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시대 서울시장(한성판윤)은 어떤일을 하였을까],류시원,한국문원,1999.

바람과 술 2008. 6. 15. 04:24

2006년 11월 6일 읽음.

 

책머리에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 격인 한성부에 근무한 이승경이라는 판관이 쓴 [경조부지(京兆府誌)]는 그 당시 한성부에서 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한문 필사본이다.

 

제1부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도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중책 

조선시대 한성부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고 수도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그 자리는 다른 많은 관직 중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다. 그 우두머리인 판윤은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셈이다. 한성판윤의 직급은 정이품이었다. 종이품이던 각도 관찰사보다 높았으며, 육조(六曹)의 최고 책임자인 판서급이었지만 그 실세는 영의정에 버금가는 지위였다(어전회의인 대각<臺閣>에도 참여할 수 있었음). 예로부터 '영의정되기보다 한성판윤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는 판윤을 임명할 때 반드시 외가의 3대까지 혈통을 살폈으며 당파에도 크게 치우치지 않는 집안의 인물만 골라서 임명했기 때문이다. 1393년 11월 29일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정도한 후 초대 성성린으로부터 1910년 8월까지 1,392명의 판윤이있었다. 성씨별로는 왕족인 전주 이씨가 43명의 한성판윤을 배출하여 단연 1위를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한말 명성황후의 후광을 받은 여흥 민씨가 35명의 판윤을 내었다. 아울러 특이하게도 달성 서씨들이 32명이나 배출된 점이 눈길을 끈다.

 

한성판윤의 재임기간

조선 시대 한성판윤의 재임 기간은 얼마나 될까.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임명된 날 해임된 한나절 판윤도 있는가 하면 자그만치 13년 4개월이나 서울의 살림살이를 책임졌던 판윤도 있다. 조선 시대 한성판윤 중에 임명된 날 해임된 한나절 판윤은  1. 1771년(영조 47년)1월 12일 임명되었다가 같은 날 면직된 구윤옥 2. 1848년(헌종 14년) 11월 20일 임명되었다가 같은 날 면직된 이돈영 3. 1849년(철종 즉위년) 7월 20일 임명되었다가 해임된 김좌근 4. 1880년(고종 17년) 2월 25일 임명되고 같은 날 해임된 임응준 5. 1883년(고종 20년) 6월 28일 임명되고 같은 날 면직된 김익용으로 5명이다. 한나절 판윤뿐만 아니라 발령받은 다음날 면직된 하루 판윤도 1. 1790년(정조 14년) 오재순 2. 1799년(정조 23년) 서유대 3. 1803년(순조 3년) 민태혁 4. 1865년(고종 2년) 이경세 5. 1868년(고종 5년) 김재현 6. 1882년(고종 19년) 이기세 7. 1893년(고종 30년) 한성근 8.1904년(광무 8년) 이병성 9. 1904년(광무 8년) 성광호 9명이나 된다. 날짜로는 이틀이지만 외지에서 발령받았을 경우 한성부에 도착하기 전에 후임이 발령난 꼴이 된다. 3일 판윤도 1798년(정조 22년) 성덕조 등 11명이나 된다. 정도 600년 동안 10일 안에 면직된 사람이 153명이며, 반면에 5년이상 장기 근속한 판윤도 9명이나 된다. 가장 장수한 판윤은 광해군 시절의 오억령 판윤으로 1610년(광해군 2년) 3월부터 1623년 7월까지 13년 4개월 동안 재임했다. 막중한 한성판윤 자리가 1656년(효종 6년) 7월에 이완 판윤이 면직된 후 1656년(효종 10년) 4월까지 4년 2개월 동안 공석으로 두었다가 허적이 임명되는 사례처럼 장기간 공석이 경우도 4번 있었다.

 

한성판윤을 가장 많이 갈아치운 왕은?

조선 초 태조 때 24개월이던 한성판윤의 평균 재임기간은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점점 짧아져, 철종.고종 때에는 평균 한 달 열흘로 줄어들었다.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 재위 기간 동안 판윤을 가장 많이 갈아치운 왕은 고종이다. 그는 43년 동안 자그만치 387명을 임명,1년에 평균 9명꼴로 판윤을 경질하였다. 1년에 가장 많은 판윤이 교체된 때도 역시 고종 연간이다. 1890년(고종 27년)에는 1년 동안 무려 25명의 판윤이 교체되었다. 한달에 가장 많은 판윤을 교체한 왕 또한 고종이다. 1882년(고종 19년) 9월에는 다섯 사람의 판윤이 평균 1주일에 한 명 꼴로 임명, 경질되었다. 조선왕조 27명의 제왕 중 한성판윤을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왕은 2대 정종, 12대 인종, 마지막 왕인 27대 순중 등 세분이다. 2대 정종은 세자였던 정안대군(후일 태조)이 실권을 가지고 있어 인사권을 못 행사한 것으로 보이며, 12대 인종은 재위 기간이 짧았으며, 27대 순종은 일제가 전권을 행사하여 실권이 없었다. 이렇게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의 한성판윤 인사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평가할 수 있다.

 

월급은 쌀 두 섬 두 말과 콩 한 섬 다섯 말

한성부의 최고 책임자의 명칭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여러번 바뀌었다. 1395년(태조 4년)부터 사용되던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라는 명칭이 1466년(세조 12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그리고 3년 뒤인 1469년(예종 원년)부터는 판윤(判尹)으로 바뀌었다. 판윤이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하여 사용되다가 1984년(고종 31년)에 부윤으로 1895년(고종 32년)에는 관찰사로 잠시 바뀌었으나, 이듬해인 1896년(건양 원년) 다시 판윤으로 돌아왔다. 정이품의 직급이었던 한성판윤은 당시 하루 몇 시간이나 근무하고 또 월급은 얼마나 받았을까? 한성부에 근무하는 관원들은 여름에는 묘시(卯時 : 오전 5~7시)에 출근하여 유시(酉時 : 오후 5시 ~ 7시)에 퇴근하고, 해가 짧은 때인 겨울에는 신시(辰時 : 오전 7~9시)에 출근하여 신시(申時 : 오후 3~5)에 퇴근하였다(하루 12시간에서 8시간 근무). 그리고 월급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선조 인조 때의 자료(대전통편<大典通編>)를 보면 한 달에 쌀 두 섬 두 말과 콩 한 섬 다섯 말을 지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섯 사람의 호위를 받는 출근길

