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글
1. 정도전, 군주를 업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태조의 창업을 설계한 '상부상조의 리더십')
국제정세에 민감해야 세상을 얻는다
: 조선 건국보다 약24년 앞서 일어난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은 원나라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동아시아 질서를 개편하는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정도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번이나 갔다 왔다. 이 세번의 사행(使行)이 그의 역사 인식과 국제정세 판단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명 제국 건설을 타산지석으로 삼다
: 정도전은 주원장이 황제가 되어 명나라를 건국하기까지 이선장이라는 걸출한 참모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들을 모델로 하여 한반도에 새로운 그림을 짜고자 했다. '주원장=이성계, 이선장=정도전'이라는 공식이 그대로 적응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정도전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시켜줄 버팀목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띈 재목은 정몽주와 이성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은 사뭇 달랐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동문수학했으나 온건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어 정도전의 야망을 실현시켜줄 인물은 되지 못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에게서 비전과 아이디어를 찾고 싶어 했고 정도전은 든든한 창업주가 필요했으니 이 둘의 만남은 상부상조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에 충분했다.
어디서든 발군의 실력을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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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팔기로 어려움을 이겨내다
: 이성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도전의 생애는 좌충우돌, 어려움 그 자체였다. 공민왕이 죽고 나자 정권을 잡은 이인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 그는 국제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친원정책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때 정도전은 배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친원파 이인임은 그래도 튀는 정도전을 밉게 보고 있다가 이를 기회로 삼아 나주군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그러나 이 유배 생활은 그에게 나쁜 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제대로 겪으며 고려 왕조의 한계를 바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근 10년이 넘는 야인 생활은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후일 정도전이 정몽주를 선택하지 않고 신흥 군벌인 이성계를 찾아가 그를 군주로 택한 것은 무인 출신 이성계야말로 정통 관료들과는 달리 혈통을 가리거나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 있는 인물을 발굴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를 대면하다
: 이성계는 무인의 카리스마가 강력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군주로서의 카리스마는 상대적으로 다소 약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성계의 강점은 이런 약점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인간미 넘치는 군주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도전은 이런 이성계를 자신의 신권 중심의 이상향 건설에 가장 필요한 존재로 여겼고 그를 역성혁명의 주연으로 세운 것이다. 이런 야심은 이미 정도전이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갔을 때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이때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면접을 당하려고 간 것이 아니라 정도전 자신이 이성계를 면접 보러 간 것이다.
실력과 열정으로 꿈을 이루어가다
: 정도전은 1388년 드디어 이성계의 추천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그런데 정도전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수행하며 정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이성계의 높은 신임 때문만이었을까? 정도전은 군주에게 기대려는 의타심보다는 군주를 앞세우고 뒤에서 밀려 자신이 직접 신세계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그는 이성계가 꿈꾸는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자신의 머리를 보태 함께 그 영광과 명예를 누리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역성혁명의 명분을 제공하다
: 이런저런 눈치 보지 않고 집권만 하면 될 정도로 이성계의 힘은 커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없어도 왕에게는 고려 군주로서의 명분이 있었다. 이 혁명의 갈림길에서 이성계는 더욱 신중을 기했다. 정도전은 드디어 역성혁명의 명분을 이성계 앞에 내놓았다. 백성과 고려 신료들의 마음을 이성계에게 돌려놓기 위한 최고의 묘수, 바로 폐가입진(廢假入眞)이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요승 신돈의 아들이므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 역시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이 폐가입진이야말로 고려 왕조의 막을 내리게 하는 절묘한 이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쿠데타 주도 세력이 폐가입진 이후 왕으로 추대된 공양왕을 회유하고 협박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성계는 겉으로는 사양했으나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그에게 새 왕조의 건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러나 새 왕조 건설이 그렇게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의 능력보다 시스템을 선호하다
: 정치적 힘을 얻은 정도전은 정치 전면에 나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런데 그의 개혁이 남달랐던 것은 그가 개인의 능력보다는 시스템을 선호했다는 점이다.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은 술에 취하며 종종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전한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 자신이 이성계를 발탁하고 군주로 세웠다는 호방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경영을 위해 매뉴얼을 만들다
: 정도전은 이성계 이후 열왕(列王)들이 지속적으로 규범으로 삼을 수 있는 틀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치조직을 운영하는 규범과 질서체제를 문서화하는 작업이었다. 정도전의 업적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조선경국전]의 저술이다. 이 책은 [경국전]이라고도 하는데 정치.경제의 기본을 감고 있는 조선 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모든 작업을 조선이 건국한 1392년 직후부터 그가 숙청된 1398년까지 불과 7년도 못 되는 기간 동안 이루어낸 점은 실로 경탄할 만하다.
신권 정치를 꿈꾸다
: 정도전의 꿈이 역사에 길이 기록될 만한 이유는 그가 신권(臣權)을 강화하는 제도를 도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이런 발상은 군주의 권한을 일부 축소하고 신료들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조정의 정치가 군주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인 것이다. 조선 왕조 건설 이후 정도전의 관심, 특히 속내는 새 왕조의 군주, 곧 이성계에게는 절대 전권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제도를 정비하면서 군주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종교를 개혁하다
: 정도전이 실시한 개혁 중에서 또 하나 뛰어난 작품은 종교개혁이다. 왕조만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왕조의 사상 철학이던 불교를 배척함으로써 종교개혁까지 강권적으로 유도하여 바탕을 바꾸어버리려고 한 것이다.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단숨에 새 판을 짜다
: 정도전이 이처럼 새로운 정계 질서를 유도하고 종교개혁을 실행하며 시대적 분위기를 개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이를 이성계가 철저히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도전은 새 왕조의 수도를 옮기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중추적 역할을 해온 귀족 계급을 허물지 않고서는 조선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독주가 자신의 발목을 잡다
: 이처럼 뛰어난 정도전에게도 서서히 약점이 드러났다. 독주하는 성격과 경쟁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정치적 테러의 희생양이 되다
: 1396년 명태조 주원장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트집 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으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강요했다. 이른바 표전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명나라는 여러가지 이유로 조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첫째는 여진족의 송환 문제 등 양국의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햇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선왕조의 실권자인 정도전을 강제로 압송하여 그를 볼모로 잡아두고 조선 지도부를 협박하려는 정치적 속셈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 가던 외교 문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箋文), 이렇게 두 종류였다. 이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싱 사건의 전모인데 사실 표전문은 정탁이 쓴 것이었다. 이방원, 하륜 등은 이런 일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정도전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명나라 송환 문제는 조준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정도전에게는 정치적 타격을 입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도전이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른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기 전제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지들에게 미움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도전의 신권 강화책은 후일 이방원 등 왕권 강하주의자들에게 심한 반발을 산다. 또한 이성계의 신뢰도 정도전을 계속 권좌에 붙잡아두지는 못했다. 독주, 너무 빼어난 실력, 견제와 시기, 질투가 계속되면서 이성계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싸움인 왕자의 난에 정도전과 그의 반대파들이 휘말라게 된 것이다.
