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아일랜드 대기근], 피터 그레이, 장동현, 시공사, 1998, (150501).

바람과 술 2015. 5. 1. 04:53

001. 거지의 나라? 1845년 이전의 아일랜드


1845~1850년의 대기근을 필연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해도, 세 가지 상호연관된 문제점이 없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전반적인 빈곤, 인구과잉, 그리고 감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라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1741년을 '블리아드하인 안 아이르(학살의 해)'라고 불렀다. 당대 사람들은 기근을 정치적 책임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기근구제는 국가의 의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002. 감자마름병의 출현, 1845-1846년 

003. 대기아, 1846-1847년 

굶주림이 직접 원인이 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굶주림에 따른 영양실조는 치명적인 질병을 동반했다. 


004. `회복`에서 반란으로, 1847-1848년 

005. 재발, 1848-1851년 

006. 대이동, 1846-1855년의 이민 

18세기에는 수천 명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에 정착했다. 이 초기 이민자들은 아일랜드 북쪽에서 건너간 장로교도들이 많았고, 신교도와 카톨릭도 일부 있었다. 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대이동이 1815년에 다시 시작되면서 그 숫자도 늘어났고, 카톨릭의 비율도 높아졌다. 1845년 전가지 약 100만 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주로 캐나다와 미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공업도시로 진출하는 예도 많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경비가 비싸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소수만이 이민을 갈 수 있다. 이민자의 대다수는 아일랜드의 영어 사용 지역과 상업이 발달한 지역 출신이었다. 


007. 에필로그 : 대기근이 남긴 유산


대기근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는 바로 아일랜드어였다. 18세기에도 영어 사용층이 꾸준히 늘어났지만 1845년까지 400만 명이 아일랜드어를 썼다. 그런데 죽거나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주로 아일랜드어 사용층이기에, 1851년에는 아일랜드어 사용자수가 반으로 줄어든다. 대기근은 아일랜드어와 가난 또는 후진성을 더욱 강하게 연관시켰고, 아일랜드어를 버릴 것을 더욱 종용했다. 

 
008. 기록과 증언 

009. 참고문헌 

010. 그림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