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부 한반도를 선택한 사람들
이글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온, 조화와 융합, 평등과 사랑의 문화 국민인지 알아보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상고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래 집단이 들어와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고, 보듬어가며 피와 땀으로 지켜온 언어적, 지리적, 사회 문화 공동체다. 중원의 승자가 바뀔 때마다, 전란과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난을 피해 한반도로 들어온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수천 년에 걸쳐 한반도로 이주해 온 귀화인들, 그렇게 많은 국가에서 들어온 귀화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유구 산남왕 온사도 -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비운의 망명왕
: 온사도! 이름도 낯선 이 유구국의 한 망명객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에, 2,077책이 남아 있는 그 방대한 분량 가운데 하나로 실려 있다. 산남왕 온사도는 결국 귀화에 실패한 망명왕이 되었다(갑작스런 죽음). 망명은 성공했으나 정착에는 성공하지 못한 온사도는 조선에 적응하지 못한 비운의 망명객이었다. 하지만 비록 그의 발자취가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그는 분명히 한반도로 망명해 왔고 그로 인해 유구화 조선의 관계는 오랫동안 친선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함께 온 15명의 수행원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 진주에 정착했을 것이다.
베트남 망명 왕족 이용상 - 화산 이씨
: 베트남에서 귀화한 이용상은, 당시 안남국에서 고려로 귀화해고려를 여러모로 도와주고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식읍(왕족과 공신 등에게 준 일정한 지역)도 하사받았고 후손도 퍼뜨려 화산 이씨의 세보를 한반도에 정착시킨 것이다. 그는 정권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베트남에 남아 있던 씨족이 멸절되었을 때 한반도에서 온전히 혈연을 끊길 뻔한 베트남 리씨 왕통의 혈연을 약 800년간의 세월을 건너뛰어 베트남에 전해주었다. 웅진 화산에 정착한 이용상은 북면 봉소리 동쪽 원추형 산위에 쌓은 화산성에 올라가 망국단(望國壇)을 만들고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기록된다. 후손들은 이용상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으며, 용상의 맏아들 간이 고려조에서 삼중대광으로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차남 일청은 안동부사를 지내고 안동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했다. 한편 베트남 정부는 2010년 하노이 왕도 1천 년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준비하고 있다. 1010년 하노이에 왕도를 세웠으니 2010년이면 정확히 1천 년이 되는 것이다. 화산 이씨 종친회도 이 행사에 도움을 주고 양국 간에 친선에 도움이 되도록 할 생각이라고 한다. 화산 이씨는 베트남의 리씨 왕조가 멸망하면서 고려로 오게 된 베트남 유민들로, 고려시대에는 이른바 베트남 혼혈인으로 살았지만 당시 혼혈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었고 생활에도 전혀 불편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현재 우리 사회의 혼혈인 포용이 고려시대보다 더 후퇴한 셈이고, 혼혈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차별의식을 담고 있다는 것이 종친회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흉노족 왕자 김일제 - 경주 김씨
: 문무왕비에는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의 창건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였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문무왕 위로 신라 왕족의 혈통을 밝혀놓은 것인데,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대목은 '투후 제천지윤'이라는 말이다. 투후는 중국의 한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된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김일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 인물이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인이라는 데 있다. 이 비문의 문자들은 문무왕 자신이 우리 조상은 흉노인 김일제라고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라 김씨는 흉노족에게서 혈통이 이어진 전형적인 한반도 귀화인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휴도는 누구인가? 