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친절한 조선사], 최형국, 미루나무, 2007, (080106).

바람과 술 2008. 6. 15. 04:53

저자의 말

 

1. 역사 속의 큰 사람 조선 왕 이야기

 

임금님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었다 - 임금님의 사생활 역사, 그리고 사관 이야기

 

사관, 그는 임금의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 조선시대의 경우는 춘추관의 관원들이 사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정1품인 영사(領事)에서부터 정9품인 기사관(記事官)까지 약 60여 명 정도가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의 직책은 상당 부분 겸직이었기에 삼정승들을 비롯한 고위관료들도 사관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산군, "임금은 역사에 속박 당할 수 없다"

: 그 내용인즉, 춘추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그가 설사 악행을 했을지라도) 꺼리어 숨기고 피한다'라고 하여 임금인 자신을 어버이로 본다면 신하들이 자신의 악행을 기록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쌩뚱맞은 주장을 편다. 그러면서 자신과 신하들을 비교하면서, 왕의 일은 하나하나 사관들이 기록하는데 신하들의 잘못된 점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푸념어린 이야기를 한다.

여자 사관을 도입해서 임금의 침실까지도

: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젠 상황이 역전되고 신하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오히려 신하들이 임금을 구속하고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기 위하여 여자 사관을 둬 임금의 침실까지도 염탐해 보려고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일을 맡아보는 시강관(侍講官) 이청까지 나서서 한문을 모른다면 언문을 써도 좋으니 여자 사관을 도입하자고 한사코 주장하였다. 이후 선조 대에 이르러서 선조가 감기 몸살에 시달려 정사를 살피지 못할 때 여자 사관들이 대신들의 문서를 대신 받아 왕에게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여자 사관이 많은 역사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을지언정 일정 정도 고유한 여자 사관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신은 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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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은 서 있었을까요? 아니면 앉아 있었을까요?

 

사관의 허리는 늘 굽혀야만 했다

: 원래 사관들은 늘 임금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작은 붓으로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였다. 아마도 이렇게 늘 서서 글을 쓰다 보니 대부분의 사관은 심한 허리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허리가 아프다고 중간에 허리를 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의 고충은 점점 늘어만 갔다. 특히 젊은 사관들은 그나마 견딜 만 했지만, 나이가 많이 든 사관들은 사초를 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중노동이었다. 드디어 1489년 8월 어느 날, 이렇게 허리 병에 시달리다 못한 사관들 중 한명인 예문관 검열 이주가 임금께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서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엎드려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라고 하며 은근히 앉아서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치게 된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중국의 사관제도를 들먹이며 사관들이 문밖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회의 자리에 들어와서 황제의 좌우에 서서 기록해야 한다고 정전 안으로 사관들이 들어왔으며 하는 소망을 밝히게 된다." 성종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부터 사관은 앉아서 일을 기록하라."

 

담배 피우는 어린이들, 어찌 그리 오만불손한가 - 조선의 담배 논쟁과 정조의 담배예찬까지

 

담배연기, 조선 팔도를 물들이다

: 남아메리카 열대지대가 원산지인 담배는 남만(현재의 베트남 지역)의 상선을 타고 16세기 후반 공납 방식으로 일본에 전파된다. 이후 담배는 일본 열도에 급속도로 번져 나갔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전파되었다. 담배가 조선에 전파된 지 십년도 안 되서 온 국토가 자욱한 담배연기로 물들게 된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한 술 더 떠서 조선은 담배를 재배해서 청나라에 밀수출하기에 이르는데, 그 밀거래 수요가 엄청나서 조정에서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이렇게 담배에 대한 수요가 날로 증가하게 되자 농부들이 벼를 비롯한 기본 먹을거리 작물들은 뒤로 하고 담배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서 국가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한다. 이와 같이 담배의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자 이에 따른 사회문제도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피워 이에 대한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담배 피우는 어린아들, 어찌 그리도 오만불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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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논쟁,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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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술 끊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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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도 밤새워 놀게 한 조선시대 공놀이 - 조선의 스포츠, 격구와 격방 이야기

 

세종, 밤을 새워 공치기해도 좋더라

: 조선시대에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공놀이를 한 것으로 격구(擊毬)와 격방(擊방) 그리고 장구(杖毬)가 대표적이었다. 격구는 서양의 폴로경기와 유사한 공놀이로 무과시험에서도 정식 과목으로 인정받은 말을 타고 했던 기마경기였고, 격방은 타구(打毬), 봉희(棒戱)라는 이름으로 요즘의 골프와 비슷한 놀이였다. 그리고 장구는 일종의 필드하키와 유사한 놀이로 현재까지도 몇몇 지역에서는 이어지고 있는 전통 공놀이이다. 이렇게 다양한 공놀이 중 봉희라는 이름으로도 함께 불리던 격방은 조선시대에 임금님도 즐겼던 놀이였다.

