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1. 세계 정복을 꿈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
육전에서 맹위를 떨친 일본의 군사력
: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곧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편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신하들과 무사들에게 더 이상 영지를 나눠 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을 통해 패한 자의 영지를 못수하고 그것을 신하에게 나눠 주는 것이 전국 시대 일본의 관습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영지를 받을 수 없다면 다른 영주들이나 신하, 무사들이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바칠 의무가 없었다. 일본의 무사들에게 '결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사상이 자리 잡은 시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고 나서 평화가 정착된 에도 막부(1603~1867) 무렵이다. 이런 불만들이 계속 쌓이게 되면 나중에는 대규모의 반란이 터질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모처럼 확립한 히데요시 자신의 권력도 무너지게 된다. 1591년 3월 9일, 히데요시는 오사카에서 일본의 모든 영주들을 모아 놓고 "조선 따위는 한 달 만에 손에 넣고 곧바로 명나라로 들어가 그곳의 4백 개 주를 정복하여 여러 영주들과 무사들에게 영지로 나눠주고, 저 먼 신비의 나라인 인도까지 쳐들어갈 것이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당시의 일본 군사력을 감안한다면 허풍이라고 가볍게 무시할 수만은 없다. 1467년에 벌어진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은 1백 년이 넘게 전란이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서로 간에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던 전국 시대는 당연히 사회의 가장 핵심이 군사였다. 항시 전쟁을 치르다 보니 상비군을 갖추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16세기 말, 일본 전역의 군사를 합치면 무려 30만이나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이만한 상비군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국제 정세를 히데요시는 비교적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조선 이외에도 1591년에 인도, 1593년에는 필리핀과 대만 등지에 사신을 보내어 "일본에 항복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히데요시의 행동을 우스꽝스러운 망신이라고 여길지도 모르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히데요시는 필리핀을 공격하지 않고, 조선을 제일 먼저 쳤다.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조선이 일본 본토에서 제일 가까워 병참 수송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인구가 많아 일본에 필요한 노동력을 쉽게 공급할 수 있으며, 전라도의 곡창 지대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일본군의 군량 공급을 원활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은 군사력이 약해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점도 작용했다. 조선의 가장 큰 매력은 지리적인 이점이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강에서 배를 타고 순풍을 만나면 사흘에서 나흘 만에 중국의 산둥 반도에 도착한다. 이 같은 사실은 히데요시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수뇌부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드넓은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 것, 이것이 히데요시가 세운 대 아시아 원정 계획의 핵심 내용이었다. 개전 이래 3개월 만에 평안북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의 대부분이 일본군의 군홧발에 짓밝히게 된다. 이는 오랜 평화기에 젖어 조선의 방비 태세와 군제 체계가 허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일본군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흔히 일본군의 패주로 알려진 1593년 1월 9일의 평양성 탈환전에서도, 일본군은 명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저항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명군은 어쩔 수 없이 포위망의 일부를 풀어 주었고 그 틈에 일본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토록 강력했던 일본군은 어째서 조선 정복에 끝내 실패했을까? 그 이유는 우리도 익히 잘 아는 대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눈부신 활약과 의병들의 봉기 때문이다. 보급로가 차단되어 식량과 물자 부족에 시달린 일본군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철수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조선은 새롭게 등장한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게 된다. 그때마다 조정에서 거론되었던 해결책 중 하나가 바로 "동래의 왜관에 이 사실을 알려 일본의 원군을 청해 오자."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그토록 당하고 치를 떨었던 조정 대신들도 일본군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한지 내심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2. 원균은 '악당'이자 '간신'이었다
원균은 현대에 들어와서 악당이 되었는가?
: 원균을 본격적으로 옹호했던 첫 번째 사람은 울산대 교수인 이정일이었다. 그는 1981년 역사학회를 통해 발행한 논문 [원균론](역사학보 89집)과 1982년 12월 [마당]이란 잡지에 <원균은 억울하다>라는 글을 실어 '원균 옹호론'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원균은 과연 용감무쌍한 장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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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순신은 박정희가 날조한 엉터리 영웅인가?