그는 현재 중국의 서안 북쪽 무위지방 언지산과 돈황의 삼위산이 있는 간쑤 성 지역을 다스렸다. 간쑤성은 중국 북서부 지역, 황하 상류에 위치한 성인데 이 성의 대표 도시이자 교통의 요충지이며 성도인 도시는 '란저우'다. 간쑤 성은 실크로드가 출발하는 길목에 있는데, 이 실크로드 상에서 란저우의 옛이름은 '금성(金城)'이었다. 이 이름이 신라의 서라벌이 한자어로 금성인 것과 일치하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신라 왕족의 시조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김일제가 이 지역을 무대로 활약하던 흉노족의 왕자로, 한무제에게서 김씨 성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또한 신라 고분군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5~6세기의 북방 알타이계 금장식과 금관들은 신라와 흉노 간의 연계성을 추측하게 한다. 두 지역이 모종의 연관성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알타이'라는 말 자체가 '금'이란 뜻이고, 이 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한 황금문화는 시베리아를 동서로 관통하여 서쪽으로는 그리스까지, 동쪽으로는 신라까지 이르는 고대 황금문화권을 꽃피웠다. 문무왕비의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인구의 20% 이상이 김일제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인도 아유타의 공주 허황옥 - 김해 허씨
: 가야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름을 날려온 해상왕국이다. 5세기 초반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실질적인 교통 중심지로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해온 것으로 추측된다. 수로대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싣고 뱃길로 김해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이미 그 시대부터 뱃길이 크게 열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로대왕이 즉위하고 7년 만인 서기 49년 7월 27일에 일어난 결혼은 당시로서는 물론이고 지금 시점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로대왕이 해상 여행을 통해 들어온 이민족 여인 허황옥을 만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배필로 정하고 2박 3일을 함께 지낸후 그 일행에게 많은 쌀과 비단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수많은 의문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장거리 항해의 결정적인 증거는 파사석탑과 쌍어문이다. 파사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과 아주 다른 재질이고 생김새도 그렇다. 또 한가지로 쌍어문으로 두 마리 물고기가 수로왕릉(납릉이라고도 부름) 정문 양쪽에 파사석탑을 바로 보며 나란히 그려져 있다. 이 쌍어무늬는 우리나라 건축양식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전형적인 아유타의 인도 건축양식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원나라 공주를 따라온 위구르 출신 장순룡 - 덕수 장씨
: 위구르계인 덕수 장씨는 장순룡이라는 시도에서 출발하는데, 문화와 전통이 판이하게 다른 나라인 위구르 출신으로 고려 말과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인물들을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시조 장순룡은 고려 고종 때인 1254년, 훗날 충렬왕의 비가 되는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수행해 들어온 배종 수행원이다. 본래 이름이 '삼가'인데 그의 부친은 원나라에서 '필도치(몽골어로 문사文士를 뜻하는 말)' 라는 벼슬을 지낸 백창이라고 전한다. 먼저 몽골, 곧 원나라 안에서 위구르족은 결코 하층민이 아닌 상부의 지도층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장순룡처럼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들어온 대표적인 배종 다섯 사람중에서 세 사람이 본토 몽골인이고, 장순룡은 회회인, 또 한 사람인 식독아(式篤兒)는 하서국 출신으로 결코 노예나 몸종 정도의 신분이 아니었다. 충렬왕 입장에서는 무신정권의 실세들과 부딪치기 위해 공주 측근들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장순룡은 후일 문하찬성사를 지내는 등 고속 출세를 하며 덕성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때 황해도 개풍군 덕수현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충렬왕은 또 그에게 원래의 이름 '삼가'를 쓰는 대산 '장'이라는 성씨와 '순룡'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어 오늘날 덕수 장씨 가문을 열어주었다.