관원들이 타는 수레나 가마는 계급에 따라 달랐다. 조선 시대에는 교여지제(轎與之制)라고 하여 제도적으로 기준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평교자는 일품과 기로(耆老). 사인교는 판서 또는 그에 상당하는 관리. 초헌은 일품이나 이품의 관원. 사인 남녀(四人 藍女)는 이품의 참판 이상. 남여는 삼품의 승지와 각조의 참의 이상. 장보교는 하급 관원들이 탔다. 조선 시대 한성판윤은 초헌을 타고 출퇴근하였지만 중간 관리들은 말을 타고 출퇴근하였다. 일반 시민들도 모두 말이나 소를 타고 도성 내를 활보할 수 있었다. 말을 탄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 도성 내가 매우 복잡해져 교통 체증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 도성 내에서 말을 타고 급하게 달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고가 자주 일어나자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1400년(정종 2년)에는 도성 내 교통 체증에 대한 특별 조치가 있었다.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천민, 목동들은 도성 내에서 말이나 소를 타지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우마는 관청에서 몰수하고 사람은 곤장 80대를 친다고 하였다. 또 1425년(세종 7년)에는 왕명을 수행하기 위해 급히 가는자 이외에는 도성 내에서 말을 달리지 못하게 하였다. 일종의 속도제한이다. 만약 어기고 말을 타는 자는 처벌하고 사람을 죽게 한 자는 귀양을 보내기로 하자, 사고가 줄어들고 도성 내의 우마 소통이 수월해졌다. 조선 중기로 내려오면서 일반인뿐 아니고 하급 관리들도 말을 타고 출퇴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성판윤의 하루 일과

조선 시대 한성부의 최고 책임자인 한성판윤의 하루 일과는 지금과 같이 능률적이지 못했다. 형식과 격식을 중요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시간 낭비가 심했다. 한성부 청사 앞에는 큰 대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가운데 큰 문이 있고 양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문이 있는 삼문이었다. 가운데 큰 대문은 낭청 이상이, 큰 문 옆에 딸린 조그만한 협문으로는 소속 관원이 출입하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출입문이 달랐다. 벼슬이 낮은 사람은 미리 출근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높은 사람이 출근할 때 격식(출근 할때에는 공례 퇴근 할때에는 지송)을 갖추어 맞이하여야 했다. 공례가 끝나면 이방 서리가 판윤, 좌.우윤 앞에 끓어앉아 직원들의 출석 상황을 적은 명단을 낭독하였다. 잡무를 맡아 보는 승발이 판윤 앞에 엎드려 소송 사건이 접수된 내용을 보고하고 관인을 개봉하면 정식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성판윤은 관복을 갈아입는 곳인 개복소(改服所)에서 공무를 집행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그 날의 일을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는 결제하기가 상당히 수월하였다. 업무 자체가 단조로워 결재 건수가 몇 건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판윤에게 결재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 일과를 보내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면 판윤 부속실격인 수청방(隨廳房) 사령이 각방 사령들에게 결재 받을 것이 있는지를 물어 본 후 결재 받을 서류가 없다고 하면 퇴근 준비를 하였다. 퇴근 시간에도 출근 때와 비슷한 지송례라고 하는 절차가 있었다. 잡무를 맡아보는 승발이 대청 마당에 엎드려 "좌기(坐起)가 끝났습니다!"라고 외치고 본방 사령이 섬돌 아래에서 복창을 하였다. 일과가 끝났다는 말이다. 이 소리를 들은 판윤은 관인(官印)을 봉하고 일과를 끝낸다.일과를 끝낸 후 한성판윤은 개복소에서 옷을 갈아 입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경직되고 엄격한 근무 환경

조선시대 사람들은 관료로 출세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였다. 유교적 관념에서 돈을 모으는 것은 천한 일로 보았다. 관료가 되면 특전도 많았다. 잘못을 저질러 형사적인 체형을 받게 되더라도 매는 노비가 대신 맞아 주는 등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외부에서의 찬사와 예우와는 다르게 관료 사회 내부는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근무 환경도 열악하고 엄격했다. 관기가 흐트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관리에게는 해서는 안될 일들이 많았다. 조선 시대에도 근무 방법, 근무 시간, 각종 민원을 처리하는 절차 등이 상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민원인을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들도 잘 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는 물품의 관리 감독이 특히 엄격했다. 물품과 회계 부정은 엄격하게 처리되어 만약 재물을 탐하다가 적발되면 영원히 관리로 임용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의 관료 진출에도 지장을 주었다. 이런 엄한 규율들이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차츰 문란해져 조선 말에는 공직 기강이 한심할 정도로 많이 해이애졌다.

 

근무 성적 평가는 어떻게?

승진할 수 있는 법적 기한을 참하관(參下官)의 경우 450일(15개월), 참상관(參上官)은 900일(3년) 등으로 승진 소요 연수를 정해 놓았다. 특히 직원들의 신상필벌을 가늠하는 근무 성적 평가 제도는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근무 성적 평정은 포폄(褒貶)이라고 하는데, 매년 6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하였다. 조선 시대의 포폄은 사사로운 정실이 배제되어 지금보다 더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포폄하기 하루 전날 신시(申時 : 오후 3~5시)에 담당자가 한성판윤, 좌.우윤에게 어떤 기준에 의해 평가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지침을 받았는 데, 1. 농사를 잘 돌보아서 풍년이 들게 하였는가 2.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어 호구를 증가시켰는가 3. 학교를 많이 일으켰는가 4. 군정(軍政)을 잘 다스렸는가 5. 부역을 공평히 부과하였는가 6. 소송 사건을 줄였는가 7. 나쁜 풍속을 줄였는가 이런 착안 사항을 중심으로 관리들의 능력을 평가하였다.