이순신에 대한 추모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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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부터 이순신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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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군 중 10%만이 조총으로 무장했다
일본군의 주 무기는 총이 아닌 창이었다
: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조총들은 '아퀴비스(Arquebus)'라 불리는 것으로, 총에 심지를 부착하여 여기에 불을 붙이고 둥그런 총탄을 총구에 직접 넣고 사격을 하는 방식의 무기였다. 이 조총에 넣는 총탄은 오늘날처럼 뾰족한 형태가 아닌 콩알처럼 원형이었다. 그런 이유로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는 100m 이내였다. 더군다나 조총은 탄환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아무리 숙련된 사수라 해도 1분에 2발을 쏘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총기는 비가 내리거나 강풍이 불면, 총의 심지가 젖어 버려 사격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일본군 전체 중에서 조총을 보유한 비율은 10%를 넘지 않았다. 조총은 결코 무적의 병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의 총병은 총구에 부착하는 총검(바요넷 bayonet)도 없었기에 기병의 돌격에 정말 취약했다. 원거리에서 총탄을 쏘아 대는 것 말고는 총병이 기병을 제압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력을 기병으로 드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일본은 대규모의 기병을 운용한 사례가 별로 없었는데 이 같은 현상은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확실해진다. 즉, 전국 시대 일본의 무사들은 말을 수송용으로 사용했지,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애기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이나 조총을 쏘아 대며 창을 휘두르는 기마 무사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 수도 매우 적었으며, 전장에서 결정적인 승패를 좌우하는 역할도 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일본하면 흔히 떠올리는 사무라이와 날렵하게 생긴 일본도를 거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도(카타나)는 특별한 무기가 아닌, 누구나 차고 다니는 흔한 무기였다. 더구나 전투가 길어져 혼전 양상이 되면 적과 아군이 마구 뒤섞이게 되는데, 이때 길이가 긴 칼은 북적거리는 인파에 걸려 사용하기가 불편한 단점이 있다. 14세기에서 16세기 말까지 일본에서 벌어진 전사자들의 통계를 다룬 자료인 [군충장(스즈키 마사야 저)]에 따르면 14세기 남북조 시대의 전투에서 칼로 인한 사상자는 1.56%였으며, 15세기 전국시대 중반까지 칼로 인한 사상자는 0.71%였고, 조총이 도입된 전국시대 말기까지의 칼로 인한 사상자는 9.59%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볼때, 일본도를 비롯한 도검이 주력 무기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요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가에야리'라 불리던 '장창'이었다.
창으로 무장한 밀집 보병대
: 16세기의 일본은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수십의 봉건 영주들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던 현장이었다. 그중에서 장창은 짧게는 4.5m에서 길면 6.4m에 달했으며, 이를 평균으로 계산해 보면 약 5.4m가 전국 시대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용했던 장창의 길이였다. 일본군은 이 장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며 싸웠다. 이는 단순히 찌르기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강력한 공격 방법으로, 찌므련 단지 창끝만이 공격 범위이지만 내리치게 되면 창 자루 전체의 무게를 실어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무예를 다룬 전문 서적인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어 단병접전에 쓰이는 검술과 창술 등에 각별히 신경을 기울였던 이유도 지나치게 활만을 중시하다 일본에 호되게 당했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일본도가 아닌 장창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의아해할지도 모르나, 근대 이전 전장의 주역은 창이었다. 이처럼 창이 전장의 주역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우선 창은 제조하기가 쉽다. 결정적으로 창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적이 가진 무기의 사정거리 밖에서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장창으로 무장하고 엄격한 군기와 규율을 갖춘 군대는 거의 모든 적을 막아 낼 수 있었다(강력한 화살이나 총탄, 대포 등으로 공격 당하지 않는 한). 17세기 말에 총검이 발명되면서 창은 점점 전장에서 사라져 갔다. 더 이상 창이 없이 총검을 갖춘 보병만으로도 기병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보병 전술은 옛날처럼 밀집하는 형태가 아닌, 적과 마주치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개하는 형태이다.
5. 일본 조총은 유럽으로 수출된 적이 없다
유럽제 초기가 일본제보다 휠씬 강력했다
: 애초에 일본의 조총은 자체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1543년 일본에 표류한 포르투칼 인 선언이 남기고 간 조총 두 자루를 일본인들이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고 이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조총을 전투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포르투칼 인이 일본에 전해 준 총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퀴버스였다. 이후 에도 막부 시대까지 이런 아퀴버스는 일본 총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아퀴버스보다 휠씬 강력한 위력을 가진 총기인 '머스킷(Musket)'이 널리 쓰였다.
16세기 일본 전국의 총기가 80만정?