개혁가이자 실천가로 이름을 남기다
: 정도전은 여말선초에 이성계를 권력의 정상으로 올려놓기까지 이를 제지하려는 권문세가들의 견제와 친원주의자들의 신랄한 비판과 위협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군주를 보필한 '창업주의 진정한 참모상'을 보여주었다.
2. 하륜, 스스로 군주를 선택해 모시다 (태종의 의지를 잘 살펴 보좌한 '부창부수의 리더십')
(군주는 참모를 선택하지만 참모는 군주를 조종한다)
태종, 침식조차 잊고 슬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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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남다른 안목을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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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바칠 군주를 만나다
: 하륜은 재주가 빼어난 만큼 견제도 많이 받았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에서 발생한 견제 세력들은 하륜을 경쟁상대로 여기고 그가 정권의 핵심부에 들어오는 것을 계속해서 방해했다.
실패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다
: 하륜에게 가하는 관료들의 견제는 만만치 않았다. 하륜의 관운이 실력에 비해 쉽게 풀리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실 하륜은 처음 관료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인 1368년(공민왕17년)에 감찰규정으로 임명되자마자 나는 새로 떨어뜨린다는 집권자 신돈의 문객을 규탄했다. 이는 신돈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격이었으니, 이 사건으로 그는 조정의 미움을 사서 하루아침에 파직당하고 말았다. 그 후 하륜은 답답한 가슴을 치며 세상을 한탄하며 지냈는데, 그런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사람은 외숙부 강회백이었다. 강회백은 명나라 기행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하륜에게 전해주었고, 하륜은 원명 교체기의 동아시아 정세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뚝심으로 고난을 겪어내다
: 그는 최고의 실력자 신돈의 문객을 거침없이 비판했다가 쫓겨난 적이 있는데 복권되어 관료 생활을 착실하게 하는 듯하다가 또다시 당대 최고의 실력자를 비판하고 나섰다. 1388년(우왕 14년), 하륜은 최영의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편에 서버렸다. 다 쓰러져가는 원나라 편을 들어 새로 일어나는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아 보였기에 하륜은 망설이지 않고 최영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하륜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으니 밉보인 것은 당연지사였다. 최영은 그를 양주로 귀양 보냈고, 하륜은 가만있으면 될 일을 화를 자초한 꼴이 되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하륜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성공의 문턱 앞에서 장애물을 걷어내다
: 격변의 세월 속에서 하륜은 이성계와는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바로 우왕이 폐위되고 아들 창왕이 옹립된 직후인 1388(창왕 1년) 여흥에 유폐된 우왕 복위 사건에 그가 연루되었던 탓이다.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중앙 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지방 수령관으로 떠돌아다녔다. 이성계 일파에 끼어들고 싶어도 자리가 없었다. 주변 상황과 시대적 흐름을 살펴볼 때 고려 왕조에서도 배척당한 그는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 등의 개국공신파에게도 견제당한 것이다.
끝없는 변신만이 퇴보를 막는다
: 실력을 갖추고도 중앙 핵심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새 왕조의 신진 세력들과 왕실에서 격변기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면서 도참사상가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왕실의 묏자리에서부터 개인의 작명, 관운, 운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이다. 길이 아니면 돌아가라는 말처럼 하륜은 도참사상을 통해 권력의 핵심부에 다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 첫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화근의 근원은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의 왕으로 등극하자마자 계비 강씨 소생의 여덟째 왕자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하륜의 강력한 경쟁자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지를 받으며 이런 조치들을 통해 신권정치의 기틀을 세워나갔다. 이방원과 하륜의 생각은 정도전과 정반대였다. 이방원과 하륜은 조선의 개국 후 왕권이 더욱 강화되어야 정국이 안정되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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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이 최선의 방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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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대신 받다
: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정계에 크게 이름을 알려고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는 이 일로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이방원이 왕으로 나가기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았기에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입장에선 지난번과 달리 골육상쟁은 피하려 들었다. 참모 하륜도 그 때문에 이방원에게 도덕적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꺼렸다. 자신의 군주가 친동기들을 살상한 패륜아라는 비난을 받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명분이 있어야 했다. 때마침 기회가 왔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과가 세자가 되어 조선 제2대 왕 정종으로 올랐으나 그에게 후사가 없어 세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넷째 왕자 방간과 다섯째 왕자 방원 사이의 세력 갈등이었다. 하륜은 이들 형제간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정종을 설득해, 군주의 세를 명분으로 업었으니 이미 명분에서 방간은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햐륜은 난이 일어나자마자 정종의 명을 받아 교서를 써서 방간에게 항복하라고 권했는데 싸움에서도 지고 명분에서도 진 방간은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그러나 하륜은 이방원의 위치가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속전속결로 일을 해치우기 위해 여러 중신을 거느리고 정종에게 가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밀어붙였다. 정종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이방원을 세자로 삼았다가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는 이 두 차례 난의 실질적인 지휘자였고 세간의 비난을 달게 받으며 군주의 방패 역할을 했다.
강한 추진력으로 개혁을 이끌다
: 하륜은 태조 시대에 정도전이 신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각종 제도적 정비를 왕권 강화 측면에서 다시 손보고 고쳤으며, 새 왕조에 걸맞은 각종 복식, 사무 처리에 대한 지침, 인사 평가와 시행 등을 태종의 의중대로 재정비했다. 또한 하륜은 고려 시대에 귀족 관료 계급이 비대해진 것이 망국의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관리의 나아감과 물러남을 분명하게 하고 업적을 정확하게 평가해 승진시키고 좌천시키면 논공행상이 분명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륜의 이 같은 관리정책은 조선 시대 인사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여말선초의 혼란기를 틈타 노비제도가 허물어지는 바람에 이에 대한 소송과 비난의 끊이지 않았는데 이를 바로잡고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를 만들어 착용토록 했다.
