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기담]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1부 근대 조선을 뒤흔든 미스터리 살인 사건
죽첨정(서대문구 충정로) '단두유아 사건'
- 대낮 경성 거리에 나뒹군 아이 머리, 그 23일간의 대소동
1933년 5월
16일 : 몸통 없는 아이 머리 발견
17일 : 부검결과 발표. "성별 남아. 연령 만 1세 내외. 살아 있는 아이의 목을 벤 것.
1933년 6월
1일 : 무당 가족 다섯 명과 일명 '뻐꾸기' 검거
5일 : 머리 없는 아이 몸통 발견
사건 발생 23일 만에 사건은 해결이 된다. 17일 부검결과 발표 된 남아는 잘못 된 것이며, 여아로 판명된다. 사건은 무지로 자식의 간질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의 머리의 골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아버지가 친구를 사주하여 죽은 아이의 시체에서 머리의 골을 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판명된다.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 사건
- 참혹히 살해된 일본 순사, 붙잡힌 조선 청년들은 과연 범인인가?
1932년 1월
20일 : 가와카미 순사부장 변사체로 발견. 구타 및 기도 폐쇄로 인한 질식사.
25일 : 살해용의자 다섯 명 검거. 범행 자백.
1932년 9월
19일 : 대구 지방법원 제1회 공판 개정. 피고인 일동. 경찰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 주장.
1933년 7월
31일 : 고등법원(3심) 확정 판결.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로 인한 자백과 증거의 불충분으로 인해 무죄로 판명된다. 다섯 명의 시골 청년들은 1년 7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하여 석방되었으나 고향에 갈 차비가 없어 경성구호회의 도움을 받아 고향에 가게 되나, 당시 경성구호회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고향으로 가기까지에는 또다시 시간이 걸리게 된다. 석달 뒤, 다섯 청년이 1년 7개월의 억울한 옥살이로 받은 보상은 9원이다. 법원은 이들이 자백을 했기 때문에 최대한 보상해 줄 수 있는 금액이 최대 9원으로 판결한 것이다. 가와사키 순사를 살해한 진범은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
- 난자당한 조선인 하녀, 싸늘히 웃음 짓는 일본 여주인
1931년 8월
1일 : 조선인 하녀 마리아 변흥례, 초량정 철도국 관사 15호 다카하시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
29일 : 다카하시 부인 검거.
1931년 12월
14일 : 부산지방법원 다카하시 부인 무죄 방면.
1933년 2월
17일 : 이노우에슈이치로 검거. 범행 자백.
1934년 1월
27일 : 부산지방법원 이노우에에게 무기징역 선고. 다카하시 부인이 주범임을 판결문에 명시.
1934년 8월
6일 : 대구복심법원(2심) 확정 판결.
다카하시 부인과 부인의 애인이었던 이노우에과 사건의 공범이거나 다카하시 부인의 단독 범행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나, 뒤늦게 이노우에과 범죄와 관련된 증거와 정황들이 나오게 되나 운 좋은 다카하시 부인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기소 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에 가서는 지리한 법정 싸움 끝에 이노우에까지 무죄로 나오게 된다. 식민지 조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한 둘이었을까? 그리고 조선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
- 확인된 살인만 314건, 전 조선을 경악케 한 사교 집단의 최후
현란호화의 절정을 뽐내는 20세기 과학문명에 일대 오점을 남기고, 만능 완비를 자랑하는 현대 경찰력을 비웃는 듯이 조선의 심장부 대 경성을 중심으로 이다지도 흉악하고 참담한 공포와 전율의 연속극이 약 1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감행되었으리라고야 누구라 생각했으며 어찌 또한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랴?
경찰이 발굴 해부한 피살자 수만 4월 6일 현재 46명에 달하고 그들의 자백에 의해 이미 판명된 피해자 수가 200명에 달하는 등, 백백교의 전율할 죄상은 동양은 물론 멀리 서양에서도 일찍히 들은 바 없는 세계 범죄 사상 초 기록적 사건이 될 것이다.
- 김대관 ,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백백교의 교주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사진 한장 안 찍었으며, 12개 정도의 가명으로 활동한 것으로 밝혀진다. 결국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백백교 교주는 도피하여 얼마후 자살한 것으로 밝혀져 교주에 대한 수사는 종결되게 된다. 그러나, 자살한 교주의 얼굴이 동물들에 의해 훼손되어 결국 백백교 교주의 얼굴에 후대에까지 알려지지 않게 된다.
