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예술과 과학],엘리안 스트로스베르,김승윤,을유문화사,2002년, (070908).

바람과 술 2008. 6. 15. 05:55

서론

 

과학이 그 경계선을 넘어설 때 철학과 만난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비물질화하여 순수한 이념으로 남게 될 수 있다. 창조는 예술에서건 과학에서건 하나의 긴 여행이다.

 

'감히 알려고 하여라 Dare to know', '용감하게 되는 법을 알라 Know how to dare' 

 

 

예술과 과학의 대화 The art and science dialogue

 

헤어짐과 만남

 

예술가들은 정서를 자극하려고 노력하지만, 과학자들은 납득을 시켜야 한다(조르주 브라크-예술은 선동하지만, 과학은 안심시키려 한다). 과학은 집단적으로 인정된 정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서 모호성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예술은 모호성을 주관적 경험의 영역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오히려 강조한다. 예술은 누구나 감상할 수 있지만, 과학은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다. 그러나, 예술과 과학은 모두 혁신적인 개념을 공략하면서, 자주 동일한 목적에 동일한 주제를 사용한다(폴 발레리-과학과 예술은 거칠게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은 예술과 서로 떨어질 수 없다. ... 나는 둘 사이의  다른 점을 명확하게 찾을 수 없다. 이 둘은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들이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인다).

 

미학과 방법

 

미와 규율은 예술가와 과학자 모두에게 중요하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논리적인 추론이 때때로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으며, 상상력이 자신들의 창조적인 과정의 중요한 부분임을 기꺼이 인정한다.(토마스 헨리 헉슬리-하찮은 사실 하나가 아름다운 이론을 죽인다). 

 

다재다능

 

많은 예술가들은 과학에 흥미가 있었고, 과학자들은 예술에 관심이 있었다. 아직도 의문은 남아 있다. 무엇이 가장 창조적인 마음들 안에서 과학과 예술 모두를 위한 재능을 부여하는 것일까?

 

영감과 시각화

 

창조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일 수 없기 때문에, 뮤즈(시, 음악, 기타 학예를 주관하는 신)나 창조의 신비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들이 있었고, 결국은 '무의식'이 창조의 원천으로서 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아인슈타인-나에게 실체들이 시각적으로, 때로는 매우 강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두번째 단계에서만은 일상적인 말과 기호를 힘들게 찾아내야 한다).

 

탐구 정신

 

하나의 개념이 비판적인 관찰을 통해 더 이상 수용되지 않을 때, 부적합함에 대한 분석은 수정을 요구한다. 모든 새로운 개념은 기존의 것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다. 기존의 것은 반드시 초월되어야 할 대상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난관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교육과 신기술

 

오늘날 전문화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과도한 전문화는 창조성을 파괴한다. 창조성은 열린 마음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놀이는 나이에 관계없이 배움의 원초적인 형태이다. 예술과 과학은 동일한 도구와 재료를 사용한다. 그들을 이어주는 주요 연결점은 기술(technique)이다. 오늘날과 같이 변화가 심한 때에 예술과 과학의 통합 현상도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전산화,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관객은 자기가 원하지 않든 영원한 학생이 되고 있다. '창조성'과 '교육', '오락'은 이제 복잡하게 얽힌 개념이다. 신기술이 예술가와 창조, 관객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이 모든 것에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뉴미디어 덕분에 누구에게나 예술과 과학,  기타 분야에서 탐구될 수 있는 창조적 잠재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동적인 역사 A dynamic history

 

예술가이자 과학자

 

창작품에 서명을 넣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출현하였다. 그러나 창조성의 개념이 오늘과는 달랐다. 그들에게는 예술과 공예는 같은 것이었다. 자기 표현의 추진력을 테크네(techne)라고 하였다(아리스토텔레스-모든 테크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 배후에 있는 기법과 이론을 연구하고, 창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 안에 있는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점점 존경과 명성을 얻었다. 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예술가 개인이 주목받게 되었다.