격방은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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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폴로가, 조선에는 격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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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상무예의 결정판을 아시나요?

 

1790년 4월 정조대왕의 명으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이 책에는 조선의 군사들이 익힌 지상무예 열여덟 가지와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합한 조선무예의 최고 결정한 '무예24기'가 체계적인 그림과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지상무예 열여덟 가지는 군사들의 단병접전을 위한 무예였으며, 여섯 가지는 기마병이 익혀야만 할 기창, 마상쌍검, 마상편곤, 마상월도, 격구, 마상재를 기록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기사가 제외된 이유는 이미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예는 굳이 교본이 없을지라도 누구라 쉽게 익혀온 터라 함께 수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남편의 육아휴직이 있었다 - 조선시대의 특별한 임신과 육아 이야기

 

태중의 아이 성을 바꾼다?

세종, 출산 전에도 미리 육아휴직을 주도록 하라!

: 세종은 서울 밖 공공기관에 소속된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하였고, 이후 4년 후에는 파격적으로 출산 전 휴가도 직접 챙겨주기에 이른다. 이렇듯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챙겨 줬던 세종은 5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남편의 육아휴가를 아낌없이 보내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식 잃은 슬픔을 가슴에 새간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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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와 현재, 뭐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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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할아버지의 육아일기를 들여다보다

 

왕이시여, 어찌 불꽃놀이에 빠지셨나이까 - 중국 사신을 기죽인 조선의 불꽃놀이

 

불꽃놀이로 주변국들에 국력 과시하다

: 군사목적으로 만들어진 화약은 조선초기에 큰 전쟁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불꽃놀이로도 발전하였다. 그 처음 목적은 다름 아닌 '기죽이기 작전'이었다. 비록 조선이 개국을 했지만, 북방의 야인들이나 일본의 왜구들은 아직 조선이라는 국가의 힘을 느껴보지 못한 상태였기에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주고자 택한 것이 바로 불꽃놀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사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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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이시여, 어찌 불꽃놀이에 빠지셨나이까

: 조선시대 임금들 중 불꽃놀이를 가장 좋아했던 임금은 다름 아닌 성종이었다. 특히 성종은 연말과 연초가 되면 불꽃놀이를 너무 자주 봐서 이를 빌미로 신하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불꽃놀이 기구를 어떻게 설치했을까?

: 땅에 묻어 놓고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것과 긴 장대에 매달아 놓은 것이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방식 두 가지의 불꽃놀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화약무기의 아버지 최무선

 

2. 뜨겁게 살다간 작은 사람들의 조선 이야기

 

홍어장수 문순득,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다 - 바다에 표류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

 

도대체 그 말이 뭔 말인지

: 특별한 군사적 사항이 아니면 조선시대 당시에도 수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표류했지만 대부분 일정한 조사를 마치면 본국으로 보내 주었다. 특히 명이나 청나라의 사람들은 정말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는 실에 굶지 말라고 식량과 여비싸지 두둑이 챙겨줘서 보내 주곤 했다. 또 만약 배가 부서졌을 경우 배를 고치는 장비를 빌려 주거나 중요한 부품을 만들어서 스스로 떠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세종의 경우는 표류한 뱃사람들에게 원래 실었던 양의 쌀을 내려 주고 음식까지 잘 챙겨 먹여 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도 했다.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 필리핀 방언에 능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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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사람들보다 더 기구했던 문순득의 표류기

: 그와 함게 표류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문호겸, 박양신, 이백근, 이중태, 김옥문 등 총 6명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거쳐간 나라를 살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데, 유구국.증산국.영파부.여송국.안남국.일록국 등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조선으로 온 것이다.

이해응, 표류인들을 위해 시를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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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장수 문순득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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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또 다른 표류기를 아시나요?

 

조선 팔도를 뒤흔든 무림검객이 있었노라 - 조선 검객의 자존심, 김체건 부자

 

임진왜란, 왜검 아래 피흘렸던 까닭은 무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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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에 숨어들어 검술 익힌 김체건, 숙종을 놀래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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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체건의 아들 김광택, 그 또한 검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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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사들은 어떻게 뽑았을까?

 

조선후기 간행된 [병학지남연의]를 보면 병사들을 선별하는 요령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 키가 작은 사람은 방패와 갈라진 창을 잡게 하고 2. 키가 큰 사람은 활과 장창을 잡게 하고 3. 힘이 강한 사람은 깃발을 잡게 하고 4. 용감한 사람은 징과 북을 치게 하고 5. 힘이 약한 사람은 화병(일종의 취사병)의 임무를 준다.

 

조선시대에도 '조폭과의 전쟁'이 있었다 - 조선시대 싸움꾼 이야기

 

조선시대의 검은 조직 '검계'

: 숙종 때의 기록을 보면 당시 좌의정 민정중이 임금에게 "서울 검계(칼을 든 무리들)들이 조직을 만들어서 싸움연습을 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져 있으니 포도청에 수사의뢰를 해서 처벌하자"는 이야기를 한다. 조선시대 민간인들도 갑옷, 방패, 화포, 기치 등 군사관련 특수 물품을 제외하고 활과 화살, 창, 검, 도, 쇠뇌 등은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었던 점이 검계의 폭력성을 높인 것으로 보여진다.

