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철학)

알튀세르와 청년 맑스 - 피에르 마슈레, 최정우 역.

바람과 술 2017. 12. 24. 02:15

정치적인 측면의 문제는 다음의 사실과 관련된다. 즉 정의상 성숙기의 맑스 저작 이전에 위치하는 청년 맑스의 저작은 성숙기 저작이 충분히 전파되고 연구된 후에 재발견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는 글자 그대로 '수정주의적' 기획의 경우에 해당되었다는 것. 


알튀세르는 맑스의 사유를 이렇게 이해하는 방식이 두 가지 전제에 상응한다고 설명하는데, 하나는 분석적인 전제이며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인 전제이다. 그런데 이 두 전제는 공히 세번째 전제를 선결 조건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관념들의 역사를 그 고유의 요소로 간주하고, 그러한 관념들 자체의 역사에 상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기며, 또한 이데올로기의 세계가 그 자체로 고유의 이해 원리라고 생각하는" 전제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인지적 자족성"이라는 이러한 펴년은 이론의 물질적-실질적 성격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것 외에 다른 토대를 갖지 않는다. 이론의 이러한 물질적-실천적 성격은 단순히 관념들의 질서의 내적 배치에만 국한되지 않는 어떤 역사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한 사유의 발생, 곧 맑스 사유의 발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번째 원리는 "각각의 이데올로기는 그 고유한 문제틀에 의해 내적으로 통일된 실제적인 전체로 간주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의미를 변질시키지 않고서는 거기서 하나의 요소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원리는 "그 전체의 의미, 곧 한 독특한 이데올로기(여기서는 한 개인의 사유)의 의미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어떤 진리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이데올로기적 장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장을 지탱하고 그것에 반영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과 사회적 구조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한 독특한 이데올로기의 발전이 갖는 의미는, 그러한 발전이 그것이 진리로 간주되는 기원이나 종말과 맺고 있는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발전 안에서 이 독특한 이데올로기의 변동들과 그 이데올로기적 장의 변동들 및 그러한 변동들을 지탱하는 사회적 문제들·관계들의 번동들이 맺고 있는 현존하는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첫번째 원리의 언표가 '문제틀'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두번째 원리의 언표가 첫번째 원리와는 분명 달라져 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단절된 것은 아닌 의미 작용 속에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준거를 드러내 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번째 원리가 내재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냈다면, 이러한 첫번째 원리를 부분적으로 반박하는 두번째 원리는, 한 '사유의 경험'이 단지 조직된 전체가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기입하는 실제적 장소로부터 연유한 어떤 선동의 압력에 의해 무언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운동 중인 집합이라는 관념을 도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유의 경험이란, 어떤 특저한 사회적 구조이자 그 구조가 포함하며 또한 그 구조 자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이는 곧 세번째 원리의 언표로 이어지는데, 이 원리는 명백히 외재적인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첫번째 원리의 대척점에 있다. 이러한 세번째 원리는 "한 독특한 이데올로기의 발전을 추동하는 원리는, 그 이데올로기 자체의 안쪽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바깥쪽에, 곧 그 독특한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이 이데올로기의 저자이며, 또한 이러한 개인과 역사를 복합적으로 연결하는 관계에 따라 그의 개인적 발전 안에 반영되어 있는 실제적 역사이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이러한 원리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원리들이 아니라 과학적 원리들"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과학은-그 고유의 질문 방식을 통해 대상들을 재창조하고, 따라서 이 대상들에 대해 단지 '-의 진리'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일에만 골몰하는 방법의 문제만이 아니라 '-의 위한 진리'를 생산해 내는 '이론의 문제를'을 제기함으로써-자신에 고유한 수단들을 통해 문제화할 수 있게 된 대상들만을 고려할 뿐이다. 


우리는 한 사유의 구조가 지닌 통일성이 최종 심급에서 이론적인 토대가 아니라 실천적인 토대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왜 중요한가?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의 연쇄가 지닌 두 개의 끝단을 포착하는 일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 끝단이란, 한편으로는 결정된 의미 작용의 효과들을 생산하는 어떤 이론적 구조의 통일성을 포착하는 일이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구조가 그 내적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구성하면서 어느 지점까지 다소간의 불안정성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를 측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불안전성은, 이론적 구조가 실제적 문제들과 함께 하나의 구성 요소로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정세로부터 그러한 이론적 구조에 전달되는데, 이러한 이론적 구조는 그 자신의 고유한 수단들, 곧 자신의 이론적 수단들을 통해 그러한 역사적 정세에 반응한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통일적이면서 동시에 불안정한 특성을 띠는 이러한 사유의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모순된 특성 때문에 또한 그러한 사유의 구조는, 이데올로기가 이론적 문제들과 실제적 문제들을 동시에 다루면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두 종류의 난점인 내적이고 외적인 난점들을 지닌 재구성의 영속적인 운동 안으로 끌려들어 가고 내던져지는 것이다. 이러한 재구성의 운동이 논리적 조건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그러한 운동의 도착점은, 그러한 도착점이 있다고 해도, 그 운동의 출발점에서 준비되거나 예고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사유를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대해 알튀세르가 섰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철학자는 그것을 그 자체로 사유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사유한다."


우리가 '사물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학적인 인과적 개입이라는 의미에서 사유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곧 사유가 사물들로부터 유래하거나 사물들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물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것들과 나란히 사물의 요소를 이루면서 사물들의 질서에 속하고 또한 사물들의 본성에 속하는 한에서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유의 발생이란 이렇듯 정확히 극적인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