문화

[에도 일본], 모로 미야, 허유영, 일빛, 2006, (080723).

바람과 술 2008. 7. 23. 03:36

글 머리에

 

선량하고 순수한 동기로 이런 세대간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바다 같이 깊고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스스로는 아는 것이 적다고 겸손해야 하고,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 또 자각적인 책임감과 의무를 다해 봉사하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1. 음식 : 飮食

 

'인스턴트 음식'의 도시

: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에도로 이주한 지 13년 후, 에도에 바쿠후가 설립되면서 새조차도 둥지를 틀지 않는다던 에도는 일약 일본 정치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그 후 지금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에도는 바로, 지금의 도쿄이다. 에도는 계획도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처음 에도로 입성하면서 많은 무사, 즉 사무라이들을 데리고 들어오기는 했지만, 사무라이들은 본래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고, 또 에도에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사무라이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상업도시로 만들고, 외지에서 노동자와 상인들을 불러 모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당시 에도는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사무라이 계급의 가옥은 모두 에도성의 후방에 위치해 있었고, 일반 서민들은 바다를 메워서 만든 땅 위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다. 맨 먼저 지금의 긴자가 만들어졌고, 그 후 계속해서 간척지가 확대되었다. 오늘날 니혼바시부터 시나가와 일대는 모두 당시 바다에 흙을 메워 만든 간척지다. 에도가 신흥도시였던 까닭에 홀로 성공을 위해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독신남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여자의 비율이 매우 적었다. 이러다보니 자연히 집에서 직접 밥을 지어먹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에도는 소비의 도시이자 '인스턴트 음식'의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인스턴트 음식'의 주요 공급자는 긴 멜대에 음식이 든 광주리를 달아 어깨에 걸머지고 다니는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야채와 생선 등을 팔았지만, 점점 조리한 음식들을 가지고 다니며 팔기 시작했다. 1675년, 에도에서 '후리소데 화재(에도의 3대 화재 중 하나, 10만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함)'가 일어났다. 이 화재로 에도의 집들 가운데 2/3가 잿더미가 되자, 복구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한 간단한 식당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얼마 후, 아사쿠사에서 나라차메시야라는 음식점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서민들을 상대로 한 일본 최초의 음식점이었다. 요리 서적도 활발하게 출간되었다. 1674년 사계절 요리를 모두 담은 [에도요리집]이 출간되었는데, 내용은 비교적 충실했지만 일반 서민들이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음식들이 많았다.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가정 요리 서적은 아마도 [두부백진]일 것이다. 이 책은 당시 큰 인기를 끌어 이듬해에 속편까지 출간되었다. 일본에서 주식을 다룬 최초의 요리서적은 1802년에 출간된 [명반부류]였다. 1780년 이후, 에도의 화로가 보급되면서 그에 따라 등장한 것이 바로 노점상이었다. 당시 노점상에서 팔았던 주전부리 음식들이 바로 현대 일본 요리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의 원형이 되었다. 이런 노점상들의 주 고객층은 서민들이었고, 사무라이 계급이나 상인들은 노점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노점상에서 가장 이기 있는 메뉴는 덴푸라와 스시, 즉 튀김과 초밥이었다. 덴푸라는 기름에 튀긴 음식이었는데, 바쿠후가 화재 예방을 이유로 실내에서 덴푸라를 파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 덴푸라는 노점상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고급 음식점만 찾던 고급 사무라이와 부유한 상인들은 덴푸라를 먹을 수 없었다. 당시 에도 사람들은 아마도 몇 백 년 후 덴푸라아 스시가 쇼비니즘의 상징으로 전락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일본 방송국에서 '많이 먹기 대회'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자주 방송하는데, 1817년 이미 이와 비슷한 경연대회가 열렸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도의 미식

: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에도 사람들이 '마누라를 잡혀서라도' 먹어야 한다는 음식이 있었다. 바로 '하쓰가츠오'인데, 그해 처음으로 잡혀 시장에 나온 첫물 가다랑어였다. 하쓰가츠오를 먹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고차현의 다다키인데, 센 불을 멀리서 쬐어 가다랑어 표면에 살짝 흰 빛이 돌 정도로 익힌 후, 얇게 저며 생강즙을 섞은 간장에 찍어 먹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회를 떠서 먹는 것으로, 주로 간토 지방에서 이렇게 먹었다. 에도 사람들이 가다랑어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해산물, 채소 할 것 없이 그 해 처음으로 출하한 물건은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들은 시장에 첫 출시된 신선한 음식을 먹으면 75세까지 장수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장에 막 나온 해산물이나 채소를 사먹는 것은 에도 사람들이 한해에 단 몇 번밖에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일본에서 하루에 세 끼를 먹는 습관이 정착된 것은 1700년 이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훗날 에도성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아침과 저녁 사이에 간식을 먹는 습관이 점차 한 끼 식사로 굳어지면서 점심 식사가 보편화된 것이다.

 

복어, 그리고 몰래한 사랑

: '복어는 먹고 싶되, 목숨이 아깝구나.' 복어에 얽힌 일본의 유명한 속담이다. 에도 시인들도 그 맛을 극찬해마지 않던 복어가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골머리를 앓게 할 줄 누가 알았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전국 각지에서 소집된 사무라이들은 히젠의 나고야성(오늘날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에 집합해야 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야마구치현의 시모노세키와 북규슈 일대가 하필이면 유명한 복어 산지였던 것이다. 결국 복어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무라이들이 집합지에 닿기도 전에 시모노세키 부근에서 목숨을 잃는 지경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장 사무라이들에게 복어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결국 각지의 한슈(에도 시대의 영주)들은 사무라이들이 복어를 먹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에도 사람들은 복어 먹는 것을 몰래한 사랑에 비유하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는 복어를 대부분 국으로 끊여먹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복어를 날 것으로 먹었던 것은 언제부터일까? 또 이런 무모한 본보기를 보일 만큼 간 큰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바쿠후 말기 시모노세키에서 활약했던 유신지사들이었다. 메이지 시대로 들어서자 일본 정부는 복어 매매를 법률로 엄격히 금지했다. 도쿄에서는 1892년에 이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1909년 다와라 요시즈미 박사가 복어의 간장과 난소에 있는 독을 추출해내는데 성공하고, 이 독을 '테트로도톡신'이라고 명명했다. 

 

장어와 다이코쿠

: 일본에서 한 해에 소비되는 장어의 양은 15만 톤에 달한다고 한다. 장어 한 마리의 무게가 대략 2백g이니, 1kg이면 다섯 마리가 되고, 15만 톤이면 7억 5천만 마리라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은 한 해에 1인당 평균 여섯 마리의 장어를 먹는 셈이다. 도요노우시노히(여름철 가장 더운 시기의 축일 또는 소날)는 바로 일본에서 '장어를 먹는 날'이다. 매년 입춘과 입하, 입추 그리고 입동이 되기 18일 전을 바로 도요날이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은 이날 장어를 먹는 습관이 있다. '소'를 뜻하는 일본어 '우시'의 첫 글자아 같은 발음으로 시작하는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5대 덮밥은 '우나돈(장어 덮밥)', '규돈(쇠고기 덮밥),'오야코돈(닭고기와 계란을 얹은 덮밥)', 덴돈(튀김 덮밥)', '가쓰돈(돈가스 덮밥)'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사용하는 나무젓가락도 에도 시대의 한 우나돈 식당의 주인이 발명한 것이다.

