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 봉건시대를 뛰어넘는 남녀상열지사의 재발견
조선시대는 연애, 사랑, 여색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혼례도 중매자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고 남녀는 반드시 내외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대부들이 기록한 정사나 야사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남아 있을 리 없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은 오랫동안 변치 않는 남녀의 깊은 사랑일 것이다. 조선시대라고 왜 이런 사랑이 없겠는가.
제1부 조선을 뒤흔든 왕조 스캔들
후궁의 죽음을 부른 한 통의 연애편지 - 왕의 여자가 사랑에 빠진 죄
임영대군 이구는 세조의 동생으로, 이구의 아들 이준은 귀성군에 책봉되어 있었다. 세조 11년 9월3일 가을이 깊어가는 경복궁으로 임영대군 이구가 아들 이준과 함께 헐레벌떡 달려와 입시했다. 임영대군의 말에 세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궁인은 후궁을 말하는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세조의 분노
: 세조는 궁인이 연서를 보냈다는 임영대군의 말에 자신의 귀를 위심했다. 덕중은 세조가 보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으로 잠저(潛邸)에 있을 때 여종으로 거느리던 여인이었다. 자태가 빼어나 세조가 비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들이 죽고 세조가 정권을 찬탈하여 보위에 오르자 비첩의 신분에서 정3품 내명부인 소용(昭容)의 첩지를 받았다. 여종 신분으로 일약 후궁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연서는 언문으로 되어 있었다. 자신의 후궁이 조카에게 보낸 서간이었다. 세조가 눈을 치뜨고 영을 내렸다. 세조의 노기가 하늘을 찌르자 대궐은 살얼음판으로 변했다.
궁궐에 피바람을 일으킨 연서사건
: 덕중의 연서사건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환관 송중에게 연서를 보내 대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궁녀의 신분인 덕중이 연서를 보낸 것은 대담한 일이다. 조선시대 양가의 여자들은 내외를 했기 때문에 외간 남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런데 양가의 여자도 아닌 왕실의 여자인 덕중이 환관에게 연서를 보낸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세조는 덕중의 소용 첩지를 빼앗고 대궐에서 방자로 일을 하게 했다. 덕중은 후궁이 되었다가 다시 무수리로 전락한 것이다. 송중에게는 곤장 80대를 때려 사헌부 청지기로 추방했다. 그러나 송중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대궐로 불러들였다. 대궐은 송중에게 보낸 덕중의 연서 파동으로 한동안 뒤숭숭했다. 그 파동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다시 연서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세조는 덕중이 또다시 연서사건을 저지르자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에 나섰다.
국청리 시작되다
: 대궐은 덕중의 연서사건으로 국청이 설치되어 살얼음판이 되었다. 환관 최호와 김중호가 내금위 갑사에게 체포되어 형틀에 묶였다. 최호와 김중호의 공초에 의해 덕중 처소의 나인들이 끌려와 잔인한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덕중 처소의 나인 둘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방자의 신분인 덕중도 끌려와 형틀에 묶였다. 세조는 차마 덕중에게 곤장을 때리라는 영을 내릴 수는 없었다. 세조는 환관 최호와 김중호에게 박살형을 선언했다. 박살형은 죽을 때까지 때리는 무서운 형벌이다. 최호와 김중호는 결국 난장을 당해 국청에서 맞아 죽었다.
