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현대 의학의 선구자 하비], 졸 쉐켈포드, 강윤재, 바다출판사, 2006.

바람과 술 2008. 6. 15. 05:53

2007년 6월 9일 읽음.

 

1. 셰익스피어 시대의 젊은 의사

 

월리엄 하비는 도버에서 멀지 않은 영불 해협의 작은 어촌 포크스턴에서 태어났다. 포크스턴은 로마 시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도시로 상업의 최적지였다. 이곳에서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합법적 해운업은 물론 밀수업도 성행했다.

 

최상의 교육이 시작되다

: 1600년 경에는 영국의 성인 남성 3명 중 한 명 정도가 글을 깨우쳤을 뿐이고,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보다 휠씬 드물었다. 귀족 소년들(가끔씩 소녀들도)은 대개 집에서 가정 교사를 두고 배웠다. 하비 정도의 사회 계급에 속한 소년들(상인이나 무역상의 아들들)은 대개 지역 학교나 중학교까지만 다녔다. 그들은 일찍감치 학교를 떠나 자신의 생계 수단이 될 직업의 도제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중류 계급의 소녀들은 대개 집에서 자습용 소책자로 공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토머스 하비가 윌리엄을 그런 엘리트 학교에 입학시킨 것은 맏아들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 원했기 때문이다.

대학 교육을 받다

: 원칙적으로, 중세 유럽에서는 주로 학습 능력에 따라 고등 교육 기관의 입학이 결정됐다. 그리고 가족과 교회의 관계가 가족의 재산보다 더 중시되었다. 그런데 헨리 8세가 1536년에 교회 개혁을 시작하면서 교회의 학자 지원금으로 사용했던 많은 수입원을 빼앗아갔다. 이때부터 대학 교육은 점차 학생의 재산, 귀족의 후원, 장학금 제도에 주로 의존하게 되었다. 하비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국에서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시기 영국 전체를 통들어 대학생의 수는 대략 3~4천 명에 불과했다. 또 그들은 대개 상류 계급이나 중류 계급에 속했고, 약 1/3은 학위를 받지 않고 대학을 떠났다.

하비가 살았던 16세기의 풍경

: 잉글랜드의 인구는 16, 17세기를 통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런 인구 증가는 노동 시장의 상대적 공급과잉, 농산물의 가격 상승, 토지 임대료의 상승 등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져 1600년 초반에 이르자 항상 식량이 부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반면에, 땅을 소유하고 있는 귀족들과 해외 무역과 전문직 종사하는 중류 계급들은 더욱 더 번성했다.

인체가 무대 위에 올려지다

: 중세 때까지만 해도 연극이 공연되는 무대는 시장통이었다. 16세기 후반이 되자 드디어 런던의 교외에 연극만 상연하는 상설 극장이 생겨났다. 씨어터가 1576년에, 커틴이 1577년에, 로스는 1578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극장들은 런던 시장과 의원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배우집단을 경종의 수단으로 여겼다. 하비가 살았던 시대의 극장은 오락장이자 무대로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었다. 고대에는 '극장'이라는 단어가 웅변과 놀이를 위한 장소라는 뜻을 지녔다. 그리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극장'이라는 말이 지도책의 제목으로, 또는 알려진 세계를 보여 주는 '극장'으로 흔히 사용되곤 했다. 반대로, 셰익스피어는 '모든 세계는 무대다(그의 작품 [뜻대로 하세요], 2장 7막)'라고 선언하면서 오히려 세상을 하나의 공연 무대로 보았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가 자신에게 맡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라고 보았던 것이다.

16세기의 교양 교육

: 고등 의학 교육을 받으려는 학생들은 천문학과 점성술도 배웠다. 당시의 의료 행위는 건강과 질병이 계절과 별들의 위치에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2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유럽 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가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구는 반복되는 침략과 빈번한 인구 이동으로 혼란하기 그지 없었다. 따라서 기초적인 교양 교육마저도 부실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재발견

: 13세기에 유럽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재발견했다. 그 후 그의 사상은 대학의 기초 교육, 특히 자연 철학(과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1600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하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세계를 사물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면서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는 과정리가고 본 자연관을 받아들였다.

중세의 대학 교육

: 논쟁은 중세 시대의 특징으로 대학에서도 중요한 교과 과정이었다. 논쟁을 중시하는 이런 학문 탐구 방법을 일명 '스콜라 방법'이라 한다. 당시의 대학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지식을 표현할 수 있는 '스콜라 방법'에 충실했다.

