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제1강 한신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
한신은 서한 초기에 최소한 두 가지 분야에서 '으뜸'이었습니다. 첫번째 '으뜸'에 대해 말하자면, 한신은 서한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신은 서한에서 처음으로 죽임을 당한 공신이었습니다. 한신의 죽음은 서한 최초의 정치 미소터리 사건입니다. 초한전쟁이 끝나자 공이 가장 컸던 한신은 유방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항우가 죽은 뒤 유방은 바로 한신의 병권을 빼앗아 버렸고, 기원전 201년에는 모반이란 죄명으로 한신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유방은 한신을 죽이지는 않고 회음후로 강등시켰습니다. 그렇다면 한신은 어떤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했을까요? 한나라가 개국한 지 11년, 즉 유방이 한왕에 오른 지 11년째이자 황제가 된 지 6년째 되던 해에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진희란 자가 모반을 일으킨 것입니다.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유방은 대로하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토벌하러 갔습니다. 이때 한신과 진희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한신은 진희에게 편지를 보내, "그대는 반란에만 신경쓰시오, 난 수도에서 그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수감자들을 풀어 황궁을 공격해 수도를 지키던 여후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한신의 죽음은 '위대한 공적' 탓만으로 돌릴 수도 없고, 토사구팽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유방은 그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그가 모반에 가담했기 때문에 여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봐야 합니다. 춘추전국 시대에서 진과 한의 교체기까지, 사회에서 '사(士)'라고 부르는 계층이 있었습니다. 사는 하층 귀족을 말합니다. 귀족은 천자, 제후, 대부, 사 이렇게 네 등급으로 나뉩니다. 천자, 제후, 대부는 모두 봉토(封土), 봉국(封國)을, 봉읍(封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사는 귀족이었고, 보통 한 가지씩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재주 중 무예가 뛰어나면 무사라 불렸고, 문채가 뛰어나면 문사라 불렸습니다. 또한 지략이 뛰어나면 모사, 말솜씨가 뛰어나면 변사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뛰어난 책략과 말솜씨로 제후나 권세가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며 책략을 팔았습니다. 기원전 203년, 한신은 제나라의 72성을 무너뜨린 후 유방을 협박해 제왕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유방과 항우 다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오릅니다. 이 상황은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한신은 왜 유방을 배반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괴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의 마차를 탔다면 그의 환난을 짊어져야 하며, 남의 옷을 입었다면 그의 걱정을 마음에 품어야 하고, 남의 음식을 먹었다면 그의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 간단한 보은이나 작은 은혜를 크게 갚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보답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중국 문화에서 음식은 생명의 근원이므로 먹을 것을 주는 행위는 생명을 주는 행위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중국 전통 문화에서 옷을 함께 입는 것은 매우 친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옷은 신분, 심지어 성적, 기분을 대표합니다. 옷은 신체를 대표하는 물건입니다. 만약 옷을 남에게 빌려 준다면 이는 몸을 서로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2강 한신의 불운했던 전반생
한신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기]에는 한신의 전기인 [회음후열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1. 한신은 일찍이 포의였다는 점입니다. 포의란 관직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관직이 있는 사람은 비단옷을 입을 수 있었으나, 관직이 없는 사람은 포(베)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2. 한신은 가난했다는 점입니다 3. 한신이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또한 한신이 귀족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당시에는 귀족만 검을 차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로 미루어 한신이 몰락한 귀족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신은 어떻게 인생을 바�을까요? 한신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를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한신은 참전한 후, 한 번도 버젓한 일자리를 얻은 적이 없었습니다. 맨처음에는 시위, 두 번째는 접대 책임자, 세 번째는 사무장이었는데 모두 그의 재능을 펼칠 수 없는 직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 한신의 운명이 바뀌었을까요? 한신의 추천자이자 은인은 바로 소하였습니다. 유방은 길일을 택하고 재계를 한 다음, 단을 만들고 예를 갖춰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전군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다들 대경실색함 투덜거렸습니다. 사실 이상하기는 이상했지요.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영하기 전까지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유방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는 아직 한신이 뛰어난 군사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정치 분석은 그의 웅대한 지략과 뛰어난 식견을 잘 보여 주지만 전쟁은 실전입니다. 한신이 정말 전쟁을 잘하는지, 과연 유방을 도와 천하를 쟁취할 수 있는지는 직접 실전을 통해 검증해야만 합니다.