 

보탄나베와 모미지나베

: 고대 일본 조정에서 8세기에 처음으로 '육식금지령'을 내리고 천황이 수차례나 이 법령을 확인하는 조서를 내린 후에야 귀족 계급의 육식 습관을 고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라에서 육식을 금지했다 해서 정말로 모든 일본인들이 고기를 먹지 않았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서민들이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에도 시대에 '보양식'으로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멧돼지와 사슴이었다. 멧돼지는 은어로 '보탄(모란)' 혹은 '야마쿠지라(산고래)'라고 했다. 사슴 고기는 '모미지(단풍)'라고 불렀다. 말고기는 그리 흐하지 않았는데, 은어로 '사쿠라(벚꽃)'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은어들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소나 말은 에도 시대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가축을 도살하거나 잡아먹는다는 관념이 없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신정부는 '문명개화'라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쇠고기를 먹도록 장려하고, 심지어 천황이 직접 나서서 쇠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솔선수범하자 비로소 육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에도 사람들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은 바로 고래 고기였다. 

 

도시락이 쓰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리

: 일본에 가면 곳곳에서 '마쿠노우치(벤토:깨를 묻힌 주먹밥에 반찬을 곁들인 도시락, 본래는 연극의 막간에 먹는 것으로 고안되었다)'를 찾아볼 수 있다. 에도 시대의 도식락은 지극히 간단했다. 기껏해야 주먹밥 몇 덩이에 장아찌 몇 개 곁들인 곳이 고작이었다. 중기 이후에는 서민들의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도시락도 덩달아 호사스러워졌다. 다이묘나 고위급 사무라이들의 야외 나들이 풍경은 현재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사무라이 계급은 공연장에 출입할 수 없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사무라이들이 요시와라 유곽과 공연자엥 드나느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당시 다이묘와 사무라이 계급은 갖가지 법도에 묶여 서민들보다 휠씬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쇼군의 식탁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건설한 바쿠후는 장장 265년 동안이나 집권했는데, 이 시기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가 바로 에도 시대다. 메이지 유신이 실시되기 전까지 쇼군이 15대까지 계승되었다. 이에야스의 아홉째 아들인 요시나오와 열째아들인 요리노부, 열한번째 아들 요리후사는 모두 각자 독립해 오와리(아이치현) 도쿠가와가와 기이(와카야마현) 도쿠가와가, 그리고 미도(이바라키현) 도쿠가와가의 시조가 되었다. 이 세 가문을 '고산케'라고 부르는데, 쇼군에게 직계 아들이 없이 후사를 잇지 못할 경우 쇼군은 반드시 이 세 가문에서 선출했다. 교젠(요리의 명인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은 헤이안 시대에 시작되어 현대의 경사스러운 전통의식으로 계승되었는데, 요리사가 폭이 좁은 칼과 쇠젓가락 한쌍만을 사용해 도마 위에서 살아서 펄떡거리는 생선을 회로 쳐내야 한다. 손이 생선의 몸에 닿으면 곧바로 실격처리 된다. 이 행사의 본래 목적은 귀빈들에게 요리사들의 손이 요리 재료에 닿지 않기 때문에 매우 위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요리법을 '유소쿠료리'라 하고, 주로 교토의 궁중요리에 사용된다. 

 

2. 생활 : 生活

 

기모노

: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의상은 바로 기모노다. 요즈음 길거리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을 거의 만나볼 수 없지만, 아직도 설날 행사나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 등 공식적인 자리에 갈 때 여성들이 가장 즐겨 입는 옷은 바로 기모노다. 에도 서민들의 옷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옷 한 벌을 두 사람, 심지어는 세 사람이 물려받아가며 해어질 때까지 입곤 했다. 오늘날 일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벼룩시장도 대부분 에도 시대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당시 시장에서 파는 헌 옷들 중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입던 옷을 직접 가지고 온 것도 있었지만, 죽은 사람의 옷이나 도둑질한 장물도 있었다. 다이묘와 상급 사무라이들은 늘 비단옷을 걸치고 다녔지만 서민들은 삼베옷을 입었다. 면으로 된 옷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에도중기 이후의 일이다. 기모노 한 벌을 만들려면 옷감을 짜고, 염색하고, 재단해서 꿰매는 등 여러 과정을 거치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한 벌을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재활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도 사람들이 유행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이른바 패션의 리덛ㄹ은 바로 요시와라의 기녀와 가부키 배우들이었다. 기모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화려함으로 치자면 후리소데만한 것이 없다. 후리소데는 미혼 여성들이 입는 기모노이기 때문에 기혼 여성이 입는다면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후리소데는 원래 에도 시대의 기녀들, 특히 춤을 추는 기녀들이 입던 옷이었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평범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후리소데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은 보통 성인식에 후리소데를 입는다. 후리소데에 비해 유카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든 입을 수 있어 널리 사랑받는 옷이다. 유카다는 말 그대로 '목욕할 때 입는 옷'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비교적 개방적이어서, 초기에는 목욕할 때 남자들은 T자 모양의 짧은 바지를 입고, 여자들은 하반신에 속치마를 둘렀지만, 중기로 가면서 남녀 모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함께 목욕을 했다. 당시에는 공중목욕탕이 이미 보편화되어 사람들이 욕탕에 몸을 담그고 나와, 그대로 홀겹의 가운만 걸친 채 게다를 신고 딸각딸각 집으로 가곤 했는데, 이것이 점차 외출용 옷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여인의 천성

: 에조 시대에는 피부가 희고 보드라우며, 이마선이 가지런하고, 머리카락이 길고 윤기가 흐르며, 입이 작고 앵두 빛이 도는 것을 미인의 조건으로 쳤다. 에도 시대의 여인들은 이 조건에 맞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집집마다 [도후조쿠케쇼덴]이라는 책을 갖추고 있었다. 이 책은 1813년에 출간되어 메이지 시대말기까지 1백 년이 넘는 동안 일본 여성들에게 '미인의 경전'처럼 여겨져 왔고, 비단 화장술만이 아니라 예절과 복식, 행동거지, 내면적인 교양에 관한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다. 화장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화장수다. 예로부터 쌀겨와 팥가루, 수세미 줄기를 잘라 나온 수액 등을 이용한 천연 화장수가 널리 이용되어 왔다. 에도 시대의 미용에 얽힌 일화를 묶어 놓은 것으로 이시노모리쇼타로의 [게와이시]라는 만화집이 있다. 이 책은 속편까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묘사가 섬세하고 회화적인 가치가 뛰어나다. 립스틱의 원료는 인체에 해가 없는 천연물질인 붉은 색의 꽃이었다. 립스틱은 1673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유행의 선두에는 역시 요시와라의 기녀들이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옷차림을 중시했고, 옷을 입을 때에도 그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후리소데를 입고 시미다마게(여인의 전통 머리 모양의 하나)를 했다면 미혼 여성이 분명했고, 치아를 검게 물들였다면 기혼 여성이었다. 또 치아르 검게 물들이지 않고 눈썹을 모두 밀었다면 아이를 둔 기혼 여성임이 틀림없었다. 남자들도 옷차림과 머리 모양, 장신구 등으로 신분과 사회적인 계급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들은 어땠을까? 보통 남자들은 열다섯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머리를 모두 밀고, 구렛나룻에서부터 뒤통수까지 난 머리는 하나로 묶어서 정수리로 틀어 올렸다. 당시 남성들은 마치 공작새가 풍성한 깃털을 뽐내듯 누구 머리가 더 길고, 틀러 올린 머리채가 누가 더 큰지 경쟁했다. 이는 투구를 썼을 때 머리의 온도가 너무 올라가 실신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재미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훈도시, 즉 T자로 된 짧은 속옷이다. 속옷이라고 해서 낡은 천으로 대충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작은 속옷이 바로 에도 남자들의 미학의 출발점이었다. 

