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철학)

과잉결정,이데올로기, 마주침 : 알튀세르와 변증법의 문제 - 진태원

바람과 술 2018. 1. 19. 10:34

1. 알튀세르와 변증법의 문제 :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


첫번째 논점은 변증법에 관한 알튀세르의 저술은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이라는 조건하에서만 …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개념을 쇄신하려 시도한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이라는 문제, 따라서 과소결정의 문제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으며, 이는 곧 과잉결정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혁의 가능성을 사고하려 했던 초기 시도의 연장이자 심화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데올로기 개념의 쇄신은,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과잉결정 및 과소결정 개념과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뚜렷하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도 변증법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알튀세르의 최후의 이론적 노력에서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은 '마주침의 유물론' 내지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곧 단지 과잉결정만이 아니라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을 동시에 사고할 경우에만 변증법에 관한 알튀세르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이라는 알튀세르의 테제가 의미하는 바는 여기에서 찾아야 함을 뜻한다.


2. 과소결정 없는 과잉결정? : 초기 이론화 작업의 한계


『맑스를 위하여』에서 맑스주의 변증법의 특성은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집약적으로 해명된다. 프로이트에게서 그 명칭을 빌려 왔지만 알튀세르가 독자적인 작업을 통해 이론화한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은 역사적 이행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이다. 곧 이 개념은 알튀세르 자신이 지적하듯이 왜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인 러시아에서만 혁명"이 가능했고, "왜 러시아에서 혁명이 승리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변증법의 차원에서 대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알튀세르의 논점은 사회주의 혁명과 이행, 따라서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의 모순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좋은 측면'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고 '나쁜 측면'을 구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또는 자본과 임금 노동 사이의 모순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인 모순만 사고해서는 혁명에 관해서, 맑스주의 정치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순을 구체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순을 그것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모순을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 전개의 외적 조건이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럴 경우 모순은 일종의 본질이 되고 상황들은 그러한 본질의 외적 조건 내지 단순한 외양으로 사고되며, 이것은 가장 순수한 도식에 따라 모순을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과 상황 사이의 관계를 본질 대 조건 내지 현상이라는 외재적인 관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 모순은 이 '상황'들과 하나를 이루고 있어서 단지 이 상황을 통해서만 그리고 이 상황들 속에서만 포착되고 식별되고 작동될 수" 있는 것으로,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몸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심급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말하는 과잉결정은 자본주의적인 모순은 결코 그 자체로, 단순한 모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존재하는 조건들 및 그런 모순이 지배하는 각각의 심급들과 분리될 수 없고, 모순 그 자체가 그런 심급들의 작용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과잉결정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는 '항상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합적 전체' 개념과 '지배소를 갖는 구조' 개념이다. 항상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합적 전체 개념은 헤겔식의 기원과 목적의 변증법과 달리 유물론적 변증법에는 순수하고 단순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체 역시 하나의 동질적 본질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로 구성된 복합적 전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지배소를 갖는 구조 개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전체는 다양한 요소들 내지 심급들 간의 위계적 결합 관계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유물론적 변증법에는 항상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합적 전체라는 개념만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과잉결정의 내포를 좀더 분명하게 한정해 준다. 사회적 전체를 지배소를 갖는 구조에 따라 파악하는 것은 막연한 다원주의를 넘어 구조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위계 관계, 또는 불균등한 절합 관계를 인식 가능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잉결정 개념은 "모순의 실존 조건들이 모순 자체 내에 반영되는 것, 각각의 모순의 내부에 복합적 전체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지배소에 따라 절합된 구조가 반영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왜냐하면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경제는 모든 생산양식에서 직접 다른 심급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 생산양식에서 지배소의 역할을 담당하는 심급들을 결정하는 기능, 따라서 지배소의 전위를 결정하는 기능만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혁명의 실패, 이행의 비실현이라는 문제 역시 과잉결정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과잉결정된 모순은 역사적 억제라는 의미에서, 모순의 진정한 '차단'의 의미에서 과잉결정되었거나(빌헬름 시대의 독일) 또는 혁명적 단절의 의미에서 과잉결정될 수 있지만(1917년 러시아),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는 결코 순수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과잉결정은 혁명이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응축되어 있는 사태만이 아니라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결합 및 축적되어 있는 사태 역시 표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 모순의 고유성을 해명하려는 이론적 시도가 좀더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과잉결정 개념만이 아니라 과소결정 개념, 곧 혁명이나 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에 의한 모순의 결정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사실 과잉결정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개념으로서 과소결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계의 재생산이라는 문제설정에 따라 각각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이러한 재생산에서 상부구조, 특히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3. 과잉결정 없는 과소결정? : 이데올로기의 부정성과 실정성 사이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될 수 있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론의 목표는 과잉결정 개념에 의해 한계가 드러난 토대-상부구조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토픽 대신 생산-재생산이라는 새로운 문제설정에 따라 생산양식과 이데올로기의 절합을 사고하는 것이다.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알튀세르가 말하는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은 두 가지 측면을 함축한다. 첫째, 이러한 재생산은 생산력의 재생산을 포함하며, 둘째,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그리고 다시 생산력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생산려긔 재생산은 각각 생산수단의 재생산과 노동력의 재생산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노동력의 재생산은 생산수단의 재생과는 달리 경제의 영역을 벗어나는 문제다. 따라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경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제도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속을 함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산력의 재생산은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전제하고 있다.


