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배움

[사토 마나부, 학교개혁을 말하다], 사토 마나부, 손우정/신지원 역, 에듀니티, 2016, (161202).

바람과 술 2016. 12. 2. 21:04

역자 서문


사토 마나부 교수는 학교개혁의 필요성을 21세기 사회의 변화로부터 찾고 있으며 21세기형 학교는 21세기 사회변화에 부응하기 위하여 '교육의 질과 평등을 동시에 추구하는 학교 학교', '프로젝트형 교육과정' 그리고 '협동적인 배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1부 학교개혁을 말하다_ 배움의 공동체의 구상과 실천

들어가며- 개혁의 시작과 고조

21세기 사회와 학교

우리에게 익숙한 학교는 '근대학교'라 불리는 것이며, 국민국가의 통합과 산업주의 사회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를 주요한 모티브로 조직되어 왔다. 세계화는 이 두 가지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OECD 가맹 34개국, 소위 선진국의 국가교육과정을 보면 다음 4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① 지식 기반 사회에의 대응 ② 다문화 공생사회에의 대응 ③ 격차 및 위기 사회에의 대응 ④ 성숙한 시민사회에의 대응. 


'21세기형 학교'는 또한 '질과 평등을 동시 추구'를 근본원리로 하여 구상된다. 산업주의에 의해 경제발전을 이룬 개발도상국의 교육개혁은 지금도 '양'의 달성이 중심 목표이다. 


'21세기형 학교'의 교육 양식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변화는 먼저 교육과정이 '프로그램 형'에서 '프로젝트 형'으로 이행했다. '프로그램 형'은 공장생산 시스템의 조립라인(컨베이어 시스템)을 원형으로삼는 교육 과정 양식이며, 계단을 한 단 한 단 오르듯이 교육과정이 조직되어 '목표-달성-평가'의 활동 단위에 의해 단원이 조직되어 있다. '프로젝트 형'은 '주제-탐구-표현' 단원으로 조직된 교육과정이며, 등산과 같이 배움의 길이 다양하며 배움의 경험 그 자체의 발전성을 추구한다. 또한 '프로그램 형'에서는 '달성목표'와 '결과의 평가'(효율성과 생산성)가 중시되는 반면, '프로젝트 형'에서는 배움의 경험의 '의미'를 추구하며 그 '가치'를 질적으로 평가한다. '프로그램형'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일방적이며 좁은데 비해 '프로젝트 형'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두 번째로는 일제식 수업에서 협동적인 수업으로의 전환이다.     


배움의 공동체의 비전과 철학

배움의 공동체 학교개혁은 3가지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3가지는 공공성의 철학과 민주주의 철학, 탁월성의 철학이다. 


'민주주의'란 존 듀이가 정의하듯이 '다른 이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배움의 공동체의 활동 시스템

협동적인 배움에 의한 수업개혁

첫 번째는 협동적인 배움은 배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한 명도 빠짐없이 학생의 배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협동적인 배움을 통해 학생들끼리 서로 배우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소그룹의 협동적인 배움이 저학력 학생의 학력을 회복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기때문이다. 네 번째는 협동적인 배움이 학력이 높은 학생들에게도 더 높은 학력을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보통 배움의 공동체 학교의 협동적인 배움에서는 누구나 다 이해해야 하는 '공유 과제(교과서 수준)'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도전하는 '점프 과제(교과서 수준 이상)'의 두 가지 과제로 수업을 디자인하고 있다. 


학력향상의 가장 큰 비결은 학력향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학력향상은 배움의 경험이 향상된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교사 간의 동료성의 구축

교사의 성장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장인으로서의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문가로서의 성장이다. 장인으로서의 성장은 '기법'과 '스타일'의 획득이며, 그 방법은 '모방'이다. 그에 비해 전문가로서의 성장은 '실천과 이론의 통합'이며, 그 방법은 '케이스 메소드'(사례연구=수업연구)이다.  

보호자와 교육위원회와의 연계

'학습 참가'의 효과는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수업참관을 '학습 참가'로 전환한 학교에서는 보호자의 참가율이 대거 상생했다. 또한 '학습 참가'를 학기마다 실시하는 학교에는 학부모나 지역의 항의가 없어진다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다. 


국내외의 네트워크

배움의 공동체 학교개혁은 '운동'이 아니라 '네트워크'이다. 


지역에 파일럿 스쿨을 만들자

2부 수준별 지도를 말하다

급속히 퍼져가는 수준별 지도

교사가 교육전문가라고 한다면 의사의 의료 실수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교육 실책에 대해서도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다. 


수준별 지도는 시대착오다!

