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근대 일본], 이안 부루마, 최은봉, 을유문화사, 2004, (080622).

바람과 술 2008. 6. 23. 12:10

옮긴이의 말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은, 왜 근대 일본이 지적인 면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독특한 활기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더 개방적이고, 좀더 민주주의적이며, 코즈모폴리턴적인 정치 질서를 발전시키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프롤로그 - 도쿄 올림픽

 

1964년 일본은 세계에 다시 편입했다. 1964년 가을에 도쿄올림픽(18회 하계 올림픽 경기 대회)을 개최하면서 전후의 일본은 정치적이며 민주적인 부흥을 위해 거대한 자축연을 열었다. 일본은 더 이상 명예롭지 못한 패전국이 아니라 이제는 존중을 받을 만한 나라가 된 것이다. 1964년 일본인들에게, 극도의 전시 고통과 그 뒤를 이은 평화주의의 상징은 히로시마 원폭투하였다. 일본이 평화적 뜻을 가졌음을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또한 과거 일본의 고통과 자기연민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올림픽 성화 점화를 할 젊은이는 원자폭탄의 섬광을 받았던 바로 그 날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뽑았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스포츠 기록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대중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일본의 두 선수, 마라톤의 쓰브야 고기치와 여자 허들의 요다 이쿠오는 그 후에 자살했다. 국가들간의 서열에 매우 민감한 일본인들에게,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전시의 패배의 기억을 달래주는 한 가지 길이었다. 1950년 리키도잔(역도산)이라는 레슬링 선수가 레슬링 링에서 성취한 승리는 상처받은 일본인의 자존심에 진통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인들로서는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담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였다. 일본 올림픽위원회는 그 특권으로 유도를 올림픽의 새 종목으로 채택했다. 유도는 레슬링이나 권투와는 달리, 노골적인 전투 형태에 익숙한 서구인들의 힘을 넘어서는 정신적 기술을 요구한다. 바꿔 말하면, 유도는 일본 문화, 일본 정신의 우월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유도선수는 최종 결승에서 네덜란드 선수에게 패하였다). 과신, 광신, 치떨리는 열등감, 그리고 때로 국가 위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모든 것들이 근대 일본의 역사에 모두 한몫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성이 다른 어떤 특성보다 일본을 잘 드러내 보였다. 그것이 바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품이었다.

 

Chapter 1.

 

구로후네(흑선)

