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정길화, 김환균 외, 해냄, 2006, (070905).

바람과 술 2008. 6. 15. 04:48

1. 억압과 폭력의 나라

 

불행했던 도시 빈민의 역사, 무등산 타잔 - 김동철

 

무등산 타잔, 박흥숙

: 1977년 4월 20일 오후 3시경, 전남 광주시 동구 운림동 산145번지 무등산 중턱 증심사 계곡 덕산골에서 무허가 건물을 철러하러 갔던 당시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일곱 명 중 네 명이, 자신의 집이 강제로 철거되고 불에 태워지자 격분한 박흥숙(당시 21세)이라는 청년에 의해 쇠망치로 살해당하는데, 이 산건이 바로 세칭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이다. 결국 당시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도 포기(박흥숙은 수석으로 당시 중학교를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음)할 수밖에 없었고, 가난 때문에 무등산 산자락에 무허가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도시빈민 박흥숙'의 모습은 가려진 채 1980년 12월 24일 끝내 박흥숙에 대한 사형은 집행되었고, 사건은 서서히 잊혀졌다.

왜 박흥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가

: 독점 재벌 위주,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대변되는 1960~1970년대 한국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수출 경쟁력을 명분으로 한 저임금 정책은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강요했고 무분별한 외국 농산물의 수입과 저곡가 정책은 일제 강점기부터 허덕거려온 농촌에 치명타를 가한다. 붕괴된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은 국가의 무관심 속에 불안정한 취업, 열악한 주거 환경, 교육.의료의 헤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도시 빈민층을 형성했고 국가의 책임 방기 속에서 잠재적인 사회 불안 계층이 되었다. 이렇듯 도시 빈민은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 진술에서 박흥숙은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형제를 잃고 애통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자나 깨나 눈앞에 어른거려 날이 갈수록 괴롭고 괴롭다. 나의 죄는 백 번 주어도 사죄할 길이 없다. ... 나 같은 기형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어떤 극형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겠다"라며 피해자 가족에게 깊이 사죄하며 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는 국가 권력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했다.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개 취급했고,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올갈데없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러, 돈이며 천장에 꽂아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 등이 깡끄리 타버리고 말았다. ... 하물며 당국에서까지 이처럼 천대와 멸시를 받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누가 달갑게 방 한 칸 내줄 수 있겠는가? ...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고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이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박흥숙 구명 운동과 어린 시절

:

1977년 4월 20일, 그날 무등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 1977년 4월 20일 철거반원들이 박흥숙 집을 불을 놓는 방식으로 철거를 진행하게 되었을 때, 이사를 위해 집에 숨겨 두었던 30만원이라는 돈이 불에 타 버리게 된다. 불타는 30만원. 가난에 찌든 여섯 식구들의 유일한 희망이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순수 지은 토담집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면서 박흥숙은 흥분을 삭이고 있었으나 다음 순간부터 결국 폭발하고 만다. 철거반원들이 당뇨와 폐결핵을 앓고 있는 김복천(당시 75세) 부부가 살고 있던 300미터 위쪽 계속으로 향한 것이다. 이에 박흥숙은 "저 사람들 저렇게 놔두면 ... 저 위에는 진짜 오갈 떼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밖에 안 계시는데 ... 저 사람들 못 하게 막고 시장한테 데려가서 따질란다"고 말하며 철거반원들을 따라 급히 올라갔다. 박흥숙은 산에서 들짐승을 쫓을 때 사용하려 만든 쇠파이프와 화약으로 만든 사제총으로 철거반원들을 위협하고, "함께 시장에게 가서 따지자"라며 철거반원들을 포박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철거반원들이 반항했고 박흥숙은 격분한 나머지 작업용 쇠망치를 휘두르어 네 명을 숨지게 하고 한 명에게는 뇌에 중상을 입히게 된다.

이농, 도시 빈민의 양상

:  대책 없는 철거가 사회문제로 폭발한 것은 1971년, 경기도 광주에서였다. 도로나 배수 시설이 전혀 없던 경기도 광주 황무지에 정부는 청계천 등지의 철거민 20만 명을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생계 방편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일종의 난민촌이었다. 도시 빈민! 강제 철거의 수난 속에 살아야 했던 그들은 사실은 '놀라운 경제 성장'의 산물이었다.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 정책이 필요햇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던 시절, 저곡가로 농촌은 몰락해 갔고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중화학 우선 정책은 결국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려놓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새마을운동 또한 농민들의 큰 짐이 됐다. 환경 개선 등 외형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운동 10년간 농가 부채는 21배나 늘었다. 그때 당시 박흥숙의 일기를 보면, "합격자 발표 날 가보았더니 정말로 꿈에 그리던 1등 합격이었다. 실력이 나만 못한 애들도 교복을 맙추고 야단인데 우리 집안은 가난하여 그야말로 풍전등화다"라는 글을 남긴다. 박흥숙네처럼 고향을 떠나온 이농 행렬로 도시는 만원이 되었갔다. 그들로 인해 만들어진 광범위한 도시 빈민층은 도시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커다란 인력 시장이었다. 무작정 상경한 이농인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였다. 서울에서 청계천 변이나 이촌동 등 일자릴르 구하기 쉬운 하천 주변과 야산 지대에 집단적인 판자촌이 형성되어 갔다.

광주의 도시 빈민과 대책 없는 철거

: 1971년, 박흥숙네 여섯 식구가 자리 잡은 곳은 광주 무등산, 계곡 입구에서30여 분을 걸어 올라가야 닿는 덕산골 산등성이였다. 식모살이를 하던 어린 여동생, 절간에서 끼니를 해결하던 어머니, 친척집에 맡겨진 동생들 ... , 여섯 식구사 함께 살 집이 절실했던 그들에게 무허가 움막은 '집'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 당시 박흥숙의 일기에는 "60일 동아 굶주려가면서 무등산에 집을 지었다 흩어져 살았던 가족들과 함게 살고 싶었고, 나는 이 집을 어머님께 선물로 바쳤다"고 적혀 있다.

문제의 원인을 철저히 외면한 언론

: 박흥숙이 왜 살인에까지 이르렀는지 언론은 사실을 외면한 채 흥미 위주의 과장과 왜곡으로 기사를 써 내려갔다. 당시 전남매일 기자이며 전 한겨레신문 편집국 사회부 국장이었던 박화강은"(기관에서)계속 찾아와서 '불'이라는 단어를 쓰는 팔목까지 잡고 못 쓰게 할 정도였다. 특히 시청에서 편집국으로 떼로 몰려왔다"고 증언했는데, 이처럼 말 못할 외압도 있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대의 또 다른 희생자들

: 삼일고가 위에서 청계천 판자촌이 보인다며 대대적인 강제 철거를 단행했던 암울했던 시대, 그러나 무등산에 철거 공문을 내렸던 당시의 광주시장을 포함한 관련자들은 지금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누구도 1977년 무등산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철거의 책임을 나누어 진 사람은 없었다. 강제 철거의 또 다른 희생양, 철거바원들. 그들은 철거 현장에 불을 지르는 등 박흥숙의 격분을 샀지만, 그들 또한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했던 박봉의 일용직들이었다. '무등산 타잔'은 우리의 역사 속에 강제 철거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비극적인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

:   

 

버림받은 인권, 삼청교육대 - 채환규

 

쿠테타 세력의 프로그램

: 1980년 쿠테타 군부에 의해 이른바 '사회 정화'의 일환으로 기획된 삼청교육대는 군병력과 경찰 병력을 포함한 국가 공권력이 총동원된 대규모의 작전이자, 그 결과 면에서도 가공할 만큼 많은 사망자와 희생자를 냈다는 점에서도 6.25 전쟁 이후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의 사건이다. 하지만 삼청교육대는 가공할 그 사건의 실체와 성격에 비해 지금까지 역사에서 철저히 지워지고 가려져 있다. 무려 6만 755명의 시민이 총검을 앞세운 군경에 검거되었고 그 중 3만 9742명이 그 악명 높은 '삼청순화교육'을 받았고, 교육 기간 중 공식 사망자 54명, 1989년 신고된 후유증 사망자 397명이라는 미증유의 피해를 낳았지만, 지금까지 그 수치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조차 없는 추가 사망자와 관련한 문제는 삼청교육대의 핵심 쟁점이다.

국민 개조 프로젝트 '삼청순화교육'

: 1980년대 5월의 광주는 전두환 정권의 위기이자 기회였다. 하지만 총칼은 그들만의 힘이자 승리의 밑바탕임이 금방 입증되었다. 그들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생 과정을 철저히 모방했다. 1961년 5.16 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정치 깡패를 제거한다는 명분과 함께 1만 5800명의 폭력배를 검거하였고, 이들 폭력배를 국토건설단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국토 건설 사업에 강제 동원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대중조작 수법이었고, 그 효과는 컸다. 사회악적 세력인 폭력배에 대한 무력적 조치는 대중들의 직접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삼청교육 대상자들의 검거에만 연인원 80만 명의 군.경이 동원되었고, 일선 행정 조직뿐만 아니라 검찰, 문교부 등 국가의 주요 공권력이 모두 동원되었다. 그 대상에는 폭력배 외에도 13세 소년에서 70대 노인, 군 장성, 언론인, 노조원, 대학생, 심지어 여자들과 고등학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국보위의 '사회개혁' 작업을 그들 스스로 '삼청교육' 사업으로 칭했고, 삼청계획 1호는 권력형 부정 축재자 척결, 2호는 정치 비리자 척결, 3호는 고위 공무원 숙정, 4호는 3급 이하 공무원 숙정, 5호가 바로 삼청교육데로 알려진 불량배 소탕 작업이다. 이를 위해 설치한 것이 '사회정화위원회'이다. 삼청교육대는 대규모 '국민 개조 프로젝트'였다.

폭력 정화의 진실

: 이들은 모두 군부대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군대식 통제와 관리에 따른 엄청난 부작용으로, 무차별 폭력과 가혹 행위는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낳았다. 말이 교육이지 구타와 가혹 행위로 시작된 교육은 야만적 폭력의 연속이었다. 젊은 군인들에게 허용된 폭력은 합법화된 폭력이었다. 삼청교육대 교육을 담당했던 조교 역시 가족이 없고 때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구타했다고 한다.

죽음의 진실, 과연 몇 명이나 죽었나

: 삼청교육을 직접 담당했던 군인들에게서 나온 가장 충격적인 증언은 은폐된 사망자 수이다. 1사단 조교가 해준 또 하나의 충격적 증언은 삼청교육대와 관련한 기존의 역사적 진실을 뒤흔드는 내용이었다. 1사단에 수용되었던 수련생들은 북파공작원 교육을 받았으며, 그래서 더욱 혹독한 가혹 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전국 25개 사단에서 삼청교육을 받은 4만 명의 피해자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신고한 3221명의 피해자 중에, 1사단 출신은 왜 단 한명뿐인 것일까?