조폭 잡는 강력부 검사 장붕익

: 검계에 대한 기록은 영조를 거쳐 순조 때까지 이어진다. 영조 때 들어서 이들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포도대장 장붕익이다. 검계는 장붕익이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리자 급격히 위축된다.

몸에 칼자국 남겨 '나는 검계 조직원' 표시

: 실록에 따르면 영조 때 장붕익의 활약으로 소탕된 듯한 검계는 순조 무렵에 다시 출몰한다. 이들 검계는 다분히 공격적이어서 실제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재물과 인신을 약탈하는 범죄행위를 했다. 일단 결코 혼자 다니지 않고 떼로 몰려 다니고 온 몸에 검계임을 상징하는 칼자국을 남기고 싸움이 나면 일단 창포검을 비롯한 다양한 연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주먹쟁이 '왈짜'

: 검계 이외에도 '왈짜'라고 불리는 싸움꾼들이 있었다. 왈짜는 검계처럼 무리지어 이동하거나 자혹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주로 기방을 들락거리며 싸움질을 하고 다녔다.

 

조선 시대에는 어떤 형벌이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형벌의 종류는 크게 여섯 가지로 태형(苔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 강제 이주형(遷徙) 등이 있었다. 태형은 가벼운 죄를 범한 자에게 작은 회초리 같은 것으로 엉덩이를 매로 치는 형벌이다. 장형은 태형에 해당하는 죄보다 조금 중한 죄를 범한 자에게 큰 형장을 사용하여 매를 치는 형벌이다. 도형은 비교적 중죄를 범한 자르르 일정한 기간 동안 관에 속박해 소금을 굽거나 쇠를 주조하는 등의 힘든 노역에 부과하는 형벌이다. 유형은 중대한 죄를 범한 자를 차마 사형에 처할 수 없어 먼 지방으로 유배하여 종신토록 귀향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사형은 극형으로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형과 목을 잘라 죽이는 참형의 2종이 있었다. 그런데 교형은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죽이는 것이라 참형보다는 덜한 형벌로 인식되었다. 강제 이주형은 고향 또는 본거지에서 1천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이다. 보통 조선시대의 경우 이 형벌을 받으면 함경도나 평안도 등 척박한 국경지역으로 떠나야 했기에 그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형벌에 사용된 도구를 살펴보면 크게 일곱 가지로 구분하는 데 1. 태(笞), 태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며 작은 굴싸리나무로 만든다. 길이는 3척 5촌으로 반드시 마디와 눈을 깍아내고 관에서 지정한 규격에 의거하여 제작하였다 2. 장(杖), 장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여 굵은 굴싸리나무로 만든다. 길이는 태와 마찬가지로 3척 5촌으로 표면에는 쇠힘줄이나 아교 따위를 덧붙이지 않도록 하였다 3. 신장(訊杖), 중죄를 범하여 죄상과 증거물이 명백한데도 죄수가 불복할 경우 사용한 것으로 굴싸리나무로 만들었다. 법규에 따라 고문을 가할 경우 사용하는데, 죄소의 둔부와 대퇴부를 나누어 때렸다 4. 칼, 목에 쓰는 것으로 건조시킨 일반 나무로 만들었다. 사형수에게는 무게 25근 짜리를 사용했고, 도형수와 유형수에게는 20근 그리고 장형수에게는 15근 짜리르 각각 사용했다. 전체 길이는 5척 5촌으로 머리 부분의 넓이는 1척 5촌이었다 5. 추, 일종의 수갑으로 건조시킨 나무로 만든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남자에 한하여 사용하며, 유형 이하의 남자 죄수 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더� 여자일 경우에는 사용하지 �았다. 길이 1척 6촌으로 두께가 5촌이었다 6. 철삭, 일종의 쇠사슬로 가벼운 죄를 범한 죄수에게 사용하였다. 전체 길이가 1장이었다 7. 요, 요는 죄수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목에 찬 쇠고랑인데, 강제 노역시에는 이것을 차고 노동하였다. 무게는 고리까지 도합 3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형벌은 속전(贖錢)이라고 하여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으로 일종의 보석금 개념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쉽게 말해 돈이나 베를 국강 내면 죄가 면제가 되었는데, 가장 극형인 사형의 경우 동전 42관 혹은 베 210필을 내면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욘사마'를 능가하는 한류가 있었다 - 조선통신사 연행이야기

 

조선통신사들은 언제부터 일본에 갔을까?