: 1853년 7월 8일, 페리제독이 개항을 목적으로 네 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 만에 나타났다. 페리는, 일본인은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네 척의 '악마의 검은 배'와 페리는 일본 해안에서 대포에 불을 붙이는 불길한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페리 제독은 힘없는 존재인 천황과 쇼군을 거의 구별하지 못 했다. 하지만 페리는 이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본의 한 항구에서 무역할 권리를 요구하는 미국의 필모어 대통령의 편지를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천황에게 그것을 전해줄 것을 계속 주장했다. 오랜 심의 후에, 일본인들은 페리 제독의 정치적 모호성과 여러 정책들에 대한 반대논의를 거쳐 결국 페리에게 뭍에 상륙하도록 허락하였고, 양측은 그들이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장면을 연출하여 상호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페리 제독이 열등 종족을 계몽시키는 임무에 확신을 갖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첫번째 왔을 때와 1854년 두번째 왔을 때 가장 큰 관심은 미국 무역의 이익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배의 갑판에 있는 총 61정, 이외에 놀랍게도 아무런 방비가 되지 않은 일본의 해안 방어선(대부분 대포는 눈속임이었고 일본 함대는 없었다)은 마침내 자포자기하는 전쟁보다는 타협안이 낫다는 것을 에도의 쇼군 정부가 받아 들이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인의 관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에도막부에서는 전제적인 법이 2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군대가 유럽 제국들의 허약함을 드러냈던 것처럼, 에도막부의 약점이 우세한 외세의 무력에 의해 노출되었다. 불만을 가진 지방 무사와 지식인들이 늘어났고, 그들은 막부를 끌어내리고, 보다 강력한 국가의 중심에 천황(그리고 자신들)을 앉힐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다른 편의 호전적인 다혈질들은 쇼군의 반대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페리 혼자에게 이 모든 소란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행동은 확실히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발생시키는 데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페리의 가정은 진실에서 먼 것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이본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사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선교사들은 일본인을 개종시키는 데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엘리트 가운데 쇼군과 가신들은 서양의 신앙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가졌다. 1720년 유럽정체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도쿠가와막부의 제8대 쇼군)는 서양 서적 금질르 완화했다. 그는 드물게 개방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당시 대부분의 난학자들이 애국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수적이었다 해도, 외국 문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반역자라는 의혹이 따랐다. 외국인 선생님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은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올 수 있었다. 외국 학문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네덜란드 학자들, 심지어 페리의 개항 요구에 타협적 해결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정치적인 반역자가 아니었다. 어쨌든 거의 모두가 열렬한 애국자였고, 중국 중심의 개화반대론을 비난함으로써 신유교의 복종 규칙을 믿었다. 난학의 과학도들은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지식은 유교국가의 철학의 합리성을 손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서구 과학의 영향은 일본보다 더 심각했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중국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구의 사고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중국과 비슷하였지만, 덜 상처받거나 최소한 다른 식으로 상처받는 것이었다. 일본의 사상가들은 중국을 지혜의 중심으로서 보던 것에서 사고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찾는 것으로 손쉽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가 움직인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과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권력분립이었다. 중국에서는 세속 권력과 정치 권력 모두 황제의 영역에 집중되었다. 도쿠가와 일본에서는, 마치 교황의 역할처럼 천황의 인정이 현실 통치자를 정당화해주는 한편, 쇼군은 강력한 군사적 인물로서 나라를 통치하였다. 권력분립은 하나의 큰 이점을 갖고 있었다. 비애국적이지 않게 보이고 특히 천황에 대한 충성의 이름 안에서 행해진다면, 그것은 정부에 대항하는 반역자들에게 효과적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쉽지 않았다. 1840년 비참한 아편전쟁의 소식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중국이 얼마나 진보가 늦은가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취약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도투가와 요시무네 쇼군이 란가쿠를 격려하였을 무렵부터 일본의 문화적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다. 일본의 토착론자들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독특한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국 사상을 연구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왜 서구 사상이 일본 토착론자들을 흥분시키는가? 서구 사상은 일본을 중국 문화의 궤도에서 탈피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토착론자들은 기독교를 이러한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유일신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 국가 통합성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교회와 국가의 통합이 근대 일본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그 기반은 고대 전통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모델은 유럽의 것이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토착론자들은 고서들과 천황 혈통의 순수성, 고대 신들에 대해 미신적으로 숭배하면서 서구화주의자들처럼 근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일본이 경쟁하기 위해 서구 세계에서 가장 나쁜 면, 가장 호전적인 면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식민주의였다. 문제는 옛 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근대 국가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 때에 어떤 사상이 그 버팀목이 될 것인가에 있었다. 다가오는 세기가 외국인 혐오주의, 전제주의 그리고 전쟁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해도 보다 개방된 민주주의의 준비가 완전히 봉쇄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일본인을 '부분적으로 개화된' 민족이라고 보았던 월리엄스의 일본관은 결국 틀린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점차 무능해져 가는 에도 정부는 일본 땅에 외국인이 침입하는 빌미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대부분의 젊은 극단주의자들은 하급 무사 출신으로 구사회에서 의지할 곳을 잃게 되자 외국인 혐오와 천황숭배를 주장하며 다음 세기의 전형인 암살을 일삼아 나라를 구한다는 이상을 갖게 되었다. 자객 지망생 중에 도사 지역(시코쿠 남서쪽의 섬)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라는 젊은이가 잇었다. 사카모토는 가쓰를 수년 동안 스승으로 모셨으며, 바쿠후에 반대하는 남서쪽의 영지인 죠슈, 사쓰마, 도사 간의 연계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해냈다. 17세기 전환기 즈음 내전에서 패했던 이들 영주들은 도구카와 권력의 중심 세력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카모투는 일본이 봉건 영주들의 위원회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고 제안하였으며, 그 위원회에서도 도쿠가와 쇼군의 힘이 막강하겠지만 최고 지도자의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1867년에 마지막 쇼군은 이러한 제안에 동의했다. 사카모토는 나가사키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서구 정치 체제를 공부했다. 그는 특히 유럽 헌법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 권력은 천황의 궁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법안은 중.참의원 양 입법의회에서 '총의에 근거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헌법이 세워지고, 고위직은, 더 이상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일본에 이런 정치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사카모토의 출신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대단한 문서였다. 이 문서의 많은 부분이 1년 후 바쿠후 통치를 종식시킨 메이지유신의 서약 헌장에서 채택되었다. 정치 자유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대부분 사쓰마와 조슈에서 일어난 반(反)반쿠후 반란 세력들이 천황과 그의 신하들을 정치적 명분에 직접 끌어들이면서 근대적 형태의 전제주의가 출현하게 된다. 바쿠후 정부의 종말은 사카모토가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쿠후 말년의 교토는 음모자, 자객들, 떠도는 검객들로 가득 찬 무법천지였고 그들 모두가 문제를 일으키며 다녔다.