 

나가야

: 에도의 집들 가운데 열 채 중 일곱 채는 사무라이의 저택이었고, 나머지 세 채 가운데 절반은 사원과 신사였으며, 나머지 절반만이 서민들의 집이었다. 에도의 인구가 약 110만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바쿠후의 신하와 다이묘들을 따라 에도에 부임한(산킨코타이:지방 영주들이 교대로 에도에 와서 쇼군을 보좌하는 제도로 지방 세력의 확장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 가신들의 수가 50만 명이 넘었고, 서민들이 50여 만에 달했다. 이 서민들이 에도 전체 면적의 15%인 270만 평의 토지에 모여 살았으니 주가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졌을 리가 없다. 나가야는 당시 서민들이 한 지붕 아래 여러 가구씩 모여 살던 집을 가리킨다. 나가야는 보통 오모테나가야와 우라나가야로 나뉜다. 오모테나가야는 상점을 겸한 가정집으로 2층 구조인데, 1층은 대부분 철물점이나 잡화점, 야채 가게, 생선 가게 등 작은 상점이었고, 우라나가야는 이런 상점 뒤편의 1층짜리 건물이었다. 우라나가야 한 채는 여섯 칸으로 나뉘어 있고, 각 칸의 면적은 기껏해야 3~5평이었다. 에도 서민 가운데 열의 일곱은 이런 우라나가야에서 살았다. 세 평짜리 쪽방의 입구는 진흙바닥이었는데, 한쪽에 물동이나 화로가 놓여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다타미 넉 장 반을 깔아놓은 방이 있었다. 이 방은 낮에는 거실이지만 해가 지면 곧 침실로 변했다. 화장실과 우물, 쓰레기장은 집 밖에 모있어 모두 공용으로 사용했고, 방과 방 사이를 막는 것이라도는 얇디얇은 나무판자 하나가 전부였다. 이런 환경에서 소위 '사생활'이란 것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일본어로 이도바타가이기, 즉 '우물가 회의'라는 것이 있다. 이는 여자들이 우물가에 빙 둘러 모여 수다를 떠는 것을 빗댄 말인데, 이 말 역시 에도 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당시의 우물은 오늘날의 수돗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도는 바다를 메워서 만든 도시였기 때문에 지하수에 모두 염분이 섞여 있어 식수로 사용할 수 없었고, 당시 우물물은 모두 이노카시라 연못(미타카시)과 다마 강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급수는 모두 지하에 매설된 사통발달의 급수관을 통해 에도 도처에 있는 우물로 공급되었다. 우물도 나무로 만든 커다란 통이었고, 급수관도 대부분 돌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급수 시설만큼은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에도 성내의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아이가 처음 태어나서 목욕하는 물이 바로 상수도를 통해 급수된 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우물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칠월 초이레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하루를 쉬고 함께 모여 우물 대청소를 했다. 청소가 끝나면 덮개를 덮고 마지막으로 술과 소금을 부었고, 그날 저녁에는 자연스럽게 한바탕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에도 중기 이훙 땅을 파는 기술이 진보한 후에야 우물을 깊게 파고 땅속 깊은 곳에서 수질이 좋은 지하수를 퍼 올려 사용할 수 있었다. 쓰레기는 지금은 물론 에도 시대에도 행정 관료들의 가장 골머리를 앓는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1649년 바쿠후는 주민들에게 정기적으로 하수구를 청소하도록 명령하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했다. 1655년에는 또 각 행정 구역에 정기적으로 쓰레기를 수거하고, 수거한 쓰레기를 배에 실어 스미다 강 하류, 즉 오늘날 도쿄 고토구 일대로 운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1666년에는 정기적으로 쓰레기를 운반하는 하청업자들까지 생겼으며, 쓰레기를 이용해 바다를 메우는 이런 방식은 3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거은 아니었다. 바로 분뇨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전국 시대부터 분뇨를 거래하는 업종(농사 비료로 판매함)들이 있었고, 분뇨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니었는데, 에도성에서 나온 것을 제일로 쳤고, 그 다음은 다이묘와 사무라이의 저택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다음이 서민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것이 가장 싼 값에 거래되었다. 그런데 뜻밖인 것은 분뇨 가격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오르내리고 해마다 물가 상승폭만큼 올랐다는 사실이다. 이 덕분에 에도성과 다이묘 저택의 분뇨 수거를 책임진 사람들은 모두 큰 부호가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입찰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오오야의 권리와 의무

: 에도 사람들이 사는 집이 누추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화재가 자주 발생했던 것이다. 화재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큰 돈을 들여 집을 정교하게 짓지 않으려고 했다. 서민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타미 넉 장반 크기의 방에 가장 기본적인 일상용품 외에 값나가는 물건은 거의 두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불이 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대피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전혀 챙기지 않고 몸만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다. 에도 사람들이 돈만 생기면 먹고 마시며 다 써버린 데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가야의 소유주는 지누시들이었고, 관리자는 오오야였다. 오오야는 집주인이라는 의미였다. 기본적으로 에도는 행정자치구였으므로 국가의 행정기구인 마치부교쇼(행정, 사법, 소방, 경찰 등의 직무를 수행하는 곳)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는 '마치도시요리'였다. 마치도시요리는 '연장자', '원로'라는 뜻이었다. 마치도시요리는 세 명이 있었고, 세습 제도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모두 미카와국(지금의 아이치현 동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신지)에서 두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에도로 이주한 명문세가였다. 마치도시요리 아래에는 구장에 해당하는 '나누시'가 총 260여 명이 있었다. 그 다음이 지누시이고, 가장 말단은 오오야였다. 한 달씩 돌아가며 일하는 마치도시요리는 매일 마치부교쇼에 출근해 바쿠후에서 하달된 명령이나 지시를 확인한 후, 서명을 해서 마찬가지로 한 달씩 돌아가며 일하는 나누시에게 하달했다. 나누시들은 이 지시를 다시 각 지구의 지누기들에게 전하고, 결국에는 오오야에게 마지막으로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면 오오야는 이 지시 사항을 모든 나가야의 출입구에 붙였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 내용을 설명해주는 임무까지도 오오야의 몫이었다. 나가야에 거주하는 사람들, 요즘으로 말하면 세입자들은 '다나코'라고 불렀다. 오오야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책임 역시 막중했고, 다나코가 범죄를 저질러 억울하게 연루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약하면 벌금이나 추방 정도로 끝났지만, 심하면 무인도로 유배를 가야했다. 오오야가 다나코의 잡다한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오오야로서 가질 수 있는 특권도 결코 적지 않았다. 오오야는 다나코가 주는 선물 외에 지누시가 주는 봉급도 받았고, 다나코들의 분뇨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은 물론 다나코들이 쓰던 간장, 술, 양념 등의 빈 통을 사고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에도 사람들의 기질

