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자의 역사], 조르주 장, 시공사, 1995, (070515).

바람과 술 2008. 6. 15. 04:39

제1장 초라한 출발

 

진정한 의미의 문자가 존재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문자를 사용하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호나 상징 체계가 있어야 하며, 이 체계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 합의된 것이라야 한다.

역사적 사건을 보존하려는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문자를 만들었다 : 최초의 문자는 농축산물의 수확량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맥 속에서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그림문자 : B.C. 2900년경 아주 흥미로운 발전이 있었다. 원시 그림문자에서 즐겨 사용되던 곡선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진흙판에 곡선을 그려 넣는 것은 어려움이 많이 따랐고, 그래서 순전히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문자체계가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다.

레부스, 진정한 문제체계로 가는 초석 : 곧 더욱 놀라운 발전이 일어났다. 기호가 구어(口語)를 나타내면서 문자체계에는 중대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모든 발달된 문자체계는 이같이 기호가 소리를 표상하는 체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법전, 과학서 그리고 문학작품 : 숫자를 세기 위한 수단으로 초라하게 시작했던 문자체계는 서서히 발전되어 나갔다. 먼저 중요한 사건이나 계약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고, 이어 구어를 기록하기 위한 체계로 발달했다가 마지막으로 의사소통과 표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우편제도가 생겨났으며 심지어 진흙으로 봉투까지 만듬).

메소포타미아 문자체계는 여러 가지 언어를 표기할 수 있었다 :

 

제2장 신의 발명품

 

설형문자가 딱딱하고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자체계라면 상형문자는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인간의 머리, 새, 동물, 식물, 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적이고 매혹적이며 생동감이 있다.

이집트인은 토트 신이 문자를 발명한 뒤 인간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믿었다 :

수메르인과 달리 이집트인은 휠씬 더 효율적인 문자체계를 만들어 냈다 : 상형문자의 특징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이 문자는 거의 완벽하게 구어를 기록할 수 있었다 2. 구체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도 잘 나타낼 수 있었고, 농업, 의약, 법전, 교육, 종교예배, 전승, 기타 문학 일반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기록할 수 있었다. 상형문자의 독창성과 복잡성은 대체로 다음 3가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따른다. 1.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전형적 그림으로 구성된 그림문자이다 2. 표음문자이다 3. 한정부호이다.

해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 아름다운 글자꼴 :

상형문자는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이었지만 종교의식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권위와 특권의 상징이었다 : 이집트 격언 "남자아이의 귀는 등에 달려 있다. 등을 때리면 말을 잘 듣는다." 필경가는 강력한 사회계층을 형성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기술 때문에 왕만큼 위세가 있었다. 특히 왕이 자기를 신이라고 생각하여 쓰기, 읽기, 산수 등을 배우려 하지 않을 때에는 이들 계급의 위력은 더욱 대단해졌다.

벌써 5,000년 전에 사용된 종이, 펜, 잉크 : 한편 이집트 정부는 파피루스 제조를 독점했다.  B.C. 3000년경부터 파피루스는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수출되었고 이집트에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 같은 독점이 가격을 상승시켰으므로 이집트 국내 필경사와 그 제자들은 큰 불만이었다. 그 결과 팔림프세스트(사용된 파피루스에서 글씨를 지워 내고 재생한 파피루스)가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파피루스의 가격이 비쌌음을 방증하는 사실이다(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더 비쌌음).

일상적인 필요에 따라 보다 빨리 쓸 수 있는 두 가지의 다른 문자가 상형문자 체계에서 발생했다 :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는 크레타 선문자 :

지금도 사용되는 고대 중국의 문자체계 :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도 문자를 신이 내려 준 것이라 믿었다 :

모든 문자체계의 첫걸음이며 중요요소인 그림문자가 한자에서는 아직도 존재한다 :

한자는 정교한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아주 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 보통 하나의 한자는 기본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부수와 발음을 나타내는 음소로 이루어져 있다.

 

제3장 알파벳 혁명

 

설형문자, 상형문자, 중국 한자의 공통되는 특색은 이들 문자의 각 글자가 단어가 되기도 하고 음절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문자를 읽으려면 상당히 많은 수의 기호나 한자를 알고 있어야 한다. 알파벳은 이들 문자와 다르게 기능한다. 이 체계에서는 오로지 30개 정도의 기호만 알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글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부 사상가들은 알파벳이 발명되고 나서부터 진정한 대중교육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번째 알파벳 : 페니키아 알파벳에는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알파벳은 실제 발음될 때 모음과 결합해야만 음가를 가지는 소리, 즉 음소(자음)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구약성서를 기록한 아람어와 히브리어 : B.C. 8000년경에 아람(요즈음의 시리아)의 도시들에서 페니키아인이 사용한 것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또 다른 알파벳이 발달했다. 바로 아람어 알파벳이다. 구약성서의 여러 부분이 이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람어의 문자체계는 언어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같은 뿌리를 가진 아라비아 문자와 히브리 문자 : 문자의 역사는 한가족의 역사이다. 왜냐하면 아라비아 문자도 히브리 문자와 마찬가지로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와 문자 :