 

Chapter 2.

 

문명개화

: 1889년 2월 11일은 일본의 신화적인 첫번째 천황이 천황 가계를 설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 동시에, 일본이 세계 열강에 당당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날이기도 했다. 이렇게 과시적인 행사의 의식은 화려했으며, 메이지 일본 특유의 정신분열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의 핵심은 바로 고대 일본 제국 통치 형태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1868년에 헌법 제정을 공약한 이후, 이제 비로소 진정한 헌법을 갖게 되었다. 프로이센 헌법에 근거한 이 헌법은 서구 세계에 일본이 이제 근대 민족 국가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치외법권과 같이 일본 국토에 미국인과 유럽인의 특원을 가능케 하는 불평등조약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메이지 헌법은 국회나 의회의 선거를 그 다음해부터 시행토록 인정하고 있었지만, 정부 각교의 선출에 있어 정당은 아무런 언급을 못했다. 그 당시 메이지 헌법에서 규정한 일본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병약한 어린아이였다. 헌법 정신에는 독일과 전통 일본 전제주의가 섞여 있었다. 결국 가장 위험한 것은 그 모호함이었다. 1870년대의 일본은 근대 시장 경제의 시작을 경험하고 있었다. 메이지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는 단순히 부유한 국가가 아니라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 당시 메이지 일본은 경제적으로 근대 국가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남서쪽 출신의 옛 무사들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들의 강력한 국가보호의식 때문에 민주주의는 그 탄생부터 방해를 받았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다. 문제는 전제적 통치였다. 전제적 통치에 맞서기 위해서 존 스튜어트 밀이나 애덤 스미스싸지 읽을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농부들은 전제적 제도 자체를 반대해서 봉기한 것이었다. '문명 개화'의 형태나 외양은 언제나 정치적 슬로건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슬로건이었다.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양이 중요하다. 메이지 개화에는 귀족적이면서 우스꽝스럽고 융통성 없는 면이 있었다. 메에지 시대의 특징 중 또 한 가지는 고기를 많이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불교의 금기 사항을 단번에 파괴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최고의 지식인 후구자와 유키치가 육식이 일본의 체질을 개선할 것이라고 제안하자 곧바로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곧 육식이 개화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승격되었다. 서구화가 모두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정치적 계산에서 연유한 거도 아니었다. 메이지 지식인 몇몇은 일본을 보다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바꾸고자 서양 사상을 흡수했다. '문명개화'에는 다른 아시아인들의 후진성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일본이 이전에 중국 문화권의 일부였다면 이제는 개화된 서양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일본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고도 문명사회의 표시였다. 중국을 끌어내리는 것은 곧 일본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민족 통합의 새로운 의미를 일본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 정복을 위대함과 근대성의 궁극적인 표시라는 문명개화 사상의 어두운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부국강병'이라는 또 하나의 메이지 슬로건의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군대가 중국의 청 제국의 군대를 물리치기 직전에 서양과의 불평등조약도 폐기되었다. 일본 군대의 근성을 입증해보임으로써 일본이 중국에게 불평등조약을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 통합, 국가의 생존과 민족읜 번영을 위한 다윈주의자들의 투쟁, 19세기 후반, 전세계를 풍미한 테마였다. 모든 곳에서, 새로운 국가가 창조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정의되었다. 각 나라에서 이 이슈들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각 국가의 입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제각가 달랐다. 1873년부터 건강한 일본인 남성은 3년간 군대에서 그리고 4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에게 그것은 서구화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무장한 군대가 메이지 일본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근대성을 겪는 통로였다. 사무라이의 미덕은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군복을 입고 전국을 순회하는 천황에 대한 충성과 복종은 가장 높은 형태의 애국심이었다. 메에지 시대에 신토는 점차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마침내 국가의 신토가 되었다. 헌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의식은 정치적 권리에 기초하지 않고, 그 자체가 일본이라는 발상의 국가 신토를 통해 천황제도에 대한 종교적 숭배에 뿌리를 두었다.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신으로서 추앙받던 황제에 대한 생각은 일본 전통에서 이미 급격하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메이지 군국주의의 정점은 1904년 러시아 함대에 대한 진주만식 기습으로 시작된 러시아와의 잔혹한 전쟁이었다. 40년 후(태평양전쟁)의 미국인들처럼, 러시아인들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감히 서구 강대국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전쟁 1년 후, 수십만의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이 유례없는 잔혹함의 극치를 보인 전투에서 사망했다. 러일전쟁은 일종의 제1차 세계대전의 리허설이었다. 도코의 승리 분위기는 더 이상 1895년처럼 축제 분위기가 아니었다. 몇 가지 예에서 일본의 분위기는 매우 흉폭하게 변했다. 