: 다타미를 한자로 쓰면 '겹쳐질 첩(疊)'이다. 말 그래도 다타미는 접어서 보관해 놓았다가 사용할 때에만 꺼내서 사용하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오늘날과 유사한 다타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보다 두께가 좀 얇아 접어서 옆구리에 끼고 휴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손님의 지위에 따라 제공되는 다타미의 재료에서부터 두께, 가장자리의 색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해진 규정이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는 방의 사방에만 다타미를 깔고 중앙은 그대로 비워두었으며, 다타미를 한번 깔면 이리저리 옮기지 않았다. 그 후 무로마치(1336~1573) 시대에는 방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어 방 전체에 다타미를 깔게 되었다. 하지만 에도 중기까지만 해도 다타미는 귀족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에도 중기에는 다타미가 서민들에게도 보급되었다. 하지만 역시 가구 중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에, 지누시들은 나가야를 지을 때 일부러 다타미를 깔지 않았고, 다나코들이 이사하면서 자기 것을 가지고 왔다. 에도 사람들은 잘 때 요만 깔고 이불은 덮지 않고 잤다. 당시에는 '요기', 즉 잠옷이 바로 이불이었는데, 잠옷은 중국인들이 입는 솜저고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간사이 지방에는 당시에도 이미 이불을 사용했는데, 아마도 귀족들이 대부분 교토에 모여 살았기 때문인 듯하다. 요를 깔고 누워 이불을 덮고 또다시 위에 홑겹 이불을 겹쳐 덮는 습관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 생겨났다. 나가야의 대문(골목의 출입구)은 매일 새벽 6시경에 열고, 밤 10시경에 잠갔으며, 에도 후기에는 범죄 예방을 위해 일부 나가야는 8시에 문을 걸어 잠가 다나코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다. 목욕탕과 이발소가 바로 동네 친목의 장소였는데, 특히 목욕탕 2층은 차 한잔 값만 지불하면 하루 중일 있어도 나가라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이 상인이나 기술공이었던 에도의 서민들은 그 업종도 가지각색이어서 어림잡아도 백 가지가 넘었다. 당시의 최고 유망 직종은 목수와 진흙공이었는데, 등급으로 따지자면 오늘날의 건축가와 맞먹는 지위였다. 상인이나 기술공 외에 '샐러리맨'들이 또 있었다. 바로 남의 집에 고용된 하인이나 점원들이다. 이들은 사무라이 집안의 하인과 상인 집안의 하인으로 나뉘었는데, 딸을 둔 부모들은 자기 딸을 사무라이 집안의 하인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무라이 집안에서 하녀로 일하는 동안 자연히 여러 가지 엄격한 예법을 배우고, 장래에 좋은 신랑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 집안의 하인이나 점원들은 대부분 지방 도시에서 올라온 사람들로서 에도 상인들이 대부분 미에현과 시가현 출신이었는데, 그들의 먼 친척이나 잘 아는 집에서 자기 아들을 점원으로 써달라는 청탁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들을 에도로 보내 성공시키려는 부모들의 바람 때문이었다. 상인 집안의 하인들은 비록 먹고 입을 걱정은 없었지만, 역시 남에게 묶여있는 몸이기에 일상 생활에서 제약이 많았고, 또 경쟁도 치열했다. 기술공들이 '오늘 술을 마셔 취해버릴' 때에도 상인들은 늘 내일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그러나 에도 서민들의 대부분이 기술공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성향이 바로 에도 사람들의 기질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데리코야

: 1920년 다이쇼 시대, 일본에서는 전국 아동의 평균 취학률이 90%가 넘었다. 19세기 중반 바쿠후 말기 기록에 의하면 서민 계급 남성의 식자율, 즉 글을 아는 인구가 이미 54%에 달했고, 여성의 식자율도 20%였다. 이것은 전국 평균 수치였고, 만약 수도인 에도만 놓고 보면 부유한 상인이든 나가야에 사는 빈곤층이든 남녀의 식자율이 모두 90% 이상이었다. 교육의 중요한 임무를 맡은 곳은 바로 데라코야, 즉 개인이 운영하는 서당이었다. 바쿠후 말기, 에도에만 1천 개가 넘는 데라코야가 있었고, 전국적으로 따지면 그 수가 2만 개가 넘었다. 데라코야 훈장들의 신분을 보면, 서민이 40%를 차지했고, 사무라이 26%, 승려 18%, 의원과 신관이 각각 9%와 7%를 차지했다. 또 대도시에서는 여성의 취학률이 높았기 때문에 훈장 가운데 1/3이 여성이었다. 아이들은 보통 만으로 예닐곱 살이 되면 부모의 손에 이끌려 집 근처에 있는 데라코야에 입학했다. 부모의 판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동네의 입소문이었다. 그러니 어중이떠중이 모두 데라코야를 열 수 잇는 것은 아니었다. 교재도, 학습 기간도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었다. 현재 남아있는 에도 시대의 교과서만 해도 7천 종 이상이니, 당시에는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아이들이 데라코야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히라카나와 가타가나였고, 이 두 가지를 떼면 한문을 배웠다. 이 외에 서예와 주판, 지리 등도 필수과목이었다. 서신 교본이나 상업 용어 교본, 농업용어 교본, 목공용어 교본 등도 전국적으로 널리 이용되는 교과서였는데, 대부분 아이들이 열 두세살 쯤 데라코야를 졸업하고 이후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놀라운 것은 교육비를 무엇으로 내든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비는 1년에 두 차례만 받았는데, 이것도 고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당시 데라코야의 훈장은 일종의 봉사직이었고, 데라코야의 훈장은 돈보다는 남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낙으로 살았으며, 한번 맺은 사제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무라이 계급의 학교는 '한코'였는데, 규율이 엄격하고 교육 수준도 일반 데라코야보다 휠씬 높았다. 에도 중기부터 바쿠후말기까지 서구 문화를 주로 가르치는 고등 서당이 급증했는데, 특히 바쿠후 말기에는 주자학만 가르치는 한코에 염증을 느낀 사무라이의 자제들이 고등 서당으로 전학해 서민 계급의 청년들과 동문수학하는 일이 흔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단기간 내에 서구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고등 서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등 서당은 데라코야와 달리 학비를 반드시 내야 하고, 일부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도록 규정하고 따로 식비를 받았다. 에도가 본래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은 도시였기 때문에 운이 좋거나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나가야에서 나고 자란 여자들도 봉황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에도에 사는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보다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았다.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 악기와 춤까지 배웠으니 말이다. 상점에서 일하는 여자 점원들은 하는 일이 육체노동인지라 대부분 농촌의 젊은 처녀들 중에서 선택되었지만, 다이묘와 하타모토(쇼군 직속으로 1만 석 이하의 사무라이)들이 서민계급에서 하녀를 뽑을 때에는 가무에 능한 것을 필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쳤기 때문이다. 당시 부유한 상인들은 사무라이의 예법과 교양을 배운 여자를 신부감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을 가르칠 여유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미모만 뛰어나다면 다관에서 일할 수 있었다. 다관에서 차를 맛있게 우리고, 손님을 잘 응대할 줄만 알면 우키요에 화가들이 제 발로 찾아와 공짜로 선전을 해주곤 했다. 

 

3. 오락 : 娛樂

 

원예

: 도쿠가와 바쿠후가 화재에 대한 대비책으로 에도에 거주하고 있는 다이묘들에게 최소한 3채의 집을 소유하도록 했는데, 다이묘의 저택에는 정원이 딸려있기 마련이었고, 이 덕분에 에도 전체 면적의 70%가 바로 정원이었다. 당시 정원이 수천 개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도쿄에 있는 모든 공원과 녹지는 에도 시대 다이묘의 저택이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정원이 오늘날 공원이 될 정도니 당시 다이묘들의 저택이 어마어마하게 넓었음을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한 해에 20~30석의 봉록을 받는 하급 사무라이의 저택도 100~150평에 달했고, 봉록 3백석 이상인 하타모토의 저택은 약 500평, 1천석 이상은 700평, 5천석이상은 1,800평이었는데, 이런 저택에 모두 정원이나 안뜰이 있었다. 어떤 다이묘들은 서민들에게 정원을 개방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이묘와 사무라이 계급이야 넓은 저택을 짓고 정원을 꾸밀 수 있었지만, 변변한 마당 한 뼘 없이 나가야의 한 지붕 아래에서 복닥거리고 살던 소시민들은 어땠을까? 정원 대신 분재와 화초를 가꾸면 되지 않는가. 매일 같이 화초 장수가 골목골목을 돌고, 또 가격도 비싸지 �으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도에서 처음으로 정원과 화초를 가꾸는 것을 유행시킨 이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에도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게 된 것은 8대 쇼군인 요시무네 덕분이었다. 요시무네는 사람들이 꽃을 늘 가까이하고 즐기도록 하기 위해 에도성 내에 수천 그루의 벚꽃 묘목을 심어 기른 후, 이것들을 스미다강과 고가네이 강가, 아스카산 공원, 고덴산 등지로 옮겨 심어 에도는 어디를 가든 벚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요시와라 유관에서는 매년 3월 1일에 벚꽃 축제를 열었는데, 축제가 열리기 전에 정원사들이 벚꽃나무들의 개화기를 조정하고, 만개한 벚꽃나무를 모두 요시와라 유곽 안으로 옮겨 심어, 일반 대중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밤 벚꽃놀이의 유래다. 좀 더 덧붙이자면, 일본의 국화는 국화와 벚꽃 두 가지다. 에도 사람들이 끈질기게 품종 개량에 몰두했던 꽃이 있었다. 바로 국화와 만년청(백합과에 속하는 것으로 5~7월에 연한 노란색이나 흰색의 꽃이 핌), 그리고 나팔꽃이다. 에도 시대에 취미로 원예를 즐겼던 사람들 중에는 보통 사람들보다 학식이나 교양이 뛰어난 사무라이와 문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원예서와 채색화 등을 남겼다.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오늘날 학자들이 아무리 우수한 첨단 기술을 동원한다 해도 당시의 원예 품종을 복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에도 사람들이 화초 가꾸기에 쏟은 노력과 정성은 현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했던 것 같다. 