제3강 한신의 공적과 과실
한신은 대장군으로 임명된 후, 즉시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한나라 군사를 이끌고 관중을 평정하고 한과 위를 쳐부순 다음, 위왕을 포로로 잡고 하열을 생포하여 연일 개선가를 울렸습니다. 이 중 가장 휘황찬란한 일전이 바로 조와의 전투입니다. 당시 한신 같은 대장군은 반드시 대장군의 도장과 병부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병부는 호랑이나 날짐승을 조각한 것으로 가운데를 갈라 둘로 나�습니다. 나눈 병부의 반쪽은 병사를 이끄는 사람이 갖고, 다른 반쪽은 결정을 내리고 지휘하는 사람이 가졌습니다. 지휘자는 출병할 때, 반을 갖고 군대로 가서 나머지 반과 맞췄습니다. 이런 행위를 부라고 합니다. 이 두 조각의 부가 맞으면 이를 '부합(符合)'이라 불렀습니다. 유방은 몰래 한신의 군영에 가서 관인과 병부를 들고 나온 후 병사를 움직였습니다. 유방과 항우의 천하 쟁탈전에서 한신은 유방을 위해 뛰어난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왜 반목하게 되었을까요? 한신의 잘못을 애기하려면 제나라 전쟁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제나라 전쟁에서 한신은 2가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잘못은 그가 대세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본래 유방은 한신에게 출병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이기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역이기는 세객이자 변사로 청산유수 같은 세치의 혀를 가지고 제나라 왕을 설득했는데, 이게 통한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는 한나라에 항복을 하기로 하고 항복 조건에 대해서도 합의를 했습니다. 한신이 계속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자 제왕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이리하여 한신은 유방의 전략 구도를 깨뜨려 버린 셈이 되었지요. 평화롭게 제나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로 볼 때, 한신은 대세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개인의 공을 더하기 위해 '평화 사절' 역이기의 공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것입니다. 유방은 항우와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어서 괜히 일을 벌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제나라에 문제가 없다면 재빨리 형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방의 전략적 구도를 깨뜨려 버렸으니 이것이 바로 한신의 첫 번째 실수입니다. 그럼 두 번째 실수는 무엇일까요? 이 실수 역시 제나라에서 출발합니다. 한신은 제나라를 무력으로 함락시틴 후 유방에게 서신을 전했습니다. 한신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형택에 있던 유방은 항우에게 겹겹히 포위당해 있었습니다. 노심초사하며 한신의 원군을 기다리던 차에 제왕으로 임명해 달라는 편지를 받은 것이지요. 역사서에는 씌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유방의 마음속에 한신에 대한 미움이 뼛속 깊이 박혔음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리하여 한신은 제왕이란 직함을 얻었으나 둘 사이에는 화근이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유방은 한신을 제왕에 봉했지만, 한신은 작위를 받은 후에도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유방은 항우에게 포위당해 대단히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제후들에게 구조 요청을 했지만 제후들 중 누구도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방은 제후들에게 봉토와 관직을 약속하며, 항우만 멸하면 여기는 누구, 저기는 누구에게 주겠다고 하고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유방이 이렇게 말하자 제후들은 부대를 소집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항우와 해하에서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초한전쟁의 최후의 일전이었습니다. 초한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유방은 시종 몇 명망 이끌고 제왕 한신의 군영으로 잠입하여, 거기서 한신의 관인과 병부를 가져와 다시금 한신의 군사 지휘권을 빼앗았습니다. 이리하여 제왕 한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병권을 빼앗긴 채 오직 제왕이란 직함만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방은 이 직함마저 그에게서 빼앗고자 했습니다. 유방은 즉위 후 다시 논공행상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유방은 한신을 초왕으로 봉했습니다. 이리하여 한신은 군사 지휘권이 없는 제왕에서 군사 지휘권이 없는 초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신 역시 초나라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금의환향하게 해 준 것이지요. 고향으로 위풍당당하게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라는 배려이기도 합니다. 초나라에서의 생활은 첫날부터 한신에게 맞았습니다. 그러니 유방과 한신의 군신 관계가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갔다면 두 사람은 아주 평화롭게 잘 지냈을 테고, 한신도 비참한 말로를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신은 왜 이렇게 좋은 나날을 차 버렸을까요?
제4강 한신의 성공과 실패
한신은 제왕에서 초왕이 되어 금의환향한 후 세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그는 소싯적 그에게 밥을 나눠 준 여인을 찾아 큰돈을 주었습니다. 둘째, 일찍이 밥을 얻어먹었던 남창 정장에게 가서 백 냥을 주었습니다. 셋째, 예전에 그에게 모욕을 줬던 저잣거리의 불량배를 수소문하여 찾았습니다. 한신은 초왕이었으니 그 불량배를 죽이는 건 개미를 눌러 죽이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신은 그를 주위로 임명했습니다. 중위는 수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관직으로서, 초나라의 검찰청장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한신이 이 시정잡배를 살려둔 것과 유방이 한신을 살려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유방에게 한신은 영원한 골칫거리이자 우환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방은 조만간 한신을 처리하기로 하고 기회만 엿보았습니다. 한신이 초왕에 오른 지 2년 째 되는 해, 한신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 모반을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 이 보고가 무고라고 생각됩니다. 이때 한신은 모반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으며, 모반을 일으킬 조건도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이 보고서를 받아들자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형과 유방은 남쪽 지방을 순수(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라다니던 일)하며, 조용히 한신을 체포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한신이 이때도 큰 권세와 높은 명망을 갖고 있었으므로 가볍게 볼 수 없었음을 뜻합니다. 또 유방이 스스로 한신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자신이 없었다는 것도 알려 줍니다. 문제는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한신 스스로 실수를 지질렀다는 사실입니다. 유방은 명을 내려 남쪽 지방 순수를 전국에 통보했습니다. 한신은 통보를 받자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불안감에 한신이 종리매의 머리를 빌리고자 한 계책은 완전히 오판이었습니다. 한신의 잘못은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우선 한신은 친구를 팔아 영화를 구하고자 하여 도덕적인 오점을 남겼습니다. 한신은 도덕적으로 지고 들어갔으니 이것이 그의 첫 번재 실수입니다. 둘째, 유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종리매의 머리를 벰으로써 벌써 심리적으로 지고 들어갔습니다. 이는 벌써 자신과 유방을 동등한 위치에 놓지 않고, 유방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한신은 심리적으로 지고 들어갔으니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잘못입니다. 셋째, 한신은 자진해서 항복했습니다. 이는 전술적인 패배입니다. 한신과 유방 사이의 형세는 본래 비교적 동등하거나 심지어 한신이 약간 위위에 있었지만, 한신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유방은 한신을 완전히 압도하게 되었고, 한신은 친구를 팔아서 자신을 해치는 꼴이 됐습니다. 유방은 국경선에 말을 세우고 한신을 체포한 후, 자신의 수레에 태우고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순수를 중도에 그만두고 수도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유방은 이때도 한신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한신이 모반을 일으켰다는 증거는 확실히 부족했습니다. 또한 건국 초기에 아무 증거도 없이 개국 공신을 죽이면 분명 나중에 말이 많으리란 것도 잘 알았습니다. 유방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한신을 가도고 그의 콧대와 패기를 꺽은 다음 천하에 대사면을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신도 자연스럽게 사면을 받았지만, 초왕에서 두 등급 아래인 회음후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신은 왜 비참한 결망을 맞고 말았을까요? 먼저 회음후로 강등된 후의 한신의 반응을 살펴봐야 합니다. 한신은 회음후로 강등된 후, 매우 불쾌해하며 병을 핑계로 조정에 출두하지 않고 장기간 병가를 냈습니다. 한신의 병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실제로 병이 났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화병에 걸렸으리라는 주장입니다. 한 10년, 진희가 거록군의 군수로 임명되었습니다(군수는 훗날 태수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진희는 거록에 간 후 대왕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방은 대로하여 병사를 이끌고 진희를 토벌하러 갔습니다. 여후, 유영, 소하는 남아서 수도를 지켰습니다. 이때 한신은 수감자들을 풀어 주고 황궁을 공격하게 하여, 여후를 생포하거나 모살하고자 했습니다. 여후는 소하의 계략에 따라, 한신에게 황제가 전투에서 대승하여 군신들이 모두 축하차 입궁하고 있으니 병환 중이라도 입궁하라고 전했습니다. 한신은 축하하러 입궁한 뒤 생포되어 결국 장락궁 종실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한신을 속인 사람이 바로 소하란 사실입니다. 한신이 유방의 대장군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소하의 적극적인 추천 때문입니다. 한신은 소하가 발굴한 인재였지만 소하가 죽이고자 하는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한신은 소하 덕분에 성공의 길을 걸었고, 또한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유방을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 모반을 꾀했습니다. 한신을 잡아 살해한 일은 모두 여후와 소하가 공모한 것으로 유방은 전선에서 이 상황을 전혀 몰랐습니다. 유방이 전선에서 수도로 돌아오자 여후가 그에게 알렸습니다. 유방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유방은 기뻐하면서도 가련해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5강 유방의 도약