 

근대에서의 결별

 

우주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자들이 점점 기계론적인 개념을 선호하게 되었고, 예술의 영역에 대한 감정적인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반대로 과학이 발달할수록 예술가들은 과학에 반항하였다. 과학의 발달은 산업과 경제에 크게 의존하였고 따라서 권력과의 연계가 불가피했다. 한편, 예술가들은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현실을 해석하는 문제를 떠맡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무의식중에 과학과의 개념적 연결을 재구축하게 되었다.

 

박물관의 역할

 

역사를 통들어 항상 과학 기술의 경이와 닮은 예술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때때로 어떤 창작품은 그것이 예술적인 것인지 과학적인 것인지 결정내리기가 불가능하다. 어떤 대상의 의미를 이해하면 그 대상이 일으키는 정서도 느낄 수 있다. 과학에 대한 가르침은 미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고 '작용하는' 이론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예술의 최종 목적은 '미를 생산하는 것'이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하나의 증거이며, 따라서 지식을 발생시킨다.

 

예술과 과학 : 하나의 모험

 

예술사는 시간에 따라 다르고 문화에 따라 다르다. 오랫동안 예술에 관한 이야기는 양식(style)의 이야기였다. 새로운 경향은 의심의 대상이었다. 예술사의 해석, 보존의 문제는 다양한 요인들에 영향을 받는다. 과학은 이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과학에서 또 다른 유행의 표지를 본다. 게다가 과학은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는 예술사와 함께 동요한다. 과학은 고대에서 기술적 혹은 정신적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B.C 500년경 그리스에서 소피아(Sophia)는 '기술적인 능력'을 의미했다. 그 후 그것은 지혜의 개념과 연결되었다. 기술적 훈련과 지적인 훈련을 결합한 접근법을 통하여 서구의 연구는 르네상스 기간 동안 재활성화되었으며 조사(investigation)라는 새로운 영역을 위한 길을 열었다. 과학적 혁신은 선행 지식을 소화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다. 이미 확립된 사실들을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실험적 증거보다 앞서 어떠한 비약적 진보를 규정할 기준은 없다. 상이한 집단들이 말없이 하나의 계획에 매달릴 때, 연구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는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변화는 자주 경쟁과 열정과 불안 가운데서 발생한다! 미적인 차원은 남아 있어도 예술의 내용은 과학과 같이 나이를 먹는다. 지식은 은연중에 인간 사유의 진화에 구속되기 때문에, 여러 영역에서 동시에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사상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즉, 예술과 과학은 독창적인 발견을 특징으로 하는 연속적 침체, 단절의 단계를 거치는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건축과 과학 Science in architecture

 

예술과 과학의 일치

 

건축은 기능적.기술적.미적인 요소가 필요한 응용 예술이다. 또한 건축은 일반적으로 소소한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응용 예술과는 달리 주요 예술의 하나로 여긴다.

 

관찰과 추론

 

고대 그리스 이전까지 과학은 실생활에서 소용되는 경험들의 모음이었다. 항해술을 통해 우주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발달시켰던 그리스인들은 과학, 즉 과학 자체를 위한 과학을 탄생시켰다(서구적인 편향이겠죠~). 위대한 철학적 각성 뒤에 거센 건축적 운동이 따라왔다. 육체와 정신의 결합은 고대 그리스의 전형으로, 여기셍서 인체 해부와 관련된 건축적 형태가 나타났다. 그들은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세계를 수학적인 표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 사유에 있어 위대한 발전이었다. 그것은 추상을 실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이 우아한 개념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대한 정보가 생산되었고 결국 조직화된 학습을 하는 학교가 생겨났다. 과학의 경험적 방법은 예술에서 새로운 자유와 자연주의가 등장하게 하였다.