권력, 영원한 감옥을 꿈꾸다

: 12.12와 5.18 광주 학살에 대한 국민적 감정과 저항은 전두환 정권에게 가장 두려운 요소였다. 게다가 가혹한 삼청순화교육 이수자들이 사회 불만 세력화되는 것도 쿠테타 정권에게는 잠재적 불안 요소였다. 계엄 해제를 한 달여 앞두고 1980년 12월 18일에 공포된 사회보호법은 법적인 근거를 동원해 삼청교육대 수련생들을 영구히 감금하는 장치였다. 순화교육에서 근로봉사로, 또 근로봉사는 보호감호로 이어진 것이었다.

빠삐용의 해상 감옥

: 1980년 여름, 삼청교육이 실시되면서 이들을 구금할 시설의 준비 명령을 받은 기관은 법무부 교정국이었다. 이 시설은 일반 감옥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 시설은 초중구금(超重拘禁) 시설로 준비되었다. 국보위는 감호소 시설 장소로 육지에서 완전히 격리된 섬을 지정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곳은 현재 청송교도소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산3번지였다. 전방 부대에 수용되어 있던 감호생들이 처음 청송감호소에 수용된 것은 1981년 12월 2일이었다. 청송 역사의 시작이었다 감옥이 아니면서도 감옥보다 더한 곳, 그 어떤 교도소보다도 더 삼엄한 시설에 엄중한 처우를 하고, 교도관들마저 기피하는 청송보호감호소, 우리 역사 속에서 이곳은 숱한 인권유린 시비를 낳으며 24년 동안이나 유지되어 왔다.

사회 안정인가, 쿠테타 정권의 안정인가

:

 

군대 가서 죽은 내 아들아 - 이규정

 

녹화사업의 실체

: 1980년대 군부에 의한 녹화사업은 반체제 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녹화사업은 강제 징집자와 운동권 학생 입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자술서를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 후 대상자의 등급을 분류하고, 그 등급에 따라 책과 글을 이요하여 순화 작업에 들어간다. 즉, 의식 개조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 후 '순화'된 학생들에게는 정보 수집의 임무가 부여된다. 이른바 관제 프락치 활동이 녹화사업의 실체였던 것이다.

돌아오지 못한 젊은이들

: 1980년대 초, 사병 여섯 명의 죽음을 군 당국은 자살이라 발표했지만 유가족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강요된 침묵 속에 묻혀버린 여섯 병사들은 바로 녹화사업의 대상자들이었다.

군 당국은 무엇을 조작했는가

: 사인이 바뀌고, 조서가 가짜로 구며지는 상황에서 군 당국의 발표는 신뢰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보안사 고문의 실체

:

누가 녹화사업을 조정했는가

: 녹화사업은 전두환 정권 당시 보안사의 작품으로 서울 소재 주요 대학의 대상자들은 보안사 심사과에서 심사하고 나머지는 예하 보안대에서 담당했다. 지난 2005년 12월 19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80년대 '특별 정훈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가혹 행위를 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도 밝히지 못한 죽음의 진실

: 1980년대 보안사의 녹화사업은 대한민국 군대가 스스로 정치 도구화함으로써 군의 명예를 스스로 저버린 사건이었다. 강제 징집에서 의무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했고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버림받은 애국심, 북파공작원 - 이규정

 

또 하나의 왜곡된 역사

: 북파공작원들 당시 국가와 한 약속으로, 아직도 자신의 과거 행적을 말하는 것이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잘못 말하면 자신과 가족들이 큰 해를 입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북파공작원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 유린, 버림받은 그들의 혹독한 사회생활상, 그리고 북파공작원 모집과 양성에서미국의 역할 등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축소 은폐된 사망.실종자 수

: 북파공작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1년, 육군첩보부대 HID는 한국전쟁 중 정규전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됐다. 1955년엔 해군 첩보부대 UDU가 출범해 해상을 통한 먼 거리 침투 공작도 펼쳤다. 북파공작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침투를 계기로 활성화됐다. 지옥의 훈련대 '설악산개발단'이 창설되고, 대대적인 북파공작원 모집과 훈련에 들어갔다. 1980년대 이후에도 북파공작원은 계속해서 모집됐다. 그러나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들에겐 실제적인 공작이 거의 없었다. 대신 3년에서 5년에 걸쳐 비인간적인 훈련만이 반복되면서 사망자와 자살자가 급증했다.

지켜지지 않은 국가의 약속

: 목숨을 대사로 하는 만큼, 또 국가를 상대로 하는 약속이니만큼 북파공작원들은 그 약속을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들 가운데는 사회 복귀 후 군대 기피자로 몰려 거급 군 생활을 한 공작원들도 있다.

죽음의 설악개발단

:

감취진 대북 특수부대의 실상

:

살아남은 자들의 바람과 노력

: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에서 공작원이라는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국가는 이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북파하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그들의 인생에 대해선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미국과 북파공작원

:

조국이 우리를 버렸을지라도 우리는 조국을 버린 적이 없다

:

 

5공의 3S 정책, 스포츠를 지배하라 - 강지웅

 

채찍과 당근

: 1980년 5월의 봄이 암울하게 막을 내린 후, 이 땅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봄'이 찾아왔다. 국민들은 스포츠로 울분을 토하고, 스크린을 통해 위로받았으며, 향락과 퇴폐 문화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바야흐로 스포츠의 왕국, 에로 영화의 천국, 섹스 산업의 메카로 성장해 간 1980년대, 그 뒤엔 5공 신군부의 '우민화'와 '국민 순치'라는 고도의 정치적 음모, 이른바 '3S 정책'이 있었다. 금지곡으로 대표되듯 1970년대가 무조건적인 규제와 억압 위주의 문화 정책을 편 시기였다면, 1980년대는 더 적극적으로 국민들이 대중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장려하던 시기였다. 3S 정책의 극치가 바로 스포츠였다. 프로야구를 필두로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 스포츠의 프로화가 1980년대 초반에 촉진됐다. 특히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한 프로야구는 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키면서 정치에 대한 불만의 배수구(排水口)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서울올림픽은 5공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해 주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무관심한 대중 양산 정책

: 일반적으로 3S 정책이란, 거대한 대중 소비 문화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비정치적 영역에 집중시킨다는 경험적 가설을 토대로 하여 대중의 관심을 스포츠(Sports), 영화(Screen), 성(Sex)에 집중시켜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대중을 양산하려는 정책을 말한다.

에로 영화의 범람

: 1970년대 리얼리즘 계열의 한국 영화들이 높은 수준의 성취를 보여�을 때 박정희 정권은 검열이라는 잣대로 그 숨통을 조이고 싹을 짓밟았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1982년 한해에만 개봉 영화 56편 중 35편(63%)가 에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5공 정권의 유화적인 영화 정책은 이면에 큰 틀의 문화 정책의 변화를 깔고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의 하나가 5공화국 헌법이 '문화'를 헌법 조항에 삽입한 최초의 헌법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의 문화 정책은 1970년대와 몇 가지 점에서 '새로운' 면을 보인다. 일단 문화 정책의 '대상'이 변한다. 1970년대의 문화 정책이 주로 전문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1980년대는 정책의 대상을 '국민 전체'로 확대했다. 문제는 이런 규제 완화가 어떤 성격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5공 정권은 '향략적 대중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 유지에 저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관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퇴폐적'이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대중문화는 방치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배경에는 '문화를 통해 탈정치화를 조장'한다는 3S 정책의 이데올로기가 효과가 야기됐다.

향략 산업의 팽창

: 1980년대 초반 룸살룽, 안마시술소, 사우나와 같은 유흥 향락 산업은 날이 갈수록 팽창해 갔다. 향락 산업의 번창은 여기에 기생하는 폭력배들을 대규모로 조직화했다.

프로야구의 출범과 올림픽 유치

: 취약한 정권의 기반, 국민의 탈정치화를 유도하기 위한 유화적인 대중문화 정책, 하지만 5공 정권은 3S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발견해 냈다. 바로 스포츠였다. 전두환이 프로야구에 대한 말을 꺼내자마자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프로야구 구단을 맡을 기업을 선정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프로야고 출범, 역사적인 개막식 시구의 주인공은 전두환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올림픽의 유치였다. 사실 올림픽 유치는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시도됐다. 꺼져가던 올림픽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당시 전두환 측근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올림픽 유치에 대한 전두환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올림픽 유치단이 떠나기 전날 환송식장에서 당시 안기부장 유학성은 대통령의 의중을 대변해 그들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여러분들이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하면 지중해 푸른 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 그 역설적인 결과

: 3S의 다른 2S 영화와 성도 탈정치화를 위한 훌륭한 수단이었지만, 스포츠의 파괴력에는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와 출판에서 나타난 검열의 이중 잣대는 끊임없는 저항을 낳았다. 정권의 빤한 속셈은 진일보한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웠다. 냉소의 대상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스포츠는 달랐다. 5공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해 주는 데 올림픽은 막강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져왔다. 올림픽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는 집권 초 정권을 위태롭게 했던 정치적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발판이 됐다.

 

2. 풀리지 않는 역사 속 미스터리

 

땅에 묻힌 스캔들, 정인숙 사건 - 김동철

 

밀실 정치와 의문의 죽음

: 1970년 박정희 정권 시절 밀실 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때, 한여인의 의문의 죽음이 있었다. 정인숙, 당시 26세였던 이 여인은 자신의 차(코로나 승용차) 안에서, 친오빠인 정종욱이 쏜 총에 맞아 살해된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검찰은 여동생의 무분별한 남자 관계를 꾸짖던 정종욱이 이를 무시하는 정인숙을 홧김에 총을 쏘아 죽였다고 발표했으나, 당시 세간에선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소문과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 3월 17일의 강변로

: 김상현 전 의원은 인터뷰에서 "정인숙은 보통 여자가 아니죠. 우선 그녀는 당시에 회수여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회수여권이라면 일반인은 가질 수 없는 여권이었습니다. 우리 국회의원도 회수여권을 갖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장관급 이상, 특수한 신분 사람들이 가진 여권인데, 이 여성이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 "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정인숙의 수첩에 기재된 고위 인사 명단과 증폭되는 의혹

: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인숙이 갖고 있던 수첩이었다. 고위 인사 26명의 이름이 담겨 있었다는 이 수첩은 수사당국으로 넘어간 이후 행방불명(명단이 적혀 있던 수첩은 다시 치안국 손**이 가젼간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이 되고 말았다. 사건 발생 후 엿새 만인 1970년 3월 23일, 검찰은 정종욱의 자백을 받아냈고, 그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물인 범행에 쓰였던 총은 결국 발견되지 않았고 정황 증거와 자백만으로 모든 수사가 종결되고 정종욱은 사건 발생 34일 만인 4월 20일 구속 기소되었다.

