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머리에
제로베이스(zero-base)에서 시작하는 신라역사. 김부식과 일연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부정/포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역사 이론.
신라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 지속의 역사를 가졌다. 권력자의 등장을 말해주는 지석묘의 축조시기부터 보면 신라는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이 된다.
책의 구성 1. 촌장사회 ~ 성골 왕 시기 2. 삼한 통합에서 ~ 신라의 멸망
그 동안의 신라사에 대한 문제제기 1. 포괄적 의미의 사회체제에 대한 통사(通史)를 찾기 힘들다 2. 1945년 일본 역사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존의 신라 역사에 대한 반성
- 프롤로그
2천 년이 넘는 동안 시라는 국가 형성의 전조가 되었던 사로6촌 촌장사회, 초기국가로서 소국-소국연맹-소국병합 단계를 거쳐 마립간 시대, 성골 왕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 발전 과정을 거쳤다. 왕국은 어떤 면에서 지속적이고 완만한 성장이 아니라 단계마다 단층을 이루며 비약적 발전을 하였다.
이 책의 문제제기는 지금까지 한국 학계는 내물왕 이전의 신라 역사는 [삼국사기]가 아닌 [삼국지] 한조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왔다. [삼국사기]가 아닌 [삼국지] 한조를 중심으로 역사 읽기를 해온 결과 신라의 건국에서 내물왕(356~402) 까지의 역사가 은폐, 말살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명을 포함하는 의미의 사회체제가 갖추어진 내물왕 이전의 역사에 대한 해명을 포기한 결과 내물왕 이후의 역사도 왜곡, 축소될 수 박에 없었다([삼국지] 등의 한조는 일종의 민속지로 소위 삼한 지역의 정치사를 서술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책이 아니다).
이 책의 제안하는 방법론은 1.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하여 [삼국지] 한조 등의 자료를 활용하며 2. 고고학적 자료를 적극 이용하고 3. 비교사학적 방법을 활용한다.
제1장. 건국신화에서 출발하는 신라의 역사
신화는 역사이다. 신라의 건국신화에는 신라사회의 구조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사로6촌과 그것을 통합한 사로국에 대한 한 가지 사실만 이해해도 신라의 역사는 전혀 새롭게 읽힌다.
1. 건국신화를 통한 새로운 역사 읽기
1945년 이전 근대 역사학의 방법으로 한국사를 처음으로 제도화한 일본의 식민지사관에 의한 실증사학에 의한 실증사학적 연구에서는 신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혁거세, 탈해, 알지, 호공 등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그 후 지금까지 한국의 실증사학이 몇 세대를 걸쳐 건국신화를 역사 연구의 자료로 이용할 준비를 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한국 실증사학의 학문적 미성숙을 말해준다.
2. 신화에서 역사적 사실 읽어내기
건국신화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라의 역사에 대한 이해체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사로6촌이 기본적으로 독립한 정치체로 있던 촌락사회와 6촌을 통합하여 형성된 사로국이라는 소국의 정치 발전 단계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1. 사로6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을 형성한 정치적 변동은 국가 형성의 첫 출발이라는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2. 지배체제의 누층화를 볼 수 있다. 3. 지배체제의 누층화는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단계가 쌓여가는 혁명적 발전(6촌통합, 소국병합, 가양병합, 백제병합, 고구려 병합)을 의미한다.
3. 신라 역사 읽기에서 신화의 중요성
혁거세 신화는 시조묘를 세운 근거가 되었고, 알지 신화는 신궁을 세운 근거가 되었다. 왕들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조묘와 신궁에 제사를 지낸 것은 왕위계승의 마지막 절차를 끝낸 것을 의미하며, 왕들은 시조묘와 신궁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조상에 대한 보고를 하고 이후 왕으로서의 권위를 갖추게 되었다.
제2장. 신라의 왕제
1. 신라의 왕
건국신화에 따르면 혁거세가 6촌장에 의하여 군주로 추대되었다. 특히, 혁거세는 이주민으로 6촌장들과는 혈연적으로 단절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로국에서는 왕이 6촌장을 비롯한 그 밑의 세력들에게 혈연적인 이유로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신라에는 1대 혁거세왕에서 28대 진덕왕까지 28명의 왕이 있었다. 이들의 왕호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 등으로 바뀌었으며 각 왕호에는 각기 다른 의미가 있다. 거서간은 진한에서는 왕을 가리키거나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이다. 차차웅은 무당을 이르는 방언으로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큰 어른을 가리켜 자충이라 불렀다고 한다. 거서간은 사로국이 소국으로 있을 때의 왕호였고, 차차웅은 사로국이 소국연맹 진한의 맹주국으로 있을 때의 왕호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사금은 3대 유리왕에서 16대 흘해왕까지 사용한 왕호로 이사금은 방언으로 나이 순서를 말한다. 이사금 시대의 시작인 유리왕 이후 신라는 진한이 소국들을 병합내나갔으므로 왕의 정치적 권력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립간은 17대 내물왕 또는 19대 눌지왕부터 사용한 왕호이다. 마립은 말뚝을 이르는 방언으로 말뚝은 모두가 잡는 것으로 김대문에 따르면 위(位)에 따라 두는데 왕궐(王獗)이 주가 되고 신궐(臣獗)은 그 아래 벌려 있게 된 까닭에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마립간을 칭하던 왕들은 모구 김씨였고, 그 중 18대 실성왕을 제하면 17대 내물왕과 그 직계에서 한 대에 한 명씩 마립간이 나온 것을 알 수 있는 데 이것은 아시금 시대와 달리 장자 왕위계승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왕은 22대 지증왕 4년(503) 10월부터 사용한 중국식 왕호이며, 신라가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것은 중국의 선진 정치조직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왕의 계보는 기본적으로 재위하고 있던 왕의 지위를 합리화시켜줌을로써 군주권을 역사적이고 천부적인 것으로 뒷받침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신라인들 중 지배세력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각기 원조(遠祖)로 나오는 시조를 기억하였고 씨족과 가계의 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한 계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라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정해주는 중요한 장치가 되었다.
왕의 계보의 내용은 무엇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각 왕의 즉위조와 [삼국유사] (왕력)에 나오는 미추왕의 계보에는 왕명, 왕의성, 왕의 아버지, 왕의 어머니와 그의 성 그리고 왕모의 아버지, 화비와 그의 성 그리고 그의 아버지 등 왕의 부계, 모계, 처계와 관련된 사항이 나온다. 한편 부계 가계의 성원들이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더라도 모계와 처계는 늘 바뀌었기에 그러한 기록을 남겨야 하였다.
왕의 계보는 수정되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물론 살아있는 왕을 중심으로 한 계보는 쉽게 수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계보의 수정이 이루어질 경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얽히고설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몇 세대 또는 그 이전의 계보는 수정이 이루어졌다. 왕의 계보는 정치적인 이유로 후대인의 필요에 의해서 조정되었다.
