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김상근, 21세기북스, 2010, (150414).

바람과 술 2015. 4. 14. 23:20

프롤로그 -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곳에서 6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은 피렌체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너무 많은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예술 작품 앞에서 그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천재적인 예술 작품을 보다가 쓰러질 것 같은 감동에 사무치는 현상을 그때부터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비아 트레첸토- 14세기의 길 12

13세기가 서서히 저물어가던 1284년, 토스카나 출신의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피렌체의 성벽을 재건축했던 사건이 중요하다. 경제가 급성장하고 도시의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자 피렌체의 도시 경계선은 급속도로 팽창한다. 도시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피렌체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새로운 피렌체 성벽이 건축되고 도시가 확장되자 그동안 도시의 경계선 밖에 거주하면 많은 사람이 '치타디노', 즉 피렌체의 '시민'으로 편입되었다. 시민이란 '치타(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피렌체에서 태동한 르네상스는 이 시민계급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미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급격하게 증가한 시민계급은 피렌체의 르네상스적 운명을 결정짓는 변수가 되었다. 물론 16세기 중엽부터는 메디치 가문의 대공에 의해 군주국으로 통치되었지만, 피렌체는 근본적으로 시민의 도시에서 출발했고 모든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공화제의 전통을 선호하는 도시국가의 명맥을 이어왔다. 피렌체는 건강한 시민의 자발적 정치 참여가 보장되던 곳이었고, 이런 시민의 사상적·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가 태동할 수 있었다. 


14세기 피렌체의 사회적 갈등과 긴장은 기벨린당과 겔프당의 각축전에서 축발되었다. 기벨린당과 겔프당의 어원은 12세기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경쟁 가문이었던 바이블링겐 가문과 벨프 가문의 이름에서 각각 따왔다. 따라서 이 용어들은 원래 이탈리아의 정치적 긴장을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라 범 유럽적 정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벨린당은 유럽의 세속 권력을 상징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정치적 노선을, 그리고 겔프당은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추종하는 종교적 노선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중세 말기 유럽에 등장한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이다. 독일 남부 지방의 지독했던 당파 간 대결은 이탈이아 정치와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피렌체를 포함한 중부 이탈리아에서 이 용어들이 중요한 정치적 파벌의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260년대에 프랑스가 나폴리를 차지하면서부터다. 프랑스와 프랑스 남부 지방인 프로방스, 피렌체가 있는 중부 이탈리아, 그리고 나폴리가 있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정치적 주도권을 인정하던 이탈리아의 겔프탕이 득세한 것이다. 반면에 당시 황제를 지지하던 기벨린당은 신성 로마 제국의 아성인 독일 남부 지방의 정치 세력과 밀라노의 비스콘티 권력을 지지하고 있었다. 겔프당은 프랑스의 정치적 주도권을 인정하던 교황 지지파였고, 기벨린당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주도권을 인정하는 황제 지지파였다. 피렌체의 경우, 새로운 경제 실력자로 부상하던 신흥 상인계급은 대부분 겔프당에 포함되어 있었고, 전통을 자랑하던 귀족 가문은 대부분 기벨린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겔프당의 내부 분열도 14세기 초반에 일어났다. 원래 겔프당은 교황 지지파였으나, 내부 분열이 일어나 교황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흑당과 이를 반대했던 백당으로 갈리게 되었다. 한편 황제 지지파였던 기벨린당은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세력이 약해졌다. 1289년 피렌체 주변의 농촌에서 중세의 근간이었던 농노제도가 폐지되었고, 당시 많은 농촌의 인구가 피렌체 도시 성곽 안으로 유입되었다. 이것은 농촌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던 기벨린당에 치명타가 되었다. 기벨린당에 우호적이었던 농민들이 피렌체 시내에 거주하며 겔프당을 지지하는 신흥 상인계급의 임금노동자가 되면서 빠르게 '교황 지지파'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겔프당을 주도하던 신흥 상인계급은 파르테 겔파를 조직하여 정치·주도권을 유지해갔지만, 점차 길드의 정치적 힘이 증대하면서 겔프당도 힘을 잃어갔다. 14세기로 접어든 피렌체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함에 따라 정치 세력보다 경제 단위였던 길드가 더 큰 정치적 역량을 확보해갔기 때문이다. 14세기 초부터 겔프당과 기벨린당의 대립과 경쟁이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자 시민 상공업자들이 길드를 조직하여 피렌체를 하나의 거대한 정치·경제 공동체로 결속해나갔다. 길드는 시민상공업자들의 자치 경제조직이었으나 피렌체 정치와 행정의 실제적인 주체로 확대된다. 길드는 피렌체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의 골격을 이루는 기본 단위다. 길드의 대표성을 통해 펼쳐졌던 피렌체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르네상스 정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경제 단위였던 길드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강력한 '시비타스', 즉 적극적인 '시민 의식'을 심어주었다.     


