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 프랑크 쉬르마허, 장혜경, 나무생각, 2006.

바람과 술 2008. 6. 15. 05:13

2007년 6월 9일 읽음.

 

남자들

 

총 인원 수 81명. 대가족이 여럿이고, 혼자 여행하는 사람 몇 명, 이 지역 지리에 밝아서 일행을 이끌고 시에라 네바다를 지날 예정이었던 안내인 몇 명. 때는 1846년 11월 말, 이들은 얼어붙은 듯 산발치에서 꼼작도 못하고 있다. 월동 장비도 갖추지 못한 데다가, 눈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도 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토네이도로 세력을 키운 눈 폭풍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몰아쳐 이들을 뒤덮었다.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처럼, 아무도 풀지 못하는 끔찍한 마법에 걸린 듯, 돈너 계곡에서 6개월간 이들은 갇혀 있게 된다. 그레이슨은 사망 사건을 모두 조사하고 사망자와 생존자를 비교.분석한 결과, 생존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조건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었다. 가족과 함께 있었느냐, 혼자 있었느냐가 생존을 좌우한 유일한 이유였던 것이다. 또한 가족의 규모가 클수록 개인의 생존 확률도 높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존 기간도 가족의 규모에 따라 달랐다.

 

후손

 

지난 몇 십 년 간 우리 사회를 급변시켰던 두 세력은 노동과 사랑이다. 사랑은 출산으로 이어지지만, 노동은 출산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노동을 하면 돈을 벌고, 사랑을 하면 돈을 쓴다. 노동과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흑과 적으로 나누며 운명을 뒤섞는다. 하지만 노동과 사랑 사이에는 둘이 함께할 경우에만 성립되는 제3의 것이 있다. 그것은 돈너 계곡에서 그레이슨이 느꼈던 바로 그것, 생존의 공장인 가족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복지국가의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더 이상 해줄 게 없으니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하자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메시지였다. 우리 아이들은 '샌드위치 세대'이다. 돈뿐 아니라 자신들의 수명도 지불해야 할 세대이다. 대부분 부모가 늦은 나이에 낳았고, 아마 자신도 늦은 나이에 아이들을 낳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인생의 40년 이상을 가족을 부양하는 데 매달려야 한다. 처음에는 자식을, 그리고 나중에는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생산, 사회생활, 감정의 그물망, 충성심에서 성인 두 사람의 몫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운명 공동체

 

독일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1945년에서 1949년까지 친족 관계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이 다시 한 번 급격히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8년의 이혼율은 전쟁 전보다 2배에 달했다. 1950년까지 사생아 비율은 제1차 세계대전 후와 비슷한 2배에 이르렀다. 당시 사생아의 30~40%가 부모의 결혼으로 인해 합법적인 자녀가 되기는 했지만, 연인들은 불법혼 상태에서 살았다. 소위 말하는 '불완전 가족'의 엄청난 증가는 점령 군인을 아버지로 둔 자녀들을 통해 더욱 촉진되었다. 1946년 신생아늬 1/6이 점령 군인의 자녀였다. 이것이 독일 연방 공화국이 태어난 순간의 상황이며, 그 상황은 참담했다. 아이들의 1/4 정도가 아버지 없이 성장했다. 1960년대 초 정신분석학자 알렉산더 미처리히가 만든 '아버지 없는 사회'라는 구호는 아버지가 전사하거나 전쟁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받았던 쇼크에 대한 반응만은 아니었다. 군사정부 스스로가 '아버지 제거' 교육을 실시했다. 군사정부는 가족의 가부장적 구조에서 독일 신민 기질의 초석을 찾았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가족의 해체와 외부에서의 통제하기 힘든 가족 충성심의 해체가 나치가 천명한 목표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55년에서 1970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남녀로, 여론을 형성하는 다수이다-는 국가의 성장을 자신의 성장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체험했을 뿐 아니라, 국가 역시 날로 번영하고 성장하고 번성한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경제 성장률과 정치적 성공이 곧바로 현재의 생활에 반영된다는 이념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생성된 것이다. 이 세대는 경제적.사회적 자의식은 물론, 개인의 자의식도 힘들여 얻어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복지 사회의 배당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인구통계학적 위기와 연금 및 사회 시스템의 붕괴에 직면하면, 이런 가족들은 다시금 공동체의 원형에게로 내동댕이쳐진다. 운명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들 딸들이 성인이 되면서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자신의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이제는 이들이 자신의 가정을 꾸리지 못한 채 과거의 가족에게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후 시대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가족은 점차 자녀를 돌보는 부모가 아니라, 부모를 돌보는 자녀들로 구성될 것이다.