사대부들, 사형을 주장하다
: 세조는 이어 덕중을 하옥시키고 종친과 대신들을 소집했다. 세조는 침통한 낯빛으로 서두를 꺼내자 종친과 대신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임금의 후궁이었던 여인이 간음을 하기 위해 연서를 보낸 것이다. 대신들은 집안에 있는 여종들을 종종 첩으로 거느린다. 그들은 자신의 비첩이 외간 남자에게 연서를 보내거나 정을 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엄형을 주장했다. 세조는 덕중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영을 내렸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세조는 종친들과 대신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춤을 추었다. 비첩 죽이는 것을 자신의 몸에 묻은 흙탕물을 털어내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세조가 주연을 베풀고 춤을 춘 거은 부정한 것을 씻어낸다는 샤머니즘적인 의식 같은 것이었다. 덕중을 교수형에 처한 세조는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반사(頒赦:사면령을 반포하는 일)를 명하고 융복 차림으로 예를 거행했다. 세조가 사면령까지 내렸으나 덕중의 연서사건은 한동안 장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조선시대 궁궐의 연애사건
: 지체나 신분이 높을 수록 조선시대 여인은 사랑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간음사건이 대부분 근친을 상대로 발생한 것은 여자가 남자를 쉽사리 만날 수 없는 사회 구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궐의 내명부에는 5백 명 안팎의 상주하는 궁녀들과 잡일을 하는 무수리까지 1천 명 가까운 여인이 북적대고 있었다. 남자는 내금위에 2백 명, 내시부 내반원에 항상 번을 서는 내시가 1백 명 안팎, 숙직을 하는 승정원 같은 곳의 서리까지 합치면 역시 수백 명이 출입한다. 남자와 여자가 한곳에 몰려 있으니 종종 염문이 일어나고 추문이 발생하였다.
사랑에 미쳐 왕좌를 버리다 -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
양녕대군 이제는 태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고 부인은 김한로의 딸이다. 아버지 태종을 따라 왕자의 난에 가담했던 양녕대군은 강인한 성격이었다. 왕세자로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장인 또한 태종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권력이 막강했다. 태종은 개성에서 조정을 다스리고 있었고 양녕대군은 한경(한양)에서 조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태종이 개성에서 조정을 다시린 것은 한양 천도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성과 한양에서 동시에 나라는 다스리다 보니 권력이 이원화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많은 대신들이 떠오르는 태양인 양녕대군을 받들자 태종은 이를 고깝게 생각했다.
양녕대군과 어리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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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에게 첫눈에 반하다
: 어리는 중추부지사 곽선의 집에서 여종으로 있다가 자색이 눈에 띄어 접이 되었다. 여자의 미모를 평가할 때 인색한 사관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색이 있다고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었다.
강제로 어리를 데려간 양녕대군
: 세자가 소환(어린내시, 정식 내관이 되기 전의 수습 내시로 소수라고도 부른다. 내시 교육을 받으면서 대궐 청소 등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했다) 김기와 함께 곽선의 생질녀 남편인 권보의 첩 계지를 보냈다. 어리는 김기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그 사실을 곽선의 양자 이승에게 알렸다. 이승은 곽선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모른체 하라고 어리에게 당부했다. 김기와 계지가 돌아가고 며칠 되지 않아, 세제 이제가 소환 김기와 악공 이오방을 거느리고 곽선을 집을 방문하여 어리를 데리고 악공 이법화의 집으로 강제로 끌고 간다. 세자 이제는 어리와의 한 번의 만남에 만족하지 않고 어리를 데리고 동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세자는 이승에게 활을 보내고 어리는 이승의 처에게 비단을 보냈다. 어리가 이승의 처에게 비단을 보낸 것은 곽선과의 관계를 청산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세자가 권보를 시켜 이승을 협박했다. 이승은 세자의 보복이 두려워 태종에게 아뢰지 못했다.