1. 비아 단테 - 단테의 길 24


2. 비아 페트라르카 - 페트라르카의 길 36


단테가 토스카나 방언으로 르네상스를 시작했다면, 페트라르카는 유려한 라틴어로 고전 부활의 르네상스를 본궤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단테가 중세를 마감한 인물이라면, 페트라르카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페트라트가가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정신의 요체는 "인간은 어떻게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고매한 덕성을 가진 인간, 이것이 바로 페트라르카가 추구했던 인문주의 정신의 목표였다. 본인 스스로 고위 성직자였지만 페트라르카는 기독교 신앙만으로는 '고매한 덕성을 가진 인간'이 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비뇽과 로마에서 전개되었던 치욕스러운 교회의 대분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페트라트카가 발견한 덕성 회복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고전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페트라르카의 이런 주장은 고대 문화의 부활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찬란히 빛났던 고대 로마 문명의 시대, 어둠의 중세, 그리고 새롭게 부활되는 인문주의의 시대로 3등분함으로써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적 개념의 기초를 놓았다. 

 

3. 비아 보카치오 - 보카치오의 길 43


4. 비아 조토 - 조토의 길 54

비아 콰트로첸토- 15세기의 길 66

15세기 전반과 후반은 사상적으로 매우 상이한 철학적·문화적 분위기가 피렌체의 정신을 지배했다. 15세기 전반이 합리성과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내재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기였다면, 15세기 후반은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초월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시기였다. 한 세기 안에서 발생한 이 현격한 차이를 선도한 가문이 있으니, 바로 피렌체 르네상스의 최대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이다.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다. 르네상스 역사에서 15세기 전반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시기에 과학적 선원근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의 모습을 객관화할 수 있는 예술의 힘이 생긴 것이다. 이로써 세상은 작가의 눈을 통해 분석되고, 이러한 분석의 결과가 예술품이라는 결과물로 창출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사의 발전이 아니라, 사고의 혁명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인류는 자연을 관찰하고, 객관화하고, 이를 사실처럼 마음껏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 비아 브루니 - 브루니의 길 71