: 1404년(태종 4년)에 드디어 일본의 국왕 원도의의 이름으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임진왜란(1592년)까지 일본에서는 '일본국왕사'라는 이름으로 200년 동안 71회의 사신이 다녀갔고, 조선에서는 처음에는 '보빙사(報聘使)' 혹은 '회례사(回禮史)' 등 몇 가지 이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1428년부터 드디어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바닷길을 건너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여전히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에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이 넘쳐났고 통신사 일행 또한 그들의 표적이 되었기에 통신사들의 왕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이후 왜구들의 소굴이라고 일컬어진 섬의 주인인 대마도주를 포섭하고 삼포를 개항하면서 조금씩 관계가 좋아지다가 임진왜란을 마치고 포로교환 문제를 비롯한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이때부터 안정적인 교류가 이뤄진다.

일본가는 길은 황천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었다

: 조선시대 통신사들의 여정을 살펴보면, 서울에서 사절단을 모아 부산까지 이동하는데 대략 2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특히 통신사 일행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 부담이 있었기에 국왕으로부터 환송연을 받았으며, 짧게는 8개월에서 길게는 2년이 넘는 오랜 여정이었기에 가족들과 온갖 회포를 다 풀어놓아야만 했다. 부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충주, 안동, 경주, 부산에서 각가 풍성한 연회가 베풀어져 그야말로 내려가는 길은 술과 기름진 음식이 펼쳐진 잔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음식이 기름지고 술이 넘쳐나면 그곳은 곳 백성의 피와 땀이 말라가는 것이기에 이후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자 정부에서는 마지못해 부산 한 곳에서만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일본으로 향하는 뱃길에 나서기에 앞서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게 해달라고 해신제를 지내고 이후 국왕의 국서를 받아 대마도를 향해 배를 저어 갔다. 대마도에 도착한 조선통신사일행들은 대마도주의 영접을 받은 후 몇 개의 섬을 거쳐 일본의 수도인 경도로 향했다.

조선통신사들의 환영인파 '욘사마' 팬을 능가하다

: 대마도에서 오사카를 거쳐 수도인 경도로 향하는 길은 말 그대로 환영인파가 가득했다. 통신사 일행들은 관리들이 약 500여 명에 대마도에서 조선통신사들은 보호하기 위해 파견한 호위무사를이 약 200여 명 그리고 현지 안내원을 포함하여 약 1,000여 명의 대규모 행렬이었다.

일본 열도, 조선 마상재에 빠지다

: 조선 통신사 일행 중 호위무관의 일행으로 따라 갔던 조선 마상재인의 실력에 감탄하여 떠나가는 통신사 일행사 일행을 붙�고 일본의 관백이 직접 '부디 다음 사행 때에도 마재인을 꼭 데려오십시오"라고 간곡한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17세기 초반부터는 조선의 글과 문장보다 마상재에 다 깊은 관심을 보인다. 또한 이러한 조선 무사들의 마상재 실력을 잊지 못하고 일본에서는 이와 유사한 다아헤이혼류라는 마상무예 유파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다산 정약용, 마상재를 보며 시를 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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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

: 조선통신사의 교류를 통해서 조선은 일본에 글과 무예를 비롯한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연히 일본의 문화 또한 조선에 빠르게 전해지기도 하였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재

 

바다귀신, 흑인용병 임진왜란에 참전하다 - 임진왜란과 흑인용병 이야기

 

선물로 온 흑인, 처음으로 조선 땅 밟다

: 기록을 들춰보면 1394년 태조 3년 최초로 흑인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섬라곡국의 사신으로 조선에 온 장사도라는 사람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려 하다가 일본 근해에서 도적을 만나 다시 조선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때 그냥 오기가 민망하여 칼과 갑옷 그리고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선물로 바쳤다. 여기서 말하는 섬라곡국은 지금의 태국을 말하는데, 이미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때부터 태국과 교류를 하여 많은 정보를 서로 주고받은 상태였다. 저융재란이라는 제2차 전쟁을 선포한 왜군의 재출병으로 조선이 또다시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또다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1598년 드디어 흑인용병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흑인용병을 보고, 선조 눈이 위둥그레지다

: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병된 장수 팽유격은 술좌석에서 파랑국에서 온 신병(흑인 용병)을 선조에게 소개한다.

흑인 용병은 바다귀신

: [조선왕조실록]은 흑인용병의 모습을 한 마디로 '바다귀신'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의 주특기에 대해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가 있고 또 수일 동안 물 속에 있으면서 수족을 잡아 먹을 줄 안다"고 적고 있다.

흑인들은 왜 전과가 없었을까

: 그러나 당시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흑인용병의 무력함을 가차없이 꼬집었다. 아무튼 조선시대에 흑인용병이 그다지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지만 흑인용병의 역사가 꽤 긴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백홍제의 왜구 섬멸 사건

 

우리는 흔히들 생각하기를 '왜구'하면 '일본 사람들로 구성된 해적'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는 단순한 바다의 도적이 아닌 수백 척의 대선단을 구축한 훈련된 군사조직이었다.