이성계의 오른팔, 여진족 이지란 - 청해 이씨
: 기록에 따르면 이지란의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식형(式馨), 본성은 '퉁'이고, 어릴 때 이름은 '쿠란투란티무르'라고 한다. 그 당시 북청 지방을 비롯한 함경도는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원나라의 영토였다. 만주의 여진족은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까지 들어와 크고 작은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청해 이씨의 족보는 퉁두란의 조상이 중국 남송의 명장인 악비(岳飛)이 후손이라고 전한다. 악비 장국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비명에 죽어갔으나 다섯 아들을 두었다. 족보를 보면 그 이름이 운(雲), 뢰(雷), 림(霖), 진(震), 정(霆)이라 하고, 퉁두란은 다섯째 정의 후손으로 나와 있다. 이 주장은 고증이 안 되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종친회에서는 악비 관련 설을 믿는 것으로 보인다. 어늘 날 신선처럼 생긴 모습의 사람이 백두산에서 내려와 이지란을 데려다가 글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이 스승이 송나라의 재상인 나중소의 후손, 나류(羅流)로 송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우리나라에 들어와 숨어 살았는데 그는 이지란에게 군자의 덕목을 조목조목 가르치면서 인륜에 위배되는 일에는 참여하지 말도록 일렀다. 이지란의 스승이 나류 선생이라면 평생을 같이한 동지는 이성계다. 특이한 점은 청해 이씨 세보에 따르면 이지란의 6대 친할머니가 이성계의 7대 외할머니라는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인데 아마도 태조와 이지란 장군의 가까운 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기록으로 추측된다. 이지란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1천 호의 여진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북청으로 옮겨온 뒤에 이성계와 함께 어울렸고 자연스럽게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영향을 받은 이지란은 북청이 고려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자 국제 정세의 변화를 살피고 북청에서의 생활 3년 만인 공민왕 20년(1371년) 2월에 정식으로 고려에 귀화하였다. 이자춘은 고려에 귀순한(정식 귀화 이전) 이래 쌍성 지방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낸 전공으로 공민왕 10년(1361년) 2월에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의 최고 군사지휘관이 되었다. 조선 왕조의 개국 이후 이지란은 이성계를 선왕에 추대한 개국의 공훈으로 태조 원년 9월 '참찬문하부사청해군의홍친군위절세사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에 봉해졌고, 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에 참가한 공훈으로 태조 2년 7월에는 또 '참찬문하부사회군일등공신'에 봉해졌다. 당시 이지란은 귀화 후 여진족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하다. 조선 왕조의 개국 이후 함경도의 여지인들은 태조 이성계에게 여전히 골칫거리였는데, 태조는 여지인들이 머리를 풀어헤티는 습관을 버리고 관을 쓰는 조선인의 버릇을 따르게 하였으며 예의를 가르쳐 배우게 했다. 또 여진인과 조선인의 결혼을 허락했고 세금도 조선인과 여진인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이렇게 태조는 이들이 조선인으로 귀화하는 문제를 적극 추진했고 그 중심에는 이지란이 있었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 장수 김충선 - 사성 김해 김씨
: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군사들 중에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 항복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피 흘리지 않고 투항한 왜장도 있었다. 김충선(金忠善)은 원래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으로 이름은 '사야가'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그를 좌선봉장으로 내세웠으며, 사야가는 휘하에 3천 병력을 거느린 고위 장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에 투입된 후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했다. 임진왜란 때 22세의 나이로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그는 곧바로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이틀 뒤 침략의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백성들에게 돌렸다. 그러고는 화살 한 번 쏘지 않은 채 4월 20일에 편지를 띄워 귀순했다. 이후 부하를 거느리고 말러리를 돌려 왜군을 치고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조선군에 전수했는데, 조총에 대한 정보가 조선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때다. 조선에서는 투항한 왜병들을 전투 중에 잡은 포로와 달리 '항왜(降倭)'라고 불렀다. 이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실록에 그 규모가 나와 있어 일부나마 추정할 수 있다.