2. 왕을 배출한 세력
1대 혁거세왕에서 28대 진덕왕까지 신라 상대의 왕을 배출한 세력은 박, 석, 김 세 세력집단이다. 박씨 세력은 혁거세를 시조로 한다. 신라의 건국신화에는 혁거세가 기원전 69년 사로6촌의 나정 근처에 나타난 알을 깨고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혁거세가 6촌장 계통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들어온 이주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로6촌 지역으로 이주한 혁거세로 대표되는 세력은 개인이 아니라 일정한 집단이었다. 석씨 세력은 탈해를 시조로 삼았으며, 탈해 신화의 원형을 보면 탈해가 이주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김씨 세력은 알지를 시조로 삼았으며 알지 역시 혁거세와 탈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주민으로서 나름대로 정치적인 실력을 갖추었다고 여겨진다. (? 신라의 왕을 배출한 박, 석, 김 세 세력집단은 이주민 세력으로 볼 수 있다. 토착세력과의 알력이나 기존의 왕을 배출한 세력들과의 갈등이 어떠한 과정과 방법으로 정리하였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혁거세, 탈해, 알지로 상징되는 정치세력들은 사로6촌의 촌장 세력들 위에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이주민 세력들은 사로국, 나아가 신라의 왕을 배출한 세력이 되기 위하여 세력동맹을 맺었던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신라의 세력동맹은 정치적 성장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다. 물론 당시 박, 석, 김의 성씨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혁거세, 탈해, 알지를 시조로 하는 세력이 존재하였고 그러한 집단을 신라 사람들은 분명히 구별하고 있었을 것이다(후일 이들 세 세력에게 성을 부여하였다).
혁거세, 탈해, 알지를 시조로 하는 세력이 신라 상대 전 기간에 동등한 지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신라 상대에 왕을 배출하던 세력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가 변동된 것을 의미한다.
3. 왕위계승
신라의 경우 선거에 의한 왕위계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이 즉위하면 그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실세력이 만들어지고 나머지는 방계화되어 족강이 이루어졌다. 왕권이 강화되고 지배체제가 잘 갖추어진 나라에서는 왕위계승의 불확실성이 줄어들었다. 그렇더라도 신라 상대 왕위계승에는 항시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신라 상대 왕위계승에는 크게 두가지 원리가 작용하였다. 하나는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왕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는 원리이다. 다른 하나는 왕위계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원리이다.
박씨 왕 시대의 계보는 더 많은 조정이 있었으며, 특히 문자로 정착되기 전 구전을 통하여 전해지는 과정에서 또는 석씨 왕 시대와 김씨 왕 시대에 이르러 계보 조정이 많이 이루어졌다. 석씨 왕 시대의 왕들은 전 왕과의 사이에 왕위계승을 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많았는데 후대에 계보를 전하는 과정에서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 인물들을 계보에서 뺀 계보 조정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부자간에 왕위계승을 하는 원리보다 종족에서 계승을 하였다. 마립간 시대(17대 내물왕~21대 소지왕)의 왕위계승의 변화는 왕위계승이 장자상속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당시 왕위계승은 장자상속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왕위와 왕권은 그 이전의 이사금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기레 이르렀다. 마립간 시대를 거쳐 다져진 왕위와 강화된 왕권을 기반으로 23대 법흥왕은 성골왕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성골 왕들의 계승은 성골집단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성골은 재위하고 있는 왕을 중심으로 왕과 그의 형제의 가족들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성골은 재위하고 있는 왕을 중심으로 왕과 그의 형제의 가족들로 이루어진 것이 확인된다. 26대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왕궁에 살던 성골 남자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성골 왕을 왕위계승시키기 위한 비상조치로 27대 선덕왕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28대 진덕왕은 마지막 남은 성골로서 왕위계승을 하였다. 신라 중고 시대에는 성골을 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원리가 중요하게 작용하여 여왕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4. 왕위계승의 여러 문제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부계 종족 내의 계승이었다. 그러나 왕위계승의 실제를 보면 부자 사이, 종족 안, 종족 사이, 씨족 사이에 이루어졌다. 물론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 중에는 부자간에 계승이 이루어진 예들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는 계보 조정에 의하여 전 왕과의 사이에 있던 인물들을 빼고 전왕과 후대의 왕을 부자로 연결시킨 경우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 모두를 부자간에 계승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왕위계승은 항시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따라서 계승권자를 정하는 일은 중요하였다. 우선 가장 주목되는 방법이 태자 책봉이다. 왕위계승자 확보의 또 다른 장치로 부군(副君)을 임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한편, 왕위계승자는 어머니 계통이 중요하여 왕의 정비의 아들이어야 하였고 후궁의 아들은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왕위계승권자는 동궁(東宮) 또는 월지궁이라 불리는 궁에 거주하였는데, 동궁은 왕위계승권자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의미가 있었다.
어느 나라든 왕위계승 경쟁을 방지하는 일은 왕위의 안정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중요하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신라에서는 왕위계승권자를 태자로 삼았다. 태자 책봉은 왕위계승 경쟁을 방지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한편 왕의 동생들을 갈문왕으로 삼는 방법도 택하였다. 이렇듯 성골 왕시대 왕의 동생들을 갈문왕으로 삼아 일종의 신분의 허구적 이동을 시켜줌으로써 왕위계승 경쟁을 방지하였던 것이다. 왕위계승자 확보와 계승 경쟁을 방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족강(族降)이었다. 예컨대 성골 왕 시대에 왕과 그 형제의 가족들은 왕궁에 살았는데 왕의 다음 세대 성원들이 왕위계승권을 가졌다. 그런데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전왕의 형제로서 전왕대의 성골이었던 세력들은 족강이 되어 왕궁을 떠나야 하였다.
왕위 종족계승을 하더라도 그 종족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멸될 수 있었다.
신라의 왕들은 임기가 없이 대체로 종신토록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
신라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에는 왕위계승전이 여러 차례 벌어져 왕을 폐위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신라 상대(1대 박혁것~28대 진덕왕)에는 그러한 왕위계승전은 보이자 않는다. 따라서 왕의 폐위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5. 왕의 역할과 권위
신라 왕은 왕국 최고 지배자로서 역할과 업무가 다양하였다. 우선 그들은 왕국의 방어를 조직화하였고 분쟁을 조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은 신분제를 유지하였으며 지배세력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정하기도 하였다. 왕은 재판을 하고 죄인을 사면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였고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나아가 왕은 공공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들은 건국신화나 시조에 대한 설화를 통하여 전통성을 얻었고, 계보의 파악을 통하여 지위의 정당성을 얻었으며, 시조묘나 신궁의 제사를 통하여 권위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과 그 일족은 그들을 상징하는 장치를 가졌다. 우선 왕과 그의 종족 성원들은 왕궁에 살았다. 왕궁은 왕의 거주지로 왕과 다른 세력들을 구분하는 좋은 장치였다. 성골 왕 시대의 3궁(금성, 월성, 만월성)은 성골 거주구역으로 일종의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졌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고총고분에서 나오는 금관과 금제 과대 등의 물건은 왕과 그 일족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왕과 그 일조이 사용하였던 사치품은 위세품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왕은 국가 전체에 작용하는 권력을 가졌다. 특히 사로국이 진한의 소국들을 병합하고 가야를 병합한 신라 상대(1대 혁거세~28대 진덕왕)의 왕들은 그 권력이 강해졌다. 또한, 비병합국 세력들에 대한 통제를 하고 그들에게 금동관, 은관 등을 나누어주어 시조에 대한 제사를 분사한 것은 아닌가 한다. 시조묘에 대한 제사의 분사를 통하여 왕은 그 지위를 전국적으로 확인받을 수 있었다. 요컨대 성골은 왕을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고 왕위를 초월적인 지위로 만든 것이다.