 

신앙이 건축 논리를 초월하다

 

예술과 과학은 기억되기를 원하는 허영기 잇는 후원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따라서 권력과 고도 기술을 상징하는 기계식 시계 같은 여러 상징물들이 주요 대성당 내에 설치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해와 달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주기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시간이 드디어 과학적인 장치에 의해 추적되는 연속체가 되었다.

 

먼 곳들의 만남

 

서구가 막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동안, 서구의 반대편에 있는 다른 사회들은 또 다른 정교한 모델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모든 예술에 형식적인 전범이 있었고 주관적인 표현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 엄격한 틀 속데서 예술은 스스로를 미묘하게 그리고 '창조성'이라고 하는 난잡한 개념의 충동적인 성격으로 판단할 때 아마도 불가항력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했다. 물질적인 관심과 정신적인 관심들이 서로 일치하면서 더욱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과학과 건축

 

새로운 개념  : 진보

 

백 투 더 퓨처?

 

 

 

장식예술 : 하이테크로 가는 길 Decoration : a path to hi-tech

 

장식 무늬와 수학

 

과학 기술에서 많은 암시를 받았던 건축이아 공연 예술과는 달리 장식 예술과 디자인 분야에서는 전통적으로 예술가들이 앞서갔다. 대칭 구조와 같이 단순한 구조를 지향하는 자연적인 경향은 '생물학적인 질서 감각'에 따르는 것 같다. 집단적인 정신을 반영하는 장식은 아프리카의 직물에서 마오리족의 문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화에서 놀라우리만큼 발달했다. 장식 혹은 응용 예술이 서양 예술의 위계 속으로 들어온 것은 겨우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 때였다. 장식은 과거에는 장인의 영역의 일부였으나 이제는 디자이너의 특권이 되었다. 역사를 통해서 수학은 장식 무늬의 토대를 형성했다. 기하하적인 표현은 시각적인 질서를 주는 반면, 대수학은 음악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 듯이 보인다. 10개의 독립적인 기호를 기초로 한 십진법은 인도의 전설의 미를 고양하기 위하여 개발되었으나 그 실질적인 측면이 나머지 세계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숫자를 기호와 위치로 표현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계산의 기초를 마련했다. 대조적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원뿔 분할, 타원, 투시 기하 등에서 미적인 절정에 도달했다. 고대의 장식 무늬는 케플러 같은 천문학자가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 비밀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우리는 그 기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대단히 복잡한 형태로 '프랙탈 fractal'을 통해 수학적 언어로 묘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술가와 과학자는 자연의 구조를 재현하려고 노력한다. 그 구조들이 구현하는 형태와 논리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하므로, 그 구조들은 예술과 과학에 똑같이 적용되는 일관된 언어를 제공한다. 

 

직조에서 컴퓨터로 

 

수천 년 전부터 목화와 같은 식물이 섬유 생산을 목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조상의 기술을 이어받아 정교하게 도안된 직물을 짰다. 그때 이래로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직물의 모티프는 가장 오래된 시각 예술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것은 옵 아트(Op art 기하하적 형태나 색채의 장력을 이용하여 시각적 착각을 다룬 추상 미술)와 같은 현대적 스타일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오래 전에 인간은 뼈로 만든 바늘을 사용함으로써 옷 만드는 기술이 한단계 발전했다. 서구 사회에서 섬유는 중세 말까지도 사치품이었다. 직물 사업은 르네상스 융성의 기반이 되었으며 푸거가Fugger family와 메디치가는 이를 기반으로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이 다국적 기업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복식 부기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한편 이때 섬유보다 휠씬 돈벌이가 좋은 호사스러운 실크가 서구를 관통했다. 산업혁명기인 1741년에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이 기계적인 실크 직조기를 발명했다. 이 직조기는 나중에 조셉 마리 자카르J. M. Jacquard(1752~1834)에 의해 개량되었다. 자카르는 정교한 도안을 짜도록 기계에 명령을 하는 펀치 카드 시스템을 도입했다. 각 카드는 도안의 분리된 부분을 담당한다. 이와 유사한 기술이 오늘날의 직조기에도 활용되고 있다. 러블레이스Lovelace 백작의 부인인 에이다 A. Ada는 최초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뛰어난 수학자였는데, 그녀는 1830년 찰스 배비지C. Babbage와 함께 분석 엔진을 만들었다. 이 분석 엔진은 컴퓨터의 선구이지만 곧바로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통계학 연구와 로그 계산은 모두 계산 기계를 필요로 했으나 100년 후 컴퓨터가 나타나기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멀리서 출발하여 갑자기 발달하는 많은 과학적 발명과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발달은 과학이 예술과 같이 항상 직선적으로 진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색소와 재료