황제의 명호는 시호(諡號), 묘호(廟號), 연호(年號), 능호(陵號) 네 가지가 있습니다. 능호는 황제의 시신을 매장하는 왕릉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황제를 능호호 부르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앞의 세 가지 명칭을 더욱 많이 씁니다. 연호를 쓴 예는 명대의 12대 황제 가정제, 13대 황제 만력제, 청대의 4대 황제 강희제, 5대 황제 옹정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 명칭은 시호입니다. 시호한 죽은 이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입니다. 한대에는 황제의 공헌이 대단히 크면 시호 외에도 묘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갖지는 않습니다. 이로 미루어 묘호가 시호보다 높다는 것을 조(祖)가 종(宗)보다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진나라 말기, 천하가 매우 혼란하자 각지에서 영웅호걸들이 일어나 진에 대항했습니다. 유방은 48세에 거병해 56세에 한 왕조의 개국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유방은 정말 황제가 되고 싶었을까요? 아닙니다. 유방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황제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미양궁이 완성되자 문무백관이 궁의 완궁을 축하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미앙궁에 와서 회의를 열면 항상 술판을 벌였고 취할 때까지 마셨습니다. 또 일단 취하면 누구의 공이 더 큰지 소란을 피우며 싸웠습니다. 유방은 기가 막혀 어쩔 줄 몰랐습니다. 숙손통이 유방에게 건의했습니다. 손숙통은 제자들과 함께 일련의 예절과 의례를 제정하고 한 달을 연습한 후에 유방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한 7년 장락궁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때는 의례에 따라 입궁하도록 했습니다. 의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을까요? 먼저 사의관(의식을 행할 때 식순이 바르게 진행되도록 감독하는 사람)이 '추(趨)'라고 소리칩니다. '추'는 잰걸음 치는 것을 뜻합니다. 사의관이 '추'라고 소리치면 모든 관원은 홀(笏,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말때에 손에 쥐던 물건)이 각각 하나의 열을 만듭니다. 그러면 황제는 어가(御駕)를 타고 천천히 들어와서 중앙에 앉았습니다. 다시 사의관이 '궤'라 외치면 모든 문무백관은 그 자리에 꿇어앉습니다. 그리고 사의관이 '배(拜)'라 소리치면 모두들 황제에게 절을 합니다. 그제야 술이 나오고 신하들은 잔을 듭니다. 사의관이 또 축하의 의미를 가진 말인 '수(壽)'를 외칩니다. 첫 번째 열에 서 있던 제후 왕이 열에서 나와 술잔을 들고 꿇어앉으면, 사의관이 또 한 번 '수'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다들 '우리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말합니다. 사의관이 '음(飮)'이라 외치면 다들 수을 마실 수 있고, '퇴'라 소리치면 다들 물러납니다. 그 다음 문관이 열에서 나와 꿇어앉고 절하고 술을 마신 후 물러납니다. 다음으로 녹봉 이천석의 관리가 열에서 나오고, 그 다음은 육백석의 관리가 열에서 나와 절차를 거칩니다. 유방은 가난한 평민 출신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신도 이름조차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황제가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된 후 공무를 맡아 정장이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10리를 정, 10정을 향으로 정했는데, 정장은 촌장보다는 높고 향장보다는 낮은 하급 관리였습니다. 이때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유방의 생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유방이 진 시항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아내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유방의 장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유방이 황제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이 대택향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진승과 오광이 봉기를 일으키자 진 왕조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각지에서 잇달아 들고 일어났습니다. 유방이 살던 패현 백성들도 단숨에 봉기를 일으켜 패현 현령을 살해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새로 지도자를 뽑기로 했는데, 모두들 유방을 추천했습니다. 당시에 지도자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유방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패현에는 유방 외에 두 명의 인재가 더 있었는데, 바로 소하와 조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하와 조참은 지식인이었습니다. 지식인은 이것저것 생각하는 바가 많은 법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자 소하와 조참은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덜렁이에다가 망나니였으니 일이 잘못돼도 괜찮을 성 싶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방은 패현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자칭 패공이라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유방이 출세한 첫 번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출신이 비천했으나 운이 좋았습니다. 유방은 운도 좋았지만 그가 주동적으로 일을 맡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나중에 그는 반진 봉기군의 우도머리인 항량에게 의탁하는데, 그때 항량의 조카인 항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투를 치릅니다. 이는 유방이 도약할 수 있는 거대한 무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제6강 유방의 승리
진 이세 3년 10월, 유방은 함양을 점령하고 해상에 주둔했습니다. 이렇게 유방은 반진 전쟁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승리는 유방에게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유방은 처세의 대가였습니다. 유방은 진의 황궁에 머물지 않았을뿐더러 세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자영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둘째, 약법삼장을 만들었습니다. 셋째, 포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진의 백성들은 유방이 진 땅에 남아 왕이 되어 주길 바랐습니다. 유방은 이렇게 민심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만 보아도 유방이 성공의 문턱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와 동시에 유방은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당시 별로 유명하지 않은 모사가 그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유방은 이 제의가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바로 군대를 함곡관으로 파견했습니다. 항우는 이때 북쪽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북쪽의 전시 상황이 안정되자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당당하게 관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함곡관으로 들어서려 하자 유방의 군대가 그를 막았습니다. 항우가 이것을 참아겠습니까? 유방의 군대는 도저히 항우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함곡관을 정복한 항우군은 홍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상황이 유방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부대에 반역자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방이 항우를 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름없어서 유방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유방이 항우와 화해한 뒤 천하의 형세로 대체로 안정되었습니다. 천하가 안정되자 항우는 제후들에게 분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매우 불공평하게 왕을 봉했는데, 이때 유방은 한왕에 봉해졌습니다. '한'이란 칭호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한나라의 수도는 남정이었습니다. 남정은 지금의 산시성 한중시 부근에 위치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우선 유방은 그곳으로 보낸 다음, 원래 진나라가 있던 지역인 관중을 진에게 투항한 세 장군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이렇게 한 번에 세 왕을 봉한 뒤부터 이 지역은 삼진이라 불렸습니다. 항우의 목적은 세 왕에게 명해 유방의 행동을 원천봉쇄하고 한중 땅에 가둬 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방에게 상당히 불공평한 처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항우과 반목할 때가 아니란 걸 말입니다.