독서광, 아이디어맨으로 이름을 날리다
: 하륜은 입을 열면 당대를 놀라게 할 만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곤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문고 설치였다. 또한, 조선 초기에 이미 종아 화폐인 저화를 통용시키려고 저화 통행법까지 만들어 강제로 시행했으나 너무 이른 시기에 적용했던지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의 화폐정책은 동서양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독창적인 발상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하고 나서 제일 먼저 부딪친 일이 수도 한복판을 흐르는 개천의 범람이었다. 결국 왕명으로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비교적 풍년이 든 경상도와 전라도의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돌로 둑을 쌓으며 홍수에 대비한 수방책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청계천이다.
군주의 리더십에 부창부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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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희, 꼼꼼한 군주의 실무형 참모가 되다 - 세종의 완급을 잘 조절한 '수용의 리더십'
노재상에게 궤장을 하사하다
: 궤장이란 군주가 공이 많은 늙은 신료들에게 내리는 의자와 지팡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2품 이상 고위 관리를 지낸 신하가 퇴직할 뜻을 밝히면 왕은 궤(의자)와 장(지팡이) 또는 가마를 내리기도 했는데 이 궤장은 '의자와 지팡이에 기대 있어도 좋으니 왕의 곁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공경의 뜻을 담고 있어 신료들에게는 최고의 명예였다.
불편한 임금을 배알하다
: 황희는 '충녕대군(세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적자계승의 원칙에 어긋나고 왕권을 흔들리게 할 소지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외지로 귀양 간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뜻을 받들어 황희를 그대로 품에 안았다. 세종의 황희에 대한 수용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앞으로 조선 초기의 국사를 통괄 관리하게 될 유능한 인재의 출범을 알리는 서막이었ㄷ.
가슴으로 집현전을 껴안다
: 세종은 왕좌에 오르자마자 조선의 정치, 사회 제도 개혁을 준비했는데 개혁의 근간에는 인재 양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통치절학이 짙게 배어 있었다. 바로 집현전의 기능 회복이었다. 집현전이야말로 세종의 싱크탱크였으며, 세종의 인재를 보는 탁월한 안목이 담겨 있는 곳이다. 그리고 집현전에서는 한참 후 조정의 중신이 될 동량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집현전은 학자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그러나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경연과 서연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경연은 왕과 유신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려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서연은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학자로서 싱크탱크의 역할을 떠나 정치 전면에 깊숙이 개입할 소지가 컸다. 그래서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관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황희가 낙점되었다.
설득형 커뮤니케이션의 대가
: 세종18년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정부의 조직체제가 바뀌었다. 의정부서사제란 육조의 판서들이 시행할 정책 관련 사항들을 의정부 정승들이 먼저 심사한 후 국왕에게 보고하고, 또 국왕의 결재도 의정부를 거쳐 육조에 전달되도록 한 제도다. 이 제도는 한마디로 왕권이 약해지고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어 자칫 정국이 소용돌이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세종이 부활시킨 의정부서사제 아래서 황희를 비롯한 중추적 신료들이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된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황희가 의정부에서 굳건하게 버티면서 집현전과 육조의 여론과 의견을 적절하게 조정, 관리함으로써 조선 초기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연공과 서열을 파괴하다
: 황희는 세종의 인사 방침을 그래도 실현시켜 능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펼쳤으며 지방이나 가문보다 실력을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실제로 세종은 황희 등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출신을 가리지 않고 나라의 일을 맡겼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적잖은 불만도 불러일으켰다. 사대부 출신이나 명문 귀족들이 주료인 중신들에게는 마뜩찮은 정책이기 때문이었다.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다
: 황희는 언제나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 다른 황희의 강점은 그가 정권의 중심부에 있다가 실각하여 유배당하는 등 실패를 충분히 경험해보았다는 것이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온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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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길러 나라를 키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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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허물을 덮어주다
: 황희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여러 가지 멍에로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세종은 황희가 정치는 잘했으나 정에 이끌려 끊고 맺는 데는 약해 괴로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순아홉 살에 영의정에 오른 황희는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이는 다 세종의 절대적인 신뢰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경제정책을 적극 지원하다
: 세종이 힘을 기울인 정책 가운데 단연 돋보인 것은 경제정책이다. 여기에 참모 황희의 지원책이 돋보인다. 세종이 아이디어를 내면 황희는 이를 현실 정치에 접목하는 시스템이 세종 재위 기간 내내 작동된 것이다. 황희는 이런 세종의 경제정책을 때로는 견제하고 때로는 후원하며 현장의 관리들을 독려하고 다스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또한 황희는 의정부서사제 아래서 육조이 모든 정책과정을 수렴하며 너무 앞서가는 세종을 잡아끌고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관료들은 뒤에서 밀어주는 등 훌륭한 기관사 역할을 해냈으며, 결과적으로 세종의 창조 경영이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책의 완급 조절로 군주의 리더십을 보완하다
: 세종은 귀천을 불문하고 인재를 가려볼 줄 아는 천부적인 식견을 갖고 있었으나 인물의 평판에 대한 사전 정보는 늘 황희가 제공했다. 세종은 완벽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고 줄기차게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황희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었다, 잡아당겼다 하며 정책의 완급을 조절했다. 그럼에도 황희는 결코 군주의 권위는 건드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군주의 의중을 잘 파악해 신하들에게 이를 보필하도록 중간 다리르 놓아준 참모 중의 참모였다. 이로써 두 사람은 군주와 신하라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남다른 신뢰를 갖고 살아간 특별한 평생 동지가 될 수 있었다. 세종과 황희는 서로 부족한 점을 가려주고 채워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4. 신죽주,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리다 - 세조의 오명을 치적으로 덮은 '열정의 리더십'
동아시아의 변화를 읽어내다
