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 조선을 둘썩인 투기 소동
국제철도 종단항을 둘러싼 부동산 투기 소동
함경북도 토지왕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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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다롄'
: 근대 이후 일본은 대륙과 교역하기 위해 세 가지 노선을 개척했다. 1. 쓰루가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어지는 '동해항로' 2. 시모노세키에서 부산, 신의주를 경유해 평텐으로 연결하는 '조선철도' 3. 모지에서 다롄, 남만주철도로 이어지는 '황해항로'였다. 길회선은 기존의 세 노선이 지닌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이었다. 1909년 중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그때까지 조선 땅이던 '간도'와 '길회선 부설권'을 맞바꿨을 만큼, 일본은 길회선을 간절히 원했다.
섬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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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튀는 종단항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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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에 불어 닥친 '땅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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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항 탈환' 청진 부민 궐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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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의 끝
: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 나진 일대 웬만한 지역의 땅값은 서울 땅값보다 비쌌다. 천 배씩, 만 배씩 올랐던 땅값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로 떨어지고 나서야 하락세를 멈췄다. 인구 40만의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총독부와 만철의 예상과 달리 광복 직전까지 나진은 인구 4만의 소도시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청진의 인구는 4만에서 8만으로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대재앙이 내린 곳은 청진과 옹기가 아니라 나진이었다.
나진의 추억
: 나진의 '땅바람'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었던 집단적 땅 투기 열풍이었고, 토지 브로커와 투기꾼이 합심해서 끌어올린 땅값 역시 역사상 최대였다. 나진의 '땅바람'은 3년 만에 종언을 고했지만, '나진의 추억'은 영원했다. 총독부는 조선 곳곳에 길을 닦고,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했다. 그 때마다 개발이 있는 곳에 투기가 있다는 '나진의 추억'은 따라다녔다.
그 후 김기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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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화려한 결혼, 초라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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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중매점의 '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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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의 협잡과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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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신' 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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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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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안의 네 칸짜리 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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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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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기진의 이중생활
동신주 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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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가의 길, 문학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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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생활의 빛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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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 잡으러 나서다
: 김복진(김기진의 형)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작품 '나상裸像'을 출품해 입상했다. 1925년 봄, 김복진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을 대표하는 조각가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김복진은 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사회주의 서적을 읽다가 그만 사회주의에 심취해버렸다. 그는 동생보다 더 진지한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동생은 가입하지 않은 조선공산당에도 가입했다. 1923년 갑자기 나타났던 정어리 떼는 1942년 돌연 자취를 감췄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일본해군은 군수용 기름의 50%를 조선산 정어리 어유로 충당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정어리 떼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군수용 기름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정어리가 일본의 패전을 앞당기는 데 한몫 거든 셈이었다.
긴축재정으로 재앙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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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찾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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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이루지 못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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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취인소 슈퍼개미 열전
라디오 합백당
: '합백'은 '하바' 혹은 '절치기'라고도 부르는, 주가의 등락을 놓고 벌이는 도박이었다. 인천 미두시장에서 밑천이 거덜 난 미두꾼들이 적게는 1~2전, 많게는 1~2원씩 걸고 미두 시세를 놓고 도박판을 벌인 것이 합백의 기원이었다. 인천 미두시장에서 성행하던 합백은 1936년경 명치정 주식시장에 상륙했다. 하지만 주식 합백은 미두 합백과 달리 1~2백 원도 없는 가난한 투기꾼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오르는 것도 아니고 내리는 것도 아닌 지루한 보합장세가 이어지면, 중매점에 주식통장을 버젓이 개설해둔 투기꾼들도 좀 더 화끈한 수익을 바라고 합백판에 뛰어들었다. 주식 합백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폐해는 더 커진 반면 합백꾼을 단속하기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전설의 당진총각
: '조선취인소'는 1931년 제정된 '조선취인소령'에 따라 이듬해 '인천미두취인소'와 '경성주직현물취인시장'을 합병해 출범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1896년 문을 열었고, 경성주식현물시장은 1920년 영업을 개시했다. 조신취인소 출범 이후에도 합병 전과 동일하게, 미두는 인천지점에서, 주식은 경성지점에서 거래했다. 인천 외에도 서울, 강경, 군산, 목포, 대구, 진남포, 신의주, 원산, 부산 등 9곳의 '연시장'이라 부르는 조규모 미두시장이 설치되었다. 조선취인소는 1943년 '조선증권취인소'로 개편돼 1945년 8월 13일 해방 이틀 전까지 영업을 계속했다. 대한민국의 중권거래소는 그로부터 11년 후인 1956년 3월 3일 '대한증권거래소'라는 이름으로 개장했다. 2007년을 기준으로 볼 때, 조선위인소는 50년, 대한민국 중권거래소는 52년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냉혹한 승부사 유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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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왕' 조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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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백 출신 증권사 사장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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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확천금의 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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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대 조선을 들썩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작인에게 토비를!
: '더 큰 부를 소유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칭찬을 들은 부자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아마도 이종만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종만이 펼친 일련의 자선행위는 '공부公富(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부호)'라는 신조어를 등장시킬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억세게 운 나쁜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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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석 광산에서 고학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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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셋, 금광왕에 등극하다
: 이종만은 금광에서 나온 수익을 개인적인 용도로 소비하지 않고, 광산설비를 갖추거나 유망한 금광을 매입하는 데 재투자했다. 그 결과 1936년에는 장진광산이라는 조선 최고의 금광 개발권을 확보했다.