: 일본의 각종 무기들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연구서인 도다 도세이의 [무기와 방어구:일본편]에 보면 17세기 초인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일본 전역의 초기 수는 약 3만 정 정도였다고 나온다. 16세기 당시 조총 한 자루면 무사 3명을 고용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에서 조총은 매우 비싼 무기에 속했다. 일부 사람들은 임진왜란 당시 동양에서는 일본만이 조총을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이미 명나라에서 왜구 토벌로 이름난 장군 척계광은 마카오에 정착한 포르투칼인들로부터 제조 기술을 전수받아 1550년에 자체적으로 조총을 개발해 실전에 활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6. 일본도 vs 서양갑옥, 누가 이길까?
서양 갑옷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인가?
: 플레이트 아머는 당시 서양의 과학 기술과 제련 기술이 총동원되어 만들어진 군사 예술의 결정체였으며, 갑옷의 생명인 방어력과 착용했을 때의 활동성 모두를 만족시킬 정도로 훌륭한 장비였다. 15세기 초에 개발된 플레이트 아머들 중에는 분명히 허리를 숙일 수 없거나 어깨와 팔의 움직임이 불편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15세기후반 관절 부위의 제작 기술이 점차 발달하면서 허리를 90도로 숙일 수도 있게 되고 팔이나 어깨를 움직이는 것도 전혀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실전에서 사용되는 전투용 플레이트 아머는 무게 분산이 잘 되어 있고 균형이 잘 맞게 설계되어 있었다.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기사는 달리거나 말을 타기 위해 안장 위로 뛰어 오르고 심지어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릴 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도 가능했다. 특히 칼이나 화살에 대한 방어력은 동서양의 모든 갑옷을 통틀어 가장 우수하다. 플레이트 아머는 갑옷 표면에 '피탄 경사각' 즉 비스듬한 경사 처리를 해 놓았기 때문에, 칼이나 화살을 맞아도 그 충격이 상당 부분을 흘려보내거나 미끄러지게 할 수 있는 뛰어난 방어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설령 칼과 화살이 흘러 나가지 않고 갑옷에 맞는다고 해도, 플레이트 아머를 이루고 있는 중탄소 강판은 열처리를 하여 만들어지고 두께는 1.5mm를 넘으므로 일반적인 화살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다. 플레이트 아머의 탁월한 장점을 더 들자면 '플레인 엣징(Plain Edgering)'을 빼놓을 수 없다. 플레인 엣징이란 플레이트 아머의 끝 부분을 접어서, 칼날이 미끄러져도 걸리도록 하는 설계이다. 플레이트 아머는 표면이 매끄러원 걸리는 것이 없고, 자체적으로도 '피탄 경사각'을 염두에 둔 설계이기 때문의 적의 창이나 검이 미끄러져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일이 많다. 그러나 자칫 그런 경우에 적의 창과 칼이 자칫 신체의 치명적인 부위인 눈으로 날아들거나 상처를 입히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므로 그런 사태를 방지하고자 만들어진 설계가 바로 플레인 엣징이다.
일본도는 뭐든지 잘라 버리는 마법의 무기인가?
: 플레이트 아머의 우수함은 일본인들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16세기 전국 시대에 들어서 일본은 스페인 및 포르투칼 같은 서유럽과 활발한 문물 교류를 했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때 서구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군사 무기가 바로 '철포'라 불리는 조총인데, 여기에 서구에서 쓰이는 플레이트 아머도 일본에 들어와 널리 사용되었다. 서양 갑옷의 우수성에 놀란 일본의 영주들은 앞 다투어 이런 갑옷을 사들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들이 바로 '난반도구소쿠', '난반가부토'라는 갑옷이었다. 이런 갑옷들은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과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서양식의 플레이트 아머 방식으로 만들었고, 팔이나 다리 부위는 기존의 일본식 방식으로 절충해서 만들었다. 플레이트 아머는 총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17세기 말까지 계속 전장에서 활용되었다. 그럼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말에 타기 위해 기중기로 들어 올려진다는 애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럴 경우에 입은 갑옷은 마을 타고 벌이는 창 시합인 토너먼트에 사용되는 '토너먼트 아머(Tourmament Amour)'이다. 토너먼트 아머는 경기 참가자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실전에서 쓰이는 플레이트 아머보다 휠씬 두껍고 무거웠으며 결코 실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7. 조선 수군 불패의 신화, 비결은 무엇인가?