 

샤라쿠는 누구인가?

: 우키요에가 고도의 예술적 가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인들은 이를 광고전단, 혹은 포스터 정도로 생각하고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우키요'란 불교의 '우에'라는 말에서 유래해 15세기에는 '속세'라는 뜻으로 확대되었다가 16세기 이후에는 기원과 가부키 등 모든 향락 문화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우키요에에 자연히 춘화(春畵)가 빠질 수 없게 되어, 당시 우키요에 화가들 가운데 한 번쯤 춘화를 그려보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다. 우키요에의 창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히시카와 모로노부라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다. 우키요에는 본래 그림보다는 글이 위주가 되어 글 속에 삽입된 삽화였다가, 점차 독자적인 미술 장르로 발전했다. 달력은 본래 일부 돈 많고 나이가 지긋한 부호들이 재미삼아 만들던 것이었는데, 돈을 주체할 수 없는 이 노인네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내로라하는 화가를 데려다가 그림을 그리게 하고, 또 조각가와 판화가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것을 요구했다. 주문을 받은 달력 제작소도 고객이 비용에 상관없이 훌륭한 작품을 원한다고 나서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신기술 개발을 위해 애쓰고, 새로운 염료를 사용해 고객의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메이와 시대(1764~1772)에 이르러서는 '달력 전시회'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달력 붐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사람들은 3색 인쇄 기술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다색 인쇄로 변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또 우연히 인쇄지를 인쇄판 위에 정확하게 겹쳐 놓을 수 있는 도구를 발명하게 되었다. 우타가와파는 에도 시대 우키요에 장르의 최대 유파였는데, 그 시조는 우타가와 도요하루였다. 구니사다가 제3대 도요하루가 된 후에는 우타가와파가 점차 방대한 조직을 형성해, 문하생이 많을 때는 200명이 휠씬 넘기도 했다. 당시 집권자인 도쿠가와 바쿠후의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우타가와파에 가문의 휘장을 하사하고, 일본 전국의 각 한(제후들의 영토)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 밖에도 가와라반(찰흙에 글씨나 그림을 새겨 기와처럼 구운 것을 판으로 하여 인쇄한 것) 인쇄물 등의 출판권을 우타가와파에 넘겨주어, 우타가와파는 관리나 관청과 같은 공공기관의 관할 범위를 초월한 집단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우타가와파는 에도 시대의 언론기관이었다. 에도 시대만 하더라도 화가라고 하면 바쿠후의 어용화가 단체인 '가노파'나 다이묘가 쥐락펴락하고 있는 '린파'를 의미했고, 우키요에 화가들은 기껏해야 '환쟁이'였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우키요에 화가들의 내력과 행정이 묘연하여,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유독 샤라쿠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우산 그는 작품의 창작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런 이유 때문에 샤라쿠가 사실은 '여러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 작업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 초상화 속의 인물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있다. 샤라쿠의 그림속 인물들은 모두 무명의 배우들이며, 종종 배우가 아닌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따로 있다. 바로 출판사다. 당시 샤라쿠의 작품은 쓰타야 쥬자부로(1750~1797, 에도 시대 서점의 주인)가 경영하는 '고쇼도'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그런데 당시는 바쿠후가 '간세이 개혁'을 실시하고 출판업을 통제하면서 쓰타야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고 대중소설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시기였다.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이름없는 화가의 판화를 출판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샤라쿠가 종적을 감추고 2년 후 쓰타야마저 세상을 떠나 "샤라쿠가 누구인가"라는 수수께끼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인 채로 남아있다. 에도 시대에 우키요에 분야에서 수많은 유파들이 출현했었지만,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도리이 기요모토가 창시한 도리아파 밖에 없다. 이는 도리이파가 가부키 극장의 간판을 그리는 것을 부업으로 하며 가부키와 공생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도

: 묘앙 에이사이(1141~1215)는 일본 임제종의 시조이자, 다도의 창시자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그때까지 차를 구경도 못해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미 7세기 초 당에 사절로 파견됐던 사신들이 찻잎가 차 마시는 풍습을 일본에 전파한 바 있었다. 에이사이 선사는 단지 일본에서 처음으로 차 재배에 성공한 사람일 뿐이다. 일본 다도의 창시자를 꼽으라면 무라타 쥬코(1422~1502)를 빼놓을 수 없다. 어려서 나라의 소묘사로 출가했으나 투다에 심취해 쫓겨난 인물이었다. '투다'란 차를 음미하며 찻잎의 생산지와 품질, 차를 우려낸 물을 길러온 곳을 맞추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무라타는 훗날 교토 다이토쿠사 잇큐 소준 선사의 문하에서 참선하면서 품차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품차회를 대중적인 문화로 개혁하였으며, 일본 고유의 풍격을 지닌 품차회로 발전시켰다. 이 무라타를 계승한 사람이 바로 일본의 다도를 중흥시킨 다케노 죠오(1502~1555)다. 다케노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다구와 장황한 장식을 일체 배제하고, 렌가(두 명 이상이 각각 와카의 5.7.5의 장구와 7.7의 단구를 이어가며 부르는 시가)의 한적함의 미학을 결합시켜, 와비차 정신을 창시해냈다. 일본의 다도를 집대성한 사람은 다케노의 제자인 센노리큐(1523~1591)였다. 그는 오늘날 일본에서 다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두 센노리큐를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오다 노부나가 시대의 다회는 그저 정치.경제적인 의식일 뿐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후에야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훗날 여러 가지 이유로 센노리큐는 도요토미로부터 할복 명령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에야 도요토미는 비로소 센노리큐의 손자인 센소탄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센소탄 이후 센 가문의 다도는 '오모테센케'와 '우라센케', '무샤코지센케'로 나뉘어 지금까지 전해졌으며, 현재는 일본 다도에서 가장 유명한 3대 유파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바쿠후는 사농공상의 신분 제도를 확립하고, 다인이라는 직책을 두었다. 본래 취미와 기호의 영역에 속했던 다인의 신분이지만 직위로 제도화되고 난 다음에는 자연히 계급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자신들의 지위를 탄탄히 하기 위해 �정 유파의 사가, 혹은 고도 등의 자격을 따야만 했다. 일본의 명차 가운데 하나인 '옥로'는 교토부 우지시에서 생산된 것이다. 3대 쇼군 이래로 우지에서 생산한 차가 쇼군에게 진상되었는데, 바쿠후는 매년 일정한 시기에 우지로 사람을 보내 그해 갓 수확한 차를 가져오곤 했다. 이때 에도와 교토를 오가던 어차 운반 행렬이 바로 일본 역사상 악명이 드높은 '오차쓰보도츄'다. 어차를 운반하던 관리들이 각 마을을 지나며 얼마나 나쁜 짓을 일삼았으면 그들에 대한 원한이 담긴 동요까지 유행했을까? 바쿠후 말기에는 다도가 쇠락했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국수주의가 다시 활개를 치면서, 특히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다도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다도가 이미 대중화되고 통속화된 데다가, 여자 스승이 우후죽순으로 출현하면서 결혼을 앞둔 신부들의 수양 과목 가운데 필수 과목이 되기도 했다.

