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행복하다

[바우트 원 3], 장우룡, 레드리버, 2020, (211221)

바람과 술 2021. 12. 21. 11:59

추천사(김두만 장군)

 

추천사(종합밀리터리 채널 건들건들)

 

개정판을 내며

 

제1화 적, 그리고 친구

 

아홉 대밖에 없는 비행기니까 무슨 일이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말이죠.

이 아홉 대의 무스탕은 지금, 대한민국 공군 그 자체니까.

 

제2화 연에 새겨진 인연

 

이놈마저 포기해 버리면 우리에겐 고작 7대밖에 남지 않는데, 어떻게 ··· 제기랄. 그럴 순 없어 절대로!!

야!! 곽경필. 당장 탈출해!! 경필아!

아, 아네요. 어떻게 해서라도 기지까지 ···

이 미친놈아! 그 상태론 당장 이 산악지대를 벗어나기도 힘을 텐데 기지는 무슨 놈의 기지야!! 그냥 뛰어내려!!

곽 대위, 아직은 고도가 있으니까 충분해요. 침착하게 탈출하세요. ···

느, 능선을 이용해서라도 착륙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비행기를 잃을 순 없어요!!

곽 대위! 기체는 반드시 보충될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불시착하다가는 당신도, 그 기체도 더 이상 없어요. 당신과 한국 공군은 앞으로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살아요!! 곽 대위 당신을 선택해요!!

 

제3화 곽경필, 비행의 꿈을 키우다

 

일단 인사부터 드려라. 장개석 장군 휘하의 중국 공군으로 널 델꼬가실 분이야. 기래, 내 손주 경필이네.

자네가 곽경필이군. 반갑네. 난, 염신현 중위라고 하네. 자네를 중국 공군에 입대시켜 달라는 아버님의 부탁을 받고 왔어.


제4화 혼란의 조국

 

우리 손으로 얻어 낼 이 나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여기 세 젊은이가 형제의 맹세를 하다! 대한민국 이실칠년 정월 초하루. <신현 형, 찬식이, 나. 충칭에서, 1945. 2. 13.>

 

방금, 라디오에서 천황이 ··· 전쟁을 그만두겠대요. 

마, 무슨 소리야. 

일본이 ··· 연합국의 뜻에 따른다고 그래서 전쟁을 그만둔다고 ···

뭐? 전쟁이 끝나? 우린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제5화 남쪽으로

 

정말 모르겠다. 내가 왜 저 친일 앞잡이와 함께 같은 열차를 타고 있는 건지. 무슨 생각으로 지금 고향을 떠나고 있는지도 ···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영철이가 봤으면 또 한소리 했겠군.

 

제6화 다시, 서울

Flight Records 1 : 역사가 우리에게 건네준 기쁨이자 비극의 선물, 독립(獨立)이 아닌 광복(光復)

 

Flight Records 2 :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 6.25전쟁 공군 100회 출격 전우회

 

어떤 전쟁, 작전에 있어서 100회의ㅣ 임무를 해냈다는 것은 곧 그 작전에 100번 이상 목숨을 걸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은 10대의 무스탕으로 시작한 우리 공군이었지만 독자적 작전 수행 능력을 갖게 되면서 100회 이상의 출격수를 넘기는 조종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수는 휴전까지 총 39명에 이릅니다. 

 

1951년 10월에 이르러 단독 작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출격하게 되고, 12월 대구의 공군 본부를 필두로 공군의 각 병과 역시 전국 곳곳에 완전하게 배치를 끝마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52년 1월 11일, 드디어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조종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애초 제대로 된 전투기조차 없었던 우리 공군의 입장에서 100번의 임무를 무사히 치러 낸 전투조종사의 탄생은 정말로 '눈물 겨운 성과'였습니다.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조종사 김두만 소령)

 

1952년 4월, 다섯 명의 100회 출격 조종사들이 연달아 탄생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조종사들이 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우리 공군의 임무는 대부분 지상공격에 대한 것이었고, 저고도에서 대공포를 비롯한 각종 지상무기의 위협 속에서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 위험도는 공중전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나 눈 같은 기상의 제약과 작전명령이 날마다 내려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감안해도 최소 3일은 한번씩은 목숨을 걸고 출격해야 100회의 출격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말기, 휴전까지 꾸준히 활동한 대한민국 공군은 총 109명의 조종사 중 39명의 100회 출격 조종사를 배출합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1980년 즈음부터 부정기적으로 친목 모임을 가져오다가 1987년 '6·25전쟁 참전 100회 출격 전우회'를 정식으로 발족시킵니다. 

