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김정미, 눈과마음, 2005, (081228).

바람과 술 2008. 12. 28. 04:20

머리말

 

1부 그녀의 카리스마

 

하쳅수트 - 태양의 딸, 최초의 이집트 여성 파라오

 

거대한 신전의 주인공

:

남편을 잃고 의붓아들의 섭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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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파라오가 된 여인

: 이집트의 관례상 여성은 파라오가 될 수 없었음에도 그녀는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세간의 입방아를 무마하기 위해 그녀는 남자의 옷을 입고 인조수염을 달았다. 하셉수트의 통치기는 이집트 신왕조의 전성기였다. 그녀는 상(上) 이집트와 하(下) 이집트를 통합하고 신권과 왕권, 군사권까지 모두 휘두르는 강력한 파라오가 되었다.

하쳅수트의 죽음과 업적 훼손

: 하쳅수트는 통치 20년 만에 파라오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죽음으로 인한 퇴위인지 혹은 반란이나 또 다른 물리적 사건으로 인한 퇴위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쳅수트의 사후에 그녀의 업적과 역사적 기록은 모두 훼손되었다. 심지어 하쳅수트가 왕위에 있었던 20여 년 간의 시간마저 부정되었다. 이집트 왕위 목록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누락된 채로 투토모스 2세 다음에는 투토모스 3세가 기록된 것이다. 그녀의 관 뚜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왕의 딸, 신의 아내, 위대한 왕의 아내, 두 나라의 여주인 하쳅수트는 말한다. - 오 나의 어머니 누트(하늘의 여신)여, 내 위로 몸을 활짝 펼치시어 당신 속에 있는 사라지지 않는 별들 속에 나를 받아들이소서, 내가 죽지 않도록."

 

클레오파트라 - 팜므 파탈? 혹은 지략가

 

독약 같은 아름다움의 상징

: 클레오파트라(BC69~BC30)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녀가 로마의 위대한 두 명의 영웅,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사랑하였고 그녀와 사랑하던 바로 그 지점쯤에서 두 명의 영웅 모두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거대한 로마의 힘으로부터 조국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한평생을 고심하며 보낸 파라오였다.  

총명한 여왕

: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이란 뜻이다. 이웃하고 있는 로마가 급성장하여 이집트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클레오파트라, 그녀는 강성한 로마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눈물겨운 외교술과 지략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시저와의 만남

: 외부적으로 가까스로 이집트를 지켜내가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에게 내부에서부터 위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롤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시저를 찾아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에 시저의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궁지로 몰라넣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무찌를 군대를 얻는다. 결과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의 군대로 내부의 적들을 일소하고 시저로부터 이집트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받게 된다.

안토니우스와의 사랑

: 시저와의 사랑은 그가 부르투스에게 암상 당함으로써 끝난다. 이제 시저에게 보장받았던 이집트의 독립은 다시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악티움 패전의 패배와 자살

: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운명까지 쥐고 있던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만다. 가까스로 지켜왔던 이집트의 독립도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과감히 자살을 택한다.

 

쯩자매 - 베트남의 국민 영웅

 

외세에 대한 베트남의 첫번째 응전은 중국 한나라의 침략에 맞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위대한 항전을 이끈 것은 지금도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두 명의 여성이었다. 그들이 쯩자매이다.

여자의 몸으로 일어서 중국에 맞서다

: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에 점령되었다. 초기 한나라의 베트남 통치는 간접적이고 폭압적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안주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기원 후 40년을 전후로 베트남에 대한 착취를 본격화하였다. 그때, 쯩 짝과 그녀의 여동생 쯩 니가 분연히 일어났다. 그녀들은 사람들에게 중국을 몰아내고 자주권을 찾자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지방 영주의 총명한 딸들

: 쯩자매는 기원 후 14년경 북 베트남의 지방 영주의 딸로 태어났다.

남편을 잃고 분연히 일어서다

: 맏이 쯩 짝의 남편 티 삭은 베트남을 독립시키려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티 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영주들의 계획은 은밀하고 조용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비밀 계획은 발각되고 티 삭은 중국군에게 잡혀가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미망인으로 상복을 입을 것도 거부한 쯩 작과 동생 쯩 니는 사람들 앞에 나서 중국군을 몰아내로자 설득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발달된 병기와 조직을 갖춘 중국군과 맞설 것을 두려워하였다. 게다가 쯩자매를 여자라고 불신했다. 그녀들은 직접 호랑이를 사냥하여 그 가죽으로 전투명령서를 작성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보냈다.