 

인간의 도안에 대한 매혹은 색깔에 대한 욕망과 병행했다. 최초의 인조 염료는 산업혁명의 결과였다. 런던의 가스 가로등을 조명하기 위하여 사용했던(1792) 콜타르는 벤젠과 같은 부산물로 생산했다. 이러한 부산물들이 많이 생산되자 과학자들이 그 잠재적인 효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염료의 산업 예술에 대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색소의 혁명은 직물로 확산되었다. 섬유에 대한 연구는 다른 방향, 즉 인조 섬유로 옮겨갔다. 섬유는 재료와 미의 세계 그리고 그것을 만지는 모든 사람의 삶을 혁신시켰다.

 

유리 제조술과 원격 통신

 

유리 제조는 5000년 전 오리엔트 지방에서 토기 재료를 실험하다가 발견되었다. 보통의 원료로 합성되는 이 비범한 재료는 세세에 걸쳐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그리스인들은 유리 제조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리 부는 기술은 BC 1세기경 로마의 영토였던 시로팔레스타인Syro-Palestinian 연안 지역에서 발명되었다. 로마인들은 유리 제조에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들은 불순물 때문에 생기는 색깔의 결함을 제거하는 방법을 발명했고 장식 모티프를 넣는 기술, 즉 새겨 넣는 방법, 도금하는 방법 등을 개발했다. 또한 일상 생활에 쓸 수 있는 튼튼한 유리도 만들었다. 튼튼한 유리 생산은 주요 산업이 되었다. 중세에는 유리가 보석으로 취급되었다. 금속 산화물 형태의 화학 물질을 용융 과정에 첨가함으로써 휠씬 광범위한 색깔을 얻게 되었다. 아랍 세계에서는 유리 제조 기술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예술적인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그 이후로 베니스가 세계의 유리 제조 중심으로서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19세기에 예술과 공예 운동의 영향으로 프랑스인 에밀 갈레(1864~1904)와 미국인 루이스 컴포트 티퍼니(1848~1933) 같은 유리 예술가들은 수많은 기법과 재료를 개발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혁신적인 성취는 소형 용광로의 발명에 따라 예술가들이 자율성을 획득한 것이다. 이 장비로 말미암아 유리 제조자들이 자기만의 스튜디오를 만들고 독자적인 예술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결국 화가나 조각가와 동등한 지위를 만들어 준 것은 기술이었다. 유리의 본질은 예술의 매채로서 선택되기에 적합했고, 과학자들 역시 이 재료에 매혹되었다. 볼록 렌즈는 일찍이 BC 300년경에 발명되었다. 한참 뒤에 아랍의 과학자들이 망원경에 쓰이는 것과 비슷한 오목 거울을 발명했고 또한 렌즈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해명했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베이컨(R. Bacon 1214~1294)에게 광학은 거의 시각 예술의 한 형태였다. 안경 유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과 유리에 의존한 다음의 큰 발견인 망원경 사이에는 300년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망원경의 원래 목적은 좀더 정확한 대포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서구 세계가 융성하면서 개인 주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평면 유리의 수요가 급증했다. 유리 생산은 산업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또한 미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산업이기도 했다. 근대의 화학과 물리학은 모두 유리로 된 도구의 도움으로 실질적인 진보를 이룩했다. 모든 발병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물론 전구였다. 그것은 계속하여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도공의 연금술