 

Chapter 3.

 

에로, 그로, 난센스

: 1920년은 많은 일본인에게 최고의 해였다. 지구 저편에서 다른 이들이 싸웠던 제1차 세계대전이 그들에게 행운이었다. 또한 보너스로 몇몇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즉 연합군에 참여하여 중국과 북태평양에 있던 독일의 식민지를 거머쥠으로써 일본 제국의 입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메이지 시대 후기에 드리워졌던 강압적인 분위기는 모두 걷혔다. 다이쇼의 도쿄는 바이마르 베를린을 떠올리게 하는 수선스러운, 때로는 허무주의적인 쾌락설로 기록된다. 이는 훗날 에로틱의 에로, 그로테스크의 그로, 그리고 그 자체로 의미가 통하는 난센스로 요약되는 문화를 낳았다. 몇 가지 예에서, 베를린과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 이상이다. 다이쇼는 급진적인 정치의 시대였지만, 예술적 실험주의와 내적 성찰의 시대이기도 했다. 왜 이런 자유분방한 일본의 바이마르 정신은 1932년 즈음에 손상되었나? 문제는 러일전쟁을 결말지은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여 폭동이 발생했던 1905년에 이미 명백해졌다. 겉보기에 시위는 단순한 대외강경주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목적 애국주의(쇼비니즘) 이상의 것이 있었다. 정부가 대중적인 대표나 심지어는 동의도 없이 통치할 경우, 반란은 한 가지 형태는 통치자들보다 더 국가주의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국내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가 국외의 제국주의 요구와 상당히 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기 다이쇼 시기에는 의회민주주의가 성립될 기회가 있었다. 1918년 쌀 폭동은, 선거로 선출된 정당 정치가인 하라 케이라는 한 하원의원을 중심으로 초지 정부의 기초를 마련하도록 해주었다. 이는 새로운 산업 시대에 의해 소외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좌절을 토로할 기회였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물론, 심지어 일본의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민주주의는 상대적인 용어였다. 1923년 자유를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2년 후, 영국 상류사회의 예절을 추종하는 부유한 친영파였던 가토 다카아키가 이끄는 정부에서, 마침내 고정 수입이 있는 25세 이상의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 세기 이전의 일본이 어땠는지, 다른 아시아 지역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볼 때, 이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가토는 몇 년 후 놀랍게도 자연사했다. 한 장군이 대행하는 짧은 과도기를 거친 후, 진보 정당 민정당의 당수인 하마구치 오사치에게 정부는 맡겨졌다. 그는 지역선거에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고, 노동자-자본가의 관계를 재정비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마구치는 한 열성 우익분자에 의해 도쿄 역에서 저격되고, 몇 주 후 사망하였다. 약 1년 후, 중국과의 전쟁에서 급진적인 육군과 해군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는 쿠테타를 기도한 혈맹단이라 불리는 해군 장교 집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익 혐오의 상징으로 이누카이 정당 사무실과 일본 은행은 폭파했고, 두 명의 사업가도 살해되었다. 그로써 정당 정치의 경험은 끝났다. 다이쇼 민주주의도 옹호자가 부족했다. 근대 일본 초기에 개인주의자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입증한다. 바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이러한 감정들 때문에 그들은 국가통합과 천황숭배 선전에 저항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경한 좌익 세력과 과격한 우익 세력이 서로 합쳐졌다. 그들이 의회의 권위를 보호하려는 시도들이 궁극적으로 효과가 없어지자 그들은 관료와 왕실, 군대의 적들의 쇼비니즘에 영합하게 되었다. 

 

Chapter 4.