왕은 한 명이었다. 그러나 왕위는 왕을 둘러싼 왕자(王者) 집단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왕권과 왕위는 그러한 집단에 의하여 유지, 강화되었다. 성골 왕 시대 왕실세력은 왕위와 왕권을 강화한 세력이었다.
제3장.신라 왕국의 정치적 성장
이 책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사로6촌-사로국-진한연맹-사로국의 진한 소국병합-마립간-성골 왕 시대로 나누었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정치 발전 단계이기도 하다. 정치 발전 단계가 높아지면서 단위 정치제의 수적 감소, 단위 정치체의 영역과 인구 그리고 지배조직의 확대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세력들은 이주민 집단이라고 상정할 경우 기본의 역사 해석과는 상이한 결과들을 낳게 된다)
종래의 시대구분과 그 문제점 1. 신라의 건국신화를 무시하여 사로6촌과 사로국 단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2. [삼국사기] 내물왕 이전의 기록을 옭게 이용하지 않아 독립 소국들의 연맹단계와 소국병합이 이루어진 단계를 구별하지 않았다. 3. 소국 또는 성읍국가를 촌락사회와 소국 단계로 나누었고 통설의 연맹왕국을 소국연맹과 소국병합 단계로 나눈 점(인류학에서 말하는 추장사회를 한국사회에서 찾는다면 바로 사로6촌이 촌락사회 단계에 있었다). 4. 시대구분에 있어 신라인들의 세계관의 확대와 정치적 변화를 능동적으로 반영하지 못 한 점.
제1절 촌장사회로의 사로6촌
1천여 년 이상 지속된 사로6촌 촌장사뢰 시기는 신라 왕국의 여명기였다. 사로6촌은 신라 왕경사회의 기층을 이룬 단위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사로6촌에는 각 촌마다 그 형성 신화가 있었다. 6촌의 성원들은 그들의 시조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 나름대로 촌장의 지위를 세습해나갔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를 보면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은 사로6촌을 통합하여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로6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이 형성되었다면 신라 역사에서 촌락(촌장) 사회와 소국을 구분한 새로운 역사 읽기가 가능해진다.
1. 촌장사회의 존재
[삼국사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를 통하여 혁거세가 사로 지역에 등장하여 입방설도(立邦設都) 하기 전에 사로6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촌장사회는 사로 지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수로왕이 등장하여 가락국을 형성하기 이전 동 지역에 9개의 촌이 있었고 각 촌은 간(干)이라는 존재들이 다스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9촌을 다스리던 간(干)을 추장(酋長)이라고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사로국이나 가라국과 같은 소국 형성 이전에 촌을 단위로 하는 정치체가 존재하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소국 형성 이전의 정치사회조직을 그 지배자에 초점을 맞추어 촌장사회 또는 추장사회(酋長社會)라고 부를 수 있다. 6촌은 촌을 단위로 한 사회, 정치체였기에 사람들이 살던 마을만 가리키는 촌이 아니라 마을과 관련된 영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서 촌사회 또는 촌락사회(村落社會)라고 부블 수도 있다.
2. 6촌 촌장사회의 형성
6촌 자체의 시조는 사로국의 소국 형성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들 촌의 시조는 지석묘를 축조하던 시대의 촌장사회의 시조였다. 지석묘는 정치적 지배자의 무덤으로 정치적 권력자의 탄생을 말해준다.
촌장사회는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촌장사회 시대의 촌락들이 동시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하나의 촌은 하나의 씨족집단을 이루었고 그 안의 마을들은 각기 하나씩의 종족집단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3. 촌장사회의 실체
소국형성 이전 촌락사회의 촌은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쳐 현재의 면(面) 정도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6촌으로 이루어진 촌장사회의 인구는 얼마나되었을까. 대략적으로 각 촌에는 대략 1~2천 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6촌들은 각기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현재의 경주시 지역에서 안강 북쪽의 안강읍과 강동면, 동쪽의 감포읍, 양남면, 양북면 지역을 제외한 지역을 합친 면적은 대체로 8백92km2 정도이다(이 면적을 6으로 나누면 대략 1백50km2). 이에 당시 주민들이 농경을 할 수 있던 공간만을 가지고 보면 6촌의 규모는 각기 그 직경이 10km 내외의 범위를 가진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직경 10km 정도의 면적으로 이루어진 사로6촌은 사회적, 정치적인 면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사로6촌의 구조를 알아보면, 촌장사회 시대 각 촌에는 대체로 2천 명 정도의 인구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서 사로6촌의 각 촌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마을의 수도 생각할 수 있다. 즉 신라 왕경6부에 55개의 리가 편제되었다는 기록에 따르면 1개 부에 대체로 평균 9개의 리가 편제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사로6촌의 각 촌에 평균 9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따라서 촌장사회 시대 하나의 마을에는 대체로 2~3백 명 정도의 인구가 있었다고 짐작된다.
4. 6촌의 씨족사회
신라의 건국신화에 나오고 있는 6촌장과 6부의 조(祖)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촌장사회 시대 촌의 시조와 촌장들의 계보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시조와 촌장 계보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의 촌에 살던 사람들이 촌의 시조를 인정한 것은 대체로 그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공동시조를 가지고 있었고 촌장의 계보를 파악하고 있던 촌의 주민들은 각기 촌을 단위로 하는 씨족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촌 안의 마을 중 서열이 높은 마을의 장은 촌락 전체의 장인 씨족장이 되었다. 이와 같은 씨족장이나 종족장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지석묘나 석관묘에 매장될 수 있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소국들이 형성된 이후 촌장 세력의 정치적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고 그 계보를 암송할 집단의 힘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후일 기록으로 정착될 때는 그 내용들이 거의 탈락되게 된다.
5. 6촌의 정치조직 운용과 그 변동
지석묘를 축조하던 사회는 분명히 계급이 나뉜 사회였다. 이는 정치적 권력자가 등장한 사회를 뜻한다.
사로국이 형성되기 직전 6촌장들은 하나의 원만한 협의체인 6촌장회의체를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촌장들은 각기 독자적인 정치조직과 지배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촌장에게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었다. 촌장사회는 혈연에 근거한 사회였으므로 촌장의 관대함이 작용하였고 그에 의한 재분배가 행해졌다. 이러한 촌장은 농경의 통제, 전쟁의 지휘, 교역의 수행, 공동 노동의 주관 등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촌장 자신은 사회적, 정치적인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임무도 지녔기에 한국의 촌락사회는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이 같은 촌락사회에는 관직, 관등, 관부와 같은 정치조직은 없었으나 촌장을 둘러싼 조직과 이를 통한 정치적 활동과 권력행사가 있었다.