 

3. 기이한 물건, 동물을 둘러싼 조선 이야기

 

코끼리, 왕발톱 연쇄살인사건 - 전라도 섬으로 귀양 다닌 조선의 코끼리 이야기

 

코끼리, 한 가족 두 달분 식량을 하루에 먹어치우다

: 조선 태종 11년(1411년) 음력 2월 22일, 일본의 국왕인 원의지가 사신을 보내어 축하선물로 코끼리를 바치게 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복시라는 곳에서 임금이 타는 말인 어승마나 금군들의 말을 관리하였다. 그래서 선물 받은 코끼리는 사복시에서 마구간 몇 개 트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게 된다. 코끼리는 하루에 먹어치우는 양이 콩 4말에서 5말씩 먹어 치웠다. 코끼리 하루 식량분이 거의 4인 가족 두 달 식량분이나 되는 것이다. 이것을 년으로 환산하면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 정도나 되었다. 다음해인 1412년 12월 10일, 겨울날에 전 공조전서였던 이우가 사복시에서 기르는 코끼리를 구경하다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코끼리, 전라도 섬으로 유배당하다

: 당시 '코끼리 왕발톱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병조판서 유정현은 난생처음 접한 사건 앞에 난감해 하다가 당시 중죄인들처럼 처리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에서 바친 선물임을 감안하고 밥값이 장난이 아니게 소비되므로 저 멀리 전라도의 섬으로 코끼리를 유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리하야, 코끼리는 저 멀리 전라도 섬으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라는 섬으로 주변에 먹을 것이라곤 고작 바다풀이 전부였다. 그래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코끼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자, 전라도 관찰사가 이런 코끼리의 상황을 보고하자 임금님은 코끼리를 불싸히 여겨 유배를 풀고 다시 예전에 살던 사복시로 코끼리의 집을 옮겨주었다.

코끼리 밥값에 지방관들 눈물 흘리다

: 코끼리의 먹는 양은 좀처럼 줄지 않아, 코끼리는 또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돌며 순번제로 이 고을 저 고을을 배회하게 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코끼리 밥값 문제로 지방관들이 조정에 하소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는데, 코끼리는 또 다시 재범을 저지르고, 충남 공주에서 코끼리를 돌보던 하인이 그만 또 다시 왕발톱에 밟혀 죽게 된다.

또 다시 귀양길에 오르는 불쌍한 코끼리

: 코끼리는 1421년 3월 다시 외로운 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낙타, 조선 궁궐을 구경하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낙타는 중국의 상인들이 물건을 실어 나르면서 조선에도 건너오게 된다. 그러나 그 가격이 만만치 않고 키우는 방식이 맞지 않아 조선에서는 낙타를 쉽게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숙종 대에는 임금이 직접 낙타 구경을 하려고 궁궐 안에 낙타를 데려오는 일까지 발생한다.

 

마당 위로 세숫대야 같은 UFO가 출현했다 - 조선 사람들의 자연과 우주에 관한 생각들

 

광해군의 집권과 기상이변의 시작

: 광해군이 집권했던 17세기 초반은 여러 가지 기후 이변들이 많이 일어나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가 급증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현재의 몇몇 기후학자들은 이른바 '소빙기'의 시대로 전세계적으로 기온 이상이 일어났으며 이런 이유로 각종 전쟁이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여름에 쏟아진 거위알 만한 우박, 다른 곳에는 배꽃이 만발

: 이런 기괴한 기상이변 속에서 UFO가 살며시 역사 속에 등장(1609년 8월 25일)하게 된다.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저 하늘에

: 결정적인 증언은 양양부의 품관이던 김문위가 UFO를 직접 본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년 9월 25일에 나와있다.

혹시, 지금 이 순간 머리 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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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우리 밤하늘 별자리를 보셨나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우리 하늘의 별자리를 돌에 새겨 놓은 천문도이다. 그 모습은 둥글게 그린 하늘 안에 1,464개의 별을 그리고, 아래쪽에는 천문도를 만들게 된 배경과 참여자 명단을 적어 놓았다. 원래 이 지도는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조선 개국의 위업을 세상에 떨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처음 새긴 돌 표면이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숙종 13년(1687년)에 다시 새기게 된다. 이후 영조 때 우연히 천문관이 불타 경복궁의 터에서 원본인 태조본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발견하여 영조는 이를 보관함과 동시에 숙종본을 목판으로 인쇄해 관리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런데 전통시대의 별자리를 정밀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임금의 길을 하늘이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비행기가 있었다 - 하늘을 나는 수레와 배, 비거와 비선 이야기

 

임진왜란의 시작, 그리고 그 처절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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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가 하늘을 날다

: 비거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 당시 조선의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일본측 사료인 [왜사기]에 등장하는데,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비거의 주된 용도는 포위된 진주성과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비거는 어떻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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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날아다니는 배, 비선도 있었다