: 15세기 초 조선에서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사대부라면 명나라에서 일어난 '정난의 역'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정난의 역이란 명나라 영락 황제의 왕위 찬탈 사건인데, 이 사건이 조선에 처음 전해진 것은 정종 1년(1399년) 3월 1일이었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1453년 10월 10일 조선에서도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숙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수양대군, 곧 세조다(계유정난). 신숙주는 물론이고 한명희를 비롯한 쿠테타의 주역들 모두가 영락제에게서 쿠테타의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이 거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세조가 등극 후 반수양대군 일당들을 모조리 축출하고 죽이는 철권정치를 펼쳤기 때문이지만, 조선의 지식인층의 영락제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혁명'이라는 면죄부를 주었듯이 세조의 왕위 찬탈도 순응하며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다
: 쿠테타는 한명회와 수양대군이 한데 뭉친 데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사실 신숙주에 대한 수양대군의 믿음도 쿠테타를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왜냐하면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신숙주 같은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문종이나 단종을 넘어서는 정치적 경륜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왕보다 못한 정치를 펼치다면 정변의 명분은 없어질 테니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집현전 싱크탱크의 조력이었다. 사실 신숙주의 인물됨을 알고 그를 중용한 군주는 세종이었다. 문종이 등극하던 시점에 왕권은 약화되었고 의정부의 권한은 막강했으며 종친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문종이 죽은 뒤 정치적 입지를 가장 강화할 세력으로 세 부류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는 좌의정 김종서를 비롯한 의정부의 훈구대신들이었고, 또 하나는 안평대군 그리고 아직 잠룡에 불과한 수양대군 등이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기 싸움, 고명 사은사
: 수양대군이 한명희를 얻은 순간, 이미 세를 어느 정도 확보한 안평대군에게는 이현로라는 책사가 있었다. 이 두사람이 처음 맞붙은 것은 문종이 세상을 뜨고 단종이 즉위했을 때 명나라에 자신의 상전을 보내는 일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은 여러 정황을 살펴보고 자신이 고명 사은사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수양대군은 이 원행에 신숙주까지 불러들여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그는 집현전 학자들이라는 원군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신숙주가 수양대군과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서 의기투합하다
: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의 규모는 보통 300~400명 정도였다. 정사부사, 자제군관(子弟軍官:개인 수행원), 병사, 역관, 짐꾼, 상인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한데 어울려 4개월쯤 생사를 같이했다. 목숨을 걸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사신단에 한 번 같이 다녀오면 사지에 다녀온 것이라 해서 평생 동지나 친구로 가깝게 묶이는 경우가 예사였다.
살생부, 거사 그리고 방관
: 고명 사운사로 다녀온 수양대군은 정치적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 부사, 이조.병조판서, 중외병마 도통사 등을 겸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장악했다. 조선 역사상 왕족 중 영의정 자리를 겸한 사람은 수양대군 뿐이다. 1455년에는 한명희, 권람 등이 앞장서서 강요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고 말았다. 신숙주에게 한명회 같은 기질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한번 순응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신숙주의 처세술이었다. 이런 미적지근한 신숙주를 세조는 왜 자신의 정치적 동조 세력으로 끌어넣은 것일까?
신숙주의 열정을 높이 사다
: 세조는 일찍이 대군 시절, 똑똑하지만 겸손하고 의외로 정치적 견해를 나타내지 않는 신숙주가 가진 장점을 발견했다. 신숙주는 정치적 이해타산에는 누구보다 소극적이었지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그 어떤 사람보다 열정적이었다. 한명회가 세조의 정치적 왕재를 발견해낸 인물이라면 신숙주는 세조의 문화적이고 외교적인 왕재를 발견해 이를 성취하도록 만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세조가 정권을 잡기 위해 한명회 같은 모사를 썼다면 통치의 최고 참모로는 신숙주를 쓴 것이다. 특히 신숙주는 외교와 문화 통치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외국어에 능통하다
: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조선이 내치에서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안정권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때 조선의 위정자들은 외부 세계로 눈을 놀리기 시작했는데, 명나나롸 여진, 일본과 유구 등 외국과의 관계가 조선의 안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세조의 외교적 눈과 발이 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다. 신숙주는 학자로서 유학을 숭상하고 즐겨 공부했어도 실질적인 정치와 경제의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다른 학자들과 그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후대를 배려해 기록을 남기다
: 신숙주의 빼어남은 그가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이 진행해온 외교의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긴 점에서도 드러난다.
열정과 치적으로 오명을 덮어버리다
: 신숙주는 세조가 원하는 것 이상을 채워줄 수 있는 실력과 군주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세조는 명분을 잃어지만 실리를 얻었고, 한명회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부귀와 명예를 얻었다. 성삼문처럼 사육신이 되지 않고 권력을 택한 신숙주는 변절자라는 비판을 들었지만 조선 초기의 문화와 외교 정치사에 중요한 디딤돌을 만들어 세조의 오명을 씻어준 진정한 참모였다.
5. 역량이 부족한 중종을 군주로 키우다 -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건 '일편단심의 리더십'
준비된 참모와 급조된 제왕의 조우
: 조광조는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회천에 유배된 김굉필에게 성리학을 배운 탓에 조선 위정자들의 정치 지조체제에 심각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하의 힘을 빌어 왕권을 잡다
: 중종은 대가 센 사람은 아니었다. 중종은 성종처럼 강한 카리스마는 없었으나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버리고 마는 고집스러운 면을 갖고 있었다. 연산군은 진성대군(중종)을 무시하고 한편으로는 경계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생각해 높여주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자세를 보여 당사자인 진성대군을 한없이 불안하게 했다.
백기를 강요한 신하들
: 중종은 떠밀려 왕권을 잡았기에 반정 초기 몇 달간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자신의 아내 신씨의 중전 책봉 문제가 정쟁의 한가운데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반정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단경왕후 신씨는 폐위되고 말았다.
새로운 대안 조광조
: 중종 입장에서 볼 때 조정 신료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모두 부패와 권력의 온상이었다. 공신들은 엄청난 권력과 재물로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면서도 나랏일은 등한시했다. 어느 새 반정공신들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임금과 자신들을 동격으로 여김 임금의 존재를 밤맞없이 견제하거나 무시했다. 중종은 알성문과에 급제한 조광조를 언관직인 사간언 정언(正言)에 임명했다. 정언이라면 사간원의 낭사로 정6품에 해당하는 직위로 직급은 중간 관료다. 하지만 사가원이라는 직책상 대신들을 언로를 통해 견제하고 그들의 전횡을 차단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자리였다.