제7장 유방의 성공비결
유방에게 인재 활용은 가장 중요한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탁월한 리더십이 반증해 줍니다. 유방의 인재 활용법은 대략 8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방의 첫 번째 인재 활용법은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것'입니다. 유방의 두 번째 인재 활용법은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기용한 것'입니다. 유방의 세 번째 인재 활용법은 '투항자나 적의 배신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유방의 수하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항우 밑에서 일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우 밑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자 유방에게 도망쳐 왔습니다. 유방의 네 번째 인재 활용법은 '과거의 감정을 들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유방의 다섯 번째 인재 활용법은 '짐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유방의 여섯 번째 인재 활용법은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방의 일곱 번째 인재 활용법은 논공행상에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재를 쓰려면 전적으로 고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또한 능력에 상응하는 장려금이나 표창을 반드시 수여해야 합니다. 인재의 공헌을 확실히 인정해 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방의 여덟 번째 인재 활용법은 '은근히 압박하는 것'입니다. 항우는 어땟을까요? 그는 일단 누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주위 사람들 모두가 눈치 챌 정도로 얼굴에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달랐습니다. 그는 아주 교묘하게 상대방을 통제했습니다.
제8강 유방의 맞수 항우
유방이 항우를 이긴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출신 성분과 군사 동원력, 개인적인 매력으로 따지면 둘은 격이 다릅니다. 항우는 귀족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었으나, 유방은 빈민이자 부랑자였습니다. 유방과 항우의 첫 번째 차이는 유방은 포부가 원대했으나 항우는 근시안적이란 것입니다. 승리를 거둔 후, 유방과 항우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두 사람의 인물 됨됨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유방은 활달하고 대담했으나, 항우는 도량이 좁고 근시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두 번째 차이점입니다. 유방이 교양 없고 투박하다고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도량이 넓고 대담한 인물이었습니다. 항우는 어땠을까요? 그는 매우 속이 좁은 인물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의 세 번째 차이점은 유방은 마음이 독하고 악랄했지만 항우는 남녀의 정을 중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방은 매우 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망가던 중 수레가 무겁다는 생각이 들자 자식을 짐짝처럼 내팽개쳤던 인물입니다. 유방은 일단 누구를 의심하면 앞뒤 사정을 가리기 않고 반드시 죽여 버렸습니다. 반대로 항아는 남녀의 정을 매우 중시한 인물이었습니다. 세기의 장군이자 지도자, 패왕이었던 사람이 최후의 순간에 걱정했던 건 천하도 전쟁도 아닌 애마와 총애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항우의 성격은 후대에 많은 동정을 얻었습니다. 유방은 확실히 독하고 악랄한 사람이었으나 항우도 적지 않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만 유방과 항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항우는 살인을 남발했지만 유방은 꼭 죽여야 할 사람만 죽였다는 것입니다. 항우는 전형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주저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영웅다움을 드러냈습니다. 유방은 시대가 만들어 낸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시대 조류에 순응하여 시대가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으며 끊임없이 배움의 자세를 지켜 세기의 영웅으로 성장했습니다.
제9강 건국의 일등공신 소하
사실 소하는 냉정하고 주도면밀한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으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소하가 일등 공신으로 뽑혔다는 사실입니다. 소하는 설사 영웅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호걸 정도는 충분히 됩니다. 호걸로서의 소하는 최소한 식견, 지혜, 도량이라는 세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점들은 소하가 범인과 구별되는 특징이며, 영웅인 한신보다 우월한 부분입니다. 중국인은 예부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람을 존중했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감상하는 법을 아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천재나 영웅을 볼 때는 현재보다 미래를 전망해야 하며, 현재의 능력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주시해야 합니다. 소하의 지혜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혜안과 뛰어난 안목은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식견이 높고 원대해 시류를 통찰하여 영웅을 감별해 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잘 알고 항상 의식이 깨어 있어 분별력 있게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유방은 초 회왕의 명령을 받아 함양으로 진격해 항우보다 먼저 진 황궁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소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각종 도서, 장부, 법조문들을 수레에 실어 패상에 있는 한나라 군영으로 가져갔습니다. 소하의 높은 식견과 선견지명, 정세를 유리하게 이끌 줄 아는 안목, 진격을 위해 퇴각하는 대담한 자세로 보아 소하는 유방의 병참부장으로만 보는 것은 그를 너무 깔보는 처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하의 도량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재기가 출중하다고 해서 반드시 도량이 넓은 것은 아닙니다. 재능만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우와 한신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유방은 소하를 세 번이나 의심했지만 소하는 세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소하는 '군주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하는 것과 같다'라는 진리를 잊지 않고, 편안할 때도 항상 경계를 풀지 않았습니다.
