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금이야기], 전태영, 생각의 나무, 2005, (160207).

바람과 술 2016. 2. 7. 08:05

머리말

1. 토지세의 성립, 고대 이집트

2. 기부문화의 시초, 고대 그리스

아테네인들은 세금징수업무를 민간이 세금징수업자에게 의존하였다. 각종 세금은 매년 최고가로 입찰하는 사람에게 경매되었는데, 이는 행정조직이 취약했던 고대국가가 정부의 수입을 확보하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입찰액은 징수업자의 비용과 이윤을 고려해 정해졌지만 세금수입의 변동이 심했기 때문에 이 사업은 위험이 높은 벤처사업에 속했다. 문제는 징수업자가 납세자를 수탈하는 경우이다. 낙찰금액이 높을수록 업자가 납세자에게 세금을 더 뜯어내곤 했기 때문에, 징수업자는 미움을 받았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감독할 필요가 생겼다. 세금의 징수에는 계약자, 보증인 및 징수인이 필요했다. 세금징수권을 수주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했으므로 회사조직이 형성되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그리스인들이 선택한 방법은 부유한 사람은 큰 재정적 기부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명예를 얻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부유한 시민의 공적인 의무(liturgy)'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말은 '공공복지를 위한 부유한 시민의 기부금'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부자들은 축제를 베풀었다. BC 4세기경에는 아테네 전체 인구의 4%가 기부금을 제공하는 부자 계층에 해당했다. 그리스인들의 공공서비스는 부자들의 의무였고, 매우 규모가 컸으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요즘의 기부행위와는 차이가 있다. 다만 당시에는 아테네의 법원이나 집회에서 자신이 수행한 공적의무에 대해서 자랑하고, 그의 정적이 의무를 회피한 것을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부자들의 기부는 재산의 규모에 비례했다. 3달란트(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대략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함) 이하의 재산을 가진 사람은 기부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기부를 행한 사람의 이름은 기념비에 기록되었다. 그중 축제에 관한 기부금(choregia)은 가장 중요한 일어었다. 아테네의 축제는 매우 잦았을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들었다. 체육행사에 관한 기부금(gymnasiarchy)을 제공하는 사람은 운동선수들이 몸에 바를 기름과 영영가 있는 음식, 그리고 대회장의 치장과 각종 예비행사를 준비했다. 이런 비용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성급하게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아테네인들은 이런 의식을 통하여 종교적이고 지역적인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사회를 유지 가능한 상태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그리스에서 부자들은 전함을 관리하는 책무(trierachy)를 맡고 있었다.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전함의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은 적은 경비가 아니었다. 전함을 건조하고 장비를 갖추는 비용, 승무원의 식량과 1년간 30미나(mina) 정도의 급여를 국가에게 지급했다. 그 이외의 모든 비용은 전함을 관리하기로 정해진 민간인이 부담했다. 전함의 유지를 위한 기부금은 전함의 장비와 관리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 의무를 맡은 사람은 배정받은 선박에 동승하거나 대리인을 보냈다. 일을 나태하게 하면 감옥에 보내지지만 반면 자신이 맡은 배를 가장 먼저 진수시키거나 수행능력이 뛰어난 경우에는 표창장이 수여되었다. 전함을 관리하는 의무기간은 1년이었다. 그 기간이 지나면 2년 동안은 쉴 수 있지만 이 특전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함을 맡은 사람은 선장과 군인의 급여, 장비구입 비용 등에 해당하는 돈을 국고로부터 받았지만 간혹 전함을 맡은 사람이 국가로부터 받아야 할 물품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국가가 제공하는 선박의 상태가 좋지 못할 때도 있었다. 클레온은 그의 정적을 다음과 같이 위협하고 있다. “그에게 낡은 선박을 배정받도록 할 것이고, 수리를 위해서 엄청난 돈을 쏟아 붓게 할 것이며, 썩은 돛대를 배정받게 할 것이다.” 선체는 제공되었지만, 배를 수선하고, 돛대를 갈고, 장비를 제공하여 선박을 항해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은 책임을 맡은 이의 몫이었고 여기에 드는 비용 또한 책임자가 감당해야 했다. 아폴로도루스의 경우를 보면, 그가 전함을 인수했을 때 선원의 수는 적었고 그나마도 튼튼한 사람이 없었다. 정부에서 선원들의 급여를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비용으로 선원들을 새로 고용했다. 그는 선박에 장비를 제공했고, 이것은 나중에 후임자에게 임대했다. 이 시기에 개인비용으로 선박의 장비를 제공한 사람은 후임자에게 새로운 장비를 가져오든지 혹은 기존의 것을 구입하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BC 357) 나중에 전함을 책임질 사람이 충분치 않자, 그 의무는 집단을 단위로 수행되었다. 대체로 60명 단위로 집단이 구성되었는데, 부유한 사람들은 대리인에게 1달란트를 주고 자기 대신 이 일을 시켰다. 그리고 모든 다른 공공의무로부터 면제되는 특권을 누렸다. 이러한 집단 부담방식은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부자들은 재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만 부담하면 다른 의무가 모두 면제되었지만 재산이 적은 사람들은 계속되는 수행으로 점차 몰락해 갔다. 이 방식은 재산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의 부담액이 동일했기 때문이다.(BC 357~340) 해군 사령관이었던 데모스테네스는 뇌물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도입했다.(BC 340) 그의 방식에 따르면 전함에 관한 의무는 10달란트의 재산액을 기준으로 했다. 그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은 책임도 점차 늘어서 전함 3척과 보조함 1척을 의무의 한도로 정하고 있다. 10달란트 이하를 가진 사람은 집단을 만들어 이 의무를 수행하게 했는데, 덕분에 가난한 계급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어서 전쟁기간 동안 아무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 신전으로 도망치는 사람도 없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리스의 제도는 문제가 많은 것 같아 보인다. 그것은 부유한 시민의 기부로 도시를 영화롭게 하고, 전쟁에서 국가를 방어하는 제도이다. 사실 이 일은 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통해 도시의 재정부담을 담당하겠다는 선한 동기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이러한 제도는 낭비와 자기 과시, 허영 등의 속물적인 것으로 변질돼 갔다. 후기로 갈수록 그것은 부유한 계층에 대한 지속적인 부담이 되었고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는 부자를 고발하고 비난하는 아테네의 밀고자들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결국 아테네의 공공재정은 건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난다. 이것은 부자들의 희생 위에 기초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에 대한 세금은 초과이윤세의 성격으로 좀더 공정하게 운영되었어야 했다. 유산세가 없는 상황에서 아테네인들은 부자들이 국가공영에 기여할 방법을 이런 식으로 찾았던 셈이다.  