마침내 전쟁은 시작되었다

: 쯩자매는 함께 나란히 코끼리에 올라 전투를 직접 지휘하였다. 또 자매는 군대의 지휘를 모두 여성들에게 맡겼다. 기원후 40년, 중국 한나라의 군대에 맞서 베트남 사람들은 봉기하였다. 중국군을 몰아낸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지배하에 있던 65개의 성을 다시 되찾아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쯩자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베트남의 자유는 3년 만에 끝나고 만다. 후한의 광무제가 다시금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베트남을 쳐들어 온 것이다. 쯩자매는 기원후 43년 지금의 하노이 부근에서 중국과 최후의 전투를 치른다. 쯩자매는 적군에 손에 들어가 능욕을 당하는 대신에 자결을 택했다. 자매는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베트남은 그 후 900년 간 중국의 지배하에서 고통받다가 972년에 가서야 독립을 하게 된다.

베트남의 국민 영웅

: 쯩자매는 지금도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다.

 

선덕여왕 - 카리스마로 이룩한 통일의 기초

 

어렵게 획득한 왕권

: 7세기 초엽 신라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원래 신라의 왕위는 부모 양쪽이 모두 성골이어야만 하는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으로 성골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7세기에 들어서면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성골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딸 승만(후일 진덕여왕)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성골남성이 없다는 것은 성골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성골 다음 계급인 진골남성 중 유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러나 화백회의는 당시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이던 진골의 김용춘을 왕으로 추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평왕의 딸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남성 지배 중심의 고대 사회에 여성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탁월한 인재등용

: 왕위에 오른 후 선덕여왕이 보여준 군왕의 능력은 바로 인재등용에 있었다.

뛰어난 외교 전략으로 나라를 지키다

: 선덕여왕 재위시 신라는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시기 신라의 국외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국가의 존립이 문제가 있는 시기였다. 이때 선덕여왕은 과감하게 견제와 긴장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외교술을 펼친다.

그러나 고독했던 여왕

: 선덕여왕의 정치적 성공은 그녀의 개인적 삶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사벨 1세 - 위기를 기회로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카스티야에는 이사벨 1세라는 한 여왕이 있었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카와 벌인 왕위계승 다툼

: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1451~1504)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다소 복잡하고 평찬티 못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카스티야와 나바르, 아라곤, 포르투갈의 왕실은 친인척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나라를 고집하고 호시탐탐 서로의 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에스파냐의 탄생

: 중세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기독교를 믿었던 서고트족은 아들들에게 나라를 분할 상속했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는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르, 포르투갈로 나위어졌다. 단결하지 못했던 이 네 나라는 8세기경 이슬람세력의 팽창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땅을 거의 다 잃어버린 채 작은 규모의 나라들로 축소되었다. 후안 2세의 두 번째 부인의 딸로 태어난 이복 오빠 엔리케 4세에 비해 세력이 약했던 이사벨은 어떻게든 자신을 도와줄 세력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이웃 아라곤의 힘을 빌렸다. 이사벨은 공주이던 시절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와 비밀리에 정략결혼을 한다. 그리고 그 힘을 빌려 카스티야의 왕위를 무사히 차지하게 된다.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왕위계승 싸움을 끝내고 왕권을 안정시킨 이사벨 1세는 전격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합하여 에스파냐를 만들었다.

신대륙 발견의 결정적 후원자

: 왕권을 둔 정략적인 비밀결혼이라는 대담한 일을 벌였던 이사벨 1세답게 그녀는 정치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대담한 방법을 취했다. 그 어떤 나라도 몰아내지 못했던 남부의 이슬람국가 그라나다를 몰아낸 것도 이사벨 1세였다.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이사벨 1세는 사업에 나섰다. 포르투갈의 왕으로부터 마지막 거절을 당한 후 오갈 데 없던 콜럼버스를 이사벨 1세가 불러들였다. 콜럼버스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절반의 성공은 후일 에스퍄냐를 한때 유럽의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준 황금 밭이 되었다.

이사벨과 유럽 역사

: 이사벨 1세의 모험으로 이루어진 신대륙 발견과 해상활동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부추겨 해외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리게 하였다. 그녀의 뒤를 이은 이사벨의 딸 후아나 왕비의 아들 칼 1세는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등 전 유럽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20세기초까지 존속된 유럽 최고의 왕가인 합스부르크가를 열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 권력에 사로잡힌 포로

 

메디치가의 고아소녀

: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는 프랑스의 왕비였지만 프랑스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대표적 가문이자 유럽의 가장 큰 부호였던 메디치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친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딸이라는 이유로 상속권으로부터 멀어져 수녀원에서 자라났다. 카트린은 수녀원에서 자라는 동안 독일의 인질이 되는 수모를 겪는 등 평탄치 않은 유년기를 보앴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인 교황 클라멘스 7세의 부름을 받는다. 클라멘스 7세의 중매로 그녀는 프랑스의 왕자 앙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