제10강 자기를 잘 알았던 2등 조참
조참의 일생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는 장군일 때였습니다. 이때 조참은 유방과 한신의 부하로 반진 전쟁에서 초한전쟁까지 무수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장군으로서 조참은 단독으로 나선 적도 없고 걸출한 전적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눈여겨봐야 할 점은 유방은 항상 조참을 신뢰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방은 수많은 사람을 의심했지만 조참만큼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한신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자 조참은 한신을 감시하는 특수한 임무를 받고 한신의 부하로 파견되었습니다. 한 3년, 유방은 항우를 공격했으나 성고에서 대패하고 전군을 잃었습니다. 결국 유방은 구사일생으로 한신의 군영에 도착했습니다. 유방은 조참의 안내를 받고 한신의 침실로 가서 병부를 들고 나왔습니다. 병권을 손에 넣자 그는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병권 쟁탈전에 연루되었으니 한신에게 사사건건 제지를 당할 법한데도 조참은 한신과 별 탈 없이 잘 지냈습니다. 조참은 한신과 수년을 함께하며 유방에게도 신뢰를 얻었으니 처세의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조참은 장군 시절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군에서 재상으로 승진하던 시기, 개공이란 도가의 고사를 만나 성격을 완전히 바꾸고 인생의 제2막을 열었습니다. 조참은 개공의 황로학을 참조해 9년 동안 제나라 승상을 지냈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려 현명한 승상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도가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은 깨달음과 수양 정도에 따라 성취 정도가 다릅니다. 수양 정도가 낮은 사람은 난세에 구차하게 생명을 보전하면서, 제후에게 나아가 명성이나 벼슬을 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수양 정도가 중간인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며 처세의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수양 정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을 잘 제어하며 자신의 천성과 흥미에 따라 생활하고,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해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나 그렇다고 외부환경에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도가 학설을 바탕으로 연륜과 경험이 쌓일수록 조참의 처세술은 점점 노련해졌습니다. 조참의 처세 원칙은 '양보'와 '관용'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조참의 일반적인 처세술로, '잠깐만 참으면 평지풍파를 잠재울 수 있고 한 발자국만 양보하면 순리대로 풀린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국으로서의 처세술로 '적의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 사전에 방비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모두 도가 정신이 발현된 것입니다.
제11강 제왕의 스승 장량
'기사(奇士)'란 탈속한 군자, 혹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지만 탈속한 정신을 지니고 세속의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장량의 '기'는 세속을 초월하고, 사회에서 벗어나 홀로 살며, 한가하게 떠도는 구름과 들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학처럼 자유자재로 떠도는 기상입니다. 장량은 제왕의 스승이기도 했지만 '도사'의 기질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행동은 종종 탈속의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는 공적을 쌓아 봉토를 받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는 다른 공신들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장량의 기이함은 등장과 퇴장 방식, 그리고 등장과 퇴장 과정에 있습니다. 진 시황의 암살을 기도한 일이나 황석이 책을 준 일화는 장량이 유방을 보좌하기 전에 일어난 일로 장량의 등장을 대표합니다. 상산사호 일화는 장량이 식읍을 받은 후의 일로 그의 퇴장을 대표합니다. 장량은 복수자의 신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한나라 사람으로 장씨 집안은 5대째 재상을 지냈습니다. 스무 살 되던 해, 진이 한을 멸망시키자 그는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후 장량은 만금은 족히 되는 재산을 들고 집을 떠나 진 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던 형가 같은 인물을 얻기 위해 천하를 떠돌아다닙니다. 일설에 따르면, 회양에서 예를 배우고, 동쪽으로 창해군을 만났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대력사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대력사를 위해 무게가 120근이나 나가는 쇠 추를 주조합니다. 진 시황 29년, 장량은 대력사와 박랑사에 잠복해 있다가 진 시황에게 쇠 추를 던졌습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그만 수레만을 박살내고 말았습니다. 장량은 말년에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여 진 시황 암살 기도로 천하를 떨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장량의 인생관과 행동 방식은 진 시황 암살 기도 사건에서 그 단초를 보입니다. 또다시 자객 사건이 일어나자, 진 시황은 대로하여 전국을 쥐져서라도 범인을 색출하라고 명했습니다. 장량은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감추고 천하를 방랑했습니다. 그는 허난성에서 장쑤성까지 도망가 하비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습니다. 10년 동안 장량은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죽이고 망명한 항백을 받아준 것으로,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홍문의 연회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연히 기서 [태공병법]을 얻어 숙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공병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첫째, 장량이 자신의 저서를 '태공'의 이름을 빌려 세상에 알렸다는 것입니다. 둘째, 누군가 '태공'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위서를 장량이 우연히 손에 넣은 것입니다. 셋째, 사실 [태공병법]이란 책은 애초에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태공병법]은 병서거 아닙니다. 이 책을 완전히 숙독했다던 장량이지만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병사를 이끌고 출전한 적이 있습니까? 이것만 봐도 그 책이 병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공병법]은 제왕의 통치술을 적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량의 사상 변화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젊은 시절, 장량은 무예를 숭상하고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진 시황 암살이 필부의 용기에 지나지 않으며, 한 왕조는 부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의협심보다는 병법 연구로 눈을 돌리는 동시에, 행동보다는 정신적 측면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결과, 천하를 제패하고 다스리면서 핵심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가의 인의와 예학을 버려야 합니다. 수년 동안 장량은 여러 사람과 교류했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평생의 지기 유방을 만나게 됐습니다. 장량은 평생의 지기를 얻었으나 유방을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한나라의 복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지 마음을 바꿔 전심전력으로 유방을 보좌했습니다. 유방과 장량은 적에게 무자비했으며 의리고 신뢰고 없었습니다. 개국 공신 중 성격, 자질, 내력 면에서 장량은 유방과 가장 흡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유방의 마음을 잘 읽었으며, 고민 끝에 도출해 낸 결과가 유방과 거의 같았습니다. 소하는 일등공신으로서 기존의 8쳔 호에다 나중에 2천 호까지 만 호에 달하는 식읍을 받았고, 장량은 처음부터 제나라의 3만 호를 받았습니다. 제나라는 제후국 중 가장 비옥하여 관중 다음으로 중요한 지역입니다. 노자는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도가 경전을 숙독한 장량이 어찌 이 도리를 몰랐겠습니까? 그는 겸손하게 자신의 공을 행운으로 돌리며, 유후로 봉애 주신다면 기꺼이 받겠으나 3만 호는 감히 박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그를 유후로 봉하고 소하, 조참과 같이 식읍 만 호를 주었습니다. 말년에 장량은 공을 이루면 물러난다는 이치를 더욱 철저하게 지켜 조정과 항상 거리를 유지했고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했습니다. 훗날 장량은 한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건에 가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사건은 유방의 변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호색한이었던 유방은 황제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여인을 가까이했습니다. 말년에 새로이 총애하는 여인이 생겼으니, 그녀가 유명한 척부인입니다. 유방은 척부인에게 빠져 여후의 아들인 태자 유영을 폐위하고 척부인의 소생 조왕 여의를 태자로 책봉하고자 했습니다. 대신들이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후는 안절부절 못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갑자기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장량을 떠올렸습니다. 여후는 오빠 건성후 여택을 장량에게 보냈습니다. 여택이 간절히 부탁하자 장량은 결국 계책을 내주었습니다. 장량의 계책은 적중했습니다. 태자 유영의 지위가 안정되자 여후의 지위도 차츰 높아졌습니다. 여후의 수렴청정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중에 여씨 일가가 놀락하고 대왕이 황위를 잇는 일련의 사건들도 모두 여기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장량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죽음입니다.