분노한 태종, 어리를 추방하다
: 세자와 어리의 사랑은 결국 태종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 유정현 등은 훗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을 받들고 있었다 그들은 세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세자와 어리의 사랑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세자의 세력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고 그의 반대 세력은 확대시켰다. 세자는 개성에 있는 태종에게 불려가 엄중한 질책을 받았다. 태종 9년 9월 4일, 태종은 민무구가 세자 이외의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일을 개탄하면서 민무구와 김과 등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는 양녕이 이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민무구 형제는 결국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임금인데 자신의 아들들이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할 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어리는 궁중에서 추방되고 세자는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조선 왕세자가 쓴 최초의 반성문이다. 어리도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왕세자 이제가 간곡하게 청하여 대궐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그쳤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어리의 출산
: 숙빈의 친정어머니 김씨는 어리를 찾아가 사가의 여종으로 위장시켜 대궐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어리가 잉태를 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대궐에서 돌볼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세자는 누이인 정순공주와 경정공주에게 유모를 구해달라고 칭했다. 어리가 아이를 낳은 사건은 왕세자 이제를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정순공주와 경정공주를 움직여 태종의 분노를 촉발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왕세자 이제를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를 받은 정순공주와 경정공주가 원경왕후에게 아뢰었다. 태종이 침전으로 들어오자 원경왕후가 이를 알렸고, 태종으 대노하여 문신인 조말생을 어전으로 불렀다. 대궐은 어리의 일로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세자빈 김씨는 억울하게 축출되었다. 세자의 아들과 딸도 모두 대궐에서 내쫓겼다. 태종의 친구이자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는 귀양을 보냈다. 태종은 자신의 큰아들인 왕세자 이제를 내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뇌했다. 그 당시 세자의 동정이 낱낱이 태종에게 보고되고 있는 것은 이미 권력이 그의 수중을 떠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양녕대군의 거센 반발
: 세자 이제는 태종의 처분에 반발했다. 그는 어리를 내보내라는 태종의 영을 거절하고 서신을 올렸다. 세자의 편지는 태종에게 맹렬하게 항거한 것이었다. 조정은 세자의 편지로 발칵 뒤집혔다. 태종은 내노하여 세자가 다시 김한로를 용서해줄 것을 청하면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세자는 계속 반발했다. 한경에서 대신들이 강을 받으라고 청했으나 단호하게 거부하여 태종을 더욱 자극했다.
세자를 폐하여 추방하라
: 태종은 문부백관들에게 세자를 폐하는 일을 논하라고 지시했다. 태종은 세자이 아들을 세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영의정 유정현이 폐세자의 아들을 세곤으로 삼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고 '어진 이'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강력하게 주청했다. 어진 이는 충녕을 말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고 광주로 추방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어서 뜻밖이다. 양녕대군 이제는 충녕과 치열하게 장자 상속권을 놓고 암투를 벌였다. 특히 어리를 축출할 때는 극렬하게 반발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샀다. 이로 미루어 이제와 어리가 얼마나 열렬하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의 며느리 세자빈과 궁여, 그들만의 사랑 - 궁궐 여성의 동성애
세종의 장자는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이향으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다. 세자 이향은 매우 독특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두 차례나 부인이 폐출당했다. 여기서 당했다고 한 것은 본인의 의지로 부인을 폐출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세종의 의해 폐출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아들의 부부 관계까지 간섭을 한 임금이었다. 이는 현군으로 불리는 세종까지 여인의 궁중 암투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세종 세자빈을 폐출하다
: 첫 번째 세자빈 김씨는 세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 대궐에 흉물을 들여와 세종의 미움을 받았다. 김씨는 국혼을 올린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을 무렵 뱀의 정액 가루를 구하여 수전에 차고 다니는 기행을 벌였다. 이 일은 노회한 궁녀들이 순진한 세자빈을 사주하여 벌어진 일일 것이다.
두 번째 세자빈 봉씨의 사건
: 세자 이향은 김씨가 폐출되자 두 번째로 부인을 맞이하는데 이 여인이 동성애 사건으로 조정과 대궐을 발칵 뒤집어놓은 봉씨이다. 사건은 세종 17년(1435) 11월 24일 동짓날 발생했다. 사건은 그날 세자빈 봉씨가 거처하는 동궁의 내전에서 이루어졌다. 동짓날 팥죽을 먹고, 며느리가 시집 어른에게 버선을 지어 바치는 것은 풍년을 빌고 다산을 기원하는 풍속이었다.