 

실로 옷을 만들고 유리를 녹여 만들기 휠씬 전에 사람들은 흙을 빚었다. 고대 유물 가운데는 도자기로 만든 작은 입상이 도자기 그릇보다 연대가 앞선다. 주술적인 목적이 실질적인 목적보다 앞섰던 것이다. 고대 도자기 유물들은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모든 공예품 제작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화학적 실험들이 진행됨에 따라 노랑색, 호박색, 갈색의 색조가 얻어졌으며 색소는 아시아를 횡단하여 거래되었다. 예술가들이 자기의 명품을 만들고 있을 때, 프랑스인 르네 드 레오뮈르(1683~1757)와 같은 과학자들은 흙의 유리질화 과정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연구했다. 영국에서도 연구가 행해졌다. 화학자인 조사이어 웨지우드(1730~1795)가 획기적인 발명을 하기까지 다양한 자기 제조 기술들이 행해졌다. 지질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발달하여 지각 형성의 중요한 요소가 '열'이라고 규정하였다.     

 

금속의 힘

 

지구상의 모든 재료들 중에서 금속이 가장 매력적이다. 아마도 금속은 처음에는 마술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어떤 금속들은 자연적으로 드러나고 지표면 위에 반짝이면서 다루기 쉬운 형태로 있기 때문에 찾기가 쉽다. 금과는 달리 다른 대부분의 금속들은 순수한 형태로 발견되지 않고 광석에서 추출해서 녹여야 했다. 사람들이 단단한 연모와 무기를 만드는 데 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생활이 바뀌었다.

 

화학자들의 미래 재료

 

18세기 동안 연소와 호흡에 대한 연구는 가스(gas:그 말을 만들어낸 네덜란드 과학자들은 '카오스chaos'라 발음했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자극했다. 영국인들은 가스에 대한 실험을 공고히 하는 한편 프랑스인들은 그것의 이론적인 부분을 발달시켰다. 더 이상 작은 단위로 환원될 수 없는 원소들을 분류하는 체계가 개발되었다. 각각의 원자는 화학적 처리 과정 중에 변하지 않는 질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후 화학 반응 동안 질량 보존을 설명하는 법칙이 확립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물질의 구조와 합성에 대한 이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속하고 강도 있게 진보했다. 화학의 진보는 예술에 즉각적으로 응용되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더욱 새로운 제품을 요구했고, 시간이 무르익어 정교한 화학적 처리 과정을 통해 원자들을 결합시켜 이른바 중합체polymer라는 긴 연쇄 물질을 만들게 되었다. 비록 테크놀지가 전통적으로 예술가들이 지배해 온 영역을 추월한다고 해도, 예술가와 과학자들은 서로서로 장식 예술의 혁신을 자극할 것이다.

 

그림과 인식 Painting and congnition

 

그림과 심리학

 

화가들은 인간의 정서를 다루기 위하여 항상 빛깔을 사용한다. 색채 이론의 기초는 뉴턴의 광학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화학적인 슈브뢸(1786~1889)이 색채론을 광범위하게 연구했다. 슈브뢸은 1만5천개 이상의 색을 분류하고 그것들을 집대성할 수 있는 척도와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색을 병치할 때 발생하는 시각적 효과를 분석하기도 했다. 색채 연구 분야는 눈의 생리학에서 심리학과 인지과학, 즉 뇌가 지식을 처리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과학에까지 확장되었다. 예술가들은 색채의 법칙을 경험적으로 발견하는 반면, 연구자들은 예술가들이 생산한 정서들을 설명하는 예술적인 이론들을 만든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화가들은 다른 어떤 유형의 예술가보다도 더 자주 과학자들을 앞섰다.