중종, 조광조와 힘을 합치다
: '강'은 임금뿐 아니라 스승들 앞에서 하던 당시 유생들의 시험방식인데 보통 '통', '약', '조(組)', '불(不)'의 4단계 평가를 받았다. '통'과 '약'은 요즘 같으면, 수.우 정도의 평가였고 '조'는 학습이 미진한 것이며 '불'은 아예 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시 순창 군수 김정과 당양 부사 박상, 무안 현감 유옥이 모여 자신들의 목을 걸고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들 사림은 왕에게 억울하게 폐위된 중종의 왕비 신씨를 복위하도록 상소했다. 공신들의 힘이 군주보다 앞서던 시절이라 조정은 훈구세력의 손을 들어주고 대간들은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오히려 심문하고 유배시켜버렸다. 조광조는 이에 반발, 상소를 올려 대간 전원의 파직을 요청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사간원 신참 관리가 올린 대간 전원의 파직 요청은 조정을 휘저어 놓고 말았다. 조정의 논쟁은 몇 달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결국 대의 명분에서 앞선 조광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는 조정에서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 중종에게 모처럼 기운을 펴고 소신껏 정사를 펼칠 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중종은 특유의 신중함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조광조의 벼슬을 올려 그에게 신임을 불어넣었다.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고 조정에 들어와도 고위직인 정3품 당상관이 되기 위해서는 보통 10년 이상이 걸리는 법이다. 그런데 중종은 파격적으로 조광조를 신임하여 3년 동안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승정원 등에서 요직을 지내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요직을 두루 거쳐 조정의 실세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종은 조금씩 자신의 자질을 키워가며 군주로서의 자리를 만들어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종과 조광조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종은 조광조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강의를 받으며 임금의 자질을 키웠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경연에 계속해서 참석해달라도 요청했다. 그는 경연을 통해 왕을 교육하고 바른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군주의 참여를 채근한 것이다. 중종 시대에 등용된 사림파는 100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시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에 포진됐다. 직급은 대신들보다 낮았지만 핵심 부서였기에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자리였다. 조광조는 그러한 사림의 지원을 입고 중종을 통해 조선의 개혁을 추구했다.
중종과 조광조, 개혁에서 이견을 보이다
: 조광조가 펼친 각가지 조치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교적 이상정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조광조의 첫 번째 개혁은 언론 개혁에서 출발햇다. 왕을 교육하는 경연과 심사의 기능을 정상화하면 최소한 조정 안에 견제기능이 활성화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광조의 두 번째 개혁은 도교의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성리학의 근본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군주였다. 역대 군주들이 계속해온 소격서를 유지하려는 중종과 조광조 일파의 기 싸움이 벌어졌고 밀고 당기는 쟁론 끝에 중종은 소격서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 싸움에서 조광조는 명분을 얻었지만 가장 중요한 군주의 마음을 잃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한편 조광조와 신진 사림은 중종을 앞세워 향촌을 주도할 수 있는 자치규약인 향약 보급에도 전력을 다했다. 조광조가 구상한 지방 경제의 활성화와 국고 충당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균전제라는 이름으로 선을 보였으며, 토지 자체를 나라에서 균등하게 나눠주는 균전법,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해 땅이 특정인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한정하는 법도 주장했다. 조광조의 세번째 개혁은 위훈삭제, 곧 공신들에 대한 적극적인 견제였다. 중종은 자신이 원하던 일이긴 했지만 그 조치들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사람의 요구가 도를 넘어선다고 보았다.
훈구대신들의 반격, 중종이 돌아서다
: 중종은 위훈삭제의 반발을 조광조 축출의 기회로 삼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군주의 배신이자 사림에 대한 일격이었다. 조광조는 죽기 전에 술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러나 추한 꼴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조광조는 끝까지 중종을 배신하지 않았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임금에게 충성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중종은 그 후로도 25년이나 더 왕위에 있었으나 조광조와 함께 했던 5년간의 치적 이상의 개혁은 결코 거두지 못했다. 아니, 더 수구적이고 개혁에서 더 후퇴하여 조선의 정치, 사회를 어렵게 만들었다.
동상이몽의 군주와 참모
: 유교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조선 초기의 제왕적 위상은 중종반정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왕조 초기의 막강하던 임금의 권세는 사라지고 반정공신이 조정에 득세하여 신권이 왕권을 넘어선 불안한 시기였다. 중종과 조광조의 만남은 조선 중기의 이른바, 신권의 강화를 통한 왕권정치의 개혁적 실현이냐, 수구적 왕권강화로 돌아가느냐의 갈림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광조는 개혁의 전도사로 철저한 하의상달의 개혁을 추구했다.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하자 왕권은 수구, 부수 상태로 돌아갔다. 중종은 조광조를 통해 공신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생각뿐이었고, 조광조는 군주를 개혁해서라고 고칠 건 고쳐나가자는 생각뿐이었다. 두 사람은 군주와 참모로 만았으나 동상이몽의 처지였기에 어느 정도 목표가 달성되자 자연스레 갈라지고 말았다.
6. 유성룡, 초유의 전란을 슬기롭게 극복해내다 - 선조의 몽니를 다 품어준 '관용의 리더십'
도망가는 군주를 붙잡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이미 체통을 잃어버리고 나라의 존망이나 백성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찾는 필부의 형태를 보였다. 명나라에 기대, 몸을 보존하겠다고 한 것이다. 유성룡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내부(內附, 중국에 가서 붙는 것)하는 것이 본래 자신의 뜻이라며 계속 고집을 피웠다. 이에 유성룡의 단호함에 밀려 조정 안에서는 더 이상 압록강을 건너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황망 중에도 앞일을 내다보고 선조와 조정의 여론을 항쟁으로 돌려놓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빼어난 품성과 자질로 임금을 돕다
: 유성룡의 재능이나 실력도 정치적 쟁론에 휩싸이기보다는 실무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정책을 사물에 응용하는 데 발휘되었다. 또한 유성룡의 최대 강점은 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군주를 대한 것인데, 이 모습은 선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았다.