조선의 우수한 전함들
: 판옥선 이전에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활동했던 전함은 '맹선(猛船)'이었다. 그러나 맹선은 원래 평화 시에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겸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배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그 때문에 속도가 느려서 전함으로서는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중종과 명종 무렵에 계속 발생한 삼포 왜란과 사량왜변, 을묘왜변 등에 왜구들은 당시 조선 최대의 전함이었던 대맹선만한 대형 전함까지 동원할 정도로 나날이 강력해졌다. 맹선의 둔중하고 느린 점을 보완하고자 조선 조정은 작고 빠른 '소선(小船)'으로 왜구를 제압하려 했으나, 소선은 많은 전투원을 태우지 못하여 왜구들이 칼을 빼들고 배 위로 올라 타 백병전을 벌이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이었다. 결국 명종 10년인 1555년에 맹선을 대체할 전함인 판옥선이 개발되었으며, 이후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렇다면 판옥선은 이전에 쓰였던 맹선과 무엇이 다른가? 우선 맹선 같은 경우는 평화 시 세곡을 운반하는 데 쓰이는 수송선 기능을 겸하게 되어 있으나 판옥선은 오직 전투 전용 함선이었다. 또한 판옥선은 2개의 층을 가진 다층 전함이었다. 이전까지의 전함들은 모두 갑판 위에 병사와 노꾼(격군)들이 함께 있다 보니, 전투가 벌어지면 자칫 노꾼들이 적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다쳐 배의 기동성이 약화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판옥선의 경우는 노꾼들이 갑판 아래에 위치하여 병사들과 분리되어 활동하므로 보호받으며 안전하게 노만 저을 수 있었다. 선체의 평균적인 길이는 대략 27.9m 정도였고, 좌우의 폭은 4.5m, 상하의 높이는 3.4m였다. 판옥선 한 척에 탑승하는 구성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배 전체를 담당하는 선직(船直)과 돛대를 움직이는 무상(舞上), 키를 맡는 타공(舵工), 돛과 닻을 조종하는 요수와 정수(碇手), 갑판 아래에서 노를 젓는 노꾼 등 비전투원인 선원들과 궁수와 포병을 비롯한 전투원들이다. 그 수는 총 160명 정도였다. 판옥선은 선수로부터 선미까지 배 전체에 선루가 설치디어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선루를 '상장(上粧)'이라고 하는데, 선체 폭보다 휠씬 넓은 선루를 가지고 있어 노를 선체와 선루 사이에 내밀게 되어 잇어 전투 시 노역에 종사하는 비전투원을 보호한다. 상장 위의 넓고 평평한 공간은 대포를 설치하기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전투 효율을 높였다. 여기에 판옥선은 한국산 소나무로 제조되었는데, 외부 표면의 두께가 12cm나 되어, 매우 단단했다. 거기에 배의 좌우 갑판에 설치하는 방패는 소나무보다 더 두꺼운 전나무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철옹성 같은 판옥선은 일본군이 쓰는 조총이 도저히 뚫을 수 없었고, 조선 수군들은 놀랄 만큼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즐겨 사용했던 전술은 배를 상대의 배에 바짝 붙인 다음, 창과 칼을 든 전투원이 상대편 배로 넘어가 백병전을 벌이는 '등선육박전술'이었다. 선체가 2층으로 만들어진 판옥선은 이러한 일본군의 전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일본군은 전투원이 탄 2층에 오르기가 어렵지만 판옥선에 탄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적을 내려다보면서 안전하게 화살을 쏘며 공격할 수 있었다. 판옥선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막강한 원거리 화력에 있었다. 판옥선은 많은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화포의 구경도 일본의 화포(30mm)보다 월등히 커서 '천자총통(최대 사거리 약 1.4km)'의 경우 130mm, '지자총통(최대 사거리 약 1km)'은 100mm, '현자총통(최대 사거리 700m)'은 75mm, '황자총통(최대 사거리 300m)'은 40mm에 달했다. 물론 판옥선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안정성과 견고성에서는 탁월하지만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거북선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기동성에 있었다. 격렬한 전투 중에도 전진, 후진, 선회, 정지, 가속, 감속이 자유자재로 조절될 수 있어 전투 중 기동성이 매우 뛰어났다. 또한 거북선의 노는 선체 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배가 적선과 부딪쳤을 때도 계속 노를 저을 수 있었다. 거북선의 역할은 돌격선이다. 돌격선의 생명은 신속한 기동성에 있다. 조선 수군의 두 핵심 축은 판옥선과 거북선인데, 판옥선이 주력선이고 거북선은 보조선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즐겨 사용했던 전술은 이러했다. 먼저 재빠른 기동성을 갖춘 거북선이 적진으로 돌입하여 전열을 유린하고 적 함대를 붙잡아 두는 동안,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판옥선이 다가와 각종 화포와 대장군전과 불화살 같은 원거리 무기들을 집중 포격하여 적진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다.
