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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이 돌아온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 권순모/이진경 옮김, 그린비, 2019, (200109).

바람과 술 2020. 1. 9. 08:03

옮긴이 서문(권순모)

0. 마침내 봉기가 도래했다

스스로를 조직화한다는 것은 동일한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을 뜻한 적이 없다. 스스로를 조직화한다는 것은 어떤 층위에서건 공통의 지각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처에 있다면 우리가 군단이라면, 이제부터 우리는 세계적으로 우리를 조직화해야 한다.


1. 메리 크라이시스crisis 앤드 해피 뉴 피어fear!

□ 위기는 통치 양식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의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위기 자본주의의 승리를 경험하고 있다. ‘위기’는 통치의 증가를 의미한다.


□ 진정한 파국은 실존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어느 시대나 오만하다.


실제로 서구 문명의 종말이라는 임상진단이 내려지고 여러 사건들이 거기에 나란히 서명한 것은 한 세기쯤 전의 일이다. 그 이후로 그것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는 방식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특히 지금 여기 있으며 오래전부터 있었던 파국으로부터, 우리 자신인 파국, 서구 자체인 파국으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방식이다. 이 파국은 우선 실존적이고 정서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머저리 카뮈가 단도직입적으로 시인한 것처럼 “인간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세계에 인간의 인장을 찍는 것이다”. 서구의 모든 묵시록적인 것의 기만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할 수 없는 애도를 세계에 투사하는 데 있다. 사라진 것은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잃어버렸고 끊임없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곧 끝날 것은 세계가 아니다. 끝장나고 절단되고 삭제된 것은 바로 우리이다.


인간은 세계에 대한 특유의 재앙적인 관계로 인해 발생한 재난을 언제나 동일하게 재앙적인 방식으로 대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인간은 방산이 사라지는 속도를 계산하고 비-인간 생명체들의 멸종을 측정한다. 인간은 우주에서 지구상의 생명의 감소를 관찰한다. 오만이 극에 달해, 정작 환경은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자기가 이제 아버지처럼 ‘환경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재난은 우선 훨씬 더 명백하고 대대적인 다른 참상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후쿠시마는 인간과 인간의 지배가 야기하는, 폐허만을 낳을 뿐인 이 완전한 파탄의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극좌파에게 혁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적인 것을 중심에 놓는 것’이라고 서둘러 대답한다. 이 좌파는 세계가 인간적인 것에 얼마나 지쳤는지, 우리가 인류-자신을 만물의 보배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황폐화시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종(種)-에 얼마나 지쳤는지 모르고 있다. ‘인간적인 것을 중심에 놓기’는 서구의 프로젝트였다.


□ 묵시록은 실망을 안겨 준다


정치 조직이든 종교 조직이든 어떤 조직도 사실이 자신의 예언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패를 인정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예언의 목적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즉 지금 여기서 기다림, 수동성,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저들은 우리에게 통치하라고 강요하지만, 우리는 그 사주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 현대 봉기의 특징


봉기는 우선 아무것도 아닌 자들, 카페에서, 거리에서, 일상에서, 대학에서, 인터넷상에서 배회하는 자들이 하는 일이다. 주변적이라거나 낙오되었다거나 미래가 없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중심으로 되돌아온다.


대표자를 맞아들일 만큼 동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까지 관찰자들에게 포착되지 않은 새로운 혁명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민’이 거리로 나왔다고 말할 때 사전에 인민이 실존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전에 인민은 없었다. ‘인민’이 궐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전에 인민은 없었다. ‘인민’이 궐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사라졌던 공통의 경험과 지혜, 실생활의 언어와 인간 조직을 되살림으로써 궐기가 인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과거의 혁명은 새로운 삶을 약속했지만, 현대의 봉기는 새로운 삶의 열쇠를 가져다준다.


누구도 마주침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봉기는 지구, 단체, 무단점유지, 사회복지센터, 개별 존재들의 삶 속에서 지각불가능하게 분자적으로 연장된다. 혁명가들은 대체로 혁명이 일어날 때 가장 많이 놀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현대의 봉기에는 혁명가들을 특별히 당혹케 하는 것이 있다. 현대의 봉기는 더 이상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시작하지 않고 윤리적 진실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 민주주의적 봉기는 없다


대중 궐기가 일어나서 전날까지만 해도 각국 대사의 예우를 받았던 폭군을 쓰러뜨릴 때마다 그것은 인민이 ‘민주주의를 열망하기’ 때문이라는 서구의 레토릭은 놀랍지 않다. 사람들이 폭군에 맞서 싸운다고 해서 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선거는 봉기를 침묵시키기 위해서 군대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도구였는데, 이는 봉기한 사람들이 다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회 같이 진부하고 뻔한 조직화 형식이 그토록 열광적인 숭배를 받았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정서의 본성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예측 가능한 절차에 따라 처리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의 한계를 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기를! 상황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기를! 누구도 자신이 속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다수와 노골적 갈등상태에 있다고 느낄 수 없기를! 누구나 자신의 힘에 기대지 않고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강요되지 않기를! 이러한 목적을 위해 집회의 다양한 장치들-발언 순번제부터 무언의 박수갈채까지-은 일련의 독백 외에는 다른 껄끄러운 것이 없는 완전히 솜털 같은 공간을 조직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위해 서로 싸을 필요성을 제거한다.


