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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을 찾아서 중 <민중 담론의 등장>

바람과 술 2019. 10. 21. 12:15

빈민지역에서의 공동체운동은 이름 없는 백성이 자신의 권익을 찾아나가는 한국 민중운동사의 일부분이다.


민중이 담긴 의미의 변천


‘민중’은 역시 같은 의미의 ‘인민’이라는 단어와 함께 1920년대부터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여 왔는데, 해방 직후 좌우가 대립하는 초기 구도에서는 ‘인민’이 ‘민중’을 압도하는 양상이었다. 이후 좌익 세력이 패퇴하면서 우익 세력과 미 군정이 선호하는 ‘민중’이라는 용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인민’이라는 표현은 좌파가 즐겨 쓰는 불온한 단어로 인식되면서 아예 남한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민중’이라는 낱말에는 역사의 주체라거나 저항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경찰이 스스로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민중은 저항의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가 권력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수동적 대중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 연설할 때 민중이라는 단어를 더러 사용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민중’이 지배층과 대비되는 피지배층, 특권층과 구별되는 서민 대중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저항 주체의 핵심을 가리키는 정도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민중이 역사의 중심 주체이자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라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민중의 개념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담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관해서는 한국 근대사를 실패라고 규정하는 인식론과 산업화를 원인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1970년 무렵부터 ‘민중’이라는 용어는 학생운동, 기독교운동, 노동자․농민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민중 담론은 특히 문학과 신학의 영역에서 풍성하게 자라나 다른 운동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 민중 담론의 핵심은 역시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명제였는데, 이는 민중이 항상 역사의 주인 노릇을 성공적으로 해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올바른 주인 노릇을 못하는 시대에도 엄연히 역사의 주체로서 활약한다”라는 주장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민중은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히 억압받고 착취받는 자이며 소외된 자로서 이 잘못된 세상의 질서에 저항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 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에서는 예수 자신이 민중이며 또한 민중의 해방자다. 민중신학은 고난받고 수난당하는 한국 현대사의 민중의 모습을 예수의 모습과 동일시했다. 민중신학자 중 한 사람인 안병무는 “민중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전태일 사건에 자극되어 생겨난 것”이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CCK)가 ‘눈을 떠서’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산업선교회가 생겨났고 인권위원회가 발족되어 이후 인권 투쟁이 계속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민중은 노동자나 농민처럼 육체노동을 통해 가치를 직접 생산하는 계층이지만, 성서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 때문에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역설했다.


1970년대 사회과학계에서도 민중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었다. 민족경제론은 주창했던 박현채는 민중을 “정치권력의 관점에서는 피지배 상태에 있는 사람들, 경제활동의 관점에서는 사회적 생산의 직접 담당자로서 노동 생산물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지위의 관점에서는 저변에 있는 피동적 성격의 사람들”이라고 설명하면서 “역사에 있어서 부나 권력, 그리고 명성이나 특권적 지위에 가깝지 않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민중에 대해서는 단일 계층이라기보다 자연히 여러 계층의 사람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편이 우세했고, 심지어 ‘중산층’까지도 포함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지식인에게 부끄러운 실패의 역사가 안긴 상처를 극복하는 길은 지난날의 역사에서 철저히 무시당해왔던 민중의 자리를 되돌려주는 것, 그들이 진정한 주체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반성 없이 친일 잔재 세력이 추진하는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언제나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반정부 지식인 그룹의 입장이었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정책에 매진하는 독재 정권이 ‘국가와 민족’, ‘국민’의 도리를 강조할 때, 역사의 모순을 자각한 지식인들은 무리한 산업화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민중’의 존재를 부각하고 그들을 섬길 것을 요구했다.


지식인과 민중운동


민중 담론은 지난날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또는 재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눈앞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실천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일련의 민중 담론에서 원래의 ‘민중’은 역사의 주인임에도 자신의 그러한 존재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조종당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잠자는 대중’의 상태로 그려졌다. 그리하여 무의식 상태의 민중은 잠에서 깨어나 자의식을 가지고 지배 집단을 비판할 줄 알며, 기존의 질서를 바꾸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능동적 민중’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창되었다. ‘민중을 올바로 이끌어야 할 사명’을 지닌 지식인은 민중에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돕고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 상정되었다.


민중 담론에서 입각한 사회운동에서는 민중이 겪고 있는 온갖 고초가 각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부당한 구조와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스스로 행동해야 함을 깨닫는 것을 민중의 의식 변화, 즉 ‘의식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의식화라는 말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변화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기보다는 대중의 변화를 촉진하고 유도하기 위해 지식인이 의도적으로 개입하고 움진인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도시의 저소득층 주민을 주체로 세우려는 사회운동에서는 일찍이 1970년대부터 ‘운동가는 운동가이기 전에 한 사람의 주민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수립했다. 주민의 삶 속에서 이슈가 될 문제를 발견하고 주민에게 신뢰와 인정을 받으려면 이들과 함께 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소득층 지역에서의 사회운동, 즉 지역 주민을 조직하는 운동은 철저히 주민의 이해와 욕우에 기반을 두어야 했기 때문에 주민의 생활상의 문제를 세심히 관찰하고 살피는 데서 시작되었다. 맞벌이를 위해 아이를 맡길 만한 탁아소나 유아원, 낮에 방치되어 있는 학생들을 돌봐줄 오늘날의 공부방과 같은 공간과 프로그램, 문턱이 높은 병원을 대신할 진료소, 긴급 생활 자금을 융통할 만한 서민금고, 청소년 노동자를 위한 교육의 기회 등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어떤 정치인이나 관료도 이에 무관심했다.


1970~1980년대에는 국가가 기본적이 생활 기반 시설이나 최소한의 사회 서비스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