1970년 3월 17일 밤의 진상은 무엇인가

: 박정희, 정일권, 박종규, 김형욱 등 당시 정치권의 실세들과 친분 관계를 가져오던 정인숙, 결국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의 아이까지 잉태했다. 서슬 퍼렇던 당시 상황에서 정종욱은 오로지 이러한 사실에 대해 함구하고 특히 아이의 아버지인 정일권을 보호하는 것만이 자신과 가족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 판단했다고 이야기한다. '조용히 있자. 그러면 이곳 교도소에서도 곧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족과 주위의 실세와 당시 검사, 변호사까지도 조용히 있으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단순 살인 사건이라 발표했으나, 정인숙 사건은 실은 중정이 개입할 정도로 국가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권 보호 차원의 개입이었다. 중정의 역할은 사건 이후까지 계속되었다고 정종욱은 믿고 있다.

다시 제기되는 의혹과 밝혀지는 진실

:

사건 현장은 말한다

:

정인숙은 왜 제거되어야 했나

: 1960년대 선운각은 한국 최고의 요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음식점이 되었지만 과거에 이속은 제3공화국 정치 실세들이 아지트처럼 사용하던 곳이기도 했다. 밀실 정치의 무대였던 선운각은 정인숙의 무대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정치 풍속도를 세간에서는 이른바 '요정 정치'라 불렀고, 요정 정치에 필연적으로 수반된 것이 여자였다. 정인숙은 1969년 일본으로 나가 몇 개월을 머물렀다. 그것은 그녀 개인의 의사라기보다 당시 정치권의 종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외국 여행을 주선한 면면들은 대통령 경호실, 국무총리 비서실,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인물들이었다.

정인숙의 무덤 앞에 선 정종욱

: 한 시대의 권력은 은밀한 밀실에서 그녀를 소비했고, 그녀는 그 권력에 기생했으며, 이러한 그녀의 부도덕성은 곧 '권력의 부도덕성'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들

: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 장형원

 

풀리지 않는 의문

: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박정희 신화를 옹호하기 위해 김재규를 폄하하는 것이나 박정희 신화를 무너뜨리기 위해 김재규를 높게 평가하는 것 모두 온당히 역사 평가 자세는 아니다.

박정희와 김재규, 그 애증 관계

: 김재규는 박정희의 후광으로 정권 내 요직에 기용되었지만 박정희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려는 입장과는 달리, 정권 내 중도 세력으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하겠다.

박정희와 미국, 그리고 김재규

: 10.26과 관련한 쟁점 중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미국의 역할이다. 해방 이래 지금까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기조는 미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상황을 막는다는 것이다. 서로 불편하지만 참고 살자는 입장에서 한미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된 것은 카터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부터이다. 그렇다면 워싱턴에서 미국에 순응적인 정권으로 교체하기 위해 박정희 제거를 명령했을까? 아무리 박정희가 맘에 들지 않더라도 암살 지시를 용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카터 행정부와 현실 정치를 중시하는 미 국무부, 국방부 실무선에서 미국에 순응적인 정권을 세우기 위해 박정희를 제거한다는 것은 위험한 도받이었던 것이다. 단지 미국 측에서 1970년대 말에 이르면 '평화적' 정권 이양, 즉 선거와 같은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유신체제를 완화하고 좀 더 순응적인 정권으로 이양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요컨대 김재규는 완고한 유신정권 내에서 미국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듣고 박정희에게 미국의 의사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창구였고 미국이 유신체제를 완화하고 박정희 정권보다 순응적인 정권을 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미국의 개입과 책임 소재를 규명할 수 있는 어떤 문서도, 증언도 없는 상태다.

10월 26일, 왜 궁정동이었는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거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10.26은 이후 재판에서 신군부 측이 주장한 바와 같이 김재규가 집권하기 위해서 일으킨 계획 거사나 재야에서 말하는 것처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미리 준비한 거사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김재규가 박정희한테서 질책받다가 욱하는 성미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총을 쏜 단순 살해 사건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총과 사무라이

:

 

김형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 이규정

 

실종의 미스터리

: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은 파리에서 실종된다. 그의 실종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실종은 미스터리로 남겨진 채 세인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김형욱, 그는 누구인가

: 김형욱은 5.16 때 처음 정권에 발을 내딛는다. 육사 8기생인 김형욱은 박정희를 도와 쿠테타 주동자로 나섰고,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김형욱은 스스로 대통령 다음가는 제2인자였다고 말할 정고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형욱은 3선 개헌 직후 정권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3선 개헌을 성사시키고 단 3일 만에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해임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후 김형욱은 국회의원을 한 번 했을 뿐 유신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그러던 김형욱이 갑자기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결국 김형욱은 미국 청문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6시간 20분에 걸친 청문회에서 김형욱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비롯해서 박 정권과 관련된 감춰진 모든 사실을 낱낱히 공개했다. 2년 3개월 만에 완성된 회고록은 원고지 5000매의 방대한 양이었다. 정인숙 피살 사건에서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까지 박정희 정권에겐 치명적인 사건이 모두 다뤄졌다. 원고가 완성되자 한국 정부에선 김형욱의 회고록 출판을 저지하기 위한 회유책에 나섰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김형욱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김형욱은 돈을 받기 위해 파리에 가게 된다.

김형욱은 어떻게 실종되었는가

:

누가 김형욱을 살해했는가

: 종합해 보면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가담한 부서는 중앙정보부이며, 파리 가까운 곳에서 김형욱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핵심 인물은 누구인가

: 실종 이후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처벌하기 위해 급조한 반국가 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재산이 몰수당했다.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는 길

: 지난 20여 년 동안 김형욱 실종 사건은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 계속되는 군사 정권들이 결코 공작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친일파, 그들만의 면죄부 - 정길화

 

'일경의 호랑이' 노덕술

:

친일 경찰 노덕술의 족적

:

해방 이후의 노덕술

: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일제하의 관리, 경찰들을 여과 없이 등용한다. 당시 동신일보 기자였던 시인 이기형은 이렇게 증언한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적에 우리나라가 36년 동안 독립 투쟁했다는 사실을 거의 몰랐어요. 미개 민족이 힘이 센 일본한테 당해서 꼼짝 못하고 굴복하고 살았다, 이렇게 알았거든요." 또 하나, 친일 경찰 등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해방 공간에서 횡행했던 좌우직의 테러와 혼란이었다. 38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를 세우려던 미군정에겐 무엇보다 치안을 유지하고 좌익을 척결해 줄 숙련된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새로운 주군(主君)을 찾던 친일 경찰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이승만이었다. 오랜 미국 생활로 국내에 정치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보호막이 필요했던 그들의 구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실제로 1946년 11월 미군정하 경찰 간부의 비율을 보면, 관구장의 63%, 총경의 83% 등, 경사 이상 간부의 80%가 일제 경찰 출신이다.

반민특위와 노덕술, 친일파는 살아 있다

: 1948년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결성되면서 노덕술 등 친일 경찰들은 최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노덕술의 검거, 그것은 반민특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승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노덕술이 체포되고 이틀 뒤인 1월 26일, 이승만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불러서 그의 석방을 요청했다. 그런데 노덕술이 검거된 그 무렵 그가 주도한 또 다른 경악할 만한 사건이 터져 나온다. 반민특위의 친일파 수사 압박으로 위기에 몰리자 친일 세력가 친일 경찰들이 주동이 돼 우익 테러리스트 백민태(본명 정상오)를 시켜 특별검찰관 노일환과 김웅진, 특별재판관 김장렬 등 반민특위 간부를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암살 청부를 맡은 백민태가 자수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기세가 오른 반민특위의 수사가 활기를 띤다. 노덕술에 이어 사찰과장 최운하까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경찰은 특경대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 사표로 맞선다. 마침내 1949년 6월 6일 새벽, 친일 경찰 출신 시경국장 김태선과 종로경찰서장 윤기병은 내무 차관 장경근과 이승만의 승인을 얻어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습격한다. 바로 6.6 사태다. 헌법기관인 반민특위가 경찰 조직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이 사건은 배후에 권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찰의 전격적인 작전은 반민특위를 단시간에 무력화했다. 이는 일제하 조산인 경찰관들이 승부수를 날려 단번에 전세를 뒤집은 것을 말한다.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는 친일 경찰 준동으로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노덕술과 전봉덕

:

친일, 반공, 독재의 주구(走拘) 그리고 몰락

: 1952년, 이승만과 그의 친위대였던 친일 세력들은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정권 연장을 위한 가공할 사건들을 획책한다. 당시 국회는 임시 수도인 부산에 있었다. 그런데 재선을 앞둔 이승만은 국회내에서 장면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자 당시 대통령 선출 방식인 간접 선거로는 재선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특무대장 김창룡, 헌병대장 원용덕 등을 앞세워 부산의 기지 창고가 간첩들에게 습격당하는 게릴라 침투 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빌미로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국제구락부에서 있�던 야당의 반정부 집회를 관제(官製) 테러로 덮친 후 야당 인사들을 줄줄히 연행했다. 국회의원들이 탄 출근버스를 통째로 헌병사령부로 끌고 가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국회의원들을 협박해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어 1952년 8월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처단

: 프랑스가 단행한 나치 협력자에 대한 '청산'과 '처단'은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부럽기도 한 대목이다.

중국의 민족 반역자 처단

: 일제가 중국 땅을 공략하면서 중국에서도 일본에 협력하는 무리들이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친일파라고 하지 않고 '한간(漢奸:한족의 간신, 배신자)'이라고 불렀는데, 이 한간은 단순한 친일이 아니라 일제에 적극 협력한 배신자, 즉 민족 반역자와 매국노를 가리킨다.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나자 중국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선택을 한다. 물론 그들에게도 국공내전이 있었다. 민족을 배반한 이들 한간들에게는 재산 몰수에서 최고 사형까지 중형이 선고되었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국민당과 공산당의 한간 처단은 1945년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국공내전이 경화되면서 숙청보다는 자파 세력 확보를 위한 포섭과 순치 쪽으로 흐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어떠한 친일파도 단죄하지 않은 한국에 비해, 중국은 한간 처단에 대한 인민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국공 모두 나름대로 법과 원칙을 가지고 민족 반역자를 처리했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달랐다.

역사의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친일파 청산을 제때에 하지 못한 우리는 반세기가 넘도록 오늘도 그 역사적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친일파 청산은 고사하고 60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반민족 행위자 인명사전 편찬을 놓고도 저항이 만만치 않다. 시대에 영합했고 권력을 쫓았던 이들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잘못된 역사와의 단절을 위해서 친일파, 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는 강남공화국이 있다 - 유현

 

왜 투기의 뿌리를 찾아야 하는가

: 16년 만에 가격이 1000배 이상 오른 상품의 이름이 무엇일까? 이제 서울의 '강남'은 단순히 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집중이 만들어낸 특별 구역의 경계 표시가 되었다. 면적이 전 국토의 0.1%에 불과하지만 공시 지가 100조 원에 달하는 가격으로, 전라남북도와 강원도 전체를 살 수 있는 교환가치를 지닌 땅. 부동산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오히려 불패의 신화가 더욱 공고해지는 곳, 그런데 강남의 역사는 바로 대한민국 부동산 투기의 역사와 일치한다. '투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나'라는 질문은 '강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라는 질문과 같다. 이 둘은 개발 독재 성장주의가 낳은 쌍생아로 박정희 시대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 중에서도 가장 긴 생명력을 지녔다. 거의 전 국민에게 투기라느 ㄴ경제 범죄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을 가지게 한 힘은 무엇인가?