의학도 하비가 읽은 책들

: 갈레노스(129~216? 고대의 가장 유명한 의사이자 실험 생리학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유럽의 의학 이론과 실제 치료 과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동물 해부를 해부학의 토대로 삼았다.)가 임상 의학과 자연 철학을 종합해 확립한 이론은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의학은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기보다는 기교에 가까웠다. 하지만 갈레노스가 철학적 용어로 신체의 작동 및 질병에 대해 설명한 것은 의학이 철학의 한 분야(학자가 다룰 만한 가치가 있는)로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갈레노스의 이런 기초 작업은 중세 시대의 대학 교육에서 그 열매를 맺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의사와 의학저술가들은 기교로 취급받던 의학이 전문적인 학문 분야가 될 정도로 그 수준을 끌어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중세의 의학 교육

: 13세기에 대학이 출현하자, 네 개의 학과('학부'라 불렸다)가 설립되었다. 교양학부, 신학, 법학, 의학이 그것이다. 그리고 근대 초기(16~17세기)만 해도 대학을 나온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의학 교육을 받았다. 또 당시의 과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사상과 학문적 접근법에 사로잡혀 있었다.17세기에 유럽의 대학생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갈레노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통일성이 강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들은 유럽 어디에서나 배우고 가르칠 수 있었다. 또한, 대학에서 교육 받은 유럽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변증법적 스타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해부학자의 길로 들어선 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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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의 대중화

: 파도바 대학교의 의학 교육에는 임시 무대에서 펼쳐지는 해부학 시범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부학의 중요성의 커지고, 해부학 시범 회수가 잦아짐에 따라 무대를 만들었다 헐었다 하는 일이 성가시게 되었다. 그래서 파도바 대학교는 1584년에 유럽 최초로 실내 해부학 강의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런던에서 연극 전용 극장이 세워진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은 1594년에 파브리치우스는 이 강의실을 청중들을 위한 강의실로 개조했다. 이처럼 강의실과 극장이 역사적으로 동시에 탄생했다는 사실은 해부의 '목격'에 사회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징했다. 즉, 공개 해부는 의과 대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일반인들을 위한 사회적 행사이기도 했다. 하비의 시대에는 해부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해부학 강의실에 돈을 내고 구경 오는 저명한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한편, 해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관찰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비의 학문 체계

: 17세기의 이런 해부학 실습은 증인이 '목격'하여 인정하는 사실 체계를 기초로 한 과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논리적 증명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한 학문 분야의 경우, 이론의 토대인 과학적 사실 체계를 만드는 데 새로운 방법이 도입되었음을 뜻했다. 즉, 물리적 시범을 해보이거나 목격한 사람들 사이의 합의가 엄격한 논리적 증명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방법이 하비의 과학 연구에 스며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도바 대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전통이 끼치는 영향력이 유독 강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발전하여 실험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생체 해부에 대한 반대

: 고대의 의학 연구자들은 생체 해부가 생체의 작동 방식을 익히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16~17세기의 '화학적' 의사들(이들은 화학 이론을 기초하여 진단하고, 실험 방법과 전통적 약초 치료법을 통해 만든 약을 처방했다)은 인체 해부를 강조하는 대학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사체의 해부는 죽은 신체의 속성만을 보여줄 뿐이고, 생명체의 특징인 '생기 철학'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갈레노스를 뛰어 넘다

: 하비의 천재성은 갈레노스의 방법들(이것은 다시 파도바의 해부학자들에 의해 정교해졌고, 고도의 숙련도를 갖추게 되었다)을 인체 각 부분들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체계적 탐구와 결합시킨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배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을 모델로 한 것이다. 갈레노스는 인간을 알기 위해 동물을 해부했던 반면, 하비는 모든 동물을 알기 위해 인간과 동물을 해부했다.

런던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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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왕, 제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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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길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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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자리 잡은 하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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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쌓여 가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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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

: 잉글랜드의 경우, 대학을 나와 의사로 개업을 한 내과 의사는 엘리트였다. 반면에, 도제 생활을 하는 외과 의사는 장인으로 취급받았다.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는 상대방이 자신의 직업적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의 내과 의사였던 하비가 해부학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외과 의사의 도움으로 부검을 요청받았을 때는 예외였다. 다행히도 그는 왕립 의사회의 해부학 강사로 임명되면서 파도바에서 배운 지식을 계속 살려 나갈 수 있었다.

의사들을 위한 강의

: 1615년에 하비는 럼리 강좌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이 강의는 1581년에 럼리 경이 이발사-외과의사 협회에서 개최하는 강좌에 필적하는 일련의 외과 강의를 열고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강좌는 외과 의사와 내과 의사 모두를 위한 것으로, 영어와 라틴어로 진행됐다.