 

스모

: '스모'가 일본의 국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사실 일본인들이 스모를 국기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1909년 료고쿠 국기관 개막식 때, 작가인 에미 스이인이 축사를 썼는데, 이 축사에서 처음으로 '스모가 일본의 국기'라는 말이 언급되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들이 스모를 국기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일본ㅇ서 고대부터 스모와 비슷한 경기가 있었지만, 스모의 존재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8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서기]가 처음이었다. 8세기 나라 시대 중기부터는 천황의 주도 하에 조정의 귀족들도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스모를 즐기며 놀았다. 헤이안 시대인 821년 제52대 사가 천황은 아예 스모를 궁중의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로 지정해, 활쏘기, 말 타기와 함께 '산도세치'라고 불렀다. 궁중의 중요한 의식이 된 후부터 스모는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등의 거친 행위를 지양하고, 오로지 '힘'과 '기술'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현재 스모의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 사무라이들이 통치한 가마쿠라 시대에 궁중의 화려한 의식이었던 스모가 점차 쇠퇴해, 사무라이 계급으로 내려오자 자연히 스모는 실전 무술의 훈련볍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또 유도가 파생되어 나왔고, 유명한 스모 역사들 가운데 사무라이가 되어 전쟁터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궁중에서 활동하던 스모 역사들 대부분이 사무라이가 되기보다는 낙향해 제례에서 스모로 점 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궁중 스모 의식의 여러 가지 법도가 일반 농민들에까지 전파되었다. 에도 시대 도쿠가와 바쿠후의 3대 쇼군 말기에 이르러 바쿠후의 권력 기반이 탄탄해지면서 사람들이 천하태평의 달콤함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스모 역시 또 한 차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모 시합이 열릴 때면 어김없이 싸움과 소동이 뒤따랐고, 유혈 사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스모로 인한 소란과 사건이 끊이지 않자 참다못한 바쿠후는 1648년, 스모 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1684년, 전문 스모 역사였던 이카즈치 곤다유가 절에서 행정을 담당한 '지샤부교'에게 요청해 몇 차례 평가와 심의를 거쳐 스모장의 씨름판인 '도효'와 48가지 기술, 각종 반칙 등의 규정을 정해 즉흥적으로 시합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자, 바쿠후도 비로소 금지령을 취소했다. 하지만 절 안에서만 시합을 해야 한다는 제한 규정이 있었다. 1868년 4월에� 바쿠후가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그리고 그해 11월 스모의 '후유바쇼'가 료고쿠바시에서 성대하게 개막되었다. 정권 교체로 사회가 극도록 혼란한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스모 대회를 거르지 않고 거행했다는 사실은 스모가 이미 단순한 한바탕 좋은 구경거리고 끝나지 것이 아니라, 온전한 운동경기로 자리 잡고 '스모도'까지 출현했었음을 충분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서양식 방식대로 바꾸던 신정부가 '나체로 하는 야만적인 놀이'라는 이유로 메이지 6년에 스모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 결과 스모 배척론이 메이지 시대 중기까지 이어졌다.

 

서민들의 여행

: 3대 쇼군 이에미쓰가 제정한 '산킨코타이'는 전국적인 교통망의 빠른 확충과 숙박업의 발전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바쿠후가 관리하는 5대 도로는 도카이도와 나카센도, 고슈가도, 오슈가도, 그리고 닛코가도였다. 이에야스는 에도에 바쿠후를 설립하기 전에 먼저 이 다섯 개 도로를 정비하고, 전국 시대부터 있었던 '덴마 제도'를 강화했다. 외진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까지도 작은 도로가 생겨 큰 도로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여행과 관련된 제반 시설은 에도 초기에 대부분 완비된 셈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허용된 사람들은 아직까지 공무를 위해 타지로 가는 사무라이나 상인, 노동자 그리고 순례자뿐이었다. 에도 초기부터 중기까지 서민들에게 있어 장거리 여행이란 평생에 단 한 번 있는 특별한 일이었고, 그 목적지도 지금의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대규모 참배단이 처음 생겨난 것은 1650년의 일이며, 그 후 1705년과 1718년, 1723년, 1771년, 1830년에 대규모 참배가 있었다고 한다. 길에서 대규모 참배단을 만나면 농가의 아낙과 아이들, 상점과 하인들이 하던 일을 모두 놓고 즉흥적으로 행렬에 참여해 참배단과 한바탕 어울리곤 했다. 참배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전 준비는 커녕 돈 한 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지나는 마을마다 일반 서민들과 부자들이 참배단이 도착했다는 소식만 들으면 먹을 것과 짚신을 산더미처럼 준비해 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집단 열병에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참배단의 인원수가 최대를 기록했던 1830년에는 486만 명에 달했는데, 당시 전체 인구가 3천만 남짓이었으니, 에도 중기 이후에는 이미 여행이 서민들에게도 매우 일상적인 일로 자리 잡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민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전국을 여행하려면 최소한 나라가 평온하고, 교통이 발달하고, 화폐가 유통된다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당시에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들어 맞았던 것이다. 1655년경부터 시중에 휴대용 여행 가이드북이 등장했는데, 5대 도로의 주변에 있는 숙박업소에 대한 소개와 숙박업소 사이의 거리가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여행을 할 때에는 사무라이든 서민이든 모두 신분증을 지참해야 했다. 사무라이라면 자신이 소속된 다이묘에게 증명서를 받았고, 일반 백성들은 절의 주지스님이나 현지 공무원에게 발급받았다. 여행자들은 신분증 외에도 세케쇼(검문소)에서 사중을 신천해야 했다. 바쿠후가 관할하는 5대 도로 주변에 35개의 주요 세키쇼가 있었고, 규모가 작은 것까지 합치면 총 76개의 세키쇼가 있었다. 또한 한에는 한슈가 자체적으로 설치한 세관인 반쇼가 있었다. 기준이 가장 엄격했던 곳은 하코네 세키쇼였다. 소총은 절대로 에도로 들여보내지 않고, 여자는 절대로 함부로 에도에서 내보내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었다. 특히 사무라이 가문의 여성들은 바쿠후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키쇼에 사증을 신청할 때 머리 모양과 옷차림, 신장, 체중 등의 기본 사항 외에 신체적인 특징이나 점의 위치까지 상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초기에는 여관이라고 해봐야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여행자들이 직접 먹을 것을 준비하고, 땔감이나 조리 도구 등은 여관에서 구입하거나 빌려서 사용했는데, 이것으로 숙박비를 대신했다. 중기 이후에는 서민들의 주머니에도 여유가 생겨 하타고야가 전국적으로 널리 생겨나고, 또 경쟁이 치열해져 시설과 서비스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서민들 사이에서도 여행이 일상화되어 여관 거리에 호객꾼들이 나타나고, 일부 여관에서는 여종업원들에게 매춘까지 시켰다. 에도에서 여행이 크게 성행하게 된 것은 1700년부터였다.