임란 초기, 철저히 궤명당하다
: 세조 때부터 조선의 국가 방위 개념은 진관 체제와 이를 보완한 제승방략 체제였다. 진관 체제는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에는 군사 체제로 전환하는 향토 단위의 방어 전략이고, 제상방략은 이 진관체제를 보완하여 군대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군 동원 체제다. 곧 제승방략은 각 진관의 병력이 적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쟁이 발발하면 각 지역의 군대가 특정한 집결지로 모여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의 지휘를 받는 체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지휘관이 도달하기도 전에 군사들이 도망치거나 모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양새로 전쟁을 시작했으니 군대라고 할 것도 없어 조선군은 첫 전투에서 괴멸되었다. 당시 병부에 기록된 조선군 총병력은 14만 5천명이었지만 수도방위와 북방수비대의 2만3천명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나마 보급 인원 등을 빼고 나면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갈 수 있는 병력은 8천병 정도뿐이었다. 이것 또한 장수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서, 점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등의 이유로 적기에 소집할 수 없었으니 개전 20일 만에 수도를 빼앗기는 참패를 겪게 된 것이다.
위기 대응책을 미리 제시하다
: 유성룡은 일찍이 나라의 위기 상황을 대비해 두 가지 방책을 제시했다. 그 하나는 인재 추천, 또 하나는 전략전술의 변화다. 유성룡이 제시한 다른 방책은 제승방략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유성룡이 제시한 방안들은 사전 정보파악 후 군대 이동과 지방 책임자들의 현장 응전과 사후 보고, 후방 경비 강화 등으로 정리된다. 이렇게 유성룡이 전쟁의 핵심을 파악했기에 임진왜란 후반부에는 조선의 전쟁 대응이 비교적 활기를 띠고 이루어졌다.
의병과 연합군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다
: 유성룡은 임란 초기 전시 상황을 파악한 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유성룡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회심의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두 가지 계책을 준비했는데, 명나나롸 조선군의 연합 반격을 주축으로 하되, 후방과 적의 진퇴를 괴롭힐 게리라전도 염두에 두었다. 또한 정식으로 전쟁에 대비하고 방어, 공격하며 병원을 지휘할 지도부를 제도적으로 마련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선조26년(1593년) 평양을 수복했고, 전세도 다소 유리해졌다. 그러자 유성룡은 군사훈련과 우수한 병기를 제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훈련도감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에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권유하면서 드디어 훈련도감 설치가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낙상지의 지휘 아래 절강병들에게서 전투 기술을 배웠다.
솔선수범의 지도력을 보이다
: 훈련도감의 설치는 쉽지 않았다. 아직 서울의 치안이 엉망인데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군주를 백성들이 용서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울은 물론이고 피난 도중에 지나친 평양 백성들조차 임금을 공격하겠다는 분위기를 표할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에서 화포와 조총의 위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동아시아 전재에 총과 대포가 새로운 주력무기로 등장한 것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싸움에 뛰어난 절강성 병력을 모체로하여 드디어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편제는 3대로 나누었는데, 병사를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으로 분류하여 부대마다 특별한 장점을 갖추도록 했다. 인원은 약 4,500명으로, 이들은 초기의 군대와는 달리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이었다. 이 제도는 후일 문제점을 보완하여 조선 말기까지 그래도 존속되었다.
선조, 유성룡을 견제하다
: 선조는 국난을 당해서는 급한 김에 유성룡에 의지해 왔으나 이제 어느 정도 전세가 역전되었으니 유성룡이 더 이상 국난 극복의 중심에 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밀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황제의 기패에 고개를 숙이지 않다
: 유성룡은 당시 파주에 있는 권율의 진중에서 적의 동향을 살피며 명과 왜가 강화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불안해했다. 그때 마침 명나라의 참장 유격장군 주홍모와 기패관 주조원이 왜로 가려다가 유성룡과 맞닥뜨린 것이다. 기패는 곧 명나라 황제의 얼굴과 같은 것으로 명나라의 국기와 경략 송응창의 전군 명령서였다. 당연히 속군인 조선의 신하는 기패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해야 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왜군과 강화를 명한 명령서에는 절을 못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의 일방적인 강화 강요에 대해 조제찰사로서 대내외에 결전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유성룡은 답답한 나머지 조명연합군의 명령체계를 어기고 도제찰사의 권한으로 한강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단독 공격하도록 명령했다가 명군에게 저지당하는 등 좌절을 겪고서 마음의 병까지 얻었다.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서다
: 명나라는 선조의 이중적인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겨 하삼도의 관리를 광해군에게 맡기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선조는 양위를 발표했다. 선조 26년 8월 30일의 일이었다. 이날 서둘러 발표한 선조의 양위 선언문은 가히 한 나라의 군주가 발표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치졸하고 조잡했다. 신료들은 이것이 선조의 진심의 아님을 금방 알아차렸다. 유성룡과 신료들이 나서서 선조의 사의를 만류했고, 선조는 마지못해하며 정사를 잡았다. 선조 26년 10월 27일, 선조는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불러냈다. 그러나 정사를 맡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위 소동 등 대내외의 온갖 어려움이 산적해 있어 군무와 정치를 함께 통괄할 실질적인 리더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불러낸 참이었다.
전란 수습으로 민생을 앞세우다
: 유성룡은 위기관리의 책임자로서 선조가 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들을 앞장서서 처리해냈는데 그중에도 민생을 회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제일 시급한 것이 백성들의 살림을 안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쟁이 수그러들자 급한 전횡을 마무리하는 한편, 조세 문제에 대한 의견을 선조에게 올렸다. 유성룡은 조세 제도 개혁으로 전체 면적을 계산해서 생산량별로 균등하게 나누어 내도록 제안했다. 그러자 수이자 형평을 지켜 세금을 내는 대동법은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대동법은 이러한 진통 끝에 겨우 시행되었지만 유성룡 집권 시절에 어느 정도 지켜지다가 그가 실각한 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내외의 적이 불린 술책으로 실각하다
: 유성룡은 왜군이 반드시 재침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의 재침을 막고다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정예군을 훈련시켰으며 화포와 신무기 개발을 독려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한 정치적 반대파들은 그의 실각을 교모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시작은 이순신부터였고, 최종 목표는 유성룡이었다. 선조와 정적들은 이순신을 내쫓고 나자 유성룡의 실각을 차츰 표면화했다. 조선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실시한 토지.조세 정책이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고 믿었다. 여기저기에서 탄핵하는 목소리가 올라오자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1598년 11월 19일 유성룡을 파직했다. 유성룡은 한평생 군주를 모시고 전쟁을 수습해왔기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는 선조가 자신을 버린 사실을 확인하고 그 후로 다시는 관직을 받지 않았다.