촌장은 태어날 때부터 지배계급이 되었으며 신성함이 함께 하였다. 구 대의 계급(rank)으로 이루어진 촌락사회는 그 구분이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로6촌이 촌장사회 시기의 초기부터 형성된 것은 아니었고 점차 늘어난 일정한 시기가 지난후 6촌이 되었다. 한국의 촌장사회를 변동시킨 요인은 1. 사로6촌 촌간의 갈등과 경쟁을 들 수 있다. 2. 촌장사회 시대 촌간에 있었던 교역이 촌장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3. 하나의 촌장사회에 일어난 조직상의 변동은 대체로 사회, 정치조직이 복잡하게 발전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4. 국가 단계에 살던 이주민들이 촌장사회로 이주한 것이 촌장사회의 변동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촌장사회 단계의 사로6촌은 외부와의 관계가 단절된 사회는 아니었다.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에는 조선유민(朝鮮遺民)과 중국 진한 교체기 연, 제, 조 지역으로부터 온 세력이 일부 이주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반도 남부 지역의 촌장사회에 새로운 변동이 생겨난 주요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부터였고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보다 많은 이주민 세력이 등장하였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북방으로부터 이주한 세력들이 자리 잡던 시기는 사회, 정치 발전 과정에 있어 일종의 과도기였다. 그러한 과도기적인 시기는 촌장사회에 중요한 변동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촌장사회는 국가를 형성할 바탕이 마련되는 변동을 겪게 되었다.
6. 한국의 촌장사회와 외국의 추장사회(chiefdom)
인류학이나 고고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국가 형성의 전조가 되는 추장사회(chiefdom)는 매우 중요한 정치 발전 단계이다. 사로6촌 촌장사회도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사회, 정치 발전 단계인 추장사회에 해당한다.
7. 촌장사회의 역사적 의의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이전의 정치체로서 촌장사회를 들 수 있다. 사로6촌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사로6촌 촌락사회가 없었다면 사로국이라는 초기국가는 형성될 수 없었다. 이에 사로6촌 촌락사회에 대한 이해는 한국사의 구조적인 해명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다.
제2절 소국으로서의 사로국(서나벌) 시대
1.소국의 개념
사로국은 진한의 12소국 중의 하나였다. 이 경우 소국들은 소국병합을 통하여 토지와 인구가 크게 늘어났던 신라 왕국과 구별하기 위하여 소국이라 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소국은 초기국가로서 국가를 이룬 첫 정치 발전 단계를 가리킨다.
소국이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정리된 개념은 아니며, 굳이 소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소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촌장사회와 소국 단계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 성읍국가, 부족국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소국이아는 용어와 그 개념을 달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둔다.
[삼국유사] 72국조에 (삼한은) 78국으로 나뉘었고 각 만호(萬戶)라고 나와 있다. 이 수를 가지고 1호에 5명이 살았다고 계산하면 삼한의 인구가 4백만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호를 인(人)으로 보면 대체로 각 소국의 인구는 1만명 내외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소국의 경우 친족제도만으로 사회를 유지할 수 없어 공적인 권력을 만들고 그 힘으로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소국의 정치적 ,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역량에는 한계가 있다. 단지 1만여 명의 인구를 거느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모체가 된 소국인 사로국은 한국 역사상 존재하였던 많은 소국들 중의 하나였다. 한국사회 초기국가로서 소국은 요동에서 시작되어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형성되었다. 요동과 만주 일대의 초기국가 형성, 발전과정에 나타난 이주민의 등장과 정보의 전파 등은 사로국 형성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분명하다.
2. 사로국의 형성
사로국(서나벌 소국)이 형성된 지역은 현재의 경주시 일대이다.
소국 형성 세력과 시기를 역사적인 내용으로 전환하면 사로국의 형성에 대한 줄거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혁거세가 등장하여 각기 독립된 정치체였던 사로6촌을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하여 사로국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로국은 촌장사회 단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권력구조를 탄생시켰다. 정치적으로 형성된 사로국은 점차 사회, 문화체제의 변동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웃에 새로이 형성된 소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적 통합을 이루고 비록 초보적이지만 조정의 신료조직(central bureaucracy)을 형성하였다.
혁거세의 건국신화에 6촌장들이 모여 입방설도할 것을 의논하는 장면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입방(立邦)은 6촌을 통합한 서나벌 소국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고, 설도(設都)는 소국의 중심에 왕이 머무는 도읍인 왕도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왕도는 6촌, 6부의 중심지와는 관계없이 소국의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왕국의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였다.
사로국은 사로6촌장 세력이 아닌 이주민 집단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사로국의 형성세력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세력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이주민 집단은 크게 1. 고조선계의 이주민의 파동이 있었다. 2. 중국계의 이주민도 있었다. 3. 만주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와 고구려계 이주민 집단의 존재도 생각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로국의 형성시기인 기원전 57년은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역사 벌전의 대세로 보면 사로6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이라는 소국을 형성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 언제였다고 생각된다.
3. 사로국의 실체
사로국 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이루어졌고, 훌륭한 항구가 근처에 있었으며,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외부로부터 강력한 군사적 침략이 없었다. 6촌을 통합한 사로국의 주변에는 북쪽에 음즙벌국, 남쪽에 우시산국, 거칠산국, 서북쪽의 골벌국, 서남쪽의 이서국 등이 둘러싸고 있었다. 사로국의 영역은 현재의 경주시에서 북쪽의 안강읍과 강동명, 동쪽의 감포읍, 양남면, 양북면을 제외한 지역을 합친 규모였을 것이다(대략 8백92km2).
사로국이 형성될 무렵 6촌에는 1만 정도의 인구가 있었을 것을 저자는 추정하고 있다.
사로국의 왕이 가지는 정치적 권력은 과거 촌장사회의 촌장의 권력보다 10배 이상 커졌다고 생각된다.
사로국은 촌장사회와 같이 혈연조직 또는 친족체계만으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어서 탄생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단위로서의 국가이다. 사로국이 형성되자 6촌의 주민들은 소국의 씨족원이 아니라 신민(臣民)이 되었고 군주와의 혈연적으로 단절되었다. 혁거세를 군주로 삼고 입방설도하여 형성된 사로국이 가지는 중요성은 1. 6촌장들에 의한 낮은 단계의 지배에서 소국의 군주에 의한 한 등급 높은 단계의 지배가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2. 6촌간의 독립성이 축소되었다. 3. 6촌 전체를 다스리기 위한 군주를 세우게 되었고 그 밑에 6촌으로 이루어진 사로국 지배를 위한 신료를 두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식적인 정치조직이 만들어졌다. 4. 17관위의 공식적인 정치조직은 처음부터 한번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지배업무가 확대되어 새로운 정보와 다양한 정치적 활동이 필요하게 되면서 점차 새로운 관직들이 생겨났다.