소쌍을 속히 데려오라
: 봉씨는 그날 이후 소쌍을 항상 옆에 두었다. 세자와 봉씨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안 세종이 세자를 불러 부인을 박대하지 말라고 영을 내렸다. 세자가 비로소 봉씨의 침소를 찾아왔다. 봉씨는 세자와 같이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지 않아 세자빈 봉씨는 유산을 했다고 하여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 봉씨는 다시 동궁전으로 돌아왔다. 세자는 또다시 그녀를 멀리했고 그녀는 소쌍을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소쌍은 봉씨가 중궁전에 올라가 있는 사이에 권 승휘(承徽)의 처소에 있는 사비(사가에서 대리고 온 여종) 단지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봉씨는 소쌍이 한시라도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마구 역정을 냈다. 대식(對食, 대식은 원래 마주 보고 식사를 한다는 뜻으로 부부 사이를 말한다. 궁인들 사이에서는 동성애를 일컫는다.)은 은밀하고 남몰래 이루어지는 것인데 봉씨는 광포할 정도로 소쌍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빈궁을 당장 폐출시켜라
: 봉씨의 이야기가 단지에게 들어가면서 궁중 암투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권 승휘는 세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단지로부터 소쌍과 봉씨가 대식을 한다는 말을 들은 권 승휘는 이 사실을 은밀하게 세자 이향에게 고했다. 하루는 세자 이향이 분노하여 소쌍에게 물었다. 그러나 세자 이향은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았다. 대궐에서 쫓겨난 김씨에게 측은지심을 갖고 있던 세자 이향은 두 번째 부인인 봉씨마저 대궐에서 쫓아내고 싶지 않았다. 봉씨와 소쌍의 대식은 거의 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결국은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소쌍을 불러다가 신문하고 봉씨까지 불러서 조사했다. 세종은 대노하여 며느리 봉씨를 대궐에서 내쫓았다. 이때 봉씨의 나이는 꽃다운 23세였다. 이후 세자 이향은 권 승휘와의 사이에서 세손(훗날 단종)을 낳았다. 권 승휘는 세자빈으로 승격했으나 출산한 지 7일만에 숨졌다.
세종, 세자 그리고 세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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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을 충격에 빠뜨린 동성애 사건
: 봉씨의 동성애는 세종 시대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었다. 봉씨는 폐출되어 자살했는데, 이후로 여러 야사가 전해진다.
질투의 화신, 현숙공주 독살 미수 사건 - 베일에 싸인 공주의 사생활
성종 25년 5월, 현숙공주의 남편인 부마 임광재가 탄핵을 받아 국문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현숙공주가 시집을 올 때만 해도 임광재는 문장이 출중하여 성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임원준의 비행
: 임원준은 과거 시험에 부정을 저지르고 안평대군의 집에서 도둑질까지 하는 등 사대부로서의 품행을 잃어 줄곧 탄핵을 받았다.
베일에 싸인 공주의 인생
: 조선시대 여성 중에 비교적 베일에 싸인 여성들이 공주(왕의 정실 왕후가 낳은 딸의 호칭)와 옹주(왕의 후궁이 낳은 딸을 부르는 호칭)였다. 이들은 왕실에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10여 세에 이르면 부마를 간택하여 시집을 간다. 공주는 바느질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지도 않았으나 공주를 맞아들인 시댁의 남자들은 줄줄이 폼계와 벼슬이 높아진다. 공주를 맞아들인 데 대한 보상이다. 왕실의 공주와 혼례를 올리는 것은 가문의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으나 곤혼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왕과 왕세자의 혼례를 가례, 공주와 옹주의 혼례는 길례라고 한다. 공주의 부마도 간택을 하는데, 공주의 나이가 10세 안팎에 이르면 소위 사대부가의 자제들에게 금혼령이 내리고 동자봉단(童子捧單)을 받는다. 왕실에서는 사대부들이 올린 동자봉단을 보고 부마 간택 날을 정하고 통고한다. 초간택 날이 되면 어린 소년들이 대궐에 들어와 왕과 왕비에게 선을 보인다. 초간택에 참가했던 소년 중에서 7명을 선발해 재간택을 한다. 이 때 초간택에 참여했던 소년 전원이 지필묵과 호초(후추), 단목 등을 상으로 받았다. 채간택에는 7명이 참석하여 최종적으로 1명이 남는다. 그에게는 지필묵 같은 문방사우와 [소학] 1권, 궁낭(복주머니) 같은 왕비의 하사품을 내리는데 이는 장모가 사위에게 주는 상이다. 그러나 공주의 남편을 선발하는 이런 행사는 종종 사대부들의 비판을 받았다.
망아니 임광재와 현숙공주의 질투
: 왕실에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공주는 사대부와 혼례를 올린 뒤에 비교적 남편과 시부모를 공경했으나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의 딸인 현숙공주는 투기로 조선을 뒤흔들었다. 임광재는 임금의 사위라는 권세를 등에 업고 기생들과 정을 통하고 양첩을 얻으려고 했다.