의료 엘리트가 된 하비

:1618년 2월 3일, 하비는 자리가 나면 정식 궁중 의사직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제임스 1세의 특별 임용 의사가 되었다. 대학 교육을 받은 하비와 같은 내과 의사들은 자신의 생계를 귀족 사회, 부유한 상인, 전문직 종사자, 건물 주인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계급들이 주로 내과 의사들의 마케팅 대상이었다. 하비가 공중 의사가 된다는 것은 유럽 의사들 중에서도 엘리트 그룹에 속하게 되고, 그의 출판물이 여느 의사가 쓴 저작물보다 휠씬 중요하게 다뤄질 것임을 뜻했다.

 

                                               2. 피의 순환

 

생리학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인체에 대한 생각을 바꿔 놓은 하비의 기념비적 저작은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연구]라는 얌전한 제목이 달린 책이다. 그렇지만 그의 책은 17세기라는 시대적 배경 탓인지 완전한 의학책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만약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연구]가 의학서라면 신체의 각 부분들에 대한 연구, 질병, 건강을 회복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치료법 등을 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았고, 심지어 당시 가르쳤던 방식대로 인간 해부학을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이 해부학책이라면 주요 장기들의 위치, 형태, 활용 가능성 등에 대한 연구가 실려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심장과 연관된 혈관들의 작동에 대한 폭넓은 관찰과 그에 대한 의견만이 실려 있을 뿐이다.

 

17세기 사람들의 심장에 대한 생각

: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심장 혈관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그것과 같았다. 즉, 심장과 혈관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각각 서로 관련이 없는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당시 의사들은 건강하려면 몸에 적절한 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책으로 간주된 하비의 저서

: 하비는 연구를 위해 네 가지 몸의 기본 요소들(심장, 폐, 동맥계, 정맥계)을 뽑아 내고, 그것들이 사실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서로 협력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이란 바로 피의 순환이다. 갈레노스의 가르침이 의학을 지배하고 있기는 했지만 의학을 포함한 모든 자연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그 주석들에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의학과 철학은 서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의학은 건강과 인간의 치료에 대한 것이었던 반면, 자연 철학은 자연 세계의 조직, 작동, 목적 등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인체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해부학과 생리학도 자연 철학에 포함되기는 했다.

실험 과정을 중요시 한 하비

: 하비는 자신의 책에 정맥 사혈 그림을 실어 모든 의사들과 대부분의 환자들의 일상 경험에 호소하고 있다. 직접적 관찰과 개인적 경험에 대한 호소라는 특징 때문인지 그의 책은 유럽을 가로질러 널리 퍼져 나갔다. 하비의 책은 어느새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에 심호한 변화를 일르키는 기초 교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즉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험의 활용이 '새로운 과학'의 초석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 책에서처럼 실험이 활용되는 방법은 계몽주의 시대에는 유럽의 여러 과학 학회들에서 채택되었다.

심장 혈관계에 대한 오해

: 하비는 인체 기관의 배열과 특성만이 아니라 전체 동물과의 관련성 속에서 심장의 기능을 연구했던 것이다. 하비는 비교 해부학과 생체 해부를 통해 심장과 혈관의 기능을 알아 내고자 했다. 그는 각 부분의 기능이 전체 구조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도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하비를 사로잡은 의문점들

: 하비는 모든 경우에 기능의 차이가 구조적 형태의 차이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있었다.

심장과 혈액 순환에 대한 새로운 발견

: 신체 기관의 구조와 기능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식의 접근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연구를 뒤따른 것이다. 사실 하비는 심장이 자연스럽게 피를 끌어들이는 능력을 지녔다는 갈레노스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피가 힘을 받아 중심(심장)을 향하고, 다시 심장에서 온몸 구석구석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자연과 인체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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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 순환의 중심,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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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의 심장 이론이 싹을 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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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맥과 정맥에 대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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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의 판막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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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노스의 이론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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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충성스러운 궁중 의사

 

하비는 20년 동안 왕을 모시는 의사로 지냈다. 그리고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의 내과 의사이면서 왕립 의사회의 회원으로서도 여전히 바빴다. 그런데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곤 했던 왕이 부르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자 하비는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1633년에 하비는 자주 자리를 비우는 자기를 대신할 보조 의사를 고용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병원 조직을 새로 짰다. 새로운 조직은 약제사들이 보조원을 두고, 외과 의사들은 더욱 내과 의사에 종속되는 체제였다. 결과적으로 병원의 조직은 휠씬 더 수직적 구조가 되었는데, 그 정점에 하비가 있었다.