프랑스의 천대받는 왕비

: 이 결혼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각국에 거세게 번지던 신교의 팽창을 막고자 했던 로마 카톨릭교회와 교황을 배후에 두고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프랑스 왕실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략 결혼이었다. 처음부터 애정이 없는 결혼이었지만 열네 살에 프랑스로 시집 온 카트린에게는 말도 못할 수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린은 총명하고 재기발랄한 여인이었지만 궁중에서 자신의 자리가 극히 협소하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칩거하였다.

마침내 권력을 손에 쥐다

: 조용히 엎드려 왕비의 자리만 지키던 카트린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다. 남편 앙리 2세가 마상 경기 도중 사망하고 나자 카트린에게는 왕이 된 어린 아들들의 섭정이라는 권력이 들어왔다. 카트린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를 서슴지 않고 이용했다. 카트린의 치세에 시작된 프랑스의 신교와 구교 간의 전쟁인 위그노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의 싸움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과 왕권의 안정을 추구하던 카트린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밤의 학살

: 큰아들 프랑수아 2세 사망 후 왕위를 이은 둘째 아들 샤를 9세는 자라면서 어머니 카트린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샤를 9세는 당시 신교도의 수장이던 해군제독 콜리니와 가까이 하면서 카트린을 권력으로부터 배제시켰다. 카트린은 어떻게든 권력을 다시 회복하려 했다. 막내딸 마그리트와 신교파의 대표자 나바르의 앙이 부르봉과의 정략결혼으로 신.구교도 간의 화해를 꾀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카트린은 기즈가의 사람들과 함께 콜리니의 제거를 모의한다. 앙리 브루봉과 마그리트 공주의 결혼으로 파리에는 많은 신교파들이 결혼 축하객으로 모여들었다. 카트린과 기즈가는 성 바르톨로메오를 기리는 축일의 밤에 파리에 와 있는 신교파의 지도자들을 모두 없애기로 하였다. 이날 이후 구교도들이 신교도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광기에 젖은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학살은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파리에 와 있던 결혼 축하객 신교도들은 3,000명 가량이나 학살되었고 프랑스 전역으로 따지면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종교적으로 아무 쪽도 아니었던 카트린은 오로지 권력유지를 위해 수많은 신교도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던 아들 샤를 9세까지도 독살하고 마는 사태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카트린이 프랑스에 남긴 것

: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성 바르톨로메오 밤의 학살 사건으로 프랑스 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여인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프랑스 문화사는 그녀로 인해 풍성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전까지 제대로 된 식문화를 가지지 못했던 프랑스에 부유한 메디치가의 음식문화를 들여와 발전시킨 것도 카트린이었다. 이때 와서야 프랑스에는 포크를 쓰는 식사 예법이 생겨났다고 한다. 더불어 향수를 프랑스로 가지고 온 것도 카트린이었다. 또 카트린은 이탈리아 귀족문화이던 발레를 프랑스 궁정에 소개해 이후 발레가 유럽 전역에 퍼지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 가장 불행했던, 가장 훌륭했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공주

: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그러나 사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불행은 그녀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꼭 적장자를 얻고 싶은, 아들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얼떨결에 영국의 왕비가 된 아름답고 가냘펐던 앤 불린이 정작 낳은 것은 딸 하나, 즉 엘리자베스 공주뿐이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 지 3년 만에 도끼로 목을 내리쳐 죽였다. 그 와중에 그의 세 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어머니 앤 불린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졸지에 서출이 되었다.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그녀는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기까지

: 엘리자베스는 사실 국왕의 지위와는 상당히 멀어 보이는 존재였다. 그러나 헨리 8세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에드워드 6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만다. 다행이었는지 불행히었는지 같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언니 메리가 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먼 훗날 서출로 왕이 되었다는 선례로써는 좋은 일이었지만 스페인에 경도되어 열렬한 구교 신종바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구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국교도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한다.

숙적 메리 스튜어트

: 메리 여왕의 공포 정치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은 다른 나라 왕족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영국혈통에, 국교도인 엘리자베스의 즉위를 환영했다.

국가와 결혼한 여인

: 엘리자베스 1세는 당대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하였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렀다. 더불어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또 이시에는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영국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메리 스튜어트 - 불꽃의 인생

 

영국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이 두 지역은 거의 다른 나라라 다름었다. 주민 정서부터가 매우 다르다. 그 배경에는 뿌리 깊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투쟁의 역사가 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세기에 와서야 하나의 나라로 합쳐졌다. 스코틀랜드는 마지막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끝으로 잉글랜드에 통합된다.