 

이차원의 그림

 

석기 새대 말경에 세 가지 형태의 그림 표현 방식이 발달했다. 모방적 혹은 실제적 형태, 추상적 혹은 장식적 형태, 그리고 정보 제공적 형태가 그것이다. 색채는 이미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백, 적, 흑의 세 가지 색이 고대의 장례식과 종족의 가면에 사용되었다. 색채의 핵석과 지각은 문화적으로 특수한 것이다. 석기 시대에 색소를 만드는 물리적인 방법은 자연에서 그것을 추출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과 결합되었다.

 

안료 없는 그림

 

수천 년 동안 예술 작품의 내용은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다. 그 결과 예술가는 매체에 집중했다. 새로운 기법은 자주 예술적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틀이 없는 그림

 

인간과 우주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 차이는 그림 안에 함푹되어 있다. 중국인들에게 풍경화(산수화)는 고상한 장르였다. 산수화 감상자는 자연의 일부로서 그 안으로 투영되어 들어갔다. 그림은 정신적인 훈련이고 그 안에서 화가의 목적은 명상을 위한 화두를 창출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자연의 세부를 연구하는 데 바치는 시간은 실제로 작품을 만드는 노력과 철저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처음으로 그림을 공예보다 고상한 예술 형태로 간주했던 중국인들은 과학자들처럼 자연을 정밀하게 조사한 후 그림을 그렸다. 동양에서는 여러 가지 독창적인 스타일이 발달했다.

 

실제의 환영

 

스테인드 글라스 창이 13세기 말경 프랑스에서 정점에 달했을 때, 남부 유럽에서는 모자이크가 비용 때문에 회화로 대체되었다. 고딕식 성당 건축이 등장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벽화가 발달할 수 있는 풍성한 토양이 형성되었다. 뜨거운 태양을 차단하기 위해 유리창을 작게 만들었기 때문에 넓은 벽면을 채워야 했다. 고딕 양식과 마주치면서 고귀한 비잔틴식 표현은 끝이 났다. 비록 회화에 관한 이야기가 단순히 기법들의 연속으로 묘사될 수는 없지만, 최초의 르네상스 예술 논문은 기법들의 모음에 지나지 않았다. 회화는 실제적인 영상을 제작하는 분야로 인식되었다.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실험했던 이 모든 매체 중에서 유화가 가장 근본적으로 그들의 예술을 변화시켰다. 유화는 화가들이 뜻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서 기본적인 매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소형의 운반 가능한 이젤 페인팅은 서구 문명과 동일시되며 거의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공예에서 예술로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림을 완전히 새롭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유서 깊은 공예였던 그림은 과학적인 개념이 적용되자마자 이탈리아에서 진정한 예술이 되었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한편으로는 물감으로 형상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근법을 통해 평면 위에 현실 세계의 환영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철학적인 차원도 기술적인 차원만큼 중요했다. 그림 안의 많은 상징들은 예술가들이 철학에도 매우 익숙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기술적인 예술로 분류되었으며 여전히 공예와 연계되었다. 16세기에 북부에서 온 예술가들이 소개한 유화를 베니스라는 국제 도시의 예술가들이 받아들이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려한 원색과 비대칭적인 구성은 생생한 동세movement를 만들어 냈다. 대담한 붓터치를 사용하여 티티안은 밝고 양감 있는 형상의 윤곽을 만들고 그것을 조각처럼 두껍게 칠했다. 이 기법을 임파스토(impasto:어원은 '반죽된'이라는 의미의 이탈이아어로서, 그림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화법)라 불렀다. 이와 같은 기법의 변화는 보통 의도의 변화를 의미했다. 회화는 건축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크의 건축은 회화를 닮았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정신을 전달하기 위하여 이 새롭게 나타난 기술적인 기회를 포착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주변 세계를 상세히 묘사하거나 신세계의 이국적인 동식물을 묘사한 정물화, 풍경화, 풍속화genre painting를 부유한 부르주아지들이 구입했다. 그러한 작품들은 과학에 대한 자신감 증가에 따른 관찰 감각의 성장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다. 가능하면 물질적 세계를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화가들은 측량도구를 사용하게 된다. 정밀한 과학을 통해 신의 설계와 자연의 신성한 법칙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증가했다. 풍경화는 신화적 장면의 배경 역할을 하기보다는 점점 독립적인 장르로 인식되었다. 선과 색깔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다. 회화가 자유 예술liberal arts로 승격되면서 이론적 지식과 기술을 훈련시키기 위한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점차 아카데미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상대성에 대하여