아네테 시민에게는 직접세가 부과되지 않았지만 외국인, 노예, 그 이하의 계층에게는 사람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들은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했고, 드럴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신체에 세금이 부과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에서 외국인은 세금부담 없이 일정기간 동안 거주할 수 있었다. 만약 외국인이 일정기간 이상 체류하면 국가의 보호 하에 있는 귀화 외국인(metic)으로 간주돼 보호비 명목으로 세금을 내야 했다. 아테네에 있는 많은 외국인들은 도시의 특권과 생활을 공유했고, 국가의 상업과 산업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권은 세금(metoekion)을 세금을 납무함으로써 향유될 수 있었다. 세금의 액수는 남자에게는 연간 12드라크마, 남편이 없거나 일하는 아들이 없는 여자에게는 6드라크마였다. 이 세금은 대략 일반시민의 12일치 소득과 일치했다. 외국인 등록을 하지 않거나 세금을 내지 않은 자는 노예로 팔린 것을 보면 아테네인들은 이 세금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고 같다. 먼저 개인당 부담액이 컸다. 가난한 외국인에게도 면세되지 않았고, 부유한 외국인들은 그 이외에도 전쟁시에 부과되는 특별세나 축제에 대한 기부금 등도 납부해야 했다. 외국인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시민들보다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에 숨어 있다. 또 외국인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전체 금액이 매우 컸다. BC 431년 경우의 외국인 수는 대략 2만4,000명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이 납부한 돈은 48달란트로 전체 예산의 약 10%를 차지하는 금액이다. 아테네가 주로 의존하고 있던 간접세는 소비수준에 따라 수입의 변동이 심한 데 비해 이 세금은 거의 고정적이어서 재정에 보탬이 되었다. 크세노폰은 BC 445년의 양곡배급대장 조사에서 불법적으로 배급을 받은 외국인 수천 명이 노예로 팔린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기여만 하고 국가의 부담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민이나 구제기금 수혜자들과는 분명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BC 5~4세기에 아테네는 그리스, 시칠리아 지방의 무역중심지였다. 그곳에서는 노예의 수입과 수출에 세금을 내게 했다. 노예수입 2%, 가산세 1~2%, 노예수출세 2% 이렇게 세 가지 세금이 부과되었다. 아테네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 중 부유한 자는 노예를 대동하는데 그 노예가 들어올 때 수입세, 나갈 때 수출세를 각각 부담했던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재판을 통해서 큰 수입을 벌어들였다. 아테네의 재판관할권이 동맹국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아테네에서 재판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수수료 수입도 점차 늘어났다. 그들의 동료나 동맹국의 시민들이 아테에에서 소송을 제기할 때 재판 당사자는 법원에 보증금(prytaneia)을 걸어야 한다. 승소한 사람은 자신의 보증금을 돌려받고 패소한 사람은 상대방의 몫까지 부담했다.  


