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새길, 1994, (220305)

바람과 술 2022. 3. 5. 22:11

마그리트에 대하여 

 

글 머리에 : 굿 모닝 헤겔

 

가상의 파괴 : 현대 예술

 

피카소는 대상에서 형태를 해방했다. 마티스는 거기서 색채를 해방했다. 칸딘스키의 말대로 이제 이 두 사람은 '위대한 목표'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결국 현대 예술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인간의 조건 : 위로부터의 미학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은 관조활동, 일종의 인식이다. 경제활동이나 도덕적 행위 같은 실천활동이 아니다. 따라서 예술적 구상을 물질로 구현하는 건 예술과는 무관하다. 그건 실천활동에 속하니까. 하지만 어떤 인식? 예술은 상상력을 이용한 '직관적' 인식이다. 그건 지성을 이용한 논리적 인식과 구별된다. 어떻게? 논리적 인식(학문)은 보편자를 인식하지만, 직관적 인식(예술)은 개별자를 인식한다. 논리적 인식이 '개념'을 생산한다면, 직관적 인식은 개개 사물의 '이미지'를 산출한다. 하지만 '직관'이 도대체 뭔가? '지각'? 아니다. 지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파악하는 걸 말한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는 지각될 수 없다. 하지만 직관에선 실제와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다. 직관은 '표상' 또는 '이미지'다. 철학적으로 표상이란 더 이상 감각은 아니지만 아직 개념이 아닌 이미지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감각의 수준을 넘는 '정신적', '관념적'인 것이다. 하지만 직관을 기계적, 수동적, 본능적인 감각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진정한 직관은 곧 '표현'이라는 거다. 직관활동은 더도 덜도 아니고, 자지가 표현하는 만큼의 직관만을 갖는다. 그건 직관을 객관화하는 능력을 말한다. 표현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건 이미 직관이 아니다. 여기서 표현으로 객관화한다는 건 예술적 착상에 물질적 외투를 입히는 '육체' 노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일단 머리속에 그림이 그려지면 거기에 물질적 외투를 입히는 건 저절로 따라온다. 표현은 머리속에서 완성되며, 머리속에 그려지는 이 그림(표현)이야말로 어떤 외적인 찌꺼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예술작품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다. 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표현이고, 표현은 예술리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표현은 질료, 즉 외계에서 받아들이는 감각 자료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를 인상이라 부른다. 표현은 무정형한 인상에 '형식'을 주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질료가 아니라 형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표현을 통해 인상을 극복함으로써 우린 인상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인상을 객관화함으로써 그것들을 우리와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지배한다. 예술에는 해방과 정화의 기능이 있다. 표현은 해방자로, 외계에 대한 우리의 수동성을 제거해 준다. 예술적 직관이 따라 있는 게 아니다. 일상적 직관이 곧 예술적 직관이다. 따라서 일상적 직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어느 정도는 예술가다. 즉 직관적 인식은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다. 

 

잉가르덴도 문학작품을 계층적 구조로 설명한다. 문학작품은 4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각 층의 다음 계층이 나타나는 토대가 됨을 말할 필요도 없다. 문학작품의 첫번째 층은 '언어적 음성형상의 층'이다. 언어음성이란 의미를 담는 그릇을 가리킨다.  두번째 층은 '의미단위의 층'이다 이 층위는 전체 작품의 구조적 골격이 되는 가장 중요한 계층이다. 여기서 비로소 무의미한 음향들은 의미를 지닌 문장들로 나타난다. 이게 없다면 작품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세번째 층은 '묘사된 대상성의 층'이다. 여기서 비로소 작품 속의 인물과 사물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사건을 만들어 낸다. 네번째 층은 '도식화한 시점의 층'이다. 여기서 비로소 인물과 사건은 우리에게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감각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 층은 이미 묘사된 대상성의 층에 포함되고 준비되어 있다. 

 

근대인의 해석도, 우리의 해석도, 물론 작품이 탄생한 시대의 해석도 모두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한다. 작품에 대한 유일한 '객관적' 해석은 있을 수 없다. 결국 여러 시대의 다양한 해석들이 다 나름대로 '참된' 해석이란 애기가 된다. 

 

예술작품은 '놀이'와 비슷하다. 가령 모든 놀이엔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일단 놀이 속에 들어가면, 우린 이 규칙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규칙을 준수하면서 우린 동시에 다양한 상황을 창조한다. 놀이처럼 예술작품도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다. 즉 작품의 텍스트 자체는 닫혀 있어 그 누구도 그걸 변경할 수 없지만, 그 완결된 텍스트에서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낸다. 작품은 '작가-텍스트-독자'의 게임이다. 이 삼각형 게임 속에서 독자는 늘 바뀐다. 물론 그때마다 게임의 내용과 의미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작품의 삶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다.      

 

허공의 성 : 아래로부터의 미학

 

헤겔의 방학 : 인간의 조건

 

에셔의 패러독스는 인간 사유의 문법, 즉 논리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형식'에 들어 있는 패러독스인 셈이다. 반면 마크리트의 패러독스는 사유의 '내용', 즉 의미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내용'이 가진 패러독스인 셈이다. 

 

에필로그 : 다시 별밭을 우러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