유럽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

: 메리 스튜어트(1542~1587)는 생후 1주일 만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고 열여섯 살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은 남편 프랑수아 2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 왕비로 살기보다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살고 싶었던 열아홉 살의 메리 스튜어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국으로 돌아온다.

엘리자베스 1세와의 질긴 인연

: 메리 스튜어트의 일생에 절대 배제할 수 없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바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국왕으로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였다.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 당시 행복한 프랑스의 왕비였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바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축복하지 않았다. 실제 통치자가 될 것도 아니면서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때부터 시작한 두 여인의 질시와 반목은 메리 스튜어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사랑과 결혼, 불륜 그리고 한없는 추락

: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국왕이라는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첫눈에 반한 남자 헨리 단리와 재혼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싫증났을 때 또 다른 남자 보스웰 백작과 불륜을 저질고 그와 공모하여 남편을 살해한다.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 헨리 단리가 죽고 3개월 만에 남편 살해의 공모자인 보스웰 백작과 또 다시 재혼한다. 그러자 스코틀랜드 전역이 들끊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신교파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다. 유폐된 상태에서도 복위를 꿈꾸며 그녀를 지지하는 구교 귀족들을 충동질했다. 그리고 생각해낸 것이 엘리자베스 1세였다.

죽음과 맞바꾼 잉글랜드의 왕위

: 엘리자베스 1세는 고민 끝에 일단 메리 스튜어트를 런던에 받아들인다. 그녀는 런던탑에 갇혀 있으면서 겉으로는 존경하는 친척인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위해 뜨개질과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뒤로는 엘리자베스 1세를 주이고 자신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등극하기 위한 모반을 꾸몄다. 그녀의 모반계획은 번번이 발각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차마 그녀를 처형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질질 끌었다. 신교 귀족들은 메리 스튜어트의 등극으로 다시 한번 잉글랜드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기 전에 메리 스튜어트가 죽어야만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의 사형 집행장에 사인을 하고 만다. 메리 스튜어트는 1587년 2월 어느 날, 전세계에서 왕으로는 처음으로 사형 당하였다.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는 어머니의 목숨과 바꾼 왕위 계승권을 받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영국의 제임스 1세이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 노회하고 전략적인 정치가

 

유럽 최고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

: 10세기경 작은 지역의 영주에서 시작한 합스부크르 가문은 영토 확장을 가문의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정략결혼으로 영토 확장에 나선 합스부르크가는 18세기 초반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 대륙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스페인,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왕은 모두 합스부르크가의 사람들이었고, 유럽 어느 나라든 합스부르크가의 여인이 왕비가 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8세기 초 이런 합스부르크 가문에도 고민이 생겼다. 아끼던 유일한 상속권자인 황태자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직계 합스부르크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 유일하게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왕위계승전쟁

: 카를 6세는 자신이 죽은 뒤 합스부르크 직접 통치령이 여타 방계 합스부르크에 의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나라의 법을 고쳐 딸에게도 왕권을 물려줄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카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르자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아래 있던 바이에른과 작센 영주가 그녀의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나섰다. 더불어 합스부르크의 방계이던 스페인과 이와 관련된 프랑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나섰다. 프로이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를 인정하는 대신 슐레지엔 땅을 내놓으라는 무력시위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일단 각국의 이권과 국가 간의 적대적인 관계 등을 고려한 모든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여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말 많은 외국의 친척 황제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외적으로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내세워 남편과 함께 공통으로 황제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스렸다.

가정에서는 순종적 아내, 정치에서는 뛰어난 위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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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18세기의 여왕

: 18세기 유럽은 새로운 사상으로 들끊고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이 대히트를 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또한 그런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정을 대폭 재정비하여 가혹한 농민 착취를 금하는 법을 만들고, 요즘으로 말하면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국민의무교육제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절대적인 왕권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였고 민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보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영토적인 국가 개념에 더 연연했다. 급진적인 계몽사상에 일말의 거부감마저 품고 있던 그녀는 계몽상상에 심취해 있던 아들 요제프 2세의 앞뒤 가리지 않는 행동을 매우 경계하였다.

 

예카테리나 대제 - 민초들을 피 말린 열정

 

프로이센의 작은 공국의 공녀

: 예카테리나 대제(1729~1796)는 러시아 황실의 사람도 아니었고 더구나 러시아 사람도 아니었다.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은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얻은 세례명이고 원래의 이름은 소피 프리테리케 오귀스트이다. 그녀는 프로이센과 스웨덴의 접경지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국이라는 작은 공국의 공녀였다.