제생산의 문제에는 생산력 이외에 생산양식의 나머지 요소인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조직하는 기술적 관계와 더불러 착취 관계로 구성되므로, 알튀세르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거쳐 우회해야 하며, 이는 다시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역사 유물론의 고전적인 '토픽'에 대해 재고찰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토픽은 원래 프로이트가 무의식이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개념인데, '의식-전의식-무의식'이나 '이드-자아-초자아' 등을 두뇌의 모습을 띤 그림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토픽은 일차적으로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공간적이거나 장소적인 비유를 가리킨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토픽이 갖는 의의는 역사의 변화 동력을 관념이나 정신적인 것에서 찾지 않고, 또 정치나 법제의 변화에서 찾지도 않고, 사회경제적인 구조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곧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을 도입했다는 데 바로 토대-상부구조 토픽의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토픽의 한계는 상부구조의 반작용이나 상대적 자율성 같은 막연한 해명 이외에는 정치와 법,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역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알튀세르의 대안이 바로 (생산력) 재생산의 문제설정이다. 알튀세르는 이를 위해 맑스주의 국가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우선 알튀세르는 국가는 국가장치만이 아니라 국가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구분에 더하여 알튀세르는 국가장치를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다시 구분한다. 고전적인 맑스주의에서 국가장치는 억압적인 장치와 동일시되었지만, 이러한 개념만으로는 국가가 수행하는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이 정확히 해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는 계급 지배를 재생산하기 위해 강제와 폭력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간주되는 여러 제도들을 알튀세르가 '국가장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자유주의-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으로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는 단지 공적 영역에서 억압적 국가장치를 장악하고 활용함으로써만 안정되게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적 영역이라고 불리는 개인들의 생활 공간까지 장악하고 지배해야 비로소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제는 권력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사적 영역의 개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계급 지배가 관철되며, 더 나아가 개인들의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의해 형성되는지 설명하는 일이다. 


이것이 이데올로기론이 갖는 두번째 측면인데, 알튀세르는 우선 이데올로기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곧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 사회에서 모든 인간, 개인은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추상적인 개인이나 인간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단어 자체가 시사하는 것과는 달리 관념들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라는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실존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이라는 테제는 몇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이라는 테제는 이데올로기는 관념들이나 표상들의 문제이기 이전에 국가장치 및 사회적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둘째, 이 테제는 개인의 내밀한 믿음이나 신념, 표상이 사실은 정신의 내면성의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제도나 그 제도 속에서 실행되는 의례들이나 관행들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 준다. 셋째,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테제가 겨냥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상", 곧 의식을 부여받고, 의식이 그에게 불어 넣고 그가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사고들'을 믿는 모든 '주체'는 '자신의 사고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표상이다. 