 

후했던 휴가제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근무하고 일요일에 쉬는 요일제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 실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요일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기적으로 쉬는 휴일이 있었다. 평균 한 달에 다섯 번 정도 쉬었다. 음력으로 매달 1, 8, 15, 23일은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고, 입춘.경칩.청명.입하 등 달을 가르는 절기도 쉬었다. 이 절기를 태양력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잘하면 음력 휴일과 앞뒤로 만나 연휴가 될 수도 있고 잘못하면 정기 휴일과 겹쳐 손해를 보는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 관리들도 연휴가 끼는 것을 좋아해 휴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연초가 되면 관상감에서 달력이 나오는데 그 달력을 놓고 그 해의 연휴가 얼마나 들어갔냐를 따져 보느라 야단들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설을 중시하여 설날에는 무려 7일을 쉬었다. 그리고 정월에는 자일(子日) 오일(午日)이 들어가는 날도 쉬었다. 정월은 쉬다가 볼 일 다 본 셈이다. 단오와 연등회 때도 3일씩 연휴를 주었다. 그러나 추석에는 하루만 쉬었다. 관리들은 또 국경일과 국기일(國忌日)에도 쉬었다. 국경일은 왕.왕비.왕대비의 생일날이고 국기일은 왕이나 왕비가 돌아기신 날이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모든 주권을 가졌기 때문에 왕족의 길흉사는 곧 일반 백성의 길흉사와 같다. 국경일이나 국기일말고도 관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휴가(부모님이 위독할 때)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 공무원들에게는 휴일, 휴가 등 노는 날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근무 태도도 느슨하여 지적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신년 아침이면 대궐로 신년 하례를

조선 시대 신년 아침은 어느 집을 막론하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다녔다. 조선 시대 한성판윤은 조상에 대한 차례가 끝나면 입궐 채비를 갖추고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신년 하례에 참석하기 위해 대궐로 들어갔다. 신하들이 조회를 기다릴 때 사용하는 조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왕이 나오면 새해를 하례하는 전문(箋文)과 신년 선물인 옷감을 바친 후 정전의 뜰에서 신년 인사를 올렸다. 팔도의 방백인 관찰사와 병사(兵使), 수사(水使)와 이름 있는 고을의 목사(牧使)도 하례하는 글과 그 지방의 특산물을 올렸다. 신년 하례가 끝나면 문소전에서 설날 아침에 특별히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근정전으로 나와 왕과 왕세자, 문무백관이 '향궐 하례'라고 하여 중국이 있는 북쪽을 향해 네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는 경축 의식을 집행하였다. 대궐에서의 신년 하례는 격식과 존엄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각 관청의 아전과 하인들과 각 영문의 장교와 나졸들은 상관 집을 돌아다니면서 세배를 드리는데, 상관들도 모두 더 높은  상관 집으로 세배를 나가 집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양반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한 쟁반을 놓아 두는데 주인이 없더라도 세배 온 사람들은 종이에 자기 이름을 쓴 명함을 쟁반에 놓고 나왔다. 이것을 세함(歲銜)이라고 하는데 세배를 드리러 왔다가 만나 뵙지 못하고 갔다는 표시이다. 왕은 새해가 되면 신하와 내명부에 올라 있는 부인들 중에 70세 이상된 사람에게 쌀, 생선, 소금 등을 하사하고 80세이거나 일반 백성으로서 90세가 되면 품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조선 시대에도 판공비가 있었다

조선 시대 한성판윤에게는 판공비가 있었다. 이 판공비로 직원들에게 격려금도 주고 상을 당한 곳에 부조도 하였다. 한성판윤은 일가친척이 아닌 공적인 부조일 경우에는 예산으로 지원해 주었다. 18세기경의 기록으로는 한성판윤이 상을 당했을 때, 정목(正木) 다섯 필에 해당되는 대금으로 10냥 4전, 초 세 쌍 대금으로 9전, 햇불 40자루 대금 2냥 8전, 중간치의 햇불 3자루 대금 1냥 2전으로 공금으로 지급했다. 너무 잘 주어 격려금 예산이 모자라 실무자들이 애를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행하(行下)라고 불렀는데, 상급자가 아랫사람에게 위로조로 주는 돈이다.

 

한성부 옛터와 구조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앞에는 경복궁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한국통신 건물이 있고 그 앞 보도 가장자리에 '경조아문터(京兆衙門攄)'라고 쓴 표석이 서 있다. '경조'는 서울이라는 뜻이고, '아문'은 관청이라는 뜻이다. 즉 한국통신이 있는 일대가 지금의 서울시청격인 한성부 자리였다는 표시이다. 조선 시대 한성부는 무려 일곱 번이나 청사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제일 오래 있었고 또 마지막까지 있었다.  참고로 건물의 배치를 보면 전체 규모는 172간으로 당상대청(堂上大廳) 6간, 낭청대청(郎廳大廳) 6간, 서리청(胥吏廳) 18간, 호적청(戶籍廳) 18간, 호적 서리방 3간, 호적 창고 99간, 기타 22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적 창고가 큰 것은 전국의 호적을 모두 한성부에서 보관 관리하였기 대문이다. 한성판윤의 집무실이 있는 당상대청은 서향으로 지어져 있었고 앞뒤에 툇마루가 있었다. 또 대청 남쪽과 북쪽에 각각 작은 방이 있었는데 남쪽 방은 판윤이 일을 보는 곳이고, 북쪽방은 관청의 하급 관원 밑에서 잡무를 보는 승발이 근무하는 방이었다. 대청의 동쪽에는 큰 연못이 있어 짬이 나면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제2부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했을까

 