의외로 약했던 일본의 수군
: 일본은 섬나라라서 해전에 뛰어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상 외로 일본은 16세기 이전까지는 배를 타고 대규모 해외 원정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감행한 1281년 제2차 일본 원정에서 일본의 전함들은 작고 불품없는 소형선이었다. 16세기 중엽에 중국의 해안을 침입한 왜구들은 육전에서는 명군을 맞아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해전에서는 반대로 명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명군이 가진 대형 전함과 대형 화기가 왜구의 빈약한 소형 전함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수군의 주력함이었던 '세키부네'부터 살펴보자. 세키부네는 중형 전함으로 30명의 전투병과 40명의 노꾼이 탈 수 있었다. 배의 측면에는 대나무 다발을 역어 만든 방패가 설치되었는데, 이런 것으로는 화살은 막아낼 수 있어도 포탄이 퍼부어지면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이조차도 대부분 설치하지 않고 경량화를 추진하였다. 대포는 거의 싣지 않았고, 설령 싣는다 하더라도 1개가 고작이었고 이조차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세키부네의 주목적은 적함에 신속히 접근하여 등선육박전술을 벌이는 것이었다. 세키부네는 선체의 밑바닥이 V자형인 첨저선이었다. 선체의 무게가 가벼워 직진할 경우, 속도는 매우 빨랐으나 선회를 할 때는 선체 밑바닥의 구조상 물의 저항을 많이 받게 되어 느렸다. 배 전체의 균형이 불안정하여 흔들림이 심했으며, 세키부네는 앞과 뒤가 길쭉하고 좌우가 좁은 형태여서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에 취약했고, 작은 풍랑을 만나도 배가 요동치거나 쉽게 침몰되기 일쑤였다. 세키부네보다 더 작은 소형선이었던 '하야'와 '고바야' 같은 경우는 탑승 가능한 전투원이 고작 8명이었으며, 노꾼은 20명이었다. 뱃머리를 뾰족하게 만들어 물을 잘 가르게 되어 속도는 매우 빨랐으나 선원을 보호할 방어용 구조물은 거의 없는 것나 마찬가지여서 적함의 원거리 공격을 받게 되면 치명적이었다. 하야와 고바야는 전투보다는 연락이나 적의 경계를 살피는 척후 등에 주로 이용되었다. 대형 선박인 '아다케부네'는 선체의 길이가 28m로 판옥선과 거의 같은 크기의 전함이었다. 60명의 전투원이 탈 수 있었으며, 노꾼은 80명이 탑승했다. 아다케부네는 2층 구조로 이루어진 전함이며, 배의 형태는 네모난 사각형으로 뱃머리 부분이 뭉툭하여 물의 저항을 많이 받아 속도가 매우 느렸다. 게다가 배의 갑판 위에 야가따(집처럼 생긴 구조물)를 올려 더욱 둔중했다고 한다. 배 위에 성의 누각과 똑같은 모양의 구조물을 올렸으니 배를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신속하게 이동하여 대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다케부네는 탑재한 대포가 1~3개에 불과해 포격전의 수행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대포를 싣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일본의 전함들은 제조 방식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배들은 쇠못을 써서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바닷물의 염분에 쇠못이 부식되어 못과 결합한 나무 사이에 틈이 벌어져 결합강도가 약해져 버린다. 더구나 일본의 전함들은 삼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빠른 시일 내에 수많은 배들을 만들어 내야 했던 일본의 상황과 맞물려 떨어진다. 히데요시가 오사카에서 조선 침공을 결정한 때가 1591년 3월 9일이고, 1592년 3월 1일 조선 원정군이 일본 본토로부터 출발했으니, 불과 1년 만에 일본의 목수와 조선공들은 1,000척이 넘는 대선단을 만들어 내야 했다. 한마디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함은 바쁜 시간에 쫓겨 부실하게 건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 전함들은 배의 구조상 돛이 하나 밖에 달려 있지 않아서 역풍을 만나면 항해를 못했다.