3. 실용 중심의 고대 로마


줄리어스 시저는 변방이 평화에 이르는 길은 무거운 과세를 통한 약탈행위가 아니라 가벼운 과세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전임자들처럼 패배한 도시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시저는 이러한 관대한 정책으로 지역민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 그는 세금징수업자들이 전년도에 거두어들인 세금의 1/3을 주민들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그는 세금징수업자를 배제하고 각 도시에서 직접 세금징수액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시저의 세금 징수는 유연했는데, 협의된 금액은 작황이 나쁠 경우 재협상이 가능했다. 이러한 관대한 세금정책 때문에 유대인들은 시돈에 있는 시저의 보급창고를 가득 채웠다. 150년 만에 처음으로 로마와 동방의 속주와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나아가 시저는 아시 도시들이 세금징수업자들을 고용하지 않게 도와주었는데 각 도시의 세금부담이 1/3 정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 이후 아시아 도시들은 분명 세금을 적게 냈으며 징수업자가 아닌 시저에게 납부했다. 이것은 징수업자를 배제한 채 그 이익을 로마의 지배자와 지역의 지배자가 나누어 가지는 형태이다. 시저는 이 수업을 가비니우스에게 배웠다. 다만 이 제도를 제국 전체에 확산시킬 중앙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시저는 기사계급의 지도자를 귀족적인 예의로 대우했고 그들을 위한 기회를 제공했으며, 재정적, 정치적 직위에 기용했다. 세금징수업자들은 로마에 장기간 봉사했다. 그들은 비교적 유능한 편이었지만 점차 권위가 사라지면서 기사계급의 중요한 위치를 상실해 갔다. 그러나 시저가 암살됨으로 이러한 평화는 끝나고 말았다(BC 44). 시저의 죽음은 동방의 세금문제를 다시 한 번 어둡게 했다. 암살자인 브루투스는 각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뺏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았고, 저항하는 도시의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런데 브루투스를 패배시킨 안토니우스는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내전에서 브루투스를 지지한 도시에게 2배의 세금을 요구했으며, 특히 그리스로부터 돈, 노예, 가축, 곡식을 모두 걷어갔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이끈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주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 놀라, 군대를 위해 보관해 두었던 모든 곡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에 준 곡식은 환영받았고, 그 이후 그가 세계에 가져온 로마의 평화와 세금의 축소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 