한성부의 주요 업무

조선 시대 당시 한성부에서 관할하는 구역은 4대문 안인 도성내(都城內)와 성저(城底) 10리라고 하여 도성 밖 5 내지 10리까지로, 대략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경계와 비슷했다. 4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나타난 한성부의 구역을 보면 북쪽은 북한산, 남쪽은 한강,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양화진과 고양의 덕수원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행정조직이 시청-구청-동사무소-통-반 순으로 되어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부-방-계-5가작통법 순으로 되어 있었다. 부는 조선 시대 내내 변동이 없었지만 방과 계의 숫자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동이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성부에 근무하는 인원은 한성판윤과 이속을 합쳐야 90명밖에 안 되었다. 이 인원이 거의 10만이 넘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책임졌던 것이다. 한성부에서는 호적 작성 및 보관, 주택.시장.점포.건축.전답.산림.도로.교량.개천에 관한 관리, 조세과정, 공동재산 관리, 물품 조사, 탈세, 채무, 폭력 행위 단속, 방범 순찰, 시체 검안, 차량 및 우마와 가축 관리, 호패 발행 등 사람이 살아가는 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처리하였다. 또한 한성부에서는 건물의 임대료도 받아들였다. 지금의 구청격인 다섯 곳의 부에서 사용하는 건물의 임대료도 한성부에서 받아들였다. 중부에서 사용하는 건물이 84간, 동부가 184간, 서부가 70간, 남부가 140간, 북부가 21간이었는데 매 간마다 5푼씩의 사용료를 받았으나 군인들이 사용하는 곳은 면제하여 주었다. 그리고 한성부가 소요하고 있는 전답에서도 수세를 받아들였다. 요즘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 등본을 발급받으려면 수수료를 내어야 하듯이 조선 시대에도 가옥이나 전답에 대한 증명을 발급받을 때에는 수수료를 내어야 하였다. 소송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답에 관한 증명의 수수료는 1부(負)에 5푼을 받도, 기와집은 1간에 5푼, 초가는 2간에 5푼, 공대지는 4간에 5푼씩을 받았는데 2냥을 넘지 않게 하였다.

 

서울의 송사를 전담하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와 형조 간에 사법 업무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점차 정비되어 한성부는 서울의 송사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확립되었다. 특히 주택.전답.묘지.노비 등에 관한 소송은 전국의 것도 심리하였다. 양반 관료층이 서울에 많이 살았고 그들의 토지와 묘지가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 서울에서 소송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한성부에서는 친족끼리 서로 싸우는 일, 절도, 간통, 구타, 욕설 등의 경범죄에 관한 사법 업무도 담당하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를 형조, 사헌부와 더불어 삼법사(三法司)라고 하였다. 당시 한성부 판윤은 실질적으로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어 오늘날의 서울시장직뿐 아니라 법원장의 직책도 일부 행사하였다. 조선 시대 한성판윤이 처리하는 일 중 중요한 비중을 갖는 민원 업무는 백성들 간의 각종 분쟁. 땅이나 주택에 대한 소송 사건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지금의 민사 사건에 해당하는 송사(訟事)를 판결해 주었고, 형사 사건에 해당하는 범법자들을 붙잡아다가 벌을 주는 일도 하였다. 쉽게 애기해서 한성부는 일반 행정 기관이면서 지금의 민사지방법원과 형사지방법원 업무에 해당하는 사법 업무도 처리하였고, 경범죄처벌법과 같은 경미한 형사 사건을 위반한 사람에게 형을 집행하는 교도소장과 같은 업무와 범죄자를 체포하고 구금하는 경찰서장의 업무까지 담당한 셈이다.

 

전국의 호적 원본 정리

오늘날의 호적 관리는 호적이 있는 곳의 읍면장 또는 구청장이 담당하지만, 조선 시대 호적의 원본은 모두 한성부에서 관리 하였다. 그 사람이 서울에 살든 호남에 살든 영남에 살든 관계 없이 모든 호적 관리를 한성부에서 하는 것이다. 물론 호적 정리 기간이 되면 기본 사항은 해당 지역에서 만들어 한성부로 올려 보냈다. 한성부 청사 중에 유독 호적 창고들이 많은 이유는 전국의 호적을 모두 보관하느라 그렇다. 호적은 한성부에서 매 3년마다 정리하였다. 호적 정리가 마감되면 한 부는 한성부 창고에 보관하고 한부는 강화도로 옮겨 보관하였다. 화재나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도성 내의 안녕과 치안 유지  

1425년(세종 7년) 사헌부에서 이르기를 '한성부의 업무는 왕도(王都)를 숙청(肅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서울 장안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엄하게 다스려 없애라는 뜻이다. 한양을 건설할 때 큰길이나 뒷길을 모두 반듯하게 곧게 해서 우마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땅 욕심 많은 사람들이 주거지를 넓히기 위해 도로를 침범하여 울타리를 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도로를 막고 집을 짓기도 하여 길이 좁고 굴곡이 생겨 통행이 불편해졌다. 1427년(세종 9년) 도로를 침범한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기 위해 조사한 결과 1만 여 호나 되어, 세종이 이 건물들을 철거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이를 막기 위해 도로를 침범하거나 도로에 오물을 버리는 자가 있으면 방(坊)의 책임자인 관령(管領)을 처벌하는 연좌제가 실시되었다. 조선 시대 집행 업무는 지금의 구청격인 '부(部)'에서 담당하였다. 5부의 장인 지금의 '구청장'을 조선 초에는 '영(令)'이라고 하였다. 하급 관원으로는 녹사(錄事) 2명이 있었다. 5부의 장은 그후 종육품인 주부(主簿)로 바뀌었다가 영조 때는 도사(都事)로, 정조 때 다시 영으로 바뀌었다. 1792년(정조 16년)에 영 밑에 도사와 서원 4명, 사령 8명, 대청직(大廳直) 1명, 군사 2명을 각각 둔다고 하였는데 조선 초에 비해 인원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정기적인 순환 보직을 하여 부조리를 사전에 방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좌경(座更)이라고 하여 일반 주민이 도시 치안에 참여하는 제도가 있었다. 좌경을 하는 주민 조직이 좃선 초에는 5가구가 한 단위였는데 숙직이 자주 돌아와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고 장정들이 부족하여 아동이나 부녀자, 노약자들이 숙직하기도 하여 1493년(성종 24년)부터는 10가구를 한 단위로 완화하였다. 한성부 5부에서 담당하던 순찰 구역은 다음과 같다. 중부:어이동궁, 영온옹주궁, 의금부, 호조, 기로소 등 / 동부:종묘, 경모궁, 중로계(中路契) 사거리, 경비초소, 숭신방(崇信坊) 경비초소, 동관왕묘 등 / 서부:사직서, 경운궁, 비변사, 선혜청, 연지계 경비초소, 서소문 밖 사거리 경비초소, 신문로 밖 사거리 경비초소, 마포계 경비초소, 서강 경비초소 등 / 남부:회현동 경비초소, 명례궁, 균역청, 수구문위 등 / 북부:경우궁, 의정부 경비초소, 육상궁, 연희궁, 선희궁, 전계대원군궁 등.

