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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생명복제기술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 -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

바람과 술 2008. 6. 15. 07:08

좋은 글입니다. 자료 꼭꼭 확인하시고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생명복제기술에 대한 논의는 어디에서 시작하나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성과에 대한 명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라고 명명해야 하며, 이런 폭에서 최근 한국의 생명공학의 추이는 세계적인 기술성과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2. 굳이 과학이라면 민족주의 과학이며, 자본종속적 과학이다.

이 글은 면역학을 중심으로 기술철학적 논의를 먼저 하고 둘째 사회역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순서로 전개한다.

 

2. 생명복제에 대한 철학적 검토의 핵심은 면역학이다.

 

생명체의 면역시스템은 기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반응구조를 갖고 있다(턱 있는 어류 이상). 외부 미생물, 독물, 이식세포, 혹은 외부 장기 나아가 물질 자극 등의 외부 항원에 대하여 항체를 형성하는 면역 기제는 결국 자기(self)가 외부의 비자기(non-self)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발생학적 구조의 현상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자기를 타자로 오인하여 자기가 자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생긴다(관절염). 자기가 자기를 타자로 오인 하는 경우는 자기의 실수도 있지만 자기가 자기의 정체성을 상실했을 경우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자기와 비자기 혹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능력은 생물 진화의 정점에 있다(이런 명료함이 어디에서 ㅠ ㅠ 이래서 철학하는 인간들이 무서워!).

결국 면역의 중요한 의미는 자아와 타자를 인식하는 능력이며 둘째로는 분자 차원의 자기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면역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정되고 정지된 생명계의 실체를 분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나긴 진화의 시간을 통해 변형과 수정이 거듭된 생명의 시간성을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진화의 시간여행에 가로놓여진 생물학적 객체란 기계적 객체와 다르며, 자기와 비자기(타자) 사이의 상관성 즉 거부와 관용의 관계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님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 ㅋ, 좋다)

자기 혹은 자아란 이질적인 타자를 인식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식한다는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 면역체계는 항원들의 기호를 그 그물망 내부에서 파악하는 상관적 바이오 피드백 체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와 타자 사이의 양방향적(bi-directional)인 상관관계로서 전체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ongoing process 자기조직성을 지닌다.

면역학은 19세기 후반에 진화 생물학의 논쟁으로부터 발생해서 20세기 전반기에 혈청학과 면역화학으로 분기된 이후 유전자 결정론의 성격인 환원주의 프로그램이 지배적이었지만 70년대 이후 자연선택 이론과 발생학의 장르가 면역의 현실적 작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더 많은 유효성을 주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요점은 자기를 정의하는 방식이 고정된 틀 안에서 정지된 객체로 보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적 발생을 담지한 변화가능성의 자아에 있다는 점이다.

환원주의 프로그램은 진화학과와 발생학의 관점과는 결별하고 물리학과 화학으로 생리학을 환원하려는 전략이다. 대부분의 일선 과학실험자들이 그렇듯이 현재의 배아줄기연구팀 역시 환원주의 프로그램의 일환을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후성적 변이에 대하여는 묵묵부답이다. 현실의 면역학은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을 고정된 틀로 보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점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최초이며 최고 기술이라고 자부하는 자기 체세포 배아 복제 기술 역시 면역거부 반응의 근본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명의 존엄성이란 생명의 시작이 어디부터인가라는 정체성의 확보시기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결국 줄기세포 연구를 하는 최종적인 목표인 난치병 치료의 실현도를 실질적으로 높이기 위해서 면역학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차적인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3. 민족주의 과학은 희망의 과학일 뿐이다.

 

민족주의 과학의 정의는 매우 복잡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두 가지로 요약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1. 과학자 혹은 과학자가 속한 집단의 희망이 과학으로 변신한다는 점이다(희망의 과학). 2. 과학연구의 가치중립성을 겉으로 표방하지만 과학발전의 현실적 목표가 뚜렷하여 현실적 지향을 마치 과학의 진보라고 믿는다(과학 개발주의). (~ ㅋ, 글이 맛나네)

 

 3.1 생명은 특허 대상인가

 

원칙적으로 생명체는 발견적 고안이나 재산의 대상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생명은 물적 재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독점적인 특허 점유는 그와 밀착된 관련 연구를 저해하는 부작용이 생긴다. 3. 특허로 인한 치료제품의 원가 상승으로 인하여 일반 환자들의 접근성이 멀어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진정한 의료복지가 관련 기술의 목표인가 아니면 산업화된 자본축적이 목표인가를 분명히 따져야 한다. 실제로 이 두 현실적 목표가 분리되기는 어렵겠지만, 그 우선순위라도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는 말이다.

 

3.2 난자 수집의 투명성

 

3.3 난치병 치료의 희망이 곧 과학의 현실로 되는 것이 아니다

 

3.4 애국심에 호소하는 과학

 

4. 철학적 사족 - 과학의 진보

 

과학에서 무엇이 발전인지를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그러한 발전이 곧 진보인지를 질문하는 반성적 입장도 매우 중요하다. 발전과 진보는 다른 개념이지만, 과학사상사에서 현실적으로 두 개념은 많은 부분 중첩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한편에서는 과학적 성과에 대한 희망과 욕구가 과학의 발전을 이루면서 그것이 곧 인류의 진보라고 믿는다. 이러한 성과주의는 현실적 문제해결에 실용적 의미를 갖는다. 반면 다른 측면의 역사적 진보주의는 인간의 진정한 진보는 가시적인 성과를 반성하고 비판하는데 있지만 자칫 선험주의에 빠질 수 있다.

과학은 인류에게 희망일 수 있으나 인간의 희망이 곧 과학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_생명복제기술에_대한_전반적_재검토-anticp7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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