 

역할놀이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가?

: 대형 호텔 섬머랜드에서 일어난 1973년의 화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최대의 화재 재난 사건이었다. 오늘날까지 완전한 피해 내역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사망자가 51명, 부상자는 400명 정도 되었다. 섬머랜드 화재를 조사한 조나단 사임의 연구결과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자 갑자기 태곳적 계약 관계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67%가 함께 움직였지만, 친구들의 경우 1/4만이 서로를 찾았다. 결과를 미루어보건대 가망 없는 상황, 즉 패닉 이론에 따르자면 모든 심리적 결합의 완벽한 붕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절반의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73%가 한 사람 혹은 그 이사으이 그룹 성원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고, 이들 그룹 성원의 다수가 가족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개인적으로 내가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개인들이 주로 이용했던-평소 익숙하지 않은 비상구 대신-평소 다니던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던 가족들도 있었기 때문에 사임의 이런 연구 결과는 비상 탈출로는 비상 사태가 아니더라도 평소 정기적으로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약점을 자극에 대한 반응 속도가 느리다는 데 있었다. 반면 강점은 자신을 두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었다. 가족은 다른 구성원이 위험에 처할 경우 구조할 수 있도록 어디에 있는지 평생 알고 싶어 하는 유일한 조직이다.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씌우는가?

: 가족은 동물 조상과의 친족 관계를 되새겨준다. 때문에 가족은 종종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가족 내에서는 태곳적 감정이, 오래되고 길들여지지 않은 감정이 방출된다. 우리의 지식 규범 역시 그렇게 시작한다. 또 다른 반론으로, 가족은 시대에 뒤떨어졌고 현대화에 역행한다는 주장이 있다. 가족은 세계화된 세계에서 마지막 날까지, 즉 감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독립적이지 못한 아이들을 낳는 그 순간까지 절대 온전히 현대화될 수 없는 제도이다. 때문에 현대 사회는 가족을 불필요한 존재로 경시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이익을 주는가?

: 1990년대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실제로 코넬 대학교에서 실시한 실험(1그룹-천문학 기초과정, 2그룹-마오쩌둥 시대 중국 경제사<교수 공산주의에 호감 있음>, 3그룹-주류 경제학 입문 수강. 설문지 내용 "작은 컴퓨터 가게 주인이 컴퓨터 10대를 주문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도착하고 보니 판매 회사에서 10대를 보내놓고 계산서에는 9대 값만 청구했다. 가게 주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판매 회사에 실수를 알리고 정정한 내용의 계산서를 요구한다 2. 계산서에 적혀 있는 금액만 지불한다. 학기초와 학기말에 학생들의 반응에 대한 실험). 자녀를 양육하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 것이라는 유려가 실제 출산율 하락으로 이어졌을까? 만일 그렇다면 왜 그 시기가 하필이면 1970년에서 1990년 사이 독일 연방공화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정되며 안전한 국가 중 하나일 때 발생한 것일까? 자식을 낳지 않는 이유는 자신만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자식 투자'가 거두어들일 수 있는 가치, 즉 자식들이 창조하는 사회자본을 등한시해왔다.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 적대적이었던 다수의 사람들을 결합시킨다. 물론 지난 세기와 달리 아이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직접적인 경제적 기능을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향후 아이들의 사회적 '가치'는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누가 누구의 용기를 꺾는가?

: 자식에 대한 애정과 배려는 형제 자매의 환경에 따라 달라지며, 어린 시절 동생과의 관계가 성인이 되어 자식에 대한 애정을 높이고 희망 자녀 수를 늘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형제 자매의 숫자는 훗날 성인이 되어 출산한 자녀의 숫자를 암시할 뿐 아니라, 동생을 통해 사회적.이타적 행동이 학습된다는 사실이 조사국(독일, 카메룬, 코스타리카 3개국) 모두에서 동일하게 확인되었다. 문화가 암묵적.친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의 62%는 형제 자매 효과에 기인한다. 따라서 자녀를 원하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이를 보는 횟수가 적을 수록 아이를 바라는 마음도 현격하게 줄어든다. 그리고 출산 자녀 수가 줄어들수록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이타적 혹은 도덕적 경제학의 몫도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그들의 부재를 통해 무시하지 못할 세력이 되어버렸다.