 

4. 사랑

 

에도 시대의 연애

: 에도 시대에는 조혼이 보편적이어서 여자들은 13. 14세쯤이면 혼담이 오가기 시작해 대부분 17, 18세면 결혼을 했고, 남자는 25, 26세가 결혼 적령기였다.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은 스모 역사나 호리(죄인을 잡아 가두는 사람), 그리고 소방대장이었다. 역사들은 '힘'을, 호리는 '정의'를, 그리고 소방대장은 '의협'을 대표했다. 이상적인 여성의 표본은 바로 요시와라 유곽의 기녀들이었다. 특히 출중한 용모와 기예를 겸비한 오이란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에도 후기에는 서민 계층에서도 다관의 얼굴 마담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런 아가씨들은 대부분 우키요에 인물화의 모델이 되어 뮤명세를 떨치곤 했다. 지금의 CF 스타들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자유연애가 널리 유행해, 남자가 자신이 흠모하는 여자에게 편지를 보내 마음을 전하고 여자의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인 연애 방식이었다. 맞선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중매쟁이는 대부분 나가야의 오오야였다. 나가야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신이었기 때문에 친척이 없어 결혼식도 아주 간단하게 치렀다. 술 한 병에 몇 가지 음식을 준비한 후 오오야가 증인이 되어 혼인 서약을 하고 첫날밤을 지내고 나면 바로 부부가 된다. 에도 후기, 유복한 상인 집안의 규수들은 집밖으로는 단 한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녀들은 하코이리무스메라고 불렀는데, 여려서부터 귀하게 집안에서만 자란 처자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자유연애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전문 중매인들이 그녀들을 대신해 신랑감을 찾아주었다. 기본적으로 에도 시대에는 남편은 아내를 소박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내는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내에게도 전혀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아내가 가지고 온 혼수를 남편이 제 멋대로 전당포에 맡기거나 팔아먹었을 때에는 장인이 나서서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고, 아니면 아내가 아예 엔키리데라(남편의 난봉이나 강제 결혼을 피해 도망쳐 온 여자를 구조, 보호할 특권을 갖고 있는 절)로 도망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가장 불쌍한 것은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신분상으로는 고위층에 속했지만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감으로는 기피 대상 제1순위였다. 지방 도시의 사무라이들은 주로 어머니에게 수양딸을 들에게 한 후, 그 수양딸을 아내로 삼는 방식을 택했다. 에도 초기에는 계급의식이 매우 엄격해 사무라이들은 절대로 서민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기 이후로 신분보다 경제적인 요인이 우세하게 되면서 지참금만 많이 �겨간다면 서민 여성들도 사무라이 가문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서민 남성들은 돈을 좀 쓰더라도 성격 좋고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날 사랑합니까? - 첫사랑 편

: 에도 시대의 연애는 신분과 직업의 조건이 결부된 데다가, 여자가 기녀라는 이유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난 경우가 허다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상인 집안의 규수를 사랑할 수 없고, 남에게 고용된 사람들은 재능 있고 개방적인 여성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사무라이들은 서민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에도 시대 '호색'이라는 것은 색을 밝힌다는 의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이 말은 시대를 앞서나가고, 유머러스하고, 눈치가 빠르고, 박학다식하고, 예절을 잘 지키고, 다재다능하고, 다양한 풍모를 갖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녀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찬사였다.

 

날 사랑합니까? - 요바이 편

: 일본의 전통적인 성 풍속은 사실 매우 인간적이고, 인성에 부합하며, 다신교를 믿는 모계 씨족 사회였던 일본의 상황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로 수립된 정부는 '문명적이고 개화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양의 단일신 교리에 부합하는 성관념을 도입해 사람들에게 강요했다. 일본의 전통적인 성 풍속은 어땠을까? 아마도 요바이가 일본 전통의 성 풍속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바이란 남자들이 한밤중에 여자의 침실에 몰래 들어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오는 풍습이다. 1백 년 전 메이지 신정부가 이 풍습을 바꾸려고 무던히 애를 �지만, 이 풍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단될 수 있었다. 그 옛날 전등이 없었던 시절에는 저녁 8~9시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요바이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시간은 약 11시경이었다. 먼 속까지 원정을 가려고 한다면 이보다 더 일찍 길을 나서야 했다. 요바이의 범위는 통상적으로 반경 4~5km였는데, 평야 지대에서는 별 문제 아니었지만, 산간 지역이나 바닷가에서는 산 넘고 물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대도시에는 일반적으로 공인된 유곽이 있고, 사창가도 적지 않아 남자들이 성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도시에는 '요바이'의 풍습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마을마다 축제를 빌미로 야외에서 많은 남녀들이 혼음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도시인 에도레는 혼전에 아시이레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자가 남편이 될 사람의 집에서 얼마동안 머무르는 풍습이 있었다. 남녀가 속궁합이 잘 맞으면 하객을 불러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지만, 속궁합이 맞지 않는다면 여자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요즈음 유부남의 외도는 '우와키'라고 부르고, 결혼한 여자가 외도하는 것만을 '후린', 즉 '불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재미잇는 것은 에도 시대에는 '우와키'란 말이 연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우와키 결혼'이라는 것은 바로 연애결혼이었다.

 

날 사랑합니까? - 슈도 편

: '동성애'라는 말은 1896년 한 헝가리 의사가 만들어낸 전문 용어이고, 이성 간의 '애정'과 '연애'라는 말은 메이지 시대의 작가인 기타무라 도코쿠와 쓰보우치 쇼요가 1892년에 영어의 'love'를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그 전까지 일본에서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에로틱한 사랑이든 플라토닉 러브이든, 모두 '색'이라는 말로 통칭되었다. 또한 '남색'은 '여색'과 대등하게 인식되어 지금처럼 금기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에도 시대 사무라이 사회에서는 심지어 '여색'보다도 더 숭고하게 여겼고, 서민 사회에서도 고상한 취미로 인식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잇따라 천하를 통일한 후, '남색'은 자연스럽게 사무라이들의 무사도와 결합해 '슈도'로 발전했으며, 슈도는 스스로 한 유파를 형성하여 자기 수양의 규칙들이 불문율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사도에서는 '충성'을 강조하고, 슈도의 궁극적인 취지 역시 '충성'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의 대상은 주군이었지만, 후자의 대상은 '맹형', 혹은 '맹제'였다는 것이었다. 사회가 평화롭고 안정될수록 서민의 경제력이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사무라이 계급의 미소년 집착증이 자연히 서민 계급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이쯤 되자 미소년 집착증은 이제 더 이상 성욕이나 선천적인 체질을 운운할 단계를 넘어서 일종의 '풍류'로 유행하게 되었다. 당시 사무라이 사회는 여자를 심하게 배척하고, 여자를 그저 '번식의 도구, 혹은 '신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수단' 정도로 치부했다. 에도 후기에는 사무라이들의 경제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미소년 집착증도 차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 바쿠후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또 한 차례 미소년들의 인기가 치솟았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쿠후 말기에 바쿠후에 잘 보이려는 사람들과 메이지 시대의 신정부의 관리로 등용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규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그중에서도 특히 구마모토와 가고시마 일대가 바로 일본 슈도의 발상지였다.

 

날 사랑합니까? - 신쥬 편

: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연인이 동반 자살하는 일이 아주 흔해, 신쥬미치유키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신쥬'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목숨을 끊는 것이고, '미치유키'란 남녀가 사랑을 위해 함께 도망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간단한 사랑의 징표는 서약서였다. 에도 시대에 팔던 서약서에는 제일 위의 구마노신사의 고오호인(액막이 부적)이 찍혀있고 까마귀가 그려져 있었다. 사랑을 맹세하려는 사람은 우선 붓으로 서약 내용을 직접 쓰고,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붉은 피를 까마귀의 눈에 떨어뜨린 후 상대에게 주었다. 사람들은 이 까마귀가 신사의 사자이며, 이 서약을 어기면 구마노신사에 있는 까마귀가 피를 토하고 죽는데, 한 번에 세 마리가 죽고 서약을 어긴 사람도 천벌을 받는다는 전설을 믿고 있었다. 사랑을 맹세하는 두 번째 방법은 머리카락을 잘라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문신이었다. 문신은 반드시 손목에 세겼는데, 문신을 하면 지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도 맹세의 강도가 더 강했다. 그 다음은 손톱을 빼는 것이었는데, 만약 손톱을 빼고도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면 과감히 손가락을 잘라 마음을 표현했다. 사실 이미 사랑이 식어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면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상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신쥬', 바로 동반 자살이 최후의 수단이었다. 신쥬는 본래 슈도 가운데 사무라이들이 연인을 따라 죽는 행위에서 온 것이었다.