비운의 대동콘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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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 월북한 자본가
: 이종만의 장례(1977년 1월 아흔셋을 일기로 세상을 떠남)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이종만은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무이한 자본가 출신 인사다.
아름다운 실패
: 이종만의 실패는 매번 아름답고 숭고했다. 그는 28번 쓰러지고 29번 일어나면서도 기필코 사업에 성공해 소작인에게 토지를, 광부에게 광산을 돌려주려 했고, 일하는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구현하려 했다. 이종만은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유기장수 이승훈의 바르게 걷기
거듭된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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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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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부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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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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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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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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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음나음 나가라
: 이승훈은 학생들에게 항상 '나음나음 나가라.'고 가르쳤다. 우리말에 '나음나음'이란 말은 없지만, 문맥상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라'라는 뜻이다. '나음나음 나가라.'는 이승훈의 인생 역정이 집약된 말이었다. 이승훈은 10대 때 먹고 살기 위해 일했고, 20대 때 양반이 되기 위해서 일했다. 30대 때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기 위해 일했으며, 40대 이후에야 비로소 민족을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 그야말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서 전진한' 인생이었다. 1930년 5월 3일 이승훈은 동상을 봉정 받았고, 제막식이 끝난 지 닷새 만에 예순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보관해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의 마지막 소망은 생물 표본이 되어 사랑하는 학생들 곁에 머무는 것이었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마지막 소망마저 이루지 못했다.
평양 [백과부]의 행복한 돈쓰기
과부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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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창 속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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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에 얻은 이름
: 그 시절에도 '과부'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이라 고쳐 불렀다. 조선의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현종 시절 태어난 백 과부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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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모르는 교육자
: 백 과부는 한평생 학교는 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다. 한글은 물론 숫자조차 읽고 쓰지 못해 굵기가 다른 수수깡에다 손톱으로 표시해 금전의 출납을 기록했다. 그런 식으로 30만 원(대략 300억) 상당의 재산을 관리했지만 한 번도 계산이 틀린 적이 없었다.
선행, 선행, 선행
: 백선행은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의 은혜를 입고 그를 어머미, 할머니로 섬기는 사람은 수만, 수십만을 헤아렸다. 1928년 백선행 여사가 타계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돌자 평양 시내 장의용 꽃값이 들썩일 정도였다.
행복한 돈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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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최송설당의 마지막 승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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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숙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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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젊어서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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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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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의 보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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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송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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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보았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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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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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 조선의 별난 부자 별난 사건
이용익의 [사라진 백만원 예금]
33만 원의 행방
: 1905년 8월 14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지만, 임지에 부임하는 대신 8월 17일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리에 출국했다. 상하이와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한 이용익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객의 저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요양했지만, 1907년 1월 총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대정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33만 원 당좌예금도 주인을 잃고 허공에 떠버렸다.
'고종의 내탕금' vs '이용익의 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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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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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의 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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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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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 5패, 9년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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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습작襲爵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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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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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횡단선의 다섯 사내
: 청나라 역시 구미 열강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처지여서 '흑심을 품고' 조선으로 오겠다는 구미의 공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조선이 구미로 보내는 공사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다. 청나라는 소위 '영약삼단'을 이행한다는 조건으로 전권대사의 미국 파견을 승인했다. 영약삼단이란 1. 조선공사가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알현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외무성과 백안관을 방문한다 2. 공적 행사나 사적 연회에서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 다음에 입장하고 아랫자리에 앉는다 3. 중요한 사무는 먼저 청국공사와 협의한 후 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외교 관례를 무시한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받정양 일행에게 당부했다.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 영약삼단을 이행하지 말고 훗날 조선에 돌아와서는 나라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라는 말이었다.
선상의 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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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그리고 권력과 만남
: 알렌은 이하영을 자신의 통역으로 삼았다. 알렌의 더듬거리는 조선어와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로 한참 동안 씨름하면 대충 뜻은 전달되었다.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는 당시 조선 안에서 조선인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어였다. 알렌은 진료를 위해 고종을 알현할 때도 이하영이 함께 가길 원했다. 그러나 벼슬이 없는 이하영은 관복을 입고 어전에 나갈 수 없었다. 사정을 들은 고종은 배운 것도 변변치 않고 집안도 한미한 이하영에게 외아문 주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하영은 더듬거리는 영어 실력 하나로 출세의 탄탄대로에 들어선 것이다.
해프닝, 해프닝, 해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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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국서 봉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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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 댄디'
: 이하영은 서기관으로 미국에 부임하기 전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부산, 인천, 원산 세 부두를 담보로 200만 달러를 차관해 그 돈으로 미국 병서 20만 명을 빌려오라는 것이었다. 고종은 20만 미국 병사로 조선 땅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것은 물론 중원까지 밀고 올라가 천하를 손에 취려는 황당하고도 원대한 꿈을 품었다.
우용택의 외부대신 구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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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고무신의 '귀족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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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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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돈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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