나라의 안위를 우선시하다
: 유성룡은 군주가 어떠하든 참모로서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생 청빈했으며 인재를 추천하는 데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전쟁 중에도 직접 최전선에 나서면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급부도 없지는 않았다. 선조는 정사를 훌륭하게 처리하고 명나라 사신마저 감복하게 만드는 유성룡의 인기가 날로 부담스러웠다. 참모는 충성으로 군주를 섬기는데 군주는 참모를 쫓아낼 생각으로 몽니를 부리는 희한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유성룡이 군주의 영광을 자신이 대신 받았다든가 군주를 넘어서는 권한을 행한 기록도 없다. 유약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군주를 끝까지 보필하면서 자신을 버리는 유연한 사고로 대처해낸 경이로운 처세술이 유성룡의 가장 큰 장점이다. 다만 군주의 재목이 부족하여 지혜로운 참모를 끝까지 견인하지 못한 것이 선조에게나 유성룡에게나 불행이자 불운이었다.
7. 최명길, 실리추구로 절체절명의 조선을 구하다 - 인조를 위해 악역을 자처한 '뚝심의 리더십'
굴욕과 수치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 1636년 12월 병자호란으로 온 나라에 유혈이 낭자했다. 강화로 피난하려다 청군에게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한 인조는 주화와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들 사이에 까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해온 최명실은 직접 청군 진영을 출입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으로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조선,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다
: 조선 중기 이후의 정치 변화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포인트는 국제 정세의 변화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는 명분의 세계에서 실리의 세계로 옮아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를 섬기는 것보다는 백성 스스로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황제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휴머니즘이고 민본주의적인 시각이 태동했던 것이다. 일본 역시 16세기에 남북 시대가 열리면서 천왕의 권위가 깨지고 전국 시대를 통해 힘을 가진 자가 득세하는 실리주의 시대가 열렸다. 백성들도 전국 다이묘들의 횡포에 직접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등,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렇듯 동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은 이미 명분론에서 실리론으로 쇄국론에서 개방론으로 옮겨가는 첫발을 뗀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쇄국과 명분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후금, 조선의 수를 미리 읽다
: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실각하자 인조는 조선 사대부들의 명분론에 휩쓸려 후금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철회했다. 그 결과 후금이 1627년(인조5년)에 군사를 보내 의주를 함락시키고 평산까지 쳐들어오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최명길, 전쟁 불사론을 온몸으로 막아내다
: 후금으로서는 화의를 맺지 않으면 곧바로 도성을 침략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강화도를 칠 생각이었다. 최명길은 후금의 속셈을 알고 있었기에 청나라 진영을 오가며 타협안을 제시했고, 인조를 설득하여 '형제의 의'를 맺게 하고 우선 위기를 모면토록 했다. 이로 인해 후금과 조선은 서로 협의를 시작해 크게 5가지 협약을 맺고 이를 지키도록 했다. 1. 후금군은 평산을 넘어서지 않는다 2. 맹약을 맺은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한다 3.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4.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한다 5.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하되 명에 적대치는 않는다. 이후 조선은 국력을 키우고 후금과 실리를 추구해야 했지만 조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후금과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속일 줄 아는 자가 실리를 얻는다
; 인조와 사대부들은 왜 명나라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그 이유는 2가지로 풀이된다. 1.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많은 군사를 조선에 파병해준 은덕을 잊지 못한 탓이며, 그로 인해 명나라와는 혈맹의 의리르 지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2.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다. 이런 전후 사정과 배경 때문에 최명길은 강화 후 스스로 사직소를 올렸고 정적들도 그의 퇴출을 주장했지만 인조는 그를 혼란한 조정과 국난의 해결사로 쓰고 싶어 했다.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 않다
: 강화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더라도 체면과 명분을 지키자고 생각했으나 정작 백성의 안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최명길은 목술을 걸고 주화론을 주장하며 자신의 제안을 밀어붙였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주장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고 일리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여유로움도 보여주었다.
단기필마로 내외의 적과 상대하다
: 1637년 1월 1일 청태종이 직접 도착해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놓고 조선 군주의 직접 항복을 요구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으로서는 항복밖에 대안이 없었다. 최명길은 이왕 항복하는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내걸어보고자 노력했다.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조선의 군주에 대한 생명 보장과 침략 전쟁의 중단이었다. 청태종은 청나라에 대한 군신의 예를 갖추고, 명의 연호 폐지와 국교를 단절할 것,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顧命)과 책인(冊印)을 내놓고 인조의 장자와 둘째 아들, 여러 대신의 자제들을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다
:
국난 수습의 해결사로 나서다
: 최명길은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임경업 등이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 알려져 청나라에 불려가 옥고를 치렀다. 이때 최명길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혔는데 두 사람은 벽을 하나 두고 서로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악역을 자처한 우직한 참모
: 최명길은 인조에게 전적인 충성을 보였지만 옳지 않다고 여길 때는 바른 말도 할 줄 아는 충신이었다. 군주를 진정으로 아끼는 그의 충성심은 군주의 잘못조차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직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최명길은 명분론의 허상을 단숨에 깨어버린 현실 정치가였다 아니, 세상을 똑바로 볼 줄 아는 당시에 몇 안 되는 선각자였다. 인조 역시 명분론에 휘둘린 나약한 군주지만 그가 가장 잘한 일 한 가지를 꼽는다면 '최명길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성스런 신하들 속에서도 최명길의 손을 끝내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8. 채제공, 군주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다 - 정조를 위해 벼슬마저 던진 '동고동락의 리더십'
정국의 핵폭탄 금등문서가 나타나다
: 영조는 당쟁을 �어해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자신이 당쟁에 휘말려 사랑하는 아들을 뒤주에 가뒤 굶겨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밤중에 도승지 채제공과 사저에 있던 세손(훗날 정조)을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사초를 기록해야 할 사관마저 내보낸 뒤 은밀하게 몇 마디를 당부했다. 말을 마친 영조는 한통의 글을 도승지에게 주면서 자신의 첫 왕비인 정성왕후 서씨 신위 및에 있는 요 안에 넣어두게 했다. 이것이 바로 금등(金藤)분서다. 이 문서는 핵폭탄 같은 파괴력을 갖고 있음에도 무려 31년간이나 정조와 채제공의 가슴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런 비밀을 담도 있는 문서가 사도세자 사후 30년이 넘어 갑자기 그것도 당시 중요한 목격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영의정 채제공에 의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냥 덮어두면 자신도 정국도중요하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채제공은 영의정이 되자마자 공개한 것이다.