풍천위를 추국하라
: 성종은 풍천위 임광재가 현숙공주를 소박하고 취첩을 일삼아 대비의 속을 썩이자 징계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던 참에 숙용 안씨가 회산군의 길례를 상의하러 혜숙옹주의 집에 갔다가 대궐로 돌아오는 실에 자신의 종들과 임광재의 종들이 싸웠다는 보고를 받자 분개하여 성종에게 아뢰었다. 숙용 안씨는 안방언의 딸로 성종의 후궁이었다. 후궁의 종들에게 모욕을 가한 것은 임금에게 모욕을 가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성종이 노하여 승정원에 전지를 내렸다. 그렇잖아도 성종은 대비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임광재의 죄를 다슬리려던 참이었다.
파렴치한 임광재의 소행을 밝혀라
: 임광재는 현숙공주의 투기에 진저리를 쳤다. 그는 현숙공주가 남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는다고 여기고 분노했다. 현숙공주와 임광재는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임광재가 양가이 규수를 첩으로 얻은 일이 성종에게까지 알려졌다. 부마가 양첩을 얻는 것은 집에 거느리는 종을 비첩으로 삼는 것과는 애기가 다르다. 양첩은 공주의 정실부인 자리를 위협하는 위치였다.
독살 음모를 밀고하다
: 사건은 현숙공주와 임광재의 대립으로 치달았다. 임광재가 양첩을 얻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현숙공주는 여종 청옥을 시켜 왕대비에게 밀고했다(공주 독살 사건의 음모).
독살사건의 결말
: 사건을 관련하여 국문이 어찌나 심했는지 국문 도중에 목숨을 잃은 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풍천위 임광재는 현숙공주를 독살하려고 했는데도 살아남았다. 이는 옥사 자체가 의혹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마에게 집을 하사하려다 일어난 폐단
:
제2부 조선을 뒤흔든 남녀상열지사
목숨 걸고 천민을 사랑한 처녀 - 신분을 초월한 용기 있는 사랑
세종 10년 9월의 일이다. 대구 감영의 선화당 앞 장터에서 양녀 가이(加伊)는 처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신분이 다른 부부의 운명
: 교수형이 집행하는 형장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형을 집행하는 날을 장날로 잡은 탓이었다. 부금(가이와 사랑하는 사이이며, 부부관계, 천민임)은 이미 참수를 당했다. 가이는 소인의 형을 집행한 뒤에 부금과 한 무덤에 묻어주소서, 소인은 오로지 그것이 소원이옵니다. 세종 때 경북 청송에 살고 있는 가이라는 양가의 딸이 집에서 거느리는 사노(私奴) 부금과 혼례를 올린 것이 죄가 되었는데 나중에 살인 사건에까지 연루되어 교수형을 당하게 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신분의 벽을 넘은 두 사람
:
관아에 고발된 두 사람
: 남녀의 혼례에 대해서는 누군가 고발하지 않으면 굳이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 조선의 관례였다. 그러나 청송의 고루한 양반이 있어서 마치 자신들의 권리를 침탈당한 것으로 생각하여 고발 부금과 가이를 고발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는 기이한 판결을 내렸다. 가이는 노비와 혼인을 했다는 죄로 강제로 이혼을 당한 뒤에 왜관에 살고 있는 왜인 손다에게 시집을 보내라는 판결이었다.
구원을 요청한 가이
: 가이는 손다의 학대까지 받으면서 여러 해를 살다가 전 남편 부금에게 편지를 보내 구해달라고 청했다. 부금은 왜관으로 가이를 찾아가 다시 청송으로 돌아와 이웃에 사는 사람 이내근내를 데리고 왜관으로 달려갔다. 부금은 왜관에서 가이를 만나 비밀리에 공모하여 손다를 죽이고 가이를 청송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정에서 허락한 일본과의 유일한 통로인 왜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커다란 일이었다.
세종의 최후 판결
: 즉시 수사가 시작되어 가이와 부금, 이내근내까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가이는 자신도 교수형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부금이 참수를 당하면 시체를 안장한 뒤에 교수형을 시켜달라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청했다. 관찰사는 가이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가이가 부금의 시체를 안장하는 것을 허락했다.