4. 이슬람의 흥망

이슬람에 있어서의 성전(지하드)이란 기독교의 십자군 운동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교도와 싸우다 죽은 사람은 거룩한 사명을 위해 죽은 것이었다. 마호메트는 정복자로서 메카에 돌아왔고 2년 뒤에 죽었다(632). 그때까지는 많은 아랍인들이 이 새 종교의 소식조차 듣지 못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과 1세기 뒤에 저 멀리 떨어진 프랑스에서 샤를 마뉴 대제가 이슬람교도와 싸워야 했고, 비잔틴제국은 오직 생존을 위해 그들과의 싸움에 주력해야 했다. 그리고 동쪽의 인도까지 이슬람 군대는 성난 물결처럼 밀어닥쳤다. 이슬람의 정복자들은 기독교도와 유대인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같은 일신교도요, 성서의 민족들로 간주했던 것이다.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이 통치하던 지역을 점령한 직후 기존의 통치방법을 그래도 인정했다. 점령된 지방마다 다른 법률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랍인들은 옛 관습을 그대로 존중했던 것이다. 새로운 정부를 인정한 아랍인들은 국유지만 접수했다. 국유지가 아닌 개인 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몰수된 땅은 등록되고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무슬림은 아라비아 밖에서 토지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국유지도 불하받을 수 있었다. 아라비아 밖의 무슬림 지주들은 토지세를 납부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자 10%도 안 되는 명목적인 세금을 납부케 했다. 통치자가 비잔틴에서 아랍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현지 주민에게 매우 환영받았다. 주민들이 새로운 멍에가 옛것보다 훨씬 가볍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리아와 이집트의 기독교인들도 비잔틴보다는 이슬람의 지배를 선호했다. 당시 어떤 시리아 역사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슬람의 지배는 우리를 로마인(비잔틴)들의 잔인성과 증오로부터 구원해 준 것일 뿐이다 ….” 피정복인들은 이슬람을 새로운 통치자로 받아들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이 아랍 침공자에게 도움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일정기간 세금을 면제받았다. 또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아랍 군대의 수비도시는 주로 사막 근처에 있었다. 그들은 사막에 익숙했기 때문에 보급로의 확보나 비상시의 후퇴에 사막을 활용하고자 했다. 세공업자, 상점, 서기, 인부들이 지배계층의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이동은 비아랍인 농부들에게 부과된 무거운 세금이 원인이었다. 또한 아랍 점령자들에게 현물로 지급된 세금이 대규모로 방출되는 바람에 도시지역 농산물의 가격이 매우 싸진 것도 원인이었다. 아랍인들은 토지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지 않았지만 종교세(소득의 10%)는 냈다. 토지는 아랍인이 아닌 소유자로부터 사든가 국가로부터 불하받는 방법으로 취득되었다. 비잔틴 지주들이 패퇴하는 제국군대를 따라서 토지를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이 땅을 경작하고 세금을 걷기 위하여 칼리프들은 그들이 가족이나 다른 저명한 아랍인들에게 토지를 임대했는데, 임차인들의 수확의 10%를 납부해야 했다. 지주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지에 거주하지 않았고 도시에 살았다. 우마이야 왕조 통치기간에 이집트에 있던 아랍인은 3,000명 정도였는데,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죽는 순교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유한 지주계급이었다. 이들의 부는 무역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메카의 상인계급도 상업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 시대의 경제는 주로 화폐경제였다. 군인과 관료들은 급여를 현물과 함께 화폐로 지급받았고 세금도 같은 방식으로 징수되었다. 충분한 은화와 금화가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의 주변에 마왈리라고 불리는 새로운 계층이 모여들었다. 마왈리는 ‘이슬람으로 전향한 비아랍인’을 뜻한다. 일부 마왈리 지주들은 무슬림에게 적용되는 낮은 세율을 적용받았지만 보통을 혜택을 얻지 못했다. 군대에 지원한 마왈리는 이슬람 군대의 보병으로 최일선에서 싸웠다. 그들은 기병인 아랍인보다 낮은 급여를 받았고, 사회적으로도 낮은 대우를 받았다. 아랍 여자와 마왈리와의 결혼은 놀라운 뉴스거리였다. 마왈리의 수적 증가는 국가적으로 큰 경제적 문제를 낳았다. 아랍제국의 구조는 세금을 내지 않는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하는 형식이었다. 따라서 마왈리의 증가는 세금 수입의 감소를 뜻하는 것이었다. 압둘 말리크 시대에 이르러 비아랍인들이 이슬람으로 전향하는 것을 억제하는 정책을 편 것을 볼 수 있다(692). 코란의 평등원칙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사회에서는 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인 아랍인들은 특권을 가진 귀족층을 형성했고, 특권을 개종자들과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 때문에 우마미야 왕조에 사회적 혼란이 생겨났다(8세기). 이슬람 사회에서 개종은 열등한 지위를 뜻했다. 낮은 계층의 가난하고 무식한 개종자는 알카리파와 바스라 등의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천한 직업밖에 기대할 수 없었지만, 시골에 거주하는 경우 개종하더라도 토지세는 면제되지 않았기에 토지세가 면제되는 도시지역으로 몰렸다. 이런 이유로 도시에는 많은 개종자가 있었고, 무슬림은 그들을 조소와 경멸로 대했다. 당국은 그들을 관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인두세를 과세하고자 했다. 도시지역에 소요가 발생하면 이들이 가장 큰 위험 요소였기 때문이다. 한편 개종자가 지식과 능력이 있거나, 귀족층에 속하거나 하면 그의 위치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부유함과 저명함이 보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상위 계층에 속한 전향자는 불평할 일이 없었다.


