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대서울의 길], 김시덕, 열린책들, 2021, (220225)

바람과 술 2022. 2. 25. 02:35

들어가는 말

 

길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대서울의 모습은 두 가지로 비유할 수 있다. 하나는 카나트(Qanat)라는 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물길이다. 물이 솟아 나오는 곳으로부터 지하 스로를 파서 사막 지대에 물을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란의 <페르시아의 카나트>를 공중에서 보면, 사막 한가운데로 동그란 우물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길을 따라 대서울이 확장되어 가는 모습이 이 카나트 같다고 느꼈다. 서울시와 인접한 경기도의 도시들에서는 오아시스 주변으로 물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이 하나의 도시가 되어 가는 연담화 현상이 확인되지만 대서울의 외곽으로 나갈수록 도심은 철도의 역, 도로의 인터체인지, 공항이라는 거점 주변 원형을 그리며 드문드문 나타난다. 여기서 카나트 시스템을 소개하는 이유는, 높은 곳의 계곡물을 낮은 곳의 사막 지대로 흘려보내는 카나트 시스템의 방식이 지난 10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근대 도시가 만들어지고 확대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 주변 농업 지역으로 카나트식으로 도시가 퍼져나갔으며, 그 주요한 경로는 철도와 도로였다. 

 

길을 통해 지역들이 형성되어 만들어진 대서울의 전체 형태는 동그란 피자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리 자신을 서울 사람, 경기도 사람, 충청도 사람, 강원도 사람이라는 식으로 소개하지만, 이들이 서울의 전체, 경기도의 전체, 충청도의 전체, 강원도의 전체를 구석구석 알고 애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과 직장이나 학교가 있는 지역을 잇는 길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길은 당연히 지자체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길을 통해 이어지는 서울과 그 너머의 지역은, 마치 둥그런 피자에게 떼어 낸 한 조각의 피자와 같이 길쭉하지만 단단하게 붙어 있다. 그리고 한 조각의 피자가 다른 피자 조각들에게 쉽게 떨어지듯이, 각각 길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서울과 그 너머 지역들의 덩어리는 다른 지역 덩어리들과 별개이다.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자기 지역에 애정과 충성심을 지니기를 원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들이 원하는 대로 특정한 지방자치단체 안에서만 삶을 꾸리며 애정과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 길을 따라 지방자치단체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정체성을 지닌다. 

 

이렇게 길을 따라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생활권, 예컨대 서울 사대문, 영등포, 강남을 중심에 놓고 보았을 때 피자 조각처럼 방사건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모습이 대서울이다. 따라서 대서울은 서울만도 아니고 경기도만도 아니고 충청남도만도 아니고 강원도만도 아니다. 대서울 속의 길을 따라가면서 갈등 도시의 현장을 본다. 서울시·성남시·과천시 사이의 길을 따라가면서 현대 한국에서 일어난 끝없는 이주와 갈등, 철거와 정착의 과정을 확인한다.  

 

서론 : 도시는 선(線)이다

 

<길>을 따라 대서울의 끝까지 걸어갈 것이다. 길을 따라 걸으면, 이제까지 볼 수 없던 방식으로 대서울을 넘어 한반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전국적 또는 지역적 차원에서 경관을 바라보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면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 행정 단위나 조선 시대·고려 시대의 행정 단위를하나의 완성된 면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행정 단위의 특징으 보여 준다고 설명하는 방법이다. 면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선적인 요소를 간과해 온 이유는 여러 가질일 것이다. 그중 하나는 세금을 걷고 있고 선거를 치르는 단위가 면적인 행정 단위이다 보니,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면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보다 학교나 직장이 있는 지역에 더 동질감을 느끼고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들이 거주지와 학교·직정 가운데 어느 쪽에서 투표하고 세금을 낼지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는 점도, 공간을 이해할 때 면적인 요소가 강조하고 선적인 요소를 과소평가하는 이유가 된다.