 

색도의 시조, 요시와라

: '유조'와 '다유'는 어떨게 달랐을까? 간단히 말해, 유죠는 기녀이고, 다유는 오이란(고급 창기)이었다. 처음에는 기원이 몇 군데에 불과했지만,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617년, 바쿠후가 홍등가를 허용하자마자 바쿠후가 공인한 요시와라 유곽이 들어서게 되었다. 요시와라 유곽은 에도와 메이지, 다이쇼, 쇼와 이렇게  네 시대를 거친 후, 1958년에 이르러 정부가 매춘금지령을 내린 후에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만여 평의 유곽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서, 이른바 다이묘와 사무라이, 서민으로 이어지는 계급의식이 없었고, 사무라이들이 칼을 차고 입장하거나 가마를 타고 들어오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요시와라에서는 권력도 무용지물이었던 것 같다. 유죠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조건은 '기백'과 '이키', 그리고 '돈'이었다. 돈을 가장 마지막으로 열거한 것은 물론 돈이 없으며 요시와라에서 즐길 수 없었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만사형통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시와라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요시와라 유곽은 사방에 물길이 나있어 정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초소가 하나씩 있었다. 한쪽에는 바쿠후가 파견한 보초병이 있고, 다른 한쪽은 사무소와 비슷한 것이었다. 요시와라의 유조들에게도 역시 등급이 있어서, 최고급이 '다유'였고, 그 다음은 '고시', 그리고 하급 유죠는 '하시'라고 불렀다. 다유와 고시는 아무나 데리고 놀 수 있는 유죠가 아니었다. 아게야에 도착한 다유는 유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 마디 말도 없이 바로 발걸음을 돌려 가버릴 수 있었고, 인상이 괜찮으면 방으로 들어와 유객과 술을 한 잔씩 마셨다. 첫 만남에서 술을 한 잔씩 마시고 난 후, 두 번째 만남에서도 아유는 절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에도 다유가 유객의 전용 젓가락을 준비했다면 유객의 구애가 드디어 성공한 셈이었다. 일단 구애가 성공하면 술자리가 파한 후 유객은 휴기롭게 다유를 데리고 기원으로 갈 수 있었다. 기원에 도착하면 또다시 술상이 차려졌는데, 이때에는 다유 곁에서 시중드는 하인과 기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리에 합석했다. 유객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고 배불리 먹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다유의 규방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다유는 유객과 함게 목욕을 하고 푸짐한 아침상을 차려준 후 정문까지 배웅했다. 유객과 다유가 정식으로 '부부'가 된 후에는 반드시 '일부일처'의 규칙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양쪽 모두 한눈을 팔 수 없었지만, 관계를 청산하고 싶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 웃는 낯으로 헤어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다유에게 반해버리면 아게야에 내는 돈과 첫날밤을 위한 침구 비용만 드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크고 작은 선물을 하고, 하인이나 견습 다유에게도 섭섭하지 않게 용돈을 찔러주어야 했다. 1752년에 이르러서는 결국 다유 제도가 사라지고 아게야도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이때 아게야를 대신해서 나타난 것이 오이란과 찻집이다. 다시 말해 본래 다유와 고시보다 낮은 등급이었던 '하시' 유죠들이 그보다 더 등급이 낮은 사창들이 대량 유입됨에 따라 저절로 최고급으로 상승하게 되었는데, 하시 가운데 미모와 재주를 겸비한 유죠를 바로 오이란이라고 했다. 오이란과 찻집은 격식은 다유 시대와 대동소이했고, 단지 절차와 비용이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요시와라가 직설적으로 말하면 홍등가였지만, 유객들이 모두 여색을 탐하기 위해 요시와라를 드나드는 것은 아니었다. 유곽에는 달마다 이벤트가 있어서 꽃구경과 음악회, 연극 공연, 그림 전시회 등 갖가지 축제가 열려, 이것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도 많았다. 오늘날로 치면 예술문화센터였던 셈이다. 본래 요시와라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기녀는 28세가 되어야 일선에서 물러나 유곽을 떠날 수 있었지만, 해방령이 발표된 후에는 기녀들도 계약제로 일했고, 계약기간은 최장 1년이었으며, 매년 근무 조건을 바꿀 수도 있었다. 1872년 이후에는 요시와라도 일상화되었으며, 1958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5. 바쿠후

 

역대 쇼군들

: 일본의 사무라이단은 11세기 무렵에 생겼다. 12세기 이후에는 귀족과 사무라이의 권세가 역전되어, 일본 역사는 7백년이 넘는 사무라이 집권 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무라이 계급은 '부케'로 불렸고, 교토에 있는 조정의 귀족들은 '구게'로 불렸다. 간단히 말해 부케는 무인귀족이고, 구게는 문인귀족이었는데, 전자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해버리자 후자는 어쩔 수 없이 학문과 예절을 연구하는 데만 몰두하게 된 것이다. 가부키의 창시자는 이즈모 오쿠니다. 오쿠니는 본래  시마네현 이즈모타이샤의 무용수였다. 어느 해 그녀는 신전 보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무용수들을 데리고 여러 곳을 돌며 공연을 하게 되었다. 입소문을 타고 그들의 공연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그들이 교토에 도착할 무렵에는 온 나라가 떠들썩해질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 오쿠니는 교토 제일의 플레이보이였던 나고야산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산자가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오쿠니는 그를 찾아가 극단의 활로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산자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것이 오쿠니가 가부키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시학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산킨코타이

: 3대 쇼군인 두쿠가와 이에미쓰가 1635년에 '산킨코타이'라는 법령을 반포하면서, 해마다 4월에서 6월이 되면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교대로 에도성에 부임하게 되었다. 산킨코다이는 일종의 변형된 인질 제도였던 셈이다. 전국적으로 총 260여 명의 다이묘가 있었는데, 에도와 간토, 변방 지역에 상주하는 다이묘들을 제외한 170여 명의 다이묘들이 2년에 한번꼴로 에도를 오가는 긴 여정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당시는 완전한 지방자치제였기 때문에 각 한슈들도 역시 어엿한 나라의 군주였다. 그러니 여정은 같아도 그 이동방식이 일반 서민들과 같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한 나라 군주의 공개적인 이 '여행'이 일종의 퍼레이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다이묘들 사이에서 자연히 경쟁이 나타났다.  이런 '퍼레이드 쇼'는 마을을 지날 때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구경꾼이 없을 때는 비교적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이동 중인 다이묘가 묵었던 숙소는 혼진이었는데, 혼진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여관이 아니라, 현지의 재산가이자 권력가인 토호의 저택에 마련되었다. 혼진의 주인은 숙박비를 받지 않았지만, 다이묘들이 선물을 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혼진의 주인도 부와 권력이 아쉽지 않은 토호였으므로 선물이나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 이런 일을 했을 리는 없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명예와 지위, 즉 성씨를 사용하고 칼을 찰 수 있는 특권이었다. 당시에는 귀족과 사무라이 계급만이 성을 사용하고 서민들은 이름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방의 토호가 성씨를 사용하고 칼을 찬다는 것은 곧 신분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산킨코다이의 효과는 당초 바쿠후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첫 번째로 문화 교류의 촉진이었고, 두 번째는 교통망, 여관업의 발달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간접적으로 서민들 사이에서 여행이 일상화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6. 의협

 

주신구라 - 아코의 47인의 방랑 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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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괴담

 

[한시치토리모노쵸] - [간페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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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