아라비아 서예가 남긴 다양한 예술작품 :

그리스인은 아람어 알파벳에서 일부 자음을 빌려와 모음으로 사용했다 :

서구문명은 알파벳을 비롯한 거의 모든 것을 그리스 문명에 의존했다 :

에트루리아 신비는 그리스 문화유산의 신비를 더해 준다 :

라틴 알파벳과 같은 기원을 가진 인도 문자 : 브라미어는 데바나가리 문자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데, 데바나가리 문자는 인도의 성스러운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기록한 것이다. 산스크리티어는 그후 서서히 세속어에 밀려났다. 브라미어는 현대 인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인 힌디어의 원천이 되었으며, 브라미 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모두 있는 완벽한 알파벳 체계를 갖추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학자들은 이 문자가 인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B.C. 4세기에 인도인은 이미 고도의 문법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 오늘날 티베트와 기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되는 문자는 저마다 발달해 나온 과정은 다르지만, 모두 인도 문자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베트남 문자체계는 이들 문자와 같은 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문자를 읽거나 쓸 수 있는 능력은 보편적 현상이 아니다 : 언어학자들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3,000여 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이들 중 겨우 100여 개 정도의 언어가 문자체계를 갖추고 있다.

 

제4장 필경에서 인쇄로

 

여러 세기 동안 글을 쓸 줄 아는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은 라틴 문자를 사용했고, 기독교 세력이 팽창하면서 성경을 베끼는 일도 라틴 문자로 수행되었다.

거의 1,000년 이상 필경기술은 수도사들이 독점해 왔다 :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필경사와는 달리 중세 유럽에서 필경사로 교육을 받은 수도사들은 창작자도 아니었고 권력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글씨를 베꼈을 뿐 스스로 문장을 만들지도 않았다. 중세 필경사의 창조적인 측면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들은 서예의 대가였던 것이다. 특히 샤를마뉴 대제 시대부터 그들은 필경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아름다운 글씨와 장식을 곁들인 정치(精緻)한 채식 필사본을 창조해 냈다. 이것이 최초의 책이 되었다.

양피지가 없었다면 채색기법은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 새로운 필기소재인 양피지의 출현은 필기술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양피지는 아시아의 페르가몬에서 처음 제작되었다. 양피지(parchment)는 그리스어 pergamene에서 나왔는데 페르가몬에서 나온 가죽이라는 뜻이다. B.C. 2세기에 이집트는 경쟁국가인 페르가몬에게 필경의 필수품인 파피루스를 공급하지 않으려는 정책을 썼다. 그래서 소아시아의 필경사들은 가죽을 사용하게 되었다.

책의 탄생 : 양피지는 2가지 뚜렷안 장점을 지닌다. 1. 깃촉펜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부러지기 쉬운 갈대붓보다 휠씬 글을 쓰기가 좋았다) 2. 로마의 코덱스(권자본과 다르게 여러 장을 책처럼 접어 놓은 책자본) 같이 한데 묶을 수가 있었다.

9세기 또는 10세기부터 각 사원과 수도원은 필사실을 갖추고 있었다 : 원고를 필사하고 장식하고 장정하는 필사실은 도서관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며, 주로 독립된 방으로 설치되어 온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수도원에서 불을 때는 유일한 방이었다). 그러나 수도회에 따라서는 조그만 방을 여러개 설처해 놓기도 했고, 가난한 수도원에서는 필사실이 회랑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필사작업의 근본은 완벽한 조직과 엄격한 분업이었다 : 원고의 필사는 수도원의 주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늘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도원의 필경사는 예술가가 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걸작이 되었다 : 일부 수도사들은 허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필사본에다 자랑스럽게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혹은 그 수도사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자랑할 때 수도원은 그에게 필사작업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소도사가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과 수도회를 위해서만 사용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면 다시 작업을 허락했다.

샤를마뉴 대제의 등극 전까지만 해도 필경사들은 서체를 마음대로 골라 쓸 수가 있었다 : 768년에 샤를마뉴 대제의 치세가 시작되자 세미언셜 서체에서 영향을 받은 '카롤링'이라는 획기적인 서체가 등장했다. 선명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이 서체는 여러 세기에 걸쳐 중세 서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샤를마뉴 시대에는 정확한 원고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 이전에 필사된 원고에는 시간의 경과와 함께 많은 오류가 나타나 있었다. 수도사들의 소홀이나 무식으로 이 같은 원고상의 오류가 계속되어 어떤 때는 문장 전체의 뜻이 달라지는 수도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가장 권위 있는 원전에 의거하여 온갖 정성을 쏟아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런 잘못을 고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표준화된 카롤링 필사본에는 ex authentico libro(권위 있는 원전에 의거)라는 표시가 찍혀졌는데 이는 원전의 완벽한 전사(轉寫)를 보장했다.