러시아 황태자와의 결혼

: 당시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엘리자베타 여왕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엘리자베타 여왕은 자신의 뒤를 이를 러시아 황태자로 가를 울리히를 지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치세에 후사를 보겠다는 욕심으로 카를 울리히의 결혼을 서둘렀다. 러시아 황실과 왕권의 안정을 꾀하던 엘리자베타 여왕은 정치적으로 그다지 영향력이 없는 가문에서 황태자비를 간택하고 싶어했다. 그 결과 선택된 것이 소피 프리데리케 오귀스트였다.

마침내 차르가 되다

: 예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는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의 황태자인 스스로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자란 프로이센에 대한 해바라기 사랑으로 러시아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 사람인 예카테리나가 더 러시아를 사랑하였다. 자연스레 황태자의 인기는 땅에 떨어지고 황태자비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열광적이 되었다. 마침내 1762년 7월 러시아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쿠테타 군이 표트르 3세를 폐위시켰다. 그들이 다음 황제 즉 차르로 선택한 사람은 다름 아닌 표트르 3세의 아내인 예카테리나 왕비였다.

고귀한 이상 그러나 거듭된 실정

: 예카테리나는 원래 고귀한 이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당시 유럽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계몽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이전의 일방향적인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를 반성하고 러시아 백성들을 더 잘 살게 하겠다는 투지로 불타는 사람이었다. 예카테리나의 교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헌법은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헌법은 헌법을 제정했다는 의의만 남길 뿐 사문화되었다. 귀족들의 힘으로 차르에 오른 그녀는 불안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어야만 했다. 즉 농도들에대한 더 가혹한 착취의 권리였다. 그녀가 차르가 되기 전 꿈꾸었던 러시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 이후 가장 부강한 러시아를 만든 인물이기는 하였다. 대외적으로 전쟁을 통해 러시아 영토를 넓혔고 낙후되었던 러시아의 문화를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향상시켰다.

 

빅토리아 여왕 -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소박한 여왕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

: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통치하던 64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 영국은 그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카리스마를 배우다

: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넷째 아들 켄트공의 딸이었다. 왕위와는 그다지 가까워 보이지 않은 위치였기에 그녀는 자랄 때 제왕의 학습보다는 일개 공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예상치 못하게 빅토리아의 백부 월리엄 4세가 죽자 어느 날 왕권이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그녀에게 아버지처럼 다가와 제왕의 위엄을 가르쳐준 사람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멜번 경이었다. 그리고 그녀 나이 스무 살에 한 남자를 만났다. 독일 색스코버그 고터가의 앨버트 공과 결혼을 한 것이다. 앨버트 공은 지적이고 사려가 깊었으며 그녀에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의 도가 어떠한가를 직접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여왕을 둘러싼 남자들

: 빅토리아 여왕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 곁에서 보좌하는 남성즐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영국의 명 총리로 불리는 디즈레일리와 글래스턴도 그 속에 속한다. 빅토리아와 디즈레일리는 대외정책에서 한 뜻이 되어 영국의 식민지 확대에 열을 올렸다.

많은 것을 내주고 더 많은 것을 되돌려 받다

: 영국의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영국 군주의 위치를 자리매김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이다. 그녀는 자신이 내놓은 통치권의 일부를 총리와 정치인들이 백성들의 구미에 맞게 행사하는 동안 사진의 안전과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사안의 마지막 결정권은 끝까지 쥐고 있었다. 그녀는 전 국민의 지지와 사랑, 총리들의 전폭적인 신뢰, 그리고 영국과 영국 왕실의 안녕, 더불어 자시 자손들의 입지까지도 확고히 하였다. 왕으로서의 카리스마는 절대 잃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의 존재로 인하여 대영제국의 건설이 완성된 것이다.

 

서태후(西太后) - 나라까지 망쳐버린 욕심과 사치

 

아름다운 자태, 불타는 야망

: 서태후(1835~1908)는 19세기 말 중국을 마음대로 다스린 여인이다. 19세기에 게다가 남존여비사상이 엄격한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8년간 통치했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서태후가 권력과 조우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는 안후이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청소년기를 가난 속에서 보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녀는 궁녀가 되고 싶어했다. 막연히 궁궐에 들어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꿈꾸었던 것이다. 타고난 재주와 미모로 황제 함풍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태후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고 일약 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녀의 여섯 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식마저 희생시킨 권력욕

: 수렴청정으로 온갖 권력의 맛을 다 본 서태후에게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 자라지 않고 어린 황제로 있어주기만 바랬던 아들이 성장한 것이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서태후는 동치제를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방관한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도록 만든다.