 

아, 우리의 만주

: 일본의 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우익 국수주의자들은 여전히 미국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는 '대동아전쟁'이란 전쟁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 이름은 일본이 서구 제국에서 아시아를 해방하는 전쟁을 의미한다. 자국의 전시의 과거에 대해 비판적인 좌익 세력들은 일본인에 의한 전쟁을 1931년 만주학살로 시작된 식민지 정복의 연속으로 보고, 그것을 '15년 전쟁'으로 생각한다. 누가 무엇을 전쟁이라고 부르는가에 상관없이 1931년에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국수주의적 공격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에 일어났다. 그 이전에도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중국 군벌이 만주를 반독립적인 통치지구로 다스리고 있다 하더라도 일본인이 이미 강력한 지위에 있었다. 중국인은 만주를 중국의 한 부분으로 보았지만 일본인은 그러한 효력을 지닌 이전의 조약들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일부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만주를 누구의 소유도 아닌 무법지라 보고 일본이 그곳에 질서를 세울 것이라고 믿었다. 1930년대 만주엔 호전적인 일본 장교, 우익 몽상가, 혁명적인 부랑자들이 득실거렸다. 1932년 정당내각 체제를 종식시켰던 이누카이의 암살은, 물론 일본에는 나치당이나 히틀러가 없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1933년 독일의 나치 집권에 비견되는 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일본 문제들은 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정점이 나약하고 분화되어 있다는 데서 나온 결과였다. 일본은 결코 통합된 국가가 아니었으며 왕실, 군대, 관료, 의회의 파벌로 나뉘어 지배되었다. 이들은 외부의 적들에 대해서 열정을 나타냈으며 그 열정만큼 서로가 격렬하게 싸웠다. 1932년까지 권력은 왕실, 관료, 군대, 의회에 분배되어 있었다. 의회는 항상 가장 약한 고리였으나 1920년대 정당 내각을 통해 그 힘을 키워왔다. 정당 내각이 끝나게 되면서 일본 정치는 왕실의 신하들을 비롯해 육군과 해군 장교 그리고 관료가 하나가 되어 이끌어 가게 되었으며, 이들의 결정은 종종 광신도적 부하들에 의해 강요되기도 하였다. 의회 정부가 상대적으로 쉽게 질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전의 힘이었다. 중국에서 행한 군사 공격은 초기 단꼐에서부터 일본에서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1930년대의 경제적 불황은 성장해가던 중산층을 파괴했으며 부르주아 정치마저도 황폐하게 만들었다. 모든 상황이 다이쇼 시대의 상대적 자유주의에 회의를 품게 하였다. 쇼와 초기는 메이지 후기의 가장 호전적인 시대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낭만적인 열말, 민족주의, 경제대공황 시대의 불안 등 이 모든 것이 만주 프로젝트에 쏟아부어졌다.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전문가들도 만주가 없다면 불황으로 쇠약해진 일본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이라기보다 동경에 가까웠다. 그러나 초기 무역 붐 이후에는 엔 블록이 일본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를 고갈시키는 원인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가장 정도의 약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실상 일본인들이 아무리 예의를 갖춰 중국의 마지막 활제를 떠받들었다고 해도 만주국은 꼭두각시 구가조차도 되지 못했고 단순한 식민지에 불과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상태에 대해 끈질기게 반대하였고 국제연맹에서도 만주사변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국제 명사로 이루어진 조사단을 만주국에 파견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애통하게도, 일본의 이 모든 형태에 대해 리턴 경이 이끄는 국제연맹만주조사단은 일본의 주장이 그럴싸하게 꾸며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일본은 자기 중심적 선전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즉 서구 열강이 중국과 합작하여 일본을 매도한다는 것이다. 가장 군국주의적인 시대였을 때조차 일본은 획일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래된 정치적 분화와 갈등은 여전히 잔존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상황은 그들이 국내의 새로운 질서에 동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도았다. 만주국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많은 좌익 이상주의자들에게 만주국은 놀이터였다. 일본의 고집스러운 반체제 인사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이 있었다. 그 선택은 바로 '전향(轉向)'이었다. 군대도 일본의 모든 제도처럼 나뉘어졌다. 즉 황도파(皇道派)와 통제파(統制派)가 있었다. 만주의 책략가 이시하라 간지와 도조 히데키 장군을 비롯한 통제파는 서양처럼 총력전의 견지에서 미래를 내다봤다. 자본주의자와 관료에 대항해서 일본에서 폭력적 반란을 계획하는 것은 그들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관료와 대기업과 렵력하여 국가의 힘을 키우고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황도파 사람들은 쇼와 유신 같은 혁명을 원했다. 혁명을 통해 부패 자본주의자와 국체에 반대하는 적을 제거하고 신헌법 아래에서 군사 독재를 세우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불확실한 천황체제 수호자들은 항상 좌익의 반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 위협은 우익의 위협이었다. 동아시아 정치의 지속적인 특징은 처절한 파벌주의와 절대 통일을 장담하는 수사의 조합이다. 그것은 모든 독재주의에서 나타나는 악순환이다-하나는 항상 다른 하나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1937년 겨울의 난징대학살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 전쟁에서 최악의 잔학 행위다. 난징대학살은 계획된 인종 멸절 작전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난징대학살의 짐승 같은 잔인무도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악한 사상주입의 결과이기도 하다. 수년 동안 일본인들은 중국인은 열등한 민족이며 일본인이 신성한 민족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것은 메이지 후기에 에도 후기의 생득설과 독일에서 차용해온 민족이론이 복합하여 만들어낸 군국주의적 괴물이 무시무시한 생명체로 분출된 것 같았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던 때에도 만주국과 소련 국경에서 일어난 작은 접전들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대해서는 합의된 사항이 전혀 없었다. 옥신각신하던 중 만주에서는 한 번 더 큰 사건이 일어났다. 1938년 여름, 조선, 만주국, 소련의 축축하고 안개 낀 국경 근처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소련군이 두만강의 만주국 편에 요새를 쌓고 있었고 일본인들은 그들을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2만여 명의 일본군이 굶주림과 목마름, 질병, 그리고 러시아의 폭격을 맞고 죽었다. 북쪽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은 무너졌다. 그 이후 모든 작전은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Chapter 5.

