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6일 읽음.
죽음이 언제나 인간을 이기고 승리하며 승자도 최후에는 빈손으로 나간다.
빈센트 반 고흐(1853년 3월 브레다 근처의 구르트-준데르트에서 출생, 1890년 7월 29일 자살.)
정신적 절망으로 인한 자살
: 오늘날까지도 확실하게 밝혀낼 수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을 향해 겨누었던 권총을 어떻게 구했는가 하는 점이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두 시경 빈센트 반 고흐는 37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작별했다. 30시간 전에 권총으로 자신을 쏨으로써 밀어젖혔던 죽음의 문이 그를 영원한 잠으로 이끌었다. 목사인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 부부의 맏아들인 빈센트는 1853년 3월 30일 태어났다. 그런데 이 날은 같은 이름의 형이 1년 전 죽은 채 태어났던 날이기도 했다. 빈센트는 심리 분석에서 쓰는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대체아동'이었던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부모들은 무의식적으로 죽은 아이에게 가졌던 희망과 기대들을 대체아동에게 부과함으로써 그 아이에게 과한 요구를 하게 된다고 한다. 부모들은 두 아이를 동일시하고 대체아동이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자주 실망한다. 또한 엄마들은 이 아이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과호보를 하기도 한다. 그 결과 정신적 상처가 생기고 회복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 고흐의 삶에서 마지막 두 달 동안 그는 동생을 잠깐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동생의 부인을 만난 후에 라부에 여관에 숙소를 정해 두었던 오베르로 향했다. 오베르에 도착한 그는 즉시 작업에 들어갔고, 몇 주가 안돼서 80편이나 되는 그림들, 곧 인물, 풍경, 보리밭, 초가집 등 그가 그린 작품들 중에서 최고의 것들에 속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오베르에서 그는 혼란과 질서, 긴장 완화와 경직, 도취와 침착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가셰 박사의 딸인 마거리트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와 다툼이 생겼다. 파리에서 테오를 방문했을 때는 테오의 부인과 집안 문제로 큰 마찰이 있었다. 빈센트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동생이 불치의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 자신의 생존이 위협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걱정들이 늘 자살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던 과민한 화가를 새로운 정신적 두려움 속으로 빠지게 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다. 그리고 그의 미술적 노력과 미술적 재능에 대한 불신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내 그림들은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사람들은 내 그림들이 색깔을 찬양하는 그림들이나 내가 집착했던 가련한 내 인생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1881년 11월 28일 빈에서 출생, 1942년 2월 23일 자살.)
세상혐오로 인한 자살
: 슈테판 츠바이크는 한 사람의 문인이었고, 기교가 넘치는 유미주의자였으며, 또한 고결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능한 화려한 응대나 공식적인 것을 피하였고, 표창이나 훈장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문학적 목표를 쫓는데 욕심이 많았으며, 작가로서의 명예와 뛰어난 인물들과 친구들로부터 인정만이 그에게 중요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혼자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거나 혹은 혼자서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동반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로테(여비서였으며 그녀와의 연애로 슈테판 츠바이크는 첫번째 부인과 헤어지게 되었고, 헤어진 후 로테와 결혼하였다) 그와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결정에서도 무조건 그의 뜻을 따랐다. 1942년 2월 24일, 슈테판 츠바이크가 죽음의 날로 정해놓은 이 날은 일요일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그와 그의 아내는 방해받지 않고 그들의 자살을 위해 마지막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치사량의 베로날을 삼켰던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 전 이 몇 시간 동안 그들의 생각, 느낌, 감정 그리고 그들의 희망, 소망, 걱정, 두려움, 그들의 꿈과 무서움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그들의 영혼 안에 잠겨져 있다. 위대한 인류주의자이며 유럽인이었고, 확실한 애국주의자였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찌 되었든 죽음 속에서 그가 평생 세계를 위해, 인류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동경했던 평화를 마침내 찾게 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년 7월 21일 시카고 근교의 오크파크에서 출생, 1961년 7월 2일 자살.)