'교회의 대분열'은 르네상스 역사 전개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15세기 르네상스 운동의 내면을 파악하려면 '교회의 대분열'이 안고 있는 모순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복잡했던 전개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교회의 대분열'은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담합하여 이미 로마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이탈리아 출신 교황을 대신해 임의로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아비뇽에서 즉위시킨 사건으로 촉발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교황권을 놓고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서고 격돌한 것이다. 이로써 가톨릭교회 안에 교황이 둘이나 존재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초래되었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간단하다. 교황청 본부가 자국의 영토였던 아비뇽에서 이탈리아의 로마로 옮겨진 것에 불만을 품었고, 프랑스를 '가톨릭교회의 여왕'으로 만들고자 프랑스 출신의 교황을 임의로 선출한 것이다. 유럽 모든 국가가 이 문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이미 교황청이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에 분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교황이 피사에서 등장한다. 한편 1414년부터 1418년까지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고자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새로운 결정이 내려졌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인 베네딕투스 13세와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12세, 그리고 피렌체의 지지를 받고 있던 교황 요하네스 23세를 모두 폐위시키고, 그 대신 로마 교황청만 인정하되 새로운 교황으로 마르티누스 5세를 즉위시켰다. 세 개의 교황청을 한곳으로 통합한 마르티누스 5세의 로마 교황청 즉위로 '교회의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1401년 무렵에 저술한 브루니의 <피렌체 찬가>는 시민적 인문주의의 근원에 대한 모색이다. 그는 피렌체에서 공화주의적 시민의 자유 의식이 처음 탄생했다고 본다. <피렌체 찬가>는 시민적 인문주의의 찬가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적 가능성을 예찬한 일종의 선언문이다. 로마에서 귀환하여 집필한 <피렌체 시민사> 역시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리는 인문학적 신호등과 같았다. 브루니는 이 책에서 인류의 역사를 고대, 중세, 현대로 3등분했다. 


2. 비아 알베르티 - 알베르티의 길 82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는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다. 이 용어가 14~16세기의 문화적 현상을 지칭하는 보편적 학술 개념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스위스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가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출간했기 때문이다. 미슐레와 부르크하르트의 공헌이 시대정신을 한 단어로 축약시킨 것이라면, 그 시대정신의 예술적 가치를 명확하게 규정했던 인물은 15세기의 위대한 르네상스 이론가 레온 바리트사 알베르티다. 르네상스 운동의 가시적 결과가 회화·건축·조각이라는 3대 조형예술의 장르로 나타났다면, 알베르티는 르네상스 예술 운동의 출발점에서 서 있는 인물이다. 알레르티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의 덕목이다. 따라서 예술은 공공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인간다운 이유는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미적 추구는 반드시 공공의 선을 이루는 목표 아래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알베르티의 이러한 이성 중심주의는 중세 가톨릭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고대 철학에 기초한 인문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했다. 알레르티에 따르면, 예술은 '공공의 선'을 위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공공의 선을 이루어야 할 '건축'은 시민들의 활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시민들의 유기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기초 단위로서 건축이라는 조형예술 장르가 연구된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을 도시의 건축물은 시청사·성당·다리·극장과 같은 공공 건축물, 중요한 귀족 가문을 위한 대형 건축물, 그리고 평범한 서민을 위한 소형 건축물로 구분되어 각각 다른 목적과 방법으로 설계되어야 했다. 15세기 전반에 피렌체 르네상스의 미학을 완성시킨 알레르티에게 아름다움이란 개인의 주관적 취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전체와 부분의 조화가 아름답다고 인식될 때 구현되는 것이었다. 알베르티에게 아름다움이란 개인의 취향이나 느낌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에 의한 조화와 질서의 문제였다. 따라서 알베르트의 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을 기초로 한다. 알베르트의 르네상스 미학은 15세기 후반부터 신플라톤주의 철학이 피렌체의 사상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 당당했던 위세를 서서히 잃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고 플라톤이 돌아옴으로써 15세기 르네상스 예술은 완전히 새롭게 변신한다.  


3. 비아 브루넬레스코 - 브루넬레스코의 길 92 


1415~1420년 사이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브루넬레스코는 원근법의 수학적 기초를 밝혀내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시노리아 광장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성 세례요한 부근을 정확히 삼차원으로 재현한 패널로 알베르티와 도나텔로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알베르티는 로마에서 귀환한 브루넬레스코와 교루하면서 선원근법의 이론적 기초를 완성하게 된다. 브루넬레스코의 최대 공헌은 이차원 평면에 높이, 길이, 그리고 넓이가 조화를 이루며 삼차원의 실재처럼 보이게 만드는 선원근법을 알베르티와 함께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선원근법의 발전은 서양미술사에 '눈속임'이 등장하는 첫 번째 단계다. 이차원 평면에 삼차원의 실재가 존재하는 것 같은 '눈속임'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던 이미지를 사실처럼 구체화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를 이루게 되었다. 브루넬레스코가 발전시킨 선원근법은 사물에 대한 기억을 사실처럼 보이게 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브루넬레스코는 선원근법을 통해 실재하는 세상을 실재하는 것처럼 재현함으로써 세상을 철저하게 해석하려고 했던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확장한 인물이다. 