조선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수 가유약 - 소주 가씨
: 소주 가씨의 시조 가유약(賈維약)은 명나라 안에서 대표적인 친한파였다. 그는 조선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었고, 명나라 조정에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가진 고위 관료였으며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우리나라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난을 겪고 있을 때 명나라군을 지휘하여 본격적으로 왜군과 싸울 수 있었다. 한국 소주 가씨의 시조인 가유약은 명나라의 문연각 태학사와 병부상서 도어사로 있던 권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조선의 선조 임금을 알현한 후 귀국한 적이 있어 조선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가유약의 손자 가침은 전쟁이 끝나 함께 귀국을 종용하는 마귀제족의 권고를 마다하고 조부 가유약과 부친 가상의 시신을 장사한 울산에 계속 머루르기고 했다. 이에 마귀제독이 안동부사 권순의 딸과 혼인을 주선하고 종복 10여 명을 내려 가씨 부자 장군의 업적을 기리며 묘소를 관리하게 하였다고 한다. 가침은 후일 네 명의 형제와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사를 정리하고 울산을 떠나 중국과 가장 가깝다는 안흥 항구로 옮겨왔다. 가침 일행은 이곳에서 선박을 이용해 명나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귀국을 포기하고 태안 남면 일대에 정착하고 말았다.
조선에 뿌리내린 네덜란드인 박연 - 파란 눈의 박씨
: 박연은 인조 5년인 1627년에, 동료 두 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이름으로 벨테브레. 홀란디아 호에서 선원으로 일하다가 1627년에 우베르케르크 호로 바꿔 타고 일본을 향하여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다. 그는 동료 히아베르츠, 피에테르츠와 함께 음료술르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호송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동아시아까지 출현한 것은 그들의 투철한 직업정신 때문이다. 특히 아시아와 관련 있는 동인도회사의 선박들은 해안선을 따라가는 연안 항해기술로 큰 항구들을 돌며 세계의 주요 무역항들을 두루 운항하고 다녔고, 커피를 비롯한 무역 물품의 운송을 위해 일본의 나가사키까지 왔다. 박연은 당시 효종의 북벌 정책에도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2부 우리나라를 찾은 귀화인의 역사
우리 안에는 대륙을 달구던 뜨거운 기상과 모험심,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없이 웅대한 꿈을 키운 유목인의 피, 반도체를 만들어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게 하는 섬세한 예술혼이 다양한 유전 인자와 함께 녹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만년 동안 한반도에 차례로 들어와 동화된 귀화인들 덕분이다. 그 많던 귀화인들은 결국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니고 우리 한복판으로 들어와 우리와 같은 피부색, 우리와 같은 언어, 우리와 같은 문화권으로 동화되었다. 처음에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와 풍속도 달랐지만 그들은 한반도에 조용히 착륙하여 완전히 정착했다. 귀화인은 결국 우리 자신의 얼굴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귀화인이 들어왔을까?
: 한반도는 중국이나 북방 지역에 전쟁이나 대홍수, 가뭄 등의 재해가 있을 때마다 해당 지역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그 가운데서도 몇 가지 큰 사건들로 인해 한반도에 많은 귀화인들이 몰려왔는데, 중국의 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시대, 당나라가 몰락할 때, 발해가 멸망할 때, 중국 송나라가 멸망할 때, 그리고 임진왜란과 명.청 교체기에 대규모 귀화가 발생했다. 당시에 넘어온 귀화인이 얼마나 많았는지 본토 반도 안에 살던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달라지고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 현재 국내에 있는 성씨를 조사한 결과 약 46%가 귀화 성씨라고 판단되는데, 인구 수로 보면 전체 인구의 약 20%에서 거의 절반까지 달한다. 어쨌든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외국에서의 귀화인 유입을 알면서도 단일 민족 운운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제는 무조건 혈통이라면 단일 민족을 논할 게 아니라 포용력과 적응력이 뛰어난 다민족을 이야기해야 할 형편이다.
