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김용규, 웅진지식하우스, 2006, (220706)

바람과 술 2022. 7. 6. 11:48

책머리에ㅣ카페라테 혹은 에스프레소?

신은 누구를 구원하는가? 괴테의 <파우스트>1부 : '자기 체념'에 대하여

 

괴테는 25살 때인 1774년에 최초 형태의 <파우스트>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발표하지 않고 주변 친구들에게나 가끔 낭독하다가, 1788년에는 <마녀의 부엌>, <숲과 동굴> 등을 더하고 <라이프치히의 아우엘바흐 지하 술집>을 수정하여 1790년에야 <단편 파우스트>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지요. 그 후에도 개작과 수정을 계속하다가 1808년에 <파우스트> 1부를 발표했고, 1825년부터 2부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여 82세인 1831년에야 마쳤답니다. 결국 괴테는 5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파우스트>를 쓴 셈이지요. 

 

인간은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적어도 키르케고르에게는, 신을 믿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믿음, 오직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만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자기'를 신에게 용납받는 구원에 이른다는 겁니다. 그레트헨은 그렇게 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악마마저 이겨낸 남자 괴테의 <파우스트>2부 : '자기 실현'에 대하여

 

괴테는 <파우스트>의 2부를 1825년에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듭니다. 그래서인지 2부는 여러 면에서 젊은 시절에 썼던 1부와는 전혀 다르지요. 1부에서 보여준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사랑 이야기는 '질풍노도 운동'을 일으켰던 당시 낭만주의 작가들이 좋아할 만한 사실적 '가정극'의 성격을 띠고 있지요. 하지만 2부는 시간적으로 약 3000년을 망라하고 공간적으로는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환상세계, 지하세계와 지상세계 그리고 천상세계까지를 아우르며 전개되는 일종의 '환상극'입니다.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고, 그 무엇도 그를 막을 수 없었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때문에 영원 속에서 헤맬 필요가 있을까! / 자기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다 이를 수 있다. / 그런 식으로 지상의 날들을 보내라."라고 외치며 오직 자기실현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했던 겁니다. 자기실현을 위한 이 무차별적인 열정, 이 무참한 용기가 그를 구원한 겁니다. 바로 이것이 독일 낭만주의의 궁극적 이상이자 긍정적 목표였습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자기실현이란 단순히 자아의 완성이 아니라 신적인 것을 닮아가는 것이며, 진리의 구현이자 구원의 길이었지요. 낭만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정의해본다면, 낭만주의란 18세기 말에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당시 유행하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범유럽적 문예 및 사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특성이기도 한 17세기 합리주의와 그것의 사회적 형식인 18세기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세의 신'이 앉았던 바로 그 전능한 자리에 올려 앉혔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것에 의해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까지도 새롭게 조명하고 규제하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드러난 것인 곧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 '계몽된 사회', 그리고 마치 시계와 같이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 자연'이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인간관과 세계관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답답할 정도로 편협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비합리적 또는 비도덕적 인간과 비과학적 세계를 옹호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이성보다 감성, 사고보다는 의지, 과학보다 신화나 예술, 차가운 도덕보다 뜨거운 열정,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론적 세계보다는 수많은 신들과 요정들이 함께 살고 있어 그것들을 변화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유기체적 세계가 더 진실하고 가치 있게 생각되었던 겁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요. 

 

실러의 <인간의 미학적 교육에 대하여>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에는 정욕과 쾌락에 필연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필연의 국가'를 거칩니다. 이 단계를 실러는 '미개한 상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미적 단계'의 인간이 '순결한 상태', 곧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에 해당하지요. 그 다음으로 거치는 단계가 도덕과 법 같은 명령들이 지배하는 '이성의 국가'입니다. 이 단계는 미개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만든 원리를 일종의 신, 곧 우상으로 섬긴다는 점에서 실러는 '야만적 상태'라고 불렀지요.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도덕적 단계'에 해당합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말하는 인간 성숙 의 단계가 평행을 이루지요. 그러나 세 번째 단계에서 갈라집니다. 키르케고르가 '무한한 자기 체념'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로 그 자리에 실러는 '유희', 곧 '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입니다. 실러는 인간이 본능만의 지배를 받는 미개한 상태나 이성만의 억압을 받는 야만적 상태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놀이를 하는 아이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놀이를 하는 아이'는 예술가들이 창작을 할 때 그리 하듯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구현하는 인간의 상징입니다. 놀이에도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기에 억압이 아니라 자유라고 거지요. 실러가 말하는 이러한 인간은 결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최고의 자기부정' 내지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해 도달하는 '종교적 인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의 자기 긍정' 내지 '무한한 자기실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실존적 인간'이지요.  

질풍노도를 잠재우는 법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 '성장'에 관하여

관계의 미학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 '만남'의 의미

사랑과 질투의 함수관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 '질투'에 관하여

가족에 관한 냉혹한 진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가정'의 의미

참을 수 없는 일상과의 결별 사르트르의 <구토> : '일상'에 대하여

텅 빈 무대의 대본 없는 배우, 인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 '권태'의 의미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 '반항'의 의미

그 섬은 어디에 있을까? 최인훈의 <광장> : '유토피아'에 대하여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민주주의의 민주화, 손상된 연대성의 복구, 삶의 정치 개혁, 발생적 정치의 추구, 대화민주주의의 강화, 복지제도에 대한 제고, 폭력과 부정 등을 통해 전제 권력에 대한 대립, 절대적 상대적 빈곤과의 전쟁, 폭력과 고통의 감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행복과 자기실현, 파괴된 환경의 구제, 생명 존중 등을 지향해 나가는 머나먼 여정입니다. 

당신들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디스토피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 '디스토피아'에 대하여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인간공학'에 관하여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 : '사회공학'에 관하여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회상'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