: 비선은 학과 두루미 날개를 수집해 배에 아교로 붙여 놓은 것으로, 포탄을 맞더라도 주춤하고 뒤로 물러가기만 할 뿐 물 속에 가라앉지는 않는다라고 하여 서양의 군함에 맞서도록 제작되었다(대원군 시절). 그러나 완성된 비선은 상상 속에서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물에 띄우는 순간 아교가 녹아 침몰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엽기적 군사력 강화책

 

조선 기병들은 고글을 쓰고 전투했다 - 조선시대 안경이야기

 

돈짝만한 두 개, 눈에 걸면 글자가 배로

: 안경이 우리나라에 건너오게 된 기록을 살펴보면, 유럽에서 만들어진 안경이 무역상을 통해서 원나라 때부터 중국에 전파되었는데 당시에는 성행하지 않다가 16세기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세속에서는 '안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도 다른 고상한 이름으로 '애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안경은 진귀한 물건으로 정평이 나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아마도 당시의 안경은 동전 크기만 한 안경알에 안경테는 금으로 장식하고, 휴대하기 편하도록 좌우의 안경알이 접어지는 형태였을 것이다. 이렇게 귀한 안경이었기에 조선후기에는 마치 안경이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허리춤에 안경집을 곱게 매달아 다니기도 하였다.

정조, 아침에 일어나 안경을 찾다

: 기록상 조선시대 임금 중 안경을 사용한 임금은 정조가 처음일 것이다.

조선시대 기병들은 고글을 착용했다

: 이렇게 안경의 사용이 조금씩 넓어지면서 드디어 군대에서 전투용으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그 안경은 다름 아닌 먼지 바람을 차단하여 막아내는 '풍안경'이었다. 요즘 쉽게 생각하자면 일종의 고글의 형태일 것이다. 먼지가 많이 날리는 곳이나 말을 타고 적진을 돌격해야 하는 기병에게 풍안경의 발명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풍안경은 당시 기병들에게 한 개씩 보급되었으며, 먼 거리를 살피는 '천리경'은 군영 전체에 1명만 보급해서 당시 천리경이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는지를 반증한다.

 

정조는 어떤 '나'를 꿈꾸었는가

 

마패를 번쩍 들고, 암행어사 출두요~ - 조선시대 마패 이야기

 

마패는 일종의 신분증이었다

: 마패는 역마와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한 증명서인데, 임금이 내린 암행어사의 신분 및 임무표시인 봉서를 대신해서 간편하게 사용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문서로 된 봉서를 쫘악 펼치는 것보다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역마의 숫자가 담긴 마패가 그것을 대신할 정도로 마패는 충분히 권력을 상징하는 징표가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마패는 역참과 함께 탄생하게 되었다. 그 기원은 신라 소지왕 487년 3월 우역이라하여 사방에 소관 관아를 통제할 수 있도록 통신소를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운용하는 사람에게 마패를 내려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고려 원종 15년 때부터였다. 조선초기에는 금속이 아닌 나루로 된 마패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재질이 나무이다 보니 사소한 실수로 마패가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목재로 된 마패에서 금속으로 된 마패로 변화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때 사용된 마패의 전체 숫사는 각도에 있는 것이 160여 개, 서울에 있는 것이 510여 개로 약 670여개를 사용하였다.

마패의 말 숫자는 곧 힘의 상징이었다

: 보통 마패는 앞면에는 부릴 수 있는 숫자의 말이 표시되어 있었다. 한 마리에서 열 마리까지 표시하게 되어 있었으며, 영조시대에 암행어사는 보통 세 마리의 말을 부릴 수 있는 삼마패를 가지고 다녔고, 열 마리가 그려진 십마패는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신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마패를 잃어버리거나, 위조하면 그 문제가 조종의 중심기관인 의정부에서 논의되고 죄를 문책할 정도로 큰 사안이 되곤 하였다. 이처럼 마패가 귀한 징표였기 때문에 왕이 낙향한 신하를 도성으로 불러오기 위하여 마패르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말의 숫자 문제로 인하여 귀한 삼마패 이상의 마패와 일마패를 동시에 사용하여 보통 때에는 일마패를 보여주며 자신의 신분을 들어내지 않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는 삼마패를 보여 암행감찰 활동 및 시급한 장계를 올리는 일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마패로 빌린 파발은 얼마나 빨랐을까

: 1급, 2급, 3급의 중요도에 따라 파발의 속도를 달리했는데, 1급은 하루에 3개의 역을 거쳐 약 90리를 달려가고, 2급은 120리 그리고 마지막 가장 급한 보고 내용은 하루에 150리를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이후 마패는 조선말기까지 사용되다가 전신, 전화 등 말의 속도를 능가하는 서구문물이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역참 제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조선의 명마 팔준마를 아시나요?