상고시대의 귀화인들
: 귀화에 관한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상고사의 기록이 별로 없어 그 시절 귀화에 대한 사료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 기록에 나타난 한반도 최초의 귀화 사건은 중국의 은나라가 망한 후 기자(冀子)가 고조선에 망명하여 세웠다고 하는 기자조선으로부터 비롯된다. 은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1세기경이며 이 시기에 기자가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도 넘은 과거에 한반도로의 귀화는 시작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가운데 하나가 청주 한씨다. 청주 한씨는 기자를 한씨 성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데 [청주 한씨 세보]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의 후대에 우성(友誠).우평(友平).우량(友諒)의 삼형제가 있어, 기씨(奇氏).선우씨(鮮于氏).한씨(韓氏)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의 먼 후세의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씨, 선우씨의 세보가 모두 기자의 후예를 이어받으므로 실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귀화 성씨가 된다.
삼국시대의 귀화인들
: 문명교류사 연구자인 정수일 교수는 신라시대에 40여 개의 성씨가 귀화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신라시대에 적지 않은 귀화인들이 들어왔고 그에 따른 귀화 성씨들고 생겨났을 것이다. 신라 초기에 귀화한 성씨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성씨는 해주 오씨다. 오씨 성의 기원은 중국의 경우, 오(吳)나라 부차(夫差)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손자 루양이 천자에게서 오씨 성을 하사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고 한다. 우리나라 오씨의 시조는 초나라의 재상이던 오기의 45세 후손인 오첨(吳瞻)인데, 그는 지증왕 원년인 500년에 중국 제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와, 왕명으로 김종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낳고 함양에서 21년을 살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두 아들 가운데 둘째 응(應)이 어려서 따라가지 못하고 함양에 살며 후손을 퍼뜨렸고, 그 가운데 해주 오씨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 오첨의 11세 후손 오회는 3남 1녀를 두었느데, 그 딸이 바로 고려 태조비 장화황후가 되었으며 장화황후의 아들이 고려 제2대 임금인 혜종이 되었다. 고구려에 수많은 귀화인들이 생긴 시점은 고루려와 수나라 사이의 큰 전쟁 때였다. 수에 이어 나라를 일으킨 당나라는 고구려에 조서를 보내 "요동의 여러 성이 본래 중국의 땅이었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수나라 때 잡혀간 병사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고구려가 그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포로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상당수의 포로와 귀순병이 있었을 것이다. 서기 645년, 제1차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당나라는 이 전쟁에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659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된 이 전쟁에서 수많은 귀순병과 포로들이 생겨났는데, 이 두 전쟁에서 중원의 다양한 종족들이 고구려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당시 많은 귀화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귀화인들
: 정수일 교수는 처용이 울산이라는 국제 무역항을 통해 선을 보인 외래인들 가운데 하나로, 아랍-무슬림을 비롯한 서역인일 것이라 결론짓는다. 당시 남해를 통한 동서교역의 주역이던 아랍- 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하고 정착까지 했다는 중세 아랍 문헌의 기록과 신라 고지에서 서역인 모습의 무인석이나 토용 같은 유물이 발견되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정 교수는 처용보다 200여 년 전에 토화라(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일본에 표착했다는 일본의 기록을 제시하며 서역인들이 얼마든지 신라에 올 수 있었음을 입증한다. 평해 구씨의 시조 구대림(丘大林)은 중국 당나라 고종 3년, 고구려 보장왕 22년, 신라 문무왕 3년인 서기 663년경에 당나라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결국 구대림 장국은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고, 문헌에는 없지만 그의 수행원들도 함께 남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평해 구씨의 족보에 따르면 구대림은 평해를 본관으로 하고, 조정에 나가 광록대부 좌복야 상서라는 벼슬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갈씨는 그리 많지 않으나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주목을 받는 성씨다. 