 

왕실과 의회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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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의사가 된  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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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측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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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전과 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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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속에 꽃핀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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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당파의 패배와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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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에 대한 새로운 연구

: 생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연 철학자들이 흥미를 느끼는 주제였다.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 고대 최고의 권위를 누렸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는 유성 생식과 동물 및 인간 배아의 발생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다르다고 보고 있었다. 중세에서 하비의 시대까지, 학자들은 갈레노스의 입잡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갈레노스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은 각각 씨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리고 배아는 처음에 원시적인 간처럼 생긴 기관이었다가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성장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의 형상(모습)을 공급하는 것은 남성이고, 배아는 태생적 열(배아의 원시 심장에 있다)로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여성은 배아가 성장하기 위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즉, 여성은 배아에게 외부적 열원이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한 수동적 질료(물질)가 되는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발생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 특히 죽은 시체와 거름더미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연구 결과를 책으로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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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리학에 대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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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체를 구할 것인가

: 하비의 시대에는 종종 해부하기에 신선한 사체를 제공하고자 처형 일정이 조정되곤 했다. 당시에는 반란과 같은 대역죄를 지은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잔인하게 처형한 뒤, 그 사체나 사체의 일부를 대중들에게 전시하는 것은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해부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

: 해부학 서적 출간이나 공개 부검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이면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즉,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종교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비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럽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창조주(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해부는 기독교 철학과 종교적 사색이라는 목적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152살까지 산 노인을 해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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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와 병리, 그리고 발생학

: 중세 대학에서 보편적인 생물 발생에 대한 의견은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갈레노스와 그의 뒤를 이은 의료 저술가들이 대체로 자신들의 학문 영역과 개인적 관찰을 의학 및 인간 생물학에 대한 것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생식과 태아 발생이 쟁점으로 떠오르자 논쟁이 불붙었다. 여기에는 오늘날에도 낙태 논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철학적, 종교적, 법률적 쟁점들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 쟁점의 핵심은 이런 질문들이었다. 1. 발생하는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2. 배아는 언제 혼(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물질)을 받아 인간이 되는가? 3. 영혼은 몸의 어느 부분에 거주하고 있는가?

갈레노스의 이론에 대한 의문점

: 갈레노스는 발생을 위해서는 영양이 필수적이며, 영양의 핵심 기관은 간이라고 믿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생학이 하비와 다른 사람들에게 제기했던 논리적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이 심장에 보낼 피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면, 어떻게 심장과 피가 간 이전에 나타날 수 있는가? 종교적 투쟁의 시기에, 그는 생물학적 설계가 신의 지적 설계를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확고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하지만 대체로 목적인이나 사물의 목적에 대한 토론을 피했다.

실험과 관찰에 충실하다


                                              4. 널리 퍼지는 하비의 사상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나 그의 해부학 시범을 볼 수 있었던 행운아들이 모두 그의 주장을 재빨리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심장과 동맥의 활동에 대해서는 하비의 이론에 동의한 유럽 최고의 의료인들이 피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대를 앞서 간 발견

: 실제로 독자의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을 수용하는 태도는 크게 달랐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표준적인 의학 교육 과정을 고수해야 했던 대다수 해부학자와 내과 의사들은 하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에, 실습 위주의 접근에 관심이 있었던 젊은 학생들은 서둘러 하비의 실험을 재현해 보고, 그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프림로스의 반론

하비,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다

하비 이론의 옹호자들

마지막까지 하비의 순환 이론을 거부한 사람들

: 하비와 호프만이 공부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따르면, 모든 자연적.물리적 현상은 본질적으로 필수적인 네 가지 ‘원인들’을 지니고 있다. 현상은 물질적 원소들의 특수한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질료인), 독자적 형태를 보유하고 있으며(형상인), 일종의 과정이나 창조적 행위자에 의해 창조되며(작용인), 분명히 설정된 목적에 기여한다(목적인). 이때 ‘목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은 어떤 것이 발전해 나가는 ‘끝’을 말하는 것으로, 목적인은 아마도 하비가 살던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목전이 자연의 구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사상의 핵심적 구성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손이나 눈과 같은 기관이 신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떤 목적에 맞는 특정한 형태와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것을 ‘설계로부터의 논증’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것은 순환의 목적을 설명하지 못한 하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적인 주장이기도 했다. 하비는 실험적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신체의 작동 방식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다. 원인과 목적에 대한 논의는 사실의 확립 후에 와야 하는 것이지 그것들이 사실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혈액 순환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론

리올랑의 비판

리올랑의 비판에 대한 하비의 답변

추론보다는 실험 증거가 중요하다

실험으로 밝혀낸 심장 혈관계의 본성


                                               5. 의학의 새로운 장을 연 하비


1649년까지, 월리엄 하비의 삶은 찰스 1세의 재임 기간에 영국을 집어 삼켰던 정치 논쟁과 내전에 좌우되었다. 내전은 영국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많은 학자들은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만 했다. 과학자들은 비공식적으로 런던에 있는 그레샴 칼리지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1640년대에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만나서 협력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내과 의사로서 왕립 의사회의 회원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립 의사회도 새로운 과학을 토론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국제적인 해부학자가 된 하비

육체적으로 쇠락해 가는 하비

가족에 대한 끈끈한 애정

하비가 남긴 유산들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