 

4. 먹거리를 둘러싼 조선 이야기

 

소젖 많이 짜지 마라! 백성이 운다 - 조선시대 우유 이야기

 

조선시대 임금님의 보양식 우유죽 - 타락

: 조선 숙종 때 실학자 유암 홍만선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광범위한 사항을 기술한 책인 [산림경제]를 살펴보면 우유에 대한 다양한 식용법이 나와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인종의 경우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졌는데, 그의 건간이 악화됨에 따라 여러 신하들이 우요로 만든 타락죽을 영양식으로 권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황금 같은 시기를 만들었던 정조의 경우에도 겨울철이면 늘 우유죽을 먹고 힘을 내어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유로 만든 죽은 실제로 조선시대에 왕들의 보양식으로 활용되었다.

우유를 많이 짜면 백성들이 괴롭다?

: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축산환경이 젖소한테 우유를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 새끼를 낳은 어미소의 젖을 모아서 우유를 진상했기에 애�은 송아지만 굶기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는 단지 송아지만 굶는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로 인하여 농업 생산력의 핵심이었던 황소들과 그 주인인 농부들이 함께 고통을 나눠야만 했다. 그래서 중종의 경우에는 '우유죽이 폐단이다'라고 하여 우유죽 먹는 것을 금지하였고, 영조의 경우에는 우유를 짜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소 도살을 금지해서 당시 사람들이 한동안 소고기를 입에 대지도 못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우유죽을 맛있게 먹다가 사회지탄을 받다

: 영의정 윤원형은 명종의 재위기간 중 상당한 파워를 가진 권문세족 중의 하나였다. 임금님이 즐겨 먹는 우유죽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가 탄핵의 대상이 되어 귀향을 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때맞춰 우유를 구하지 못하면 징계 당하다

: 고종 1년(1901년)의 실록 내용을 살펴보면 심지어 임금님이 드실 우유죽의 원료인 우유를 제때에 구하지 못한다고 파면당할 뻔 한 일도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우유는 약으로도 쓰였다

: 이렇듯 조선시대에 우유는 맛좋은 영양식으로 임금님이 즐겨 먹었던 보양식이었는데, 심지어 우유를 약으로 복용하는 일도 있었다.

 

임금님의 밥상? 아니 수라상

 

조선시대 임금님의 수라상의 반찬은 12가지로 가지 수를 정해 놓고 계절에 따라 내용을 다르게 하였다. 좀 더 자세히 수라상에 올라 간 음식들을 살펴보면, 수라(밥).탕.조치.찜.전골.김치.장류를 기본으로 하여 더운구이.찬구이.전유화.숙육.숙채.생채.조리개.장과.젓갈.마른찬.회.별찬의 열 두가지 찬품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왕들도 늘 12첩의 화려한 밥상을 받지는 못 하였다.

 

다산 정약용, 개고기에 우애를 담다 -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유배 떠난 형제

: 유배를 떠난 정씨 형제들은 유배지에서 쉼 없는 학문탐구에 열정을 쏟았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건강 또한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정약용, 형 약전에게 개고기 소개하다

: 이런 와중에서 형과 동생은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학문적인 내용은 물론이고 다양한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 중 순조 11년(1811년)에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 형의 건강을 걱정하며 개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실여 있다. 심지어 다산은 개고기에 함께 넣어 먹으라고 들깨 한 말을 편지와 함께 동봉해서 보내는 정성까지 보여준다. 여기에다 새로운 개고기 요리법을 첨부한다.

개고기 요리법 전수해준 학자는 누구인가

: 다산은 유배 오기 전에는 박제가를 비롯한 소위 실학자들로 불리는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맺었다. 아마도 그 때 박제가한테 직접 개고기 요리법을 전수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는 견인가, 구인가

: 개에 해당하는 한자에는 크게 견(犬), 구(狗), 오(獒), 방(尨) 등 네 가지가 있다. 견은 애완용 개를 말하고, 구는 식용의 개를 말하고, 오는 크기가 4척이 넘는 대형 개로 사냥에 사용하는 개를 말하고, 방이라고 쓰는 개는 삽살개를 지칭하며 조금 작은 사냥개를 말한다.

 

옛 그림 속의 개들을 들여다보다

 

누가 대체 사람고기를 먹었는가 - 인육과 관련된 해괴한 사건들

 

세종, 사람고기 먹었다는 소리에 경악

: 1447년 세종 29년 11월 세종에게 백성들이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백성들이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내용은 당시 황해도 관찰사로 굶주린 백성을 살피던 대사헌 이계린이 임금께 직접 한 이야기였다. 이후 이계린은 형조에 불려가 혹독한 국문을 받았고, 이후 사건의 전말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대질 심문이 이어졌으며, 의외로 결과는 말이 중간에 와전되어 벌어진 사건으로 판명난다.