 

왕 행차시 경호 담당 및 환경 미화       

조선 시대는 절대군주제였기 때문에 왕이 한 번 행차하면 그 준비가 보통이 아니었다. 왕이 행차를 하거나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 길 옆 주택의 지붕과 다리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헝겊과 실을 늘어뜨려 장식을 하여 환영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왕의 행차가 있기 대략 15일 전에 한성부로 공문이 내려왔다. 그 공문을 받으면 한성부와 다섯 부(部)는 매우 바빠진다. 한성부와 왕이 행차하는 지역의 부에서는 도로를 보수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며 왕이 지나가는 곳에 전염병이 있는지 없는지도 조사하여야 하였다. 도착지에 대한 대비 등 사전에 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관리가 말을 타고 왕의 연(輦)을 선도하였다. 왕의 연을 선도하는 것을 청도(淸道)라고 하였는데, 요사이 말로 에스코트하듯이 멀찌감치 앞서가면서 도로변의 백성들을 비키게 하고 엎드리게 하였다. 보통 때 같으면 아무리 높은 관리라도 대궐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는데, 청도는 말에서 내리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말에서 내리면 안 되었다. 뒤에 왕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다만 종묘 앞을 지날 때만 말에서 내렸을 뿐 어패(御牌) 및 왕의 명령을 받드는 자를 만나더라도 피해 돌아가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모든 행정력이 왕을 수발하는 데 집중되고 있었다.

 

무허가 노점상 단속

조선 시대에도 한성부와 5부(部)에서는 무허가로 장사하는 상인들을 단속하느라 골치를 섞었다. 요사이 노점상 단속은 순전히 공무원들이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허가받은 상인들도 단속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허가로 장사하는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한성부에서는 종로 일대에 점포를 만들어 세를 주고 이들 점포 외에는 장사를 못 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일종의 상가 임대업을 한 것이다.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서 만들어 준 상점에서 물품을 파는 대신 국가에서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 대신 모든 상품은 시전 상인들이 독점 매매하였다. 만일 시전이 아닌 곳에서 물품을 사고 팔면 난전(亂廛)이라 하여 과낭에 고발하여 벌금을 물리거나 체형을 가하였다. 이러한 금난전권(禁亂廛權)은 17세기부터 시전 상인들에게 부여되었다. 금난전권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서울이나 서울 주변의 가난한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했고 점점 허가받은 상가에 대한 원망이 커져 갔다. 더 이상 시전의 행패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정부가 육의전(六矣廛)이라고 하는 큰 시전만 제외하고 금난전권을 없애 아무나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했다. 이때가 1791년(정조 15년) 신해년이기  때문에 이 정책을 '신해통공'이라고 한다. 시전 상인에 대한 금난전권은 축소되었지만 한성부나 5부의 관원들은 계속하여 무허가 상행위와 매점매석, 물가를 터무니 없이 올려 받는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한성부와 5부 관원들의 지나친 단속과 횡포로 상인들의 원성과 민원이 일어나자 한성판윤은 엄격한 단속 지침을 만들었다. 1. 단속하는 관리는 반드시 단속 관리임을 나타내는 금패(禁牌)를 차고 나갈 것 2. 금패는 단속을 나가는 날 수령하고 일과가 끝나기 전에 반납할 것, 담당자는 출납 기록을 엄격히 하여야 함 3. 야간에는 단속하지 말고 자기 집에 있으면서 단속하지 말 것 4. 금지구역 외에서는 단속하지 말 것 5. 사전에 금지 품목으로 정한 것 이외의 것을 추가해서 단속하지 말 것 6. 단속을 정한 시간 내에만 할 것 7. 먼저 단속 사항을 충분히 알린 후 위반자를 단속할 것 8. 단속은 한 달에 6번 이내로 하고 명절에는 단속하지 말 것 9. 단속 관원을 사칭하다가 적발되는 자는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낼 것임 10. 위의 단속 지침을 위반할 때에는 엄벌에 처할 것임.

 

