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비잔틴 1100년
과거의 로마처럼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도시국가(Polis) 그 자체였다. 15세기까지의 투르크인이 그 지방 농민에게 길을 물어보면, 이들은 1000년 전에 그랬듯이 '도시로('Is tin polin', 이것이 '이스탄불'이 되었다)'라고 말하며 성벽과 지부을 가리켰다. 이렇게 해서 비잔틴이라고 불리는 이 제국은 로마 제국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리스적, 기독교적 동로마 제국인 것이다.
제2장 황권의 개념, 황권을 위한 수단
비잔틴 국가는 고관직과 공직이라는 이중의 신분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관직은 행정직, 군사적 직위나 실질적인 명령권에 해당되었다. 황제의 명으로 내린 그들의 직함은 언제라도 박탈될 수 있었지만, 고관직과 여기에 딸린 휘장은 원칙적으로 평생 동안 보유하였다. 공직은 권력을 가져다주었지만, 신분을 부여하는 것은 고관직이었다.
세금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즉 상품마다 '코메르키온'이라 불리는 '1/10세'가 부과되었고, 땅의 가치에 비례해서 농민들에게 걷는 토지세가 있었다.
용병은 아랍의 약탈전쟁에 대응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세금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군사적 의무를 다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테메)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현지에서 충원되었고, 군사령관이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었다. '스트라티오테'라 불리는 이 농민군은 경기병 부대를 형성하여 신속하게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농민군은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므로, 효율적이었고 저렴한 비용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무장하였고, 생계문제도 직접 해결했다. 일부 해군도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되었다. 10세기부터 제국이 공세로 돌아서자, 테메의 병사들은 멀리 떨어진 싸움터로 파병되는 것을 꺼려했다. 위기에 처한 농민층에게 군복무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으므로, 황제는 11세기부터 세금으로 군복무를 대체하는 길을 택하였고 이 재원으로 처음에는 비잔틴 용병, 다음에는 외국인 용병을 고용하였다. 또 한편, 비잔틴은 엄청난 상업적 이익을 대가로 해상방위를 베네치아에게 위탁하였다.
제3장 광명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로마에게서 경마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는데, 경마는 식량의 무료공급이 중단된 때조차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응원단(데메)도 조직되었는데, 처음에는 네 개였으나, 곧 청색단이 백색단을 흡수하고, 녹색단이 적색단을 흡수하여 두 개로 축소되었다. 응원단의 역할은 경마의 조직이나 재정지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응원단의 단장(데마르크)은 높은 신분의 고관이었고, 이들은 수백 명의 사병(데모트)을 두고 있었다. 이들 사병은 도시 경찰의 역할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성벽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경기장은 대궁전관 통해 있었다. 관람석 동쪽 중간부에는 '카리스마'라 불리는 황제 전용석이 있는데, 황제는 원로원과 고관들에 둘러싸여 이곳에 나타났다. 청색단은 황제의 우측에, 녹색단은 황제의 좌측에 자리잡았고, 응원단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관람석의 나머지 자리에 앉았다. 청색단은 일반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이고, 종교적으로는 정교파인 반면에, 녹색단은 보다 잡다한 집단이며, 종종 반대파와 그리스도 단성론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대경기장은 정치생활 속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했다.
제4장 산업의 발달과 국제적 명성
외국 상인들의 활동에 보조를 맞추는 동반자는 비잔틴 무역업자와 선주들이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상류사회에서 별로 대접을 받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이는 그들이 갖는 경제적 중요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귀족은 장인과 상인을 철저하게 경멸하였고, 이로써 이들과 귀족의 단절은 뿌리가 깊어졌다. 이처럼 제국은 결정적인 순간에 국가의 엘리트들을 갱신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960년에서 1080년까지 1세기 동안, 국가에서 상업의 발흥으로 부유해진 상인들과 중소관료로 구성된 중산계급이 출현했다. 특히 중소관료들은 당시 번창하고 있던 학교에서 아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던 상인의 자제였다. 11세기 중반 황제는 이 신흥 중산계급에게 원로원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은 오래가지 않았다. 1081년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즉위와 더불어 토지귀족이 권력을 장악하자 원로원은 재편성되어 더 이상 상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고관직은 황제의 측근에게 배정되었다. 귀족은 다시 입지를 회복하여 원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제5장 농촌 사회의 연대
7세기 이후부터 비잔틴 국가는 마을 단위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익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익의 핵심이 되는 것은 지주나 토지 차용자가 납부하는, 따라서 결국에는 소농민이 납부하게 되는 토지세였다. 따라서 토지대장은 당연히 마을을 단위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마을은 세금 차출의 단위일 뿐 아니라, 세금을 낼 때 연대성을 부과하는 곳이기도 했다. 만일 한 납세자가 세금을 낼 수 없다면 그 몫을 공동 납세자들에게 청구하고, 그 대신 공동 납세자들은 그자의 땅을 경작할 권리를 가졌다. 달리 말하면, 자기 토지에 대한 세금은 각자 책임이지만, 총세금액의 납부에 대해서는 마을 전체가 연대책임을 진 것이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책임을 지는 대신에 일정한 권리도 행사했다. 특히 어느 누가 토지를 양도할 경우에는 먼저 이웃에게, 다음은 공동 납세자들에게, 끝으로는 마을 공동체에게 먼저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금 징수 체계, 더 넓게는 조밀한 영농 작업망의 유지는 마을공동체의 결집도에 의존했다.
제6장 그리스 문화의 전통
비잔틴 문학의 정수는 뭐니뭐니 해도 성자의 삶을 다루는 데 있다. 성자전기는 영웅의 미덕을 가르치는 선전문학으로, 이따금 서사시에 접근했다.
제7장 신과 성자들
기록과 증언
끝없는 외침으로 항상 전쟁 상태에 있던 비잔틴에는, 군사 쿠데타를 두려워한 나머지 군대의 재정과 특권을 약화시킨 바실리우스 2세와 그 후계자들의 미숙한 정치로 그리스 출신 병사들이 감소하고 있었다. 비잔틴인은 서구인의 육체적 용기를 일차적 진리로 삼아 이엇을 배타적, 극단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구인에게 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무인으로서 지니는 가치였다. 이는 분명 그리스인에게도 존중할 만한 덕목이었으나, 그 모범을 보인 것은 바로 용병들이었다. 비잔틴은 금전으로 영웅정신을 사들이는데 너무나 습관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연보
역대 비잔틴 황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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