4. 사로국의 형성요인
촌장사회에서 정치를 경험한 촌장을 중심으로 한 정치조직과 지배세력이 존재하였고 더욱이 소국 형성 직전에는 6촌장들이 중심이 되어 6촌연맹을 맺었기에 혁거세 세력이 등장하여 쉽게 6촌을 통합하고 소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촌장사회가 없었다면 사로국의 형성은 휠씬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외래문화는 사로 지역의 정치적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외래문화는 1. 교역 2. 이주민 을 통해 전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여하튼 외래문화를 수용한 사로6촌은 새로운 이주민에 의하여 소국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사로국은 이주민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원초적 국가(pristine state)가 아니라 2차적 국가(secondary state)에 해당한다. 현재 남아 있는 건국신화를 보면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한 세력들은 모두 이주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주민 집단이 원래 살던 지역에서는 비록 밀려났지만 새로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국가체제에 대한 경험이 실력이 되어 소국을 세우거나 왕권을 빼앗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혁거세 집단은 촌장들이 다스리던 6촌을 통합하여 소국을 형성할 실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주민 집단은 소국을 형성할 만한 정치조직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군사적 실력을 갖추었다(혁거세의 경우 기마집단). 그 밖에 이주민 집단이 가지고 온 농업기술도 생각할 수 있다. 농업생산기술을 장악한 이주민세력이 소국의 지배세력으로 경제력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농업을 시작한 결과 인구가 증가하였고 잉여생산물도 늘어났으며, 이것은 바로 사로국의 국력 증대로 이어졌다. 이주민들은 6촌 세력들과 기본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지 않고 이주민들간에 혼인을 통한 세력동맹을 맺어나갔다. 그 결과 신라 왕국의 왕실세력과 종래 6촌장계 후손들 사이에 신분적 간격이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소국을 형성한 후에는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왕실세력을 보호하는 또 다른 궁실과 왕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주민들이 정착한 지역에는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주민들에 의하여 복합종족을 이루게 된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힘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5. 소국의 지배조직
소국단계의 지배조직은 3단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군주-촌장-마을의 장).
사로국의 형성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국가 자체는 지배세력에게 여러 가지 이점을 주었다. 한편, 국가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조직이며, 국가의 운용은 정치적, 종교적 힘으로 이루어졌다.
6. 소국의 정치적 변동
한번 형성된 소국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사로국은 이웃한 소국들과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을 형성하였고, 나아가 진한 소국들을 병합해나갔다. 탈해와 알지 집단과의 새로운 동맹세력을 받아들인 후 사로국의 최고 지배세력은 그 힘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사로국은 점차 이웃한 소국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갔다. 또한 기원전 1세기 낙랑에 온 중국 상인들의 활동에 의하여 원거리교역이 행애지고 사로국 주변의 여러 소국들이 중국문명의 산물인 위세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국들 사이에 교역망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이 형성되었다.
7. 한국의 소국과 외국의 소국
추장사회를 넘어선 국가로서의 소국은 한국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도시국(city state ), 중국의 은나라와 주나라의 제후국, 일본1세기경에 각지의 소국, 멕시코의 아스텍, 마야 문명권의 소국 등을 확인할 수 있다.
8. 소국의 특성
소국은 초기국가로서의 국가이다. 단지 소국병합을 통하여 토지와 인구가 늘어나 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갖춘 왕국과 비교하여 초기국가로서 고숙이라고 할 뿐이다.
제3절 소국연맹의 맹주국 시대
1. 맹주국으로서의 사로국
혁거세왕 38년(기원전 20)에 왕이 호공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마한을 방문하게 한 사실을 통해 기원전에 이미 마한, 진한, 변한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는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의 맹주국으로서 호공을 마한에 보냈다. 이와 같은 맹주국의 존재는 일정 지역에 있는 여러 소국들을 하나의 연맹으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여기서 소국연맹은 연맹에 속한 각 소속에 왕들이 있었던 단계를 가리킨다. 각 소국들은 독립된 나라들이었다(자급자족 경제와 자위능력 보유). 맹주국은 연맹 내의 다른 소국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단지 소국들은 맹주국에 대해 직공을 바치고 사대(事大)의 예를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소국연맹의 맹주국과 연맹 내의 소국들은 군신관계가 아니라 군사적 공수동맹이거나 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연맹관계를 맺었다(소국연맹-소국병합/연맹왕국).
기원전 2세기 언제인가 혁거세 집단이 사로6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을 형성한 후 경상북도 일원에 형성되었던 소국들이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을 형성하였다.
사로국은 진한의 소국들을 병합하였을 때 피병합국의 왕과 그 일족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제거하였으나 나머지 세력까지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그들 피병합 소국의 잔존 세력들은 후일 신라의 지방세력인 촌주로 이어지는 세력이 되었다.
현재의 통설은 진한의 영역을 경상북도 일대에서 찾고 있다.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에 가담한 소국이 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는 3세기 중엽까지는 경상북도에 있던 소국들을 병합하였다. 사로국(신라)이 소국병합을 시작한 1세기 중반에서 소국병합을 끝낸 3세기 중반까지는 소국연맹 진한이 해체되어가던 기간이었다(진한이라는 용어도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2. 소국연맹 진한의 형성
[삼국사기]에는 혁거세왕 38년에 마한과 진한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삼국지] 한조의 기록과 관련시켜 볼 때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진한이 존재하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삼한의 형성시기는 언제였을까.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의 명확한 형성시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단지 역사 발전의 대세를 통하여 기원전 1세기 언제인가 형성된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 낙랑군이 설치된 후 중국군.현과의 관계에서 삼한이 구별된 것으로 여겨진다.
진한의 맹주국이 되었던 사로국은 유리왕대에 이서국, 탈해왕대에 이웃한 걸칠산국.우시산국을 병합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병합 소국이 늘어났고 3세기중반까지는 진한 소국들이 모두 사로국에 병합되었다. 여기에 1세기 중.후반에서 3세기 중반까지 진한을 단순히 소국연맹이라고 볼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진한의 소국연맹 형성요인을 한 가지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현재 경상북도 일대에서 성장하였던 소국들이 낙랑군을 통한 원거리교역을 하는 과정에서 소국연맹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 낙랑군의 설치 후인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의 상인들은 해로를 통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하며 원거리교역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진한 소국들의 지배세력들은 중국의 선진문물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그런데 당시 낙랑의 상인들은 진한의 소국들과 개별적으로 교역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일정 지역의 소국들을 묶어 하나의 교역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진한의 소국들 중 사로국은 교역의 창구가 되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여기서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서나벌)의 대외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진한의 형성과 관련하여 사로국의 대외관계 중 낙랑과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2세기 언제인가 경상북도 일대에서 성장하였던 소국들이 진한이라는 하나의 정치체로 인식된 것은 중국인들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마한.진한.변한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들이었고 후일 삼한의 정치적 상황이 변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삼한이라는 구분을 계속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3. 진한의 정치적 성격
기원전 20년에 혁거세왕이 호공을 마한에 파견할 때 사로국은 단순히 하나의 소국으로서의 사자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기록대로 하면 진한의 사자라는 자격으로 호공을 파견한 것이 된다. 마한의 목지국, 변한의 구야국(가락국) 그리고 진한의 사로국이 그러한 맹주국이었다.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사로국과 진한의 다른 소국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또 원거리교역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진한 소국의 지배세력들은 원거리 교역을 통하여 수입한 물건들을 장악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진한의 소국들은 중국의 군사적.경제적.정치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사로국에서는 철제의 무기와 농기구 등을 다른 소국에 공급하지 않고 군사적.경제적 실력을 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수입품 중에서 관작(官爵)이 있었다. 관작은 물건이 아닌 중국에서 내려준 읍군.읍작 등의 직함이었다. 이러한 관작을 받았던 삼한 소국의 지배세력들은 정치적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관작과 함께 인수와 의책을 교역품으로 주었다. 이 같은 위세품은 삼한 소국 지배세력들의 정치적 권위를 높여주는 장치가 되었다. 진한을 포함한 삼한에서는 원자재인 목재.철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그런데 위세품교역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불평등거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위세품으로는 중국문명이 부여하는 위세를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경제적 실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지만 경제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불평등거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거리교역은 중국 측 관점에서는 조공관계 또는 내속(來屬)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 반면 삼한의 관점에서는 말 그대로 위세품을 얻기 위한 원거리교역으로 볼 필요가 있다. 시간이 지나 1세기 초에 이르면 진한의 세력들은 위세품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고 여겨진다.