8. 명군의 참전 이후 더 나빠진 전황
조선군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니
: 명군이 조선에 파병되어 일본군과 처음 싸운 시기는 부총병 조승훈이 평양성을 공격한 1592년 7월 20일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 4,300명은 일본군을 얕보고 덤벼들었다가 성벽 위에서 퍼붓는 조총 사격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조승훈의 부장인 유격장군 사유와 천총 마세륭, 장국충이 전사했을만큼 참담한 패배였다. 일본군의 전투력이 예상 외로 막강한 것을 안 명나라 조정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시 파병했다. 제독 이여송과 경략 송응창이 지휘하는 명군 4만 5천 명은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두 번째로 공격한다. 명군이 보유한 대형 화포인 불랑기포가 위력을 발휘하여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하지만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는 모두 살아남아 병사들과 함께 무사히 성을 탈출했다. 평양성 탈환전에서 더욱 큰 문제가 된 것은 명군이 죽인 일본군 중 상당수가 조선 백성이었다는 사실이다. 평양성 함락 이후 좀처럼 전의를 보이지 않았던 이여송은 1월 27일,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관에 이른다. 여기서 이여송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소규모의 일본군 분견대 6백 명을 격파하자, 일본군을 우습게 여기고 직속 경기병대만으로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군 본대에 걸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명군의 피해는 실로 엄청나서 이여송의 부장인 이비어와 마천총이 전사하고, 이여송도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쳤을 정도였다. 백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의 무서운 전투력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명군 수뇌부는 그 후로 이떻게 해서든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려고 했다. 한양에서 일본군이 철수할 때도 명군은 일본군을 추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격 금지령을 내려 조선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을 강력히 막았고, 그도 모자라 멀리서 일본군을 호위(?)하며 엄호해 줄 정도였다. 명군이 이처럼 소극적인 교전 태세를 보였던 이유는 백제관 전투의 참패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전한 본래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명이 조선에 파병을 한 이유는 일본군이 조선 전체를 석권하고 그 여세를 몰아 명의 본토까지 침공하는 사태를 막고자 함이었다. 전쟁을 조선에만 국한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선조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명군을 천병이라 불렀다. 천병(天兵), 즉 하늘이 보낸 군대란 뜻이다. 하지만 명군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전추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극복의 공은 명군에게만 있으며, 조선군은 하나도 전공을 세운 것이 없다고 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조선군이 거둔 승리들은 대부분은 명군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반대로 명군이 파병되고 전쟁에 개입하면서는 좀처럼 이런 승전을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 조선군이 일본군과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명군은 백제관에서 일본군의 강력함을 실감한 이후부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하 교섭을 맺으려 했고, 그 때문에 조선군이 일본군을 추격하거나 싸우는 것 자체를 엄격히 금지시켜 버렸다. 임진왜란 때 명군의 활약이나 전공은 극히 미미했으며, 오히려 전체적인 전세에 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선조는 무엇 때문에 국란 극복의 공을 모두 명군에게 돌렸던 것일까? 여기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술수가 숨어 있다. 임진왜란 내내 선조가 경계했던 것은 일본군보다 자국의 군대였다. 특히 이순신을 비롯한 민간의 추앙을 받던 전쟁 영웅들은 선조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선조는 이순신뿐만 아니라 의병장들에게도 냉담했다. 1603년에 있었던 공신 책봉에서도 선조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수많은 의병장들 중 겨우 이정암 한 사람만을 공신으로 책봉하고, 나머지 의병장들의 공로는 모두 무시해 버렸다. 명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선조로 인해 명군은 조선에서 약탈과 범죄를 마음대로 자행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고, 전의가 희박한 명군에게 조선군 전체의 지휘권을 맡기다 보니 그들에게 끌려 다니느라 조선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또 명나라는 파병을 이유로 전후 조선에서 엄청난 이권을 닥치는 대로 챙겨 갔다.