불패 신화의 땅, 강남의 시작

: 1960년대 초까지 서울은 지금의 강북 지역 일부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1963년 서울시 경계가 확장되면서 한강 이남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고, 논과 밭이 대부분이었던 강남 지역은 개발 가능성을 지닌 미개척지로 등장한다. 또 다른 강남 개발의 필요성은 안보상의 이유에서 제기되었다. 서울의 기능을 강남에까지 확대해야 방어 전략상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었다.

열풍의 시대, 유신 드라마의 제2막

: 유신의 폭압과 성장의 달콤한 과실이 동전의 양면으로 작용했음을 상징적우로 보여주는 사실이 '영동주택단지 조성 사업'이다. 강남으로 이주가 시작되는 신호탄이었으며, 투기라는 광품의 전주곡이 된다.

강남 신화가 가능했던 배경

: 강남 개발의 시동이 걸린 것은 한남대교가 착공된 1967년이었다. 강남과 강북 도심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 한남대교는 완공과 함께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 되었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강남 개발에 가속도를 붙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당시 비용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강행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구획정리 사업이라는 방식을 통해 용지를 확보하고 비용을 조달해야만 했다. 구획정이 사업인란 땅 주인이 토지의 일부를 공공요지로 제공하면 개발자인 정부는 공공시설을 건설해 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대신 남은 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정부가 무상으로 소유하게 된 땅, 체비지를 팔아 개발 비용을 충당하게 된다. 구획정리는 재원이 없는 상태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강남 개발의 초기 비용을 체비지 매각을 통해 확보함으로써 구획정리는 강남 지가 상승의 단초를 마련한다. 즉, 정부 주도형 사업이면서도 오히려 땅값이 올라야 개발 비용이 나오는 방식이라 정부가 땅값 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었고 개발지상주의하의 이 선택은 필연적으로 투기를 불러왔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확정 이후 강남 일대에 지정된 토지 구획정리 지구는 총 900만 평. 전 세계 도시계획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초기에는 시민의 이주 자체가 소극적이어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유인책이 발표된다. 서울의 중심이 되는 시청, 상공부 등 관청의 강남 이전이 공표되나. 반대로 강북에는 강력한 개발 억제책이 시행되면서 유흥업소의 신추고가 허가가 금지되고 강남은 허용되어 이후 1980년대 강남 룸살롱, 카바레 창궐이 단초가 된다. 또한 1980년대 중반 개통 예정으로 추진되던 지하철 2호선의 노선 결정에서 수요가 많은 강북 중심의 I자형 노선을 버리고 강남 개발을 강력히 추진하던 당시 서울시장의 주장에 따라 강남을 통과하는 순환성이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유인책이 된 것은 명문 고등학교들의 강남이전이었다. 도심에 몰려 있던 전통 명문고들이 강북을 떠났고, 강남에는 신흥 명문 학군이라는 이른바 8학군이 형성됐다. 한편 투기 붐 현상이 가능했던 경제적 배경에는 달러 유입으로 인한 통화 팽창이 있었다.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 한국은 국내외적으로 고도성장을 구가할 호재를 맞이하는데, 1. 베트남 참전이다 2. 이어서 중동 특수까지 겹쳐 400억 달러가 넘는 외화가 대량 유입되었고 대내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돌파한다. 단기간에 이루어진 고속성장으로 투자 생긴 계층이 형성되고 이들은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가격의 급등으로 새로운 계급인 중산층이 된다.

청와대 개입설과 '건설 마피아'

: 강남 투기에 당시 청와대 비자금이 직접 투입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선 자금 활용설이나 당시 대통령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 등은 증거 제시가 어려운 추론에 해당되지만 적어도 개발 정보 접근이 용이한 고위층이나 정책 관련 관료들의 투기 개입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건설과 관련된 정보를 주고받던 관료와 건설 재벌, 언론과 전문가 집단은 공동의 이해관계로 뭉쳐 한국 부동산 투기의 견인차가 된다.

투기 본격화의 신호탄, 현대아파트 사건

: 이러한 투기 집단의 실체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사건이 바로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이다. 사원용으로 지어진 600여 세대의 분양권이 사회 유력 인사들에게 사전에 따로 분양되었다는 이 사건은 관련 혐의자만 900명에 이르렀고 1970년대 말 유신 정권의 최대 스캔들이 된다. 돈만 벌면 된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특권층의 비리가 오히려 투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강남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투기의 진원지이자 서민들은 진입할 수 없는 특별한 거주지로 자리 잡게 된다.

거품 위의 성채, 투기가 남긴 것

: 투기는 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자리를 빼앗아 간다. 1970년대의 10년간 실질임금이 두 배 상승할 동안 전국의 땅값은 15배나 올랐고 강남은 200배가 올랐다. 강남은 대중에게는 욕망의 대상으로, 그 지역민에게는 타 지역과는 차별되는 특수 지역으로서 신상류층의 방주가 되어왔다. 부동산은 물과 공기와도 가은 제한된 자연 자원의 일종으로 공공재에 속한다. 하지만 투기는 인간의 주거권이라는 근본적인 권리를 박탈할 수도 있는 사회적 범죄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3. 헤어나지 못한 굴레, 레드 콤플렉스

 

분단의 너울, 연좌제 - 정길화

 

연좌제는 갑오개혁 때 폐지됐다?

: 역사적으로 연좌제는 갑오개혁 때 폐지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적의 3대를 멸하던 이 무지막지한 연좌제는 1894년 6월 "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하지 말라"고 한 일종의 사책임 개별화 원칙이 칙령으로 규정됨으로써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백 년을 내려오던 인습이 칙령하나로 쉽사리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지난 반세기 한반도에 미만(彌滿)한 유령이 된 연좌제. 많은 다른 요인이 있겠지만 이는 분단과 냉전의 업보가 아닐 수 없다.

반세기 업보, 양민 학살 피해자 유족을 옭아맨 연좌제

: 분단, 그리고 전쟁. 반세기 전 이 땅을 피로 물들였던 6.25 전쟁은 우리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제주 4.3과 연좌제

: 제주의 4.3 사건은 1948년 5.10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무장대와 이들을 소탕하려는 토벌대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이때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도민의 70%가 희생되는 학살극이 벌어졌다. 대량 살육의 와주엥 심지어 가족 대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이를 '대살(代殺)'이라고 한다. 6.25는 제주에 또 한 번의 학살을 몰고 왔다.

월북자 가족과 연좌제

: 2000년 8월 15일. 6.15 선언 이후의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북한 국적의 민항기가 사상 처음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당시 북측 방문단의 대부분은 6.25 당시 월북했거나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남쪽에 남은 가족들은 지금까지 그들을 소리 내여 불러보지 못했다. 바로 월북자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이다. 이들도 연좌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물론 연좌제는 남한만의 것이 아니다. 북한 역시 6.25 이후 월남자나 납북자, 국군 포로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날 처절한 남북 대결 시대를 극명히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구도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권과 민주주의를 실현했어야 하며 그것은 나라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어쩌면 연좌제의 극복 여부가 두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성에 대한 바로미터가 될지도 모른다.

연좌제는 왜 만들어졌는가

: 남북 대립 속에 연좌제에 연루된 대상자들은 체제의 잠재적 위험인물로 간주됐다. 국가는 이들을 법적 근거도 없이 보안 사찰과 신원 조회를 통해 감시했다. 이들은 분단 체제의 속죄양이었던 것이다. 사실상의 전쟁인 냉전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체제에 연좌제 효용은 무엇이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연좌의 형벌을 통해서 잠재적인 반대 세력을 제압하거나 제거함으로써 후환을 없애는 것이었다. 공안 당국에 의한 사찰과 감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를 담당하는 조직은 주요 인물에 대해 요사찰 카드를 작성하고 사찰 대상자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연좌제 폐지, 과연 이루어졌는가

: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연좌제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5공 정부는 연좌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1980년 8월 1일) 이를 헌법에 명문화했다(5공화국 헌번 12조 3항 "모든 국민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쌓였던 기록과 관행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는 어려웠다. 신원 조회와 개인 사찰고 관련된 기록들은 여전히 연좌제 근거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좌익 전력을 가진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좌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1966년 5월 엄민영 내무장관은 연좌제는 이미 폐지되었다고 언명했다. 흥미롭게도 권위주의 정권이 잊을 만하면 연좌제 폐지를 들먹였다니 어떻든 그들도 연좌제의 폐해를 알고 있었고 폐지를 거론하는 것이 정권의 인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았음직하다. 1984년 5공 정궈느이 이진희 문공부 장관은 다시 한 번 이른바 신원 조회 기록을 전부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때까지 여전히 연좌제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1987년 노태우 정권에서도 연좌제 폐지는 또 나왔다.

연좌제는 살아 있다

: 1990년 보안사 윤석양 이병에 의해 폭로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이는 개인에 대한 감시와 사찰이 여러 경로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지난 1998년 참여연대에 의해 폭로된 경찰의 민간인 사찰을 보면, 인물 카드의 존재나 사찰의 불법성도 문제지만 여전히 가족이나 주변 인물에 대한 감시와 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소수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

: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한은 서로에 대해 두터운 벽을 쌓았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 내면 의식 깊숙이 뿌리내린 냉전 의식과 연좌제는 이 땅의 사람들을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그들에게 자학을 강요하면서 권력에 대한 순치와 굴종, 열외자(列外者)들에 대한 배제와 압박을 안겨주었다.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 김환균

 

사형 집행

: 젊은 서른 두 살의 조용수,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조용수의 사형 집행에는 18분이 걸렸다.

민족일보, 가판 판매 1위의 신문

: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오랫동안 억압되어 왔던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해 주었다. 새롭게 선을 보인 신문이 무려 380여 개나 되었다. 억눌렸던 통일 논의는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통일론의 백화제방이었다. 민족일보도 그런 자유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신문이었다. 1961년 2월 13일에 창간된 민족일보는 다른 신문과는 구별되는 사시를 신문의 제호 왼쪽에 실었다. '민족의 진로 제시, 부정부패 고발, 근로 대중의 권익 옹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민족일보 논설 작성용 원고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고지(稿?)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 민족일보의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과 진보적 논조는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일보는 창간 한 달 만에 발행 부수 3만 5000부를 기록했다. 동아일보 등 당시 유력지들이 5만 부를 발행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두판매에서는 쟁쟁한 유력지들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우익 학생이었던 조용수

:

혁신의 꿈

: '제2의 해방'. 사람들은 4월 혁명이 가져온 자유의 분위기를 이렇게 불렀다. 혁신계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돌풍을 일으켰지만 그 돌풍이 표를 몰아온 것은 아니었다. 당시 혁신계는 선거 패배에 대한 인책론으로 분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혁신계 통합을 위해서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혁신계를 통합하고 혁신계를 대변하기 위해서 조용수가 구상한 것은 신문의 창간이었다.