 

<6·25전쟁 공군 100회 이상 출격 조종사> (1053년 7월 27일 기준 총 39명, 100회 출격일 기준 배열)

1. 소령 김두만 (1952. 1. 11) 101회 출격.

2. 소령 이기협 (1952. 4. 6) 142회 출격.

3. 소령 김금성 (1952. 4. 16) 193회 출격.

4. 소령 옥만호 (1952. 4. 18) 112회 출격.

5. 소령 정주량 (1952. 4. 29) 100회 출격. 

6. 대위 유치곤 (1952. 4. 29) 203회 출격.

7. 소령 박재호 (1952. 5. 18) 100회 출격.

8. 소령 손재권 (1952. 5. 18) 106회 출격.

9. 소령 윤웅열 (1952. 5. 29) 106회 출격.

10. 대위 손홍준 (1952. 7. 8) 144회 출격.

11. 중위 박용만 (1952. 8. 13) 167회 출격.

12. 대위 박완규 (1952. 9. 19) 105회 출격.

13. 중위 임순혁 (1952. 9. 19) 117회 출격.

14. 중위 권중화 (1952. 9. 27) 101회 출격.

15. 중위 백정현 (1952. 9. 28) 130회 출격.

16. 중위 배상호 (1952. 9. 29) 119회 출격. 

17. 중위 이창실 (1952. 12. 11) 103회 출격.

18. 중위 이호영 (1952. 12. 11) 146회 출격.

19. 중위 송재봉 (1952, 12. 11) 112회 출격.

20. 중위 임상섭 (1952. 12. 11) 150회 출격.

21. 중위 임종두 (1952. 12. 11) 104회 출격.

22. 소령 오춘목 (1952. 2. 21) 100회 출격.

23. 소령 장성태 (1952. 1. 16) 114회 출격.

24. 중위 현창건 (1952. 1. 16) 113회 출격.

25. 중위 박희곤 (1952. 1. 16) 103회 출격.

26. 중위 신관식 (1953. 2. 7) 100회 출격.

27. 중위 임병두 (1953. 2. 7) 101회 출격.

28. 중위 김만용 (1953. 2. 16) 102회 출격.

29. 중위 김필정 (1953. 2. 16) 112회 출격.

30. 중위 최순선 (1953. 2. 16) 124회 출격.

31. 중위 이학선 (1953. 2. 16) 105회 출격.

32. 중위 조항식 (1953. 2. 16) 124회 출격.

33. 중위 이찬권 (1953. 2. 16) 101회 출격.

34. 중위 황정덕 (1953. 3. 15) 104회 출격.

35. 소령 김호연 (1953. 3. 15) 109회 출격.

36. 중위 권찬식 (1953. 3. 15) 113회 출격.

37. 중위 전형일 (1953. 3. 15) 101회 출격.

38. 중위 최성달 (1953. 4. 8) 127회 출격.

39. 중위 김직한 (1953. 6. 13) 113회 출격.

이들을 포함해서 6·25전쟁 당시 전투 출격을 했던 조종사는 총 125명에 달하며, 이 중 29명이 작전 중 전사했습니다. 

 

Flight Records 3 : 비행기에도 개성이 있다! 6.25전쟁 속 한국 공군의 마킹

 

김영환 대령은 6·25전쟁 당시 가야산으로 숨어든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한 미군의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내고,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의 기원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행사 참석차 강풍으로 비행 중 악천후를 만나 동해시 인근 상공에서 추락,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