수준별 지도는 유효한가

능력별 교육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첫 번째로 학교의 종류에 따른 능력별 교육이 있다. 두 번째는 학교 안에 다양한 코스를 두는 능력별 교육이다. 세 번째는 '스트리밍'에 의한 능력별 교육이다. 하나의 학교 안에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진로별 코스를 설정하는 방식이다. 네 번째는 '수준별(능력별) 지도'에 의한 능력별 교육이다. 다섯 번째는 학교 선택에 의한 능력별 교육이다.


산업주의 사회의 노동시장은 일부 엘리트와 대다수의 단순 노동자로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했다. 거기서 요청되는 것은 '효율성'과 '효율성'을 둘러싼 경쟁이다. 그러나 포스트 산업주의 사회는 지식이 고도화, 복합화, 유동화되었다.  


수업개혁에 의한 협동적인 배움으로


비고츠키는 학생들의 정신발달을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내화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정신발달은 먼저 대인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다음으로 그것을 내화하는 개인 내의 심리 과정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고츠키는 발달단계에 맞춘 교육을 '발달을 뒤좇아 가는 교육'이라며 비판했다. 비고츠키는 '혼자서 도달할 수 있는 단계'(현재의 발달 수준)과 '다른 이의 도움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단계'(내일의 발달 수준) 사이의 영역을 '근접발달영역'이라 이름 짓고 교육은 '근접발달영역'에 맞추어 실시해야 한다고 제창했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과 '내화' 이론에 의거해서 배움을 3가지 대화적 실천으로서 정의한다. 배움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자 대화의 실천(인지적 실천)이며, 다른 이와의 대화의 실천(대인적 실천)이며, 자기 자신과의 대화의 실천(자기 내적 실천)이다.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업개혁의 포인트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학력 향상의 포인트를 직접적인 학력향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 것에 있다. '협동학습'에서 교사는 모르는 학생을 잘 아는 학생이 도와주는 '가르쳐 주는 관계'로 이끌기 쉬운데 '가르치는 관계는 일방적이며 '협동학습'을 빈약하게 만든다. '서로 가르치는 관계'와 '서로 배우는 관계'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서로 가르치는 관계'는 참견하는 관계이고 '서로 배우는 관계'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배려의 관계이다. 


3부 학력을 묻는다_ 배움의 교육과정

학력문제의 혼란

학력의 실태-무엇이 문제인가

위기의 배경-학력신화의 붕괴

3가지 측면에서 학력은 화폐이다. 첫째, 학력은 평가 기준으로 기능한다. 둘째, 학력은 교환수단으로 기능한다. 셋째, 학력은 저축수단으로 기능한다. 


기초학력의 복고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나는 기초적인 지식이나 기능일수록 반복적인 연습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기능적으로 습득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준별 학습지도와 소인수 지도는 유효한가

왜 학원에서는 수준별 학습지도를 기본으로 하고 학교에서는 수준별 학습지도를 도입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1960~1970년대 영국의 능력별 편성의 폐지에서처럼 수준별 학습지도는 공립학교가 입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차별 교육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수준별 학습지도를 도입해도 교사의 수가 늘지 않는다면 조직이 복잡해질 뿐이며 오히려 지도에 곤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학교수업과 학원수업을 비교하면 일목요연해지지만, 학교의 커리큘럼이나 수업은 소정의 지식과 기능을 단계적으로 배우는 학원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네 번째로, 이 지도법이 학교에 도입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 방법이 그리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배움’을 위하여


공부는 시대는 끝났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행복도 없고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시대의 감수성으로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아이들은 공부의 세계와 떨어져 배움의 세계를 찾아 방황하고 있다. 공부의 세계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에도 부딪치지 않고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는 세계이며 쾌락보다 고통을 존중하고 비판보다는 순종을, 창조보다는 반복을 중시하는 세계였다. 공부의 세계는 장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세계이며, 그 희생의 대가를 재산이나 지위, 권력에서 찾는 세계였다. 또한 공부의 세계는 사람과 사람의 끈을 끊어 버리고 경쟁을 부추겨 사람과 사람을 지배와 종속관계로 몰아가는 세계였다. 배움의 세계는 대상이나 타자 그리고 자기와 끊임없이 대화하는세계이다. 자기를 내면에서부터 허물어뜨려 세계와 확실한 끈을 엮어가는 세계이다. 고독한 자기성찰을 통해 사람들의 연대를 쌓아 올리는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 땅으로 자신을 도약시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의 것으로 연결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자기 행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행복으로 이어지는 많은 타자와 함께 행복을 탐구해 가는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