화재 예방과 진화 업무에 관여

보신각 종은 새벽과 저녁에 두 번 울려 도성 문을 열고 닫는 것이 관례이다. 새벽 4시 33번 울리는 파루(罷漏)라 하여 도성 내의 4대문과 4소문이 일제히 열린다. 이때부터 도성 내외에서의 모든 활동이 개시되는 것이다. 또 저녁 10시에 28번 치면 인정(人定)이라고 하여 통행금지가 시작되어 도성 내 8개의 문이 모두 닫혔다. 파루와 인정 시각 외에 보신각 종이 울린다는 것은 틀림없이 장안에 비상 사태가 일어났다는 신호였다. 조선 초에는 궁궐이나 관청 건물에 불이 났을 때에만 보신각 종을 치도록 하였는데 조선 중기 이후 도성 안에 대형 화재가 자주 일어나자 민가에서 큰 불이 날 경우에도 보신각 종을 쳐 각 관청과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서울 장안의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들이고 오밀조밀 붙어 있기 때문에 한 번 불이 나면 순식간에 옆집 건물로 옮겨 붙어 큰 화재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1426년(세종 8년) 2월에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여 화재의 예방과 개천의 보수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화재가 발생된 현장에는 좀도둑들이 성했는데 금화도감에서는 화재가 난 틈을 타 물건을 훔쳐가는 도적들을 잡아들이는 일도 하였다. 또 불을 끄는 사람들에게 야간 통행증도 발급하였다. 조정에서는 인접한 가옥과 가옥 사이에 화재 예방 담을 설치하여 불길이 번지게 않게 하고 요소마다 우물을 파게 하였으며, 한성부 각 방의 책임자인 관령(管令)으로 하여금 자기 관할 두 곳에 물독을 설치하여 비상시 방화수로 쓰게 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평소에 방화조를 편성하여 두었다가 비상사태 때 동원하였다. 방화조는 각 지역 주민별, 기관별, 군부대별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편성만 된 것이 아니고 주기적인 훈련과 회의도 하였다. 방화대의 조직과 행동 요령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비화조건(備火條件)'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1. 금화도감에서는 각 관청에 있는 노비 수에 따라 방화조이 수를 정하여 준다 2. 각 관청에서는 번호가 들어간 통일된 모양의 깃발을 만들고 금화도감에서는 인장을 찍어 준다. 화재시에는 이 깃발을 앞세우고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래야만 불을 끄러 온 사람인지 도적질하러 온 사람인지가 구별된다 3. 금화도감에서는 각 관청의 방화조의 숫자대로 미리 급수통을 만들어 지급한다. 화재가 발생하면 각 관청의 책임자는 방화조에게 급수통을 휴대시켜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서 금화도감의 지시에 따라 진화 작업을 한다 4. 모든 마을에서는 다섯 가구 단위로 급수조를 편성하여 급수통을 준비한다 5. 불이 나면 화재 현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집에서는 우선 자기 집에 불이 옮겨 붙지 않게 하여야 하며 그외의 인원은 관령이 집합시켜 화재 현장으로 가 금화도감의 지시를 받는다 6. 불이 나면 화재 현장에 소화 지휘소를 설치한 뒤 큰 깃발을 세우고 북을 쳐 각 관청의 소화반, 군인과 시민들의 소화 지휘소를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7. 각 군부대에서는 불이 나서 보신각 종소리가 들리면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화재 현장으로 출동하여 금화도감의 지휘를 받아 불 끄는 작업에 임한다 8. 불을 다 끈 후 공로가 있는 자는 왕에게 보고하여 상을 주고 태만히 한 자는 벌을 주며 늦게 도착한 각 관청이 책임자도 처벌한다. 비록 비표가 없더라도 불을 끄기 위해 출입하는 사람은 통제하지 아니하나 난잡한 행동을 하는 자는 출입을 통제한다 9. 충호위(忠扈衛)에서는 천막을 찢어서 보자기를 만들어 각 관청에 나누어 주고 소화원들은 보자기를 물에 적셔 불을 끄게 한다 10. 각 관청은 불이 나면 필수 요원을 제외하고 전 관원을 화재 진압 작업에 동원하여야 한다 11. 군과 노비의 동원 책임을 맡은 각 관청의 책임자는 평상시에도 한 달에 두 번씩 모여 모의 훈련과 대책을 교육하여야 한다.

 

일식이 있어 하늘에 빌다 

종로구 재동 140번지 일대에 관상감이 있었다. 관상감의 본래 이름은 서운관이었으나 1466년(세조 12년)에 관상감으로 개칭하고 천문.지리.기상 등을 관장하였다. 관상감에서는 달력도 만들었다. 달력이 나오면 관상감 직원들은 몰래 빼돌려 실력자들에게 선물도 하고 친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관상감에서는 해와 달과 별도 관측하였다. 왕실에서는 천체 관측에 비상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천체의 변화는 왕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별의 변화는 국가와 개인과 왕의 생명과 흥망성쇠를 예언하고 경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왕이 하늘의 변화에 신경을 쓰므로 관상감에서는 자연히 천상 관측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천상 관측에 신경을 쓰다 보니 관측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여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이 있는 날을 미리 알아 내었을 뿐 아니라 일식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도 정확히 알아내었다. 몇 월 며칠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관상감에서 일식이 예고되면 왕과 조정 대신들은 하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반성의 표현으로 소복을 입고 일식이 무사히 끝나기를 비는 행사를 궁궐에서 거행하였는데, 가끔 한성부에 나와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구식(救蝕)이라고 한다. 각 관공서에서는 일식이 있는 날 근무를 하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모두 휴무하였다. 당시 일식맞이는 중요한 국가 행사였기 때문에 예보가 빗나갈 경우 관상감 직원들은 곤장을 맞거나 감옥에 가는 일도 있었고 정확히 잘 맞히면 상을 받기도 하였다.

 

불씨를 나누어 주다

옛날에는 편리하게 불을 일으키는 도구가 없어 각 가정에서는 항상 불씨를 보관하고 있어야만 하였다. 조선 시대는 모든 물품의 제작과 공급을 정부에서 주도하던 때이므로 각급 관청 및 고급 관리들에게는 조정에서 수시로 생활 필수품들을 공급해 주었으며 불씨도 그런 뜻에서 정부에서 만들어 공급해 주었다. 조정에서 만들어 나누어 주는 불씨가 한성부에 도착하는 날은 특별히 정중하게 맞이하여야 하였다. 모든 물품의 하사는 왕이 베푸는 은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 및 고급 관리들이 필요로 하는 불씨도 병조에서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매년 입춘(立春).입하(立夏).입추(立秋).입동(立冬) 및 6월의 토왕일(土旺日)에 병조에서 불씨를 만들어 궁궐에 진상한 후 각 관청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불이 오래가도록 단단한 나무로 불씨를 만들었는데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나무가 달랐다. 입춘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입하에는 은행나무와 대추나무로, 토왕일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로, 입추에는 떡갈나무와 느릅나무로, 입동에는 괴목(槐木)과 박달나무를 비벼서 불씨를 만들었다. 불씨를 만든 후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수량 등을 적어 각 관청에 보내고 한성부에도 보내주었다.