중국 광동성 남양이 본관인 제갈씨는 역사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성씨였으나 1930년도 국세 조사에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했다. [남양 제갈씨 세보]에 따르면 시조는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이며, 그로부터 현재까지 60여 세(世)의 세계가 이어져 내려온다. 한국에 제갈씨가 들어온 것은, 시조의 20대손인 공순(公巡)이 신라 흥덕왕(826~836) 때에 건너와 귀화한 것이 그 시초라 전한다. 그 뒤 고려 고종 때 홍(泓).영(영) 형제가 복성을 서로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은 제시로, 아우는 갈씨로 분종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말에 성씨 환원 운동이 일어나 일부 제씨와 갈씨가 다시 제갈씨로 복성하였다. 따라서 제씨와 갈씨는 제갈씨에서 분화한 성씨며, 이들 세성은 이성이본의 동성이 된다고 하는데, 이런 예는 극히 드문 경우다. 통일신라시대에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대륙의 난을 피해 온 귀화 행렬이 제법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안록산의 난이다. 이 난리가 얼마나 컸던지 수많은 피난행렬이 줄을 이었고, 농사를 짓지 못해 전국적으로 굶어죽는 이가 수도 없이 나왔다. 이때 난을 피해 신라로 들어온 이들이 적지 않았다. 비록 난민이었어도 그들은 신라의 역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귀화인들
: 고려가 존속하는 동안 중국은 한족, 북방 유목민족과의 전쟁이 그치지 않았고, 격동과 혼란이 계속되었다. 한반도는 중국의 주변국가 중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그 당시 고려의 안정적인 국가 운영으로 문화적으로도 적응하기 쉬워서 난을 피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들의 귀화는 정치.사회적 동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군사적인 대립이나 사회.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이동도 다수 있었다. 또 외교적인 왕래 중에 고려가 마음에 들었거나, 피할 수 없는 여러 사정이 생겨서 눌러앉기도 했다. 그 동가기 어찌 되었든 고려로 들어온 이들은 한반도 사람이 되어 나름의 뿌리를 내리며 동화된 것이다. 아주대 박옥걸 교수는 이러한 귀화의 물꼬를 더욱 촉진시킨 요인으로, 고려 조정의 귀화인에 대한 특전을 꼽아 두 가지로 정리했다. 1. 주요 인물들에 대한 특적으로 관직이나 직위를 수여하는 방법 2. 일반 귀화인이 고려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집이나 논밭, 물품을 증여해주는 방법들이다. 고려 초기에 가장 눈길을 끄는 귀화인 집단은 발해 유민이다. 12세기 중엽에 들어서자 송나라의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멸망해가는 과정에 많은 지식인과 경제인들이 어지러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고려로 망명해 왔다. 그런데 사실 송나라 한족의 귀화는 송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문치를 숭상한 송은 전국적으로 몰려든 사대부 계층의 자제들을 과거제도로만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일부는 고려 조정으로 귀화하기 시작했고 이 행렬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조선시대의 귀화인들
: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귀화인 우대 정책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의 귀화 정책은 여진족에 대한 포섭과 격겨, 결혼 정책, 강제 이주, 인질책 등으로 주로 북방 경계를 지켜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귀화인들을 통해 북방의 정보를 얻고 여진과 적당한 교섭, 통상을 계속했으며 유사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방비책으로 귀화인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후 중기에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분기점이다. 이 당시 많은 일본군과 명나라군이 자의나 타의로 귀화해 왔다.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도 귀화가 있었는데, 호란의 결과로 발생한 왕자 인질 사건으로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볼로가 되어 끌려갔다. 그러나 이들이 귀국할 때, 청나라에 복수하려는 의사들이 대거 조선으로 따라 들어왔다(소위 9의사).이와 달리 조선 말기에는 귀화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부터 조선과 청의 경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중간에 여진이나 여타 다른 부족들을 정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청나라에서도 오히려 돌려보내라고 요구하기까지 해서 귀화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DNA로 본 한민족의 실체:
21.9% 중국인 DNA 타입/40.6% 한국인 DNA 타입/17.4% 오키나와인 DNA 타입/ 1.6% 아이누인 DNA 타입/18.5%불분명한 DNA 타입(유래를 알 수 없음), 결국 우리 민족은 다양한 이주 집단이 귀화한 결과로 태동된 다민족 집단이다.
미래의 한국인,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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