정조를 위하여 스스로 폭탄이 되다
: 금등문서가 공개된 배경과 역사의 진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정조의 화성 건축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정조는 화성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재위 기간 내내 탕평책으로 조정의 갈등을 잠재워왔지만 노론이 주류를 차지한 정치권을 개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성은 단순한 신도시가 아니라 자급자족이 가능한 준수도에 해당하는 특별 도시였다. 이 때문에 도성 천도 소문이 번지고 정조의 친위 쿠테타에 대한 우려가 조정 재 노론들의 관심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화성을 건설하고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배치했다. 1793년 1월 16일 정조는 드디어 수원화성을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조야에선 정조의 의도를 묻는 여론의 압박이 거세졌다. 여기서 밀리면 사도세자처럼 죽음을 맞거나 정치적으로 죽음 목숨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정조는 화성유수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숙종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영의정에 오른 채체공은 사도세자 문제를 공식저으로 거론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자고 상소를 올렸다. 노론은 현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책임 때문에 목숨을 건 정치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정조의 지지 세력도 정치 생명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 그런데 돌연 정조는 양쪽의 책임을 물어 노론의 영수 김종수와 영의정 채제공의 옷을 벗겨버렸다. 그러나 정조는 1793년 8월 8일에 채제공을 옹호하며 그가 왜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죽음데 대한 억울함을 밝히고자 했는지 알리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정조의 오른팔인 채제공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여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정조는 기존 정치권들이 화성에 대해 시비를 걸면 자신도 금등문서로 사도세자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결국 이 일은 노론 측의 화성 축성에 대한 미미한 반대로 끝나고 말았다.
가난을 딛고 서민정치의 중심에 서다
: 채제공이 활약한 18세기는 서민들이 큰 가뭄과 홍수, 심각한 전염병에다 가혹한 세금에 짓눌려 신음하던 시기다. 채제공은 이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관록을 발휘했다. 사실 그는 정치가로서만 우수한 것이 아니라 행정가로서 또 서민경제의 보호자로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조선 최고의 경제정책가로 자리매김하다
: 채제공은 영조 19년(1743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56년간을 관직에 머물면서 내외직의 관료 경험을 쌓았으며, 조선조에서는 보기 드문 현장 출신 관료라 할 수 있다.
군주의 지팡이가 되다
: 채제공이 정조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767년에 그가 세손의 우빈객으로 공시당상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채제공은 적지 않은 파란의 삶을 겪었다. 정조를 임금으로 세우는 데 공헌한 홍국영이 파직당하면서 채제공도 함께 내몰리게 되어 8년이나 야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채제공은 다시 한번 서민들의 살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이 빈궁하니 백성의 빈궁함이 보인다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이 경험을 다시 조선 경제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꿀 것은 반드시 바꾼다
: 정조는 채제공을 우의정(정1품)에 제수함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자의 반열에 세웠다. 이때 채제공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6조 진언'을 만들어 올렸다. 1. 황극, 곧 편파가 없는 곧고 바른 치국의 도리르 세울 것 2.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3. 당론을 없앨 것 4. 의리르 밝힐 것 5. 백성의 어려움을 돌볼 것 6.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정조는 채제공을 개혁의 기수로 세우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해낸다. 정계에서 소외돼온 남인과 북학파를 대거 기용했는데, 이는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실시한 것이며 채제공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790년에 채제공은 다시 좌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삼정승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이었다. 채제공은 흔히 독상(獨相)이라고 하는 나 홀로 정승 시절을 3년간이나 보낸 것이다. 채제공에게 1791년은 아주 중요하고도 힘든 한 해였다. 이른바 '진산사건'이 계기가 되어 '신해박해'가 발생했고, 채제공이 '신해통공'이라는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두가지 사건이 그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진산 사건이란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것을 말한다. 유교 국가 조선에선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가 채제공과 같은 남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일로 채제공은 한때 파직되었고, 후일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으로 1801년 신유박해라는 전대미문의 종교박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또하나의 기록할 만한 사건은 '신해통공'이다. 그해 채제공은 숙종 때부터 유지해오던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이다. 누구나 시장에 들어와 마음 놓고 장사하라고 길을 터준 것이니 서민들로서는 손뼉을 치고 환영할 일이나 노론은 돈줄이 끊어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연히 그를 시기하고 반대하는 세력이 늘어났다. 채제공은 이런 정치적이고 개혁적인 노림수와 함께 국고를 축적하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매사업의 확충이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다
: 조선의 정치는 군주 중심의 절대 전제정치 체제였다. 권신의 생명은 군주의 신임이니 많은 사대부들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서라도 군주에 대한 충성을 정치 철학의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실시된 이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런 체제하에서도 오히려 군주보다 붕당과 영수와 기득권 체제 유지에 목숨을 걸었다. 따라서 붕당에 속한 관료들로서는 군주라는 절대적인 자리도 자신들이 사사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력의 부산물로 보는 경향마저 있었다. 채제공은 붕당정치의 한 원인으로 전량법을 예로 들려 이를 철폐하도록 정조에게 요청했다. 전랑법이란 전랑천대법이라도고 하는데, 문관의 인사권을 관장하는 이조와 무관의 인사권을 관장하는 병조를 전조로 합칭하여 무소불위의 관료선발권을 갖게 한 것을 말한다. 곧 관리의 선발을 전담하는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전랑으로 합칭한 것으로 전랑의 임직은 주무부서 장관인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도 간여하지 못하고 전랑 스스로 후임자를 천거하도록 되어 있기에 자신의 붕당의 이익을 따라 줄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서 말 잘 듣고 붕당의 이익을 잘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로 요직을 채우는 폐해가 만들어졌다. 정조는 안 그래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기에 전랑제를 철폐하도록 하여 노론 측이 대를 이어가던 전랑 독직을 막아버렸다. 이로 인해 노론 측은 채제공을 제거 대상 1호로 여겼고, 그에 대한 견제가 휠씬 심해졌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정조의 보디가드
: 채제공은 이미 영조 시절부터 �운 신임을 받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으며 정조를 지켜준 든든한 버팀목이자 경호실장이었고, 정조의 오른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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