 

누가 누구랑 결혼하나?

: 사랑의 결핍, 이것이 1970~1980년대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진 첫 번째 현상이다. 젊은 여성들의 이주와 출산율 감소로 인해 야기된 남성 과잉의 문제는, 특히 젊은 남성들의 교육 수준이 낮아 이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곳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누가 누구와 노니?

: 거의 자식을 낳지 않는 사회의 의식 속에서 가상의 친구들이 북적거린다. 놀라운 점은 이런 가상의 친구들이 한 가지 사회 역할만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돌프 그리메 연구소의 연구 결과대로 이들은 형부, 언니, 남동생, 조카, 여자친구 등 모든 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우리 모두는, 특히 아이들은 가상의 우정, 가상의 갈등, 가상의 임신과 결혼으로 매일 낮과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발견하는 이야기,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영웅, 우리가 원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상상의 우정으로 인간이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아무도 불평할 필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꿈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항상-마약이건 드라마건 관계없이-현실 세계에서 대가를 요구한다. 가치 변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미 태도 변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정보를 제공하나?

: 오늘날 국가를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담론은 경제 정치적 메타 담론이다. 우리가 가진 경제적 자원의 분배에 관한 분배에 관한 대화는 이제 사회에서 가족의 대체물로 승격되었다. 정치 토크 쇼의 현대적 메타 가족은 약화된 이타주의를 모방한다. 아무도 자신을 위한 어떤 것도 원치 않으며, 만인을 위한 모든 것을 원한다. 모든 논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가면을 쓴다. 결국 차이는 결말에 있다. 현대 사회는 무언가를 나눌 경우 생길 법한 감정을 나눌 뿐이다.

 

누가 누구를 짊어지고 가나?

: 가족과 더불어 이타주의가 사라지고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하는 경제학, 즉 프란츠 크사버 카우만이 말한 '도덕덕 경제학'이 사라지는 것이다.지금껏 국가는 가족의 개인의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지극히 당연하게 공공 의료보험에, 유치원과 학교, 노동시장, 노인 부양비에 합산해왔다. 복지국가는 가족 구조의 변화를 이겨낼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친족 관계가 줄어들고 있으며 네트워크도 줄어들고 있다. 개인에게 돌아올 도움의 손길은 날로 희박해질 것이므로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을 위해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누가 누구와 가족이 되는가?

: 실제로 우리는 친족 관계와 친구나 의붓 친족 관계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알고 있다. 친구와 의붓 친족 관계는 결국 머리 굴려 고민한 주고받기의 대차대조표를 제시해야 한다. 이를 두고 진화심리학은 '상호 협력'이라 부른다. 반면 친족 관계에서는 주고받기의 불균형이 허용된다. 무론 친족 간에도 한쪽의 일방적인 이타주의 때문에 다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상호 교환의 불균형이 일생 동안 인정되는 관계는 친족 관계뿐이라는 것이다.

 

여자들

 

여성은 생존의 기계이다. 여성들은 네트워크를 조직하며, 사회 자산이 소비되거나 파괴된 곳에서 사회 자산을 축적한다. 여성들은 친족의 '여성 동맹자'이며, 이방인에게도 신뢰와 보호를 전달해 줄 수 있다. 남녀의 사회 의식은 일생 동안 같지 않다. 남성이나 여성 어떤 쪽의 행동방식이 도덕적으로 더 낫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남성과 여성의 진화 생물학적 프로그래밍은 공동체를 위해 특정한 목표를 수행한다. 여성과 남성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 중 하나가 감성적 도움의 교환, 사회 자산의 주고받기에 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나타난다. 여성의 사회 지능이 발휘하는 신뢰 구축 효과의 실례는 무궁무진하다. 암컷 생명체는 사회 진화를 조종한다.

 

출산

 

사회가 위기에 빠지거나 한 종의 개체수가 종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로 줄어들면 자연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올인한다.

 

딸들

 

할머니들

 

물론 여성이 더 나은 인간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가 새롭게 탄생하느냐,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결정할 당사자는 바로 할머니들, 어머니들, 딸들이다.

 

유산 공동체

 

공동체를 가장 깊은 내면에서 결속시키는 것은 시장이나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급선무이다.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진정한 유산은 서로에게 하는 행동이 만인을 위한 행동이라는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