 

서양과의 전쟁

: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에서 일본의 어뢰와 급강하 폭력기가 수많은 미국 함대를 쳐부수었을 때, 천황과 그의 부하들에게는 환희가 극치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진주만에서 싱가포르, 네덜란드령의 동인도, 필리핀으로 옮겨 가자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성전은 이제 더 이상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37년 첫 승리 이후, 일본인들은 중국에서 벌이는 '성전'으로 인해 점점 더 어여룸에 처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정말로 겉보기에 끝날 것 같지 않은 전투와 싸움에는 어떤 희열도 없었으며, 끝내 중국의 항복이라는 바라던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아시아 사람들은 열등하여 신성한 제국의 아들들이 될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보면서, 아시아인들을 상대로 싸우는 한, 그런 신아시아 질서에 대한 선전은 알맹이가 빠진 것이었다. 서구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이었지만, 도쿄는 매우 서구화된 곳이었다. 다만 1941년에 1945년 사이에 일본인들의 생활에서 추방되었던 것은 '앵글로색슨'과 연계되는 서구였다. 이미 거의 그 입지가 약화되어 있던 정당들은 1940년대 해체되고 대정익찬회로 대치되었다. 일본 정신은 마치 종교적 광신도와 같았다. 인종적 순수성 역시 독일에서 그러했듯이 일본에서도 전시 선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일본인들은 거의 100여 년에 걸쳐 서구화를 경험한 후, 이제는 이를 악물고 아시아인이 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신아시아주의도 지나치게 포장된 허구였다. 신일본 질서라는 것은 다이쇼 시기 지식인들의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했듯이, 서구의 사상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파시즘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고 보다 동아시아적 사고 방식에도 접목된 것이었다. 진주만을 공격하기 이전에, 이들 중 적어도 몇몇은 일본의 전국민의 자살이라는 임무를 발동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는 히틀러 총통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와 달리 일본 정부의 최상층부의 허약함 혹은 마비 �문이었다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서구와 전쟁을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 전쟁을 막을 힘이나 의지는 혹시 천황 자신이라면 몰라도 그 외 아무에게도 없었다. 일본인들이 인종근절 정책을 쓴 적은 없지만 아시아에서 성전은 가공하리 만티 잔학성을 띠었다. 성전은 일본인들에게도 고통을 주었다. 일본 본토에서도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국내외에서 일본 군국주의 정부의 잔인함은, 선전을 통한 평화와 사랑이라는 이율배반적 형태로 더욱더 나쁜 인상을 주었다. 일본인들도 동아시아 제국이 군사력만으로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서구 식민지 억압에서 민족 해방이라는 공약에, 일본 본질주의를 독특한 보편주의로 바꾸어 그것과 함께 결합시켰다. 중구과 서구의 문화를 수세기 동안 흡수해온 일본이 이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의 문화를 수용하도록 강요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결코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문화의 독특성이란 것은 수출될 수 있는 것이 나리다. 아무튼 아시아인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일본으로서 중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그런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자기들 전선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항복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자살 특공대를 위한 잠수함과 전투기가 특별히 제작되었다. 자살 전략은 좀더 나은 전황을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일본과 타협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에도 시대 후반에 그 씨가 뿌려져서 1930년대 후반에 민족의 심리적 정서가 된 일본의 독특한 사상이 외향적인 공격성에서 순전히 자기 파괴성으로 전도되었다. 이 같은 비참함을 막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은 바로 천황이었다. 천황은 자신의 신성한 통치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강구하기로 결정했다. 포츠담선언은 무시되고 일본의 마지막 결전을 위한 준비는 계속되었다. 8월 6일 트루먼은 미국의 특별 병기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히로시마 폭격 3일 후, 나가사키도 초토화되었다. 결국 이렇게 결말이 났다. 거의 반세기의 전쟁 이후 일본이 완전 파괴에 직면한 그때, 일본의 정체(政體)를 정의해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도달한 것이다. 천황은 연합군의 조건을 수요해야한 한다는 '신성한 판단'을 내렸다. 천황은 더 이상 말없이 떠났다. 일본은 파괴되었다. 