멈출 줄 모르는 극단적인 사치와 향략

: 서태후는 황실의 세 살, 네 살 어린 아이를 황제로 내세워 양어머니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이어간다. 세 살의 아이가 성인이 되면 어김없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스물일곱 살의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인다. 영록은 평생을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현재까지도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짓게 하였다.

서태후와 청나라

: 서태후가 만든 보수적인 정치풍토는 새롭게 다가드는 서구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황실과 주변 귀족의 사치와 향락은 백성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서태후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서구열강의 손아귀에서 농락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2부 그녀, 혹은 예술가의 초상

 

사포 - 레스보스섬의 여류 시인

 

서정시의 대명사

:

사포의 생애

: 사포는 다작 시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에는 그녀의 시 일부부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사포는 기원전 617년에서 기원전 560년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어난 곳은 그리스의 레스보스섬 미텔레네이고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전한다. 사포는 안드로스섬의 케르킬라스라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 클레이스라는 딸을 하나 낳았다.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가족과 함께 2년간 시칠리아에 망명했었고 다시 레스보스로 돌아와 미텔레네에 자리를 잡았다. 이즈음 그녀는 남편을 잃고 홀로서기를 하여야 했다. 사포는 귀족 집안의 어린 소녀들을 모아 교육을 하면서 살아갔다.

레스보스섬의 소녀들

: 사포와 관련해서는 그녀의 서정시와 함께 여성동성애자를 일컫는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고대 그리스는 남자 귀족들에게는 매우 자유롭고 이상적인 사회였지만 여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특히 여성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필요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포를 중심으로 하여 여성들만이 모여 그들의 예술과 학문 세계를 만들어갔다는 것은 대단한 파격을 의미했다. 이리하여 레스보스섬의 사람들이란 말, 레즈비언은 남성과 똑같이 조직을 만들어 공부하는 여성들이 있는 곳을 뜻하는 말이 되었고, 이후 여성동성애자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쉬잔 발라동 - 몽마르트의 여인

 

19세기 말 프랑스의 수도 파리, 그중에서도 몽마르트 언덕은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예술가들의 베아트리체아 같았던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이었고 음악가들의 벗이었으며 그들 모두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림 속의 여자

: 그녀는 몽마르트 화가들의 단골 모델 쉬잔 발라동(1867~1938)이다. 가난한 세탁부의 사생아였던 쉬잔은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세탁부로 일했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서커스단에서 곡예사로 일하였다. 그러나 그네에서 떨어지면서 곡예사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막막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몽마르트의 직업 모델로 나섰다. 그녀는 화가들이 원하면 싼값에 스스럼 없이 누드모델이 되어 주었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몽마르트의 애인

: 쉬잔 발라동이 어울린 예술가들은 오늘날 예술사에서 후기 인상파로 알려진 화가들이었다. 그녀는 그들 모두가 모델이자 애인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로트렉과 음악가 에릭 사티와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림 밖으로 나와 화가가 되다

: 쉬잔 발라동은 화가의 모델이 되는 것으로 인생을 마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화가들의 모델로 서면서 어깨너머로 본 그림들을 체화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홀로 숨어서 그림을 그렸다. 쉬잔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드가였다. 그리고 로트렉과 함께 쉬잔이 화가로 일어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녀는 남성 화가들이 여성 누드를 바라볼 때의 탐미적인 관점과는 달리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몸속에 녹아 있는 여성의 삶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아들과 어머니

: 쉬잔 발라동에게는 그녀가 열여덟 살에 낳은 사생아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열 살 때부터 몽마르트의 뒷골목에서 압상트 술맛을 알게 된 위트릴로의 청년시절은 알코올중독과 정신착란으로 점철되었다. 이른 나이에 병원에 입원한 그에게 어머니 쉬잔 발라동이 제시한 것이 그림이었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의 거리 구석구석을 자신의 화폭에 남겨 모딜리아니와 함께 몽마르트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들에게 어머니다운 사랑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했던 쉬잔 발라동이었지만, 화가로서 나란히 서게 된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와는 말년에 화해를 하게 된다.