4. 소국연맹의 구조
소국연맹 단계 진한의 지배구조는 완만한 4단계 조직(1단계-자연촌의 장, 2단계-촌의 장, 3단계-소국의 군장, 4단계-소국연맹의 대군장)으로 이루어졌다. 소국연맹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소국의 3단계 구조 위에 소국연맹의 맹주국이 더해진 것이다. 맹주국의 정치적 기능은 연맹의 맹주로서의 기능이었지 연맹 내의 소국들을 지배하는 기능은 없었다.
진한의 소국들은 각기 방백리(方百里), 구체적으로 직경 30~40km2 정도의 영역과 1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졌다. 그리고 3단계의 정치조직, 적어도 3~4단계의 신분층으로 이루어진 지배체제를 가졌다. 각 소국의 왕은 소국을 형성한 지역구분인 촌락의 지배세력과 혈연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사로국이 맹주국이 된 까닭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국연합을 사로국의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는 강화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서나벌 소국은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어 위세품교역체제(prestige-good system)을 유지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맹주국 사로국은 진한 소국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로국의 진한 소국병합은 유리왕대부터 시작되었다. 소국병합을 시작한 진한의 맹주국 사로국의 국력은 점차 커지게 되었다. 그 결과 진한 소국병합이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한연맹의 여러 소국들 중 맹주국이었던 사로국과 다른 소국들과의 관계를 살펴보자(진한의 경우 자료가 없어 마한의 경우를 유추). 소국연맹 내의 각 소국은 도읍을 옮기는 등 중요한 정치적 변동 사항을 맹주국에 보고한 것을 볼 수 있다. 진한 소국연맹의 맹주국과 다른 소국들 사이의 관계도 소국들의 보고와 맹주국의 간섭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맹주국에 대하여 소국들은 기본적으로 사대(事大)의 예를 지켰다.
5. 소국연맹의 정치적 변동
진한 소국연맹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낙랑과의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사로국은 진한의 맹주국이 된 후 이웃한 소국들과 연맹을 맺기 시작하여 점차 먼 곳에 있던 소국들을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에 가담시켰다. 기원후 1세기 중.후반경부터 사로국의 이웃 소국병합이 전개되고 진한 소국연맹은 그 성격이 변동하기 시작하였다.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는 진한연맹의 소국들이 줄어들고 사로국(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이 늘어나는 시기였다. 그 과정에 신라가 병합한 소국의 수가 늘어날수록 신라의 정치적 지위는 강화되었다. 그 결과 1세기 중반 이후는 사로국이라 하기보다 신라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6. 소국연맹의 정치적 의미
한국 초기국가 형성.발전과정의 소국과 소국병합 단계의 중간 단계로서 소국연맹 단계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소국에서 소국병합 단계로 갑자기 옮아간 것이 아니라 독립 소국들이 하나의 정치적.경제적 연맹체를 만들었기에 소국병합 단계로 쉽게 옮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7. 외국의 소국연맹
소국연맹에 해당하는 정치체는 다른 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 은(殷)의 대방(大邦)과 소방(小邦)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대방인 상읍이 정치적.군사적 패권을 장악하였고 주변의 소방은 연맹 내의 은왕의 패권을 인정하여 은족 최고의 신인 상제(上帝)를 받들고 공납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소방은 정치적으로 각기 군장을 가진 독립집단으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는 집단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자위능력을 갖춘 무력집단이었다. 은왕은 패권을 장악하였으나 지배력이 다른 방국에 미칠 수는 없었다. 대방과 소방의 관계는 군신관계가 아니라 군사적 공수동맹, 경제적 공동체의 기반 위에서 형성된 동맹관계였다.
제4절 소국을 병합한 이사금 시대
1. 소국병합 왕국으로서의 신라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유리왕대(24~57)와 탈해왕대(57~80)에 이미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한 바 있다. 사로국이 예전 진한의 한 소국이 아니라 소국병합을 전개하기 시작한 나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진한이라는 소국연맹 단계와는 다른, 한 단계 정치적으로 발전한 단계를 의미한다.
2. 신라의 소국병합과 그 요인
유리왕대에 이서국과 탈해왕대에 우시산국(현재의 울주).거칠산국(현재의 동래)을 병합한 신라는 파사왕대(80~112)에 이르러 소국병합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소국병합른 단기간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로국에 인접한 소국들은 일찍이 병합되었지만, 멀리 떨어진 곳게 있던 소국들은 2세기 후반 늦어도 3세기 중반경에 이르러 병합되었다. 사로국은 국력을 키워나가며 점찬 먼 곳에 있던 소국들까지 병합할 힘을 얻었던 것이다. 신라의 소국병합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되었다. 그렇더라도 신라는 3세기 중반까지는 진한의 모든 소국들을 병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의 경상남도 지역에 위치한 우시산국(울주)와 거칠산국(동래)을 일찍이 병합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단정하기 어려우나 신라는 1세기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시기에 원거리교역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서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먼저 병합하였던 것은 아닌가 짐작된다. 한편, 흥미로운 사실은 유례왕 14년(297)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신라의 금성을 공겨한 시건이다. 여기서 신라가 일찍이 병합한 소국들을 다시 병합하는 2차 병합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한 2차 병합은 이서고국에 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3세기까지 신라의 소국병합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소국병합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군사조직이 발전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의 소국병합은 1세기 중.후반 유리왕 19년(42)에 시작되어 3세기 중반 첨해왕대(247~261)에 일단락되었지만, 2차 병합은 3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소국연맹 진한의 맹주국 신라는 원거리교역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물과 정치조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먼저 장악하였다. 일차적으로 그것이 국력이 되어 사로국은 전쟁을 통하여 소국병합을 전개해나갔다. 전쟁은 신라가 소국병합 단계로 성장하게 된 주요 요인임이 분명하다. 소국들 사이의 병합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소국연맹이 이루어져 소국들 사이에 균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일단 소국병합이 이루어지면 그 후 소국병합은 가속화된다. 소국병합 자체가 또 다른 소국병합을 이끄는 힘을 제공하였다.
