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교사일기], 조재도, 실천문학사, 1988, (200409).

바람과 술 2020. 4. 10. 01:16

<봉급날>


고스톱 치자는 이선생님과

읍내 맥주 한잔 하러 가자는 김선생님과

헤어져 돌아오면

제일 먼저 날 맞이하는 것은

방 안에 널린 축축한 빨래다


오늘따라 기방이 무겁게 느껴진다

주당 삼십 시간 수업하고 받은 

봉급 삼십 삼만 구천 칠백 십원


고등학교 졸업하고

정비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 재천이의 월수 십 사만원을 생각하면

삼십 몇 만원은 분명 큰 돈이지만


평화시장 60촉 전구 밑

밤새워 칼질하고 다림질하여 받는

어린 누이동생들의 피 맺힌 돈을 생각하면

오늘 내가 받은 이 금액은

게임도 안될 만큼 엄청난 액수지만


돌아와 차인지급액 다시 한번 확인하며

동전까지 세어 보는 나의 가슴에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션생은 돈 따지면 안된다는데 

돈이 사람을 부르면 안된다는데

오늘따라 이 말이 밉기만 한 것은

선생도 노동자임을 아는 탓일까. 


<박 종 숙>


나는 종숙이가 

어떤 아이인지 모른다.


3교시 끝난 후 열린 임시 직원회 시간

교감 선생님께서

어제 우리 학교 2학년 8반 박종숙이란 학생이

가정의 빈곤함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음을 비관하여

농약 먹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나는 종숙이가

어떤 아이인지 모른다


키는 얼마나 크며

머리는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

가정형편은 친구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사실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종숙이의 집은 황도라고 했다

안면에서 버스 타고 40여 분 걸리는 곳

섬마을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언니는 무슨 야간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중속이네 집을 다녀온 담임 선생님은

눈이 빨개진 채 말씀하셨다

- 평소에는 명랑하고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 

중학교 2학년 애가 어떻게 약을 먹고

적었을까 생각하니 끔찍해요 -


그늘, 산업화와 문명, 아프게 깔려 있는

살점 살점들


안방에 놓여 있는 칼라 TV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롭다 외쳐댔지만

천 삼백 친구들은 너와 똑갗이

떠들고 공부하고 장난쳤지만


아무도 너의 아픔 열다섯 소녀의

쑤셔대는 가슴 보지 못했다

아무도 살 속 깊이 곪아가는

네 쓰라린 가난 보지 못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양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데불고 가는 것이

선생의 사명이라 말해지는 땅

생각하면 그 한 마리의 양은

혹 너 종숙이가 아니었을까

아니 아니 종숙이와 같은 가슴 앓으며

뒤쳐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 아닐까


같은 반 급우들도 기가 죽어

선생님의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비어 있는 종숙이의 자리를 보며

어떤 아이는 얼굴 묻고 어깨를 들먹인다


오늘 교무실에서

가정의 빈곤함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음을 비관하여

한 학생이 자살했다는 이야길 듣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하지만

키는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지만

복도를 오가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나도 또 다른 종숙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