필사작업이 세속화되자 새로운 예술가 계급이 생겼다 : 12세기 말에 이르면 교육분야에 대한 교회의 독점적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수도사와 함께 일했던 세속 필경사들이 그들 나름대로 길드나 직인조합을 만들었다. 그들은 새로 진출한 상공업 계층인 부르주아들을 위해 공식문서를 작성해 주었고 또 직접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책의 출간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다. 책 제작이라고 해야 귀족의 경우에는 호화장정본, 성직자의 경우에는 예배서나 신학서가 전부였다. 여기에 새로운 분야의 출판이 추가되었다. 철학.논리학.수학.천문학 분야의 저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단테 같은 작가는 자국어로 글을 썼다. 이제 라틴어는 모르지만 자국어는 읽을 줄 아는 일반대중들이 자국어로 쓰인 책들을 사서 읽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중산층이 문학과 책을 접할 수 있었다.

12, 13세기에 대학 주변에 길드와 협동조합이 많이 생겼다 :

원고의 오류를 수정하다가 제멋대로 추가사항이 들어가기도 했다 :

문화적 변화의 흐름에 따라 고딕 서체는 휴머니스트 서체로 대체되었다 : 필경사들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고딕 서체를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문화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게 못지않은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고딕 서체는 카롤링 서체보다 갸름하여 동일한 양피지에다 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깃펜의 끝을 비스듬히 잘라 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서적대 위에 수직으로 놓인 양피지에다 글을 써 넣으려면 깃펜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들어야했다. 이러한 붓 잡는 법은 네모나고 중간이 끊어진 고딕 서체를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14, 15세기에 들어와 고딕 서체를 완전히 배격하는 전혀 새로운 서체가 이탈리아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동그랗고 넓적한 서체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휴머니스트 서체라 했다.

요한 구템베르크의 동료들은 그의 인쇄술이 출판에 미칠 엄청난 영향을 헤아리지 못했다 : 기계 인쇄술은 현대인이 볼 때에는 엄청난 혁명이었지만 당시에는 필경의 연장으로 인식되었다. 인쇄업자의 목적은 필경사와 겨루어 그들이 내놓는 호화로운 책자와 똑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종이가 도입되면서 더디고 힘겹던 필사작업이 한결 쉽고 빨라졌다 : 종이 보급 이후의 역사는 문자의 역사가 아니라 타이포그래피(활자의 크기, 활자들 사이의 균형과 배열 등을 다루는 기술), 인쇄 그리고 출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제5장 출판업자

 

인쇄술의 놀라운 발달과 대규모 출판의 실현이 가져온 주된 결과는 지식의 보급과 문어(文語)의 활용이었다. 옛날 필경사들에게도 그러했지만 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한 권력을 의미했다.

16세기에 도안공(圖案工), 주자공(鑄字工), 식자공(植字工)을 두루 갖춘 인쇄소 가문이 많이 생겨났다 :

출판업의 선구자들 :

포켓북과 급진사상 :

루이 14세 시대에 가난한 사람과 미친 사람은 격기.구금되었고 문자는 격자무늬의 감옥(모눈종이) 속에 가두어졌다 :

사람들은 신선하고 분명한 것을 찾고 있었다 : 18세기에 들어서자 독자들은 이제 시각적인 즐거움보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찾기에 이르렀다. 독자의 욕구를 충족하려면 문자의 가독성을 높여야 했다.

문자의 역사를 바꾼 새로운 발명품 :

회전형 인쇄기가 주도한 속도경쟁은 19세기 말 라이노타이프의 발명으로 더욱 불을 붙었다 :

인쇄의 발달은 18세기에 신문의 발달을 가져왔다 : 정기간행물이 처음 나온 것은 17세기 초엽 네덜란드와 독일에서였다.

18세기에 프라하에 사는 독일인에 의해 석판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 시간이 흘러가면서 디자이너들은 삽화를 배치하는 방식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문 레이아웃도 형태가 많이 바뀌어 독자의 반응을 수렴하는 쪽으로 변해 갔다. 독자반응의 수렴, 이것은 현대출판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인쇄의 주된 영역은 신문과 책이지만 펜으로 써야 하는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 : 손으로 직접 쓴 서명이 계약, 유언, 매매서류 등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판단해 오늘날에도 일부 법률문서에는 수기(手記)가 요구되고 있다.

파스칼은 잘 쓸 줄 아는 것은 잘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다 :

 

제6장 문자해독자

 

기록과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