제12강 변화무쌍한 처세의 달인 진평
진평과 장량은 모두 도가에 심취했지만 깨달음의 경지는 달랐습니다. 이 차이는 도가 학설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도가 학설은 도(道)와 술(術), 체(體)와 용(用)으로 구성됩니다. 장량은 도사 학설의 '체'를 근간으로 도와 술을 겸비했으며, 체와 용을 나누자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평은 도와 술, 체와 용을 이원화시켜 오직 '용'과 '술'만을 추구했습니다. 장량은 한나라 초기 도가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 중 유일하게 은사의 기질과 초탈의 기상을 갖고 진실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지평ㅇ게는 인사의 기질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매우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며 공리를 따지는 사람으로, 초현실적인 기질은 없었습니다. 세속적인 인간이 도가와 결합하면 뛰어난 술사나 모사 즉, 권모술수에 능한 정객이 됩니다. 사실 진평은 진실한 삶과 인격이라는 부분에서 전혀 성과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진평은 평민이 어떻게 조정의 최고 직위인 승상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의 모델입니다. 진평의 성공 비결로는 네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1. 출세를 위해 고관이나 권력자를 찾아가 아첨을 했습니다 2. 입신하기 위해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3.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4. 동료들 사이에서 남을 깍아내리고 자신을 높였습니다. 진평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인 형이 있었습니다. 형은 밭을 일구어 진평을 유학시켰습니다. 유학에는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1. 학계의 선배를 자주 방문해 가르침을 구하는 방법 2. 저명한 학자를 따라 다니며 연구하는 방법 3. 수많은 책을 읽고 끝없이 걸으며 견문을 넓히고 풍부한 경험을 쌓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학문과 전혀 관계가 없는 유학도 있습니다. 진평의 유학은 오직 공리 추구에만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권세 있는 사람과 교분을 맺기 위한 통로로 유학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혼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진평은 후에 봉해져 식읍을 받은 후에도 남의 비위나 맞추며 아첨을 하는 본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는 여후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렸습니다. 진평 같은 똑똑한 정객의 최대 관심사는 권력의 이동이요, 최대 걱정은 출세할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에게 변치 않는 원칙과 옳고 그름이란 없었습니다. 진평은 평생 정치판에서 오뚝이로서 시종일관 난관을 잘 헤쳐 나갔으니 진정 대단한 인물입니다. 정계에서 진평의 입신 비결에는 '변화무쌍'이라는 말을 덧붙어야 합니다. 그건 항상 변화무쌍하게 태도를 바꿨기 때문입니다. 분명 진평은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진평은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보전이 유일한 고려 대상이고, 이익이 유일한 척도이며, 성공의 유일한 원칙이었습니다. 진평 같은 정객에게는 동료 역시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진평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출세에 도움을 준 동료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근히 정을 표시하며 은혜에 보답하려 했습니다.
제13강 지혜로우면서도 잔혹했던 여인 여치
여치는 황제에 오르지 못했으나 사실상 중국 역사상 첫 여성 황제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은 [사기]에 [여태후본기]를 수록하고 심지어 '고후(高后)'란 연호까지 사용했습니다. 여치가 수렴청정하고 조정에 나가 직접 국무를 맡아 보던 15년 동안, 천하가 안정되어 전란과 도적이 없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태평성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여치처럼 웅대한 기백과 훌륭한 치적을 가진 통치자라면 마땅히 영명하고 위풍당당한 '성주'나 '명군'으로 각인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치는 이런 운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살아 있는 적에도 악명을 얻었습니다. 그녀가 오명을 뒤집어쓴 데는 다음의 3가지 이유를 들수 있습니다. 1. 우선 여치의 성별입니다. 여치는 여자입니다 2. 여치의 성씨를 들 수 있습니다. 여치는 여씨입니다. 그런데 여치란 이름의 여자가 천하의 갖은 비난을 무릅쓰고 유씨 강산을 여씨 강산으로 바꾸려 했으니, 대역무도한 일로 낙인찍히기 안성맞춤이었을 겁니다 3. 여치의 성격입니다. 여치의 성격은 강인했습니다. 또한 여치의 성격은 악락했습니다. 더욱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여치의 악랄함은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들 정도였으니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치가 역사 무대에 발을 디딘 것은 모두 유방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여치의 부친 여공은 패현 현령과 교분이 두터워 자주 패현에 드나들다 나중에는 원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예 패현으로 이사했습니다. 여공은 유방의 얼굴을 보자 엄숙하게 옷깃을 여미며 예를 올리고 몸소 대청까지 안내했습니다. 유방도 사양하지 않고 버젓하게 대청에 앉았습니다. 주연이 끝날 즈음 여공은 유방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여공은 집에 돌아가 사윗감을 구했으니 혼례를 치를 준비를 하라 일렀습니다. 이때 유방은 이미 사십을 넘긴 나이로 조씨와 혼인하여 아들 유비까지 두고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여치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혼인을 혼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은 여치의 불가사의한 행동은 3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여치는 여공의 말에 따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들'에 속했지만 아비의 속뜻을 간파해 냈을 것입니다 2. 여치는 유방에 얽힌 기이한 행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3. 사마천의 말에 따르면 여치는 '강인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니 나름대로 확실한 주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치는 똑똑한 여지니만큼 '영웅을 알아보는 탁월한 식견'이 있었을 테고 이미 유방을 점찍어 두고 아비에게 적극적으로 혼인 의사를 표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방은 황제가 되어서도 젊었을 때 아내가 해 준 격려와 인정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아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방임했습니다. 이런 신뢰와 방임은 3가지로 나타났습니다. 1. 여치의 아들 유여을 태자로 세운 것입니다 2.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대신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3. 부부간의 분업을 들 수 있습니다. 