 

케테 콜비츠 - 민중 미술의 어머니

 

사회주의자 집안의 그림 그리는 소녀

: 케테 콜비츠(1867~1945)의 결혼 전 성은 슈미트였다. 케테의 외조부는 1848년 독일 시민력명 이후 민주헌법 제정에 참여했고 정치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자유교회를 처음 세운 사람이었다. 케테의 아버지는 법관이었지만 프로이센 정부의 민중 억압과 부패상을 보고 법관자리를 박차고 나와 미장이가 된 사람이었다. 자유롭고 혁신적인 가문이었던 만큼 여성들에 대한 차별도 없었다. 열여덟 살 때 케테는 사회주의자인 오빠 콘라드를 따라 베를린으로 가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한다.

남편 콜비츠와의 결혼

: 케테는 1891년 스물네 살 때 의사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카를 콜비츠와 결혼하였다. 카를 콜비츠는 베를린 외곽에 자선병원을 세워 그곳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활동으 펼쳐나갔다. 케테는 남편의 자선병원에서 고통받는 독일 민중을 만났다.

연극 <직조공>에서 얻은 영감

: 단지 미술을 공부한 자선병원장의 아내일 뿐이던 케테 콜비츠를 한 사람의 예술가로 일으켜세운 것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1893년 하우프트만의 연극 <직조공>을 보고 강한 영감을 얻은 케테는 일련의 연작 판화 <직조공의 봉기>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 이 연작 판화는 베를린예술전람회에서 금상으로 확정되었지만 황제 빌헬름 2세의 거부로 수상이 취소되었다. <직조공의 행진> 이후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하나의 방향을 향해 곧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반전 작가로

: 연작 판화 <농민전쟁> 등 일련의 민중미술을 주도해가던 케테 콜비츠에게 커다란 개인적 슬픔이 들이닥친다. 그녀의 막내아들 페테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나갔다가 전사한 것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 침착하던 케테 콜비츠는 마침내 자신의 불행을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반전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민중 예술의 어머니

: 케테 콜비츠 이후 많은 민중 미술들은 그녀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걸었다.

 

이사도라 덩컨 - 자유와 열정으로 춤추는 맨발의 무용가

 

이전 시기 발레리나가 짜여지고 정형적인 동작을 고통스럽게 표현하던 것과는 달리 춤추는 사람 스스로의 내면을 표현하고 관객과 공감하는 새로운 무용이 나타난 것이다. 그 새로운 무용을 만들어낸 사람이 이사도라 덩컨이었다.

맨발의 댄서

: 신대륙 미국에서 건어온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1877~1927)은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유럽 예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춤으로 인해 무용에 대한 인식은 180도로 전환되었으며 토슈즈의 발레를 떠나 자유롭게 인간의 몸과 마음을 표현하는 현대 무용이 등장하였다.

마음으로 춤을 느끼는 소녀

: 이사도라 덩컨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이 되자 시카고로 간 이사도라 덩컨은 프로 무용수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고살기 위해 술집에서 캉캉과 비슷한 것을 추면서 돈을 벌었다. 돈벌이는 괜찮았지만 이사도라 덩컨은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다. 그것은 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뉴욕으로 건너간 이사도라 덩컨은 2년간을 더 삼류 무용수로 보낸다. 그녀는 20세기를 1년 앞둔 1899년, 가축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에서의 열광

: 이사도라 덩컨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던 미국과는 달리 세련되고 폭이 넓은 유럽의 예술계는 그녀의 춤을 단번에 받아들였다. 이사도라 덩컨의 성공은 독일과 러시아에서 눈부셨다. 특히 정통 발레의 본고장이었던 러시아에 이사도라 덩컨이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새로운 무용에 대한 전폭적인 관심으로 이사도라 덩컨은 무용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드라마틱한 최후

: 인생에 닥친 모든 고통을 춤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던 이사도라 덩컨은 1927년 프랑스 니스에 있었다. 최근에 사귄 젊은 벗이 그녀에게 스포츠카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빨간색의 길고 긴 머플러를 두른 이사도라 덩컨은 가볍게 차에 오르며 친구들에게 '안녕, 나는 영광을 위해 떠나!'라고 외쳤다. 그리고 머플러 자락을 뒤로 넘기고 차가 출발했다. 빨간색 머플러가 자동차 바퀴에 끼면서 그녀의 목이 부러졌다.

 

코코 샤넬 - 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패션 혁명가

 

샤넬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현대 여성 옷의 기준을 세웠다는 데 있다. 19세기까지 조형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신체를 학대하며 코르셋으로 조여왔던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해방시킨 사람이 바로 샤넬이었다. 그녀는 코르셋으로 조이지 않은 여성의 자연스러운 육체의 아름다움을 패션 속에 녹여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버림받은 고아소녀

: 프랑스에서 오르베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코코 샤넬(1883~1971)의 원래 이름은 가브리엘 샤넬이었다. 샤넬은 열두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두 자녀를 키울 마음이 없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서 성장한다. 고아원에서 요구하는 규율은 모두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그녀는 스무 살에 인근 도시 물랭에서 유아용품의 판매원으로 취직하지만 곧 그만둔다. 그리고 기병들이 드나드는 싸구려 바에서 댄서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즐겨 부르던 노래 코코에서 이름을 따 코코 샤넬로 이름을 고쳤다.