2부 근대 조선을 뒤흔든 스캔들
중앙보육학원 박희도 교장의 '여 제자 정조 유린' 사건
- 파렴치한 성추행인가, 악의적 무고인가? 불꽃 튀는 진실 게임
1919년 3월
1일 : YMCA 간사 박희도 민족 대표 33인 자격으로 3.1 운동 참여.
1934년 3월
12일 : 중앙보육학교 순회 음악단 평양 음악회 파행.
17일 : <조선중앙일보> 박희도 중앙보육학교장의 "여 제자 정조 유인 사건" 특종 보도.
22일 : 박희도 교장, 중앙보육학교 설립자회에 사직원 제출. 진상 조사단 구성.
25일 : 박희도와 노원우, 경관 입회 하에 양자 대면.
27일 : 박희도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사문위원회' 개최.
키스 내기 화투와 세 명의 당사자들 박희도, 노원우, 윤신실 다들 진실만을 말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다들 거짓말이 섞여 있다.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 수난기
- 순종 임금의 장인, 3백만원 떼먹고 베이징으로 줄행랑
옛날 친왕(황제의 아들이나 형제) 대우를 받았으며 해풍부원군이던 후작 윤택영씨가 금일에 왜 5백만원(현재의 가치 5천억원)의 큰 채무 때문에 몸을 베이징 객창에 두고 파산신청을 받고 있을까? 이와 같은 신세에 있는 귀족이 어찌 윤택영 후작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마는, 윤택영 후작이 순종의 장인이 되는 이로 영화가 뭇 귀족을 대표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만큼 윤택영의 이야기가 뭇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다.
- "영화에서 몰락으로 조선 귀족 행장기". <신동아>, 1932년 10월호.
채무대왕으로 불리던 윤택영에 집에 집달리가 왔을 때, 윤택영은 자신의 재산이 고작 3천원(현재돈으로 약 3,000천만원 정도) 밖에 없다고 우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4만원(현재돈으로 40억원)을 들려 집을 수리하는 등 진짜 질이 안 좋은 인간이었다. 이 인간이 자신의 부채를 갚기 위해 한 짓이 사위가 황제로 자신의 딸이 국모로 있던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었다. 일제는 그 공을 인정하여 '은사공채(한일합방 유공자들에게 총독부가 내린 일종의 사례금 지금은 '매국공채'라 불린다)'로 50만 4천원(현재돈으로 약 500억 정도)를 받게 된다. 이것으로도 빚을 다 못 갚고 더욱 빛을 빌려 결국 나중에는 중국 베이징으로 도피를 떠나게 된다. 아주 지금 생각해 보면 전두환 같은 놈이다.
이인용 남작 집안 부부 싸움
- 이재극 남작의 백만금 유산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
조중인 여사가 남편 이인용 남작을 걸어 경성지방법원에 준금치산 선고 신청을 제기했다. 이인용 남작이 1927년부터 1931년까지 팔아서 없앤 재산은 24만 6천여 원(현재가치 246억원)에 달한다. 이인용 남작은 이처럼 거대한 재산을 무엇에 낭비했는가? 이인용 남작 자신이 그 재산을 자기의 손으로 없애지 않았다면 그 돈은 누구의 손을 거쳐 흔적없이 사라졌는가? 멀지 아니하여 법관의 날카로운 메스에 해부를 당할 이 사실에 대하여 세간의 의혹은 더한층 깊어졌다.
- <동아일보> 1932년 8월 15일.
조선 시대에는 귀족이 없었다. 조선 귀족은 역설적으로 조선이 사라진 이후 생겨났다. 1910년 7월 한반도를 손에 넣은 일본은 같은 해 10월 7일 이른바 '합방 유공자' 76명에게 은사공채(매국공채)와 함께 작위를 수여했다. 공작은 없었고 후작이 6명, 백작이 3명, 자작이 22명, 남작이 45명이었다. 작위는 재산과 함께 세습되었지만, 몇몇은 처음부터 작위 받기를 거부했고, 몇몇은 독립운동, 파산, 품위실추 등의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해 1930년대에는 60명 내외의 귀족만이 남게 된다. 조선 귀족 대부분은 작위를 받은 지 10여 년 만에 그 많던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심각한 생활고에 허덕인다(거의 50%). 이에 조선 총독부는 1929년 영락한 조선 귀족을 구원해주기 위해 '창복회'라는 250만 원(현재돈으로 2천5백억 정도)으로 재단을 설립하고 몰락한 귀족들에게 매월 백원에서 이백원(현재돈으로 백만원에서 이백만원이지만 당시에는 교사 월급의 두 배가 넘는 월급이었다고 한다)을 나누어 주게 된다.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 도피 행각'
- '사랑의 이름으로' 가정을 버린 위대한 예술가의 비루한 사생활
1919년 봄
: 안기영 3.1 운동에 적극 가담. 북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
1924년 봄
: 귀국. 첫사랑 이성규와 결혼.