민족의 자주의 외침

: 민족일보의 창간은 이승만 이후 들어선 장면 정부의 언론 자유를 중시하는 정책 덕분이었다. 하지만 장면 정부의 인내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무렵 커다란 현안은 '한미경제협정'이었다. 협저으이 조항 중 원조의 대가로 미국이 원조 사업을 감시하고 감독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문제였다. 미국의 내정 간섭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은 주권 국가로서 치욕이며 굴욕이라는 것이었다. 연일 협정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것은 해방 이후 남한에서 벌어진 최초의 반미 운동이었다. 민족일보도 창간호부터 이 협정이 자주 경제를 해치는 부당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장면 정권이 미국에 예속적이라고 비판했다. 반독재 투쟁으로 시작된 4월 혁명은 1960년 가울부터는 통일운동으로 발전했다.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인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당시의 통일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통일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자는 것 2. 외세 간섭을 받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 이는 이승만이 주창했던 북진통일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조봉암이 제시한 평화통일론의 복권이자 부활이었다. 더 나아가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미국만도 아니고 소련만도 아니라는 비소비미 노선이 모색되었다. 여러 사회 문제를 민족주의적인 그리고 진보적인 시각으로 보다하는 민족일보에 대한 보복 조치가 내려졌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 1961년 4월 19일. 4월 혁명 1주년을 맞아 각 대학마다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은 이제 민족의 통일 문제를 앞세운 거대한 운동으로 변화해 있었다. 미국도 한국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민족주의의 움직임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당시 미국 국가안보회의가 작성한 대한 정책 보고서는, 세계, 특히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민족주의 감정이 마르크시즘, 혹은 중립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막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정책지침을 제시했다. 기밀 해제된 미국의 외교문서들은 강력한 반공 세력인 군부 쿠테타가 대안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3일 후의 반란

:

조용수 처형의 수수께끼

: 언론사 사장의 사형.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유례가 없었던 일이엇다. 사형 판결이 내려졌을 때, 국제신문인협회(IPI), 국제펜클럽(PEN) 등 국제 언론 단체들의 항의 성명을 내면서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왜 그런 국제 여론도 무시한 채 언론사 사장을 처형해야만 했을까? 그것도 증거조차 불충분한 용공 혐의로 말이다. 조용수의 처형은 5.16 쿠테타가 낳은 숱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이다.

서른두 살의 영원한 청년

:

 

잊혀진 대학살, 보도연맹 - 이채훈

 

잊혀진 대학살

: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밀물처럼 내려오던 그날 오후, 내무부 치안국장 장석윤은 "보도연맹을 포함한 모든 불순분자를 체포하고 상부의 지시가 없는 한 절대로 풀어주지 말 것"이라는 명령서를 각 경찰서에 하달했다. 이 사람들은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에 의해 대부분 학살당했다. 이때 희생된 사람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때 최소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무고한 보도연맹원

: 보도연맹(保導聯盟)은 1949년 6월 5일 정희택, 장재갑, 오제도, 선우종원 등 이른바 반공검사들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로, 좌익 전력이 있는 인사들을 '보호하고 이끌어' 선량한 대한민군 국민으로 포섭한 다는 취지였다. '대한민군 절대 지지, 북괴 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 타도 분쇄' 등 강령에서 알 수 있듯. 보도연맹은 이른바 '좌익 전력자'들을 묶어서 만든 반공의 행동 부대였다. 적지 않은 좌익 전력자들이 연일 신문에 전향 광고를 내고 이 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나 좌익과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가입을 권유하고 설득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시골에서는 식량 사정이 어려울 때였으므로 곡물을 배급해 준다는 약속에 솔깃해서 가입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학살의 이유

: 인민군이 남침을 감행하자 이승만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게 대한민국 내부의 소요 사태였다는 것은 맞는 말로 보인다. 1949년까지 이미 10만여 명의 남로당원들이 죽거나 월북하면서 남로당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학살된 사람이 '의식있는 남로당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터지자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해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모두 검속하여 총살한 것이다. 이는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정부의 명백한 약속 위반이자 반윤리적인 전쟁 범죄 행위인 것이다.

잔인한 학살의 전개

: 입수한 미군 문서는 이러한 대규모 학살은 '최고 지도자만 명령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

: 피해자의 자녀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울어야 했고, 성장해서는 묶여서 정상적으로 취업할 수도 없었다. 이들의 부도덕한 살인 행각은 인민군에 의한 보복 학살이라는 악순환의 빌미를 주었다. 남과북의 증오를 증폭시키고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원한을 깊게 만든 악순환이 이 보도연맹 학살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임자는 누구인가

: 육군 특무대는 보안사를 거쳐 지금의 기무사가 된 방첩대로, 당시에는 CIC라는 영문 이니셜로 불렸다. 피난지 대구에 본부를 두고 있던 CIC의 지휘관은 김창룡 대령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 내의 역학 관계를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전국적인 학살의 현장 지휘자로 김창룡을 지목했다. 김창룡이 공식 명령 계통을 뛰어넘어 이승만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 '비상사태하 범죄 행위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했다. 이적 행위자에 대해 재판 없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한 초헌법적 법안이었고, 이는 김창룡에게 살인 면허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산 코발트 광산의 침묵

: 경북 경산시 변두리 평산동에 있는 일제시대의 코발트 광산. 이 곳에서는 특무대가 대구형무소 수감자와 경북 지역 보도연맹원 등 3500명을 총살해서 깊이 100미터의 수직갱에 떨어뜨렸으며 그 상태로 5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최조한 특무대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사한 사람들을 등급별로 분류해서 처형한 기록이었다. 코발트 광산의 학살이 특무대에 의해 자행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피해자를 두번 죽인 사람들

: 보도연맹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후, 4.19 혁명으로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자 피해 유족들도 조심스레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5.16 쿠테타를 주도한 세력들은 최소한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다시 군홧발로 짓밟았다. 진상 규명에 앞장선 이원식 등 주동자들에게 그들은 '반국가 행위자'라는 낙인을 찍고 사형, 무기징역 등 극형을 선고했다.

진정한 비극, 일사불란한 침묵

: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은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철처히 은폐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아버지 세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도 아무도 애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이 엄청난 학살 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 반성 없이 부와 권력을 누려온 반면, 피해자들은 연좌제로 억눌리고 레드 콤플렉스로 가위눌린 채 50년 이상을 살아왔다.

마지막 절규

: 학살 책임자들의 대다수가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군림하여 살아왔다. 반면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들의 죄과에 대해 애기조차 할 수 없었다.

 

대한반공청년단의 비밀 - 김환균

 

세 개의 전쟁터

: 한국전쟁이 발발 후 1년이 지날 때쯤에서 이미 소강 상태였다. 연합군은 더 북진할 생각을 버렸다. 전전(戰前)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전쟁의 목표는 38선을 회복함으로써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공산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통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어느쪽도 군사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제 품위 있고 그럴듯하게 전쟁터를 빠져나가면 된다. 그런데 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은 더 계속되어야만 했다. 군사적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또는 심리적인 승리라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열쇠는 포로들이 쥐고 있었다. 포로들이 어느 체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공청년단의 숨은 지도자

: '대한반공청년단(大韓反共靑年團)'은 1951년 8월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들의 반공 포로에 대한 포악한 폭력과 살상에 대항해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은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당시 수용소의 구성은 인민군 포고 7에 민간인 3의 비율이었다. 미군들이 후퇴하면서 의심되는 사람이면 모두 붙잡아 포로로 삼았던 것이다.

푸로수용소 안의 '직업'

: 부산 거제리 수용소는 당시 남한 출신들이 장악했다. 남한 출신 의용군들은 거제도 시절 전체 포로 17만 명 중 4만 5000명에 달했다. 중공군은 2만여 명이었다. 전쟁이 곧 끝날 것 같은 분위기이기도 했고 '그곳은 남한 땅이었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이 힘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정보 제공자로서 활발한 활동

:

최초의 쿠테타

: 쿠테타의 수용소 내 포로들의 전쟁이 단순한 주도권 싸움을 벗어나 이념 전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은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송환 문제가 대두되면서였다.

<대한반공청년단가> 작곡자는 친공 포로

:

대한반공청년단의 기본 목표

: 1951년 8월 7일까지 천신만고 끝에 27개 수용소 중 12개 수용소에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할 수 있었다. 때마침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포고 송환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반공청년단의 목표는 쿠테타를 통한 수용소 장악에서 송환 반대로 옮아간다. 반공청년단의 기본 목표는 세 가지였다. '1. 우리는 악질 공산분자들과 피의 투쟁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2. 우리는 포로 강제 송환을 결사반대하고 대한민국에 석방(잔류)을 성취한다 3. 우리는 민주독립의 정신으로 수련과 지식을 배양하여 대한민국에 복무함은 물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소양을 배양한다.'

수용소 안의 유력 인사

: 그동안 대한반공청년단에 대한 UN과 국군의 지원 및 비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UN과 국군이 조직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유엔군의 전향 공작

: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의 특징적인 면모는, 물리적.지리적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이념적 영토의 확장이라는 데 있다. 1951년 6월,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되어갈 무렵, 양측은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심리적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지에 주목했다. 미국이 생각한 방안 중의 하나는 포로들로 하여금 자유 진영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많은 수의 공산 포로들이 자유 진영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자유 진영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1951년 6월부터 시작된 CI&E(Civil Information&Education), 즉 민간정보교육 프로그램은 바로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CI&E 프로그램의 핵심은 공민교육이었는데, 이것은 전향 프로그램이었다.

반공청년단원증 1, 2, 3번의 주인은 전범조사과 장교들

: 1952년 1월 4일, 김선호 중위가 일하는 UN군 전범조사과에서 대한반공청년단 중앙단이 만들어졌다. 그 일은 제네바협정에 위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이것은 사실 유엔군이 포로들의 정치 활동에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전범조사과는 반공청년단의 조직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친공 포로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대한민군 정부의 개입

:

대한민군 정부의 공작금

: 1953년 2월 국회 국방위에서 비밀 청문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 후, 국무총리 서리였던 이운형이 찾아와 반공포로였던 안씨를 면담했다. 그는 후에 거금 500만 원을 공작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돈은 안씨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심부름을 맡았던 민간 교육 강사가 '배달 사고'를 낸 것이다. 이것도 대한민군 정부가 포로 조직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된다.

반공 포로 석방

: 반공 포로 석방은 6월 18일 하루에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5일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수용자 총수 3만5000여 명 중 탈출에 성공한 자가 78%인 2만 7000여 명, 잔류자가 22%인 7000여명이었다.