삶에 대한 염증으로 인한 자살
: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힘이 넘쳐 보이는 건강한 타입으로 우리가 일반적이고 상투적으로 문학가에 대해 상상하는 그런 갸냘픈 체격의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과는 전혀 반대의 타입이었다. 그는 에너지와 힘, 생명력, 거칠고 난폭한 남성다움을 발산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한 명의 마초였고 스스로도 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나는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남자가, 세기의 마초가 되고 싶다!"고 그는 젊은 시절에 말하곤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었고 또한 그것을 실현하였다. 어찌 되었거나 겉네서 볼 때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허상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의심하며 고통스러워하며, 소심하고, 거의 수줍음을 타는 남자였으며, 자신의 내적인 불안정을 힘 자랑을 통해서 덮어버리거나 술로 마치시키려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보이는 이미지는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허구적인 모습이었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곧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척하려는 힘겹고 지치는 노력 때문에 결국 그는 무너지게 되었다. 그레이스 헤밍웨이(헤밍웨이의 어머니)는 평범하지 않은 여성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기이한 교육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는데, 적어도 어린 어니스트에 대해서는 그러했다. 그녀는 아들인 어니스트를 18개월 먼저 태어난 그의 누이와 똑같이 옷을 입혔다. 그런 것은 사실 당시로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이상했던 것은 그녀의 이러한 기벽이 일반적인 시기가 휠씬 지나도록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정말로 기이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어니스트를 누이인 머슬린과 마치 동성의 쌍둥이인 것처럼 옷을 입혔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그런 것처럼 키웠다는 점이다. 어린 어니스트는 정상적인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의 과장된 남성적인 태도와 모험심은 어린 시절 그의 남성성이 억눌렸던 것에 대한 역반응으로 보아야 하며 또 이해해야 한다. 그는 자신과 세상에게 그가 강철같은 소년이고 완벽한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체격이 크고 위풍당당했던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육체적으로 현저하게 쇠약(당뇨병과 협심증 발작)해졌으며 거기다가 땅 투기로 인해 궁핍과 경제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다리를 잃을 수도 있을 만큼 건강상태가 악화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지자, 독실한 기독교적인 믿음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 했다.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완전히 절망하여 1928년 12월 6일 침실에서 권총으로 자신(57세)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쏘았다. 아버지의 자살은 작가 헤멩웨이의 기억 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어느 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만 했을 때, 그에게 인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오래 전부터 자살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책 속의 영웅들을 자기 대신 죽게 할 수 있는 동안 죽음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미루어두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차례였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년 오데르 강변의 프랑크부프트에서 출생, 1811년 11월 21일 자살.)
후세를 바라보며 택한 자살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는 천재적 창조력을 지닌 독일의 작가였다. 대부분의 문학사 교수들이 그를 괴테나 실러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토마스 만과 같은 위대한 작가들에게 '대단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다. 1811년 독일의 위대한, 그러나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이제 최종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었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는 단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정신적인 일치감을 가질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클라시스트도 혼자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늘 죽음의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찾는 죽음을 함께 할 동반자란 여성을 의미했다. 그와 함께 선택한 운명을 나눈 여성은 헨리에테 포겔(자궁암으로 죽음이 이미 예고 되었음)이었다. 삶에 지친 작가와 죽음의 동반녀 사이에 성적인 관계는 없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헨리에테 포겔은 오직 죽음에 대한 열정으로 연결되었고 하나가 되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자살은 동시대인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그의 자살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근거에서 비난했고, 다른 사람은 이해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그가 자살한 동기에 대해서 살아있을 때는 얻지 못했던 관심을 끌려고 했거나 자신의 작품인 [홈부르크 왕자]에서처럼 불멸성을 얻으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런 논쟁은 끝내도록 하자. 그리고 위대한 하인리히 하이네가 자신과는 전혀 정신적으로 비슷한 점이 없는 클라이스트를 위해 한 말에서 만족감을 찾자. "나는 그가 권총자살을 한 것에 대해 충분히 동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1890년 4월 20일 인 근처의 브라우나우에서 출생, 1945년 4월 30일 자살.)