호명의 첫번째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개인들의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호명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데 관건이 되는 개념이다. 근대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호명 개념은 근대 주체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호명 개념에서 주체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한 메커니즘의 파생물로서,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주체는 정의상 종속적인 주체인 셈이며, 근대 철학의 가정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종속화'의 산물인 셈이다. 근원적으로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되는 주체가 사실은 종속화의 산물이며 주체의 자율성 주장은 사실은 이러한 종속화의 메커니즘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면, 근대성의 원칙 자체가 근원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구성적이면서 또한 실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데올로기 개념이 구성적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허위 의식이나 가상 또는 왜곡이나 기만으로 치부하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여기에는 맑스와 엥겔스 자신도 포함된다)과 달리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주체를 구성하는 기능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튀세르 이전까지는 누구도 이데올로기가 주체 개념과 본질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반면, 알튀세르 이후 이데올로기에 관한 거의 모든 논의는 종속화와 주체화의 변증법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실정성은,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부정적인 것, 곧 지배하고 종속시키고 기만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자립적인-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의미에서-영역이라는 것, 능동적인 정치적 활동의 장소이자 지주라는 것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그에 앞서 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으로 구성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가 지속된다는 당시로서는 아주 충격적인 테제를 제시하면서도 이것이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과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처럼 이데올로기의 실정성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갖는 부정성, 따라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할 필연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내지 노동자 계급과 이데올로기의 외재성을 전제하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과 달리, 이데올로기의 구성적 기능과 실정성을 강조하는 알튀세르에게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부정성을 사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알튀세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데올리를 정치사회학적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데올로기는 사소한 개념이 되거나 (왜냐하면 일종의 집단적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되기 때문에) 아니면 상대주의적인 개념이 된다. 곧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수용을 전제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절대적이거나 해방적인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또 하나의 길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론적 상이성 또는 적어도 불균등성을 강조하는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론적 상이성 또는 적어도 불균등성을 강조하는 길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두 계급의 관계는 단순한 모순 관계가 아니라 불균등한 모순 관계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두 계급은 동일한 역사를 갖지 않으며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지 않고 동일한 수단을 갖지 않으며 … 동일한 계급투쟁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양자 사이의 관계를 불균등 모순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표현을 넘어서 일종의 존재론적 테제를 제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가 계급과 본성상 상이한 계급이 아니라면, 양자 사이의 계급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고, 곧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이행은 해방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생각한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또는 적어도, 생산력과 생산과계 상이의 모순이라는 저 유명한 진화론적·경제주의적 도식에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 이행의 필연성을 사고하려면, 두 계급 사이의 비대칭·불균등성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우발성의 유몰론 또는 체계 안에서 체계를 벗어나기


영국에서 일어났던 인클로저 운동이 결국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성으로 귀결되었던 과정을 묘사하는 이 대목에서 알튀세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운동을 발생시켰던 원인과 그 결과 및 효과 사이의 괸리, 일탈이다. 알튀세르가 이러한 괴리와 일탈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과정을 시작한 원인과 그 과정이 전개된 끝에 산출된 결과 사이의 이러한 괴리야말로 이 과정(더 나아가 모든 역사적 과정)의 근원적인 비목적성을 나타내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튀세르에 따를 때 근원적인 비목적성이아야말로 유몰론의 진정한 징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괴리와 일탈은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려는, 따라서 유물론의 우위에 변증법을 종속시키려는 알튀세르의 관심에 잘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변증법에 사로잡히지 않는, 따라서 기존의 체계의 재생산의 원환에 사로잡히지 않는 돌발의 가능성, 근원적으로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결과가 산출된 이후, 이 결과는 이제 이 과정 속에 기입되어 있다. 곧 이 결과는 이 과정의 재생산 메커니즘 속에서 이 과정의 일부로, 이 체계의 일부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따르면 어떤 결과, 어떤 요소가 어떤 체계의 한 요소로 생산되는 과정과 그러한 체계가 성립한 이후 이 요소가 그 체계의 요소로 재생산되는 것은 엄밀히 구별되어야 할 두 가지 상이한 사태, 두 가지 상이한 논리이며, 양자를 혼동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결국 마주침의 유물론 내지 우발성의 유물론에서 알튀세르가 고심했던 문제는, 어떤 체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요소, 그 체계의 재생산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그러한 재생산을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재생산에 대해 이질적으로 남아 있는 요소, 따라서 그 체계의 바깥에 있는 요소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5.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