철저한 수사 촉구, 그러나 또 다른 사건의 발생

: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황해도 서흥군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내용이 보고되자 세종의 머릿속은 더욱 복자해졌다. 이 때 인육을 먹었다는 내용을 말한 전리 김의정의 보고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이후 계속되는 추국 끝에 모든 것이 거짓이고 허망한 내용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김의정은 감옥에 갇혔다가 온 가족이 변방으로 �겨나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앞에 일어난 사건 또한 이계린을 파면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 이후 숙종 22년(1696년)에는 실재로 평안도에서 굶주린 백성 이어둔이 인육을 먹었던 사건이 일어난다. 심지어 선조 9년(1576년)에는 피부병의 일종인 창질에 사람의 쓸개가 특효약이라는 괴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현상금을 걸어 범인을 체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손가락 자른 피로 부모 살리는 게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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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면 죽겠습니까, 먹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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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파리에게 조문의 글을 남기다

 

소도둑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다 - 조선시대 소와 소도둑 이야기

 

소는 곧 농사의 전부였다

: 농업이 사회의 근간을 이뤘던 조선시대의 경우 소는 농우라고 해서 농사일의 상징으로 불렸다. 이런 이유로 유독 소를 함부로 도살시키지 말라는 상소가 [조선왕조실록]에 심심치 않게 실려 있다.

죄인의 얼굴에 소도둑이라는 글자를 새기다

: 소가 중요한 생산수단이었기에 소도둑은 말 그대로 남의 생산수단을 강탈하는 최대의 도적으로 부렸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경우 소도둑을 우적이라고 해서 관가에 잡혀가면 목을 매달아 죽이는 사형에 처하는 강력한 처벌을 하였다. 그리고 만약 인품이 좋은 수령을 만나 사형을 모면해도 소도둑이라는 죄명을 얼굴에 새겨야만 했다.

소도둑은 돈 많은 양반님네들 때문에 생겼다

: 이처럼 소도둑들에게는 강력한 처벌이 내려졌음에도 소도둑질은 조선시대 내내 끊임없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소의 밀도살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소도둑과 소 밀도살의 중심에는 돈 많고 미식가였던 양반님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여류시인 이옥봉, 소도둑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다

: 소도둑으로 내몰린 산지기를 구하기 위해 시를 한수 썼건만, 남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던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만 이옥봉(이옥봉은 출신이 서녀이기 때문에 결혼을 해도 첩살이밖에 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조원을 만나 사랑에 빠져 시를 짓지 않는다는 약속과 첩이 되기를 간청하여 조원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한 많은 삶을 시와 함께 마감한 조선의 여류시인 이옥봉

 

조선시대에도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 조선시대 여름과 얼음 이야기

 

빙고bingo? 아니 빙고(氷庫)

: 사료를 살펴보면 신라 제22대 왕인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저장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유리왕이 장빙고를 지었다'고 하여,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얼음 창고를 지어 뜨거운 여름에 시원한 얼음을 사용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임금님이 계신 서울에는 동빙고와 서빙고 그리고 궁궐 내에 내빙고를 둬서 얼음을 저장하였다. 동빙고는 한강 하류 두모포에 한 개가 있어 그것에 저장한 얼음은 오직 제사를 지낼 때에만 사용하였고, 서빙고의 경우는 한강가에 대여섯 개를 지어 왕실의 주방이나 대신들에게 뜨거운 여름을 잘 지내라고 선물로 주곤 하였다. 또한 이 얼음을 사용하는 것도 일정한 법도가 있었는데, 아무리 날씨가 덥더라도 반드시 입하절부터 입추까지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저 놈의 얼음만 보면 이가 갈린다

: 그런데 이렇게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에 얼음을 잘라다가 빙고에 보관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일 또한 백성들에게는 힘든 부역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실천하는 지성 다산 정약용, 빙고에 대해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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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녹으면 즉시 파면당하다

: 보통 서울에 있는 내외빙고는 나무로 만든 일종의 목빙고였으며, 지방에 만든 빙고는 돌로 만든 석빙고였다. 그런데 문제는 나무로 만들던 돌로 만들던 얼음이 녹지 않고 여름까지 잘 버텨 줘야 하는데, 만약 이 얼음이 중간에 녹아 버릴 경우 빙고를 담당한 관리는 즉시 파직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얼음이 녹지 않고 넉넉하게 가을까지 사용한 경우에는 후한 상이 내려졌다. 그리고 지방에도 몇 개의 석빙고를 만들었는데,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갈 재료인 어유나 육류들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특히 말린 어류가 아닌 생으로 먹어야 맛이 나는 식품은 얼음으로 속을 채워서 만든 조빙궤라는 특수궤짝에 넣어서 서울로 보냈는데, 이는 당시에도 일종의 냉동화물을 수송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누가 얼음과자를 먹었을까

: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얼음과자를 먹은 것으로 보이며 통신사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그 추억을 못 잊어 조선으로 돌아온 후 그것을 만들어 먹었을지도 모른다.

 

계곡선생 얼음을 노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