소국병합 전쟁에 동원된 병력은 기본적으로 6부의 백성을 동원한 6부병이었다. 당시 기병은 물론 수군도 유지하였다. 소국병합은 전쟁과 내항을 받음으로 이루어졌다. 각 소국은 병사와 무기를 갖추고 있었는데 신라의 경우 6부병들은 철제무기를 사용하였다. 사로국은 진한 맹주국으로서 낙랑과의 교역을 하는 과정에 철제무기를 먼저 차지하였다. 신라가 소국병합을 전개하던 1~3세기 신라 왕경에서 출토된 철제무기는 당시 다른 어느 소국 지역에서 출토된 것보다 우수한 것이었다. 물론 사로국이 이웃한 소국을 병합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철제무기를 비롯한 군사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로국은 먼저 철제농기구 등을 이용하여 농업생산력을 키웠다. 그 결과 경제력이 성장하였고, 그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력을 더욱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3. 소국병합의 결과
수곡병합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우선 신라 왕국의 토지와 인민이 증가하였다. 이는 조.용.조의 수취 증가를 의미한다. 조.용.조의 수취 증가는 각종 자원의 획득을 불러왔고, 이는 나아가 신라의 국력 신장을 낳았다. 그 결과 신라는 소국병합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소국병합은 노비의 증가를 불러와 사로국 사람들의 생산활동을 감소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 소국병합 등 새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6부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면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소국병합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통제하기 위한 지배조직도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소국병합을 통하여 국력을 키운 신라는 피병합국의 인려과 자원을 동원하여 거대한 고분을 만들게 되었다. 결국 소국병합 단계의 고분을 보면 신라는 피병합국의 많은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대규모 고분을 축조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그 과정에서 신라는 왕국의 동원체계와 정치조직을 발전시켜나갔던 것이다.
4. 소국병합 왕국 신라의 지배체제
이사금 시대는 소국병합을 시작하여 완성된 시기이다. 기존 견해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1. 그 동안의 시대구분인 부족연맹(연맹왕국) 단계를 소국연맹과 소국병합 단계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2. 이사금 시대에 왕을 배출하던 박.석.김 세 씨족을 6부의 세력으로 보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소국병합을 전개한 사로국은 종래 제후국과는 다른 나라의 모습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소국병합을 전개한 사로국을 그전같이 부르기보다 신라라고 불러 구별을 할 필요가 있다. 소국병합 단계의 신라 왕국의 지배조직은 4단계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국연맹 단계의 조직은 4단계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독립된 소국은 사라지고 피병합 소국은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던 것이다.
각기 왕이 있던 소국연맹의 소국들은 사로국의 소국병합에 의하여 사라졌다. 피병합 소국의 왕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신라의 왕이 피병합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피병합국에 대한 지배의 강도가 높아졌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팽창을 한다. 그리고 모든 나라는 망한다. 그런데 망한 나라는 흔적을 남긴다.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도 같은 운명이었다. 소국들은 신라의 군(郡) 또는 현(縣)으로 편제되었다. 그런데 사로 6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이 형성된 것과 같이 각 소국들도 촌락사회의 촌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다. 촌락사회의 촌은 현재의 면 정도에 해당하고 소국은 현재의 군 정도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가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면과 군이라는 지방행정조직의 뿌리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과정에서 존재하였던 촌장사회와 소국에서 출발한 것이다.
처음부터 신라가 피병합국들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방식을 시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피병합국 세력들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그들을 통하여 피병합국 지역을 지배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신라에서는 소국의 왕들의 지위를 빼앗는 대신 그들을 제후적인 존재로 삼아 피병합 소국을 지배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피병합국 지배 방식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신라는 피병합국의 지배세력들 중 신라에 항거한 왕들을 제거하고 그 땅에 2세기 후반부터 성주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신라에 스스로 내항한 왕들은 왕경으로 사민시키거나 원래 살던 지역의 제후적인 존재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3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들 제후적인 존재를 왕경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3세기 중반 이전에는 신라가 소국들을 병합하였지만 모든 피병합 소국에 지방관을 상주시켜 지배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지방세력들은 적어도 촌락사회의 촌 정도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질 수 잇었다. 이들 피병합국 세력들은 지방의 음악과 춤 등을 유지하며 지방의 전통을 지켰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낙랑군.대방군과도 교역하였다. 그 결과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지] 한조에 진한에 12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한편 기존 견해에서는 피병합국의 족장세력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지배세력으로 편입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 피병합국의 왕들이 왕경으로 이주한 후 그 지위가 어떠하였는가에 있다. 왕경으로 이주한 세력들은 왕을 배출하던 박.석.김 세력은 물론이고 6부의 세력들보다 격이 떨어졌다. 물론 그 중 극히 일부 세력은 왕경인으로 대접받고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세력은 극히 일부였다. 신라의 지배세력은 왕을 배출한 박.석.김 세력 중 왕이나 왕비를 배출한 세력이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들 밑에 방계 왕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6부의 세력들이 있었다. 피병합국에서 왕경으로 사민된 세력은 격이 떨어지게 되었고 왕을 배출할 수 없었다.
5. 1단계 지방관 파견 통한 지배체제의 편성
지금까지의 견해에서는 신라 중앙집권화 정책이 이루어진 시기로 마립간 시대를 주목해왔다. 그런데 사실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마립간 시대에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가 사벌국을 병합하여 진한의 소국을 모두 병합한 것은 첨해왕대(247~261)였다. 이 때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운용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신료를 등용하였다. 따라서 군(郡)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초보적이나마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편성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중반 첨해왕대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첨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13대 미추왕대(261~284)의 신라는 이미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통치를 시작하였고 조정의 신료조직을 확대.발전시켰다. 신라의 소국병합을 이룬 결과 3세기 중반 이후 백제와 경계를 접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백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마립간 시대가 시작된 것은 이와 같은 3세기 중반 이래 신라의 정치적 발전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라가 피병합 소국에 지방관을 처음부터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이사금 시대인 2세기 말경 신라는 이미 좌군주.우군주 또는 성주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적인 지방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소국병합 시기 군주는 지방에 머물며 전쟁을 수행하였다고 여겨진다. 결국 군주는 군대 사령관인 동시에 지방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군주보다 지방관적인 성격(군주보다 군사적 성격이 약한 것 뿐임)이 강한 성주는 2세기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신라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편성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3세기 말 이서고국이 금성을 쳐들어온 사건은 피병합국 세력의 반발을 의미한다. 반발의 이유가 무엇인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3세기 중반 이후 진한 소국들에 대한 1차 병합을 끝낸 신라에서 피병합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그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세기 말부터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한 신라는 아무리 늦어도 3세기경에는 모든 피병합 소국을 군(郡) 정도로 편제하여 성주를 파견하고 지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런 신라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로의 변화는 지방세력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6. 소국병합 왕국의 성장과 변동
신라는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통제하기 위한 지배조직을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소국병합국으로 확대된 신라의 수도 왕경이 되었던 종래 사로국 지역은 6촌에서 6부로 지방행정구역이 편제되었다. 그런데 6부에는 부주(部主)-이찬 및 위가 낮은 자들이 있어 각 부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당시 신라의 중앙정부에서는 6부의 통치를 종래 6촌장 계통의 후손들인 부장들에게 맡겼다. 이는 그들을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로 편제하여 다스린 것을 의미한다. 6부의 세력들은 부에서는 최고의 세력이었으나 신라 왕국 전체에서는 박.석.김 세력과 비교하여 정치적.사회적 격차가 컸다.