유방은 황제로 등극한 뒤에도 자주 원정을 떠났는데, 후방의 일은 겉으로는 소하에게 맡겼지만 실제로는 아내 여치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유방이 황제에 등극하자 여치는 유방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지녔던 자신의 중요성이 다소 떨어졌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게다가 유방이 자신의 아들을 밀어내고 척부인의 소생을 태자로 옹립하려 하자, 여치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결국 태자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한 발 더 나아가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권력을 확장시키려면 정적은 모조리 죽여야 했습니다. 얼마 후, 혜제가 즉위했습니다. 혜제는 여후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황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혜제가 죽을 때는 이미 모든 권력이 여치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7년간의 수렴청정 덕분에 풍부한 정치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방이 붕어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습니다. 새로운 황제는 나아가 어렸기 때문에 조정에서 나오는 명령은 모두 여치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여치는 황제의 권한을 독단적으로 행사했으며, 여씨를 모두 왕에 봉했습니다. 이때부터 여씨 일가는 조정 대권을 장악했습니다. 새로 즉위한 황제는 혜제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황후의 소생이 아닌 후궁의 소생이었습니다. 황후는 뱃속에 베게를 넣고 거짓으로 임신한 척하다가 아이가 태어나자 후궁을 죽이고 아이만 뺏어 온 것이었습니다. 어린 황제는 철이 들면서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복수를 하겠다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여치는 그 즉시 황제를 폐하고 아예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여치의 첫 번째 살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후의 살인도 아니었습니다. 수렴청정과 직접 조정에 나가서 국정을 돌보는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지위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확장하며 정적을 죽였습니다. 여티는 잇달아 3명의 조왕 유여의, 유우, 유회를 살해했습니다. 제왕 유비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여치의 가장 큰 적이라면 척부인과 조왕 여의일 것입니다. 이렇게 여치는 절치부심하며 장장 15년간 한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녀는 유씨 일족을 가차 없이 죽인 후 그 자리에 여씨를 앉혔습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여씨 강산이 보이는 순간, 그녀는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여씨 일가의 정치적 구심점은 오로지 여치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여치의 동생 여수나 나름대로 식견을 갖고 있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무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치가 15년간이나 쏟아 부었던 피땀의 결과는 이렇게 불과 며칠 만에 와를르 무너져 버렸습니다.
제14강 억울하게 죽은 조조(上)
조조(삼국지의 조조 아님)의 피살은 서한 초에 일어난 억울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이상과 정치 포부 때문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자마자 그의 정치 이상은 실현되었으며, 그의 정치 이상이 막 실현되고 있을 때쯤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억울하다'는 평가도 현대인이 아닌 당시 세인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한나라 중앙 정부가 실행한 제도는 '삼공구경제'였습니다. 이는 재상이 셋, 각 부의 대신이 아홉이라는 뜻입니다. '삼공' 중 최고 직위는 승상으로 현대의 총리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은 태위로 현대의 육해공군 총사령관, 즉 최고군사령관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어사대부, 즉 부승상으로 주로 감찰 업무를 맡으며, 현대의 부총리 겸 감찰부장에 해당합니다. 이 '삼공'을 합해 재상이라고도 부릅니다. '구경'은 9부 장관으로 이 중 몇은 위(尉)라 부릅니다. '위'는 어떤 관직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위' 앞에 쓰이는 글자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태위의 '태(太)'자는 최고하는 뜻이자, 비할 수 없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중(中)'은 궁정, 중앙, 수도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위는 '정(廷)'은 조정을 뜻합니다. 조조가 죽기 전, 자신의 죄명을 통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으며, 변호인 또한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조가 피살된 진짜 이유는 조조가 주장했던 '삭번책'입니다. 삭번책은 조조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국 국가 제도는 진한 시기에 중대한 변혁을 겪습니다. 진 이전의 국가 형태는 국가 연맹이라 불러야 합니다. 제후들은 공통적으로 천자를 모셨는데, 천자는 국가 연맹의 맹주로서 당시는 '천하 공주'로 불렀습니다. 천자란 바로 하늘의 아들입니다. 천자는 하늘이 그에게 수여한 땅을 소유합니다. 그는 이 땅을 제후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것을 봉건이라 합니다. '봉(封)'은 영토의 경계를 정한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건(建)'은 국군(땅의 주인)을 임명한다는 뜻입니다. 영토뿐만 아니라 그 땅의 우도머리를 지정해 주는 것이지요. 한편 제후국 역시 천자가 준 영토를 가지고 다시 봉건을 할 수 있습니다. 진의 시황제는 여섯 나라를 겸병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이 봉건제를 군현제로 대체했습니다. 군현제는 제후의 국(國)을 군(郡)으로 대부의 가(家)를 현(縣)으로 바꾼 것입니다. 군이 현을 관리하며, 군과 현은 중앙 정부에 직속되어 다시 나눠지지 않습니다. 즉 하나의 정부, 하나의 주권, 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국가인 것입니다. 시황제가 죽은 후 진나라는 실질적으로 명망했고 한나라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결국 고조 유방은 중도 노선을 걷기로 타협해 봅니다. 한마디로 수도 주변 즉 경기 지역에서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실시하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실시해 왕국을 봉해주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의 왕조에서 두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니 '일조양제(一朝兩制)'라 불러도 무방하겠습니다. 경기 지역을 제외한 곳에 봉한 왕국이 바로 번국(藩國)이빈다. 그러나 고조 유방은 일조양제를 실행하면서 같은 성을 가진 사람만 왕으로 봉한다는 규정을 남겨 놓았습니다. 당시 번국은 독자적인 왕국으로 독립적인 주권과 조세권, 군대, 영토, 정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앙 조정에서는 그를 통제해야 했고, 그를 통제하려면 반드시 영토를 줄여야 했습니다. 영토가 줄어들수록 국력은 약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오늘은 여기를 조금 잘라내고, 내일은 저기를, 모레는 다시 다른 곳을 조금 잘라내 통치 지역을 조금씩 줄이는 것이 바로 삭번입니다. 그렇다면 번왕도 이 삭번을 원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하나, 결사 반대입니다.