4. 비아 도나텔로 - 도나텔로의 길 109


1420년대, 피렌체로 귀환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코는 곧바로 장안의 화제 인물로 떠올랐다. 로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건축과 조각의 신예가 선원근법이라는 혁신적인 미술 이론으로 피렌체 예술가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도나텔로 역시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 입체 조각상 제작에 착수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도나텔로의 조각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였던 중세의 예수는 처음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자 가장 거룩한 구세주의 얼굴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성스러움의 일상화, 아니 일상의 성화가 조형예술의 3대 장르인 건축, 조각, 그리고 회화에서 구현되는 것이 15세기 전반 피렌체에서 일어난 예술의 혁명이었다.  


5. 비아 마사초 - 마사초의 길 128

6. 비아 아르티스티 미노리 - 아르티스티 미노리의 길 140

(1) 기베르티 141

(2) 프라 안젤리코 147

(3) 미켈로초 152

(4) 우첼로 158

(5) 델라 프란체스카 163

(6) 베노초 고촐리 166

(7) 베로키오 170

(8) 기를란다요 175

(9) 다빈치 181

(10) 라파엘로 192

비아 메디치- 메디치의 길 206

1. 비아 코시모 데 메디치 - 코시모 데 메디치의 길 210

메디치 가문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메디치'라는 단어가 의술과 연관이 잇고, 가문의 문장이 여섯 개의 알약처럼 보이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의 조상이 의술과 연관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여섯 개 혹은 그 이상의 알약을 어떤 사람은 금화와 같은 화폐의 무게를 재는 추의 종류라고 해석해서, 메디치 가문이 이미 조상 때부터 환전상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2. 비아 로렌초 데 메디치 - 로렌초 데 메디치의 길 224

3. 비아 플라토니 - 플라토니의 길 237

(1) 마르실리오 피치노 240

피치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어왔던 진정한 플라톤을 복권시키면서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 철학을 극적으로 화해시킨다. 그는 플라톤을 '아테네에서 그리스어로 말하던 모세'와 같은 인물로 평한다. 신의 본질과 플라톤의 이데아를 동일하게 보았던 피치노는 '모세와 플라톤의 일치'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원류를 합치시키는 놀라운 사상적 통합을 시도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치노는 이 세상을 '계층'이 존재하는 곳으로 보았고, 가장 높은 곳에 절대자인 하느님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은 낮은 계층에서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 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세상을 이해했다. 인간의 이성은 신과 합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순수한 것이고,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인간의 삶이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피치노의 사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개인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는 철학적·신학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인간을 "육체 속에 갇혀 있지만, 신의 지성에 참여할 수 있는 이성적인 영혼"이라고 보았다. 피치노가 인정했던 인간의 가능성은 인간이 신적 본질에까지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인간 영혼에 대한 가능성의 긍정은 영혼불멸설로 이어졌고, 결국 이런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개인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2) 폴리지아노243

(3) 피코 델라 미란돌라 246

4. 비아 보티첼리 - 보티첼리의 길 251

5. 비아 미켈란젤로 - 미켈란젤로의 길 257

(1) 피렌체 제1기 259

(2) 피렌체 제2기 278

(3) 피렌체 제3기 288

에필로그 : 피렌체 르네상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 306


르네상스가 단일한 직선과 같은 예술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는 항상 복수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것이 문법적으로 어색하다면 최소한 '르네상스의 여러 가지 흐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