 

공개 처형을 위한 주민 동원

조선 시대의 형벌에는 사형, 유배, 1년 내지 3년 간 복역시키는 도(徒), 매를 때리는 장(仗).태(苔) 등 다섯 종류가 있었다. 그 중 사람의 목숨을 끊는 사형은 죄질에 따라 집행 방법이 달랐는데,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목을 베어 시장거리에 매다는 효수(梟首)와 일단 죽인 뒤 머리.팔.다리.몸통 순으로 토막을 내는 능지처참(陵遲處斬),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꺼내 토막내는 부관참시(剖棺斬屍) 등이 있었다. 가끔 노량진 모래사장에서 사형수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공개 처형하였다. 역정 등 중죄인을 주로 공개 처형하였지만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사회 기강이 흐트러져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정책적으로 공개 처형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죄인들에 대한 인권이 지금같이 보장되지 않았다. 당시 한성판윤은 동원을 담당한 판관에세 인원 동원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고 엄명하였으며 동원하도록 지시된 인원보다 적게 나올 때는 문책을 하였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시체 검시까지

조선 시대에도 도성 내에서 가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각양 각색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성부 내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피살된 시체에 대한 일차 검시(檢屍)와 현장 보존, 수사를 지금의 구청격인 '부(部)'에서 하여 형조에 보고하였는데, 형조에서는 초검(初檢)한 것을 검토한 후 미진하다고 판단하면 한성부에 다시 재검사를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살인 사건이 나서 시체를 검시하여 보고할 때에는 일정한 양식과 절차가 있었다. 검시는 범인을 검거하거나 형량을 정하는 데 중요한 증거자료이므로 신중하고 치밀하게 처리되었다. 살인 사건의 시체를 검시할 때 초검과 재검을 같은 사람이 하는 경우에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즉 왕의 지시를 위반한 죄로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을 정확하게 조사하기 위해 각 단계별로 한 번 조사한 사람들은 다시 재조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혹시라도 서로 짜고 사건을 조작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옛날에는 사진기가 없었으므로 사망자를 그림으로 그린 시형도(屍型圖)에다가 각 신체 부위의 이상 유무를 기록하였다. 시체를 검시할 때에는 사망 원인을 밝혀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시체의 머리부터 시작하여 신장과 얼굴의 빛깔, 팔과 다리, 피부의 손상 여부 등 모든 신체 부위를 상세리 살펴보고 조사하였다. 또 시체를 검시할 때는 술.초.소금.망치.목탄.백반.솜과 상처를 재는 관천, 독살을 판정하는 데 사용하는 은비녀 등 각종 재료들을 활용하였다. 검시관들은 이들을 이용하여 자살과 타살.익사.구타사.중독사.병사.동사.아사 등 여러 사망 원인을 밝혀 내었다. 다음으로 시체를 처음 본 사람의 진술, 참고인들의 의견, 가족, 이웃 사람으로부터의 진술 등을 기록하고 각종 증거품들을 수집하였다. 마지막으로 시신을 조사한 검시관들은 죽은 원인과 검시 결과, 관련자들을 조사한 내용, 관련자들에 대한 처리 결과, 범인 처벌의 방향 등에 대한 견해 등 종합적인 의견을 기술하고 정범과 공범을 기록한 후 끝에 참여한 인원의 관직과 성명을 썼다. 사건 수사에는 관련자들의 진술보다 사망 원인을 더 중요시하여 검시가 끝났더라도 바로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아전들로 하여금 온전하게 지키게 하여 2차, 3차 검시가 있을 것에 대비하였다. 한성판윤은 한성부 관리들이 조사한 내용을 즉시 형조로 보고하였다. 왕에게 결재받는 일은 형조에서 하였다.

 

버려진 아이들을 처리하는 기준을 만들다

조선 시대는 생활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 먹고 살기가 어려워 자식을 많이 버렸다. 버려진 아이들 때문에 분쟁이 자주 발생하자 한성부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을 처리하는 기준을 만들어 5부(部)에 시달하였다. 1. 버려진 아이를 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 이를 허락할 때에는 아이의 성별, 용모와 나이, 입은 옷, 버릇 등을 자세히 기록한 후 양육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계하여야 한다. 만약 3개월이 되기 전에 친부모가 나타나 데리고 가겠다고 하면 기르는 데 들어간 곡식을 두 배로 배상해야 한다. 곡식을 배상하지 않거나 3개월이 지난 후에 찾아가겠다고 하면 아이를 돌려 주지 않아도 된다 2. 아이를 버린 독신 여인이 자식을 못 잊어 다시 찾으러 오면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3. 흉년에 도성 내외를 떠돌아다니는 12세 이하의 거지를 봄보리가 날 때까지 먹여서 살려 놓은 사람은 그 거지를 영원히 자기 노비로 삼아도 된다. 12세 이상 된 거지를 먹여 살렸을 때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 머슴을 살게 해야 한다 4. 버린 아이와 거지를 맡아 기를 사람이 없을 때에는 관할부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는지를 정확히 확인한 후 진청(賑廳), 즉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도와주는 기관으로 보낸다. 속이거나 사욕을 부리지 못하게 철저히 조사하여야 한다 5. 도성 밖 세력 있는 집에서 남의 아기를 버린 아기하고 속여 수양아들로 삼는 것은 중벌로 다스린다. 다른 사람이 이미 수양아들로 데려다가 길러 굶어 죽을 것을 살려 놓았는데 친부모가 나타나 자기 아들이라고 할 때에는 중죄로 다스린다 6.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길러 주었는데 그가 흉년이 지난 후 그 집에 머슴사는 것이 싫어서 배반할 때에는,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고 머슴이 주인집을 배반한 죄로 다스린다.