 

 구상 회화는 격식의 완성mannered perfection이라는 정상이자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망막의 기능과 빛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이론적인 주장들이 유행했다. 화가 자신들은 이미 다음 단계로 진입했다. 즉, 1835년에 '예술을 위한 예술I' art pour I' art이라는 표현이 만들어졌다. 색채의 관계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심 증가는 과학자들, 즉 구스타프 키르히호프(1824~1887)와 로버트 분젠(1811~1899)의 발견과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은 새로운 도구(분광광도계, 1859)를 사용하여 원소를 연소시킬 때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했다. 그 결과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한 색채 분석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근대 과학의 방향을 따르게 했다. 비록 유치한 단계였지만 신경 생리학은 프로이트와 같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었다. 잠재의식의 신비와 매력은 초현실주의 운동을 자극했으며, 문필가들에게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정신 분석학에서 사용되는 기법인 자유연상을 예술 창작 과정에 도입했고 그것을 '오토마즘automatism'이라 불렀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들이 꿈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비이성적인 비전의 우월성을 선언하고 있을 때,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회화와 음악-그의 의견에 따르면 비재현적이고 그래서 더 우월한 예술-이 수학적 형태로 표현된 조화로운 철학적 창작이 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추상 예술의 선구자들은 그것의 광학적이고 정서적인 한계를 계속 탐구해 온 추종자들과 합류하게 된다. 모든 사물에 대한 종말과 같은 총체적인 추상은 예술의 이야기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장을 썼다. 추상 예술은 시각적 효과를 분석하는 특히 흥미로운 도구가 되었다. 회화에서 제한된 변수들을 조작하는 것은 인지 과학자들이 반세기 뒤에 사용할 방법의 전조가 되었다. 추상 예술이 발달하기 오래 전에 공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있었다. 20세기 과학의 가장 중요한 전달자 중의 한 사람은 파플로 피카소였다. 화가는 전통적인 경계를 초월했다. 캔버스는 완전히 새로운 크기로 커져, 예술가의 장field 또는 '환경'이 되었다. 그리는 행위는 자기 표현을 위해 온몸으로 움직이는 커다란 운동이 되었다.

 

그림의 종말

 

과학적 발전의 격류에 휩쓸려 그림은 쓸모벗는 것이 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현대 기술에서 파생된 예술 형태는 전통적인 매체와 경쟁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그것은 창조자들의 선택을 보충하고 있다. 최근에 출현한 과다한 양식들은 변화에 대응하는 화가들의 능력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반드시 진리를 포착하지는 않는다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예술가들은 때때로 세상을 개선하기를 원한다. 즉, 어떤 예술가들은 우리들이 과학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진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인상파 이래로 예술은 과학의 다양한 측면을 자연스럽게 통합했다. 과학자들은 분자 차원에서 시각적으로 유도된 감정을 연구한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회화를 감상하도록 하는가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다. 비록 감정 배후에 있는 과학이 천천히 풀려 가고 있다 해도, 많은 것들이 해명되어야 한다. 이 분야에서 나타난 한 가지 발견은 지적인 과정과 감정적인 과정이 강력하게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 디자인의 언어 The language of graphic design

 

그림과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