반공청년단의 해체

: 반공 포로 석방 후 1년이 되는 날인 1954년 6월 18일에 발행된 [신생의 날]에 따르면 대한반공청년단은 조직 활동 포기를 선언했다.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은 진실인가 - 곽동국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와 김일성

:

김일성 항일운동의 연구와 생존 증언자들

: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사실 남한 역사학계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냉전 시대를 겪은 중장년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히 김일성 가짜론이 유효한 형세였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저 무관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가짜론의 진상과 항일운동의 진실

: 김일성 가짜론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북한의 김일성은 반만항일군으로 활동하다 동북인민혁명군에 1934년에 합류해 훈춘 4단 3연장이 되고 이후 소련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진짜 김일성은 왕청 출신의 김일선(金一善)으로 1932년 이전에 유격대에 합류해 항일연군 6사장까지 된 사람으로 보천보 전투 후 사망했고, 일제 말 김일성 장군의 전설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북한은 보천보 전투를 김일성 항일 투쟁의 상징적 사건으로 대단히 칭송하고 있다. 그런 배겨에는 사실 보천보 습격 사건에 대해 당시의 국내 언론들의 이례적으로 큰 관심을 보인 것과 관계가 있다.

김일성 가짜론의 배경

: 해방 이후 반민특위의 와해로 친일 세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남한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치열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김일성을 쫓던 간도 토벌대 중에서 조선인을 주축으로 하는 부대도 있었고 국군의 중추 세력이 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쫓던 자들이 항일투사가 아니라 '비적'이어야 했던 것이다. 실제 김구나 이승만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지도자들에게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락은 7.4 남부공동성명 당시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이미 "직무상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락 이전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 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으니 이미 남한 권부는 오래전부터 김일성의 항일 투장 경력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가짜론 확산의 책임을 남쪽에만 지우기는 억울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북한의 김일성 신격화 과정에서 항일 투쟁 경력을 부풀려 선전한 것이 김일성 가짜론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 결성

: 김일성은 만주사변 이후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북한에서는 이 유격대 결성을 김일성의 독자적 행보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박창욱 교수(연변대)는 그것이 중국 공산당 상부의 지시에 따라 조직한 것이라고 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인 양세봉과의 연합에 실패하자 중국 공산당 소속의 왕청 유격대로 합류했다. 1933년 일제의 대규모 토벌대에 쫓긴 항일 무장 세력은 험준한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왕성한 활동

: 중국 공산당 소속이었던 김일성은 조선이기 때문에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른바 민생단 사건인데, 김일성도 의심을 받았으나 그의 상관이었던 중국인 간부 주보중의 보증으로 살아남았다. 이 당시 선배급이었던 많은 조선인 항일 투쟁가들이 희생되면서 20대였던 젊은 김일성이 조선이 가운데 상급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1936년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세력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대규모 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1939년에 이르러 3로군의 편제의 동북항일연군은 7만 5000명의 간도 토벌대에 의해 크게 위축되고 만다.

해방 정국, 김일성의 위상

: 일제의 대규모 공세로 동북항일연군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40년 10월 김일성은 남은 부대원 10여 명과 함께 소련으로 향했다. 88여단은 소련 극동사령부 산하 부대였는데 소련으로 퇴각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이었다. 이 당시 김일성의 직책은 대다수가 조선이었던 제1대대의 영장, 즉 대대장급이었다. 당시 해방 정국에서 김일성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가 있다. 한 우익 단체가 1945년에 설문 조사를 했는데, 지도자로 적당한 인물에 김일성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에 이어 6위에 오른 것이다. 낸가의 국방장관 격인 군무부장 1순위로 뽑히기도 했다. 해방 후 대중들은 그의 항일 투쟁 경력을 높이 평가했다. 결국 그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항일 경력과 소련 군정의 지원 때문이었다.

사실과 인정 사이

:

 

4. 미국과 일본 당신들의 대한민국

 

섹스 동맹, 기지촌 정화 운동 - 이모현

 

윤금이, 세상에 기지촌을 말하다

: 오랜 세월 동안 기지촌은 성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야합해 만들어낸 곳이라고만 여겨졌다. 그러나 실상 그곳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후원되고 규제되는 국가적인 시스템이었으며 한미 동맹의 음지이자 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 1970년대 초반 박정희 정권에서 이루어진 기지촌 정화 운동이다.

미군 주둔과 함께 시작된 기지촌의 역사

: 1945년 해방 이후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일제 주둔지를 접수하고 전국에 34개의 미군 기지를 만들었다. 1953년 10월 1일 이승만 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미군의 한국 내 영구 주둔을 공식적으로 인간했다. 전국 18개 도시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미군 기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1958년 8월 11일 경향신문에 의하면 당시 30만 명의 매춘 여성중 약 59%가 기지촌 여성이었다. 또한 1965년 미8군 국제관계국 보고서에 따르면 용산 지역 108명 매춘 여성 모두가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가족 부양이 가장 중요한 매춘 동기였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교통부 산하에 국제관광협회 요정과를 두고 국가적 차원에서 일본인 기생 관광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등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었다. 미군이 뿌리는 달러에도 눈길을 돌렸다. 당시 내무부 특수지역과 과장이었던 전영국에 의하면 정부 차원에서 이 달러들을 국내로 흡수하기 위한 조직적인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1964년 6월 30일 정부는 기지촌 클럽 주인들의 모임인 한국관광시설협회에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아낌없는 정부의 지원으로 기지촌은 날로 번성한다. GNP 80달러이던 1964년, 기지촌에서는 매년 100만 달러가 넘는 달러를 벌어들였다. 기조촌 여성들에게 달러벌이 전사로서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됐다. 정부의 지원 속에 기지촌은 주한 미군의 왕국으로 변해갔다. 

갈등의 불씨가 된 기지촌

: 미군들의 왕국이었던 기지촌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각종 문제점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다. 당시 기지촌 분위기는 지금과는 달리 상당히 자유로웠고 기지촌 여성들은 불만이 생기면 미군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시위는 미군 사령부의 골칫거리였다. 1971년 한국 원조 사령부 조지프 퍼디츠 사령관은 미8군에 전문을 보낸다. 기지촌 통제가 어려우니 한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인종 문제도 심각했다. 미군 부대 내 흑인과 백인 병사들의 갈등이 기지촌으로 전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병이었다. 미군의 성병 비율이 허용치를 능가한다고 생각한 미군 사령부는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를 줄이기 위한 조치가 사령부의 최우선 사항이 되었다. 특히 한미 1군단 사령관이었던 라우니 장군은 한국 측 군부에 한국 대통령이나 정부가 미군의 한국 주둔을 절실히 원하고 있더라도 현재 같은 기지 주변 상황으로는 힘들다는 식으로 은근히 압박을 가했다. 위싱턴에서도 기지촌 문제를 알고 있었다. 미국의 불만은 여러 경로를 통해 박정희의 귀에 들어갔다.

위기의 한미 동맹

: 박정회와 미국의 관계는 닉슨의 취임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베트남전 종전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아시아 주둔 미군의 규모를 축소하고, 아시아인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에 맡긴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닉슨 독트린의 면제국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던 박정희는 그것을 확약받기 위해 그해 8월 미국을 방문한다. 샌프라시스코 정상회담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70년 3월 청와대를 찾아온 주한 미 대사 포터는 주한 미군7사단의 철수를 통보한다. 그 동안의 베트남 파병을 이유로 대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 왔지만 1971년 4월부터 베트남 철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박정희의 대내외적 입지가 모두 어려웠던 1971년 12월, 한미 1군단을 방문한 박정희는 한미 1군단 부사령관 이재전장군에게서 기지촌에 대한 미군의 불만을 듣고 청와대에 돌아가 즉각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마침내 1971년 12월 31일 청와대 직속 기지촌정화위원회가 발족된다. 10여 개 부처의 장.차관급으로 위원회를 구성할 만큼 박정희의 관심은 각별했다.

기지촌 정화 운동

: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박정희가 내밀어본 카드, 기지촌 정화 운동. 우선 미국 부대 내 인종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지촌 여성들에게 흑인 병사들도 백인과 똑같이 접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미군 측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는데 미군들의 인종 갈등 문제를 기지촌 여성들을 통해 해결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또한 기지촌 여성들을 민간 외교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영어 교육, 교양 교육 등도 이루어졌다. 기지촌 정화 운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핵심 사업은 성병 퇴치였다. 성병 퇴치를 위해 1972년 하반기에만 전국 11개 성병 진료소를 신축하거나 증축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반드시 주 1회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고 클럽에서 검진증 번호를 항상 달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여성들에게 대단한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헌병들은 길에서 불심검문을 해 검진증이 없는 기지촌 여성들을 잡아갔다. 기지촌 여성들은 이것을 토벌이라 불렀는데 토벌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검사 결과는 미군에 통보됐고, 아울러 미군 의무대와 카투사 등이 클럽으로 찾아가 성병을 옮겼다고 지목된 여성을 데려갔다. 이렇게 잡힌 여성들은 성병 관리소로 보내져 격리 수용됐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미군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성병이 있다고 지목된 여성이나 정기 검진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여성들이 치료를 받던 성병관리소. 여성들은 이런 곳을 '몽키하우스'라고 불렀다. 성병관리소는 전국 여러 곳에 있었는데 어떤 곳에선 미군들이 직접 치료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서 성병을 치료할 때 사용했던 페니실린 양은 120만 단위. 그러나 미군은 480만으로 늘릴 것을 권장했고 경우에 따라서 600만까지 처방했다. 치료 효과는 높았지만 독한 약 때문에 여성들은 크게 고통받았다. 성병 치료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미국은 새로운 성병 검사 기술을 알려주고 검사 약과 치료 기술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미 본토에서 검사 기계를 들여오기도 했다. 미군들은 이동 훈련을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포주들은 훈련 캠프 근방에 임시 위안소를 차려놓고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시켰다. 미군 부대에서 이동 훈련을 통보하면 현지 보건소에서는 위안소 인근에 간이 이동 진료소를 세워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했다. 1972년 한 해 동안 총 3억 8000만 원의 보건위생 예산 중 2억 2000만 원이 성병 치료에 들어갔다. 모든 검사와 치료가 무료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핵이나 나병 등 다른 전염병과 비교핼 볼 때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기지촌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앓고 있는 다른 질병은 치료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고 오로지 성병만 치료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됐던 기지촌 정화 운동. 그 결과 박정희 정권과 주한 미국 사이의 긴장은 많이 완화됐다. 결과적으로 기지촌 정화 운동은 주한 미군과 미국 정부 그리고 한국 정부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안겨준 것이다. 변함없는 정부의 지원 속에서 기지촌 업체들은 더욱 번성했고 1975년엔 정부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그러나 기지촌 정화 운동으로 여성들에게 긴 침묵의 세월이 시작됐다. 여성들은 한미 동맹의 평화를 위해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당했다.

윤금이 그 후 14년, 지금 기지촌은?