사노와 양녀의 혼례가 금지된 유례
: 조선시대에는 천민과 양반 딸이 혼인을 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했을 뿐 아니라 보니의 경우에는 주인까지 책임을 추궁했다. 이는 태조 때 예천 부원군 권중화가 상소를 올리면서 비롯되었다. 천민과 양녀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면 사수감(司水監, 조선시대 전함의 수리와 운수를 맡은 관청)에 속하게 하여 사실상 관노로 부렸다. 태조는 권중화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노와 양녀가 혼인하는 것을 더욱 엄격하게 금지하게 했다. 태종 14년 6월 예조판서 황희가 아뢰자 태종은 이를 윤허하여 종부법(아버지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 됨)을 시행하였다.
기생과 사대부의 지족한 사랑 이야기 -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연애
이광덕은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쟁쟁한 명문 사대부다. 그의 아버지 이진망 역시 대제학을 지낸 문신이다. 이광덕은 1690년(숙종 16년)에 태어나 1722년(경종 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학문이 출중하여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명되어 세자를 가르쳤으며, 탕평론을 주장하는 등 소론 완소계열(緩少系列)에서 활약을 했다. 이광덕이 관북어사에 임명되어 함흥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그가 사령들에게 엄중한 영을 내렸는데도 함흥에는 암행어사가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져서 암행을 하여 조사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광덕은 비밀리에 함흥부를 조사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분개했다. 이광덕은 어사로서 공무를 모두 마치자 어사를 수행하는 사령에게 비밀을 누설한 자가 누군인지 밝히라고 맹렬하게 추궁했다.
암행어사 출현을 미리 예단하다
: 이광덕이 추상같은 영을 내리자 함흥 판관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흥 일대를 휩쓸고 다니더니 7세 된 소녀를 데리고 왔다.
귀양을 간 이광덕
: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다. 이광덕은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전전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함흥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이 귀양살이를 할 때는 노동을 하지 않고 정해진 장소에서 떠나지 않는다. 죄인은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두던 위리안치(圍籬安置) 외에는 비교적 행동이 자유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울타리 밖에서 여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련의 오랜 기다림
: 가련(이광덕인 함흥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이를 눈치 챈 7살 소녀)은 과연 이광덕이 함흥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를 했다.
이광덕의 죽음
: 이광덕은 몇 년 만에 귀양에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가련은 양계의 금(관북과 관서의 기생은 한양으로 데려오지 못한다는 조선시대의 법)으로 한양으로 함께 갈 수 없었다. 이광덕은 한양에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죽음도 비켜간 가련의 사랑
:
자유연애를 꿈꾼 규방 부인 - 남편감을 직접 고른 여인
세조 때 영양군 이응에게 성품이 쾌활한 손녀가 있었다. 이응의 손녀 이씨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단양군사 남의와 혼례를 올렸다. 남의가 병들어 죽자 이씨는 더욱 쓸쓸하게 살아야 했다.
중과 사통하다
:
개가를 결심한 이씨 부인
:
이씨와 유균의 결혼과 동뢰사건
: 아이를 10여 명이나 낳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부면 유균과 이씨가 부부의 정이 돈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실록에까지 기록된 것은 관청의 벽에 그려진 동뢰 그림 때문이었다. 동뢰는 남녀가 음식을 같이 먹고 합환주를 마시는 초야를 말하는데, 합환주를 마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한 춘화도를 관청의 벽에 그린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선시대 연인의 만남과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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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종사를 거부한 여성들, 유감동과 어을우동 - 윤리보다 자유를 선택한 두 팜프 파탈
조선시대 음란한 여인의 대명사로 불렸던 유감동(兪甘同) 역시 처음부터 염문과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음부는 아니었다. 유감동은 검한성 유귀수의 딸로 명문 사대부 출신의 규수였다. 그러나 무안군수 최중기와 혼례를 올리고 얼마 되지 않아 무뢰배 김여달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인생행로가 완전히 바뀌었다.