민주주자가 그 정도로 상황을 구조화하는 것은 상황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가 상황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봉기가 결코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이유는 바로, 봉기는 곧 권력이 벌거벗은, 진실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 민주주의는 순수한 상태의 통치일 뿐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게 통치가 이루어진다.


17세기 이래로 서구에서 끊임없이 전개된 것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특수한 권력 형식으로서의 통치이다. 그것은 과거에는 국민 국가의 건설을 통해 전개되었고 지금은 국민 국가의 붕괴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 두려움 없이 국민 국가의 녹슥 낡은 상부구조가 붕괴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상부구조가 저 고명한 ‘협치’를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통치로서 권력은 끊임없이 진화하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권력을 국가, 법, 규율, 주권 등의 형태로 생각하고 있는 결과이다. 권력이 기체 상태까지는 아니어도 액체 상태로 변한 지는 아주 오래됐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고체 상태의 권력을 찾고 있다.


선거에 특별히 민주주의적인 것은 없다. 선거가 민주주의적이라면, 그것은 물론 사람들의 통치 참여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금 선택을 했다는 착각을 일으켜서 통치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이다. 마르크스는 “민주주의는 모든 국가 형식의 진실”이라고 썼다. 마르크스는 틀렸다. 민주주의는 모든 통치 형식의 진실이다.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상호 흡수, 그것은 더 이상 어떤 형식도 어떤 한계도 없는 순수한 상태의 통치다. 현대 액체 민주주의가 이론화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모든 고정된 형식은 순수한 통치의 행사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 해체 이론


아르헨티나에서 터져 나온 “모두 물러나라!”는 구호는 정말로 전 세계 지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최근에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이런 탄식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혁명은 배반당했다. 과도 정부가 선거를 조직하고 제헌 의회가 새로운 헌법을 마련해서 새로운 선거 방식을 규정하면 그로부터 이전의 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새로운 체제가 태어날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이 달라지길 원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혁명이 어김없이 배반당하는 것은 운명의 장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혁명 관념 안에 혁명을 그런 운명으로 만드는 어떤 숨겨진 결함이 있다는 표시일지도 모른다.


권력을 수립(제도화) 또는 구성하는 것은 권력에 기반․근거․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거리에서 승리하는 것, 권력 기구를 부수는 것, 권력의 상징을 불태우는 것만으로는 권력을 해체할 수 없다. 권력을 해체하는 것은 권력의 근거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봉기가 하는 일이다. 이 시대의 권력의 특수한 형식을 해체하려면 우선, 민주적으로든 위계적으로든 자신에 의해서든 타인에 의해서든 인간은 통치되어야 한다는 공리를 가설의 지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통치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이 인간학과 그것의 허위 ‘사실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인간학을 바깥에서 파악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고, 다른 지각 면을 긍정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실제로 다른 면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통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치적으로 반대 가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공백은 없다. 


3. 권력은 병참술이다. 모든 것을 봉쇄하자!

□ 권력은 이제 인프라에 있다


권력의 실제 소재에 관한 진실은 전혀 감추어져 있지 않다. 권력은 이제 이 세계의 인프라에 있다. 기존 세계에 반하는 무엇이건 해보려고 하는 사람은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권력의 진정한 구조는 이 세계의 물질적․공학적․물리적 조직화라는 것에서 말이다. 통치는 더 이상 정부에 있지 않다. 권력은 이제 사물의 질서 그 자체이고, 경찰은 그것을 수호하는 일을 담당한다.


□ 조직화와 자기-조직화의 차이에 대하여


일상적 삶이 언제나 조직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도시부터 시작해서 삶을 해체해야 했다. 모든 코뮨에 동반되는 기쁨이 거기서 생겨난다. 삶은 돌연, 연결된 토막들로 분해되는 것을 멈춘다. 자는 것, 투쟁하는 것, 먹는 것, 건강을 돌보는 것, 축제는 벌이는 것, 음모를 꾸미는 것, 토론하는 것이 모두 하나의 생명(삶)의 운동에 속한다. 모든 것은 조직화되지 않고 스스로를 조직화한다. 차이는 현저하다. 하나는 관리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주의를 부른다.


□ 봉쇄에 대하여


문명은 대체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고도화 단계에 도달할 때 봉괴된다. 각각의 생산 공정은, 그 중 하나만 사라져도 공정 전체가 마비, 아니 파괴될 정도로 수많은 중간단계로 세분화된 고도 전문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방사능 핵물질과 보이지 않지만 중금속이 쌓여갈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 시스템을 봉쇄(차단)하려는 모든 시도, 모든 운동, 모든 반란, 모든 궐기를, 시간을 멈춰 세우고 덜 치명적인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수직적 시도로 보아야 한다.


□ 조사에 대하여


투쟁이 나약하기 때문에 혁명 전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혁명 전망이 부재하기 때문에 투쟁이 나약한 것이다. 혁명 전망은 더 이상 사회의 제도적 재조직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세계의 기술적 조형에 관한 것이다. 


4. 구글, 꺼져버려fuck off!
5. 종적을 감추자
6. 우리의 유일한 조국: 유년기
7. 모든 것은 공유물이다
8. 오늘은 리비아, 내일은 월스트리트

옮긴이 후기: 혁명의 무당들이 불러낸 것들(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