: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2006년 오늘의 기지촌.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국 여성이 있던 그곳을 이제는 러시아와 필리핀 등 다른 나라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에선 이 여성들이 성매매를 위해 입국하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즈 검사 결과를 첨부한 예술흥행 비자에 쉽게 허가를 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군들에게 안전한 섹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금도 보건소에서는 여성들의 검진을 무료로 해주고 있다. 한때 이들은 달러벌이 전사 민간 외교관이라고 불렀던 목소리들은 이들의 불행한 삶에 왜 지금 침묵하고 있는가!

온몸으로 증언하는 암울한 역사

: 기지촌은 한반도의 모근 모순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곳이다.

 

1994, 불바다 발언과 전쟁위기 - 최승호

 

철학 없는 정부와 언론의 불장난

: 철학이 없는 김영삼 정부는 조선일보가 끌고 가는 '전쟁할 각오'라는 여론의 압박에 충실하게 부응해 왔지만, 미국 대사한테서 한국에 있는 모든 미국인들을 한국 밖으로 피신시키겠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패닉 상태에 빠져든다. 미국이 실제로 전쟁을 불사하는 태도로 군사적 조치를 해나가고 있는데도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를 모르고 전쟁을 부채질하는 불장난을 하다가 마침내 미국의 의도를 알아차린 뒤 미국 대통령에 애걸하는 전화를 하는 상황, 이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김영삼 정부가 처음부터 대북 압박을 정책의 코드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남한이 만들어낸 북미 대화

: 남쪽에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했고 미국은 이를 '자유롭게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국 쪽에서는 당장 영변 원자로에 대한 공격을 검토한다는 기사가 실리는 등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김영상 정부는 북미 간 대결을 종식시키면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승주 외무부 장관을 워싱턴으로 급파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과 대화를 시작했다. 미국은 핵무기를 포함해 북한을 무역으로 위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대신 북한이 NPT 탈퇴를 유보하고 IAEA의 감시 활동을 중단시키지 못하도록 했다.

보수 언론에 휘둘린 김영삼의 대북 정책

: 김영삼 대통령이 대북 정책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없었다는 점도 큰 요인이겠지만 외부 요인으로는 역시 보수 언론의 역할을 들어야 할 것이다. 당시 보수 언론들은 미국과 북한 간의 직접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 당국이 팔짱을 끼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김영삼의 반대, 모든 것을 뒤집다

: 김영삼 대통령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북미 대화는 지속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을 북한이 이를 '정책의 변화'로 받아들였고, 이후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도 IAEA와의 협상에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북미 간의 협상 실패는 이후 한반도에 엄청난 전쟁 위기를 몰고 오고 결국 전쟁 직전까지 가는 극단적 대치 후에야 다시 협상을 하고 합의를 하게 된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는 바로 1993년 10월 퀴노네스가 강석주에게서 받은 내용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따라서 김영삼 대통령과 보수 언론들은 1년간 외교적 소모전을 벌이고, 한국민이 엄청난 전쟁 위험에 노출되도록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불바다 발언'의 진실

: 1994년 전쟁 위기에서 가장 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불바다 발언'이다. 그런데 1994년 당시 미 국무부 코리아 데스크로 북미 대화에 깊숙이 관여했던 퀴노네스가 "불바다 발언과 관련해 남한 정부가 지독한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퀴노네스는 불바다 발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대화를 파국으로 몰고가려는 남한 정부의 '작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북한 측은 당시 남한 당국이 고의적으로 회담을 파탄 내서 북미 대화가 불가능하도록 몰고 가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조작된 진실

: 퀴노네스는 남한 정부의 방해로 북미 회담이 좌초되게 생겼다고 판단하고 있던 상황에서 남측이 이전 회담에서 제기하지 않았던 새 조건들을 내놓자 북한 대표단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남한 정부가 미국에 요청해 성사된 회담을 당사자가 결렬시키려 한 것이다. 북미 대화를 결렬시켜 북한을 안보리에 회부하도록 하기 위해 협상의 진전을 위한 북한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도록 대표단에 지시하고, 북한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불바다 발언은 북미 대화 좌초라느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바다 발언의 반민족적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기고 북한을 세계의 공적으로 몰고 간 김영삼 정부의 부도덕성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높아가는 전쟁 위기의 파고

: 불바다 발언이라는 방아쇠가 당겨진 뒤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의 파고는 급격히 높아졌다. 미국 정부 내에서 협상을 주도한 국무부의 역할은 축소되고 국방부의 발언권이 압도하기 시작했다. 1994년 5월 주한 미군 사령관 게리 럭은 페리 장관의 명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전쟁이 시작된 뒤 3개월 동안 미군 사망자가 5만에서 10만 명, 한국군 사망자는 최소 50만 명 안팎, 한국 민간인 피해자가 수백만명. 재산 피해 규모가 1조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예측된 것이다. 고민에 빠진 클린턴은 다시 한 번 협상해 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연료봉 8000개를 빠르게 교체하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는 북한을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 위해 명렬한 외교 활동을 지속했다. 북한은 안보리 제재는 곧 전쟁이라고 반발했고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대결 지향적인 보도를 일삼은 무책임한 언론들

: 미국이 병력을 증파하고 영변 폭격설이 미군 언론에서 공공연히 나오는 상황에서 실제 전쟁 가능성을 읽지 못했다는 변명은 통하기 여러운 일이지만 청와대조차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영변 폭격'이냐, '병력 증파'냐

: 당시 상황은 한국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고, 그들은 사태 이후 10여 년이 넘은 상황에서도 '1994년에는 미국이 영변 폭격을 하려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결정을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의논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 그것이 한미 동맹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이 없는 주권 국가

: 한국군 스스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최고의 무력으로서의 자존을 확고하게 지켜야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명령에만 따르는 우리의 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소파, 동맹의 초석인가 덫인가 - 이모현

 

주한 미군 범죄, 절대로 처벌할 수 없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

: 소파의 기원은 한국전쟁 당시 맺어진 대전협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7월 12일.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 중이던 미국은 북한군의 쫓겨 대전에 피란 정부를 꾸린 이승만에게 미군에 대한 일체의 형사재판권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이른바 대전협정. 이 협정은 불리한 전황 속에서 미국의 초안 내용 그대로 작성되었다. 1953년 7월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을 반대해 오던 이승만이 전격적으로 정전협정에 동의한다.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는 조건이었다.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미군의 영구 주둔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협상의 시작

: 아이젠하워는 해외 주둔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검토 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해외 주둔 미국 기지 보고서인 '내시(Nash) 보고서'. 이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60여 개국에 주둔 중인 미군의 범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로 인해서 현지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되면 미군이 안정적으로 주둔하는 것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공감했다. 현지 여론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미군이 마침내 현지 국가가 주둔군 지위 협정 체결을 요청하면 즉각 응하라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지난한 협상 과정

: 그러나 그 후에도 교섭이 바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미 정부의 입장과 별도로 주한 미 군부가 한국과의 소파 체결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 군부의 입장은 자기네 군인들을 한국 법정에 넘기느니 차라리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답보 상태였던 소파에 물꼬를 터준 것은 4.19였다. 장면 정권은 이승만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외교 6대 정책에 소파 체결을 포함하는 등 강한 의욕을 보였다. 1961년 4월 12일 매카너기 주한 미 대사가 장면 정권을 찾아가 소파 협상을 시작하겠다는 본국의 전언을 알린다. 마침내 1961년 4월 17일 소파 체결을 위한 첫 교섭 회의가 열린다. 미군이 한국 땅에 진주한 지 16년 만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시작한 교섭 회의는 5.16.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처음엔 소파 페결을 위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그때까지도 좌익 전력을 가진 박정희와 5.16 쿠테타의 성격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미 국방잔관과 합참의장을 방문했을 때도 박정희는 투철한 반공관을 피력하며 군부를 안심시키는 것에만 전력을 쏟았다. 계속되는 미군 범죄는 대학생을 자극했다. 학생 시위를 주시하고 있던 미 대사관은 우려 섞인 전문을 본국으로 보냈다. 교섭 회의가 중단된 지 1년 5개월 만에 미국은 다시 협상 테이블로 나왔다.

국내 최초 공개, SOFA 교섭 회의록

: 1964년 2월 18일 국회는 교착 상태에 빠진 소파 협상을 조속히 진행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사실 미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여론이었다. 또한 미국 측 협상단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또 한가지는 바로 반미 시위였다. 총 31개의 소파 조항 중 통관과 관세, 보건 등은 일사천리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협상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날 때까지 형사재판권을 둘러싼 이견은 계속됐다. 협상은 지연됐다. 우리 측 협상단은 상당히 초조한 입장이었지만 미국은 급할 것이 없었다. 그러던 미국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협상 개시 13년 만의 타결

: 1965년 한미 관계는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전기를 맞게 된다. 한국 정부의 위상이 달라졌다. 모든 협상 관계에서 이젠 우리가 요청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소파 체결을 밀고 나가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유례없는 한미 밀월 관계에 힘입어 소파 교섭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교섭을 시작한지 약 4년 만인 1966년 1월 21일 총 82차 회의를 끝으로 31개 조항에 완전히 합의한다. 하지만 국회 비준을 남겨놓고 소파는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모든 재판권을 미국이 우선적으로 갖고 중요한 건은 한국이 미국에 포기를 요청한다는 최종안. 애초 미국의 초안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재협상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부통령 험프리가 방안했다. 베트남전 확전을 앞두고 한국에 추가 병력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외무부 장관 이동원은 여론을 등에 업고 소파 재협상을 요청했다. 미국은 고민에 빠졌지만 재협상을 받아들였다. 결국 비공부 중 사건의 1차 재판권을 한국에 넘겨주기로 미국이 양보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바로 브라운 각서였다. 브라운 각서란 사건 발생 15일 이내에 재판권 행사를 알리지 않으면 재판권이 자동 포기된다는 내용이었다. 브라운 각서는 미국의 최종 마지노선이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엔 대단히 불평등한 내용이 있었지만 그 당시엔 박정희의 외교적 성과로서 미국이 우리에게 선물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다. 그만큼 한미 관계가 불평등했다는 걸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소파 체결, 그 후

: 소파 체결 후 미군 범죄가 공식적으로 집계되기 시작했는데 한국의 재판권 행사율은 예상대로 저조했다. 1967년에 8건을 비롯해 오랫동안 한국의 재판권 행사율은 1%를 밑돌았다. 그 후 21년간 소파는 단 한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소파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동맹의 초석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 덫이 될 수도 있다. 소파가 동맹의 덫으로 전락하는 경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국민의 힘뿐이라고 역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여전한 한계

:

 

맥아더, 영광스런 그의 전쟁 - 김환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 한국전쟁은 영웅의 등장을 위한 화려한 무대인 동시에 그 영웅의 퇴장을 위한 무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맥아더의 전쟁이었다.