 

Chapter 6.

 

도쿄 부기우기(boogie-woogie)

: 1945년 8월 30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요코하마 근처의 아쓰기 해군 비행장에 도착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관한 전문가각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일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험 링컨, 예수의 신념을 좇아 그는 이 미개한 동양의 국가를 노예제와 봉건제에서 구제하고, 이 나라 국민들을 평화로운 민주 시민으로 바뀌놓고자 하였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래로 가장 급진적인 변혁이었으며, 서구화를 향한 또 하나의 새로운 여명이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임무는 단순한 정체 개혁보다 더 심오하고 거대한 것이었다. 일본의 문화 그 차제, 즉 끈질긴 잡초처럼 수천 년 동안 자라온 일본 정신의 총집합체를 개혁하고, 정화하여, 다시 만들고자 한는 것이었다. 점령 초기에 일본 문화에서 문제짓되는 모든 거의 키워드는 '봉건주의'였다.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민주주의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3S'에 관련되었다. 일본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미국의 시도에는 소박함, 단순함과 함께 다분히 이상주의가 존재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상주의는 위선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미국 문화의 전파는 비공식적이고 자발적인 기반 위에서 전해질 때 가장 효과적이었다. 약 10년간에 걸친 문화적 박탈감과 군사 선전 행위 때문에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무엇이든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것에 굶주려 있었다. 동경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끼며 매춘부들은 전후 일본 사회에서 미국식 상업 문화의 개척자 틈에 끼여 있었다. 대중적인 미국 문화를 경멸하는 지식인들은 프랑스 문학으로 발길을 돌리며 위안을 찾았다. 어쨌든 문화는 사실상 관심을 돌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천황 중심의 '고쿠타이(국체), 즉 시민의 자유를 짓밟아온 신성한 국가 정체였다. '고쿠타이'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우익 이론가아 전범들, 그리고 극우적 천황가의 아들들뿐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사람들은 미국의 외교관이 '중도파'로 이름 붙인 요시다 시게루와 같은 이들이었다. 히로히토 천황가의 가족들은 그가 퇴위하고 전쟁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기를 바랐다. 그 당시 행해졌던 여론조사는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이에 따를 것이며, 더 나아가 환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다른 의견을 나타낸 것은 다름 아닌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쇼군처럼, 맥아더는 자신의 권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천황을 일종의 성전과 같은 상징적 존재로 이용하고 싶어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먼저 천황에게서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신비감을 제거해야 했다. 이것은 제도적, 구조적 변화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신도 의식은 국가의 업무와 분리되었고, 천황은 신성한 전제적 왕의 지위 대신의 '국가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천황의 공무 관계에 대한 조치도 이루어졌다. 1946년 1월, 히로히토 천황은 미국인 조언자의 말에 따라 그의 신성성을 포기하기에 이르고,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의 혐오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달 후, 일본은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만들었다. 물론 그 탄생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는 새 헌법을 극구 혐오하는 작지만 집요하고 영향력 있는 집단이 있었다. 바로 강경 우파였다. 그들은 단순한 상징으로서 천황의 새 지위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장 급진적 개혁이었던 9조 개혁, 즉 자국의 군대를 유지하며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주권을 빼앗는 것에 대해서 더 큰 분노를 표출했다. 여하튼 1946년에는 강경 우파가 소외되어다는 것이 그다지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다시는 또 다른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초기 이상주의의 이 위대한 상징은 곧 메이지 시대의 주요 문제들을 영속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일본의 국내외에 많은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정작 필요한 곳에서 일본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일본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에는 역사 반성도 포함된다. 징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백히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연합군 총사령부가 천황제를 보호함으로써 이 모든 것의 가장 주용한 부분, 즉 정치적 책임에 대한 문제, 고쿠타이의 본질, 제국주의 이상과 아시아인들에 대해 저지른 범죄 사이의 관계 등은 감추어지고 말았다. 만일 군국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일본인이 그들의 천황과 같이 무죄라면, 그들은 희생자들인 것이다. 도쿄 재판에 관심이 잇었던 일본인들은 바로 헌법 제9조가 개정되길 바라는 이들이었다. 일본이 다른 참전국보다 죄가 더 크다는 인식에 반대하던 우익 역사가, 저널리스트, 정치가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정치적 선전이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좌익 세력에 의해 앵무새처럼 반복되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들은 도쿄 재판을 통해 나온 역사적 교훈을 무시했다. 1947년 2월 최고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경제를 침몰시킬 것을 우려하여, 총파업을 금지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요시다와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연합군 총사령부 내에서 '현실주의자'들이 '이상주의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점령 초기의 격려와는 다른 이런 조치들에 대해, 일본의 좌파들은 미국에 배신당한 느낌을 받았다. 새 엘리트층은 여러 면에서 1920년대의 구 엘리트들과 비슷했지만, 그들처럼 권력에 굶주린 장군들 간의 경쟁 같은 것은 없었다. 이듬해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일본 경제는 수직 상승하게 되었다. '역코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임무 중 많은 부분은 깜짝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좋든 싫든 간에 이제 그의 이상주의는 헌법에 고이 간직되었다. 일본인들은 완전한 참정권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차별 없이 행복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남기고 간 유산에는 몇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평화주의는 일본인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완전히 의존하게 만드는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이는 우파들의 보복주의를 되살아나게 했으며, 합의가 있어야 마땅한 자리에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양극화된 정견이 대두되었다. 그 문제는 헌법 그 자체였다. 어떤 면에서, 일본은 그들이 만들고자 혼신을 다했던 국가상의 왜곡된 반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상이 높았기에 그 결함도 휠씬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Chapter 7.