 

이 같은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은 면적인 행정 단위에만 충성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도로와 철도를 따라 선적으로 이어지는 지역들에도 소속감을 느끼고 그곳 사람들과 느슨하게 연대한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도로와 배를 통해 선적인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근대 이후에는 철도와 고속도로가 교통 수단으로 추가되었다. 도로와 고속도로를 구분하는 이유는, 고속도로는 닫힌 구조이기 때문이다. 도로는 기본적으로 연결한 지역들에 열려 있어서 도로를 따라가다가 어디로든 <옆길>로 샐 수 있지만, 고속도로는 인터체인지를 통해서만 다른 길로 연결될 뿐이며 그 이외의 인접 지역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고속도로와 그밖의 도로의 차이는, 고속철도와 그밖의 철도를 설명할 때도 적용된다. 현재 한국 시민들, 특히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도시민들은 철도라고 하면, 주요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고속철도, 그리고 대서울·대부산 등에 건설되고 있는 광역 철도, 두 가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근대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두 가지 존재로서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거론할 때 포함되는 철도는 고속철도·광역 철도만이 아니다. 근대의 한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마치 오늘날 한국의 버스 시스템처럼 국토 구석구석까지 철도 노선이 놓이고 철도역이 만들어졌다. 한반도 역시 20세기의 한 세기 동안 철도 시스템에 의해 빠르게 재편되었다. 광복과 6·25전쟁 이후, 구체적으로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한반도의 교통 체계는 한때 철도에서 고속도로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 갔지만, 최근 GTX·중부 내륙선·서해선·동해선 등의 간선 철도·광역 철도 건설를 둘러싸고 전국이 들썩이고 있다. 철도에 의해 만들어진 20세기 한반도의 공간 구조는 그 이전 시기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졌으며, 이 변화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20세기 한반도의 공간과 시민들의 정체성은 과거로부터 단절되었으며, 이렇게 새로 형성된 공간과 정체성은 2021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근현대 한국의 경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나 특정 행정 단위를 관찰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철도라는 길의 연구에 기울여야 한다.   

제1장 대서울의 서부

 

1 김포선 : 사라진 철로 끝에는 사라진 마을이

 

현행 재개발·재건축 방식에서는 토지주나 건물주만 주민으로 인정받고 세입자와 임차인은 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세입자와 임차인은 외면받고, 다른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에 토지나 건물을 소유한 부재지주만이 주민으로 인정받는 현실은, 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어떤 지역에 거주하는 임차인은 그곳에 애착을 느껴도 이를 드러낼 방법이 제한되고, 그 지역에 토지와 건물을 소유하면서 다른 곳에 거주하는 임대인은 그 지역에 관심이 없는 것이 현재 한국의 지역 현실이다.

 

2 48번 국도 : 신촌, 양천, 김포, 통진, 그리고 강화도

 

3 시흥과 광명 사이 : 강과 철길을 따라가면 보이는 것들

 

4 시흥, 군포, 안산을 거쳐 남양반도로 : 이제는 뭍이 된 포구와 섬을 찾아

 

5 자유로, 경의선, 통일로 : 이주민의 땅 고양ㆍ파주를 가다

 

6·25전쟁 뒤로 군사적 목적으로 한강 하류가 폐쇄되면서 조강이라 불리던 한강 하류의 숱한 포구는 모두 사라졌지만, 강매리교는 이산포 등과 함게 고양훈=고영시가 한때 어촌이었음을 증언하는 도시 화석이라 하겠다.

 

제2장 대서울의 동부

 

6 경원선, 호국로, 금강산 전기 철도 : 대서울이 될 수 있었던 철원을 향해

 

7 경춘선과 중앙선 : 구리, 남양주, 양평, 춘천, 원주

 

5공화국 초기인 1980년에 지정된 택지 개발 촉진법과 1983년부터 실시된 합동 재개발 방식에 따라, 재개발과 재건축 현장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위해 시민 개개인의 재산권이 침해되고, 법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사적 집단인 용역들이 활개 쳐도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주택 사정이 정말로 심각했기 때문에 강제적인 토지 수용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왜 이런 전시 상황이 지속되어야 하나? 손정목 선생은 서울 도시 계획 이야기 4에서 택지 개발 촉진법에 대해 <처음부터 만들지 말아야 하><천하의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이 택지 개발 촉진법은 국가보안법과 아울러 담장 폐지되어야 하는 법률이라고 생각한다. 또 재개발·재건축 때 동의를 받은 대상인 <주민>은 토지주와 건물주만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곳에서 수십 년 동안 실제로 살아온 사람과 부재지주 가운데 누가 과연 진짜 <주민>일까? 서울시 봉천동, 사당동, 상계동, 성남 광주 대단지에서 그러했듯이, 문자 그래도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아등바등 버티면서 그곳에 각종 인프라를 끌어 와 살만한 곳으로 만든 이는 언제나 세입자와 임차인들이었다. 세입자·임차인들이 황무지를 간신히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놓으면, 부재지주들이 나타나서는 재개발·재건축을 한다고 이들을 도시 바깥으로 몰아낸 것이 현대 한국의 도시 개발 역사였다. 그리고 수십 년간 그 땅에 살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주민이라면서 나타나 수십 년 거주한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화될 때, 국가는 구성체의 최말단에 있는 시민 개개인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8 역말로 : 하남시에서 옛 광주군의 흔적을 찾다