마호메트 가족의 일원만이 칼리프로 추천되기를 바라는 당파를 '시아파'라 불렀는데, 그들은 코란지상주의자였다. 그들에 대항하는 종파는 전통을 중시하는 '순니파'로, 칼리프를 마호메트의 혈족이 아니어도 선출하기를 원했고, 주석서로 코란을 보충하고자 했다.  


5. 중세기의 프랑스

중세의 세금은 반드시 납세자와의 상의를 거쳐야 징수가 가능했다. 중세의 정부는 주민의 수와 재산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지 못했는데, 이는 세금대장을 관리할 충분한 수의 관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있는 화로의 수는 세금을 매길 때마다 조사했고, 지주의 소득이나 부는 지주나 그의 이웃과 상의함으로써 결정할 수 있었다. 유대인에게 부과된 세금은 유대인 자신에 의해서 자치적으로 징수되었다. 대체적으로 화로세가 재산세로 바뀌어갔다. 


6. 근대 이전의 영국

16세기 영국에는 두 종류의 재산세가 있었다. 납세자와 동산 및 상품 평가액의 1/15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과 부동산 임대료 의 1/10을 납부하는 것이다. 이 세금으로 영국 전체에 걸쳐 3만 파운드이 세금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다. 각 지역의 납세자들은 할당된 금액을 납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일한 금액을 수세대 동안 납부해왔으며, 세금징수는 그 지방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매우 더디게 징수되었기 때문에, 왕실은 세금을 받기 위해서 때로는 2년을 기다려야 했다. 영국인들은 이 세금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의 세금이 얼마인지 알 수 있었고, 부당한 압력이 없었으며, 국왕의 관리가 징수과정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7. 제국의 흥망, 그리고 세금

8. 스페인의 붕괴

9. 낡은 제도와 혁명

10. 근대의 영국
11. 세금으로부터 자유와 독립
12. 고구려부터 조선까지의 조세제도
13. 세금의 새로운 역할

맺음말
조세용어해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