 

1955년, 그리고 그 모든 것

: 이 시기에 일본은 과거 서구식의 제국 열강이 되려고 노력했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뜻으로, 아시아 이웃 나라들의 편에 섰다. 다시는 그들과 전애을 벌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 햇다. 이것은 결국 군사력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좌익 세력에게 있어 맥아더 장군의 헌법 9조는 성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기시와 같은 우파는 냉전 체제에서는 미국의 편이 되기를 원했지만, 천황의 새로운 지위, 세속적 지위에 관계된 헌법 9조와 1조는 모두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다와 같은 실용주의 노선의 보수주의자들은 일본이 당면 문제에 충실하는 동안 미국이 공산주의들과 싸우는 것에 만족스러워했으며, 헌법에 관한 논쟁이 사라지기만을 바랐다. 기시를 선도루 하는 우파는 여전히 일본의 전쟁이 정당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문제는 헌법에 관한 정치적 논쟁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좌파가 헌법상의 평화주의를 논하기 위해 전쟁 기록에서 일본의 야만성을 언급할 때마다, 우파는 일본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정하거나, 적어도 다른 참전국보다 잘못한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1955년에는 사회당이 잠시 기회를 잡은 듯했다. 사회주의의 우파와 좌파는 평화를 유지하며 일본사회당(Japan Socialist Party, JSP)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는 자유당과 민주당을 자극하여 많은 상호 비방과 공격 후에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 Party, LDP)을 결성하게 만들었다. 자유민주당은 재빨리 1955년 체제를 자민당 체제로 만들었다. 전후의 붐은 미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두 아버지에서 비롯된 자손이다. 다시 말해, 더글라스 맥아더와 조지프 도지도 전쟁 전의 고쿠타이 체제가 자민당 체제로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이행하도록 하는데 일본의 전시 관료들 및 보수주의 정치가들에 버금가는 비슷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 

 

에필로그

 

전후의 종결

: 일본인들은 오로지 외압만이-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데도 구태의연한 방식에만 만족하고 있는-이 사회르 조이고 있는 부속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는 하지만, 필자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자유로워져서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흑선이 필요없으므로 마침내 흑선과 결별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만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