아귀처럼 은을 탐낸 명나라 사신들
: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대해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은을 요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명은 세금을 은으로 받는 은본위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발배의 난', '양응룡의 난' 등을 진압하는 동안 명나라는 무려 1천만 냥이란 거액의 군비를 지출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명나라 조정의 2년 예산에 해당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전란인 '만력 삼대정(三大征)'을 치르는 동안 명나라의 국가 재정이 급속히 궁핍하게 되었고, 이것이 명의 국력을 쇠퇴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황실의 사치도 한몫했다. 이러는 동안 국고는 바닥이 났고, 명나라 조정은 부족한 은을 충당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이때, 명나라 조정은 가까운 해외로 눈을 돌려 조선을 주목한 것이다. 조선의 은에 눈독을 들인 명나라는 즉각 사신을 보내 은을 요구했다. 물론 조선에 왔던 명군이 악행만 저지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명군의 파병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9. 백성들의 목을 잘라 공적(?)을 세운 장수들
전쟁 중에 일어난 끔찍한 민간인 학살
: 개전 초기에 대부분의 전함과 무기를 바다에 쳐넣고 도망쳤던 원균으로서는 장비가 부족해 일본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때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자연히 원균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전공을 세울 수 없게 되자, 이미 죽은 일본군의 수급을 챙겨 마치 자신이 싸워 얻은 것인 양 위장하여 공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나마 원균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그의 부하인 최덕순의 경우는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최덕순의 행적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힐 뿐이다. 조선인 피란민을 죽이고 그 수급을 일본인 것처럼 꾸미려다 여러 사람들에게 발각이 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니, 조선의 기강이 얼마나 문란해져 있었는지 알 만하다. 최덕순과 비슷한 사례가 전란 중에 더 있었다. 용궁 현감 우복룡은 영천 길가에서 점심을 먹던 중, 하양 군사 수백 명이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말을 타고서 지나가자 괘씸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병사들의 유족들은 조정에 수차례나 항의했으나 우복룡은 조정에 뒷줄을 대고 있어 무사했다. 사건이 벌어진 지 20년 후인 광해군 무렵에야 우복룡은 자신의 저지른 비행이 조정에서 거론되어 파직 당했다.
인간성 파괴의 극치, 전쟁
: 왜 이렇게 많은 군대들이 전쟁터에서 외적과 싸우지 않고, 자기 나라의 백성들을 죽여 그 목을 적군의 것으로 위장했던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래야 '쉽고 안전하게' 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10. 임진왜란 때 활약한 친일파의 원조들
침략자를 도와 동포들을 해친 반역자들
: 임진왜란 당시에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편에 서서 매국 행위를 했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왕실의 위신에 먹칠을 한 사건이 임진왜란 중에 벌어졌다. 한양이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던 1592년 12월 16일, 관가의 서리였던 최업과 노비인 효인이란 자가 왕릉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 있으니 이를 파헤쳐 갖자고 꼬드겼다. 나중에 한양이 조선군에 의해 탈환되었을 때 선릉과 정릉을 조사했는데 능 안의 관 속에는 왕들의 유골이 아닌 전혀 엉뚱한 자의 유골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왕들의 유해가 침략군에 의해 그토록 무참히 망가졌다는 사실은 조선 왕실의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배신자들의 최후
:
왜 가해자는 불쌍히 여기면서 피해자에게는 무관심한가?
: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군 병사들의 혐전 분위기가 짙어지자 이를 만회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히데요시는 더 끔찍한 명령을 내렸는데, 바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 오라는 것이었다. 이런 야수 같은 잔혹한 짓거리를 일본인들은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조선인들의 잘린 코와 귀를 모셔 놓은 이총(耳塚, 귀 무덤)까지 만들어 보관해 놓을 정도였다. 이총에 들어간 조선인들의 귀와 코는 무려 18만개나 되었다고 한다.
11. 기적 같은 역전승, 명량대첩
"아직 저에게는 배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일본군은 장대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니, 임진왜란 때 실패했던 수륙 병진 전략을 다시 실현시킨다는 것이었다. 먼저 명군과 대치하고 있는 육군 병력을 일부러 후퇴시켜 명군을 깊숙히 끌어들인다. 그런 다음, 330척(혹은 그 이상)의 대함대에 수군이 아닌 육군 소속 병사들을 별도로 탑승시키고 이들을 명군의 배후에 상륙시키게 한 다음, 앞뒤고 명군을 포외하여 섬멸한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한양으로 신속히 북진하여 한양을 점령하고, 국왕 선조와 대신들을 사로잡아 조선을 손에 넣는다. 이것이 바로 히데요시가 세운 원대한 전략이었다. 이 수륙 병진 전략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단계가 있었으니, 바로 대규모 윤군 병력을 수송한 선단이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선박 조종 기술로는 먼 외해를 돌 수 없으니, 연안으로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함대가 남해에서 서해로 나가려면 반드시 명량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구루지마 미치후사 등이 지휘하는 일본 함대 수백 척(대략 330척으로 추정되는)은 1597년 9월 16일 오전 11시 무렵에 명량해협의 입구인 울돌목에 도착했다. 