 

버려진 시체의 처리 기준

조선 시대는 생활 환경이 열악하고 불결해서 전염병이 많이 발생하였다. 조선 시대 서민들의 생활상은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시체가 도성 내외에 쌓이고, 이상 기후로 추운 겨울이 오면 얼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거리를 메우고, 전염병이 돌면 양반 상놈 가릴 것 없이 죽어 버려지는 시체가 산골을 메웠다. 헐벗고 가난한 백성들은 가족이 죽으면 장사를 지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밤에 몰래 내다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너무 가난하여 장사 지낼 돈도 없었겠지만 도성 안에서는 낮에 상여가 나가지 못하게 금지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도성 안과 성저 10리 내에 묘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묘를 쓰지 못하게 한 금지 구역을 살펴보면 대략 북쪽은 대조동, 우이천 하류, 수유리까지이고 남쪽은 신촌, 망원정, 마포에서 한강을 경계로 하였다. 이곳에 몰래 묘를 쓰다가 들키면 원(園)이나 능(陵)의 수목을 도벌하다가 들킨 것과 같이 처벌한다고 하였기 대문에 그 형량이 매우 무거웠다. 또 성밖 가까운 곳에서는 초가장(草架葬), 즉 유해성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체를 즉시 매장하지 않고 그 병이 사라질 때까지 풀을 덮어 가매장해 두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런 까다로운 규제 때문에 서울 장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일반 서민들은 형식을 갖추어 장사 지내기가 힘들었다. 한성부와 5부(部)에서는 버려진 시체를 정리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함부로 버려지는 시체를 정리하는 데 일관성이 없자 한성부에서는 버려진 시체의 처리 기준을 마련하여 5부에 시달하였다. 1. 주인이 없는 강시, 즉 얼어 죽은 시체는 발견된 지역의 부에서 묻어 준 후 표시를 하여야 하는데, 만약 호패가 있으면 거주지 부에 공문을 보내 시체를 찾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2. 큰 흉년이 들면 도성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많이 버려지는데 이들을 매장하기 위해서는 어영청(御營廳) 장교를 차출하여 쓰고 매장하는 사람은 각 계(契)에서 상여꾼을 차출하여 쓴다 3. 시체를 처리하는 어영청 장교와 매장꾼에게는 매월 한 사람에게 쌀 13말과 베 3필씩을 지급한다. 매장할 때 들어가는 가마니와 새끼는 양창(兩倉)에서 준비해 주고, 광(壙)을 파는 데 쓰는 삽과 곡괭이 등은 선공감에서 준비한다 4. 시체를 실어 나르는 수레는 용산에서 4량, 훈국(訓局)에서 1량, 어영청에서 2량, 금위영(禁衛營)에서 2량, 수어청(守禦廳)에서 1량을 빌려서 쓴다. 그러나 계획은 치밀하게 세웠지만 실제로는 이대로 집행이 되지 않았다.

 

제3부 그외 조선 시대 서울시장이 관여했던 일

 

이행(李行)이 만들고 홍계희(洪啓禧)가 준설한 청계천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통감부(統監府) 초기에 생긴 것이고, 고려 때부터 '한양천(漢陽川)' 또는 '경도천(京都川)'이라 불려 왔다. 청계천은 당초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개울이었는데 시가지를 만들면서 인공 하천이 되었다. 1406년(태종 6년) 1월에 한성판윤 이행이 충정.강원도 장정 600명을 차출하여 청계천을 팠으며, 같은 해 3월에 다시 장정들을 동원하여 개천을 파고 길을 닦았다. 그러나 그때 한 공사가 완벽하지 못해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개천이 넘쳐났다. 태종 이후 물난리가 자주 나자 청계천을 보수하거나 수시로 준설을 하였지만 근본적인 정비는 하지 못하였다. 아울러 1444년(세종 26년)경에는 벌써 청계천에 쓰레기가 쌓여 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었다(파풍수설<破風水說>). 그러나 조정에서는 청계천을 계속 방치하였다. 여기에 인조 이후 서울 주변 산들의 나무가 남벌되어 개천에 토사가 계속 흘러 들어오고 하상이 높아져 결국 수구(水口)가 막히기까지 하였다. 1760년(영조 36년) 2월 27일 청계천의 비참한 참상을 보고 지시를 내린 영조의 통탄교서(痛嘆敎書)에 이런 실정이 잘 나타나 있다. 몇 번의 준설 사업을 조정에서 주관하여 시행하였지만 미봉책에 그쳐 별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그리고 예산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1760년(영조 36년) 이조판서 겸 한성판윤으로 재직하게 된 홍계희가 청계천 준설 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호조판서 홍봉한도 함께 참여). 준설 공사에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소요되었다. 동원된 인원이 15만 명이었고, 이 중 품삯을 주고 동원한 사람도 5만 명이나 되어 들어간 돈이 그 당시 돈으로 5만 5,000냥이었으며 지원된 쌀도 2,300석이나 되었다. 광통교 다리 기둥에는 '경신지평(庚辰地坪)'이라는 넉 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이 해에 준설한 개천 바닥의 표준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파낸 토사가 하도 많아 산처럼 쌓였다. 이 토사의 처리가 또 골칫거리였다. 영조는 이 토사를 한 군데로 옮겨 산처럼 쌓기로 하였고, 이렇게 하여 지금의 청계천 6가 양쪽에 산이 생겼고 이를 기산이라고 불렀다. 이 산에 나무와 화초를 심었는데 그 향기가 일대에까지 퍼져 방산동(芳山洞)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광통교를 돌다리로 다시 놓다

청계천에 있는 다리 중 비교적 규모가 큰 것으로는, 모교(毛橋).광통교(廣通橋).장통교(長通橋).수표교(水標橋).화교(花橋).효경교(孝經橋).마교(馬橋) 등 8개가 있었다. 청계천 지류에도 66개의 다리가 있었다. 이 중 광통교는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 중 제일 큰 다리였다. 광통교는 원개 대광통교, 북광통교, 광통교 또는 대광교라고도 불리었다. 광통교 때문에 광교라는 지명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 다리는 처음에는 흙으로 만든 토교(土橋)였는데, 1410년(태종 10년) 대홍수가 나서 파괴되자 다시 석교로 건설되었다. 이때 이용된 석재가 바로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의 능인 정릉(貞陵)을 옮기고 버린 12개의 석각신장(石刻神將) 및 병풍석이다.

 

왜적에게 도굴된 선정릉(宣靖陵)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 이 능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게 도굴된 아픈 내력을 지니고 있다. 도굴 때문에 선릉과 정릉 안에는 아무런 시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