1925년 봄
: 미국 유학.
1928년 여름
: 귀국. 이화여전 음악과 고수로 부임.
1932년 봄
: 가출. 하얼빈, 신징, 베이징, 상하이, 도쿄 전전.
1936년 봄
: 귀국. '치안상의 문제'로 귀국 독창회 취소.
조선의 '노라' 박인적 이혼 사건
- '신여성 선두 주자'는 왜 남편과 자식을 버렸나
1919년 3월
: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 학생들과 함께 3.1 운동에 참여, 3개월간 옥고 치름.
1920년 6월
: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배재학당 출신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
1921년 4월
: 미국유학, 여자신학교 시간제 교사, 윤덕영 자작 집 가정교사로 사회 복귀.
1926년 7월
: 미국유학, 웨글리언대학 학부 졸업, 컬럼비아대학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
1928년 9월
: 세계 순회 강연 시작, 32개국 260회 강연.
1931년 10월
: 귀국, 이혼 요구.
박인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이 되었다. 박인덕이 당시 남편에게 준 돈은 위자료 2천원(현재 돈으로 2천만원 정도로 적지 않은 돈이었다)이었으며, 자식들의 양육권까지 가질 수 있었다.
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
- 명예와 사랑 버리고 조국 택한 인텔리 여성, 고국에 버림받고 가난으로 죽다
1926년 9월
: 최영숙 스톡홀름 도착.
1927년 4월
: 스톡홀름 대학 경제학과 입학, 황태자 도서관 연구보조원으로 근무.
1931년 3월
: 경제학사 학위 취득, 한 달뒤 귀국길에 오름.
1931년 11월
: 세계 20여 개 나라를 여행하고 귀국, 서대문 밖 교남동에서 '콩나물 장사' 시작.
1932년 4월
: 태아에 탈이 생겨 동대문부인병원 입원. 홍파동 자택에서 27세를 일기로 절명.
사회과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스웨덴을 찾아간 스물 한살의 최영숙은 스웨덴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으며 스웨덴어로 간단한 인사말조차 할 줄 몰랐다. 집안은 유학비를 대줄 만큼 넉넉하지 않았으며, 장학금을 대줄 후원자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스톡홀름에 도착한 최영숙이 가진 것은 사회주의 관련 서적 몇 권과 가방이 전부였다.
5년의 고생스러운 유학 생활 끝에 스웨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풍요로운 생활이 가능했던 최영숙이 조선에 돌아온 것은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웨덴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영어.독일어.스웨덴어.중국어.일본어 5개국어에 능통했고 세련된 국제감각까지 갖춘 최영숙은 분명 인재였지만, 조선에 돌아와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결국 최영숙은 낙원동에 있는 여자소비자조합을 인계해서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서 자그만한 점포를 빌려 장사를 벌이게 된다. 5년간의 고생으로 스웨덴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와 노동자와 여성들을 일하려고 했던 최영숙이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콩나물 장사'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최영숙의 사후 일기장에서 공개된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고국에 대한 향수병을 나타내는 시
혈혈단신 20세에
시베리아 머나먼 길
삼등차에 몸을 싣고
밤낮으로 떠나와서
서전이란 낯선 땅에
고객된 지 3년이라
3년이란 기나긴 날
눈물인들 얼마이며
한숨인들 그 얼만가
말 모르는 외국 땅에
금전까지 없을 때에
이내 마음 어떠하냐
가을 하늘 달 밝을 때
울고 가는 기러기 떼
하염없이 바라보며
멀리 계신 부모님과
사랑하는 동생들아
아~ 언제나 만나 볼까
동편 하늘 바라볼 때
붉은 햇빛 떠오른다
금수산에 비취든 해
2천만의 배달민족
천재인재 슬피 울면
황천이 살피소서
스웨덴에서 최영숙의 거의 최초의 동양인 여성으로 인텔리의 지위를 얻게 되어 스웨덴 청년들의 구애가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최영숙은 한 번도 그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으며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S군아
내사랑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이 몸은 당당한 대한의 여자라
몸 바쳐 나라에 사용될 몸이라
내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이런 여자분을 '콩나물 장사'(콩나물 장사가 천하거나 기타 장사하시는 분들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능력있는 여성이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당시 상황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나 하게 하다가 27살에 죽게 하는 상황이었으니 ............. 일제식민지 시대 당시 조선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새삼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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