책임에 대한 회피로써의 자살
: 과대망상을 지닌 이 독일의 독재자는 나치의 일원이었고 거기다가 육체적인 문제들이 불안한 걱정으로 나타나는 우울증 환자였다. 그는 매일 자신의 체중을 검사하고 맥박을 체크했으며 죽는 날까지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착각했다. 그가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이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그의 행동과 결심에 영향을 끼쳤고, 심지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군대의 선두에 서서 영웅다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여러번 호언장담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살이라는 도피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버려진 총통의 방공호는 1945년 5월 3일에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틀 후에 두 사람의 시체가 발굴되었고, 그 중 남자 시체는 자세하고 철저하게 법의학적으로 검사되었으며 자세한 해부보고서에서 결과가 밝혀졌다. 시체에서 발견한 수많은 요인들이 자살을 주장하는 목격자들의 보고와 일치하는데도 불구하고 시신의 신원확인에 관한 의심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총통의 죽음에 대한 전설은 전후 독일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1956년 10월에는 독일 대제국의 '지도자이며 총통'이 공무상 죽은 것으로 해명되었다. 그리고 1972년~73년에 미국의 전문가와 노르웨이의 전문가가 각기 의치를 통한 확실한 신원확인을 하였고 1945년 5월에 소련군이 히틀러의 진짜 시체를 발견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한 신문기사(1999년 11월 8일자 쿠리어)에 따르면 나치 독재자 히틀러의 두개골은 온전히 보존된 채 1945년에 모스크바로 옮겨져서 한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에르빈 롬멜(1891년 11월 15일에 브렌츠 근처의 하이덴하임에서 출생, 1944년 10월 14일 자살.)
명령에 따른 자살
: 에르빈 롬멜이 전설적인 명성을 얻은 곳은 북아프리카의 전쟁터였다. 1844년 8월 8일 롬멜은 병원에서 퇴원(1944년 7월 17일 이동 중 연합군 비행기의 공격을 받아 부상당함)하여 가족들이 있는 헤링엔으로 갔다. 그는 천천히 회복되었고, 두통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였다. 이는 이제 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비판적인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날마다 사라져갔고, 정부에 대한 혐오감은 점점 커졌다. 히틀러에 반대한 반란에 참가한 그의 지인들의 진술서를 바탕으로 그의 결백이 증명되지 않으면 체포와 재판을 각오해야 한다는 협박과 고위 장교이며 존경받는 인물로서 그런 일은 가능한 피해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에르빈 롬멜은 이 말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롬멜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총통이 다른 모든 것을 그를 위해 배려해줄 것이라고 했다. 에르빈 롬멜은 몇 분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베를린에서 보내온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롬멜은 베를린에서 보내온 독약을 먹고 자살하나, 이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전선정찰 중에 발생한 트럭사고의 후유증에 의한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된다).
루돌프 황태자(1858년 8월 21일 빈 근처의 락센부르크에서 출생, 1889년 1월 30일 자살.)
연출된 죽음으로서의 자살
: 오스트리아 황제 부부의 아들이며 거대하고 다국적인 제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루돌프, 그는 1889년 1월 30일 자살을 실행하기 몇 년 전부터 이미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아무 조선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삶에 연결시켰던 마리 베체라와 황태자가 1899년 1월 29일 밤에 마이얼링 사냥 별장의 침실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그들이 서로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는 영원히 그들만의 비밀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왕가에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마이얼링 비극의 배경이나 자세한 상황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짓 정보를 알렸다. 루돌프의 죽음은 처음에는 심장마비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졌고, 1889년 1월 31일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비너 자이퉁'이 그의 자살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법의학적인 시체 해부결과는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황태자와 그의 애인이 함께 자살했다는 것을 궁정에서는 밝히지 않았다. 황실의 궁정의사인 프란츠 아우헨탈러는 마리 베체라에 대한 검시 서류를 썼지만 그것은 진실과 달랐고, 그녀의 시체는 숨겨진 채 가장 무성의한 방법으로 하일리겐크로이츠로 옮겨졌고 그곳의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황실의 이런 은폐전술은 오히려 마이얼링의 사건을 가장 흥미롭고, 가장 센세이셔널한 범죄사건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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