조선 최대의 섹스 스캔들
: 김여달은 살인범 기찰을 한답시고 유감동을 겁간했다. 조선조에서 절개를 읽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유감동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감동은 스스로를 창기라고 선언했다. 사대부가의 부인이라고 하면 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남자들이 가까이하지 않는다.
섹스 스캔들에 연루된 고위 관리들
: 세종이 유감동에 대하여 조사하라는 영을 내리면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유감동은 조정의 최고위직 벼슬에 있던 영의정에서 천민인 공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통간했던 것이다.
유감동과 간음한 자들에게 곤장을 쳐라
: 세종은 유감동의 자백만으로도 수십 명의 간부가 나타났으니 더 이상 조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유감동을 유배하라
: 세종은 유감동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사헌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다시 보고를 올리자 세종은 유감동을 먼 변방으로 유배시켰다.
조선시대 팜프 파탈의 또 다른 이름, 어을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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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사대부가의 여인, 소박을 당하다
: 승문원지사 박윤창의 딸로 태어난 어을우동은 성년이 되자 태강 현감 이동의 부인이 되었다. 이동은 왕실의 인천으로 쟁쟁한 명문 사대부였다.
어을우동과 현감 이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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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을우동의 자유로운 성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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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당한 어을우동
: 어을우동의 자유로운 성생활에 대한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어을우동은 끝내 사헌부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대신들은 유감동의 예를 들어 사형을 반대했다. 그러나 성종의 생각이 강경했기 때문에 당대를 뒤흔들었던 음란한 여인의 대명사인 어을우동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제3부 조선을 뒤흔든 연애기담
아버지의 연인을 빼앗은 사대부의 최후 - 어느 사대부의 일그러진 욕망
아버지 첩과 간음한 형을 고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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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아가 된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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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복수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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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와 의금부, 사건을 재조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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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의 탄식과 문홍도 가문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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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사랑이냐, 부도덕한 간통이냐 - 조선시대의 근친상간이 일어난 이유
구씨 부인과 이인언의 패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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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 부인의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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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와 이인언의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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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근친상간이 일어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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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 모두를 유린한 별종 - 양성을 넘나든 사방지 사건
사방지에 대해 보고받은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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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넘나들며 유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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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사방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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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양성인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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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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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아이가 아기를 낳은 사연 - 영조 시대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
조선시대에는 16세에서 21세 사이에 결혼을 가장 많이 했다. 과년하다거나 파과지년(破瓜之年) 모두 여자 나이 16세를 일컫는 것으로 결혼 적령기를 말한다. 왕비나 세자빈을 간택하기 위해 금혼령을 내리는 나이도 16세에서 20세가 가장 많다.
참으로 괴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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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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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의 이름을 바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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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가 들은 좌수 우씨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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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정조를 놓고 싸운 선비들 - 연애 스캔들을 둘러싼 조신과 이황의 대립
전처의 딸, 이 소사를 모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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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싸움으로 비화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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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선비들의 집단 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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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으로 비화된 이황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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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 선조에게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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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최대 피해자 이 소사
: 한 여자의 간음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고 소위 시대를 뛰어 넘어 지금도 명유라고 칭송을 받는 조식과 이황의 대립까지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이 소사 사건은 영냠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까지 갈라놓았다. 그들의 문인들은 이 사건 이후에 철저하게 상대방을 배척했고 조선시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관꼐가 회복되지 않았다. 이 사건에는 군중 심리, 영남 유림의 종가임을 자처하는 두 거두 이황과 조식의 대립도 저변에 깔려 있었다.
제4부 조선을 뒤흔든 불멸의 로맨스
삼의당 김씨 부부의 영원한 사랑 - 사랑의 시를 남긴 부부
신랑 신부, 첫날밤에 시를 주고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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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당 김씨와 하립, 부부의 연을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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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낙방한 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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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팔아 노잣돈을 마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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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포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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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 심노숭 - 떠난 아내를 미치도록 그리워한 남자
심노숭과 심노암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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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노숭과 이씨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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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내를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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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생긴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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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부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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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노숭의 눈물 어린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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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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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향한 통곡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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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노숭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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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다 - 기녀가 열녀문을 하사받은 사연
관기와 사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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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시간은 다가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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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변한 동심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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