명배우 맥아더

:

나는 미국의 운명

: 맥아더는 자신의 오만함을 미국의 위대함과 동일시했다. 그런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은 미국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도발이었지만 동시에 미국의 힘을 좀 더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38선 이북으로 적군을 몰아내 전전(戰前)의 상태를 회복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의 기세를 몰아 38선을 넘어 한반도 끝까지 진격하길 원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잘 통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처음에 맥아더의 북진 요청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다 이긴 전쟁이라고 판단해 38선 돌파를 허락했고 유엔도 이를 승인했다. 연합군의 38선 돌파에 대해 중국이 엄중히 경고했지만 맥아더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영웅의 패배

: 중국군의 참전은 전세를 완전히 뒤바꾸어놓는다.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2월 6일, 평양이 다시 적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고도 후퇴를 멈출 수 없었다. 12월 한달 동안에만 전선은 압록강 부근에서 38선 이남 지역까지 밀려 내려왔다. 미국 전사상(戰史上) 가장 길고도 치욕스러운 후퇴였다.

중국과의 전쟁

: 연말에 맥아더는 또 다른 비밀 작전 계획을 합참에 제출한다. 그 계획은 크게 세 가지 였다. 1. 미국의 공군력을 동원해서 중국의 항공기지와 산업 시설, 그리고 만주와 동북 지역의 군수 시설을 파괴한다 2. 미 해군을 동원해 중국의 남해와 황해의 해안 항구들을 포위 공격한다 3. 대만의 장제스 군대를 파견해 중국 남부를 기습해 점령하게 한다. 그의 계획은 중국에 대한 전면전과 다름 없었다. 그것은 맥아더가 품어온 신념이기도 했다. 한국은 중국을 패퇴시키기 위한 기회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중국과의 전면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자폭탄의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을 개발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 시대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소련 역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사실 이 무렵 미국은 치밀하고 구체적인 핵무기 사용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다. 셰이크다운(Shakedown) 계획은, 핵무기를 이용해 보복 공격을 당할 위험 없이 소련을 완벽하게 박살낸다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충분한 양의 핵무기를 비축해 놓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전까지 핵무기의 사용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트루먼은 양쪽이 공멸할 수 있는 핵전쟁의 위험을 어떻게든 피하려 했다.

두 개의 전쟁

: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트루먼이 우려한 것은 맥아더가 자기 개인의 성공과 미국의 승리를 동일시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맥아더는 틀림없이 전쟁을 확대하고 말 것이었다. 한반도 전쟁과 트루먼과의 전쟁. 맥아더는 두 가지 전쟁을 동시에 벌이는 중이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트루먼과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그의 잘 알려진 정치적 야망과 관련된 것이었다. 바로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대통령의 자리를 향한 맥아더의 욕망을 실현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순교의 길

: 3월 중순에 연합군은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38선 이북으로 공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점령당했던 남한 지역은 대부분 수복되었다. 전쟁 전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트루먼의 전쟁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트루먼은 다른 연합국들과 '38선에서부터 양측이 서로 후퇴'하는 것을 협상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맥아더는 도쿄 대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협상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맥아더의 이런 도발은 트루먼의 평화협상 구상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1951년 봄에 끝날 수 있었던 한반도 전쟁은 맥아더의 훼방으로 2년이나 더 길어졌다.

사라지지 않는 노병

: 맥아더와 트루먼의 전쟁은 맥아더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1951년 내내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을 상대로 연설했다. 사실상 트루먼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었다. 트루먼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휴전회담이 가까스로 시작되었지만 협상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심신이 지친 트루먼은 1952년 대선에 재선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다. 맥아더는 이제 대통령을 꿈꾸었다. 하지만 새로운 라이벌이 나타나 그를 제쳤다. 한때 맥아더의 보좌관이었던 아이젠하워였다.

최후의 필승 계획

: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직후, 맥아더가 아이젠하워를 방문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게 '비밀계획'이라며 긴 메모를 전해주었다. 이른바 맥아더 최후의 필승 계획이었다. 맥아더 최후의 계획은 '적군의 집결지와 북한 내 시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적의 주요 보급로와 통신망을 봉쇄하기 위해 방사능 폐기물로 오염 지대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안한 방사능 물질은 코발트로 반감기(半減期)가 90년이나 되는 것이었다. 1953년 5월, 아이젠하워는 한국 지형에 맞게 개발된 전술형 원자폭탄 사용 계획을 승인했다. 목표는 개성 지역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기적인 영웅, 노퍽에 잠들다

: 19세기와 20세기의 전쟁터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던 그는 1964년에 눈을 감는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에 한반도의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되었고 잔혹한 살육을 겪어야 했다는 것, 그 기간 동안 양측에서 스러진 목숨이 무려 400만 명이라는 것은 좀체 기억되지 않는다.

 

감춰진 일본의 음모, 핵개발 - 박건식

 

2차 대전 중 일본의 원폭 개발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에 한국 정부가 일본 핵물리학자를 납치한 뒤, 경남 진해 해군본부에서 원폭 개발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핵물리학자는 2차 대전 때 일본에서 원폭 개발을 하던 핵심인물이란 것이었다. 일본은 2차 대전 전범 국가지만 원자폭탄에 관한 한 언제나 피해 국가였고, 그 점을 이용해서 평화의 사도로 자처해 왔다. 그런데 일본 역시 2차 대전 중에 원폭을 개발했다고 하면, 도덕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 때문에 일본은 한사코 원폭 개발 사실을 감추려 해왔다. 미국 역시 원폭 개발 문제의 언급 자체를 꺼렸는데, 이 문제가 논쟁이 되면 바로 대량 살상 무기인 원자폭탄 투하의 타당성과 전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일본의 원폭 개발 문제는 지금까지 역사의 비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원자폭탄 개발은 1938년 독일 과학자 오토 한이 우라늄 원자핵에서 중성자를 부딪치면 분열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보는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 과학자들에 곧바로 전해졌다. 그리고 하아젠베르크와 아이슈타인 박사 같은 세계적 물리학자도 자주 일본에 와서 교류를 했기 때문에 일본은 독일과 미국이 원폭 연구와 개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사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보은 육군 항공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비밀 프로젝트 '니호 연구'

: 1941년 4월 일본 군부는 도쿄대 이화학연구소 니시나 요시오 박사 팀에게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연구를 공식적으로 의뢰했다. 당시 일본의 과학자들은 미국에서 입자가속기를 도입해 우라늄 235를 분리해 내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난관은 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우라늄 원석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일본 군부의 우라늄 수입 작전

: 일본 군부는 대대적인 우라늄 수집 작전에 들어갔다. 일본 전역은 물론, 한반도.중국.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 우라늄 수집령을 내렸다. 또 다른 사례로는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 일본 첩보 부대의 활동이었다. 그러나 군부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우라늄은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믿을 곳은 동맹국인 독일이었다. 드디어 1943년 말 독일에서 산화우라늄을 실은 잠수함이 출발했다. 그러나 이 잠수함은 싱가포르 근해에서 영군 군함에 의해 침몰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5년 B-29의 도쿄대공습으로 원폭을 개발하던 이화학연구소도 전소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도쿄대공습 직후인 1945년 4월부터 도쿄에서 네 시간 떨어진 곳에 우라늄 정련 시설이 생겼다. 패전 당시에도 우라늄 정련 시설이 가동되고 있었다는 것은 원폭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는 독일 잠수함 U-234가 일본을 향해 출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해 도중 히틀러의 사망 소식과 함께 회항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러자 그 배에 타고 있던 일본인 장교 두 명이 유서를 남기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1945년 5월 14일 미국 포츠머스 항구에 도착한 U-234 선체 밑바닥에서 수상한 물체가 발견되었다. 바로 산화우라늄 560킬로그램이었다. 56킬로그램 들이 10박스로 된 이 산화우라늄의 운반 목적지는 일본군로 되어 있었다. 이상의 사례들은 도쿄대 이화학연구소가 파괴된 이후에도 일본이 원폭 개발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방증인 셈이다.

해군의 원폭 개발과 흥남의 비밀

: 일본 해군은 도쿄대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쿄토 제국대학의 아라카쓰 분사쿠 박사 팀에게 원폭 개발을 의뢰했다. 당시 아라카쓰 박사 팀은 원폭 개발 암호는'F-연구'였다(F는 핵분명을 뜻하는 'Fission'의 약자다). 그리고 'F-연구'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한국 흥남에 해군 함대 지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은 모노자이트라고 불리는 검은 모래 등 우라늄을 추출해 낼 수 있는 광물이 많았고, 원폭 개발에 필요한 전력과 물이 풍부했다. 해군은 이러한 시설을 기반으로 흥남 해군기지에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비밀 코드명은 바로'NZ 프로젝트'였다. 'NZ'는 '니트로겐 제트', 즉 제트엔진의 액화수소 연료 제조라는 의미였다. 흥남은 공단인 동시에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미사일과 고성능 폭탄을 제조하는 비밀 군사기지였다. 이러한 'NZ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때 흥남 지역에 맥아더가 왜 원폭을 투하하려 했고 가공할 폭격을 퍼부었는지에 대한 비밀을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45년 8월 12일 흥남 앞바다에서 섬광과 버섯구름을 동반한 폭발이 있었다고 밝힌 1947년 미국 첩보부대 비밀 정보 보고서다.

풍선 폭탄과 인간 어뢰

:

일본은 90일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

: 소련은 1949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해 미국을 경악시켰다. 위기를 느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본에도 핵 연구와 개발을 하도록 함으로써 소련을 견제하는 카드로 삼고자 했다. 이에 1954년 일본은 나카소네의 주도로 원자력기본법을 통과시키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표면적으로는 에너지난 해결이 목적이었지만 잠재적으로 핵무장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면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동시에 핵무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원전을 가동할 경우 발생하는 폐기물을 재처리하면 핵무기의 재료인 플루토늄이 다량 생산된다. 일본의 핵 이중 정책은 1960년대 사토 에이사쿠 총리때 절정을 이룬다. 사토 총리는 왜 국제적인 비난이 일 것을 예상하면서도 핵 개발 보고서를 비밀리에 만들었을가? 그것은 바로 1967년 6월 17일 실시한 중국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의 핵 이중성은 199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1995년 사회당 무라야마 총리 때도 핵무장을 검토하는 비밀 보고서를 만들었다. 사실 일본은 정권과 관계없이 농축과 재처리 시설 확보에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핵무장 노력의 정점은 후쿠이 현 몬주 고속증식로 가동 결정이었다. 이제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북핵 위협을 강조하는 일본의 본심

: 핵 문제에 관한 한 일본에겐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동안 금기시돼 왔던 핵무장 논의가 최근 들어서 급부상하고 있다. 북핵 문제를 지렛대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등과 같은 국가 어젠다를 형성해 나가려는 의도와 일본 우익의 최종 목표는 안보 면에서 미국의 우산 아래 있지 않고 독자적인 안보 체제와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북핵 위협을 강조하면 할수록 이 두 가지 과제는 일본 앞에 자동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잊혀진 과거는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