3세기 중반경에 이르면 신라 왕국에서는 6부의 인재들을 조정의 신료로 등용하였다. 이사금 시대에 이미 이찬.이벌찬.아찬 등의 관위가 만들어졌다. 처음 이들 관위는 관직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그런데 신료제가 발전하면서 점차 관위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소국병합을 전개한 이사금 시대에는 피병합국 세력들을 편제하기 위하여 악간 등의 관위가 외위(外位)로 만들어졌다. 신라 중앙정부가 이와 같이 왕경과 지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 지방세력들 중에는 반발하는 예도 있었다.
전쟁이 일단락된 3세기 중반 이후 신라는 이미 인력동원 능력을 잘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피병합 지역으로부터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고총고분을 축조하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축성사업)를 벌이게 되었다. 늘어난 영역과 인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축성사업과 전쟁을 수행하고 거대한 고분을 축조하기 위한 인력확보를 위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 결과 흘해왕 21년(330)에는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신라는 피병합국에 대한 조세 수취를 하였으며 그것은 곧 신라왕국의 국력이 되었다. 왕이 조세 수취를 위하여 지방에 순행을 하기도 하였다. 3세기 중엽 신라는 신료제의 설치.운용.지방관의 파견을 통하여 국가지배체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이어 전개되는 마립간 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는 백제.낙랑 등과의 육로를 통한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왜인들의 신라 변경 침입도 보입).
7. 소국병합의 정치적 의미
소국병합 단계는 초기국가 형성.발전과정의 한 단계이다. 소국병합을 시작한 사로국은 단순한 소국일 수 없다. 따라서 소국병합을 전개한 왕국을 신라라고 부르기로 한다. 정복왕국의 수도가 된 신라의 왕경은 정치적.군사적.문화적.경제적 중심지가 되었다. 신라의 중앙정부는 피병합국으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였고 군대를 징발하였으며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일부 피병합국 세력 중 적어도 왕과 그 일족은 왕경으로 사민시켜 왕경인으로 대우해주었다. 소국병합 과정에서 왕경은 신라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해나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통치하기 위하여 조정의 신료조직도 성장하였다. 한편 소국병합 왕국 신라의 지배세력들은 피병합국 지역으로부터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건축물들을 축조하였다. 거대한 건축물의 축조는 소국병합 단계의 신라의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이 나타난 구체적인 증거이다. 그런데 소국병합은 시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피병합국으로부터 조세를 거두고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3세기 중반경 진한 소국을 모두 병합한 신라는 백제와의 교류가 늘어나게 되었다.
8. 다른 나라의 소국병합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과정에서 소국병합은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소국병합 이후 피병합 소국에 대한 지배방식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는 분명히 피병합 소국들의 왕들을 지방세력으로 인정해주며 제후적인 존재로 삼았다. 신라는 소국의 왕들을 왕경으로 사민시키거나 제거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성주 등 외관을 피병합국에 파견하여 일종의 군.현제적 지방지배조직을 편성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보다 중앙집권화된 지방지배를 하게 되었다.
제5절 왕정이 강화된 마립간 시대
신라 왕국의 지방관 파견을 통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차 왕정의 강화는 피병합국에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한 2세기 말 또는 3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후 2단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마립간 시대에 편제되었다.
1. 마립간 시대의 시작과 끝
[삼국사기]에는 19대 눌지왕(418~458)부터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나오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17대 내물왕(356~402)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립간 시대의 시작에 대한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립간 시대는 내물왕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왔다. 한편 마립간 시대가 끝나는 시기는 지증왕 4년(503) 10월 신라라는 국호와 왕호를 사용할 때까지이다. 17대 내물왕대부터 시작된 마립간 시대는 이사금 시대인 3세기 중반 이래 신라의 중앙집권화 정책의 결과이다.
2. 마립간 시대의 정체
마립간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성격 중 두드러진 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의 성장을 들 수 있다. 경주 중심부에 남아 있는 신라의 고총고분이 그 증거이다. 이 같은 거대 고분의 축조는 국가지배체제의 발전을 통한 국력의 집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총고분의 존재는 신라 신분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특히 법흥왕대에 율령을 반포하며 편제되었던 골품제도 마립간 시대의 신분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내물왕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만이 아니라 그 이전 이사금 시대에도 정치적 성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그 결과 마립간 시대에 정치적 비약이 가능하였다.
3. 왕정의 강화
마립간 시대 지배구조는 기본적으로 4단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사금 시대와는 달리 피병합 소국을 편제한 군 모두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한층 지방지배가 강화되었다. 마립간 시대에 이르러 피병합국에 대한 지배체제가 확대.발전하며 신라 왕국의 지배력이 소국병합 단계 이사금 시대보다 휠씬 커진 것만은 사실이다. 이사금 시대에 관직으로 운용되던 이벌찬.아찬이 관위로 성격이 바뀌었고, 마립간 시대에 이르면 그것은 본격적인 관위로 운용되었다. 마립간 시대에 이미 다양한 관직이 설치.운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립간 시대 지방지배조직의 편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왕경에 대한 편제이다. 사로국이 모체가 되어 만들어진 신라의 왕경은 원래 6촌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다. 따라서 촌락사회 단계의 6촌은 사로국의 6촌(또는 6부)으로 되었다가 소국을 병합하면서 사로국영역이 신라의 왕경으로 편성되어 왕경6부가 되었다. 한편 피병합국에 대한 지방행정구역 편제는 기본적으로 피병합 소국을 단위로 군(郡)이 설치되었다. 피병합 소국을 군으로 편제한 신라는 그 안에 다시 몇 개의 촌을 단위로 하는 지방행정구역을 편제하였다. 그러한 촌이 후일 행정촌이 되었다. 이러한 촌에 도사(道使) 또는 나두(邏頭)가 파견되었다. 이로써 마립간 시대에 군의 성주와 행정촌의 도사.나두 2단계의 지방관이 파견된 것을 알 수 있다.
마립간 시대에는 여러 가지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폈다. 마립간 시대의 신라는 중앙정부조직을 확대.편제하고 지방지배조직을 정비하였다. 나아가 교체제를 운용하여 마립간 시대의 신라는 나름대로 잘 짜여진 지배체제를 운용하고 있었다. 눌지왕19년(435) 역대의 왕릉을 수리하여 왕권을 초월적인 지위로 만드는 조치를 취하였다. 왕은 대등을 중심으로 한 신료들을 거느리며 중앙집권화 정책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한 왕을 중심으로 한 왕정을 중앙집권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왕이 직접 지방을 순행하였다.
4. 교체제(敎體制)의 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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