 

예전에 하남시가 속했던 광주군은 땅이 넓다고 해서 광주(廣州)였다고 하지만, 서울시에 넘어간 지역은 지금의 <강남>이 되었고, 서울 강북 청계천 지역의 철거민이 집단 이주한 광주 대단지는 성남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땅의 북부 지역이 1989년에 하남시로 독립하면서 광주군=광주시는 더 이상 서울시와 경계를 접하지 않는 행정 단위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예전에는 북쪽 경계 대부분이 한강을 접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남양주군 조안면의 정약용 유적지를 바라보는 일부 지역에서만 한강을 접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광주군=광주시는 서울시와 한강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동남쪽으로 축소된 느낌이다.

 

9 헌릉로 : 서울의 남쪽 경계선이 경험한 현대

 

박정희 정부는 소록도 등에 격리된 한센 병력자 가운데 감염성이 없는 음성 환우들이 사회로 복귀시키는 사업을 1961년에 시작했다. 이분들 가운데 일부가 당시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시작한 헌인 마을에 비극이 발생한 것은 1969년이다. 한센 병력자 환우들의 다섯 자녀가 근처의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들은 보건사회부의 진단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자녀의 등교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미감아 사건>이다. 미감아란 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이다. 30여 명을 제외한 전교생이 계속 등교를 거부하자, 당시 최복현 서울시 교육감은 기자 회견에서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다. 헌인 마을주민들이 땅을 제공하면 분교를 만들어서 자녀들을 따로 교육해주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다섯 어린이에게 등교 정치 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헌법 제31조에 어긋나는 이러한 결정을 보건사회부는 비판했다. 당시 홍문종 문교부 장관은 다른 학교에 다니던 딸 홍미영 양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시켰다. 800여 학생의 학부모들이, <문교부 장관 자녀 중 한 아이만이라도 전학해 오면 우리 자녀도 등교시키겠다>라고 요구한 데에 따른 결정이었다.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 홍종관 국립 중앙 의료원장, 김탁일보건국장, 차윤근 의정국장, 유준 의대 교수 등 다섯 명은 다섯 어린이를 각각 한 명씩 자기 집에서 기르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이 계속해서 다섯 어린이의 등교를 반대하자, 문교부는 강북구 수유동에 한국신학대학 부속 초등학교를 신설해 이곳으로 통학시킨다는 결정을 내린다. 의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헌인 마을의 다섯 어린이는 가까운 학교로 입학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직선거리로 30킬로미터가 넘는 학교까지 통학해야 했다. 이 사건에서 다음 포인트에 주목한다. 우선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서울시 교육감의 발언이다. 이 교육감은 식민지 시대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은 독립운동가였다. 반일 독립운동가와 민주주의자가 반드시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들 다섯 명의 입학이 보류되었다가 재개된 뒤에 재학생 853명 가운데 30여 명이 등교했다는 사실, 문교부 장관이 자기 자녀를 전학시키고 보건사회부 장관 등 저명인사 다섯 명이 다섯 아이를 각기 맡아 기르겠다고 나선 사실, 그리고 27년 뒤인 1996년에 헌인 마을 주민들이 동병상련으로 특수학교 설립을 허용한 사실에도 주목한다. 다섯 어린이의 입학은 결국 좌절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 정책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정부 당국자들, 이들을 믿고 등교한 학생 30여 명과 학부모들, 그리고 자신들처럼 소수자인 다섯 아이들을 진심으로 받아 준 헌인 마을 주민들의 행동은 민주주의 시민의 모범으로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를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시민으로서 법적·도덕적 의무를 다한 사람들을 기억해야만, 그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교훈이 될 수 있다.

 

10 교외선 : 대서울 순환 철도를 상상한다


제3장 대서울을 넘어

 

11 수원권에 대하여 : 서울에서 오산까지

 

12 수려선과 수인선 : 철도로 이어지던 경기도 남부 지역

 

13 평택ㆍ천안ㆍ아산ㆍ안성 : 대서울과 충청도의 경계에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