제15강 억울하게 죽은 조조(下)
조조는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형명학(刑名學,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조조 인생의 전환기는 태상시에서 [상서]를 공부할 사람으로 뽑혔을 때입니다. 진 시황의 분서갱유로 다수의 서적이 소실되고 민간으로 흩어져,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문제는 이르러서는 [상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제남복생뿐이었습니다. 문제가 그를 찾아갔을 무렵, 그는 이미 아흔을 훌쩍 넘은 나이라 조정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문제는 태상시에 인재 하나를 선발해 제남복생에게 가서 배워오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조조가 선발된 것입니다. 조조는 제남복생을 찾아가 [상서]를 공부했습니다. [상서]는 유가의 학설을 다룬 책입니다. 조조는 이미 법가를 공부한데다 이제 유가까지 배웠으니, 유가와 법가 모두에 통달했다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학식이 풍부해질수록 명성 또한 높아졌습니다. 조조는 태자의 사인이 되었고, 나중에 태자의 문대부를 거쳐 가령이 되었습니다. 한편 조조는 국가 대사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가 올린 상주문 중 변방 수호와 농업 장려에 대한 문서는 무척 유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조조는 나름대로의 식견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자 능등적인 참여자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조조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정치가보다는 정치논객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조조의 첫 번째 문제점은 인간관계에 소홀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태자부에 있을 때 조정 대신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습니다. 조조가 어떻게 하다가 그 정도로 인심을 잃었을까요? 그 이유는 3가지로 볼 수 있는데 1. 정치적 견해의 불일치입니다. 그 혼자만 삭번을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2. 조조의 모난 성격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고집불통의 성격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3. 앞만 보고 매진했던 불굴의 정신 때문입니다. 이런 정신은 여태까지 고상한 인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합니다. 끝까지 고수해야 할 때는 고수해야 하지만, 타협해야 할 때는 타협하고 양보해야 할 때는 양보해야 합니다. 오초 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조조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경제 역시 당황했습니다. 조조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유치한 계책 두 가지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유치한 계책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첫 번째 그는 원앙을 죽이자고 주장했습니다. 원앙은 오나라 승상을 지냈기 때문입니다. 조조가 내 놓은 두 번째 계책은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황제보고는 직접 출정하라 하고 자기는 수도를 지키겠다고 계책을 내놓습니다. 조조가 이런 계책을 내놓자 조정 중신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조조의 가장 큰 실수는 황제를 너무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조는 너무 성습했습니다. 성공에만 급급해 어떻게든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정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려고 경천동지 할 만한 일을 밀어붙였습니다.
제16강 원앙과 선비
원앙과 조조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원수지간'이었지요. 역사에서는 종종 조조의 죽음을 원앙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이건 원앙에게 좀 억울한 일입니다. 원앙이 억울한 데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조조가 먼저 원앙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원앙도 경제에게 조조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 원앙이 경제에게 제시한 의견은 아주 사적인 건의에 지니자 않았습니다. 당시 원앙은 파직된 상태로 일개 평민 신분이었습니다 3. 조조가 피살된 후에 오와 초가 병사를 거두지는 않았지만, 조조의 죽음은 정치 구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조조를 긍정했으므로 원앙은 항상 부정되었습니다. 원앙은 소인도 간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풍행이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원앙은 조정이나 세간에서 높은 명망을 자랑했습니다. 원앙은 의협심이 대단하고 천하의 일을 자기 소임으로 삼은 사람이었지만 이 때문에 비명횡사하고 말았습니다. 국가 대사를 지나치게 걱정하여 양왕을 태자로 삼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화를 당한 것입니다.
제17강 두영과 외척
두영의 죽음은 서한 초에 일어난 의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시작은 아주 사소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관부가 승상 전분의 피로연에서 부린 술주정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관부는 왜 전분의 피로연에서 술주정을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혼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두영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이 피로연은 전분이 태후의 명을 받고 연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태후의 체면에 먹칠을 한 것이었으므로 마땅히 '불경죄'로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에 두영은 관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가 결국 그도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두영은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곧 사람을 시켜 황제에게 말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에겐 선제의 유서가 있는데, 거기에는 그에 대한 특별한 권리가 적혀 있다고 말이지요. 무제는 이 보고를 받고 진짜 선제의 유서가 있는지 상서에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무제는 사람을 상서로 보내 조사했으나, '그런 문서는 없으며, 사본도 없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결국 두영은 '유서 위조죄'라는 죄명으로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는 큰 죄이기 때문에 두영은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두영의 죽음은 관부가 승상 전분의 피로연에서 부린 술주정 때문에 시작되어, 이후 선제의 유서를 위조했다는 죄명으로 결정됩니다. 이 억울한 사건의 배후에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승상 전분입니다. 이때는 두태후가 이미 세상을 떠나 두태후의 외적 집단은 이미 세력을 잃은 후였고, 왕씨 일족과 전씨 일족으로 이루어진 왕태후 집단이 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분은 이 기세를 타고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사실 무제는 교만하고 사치스러웠던 전분을 더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가련하게도 두영이 외척 타도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투쟁의 최종 결과는 무제가 어부지리고 득을 봤습니다. 그 결과, 두씨 일가와 전씨 일가는 모두 몰락하고 말았으니까요.
초한지 강의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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