일본 수군의 선봉을 맡은 구루지마 미치후시가 기세 좋게 휘하 함대 수십 척을 이끌고 울돌목 안으로 돌겨했다. 미치후사는 특히 이순신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의 친형인 구루지마 후사모토가 1592년 6월 5일 벌어진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과 싸우다 온몸에 수십발의 화살이 박힌 채로 비참하게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로 안에 들어선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수로가 극히 좁고 물살이 너무 빨라 함대의 대열 유지와 운신이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명랑 해협의 길이는 1.3km였으며, 입구 쪽의 폭은 약 650m, 해협 중간에서 가장 넓은 곳은 605m이고, 가장 좁은 곳은 295m이다. 그나마 양안에 큰 암초가 있어 실질적인 폭은 120m에 불과하다. 이 암초에 조류가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나 마치 바다가 운다고 하여 해협의 이름이 '명량(鳴樑, 바다가 울며 돌아나간다 하여 울돌목)'이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입구의 폭이 좁으니 대형선인 아다케부네는 거의 활동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중, 소형선인 세키부네와 고바야를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했다. 구루지마 함대의 전멸에 충격을 받은 도도 다카도라와 가토 유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룩가 휘하 함대를 이끌고 가세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좁은 수로 안에 많은 병력이 들이 닥치니 제대로 배를 움직이는 것초차 힘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순신은 모든 함대에게 '학인진'을 갖춘 것을 명령했다. 울돌목 안에 몰려 우왕자왕하는 일본 함대를 향해 조선 함대의 맹렬한 포격이 퍼부어졌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새 시간이 오후 4시가 되었다. 조류의 흐름이 지금까지의 흐름과는 달리 남동류(해협 추구에서 입구 쪽으로)로 흐르기 시작했다. 거센 물살이 일본 함대를 강타하자 그들은 더 이상 조선군을 향해 전진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조류의 흐름을 타고 조선 함대의 '충파전'이 시작되었다. 적함에게 가까이 다가가 근접 사격을 퍼붓거나 아니면 반쯤 부서진 적함을 향해 육중한 판옥선을 몰고 가 아예 배 전체를 깨뜨려 버리기도 했다. 점차 쌍여만 가는 피해에 일본 수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을 결정했다. 마침내 명량해전이 종결되었다. 일본 수군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채로 도망쳤다.
싸워서 이기지 말고 먼저 이긴 후에 싸운다
: [손자병법]에는 "싸운 후에 승리를 구하지 말고, 먼저 이긴 후에 싸우라."라는 대목이 있다. 명량 대첩을 둘러싼 논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순신이 바다 밑에 철쇄를 설치해 일본 함대의 진격을 막았다는 '철쇄설'이다. 그러나 직접 전투를 치른 당사자인 이순신의 기록에서 철쇄를 사용했다는 내용은 전혀 찾을 수 없으며,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도 철쇄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가장 짧은 거리인 190m 가량의 수로를 봉쇄할 철쇄를 설치한다고 해도 거기에 쓰일 철의 양은 너무나 많다. 결국 철쇄설은 근거가 희박한 낭설이라고 봐야 옳다. 명량 해전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가 얼마나 되었을까?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적함 31척을 파괴하였다."라고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이순신은 자신의 전공을 축소시켰는가? 그것은 그가 처한 입장에 따른 결과였다. 그가 자신이 거둔 전과를 그대로 보고하면 그를 무능했다고 매도했던 선조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전과를 축소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로 선봉에 섰던 구로지마 미치후사 함대는 몰살당하고 그 자신도 전사했으니, 총사령관인 도도 타카도라는 기함이 격침되어 중상을 입은 채로 바다에 빠져 둥둥 떠다니다가 구출되었다. 전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이 탑승한 기함마저 파괴되고 사령관 본인도 배를 잃고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는 증거이다.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해 볼 때, 명량 해전에서 격침된 일본 전함은 133척이며 약 1만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명량 대첩은 사실상 7년간이나 끌어 온 전란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승부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조선을 지배해야겠다는 야심을 포기하고 남해안의 왜성으로 후퇴해 본국으로 무사 귀환만을 바라게 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또한, 일본 수군의 중국 상륙을 우려했던 명나라 조정에서도 한시름을 놓았고, 수군을 보내어 조선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12. 이순신은 엄격하고 냉혹한 장군이었다
범법자와 탈주자를 무자비하게 처형하다
: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엄격했던 사나이
:
13. 그 많던 거북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거북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매천 황현의 '충무공귀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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