그녀를 성공시킨 두 명의 남자

: 샤넬의 성공기에는 중요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싸구려 바에서 최초로 샤넬을 건져낸 사람은 상류층의 부유한 남자 에티엔 발상이었다. 그는 샤넬을 자신의 호화스러운 별장에 두고 그녀를 가꾸기를 좋아했다. 비참한 어린 시절 동안 배우지 못했던 상류층의 예절과 습관을 샤넬은 모두 이곳에서 배운다. 그녀가 두 번째로 만난 남자는 영국인 사업가 아서 카펠이었다. 그는 샤넬에게 살롱과 의상실을 열 수 있는 돈을 빌려 주었다.

단순하고 명료한 디자인

: 샤넬 디자인의 정수는 단순함과 명료함이다. 샤넬의 디자이너로서의 첫걸음은 모자 디자인부터였다. 19세기 말 여성들은 모자에 온갖 것들을 장식하고 다녔다. 샤넬은 일반 여성들이 쓰는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거부하고 스스로 디자인한 검은 모자에 하얀색 리본 하나만을 두른 단순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 모자는 당시 상류층 여인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녀는 모자 디자인에만 그치지 않고 1913년 도빌에 의상실을 열었다. 이곳에서 샤넬은 여성의 옷과 향수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옷으로부터의 해방

: 1913년 도빌에 연 샤넬의 의상실은 패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쾌거를 이루어낸다. 샤넬은 여성 옷의 코르셋을 과감히 생략하였다. 그녀가 디자인 한 옷은 여성성을 나타내는 약간의 곡선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허렁하며 움직임이 자유로운 형태의 옷이었다. 이 옷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샤넬은 1920년 이른바 <샤넬 라인>으로 알려진 무릎 및 5~10cm까지만 오는 길이의 스커트를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성 옷에서 다리를 드러낸 것은 샤넬의 옷이 최초였다. 여성의 옷에 주머니를 달고 여성이 입을 수 있는 재킷을 만들어낸 것도 샤넬이었고, 어깨에 메는 숄더백을 디자인해 핸드백으로부터 여성의 손을 해방시킨 것도 샤넬이었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 '패션이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는 말은 샤넬이 남긴 중요한 말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 추리소설의 여왕

 

조용하고 수줍은 주부가 만든 기묘한 추리소설

: 애거서 크리스티(1891~1976)의 소설에 나오는 범인들은 모두 아름다운 외모와 강력한 정신력, 세련된 예의와 우아한 사교생활로 완전 무장을 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해 범죄를 밝히는 탐정들은 결점투성이들이다. 온갖 추악한 범죄수법만을 머리를 굴려 짜낼 뿐 인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었기에 번번이 탐정들에게 지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자란 격식있는 영국의 귀부인이었다. 순진한 얼굴에 가사를 돌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주부였다.

독약에 대해 배우고 소설을 쓰다

: 결혼 직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애거서는 남편을 전장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적십자사에서 간호사로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독약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익힌다. 이 무렵 애거서 크리스티는 언니와 기묘한 내기를 벌인다. 소설 끝까지 절대 범인을 알 수 없는 추리소설이 가능한가에 대한 내기였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던 애거서는 언니에게 보이기 위해 [스타일즈 저택의 미스테리]를 쓴다. 이 소설로 인해 그녀는 일약 추리소설계의 신예로 떠오른다.

불행했던 첫 번째 결혼생활

: 애거서 크리스티는 최정점에 올랐던 1926년 돌연 실종된다. 그리고 실종 11일 만에 그녀는 시골의 작은 호텔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호텔방에 숙박계에 애거서가 적은 이름은 남편이 바람피운 여인의 이름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고고학자와의 재혼

: 실종사건 2년 뒤 애거서 크리스티는 남편 아치볼트와 이혼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훌쩍 메소포타미아로 여행을 떠난다. 연하의 고고학자 맥스 맬로윈을 만나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 반했고 14년이란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을 한다. 맥스 맬로윈은 애거서에거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그런 환경이 그녀의 천재성을 폭발시킨 것일까? 맥스 맬로윈과 결혼한 1930년 이후 그녀가 발표한 작품은 모두 걸작들이었다.

추리소설의 여왕

: 애거서 크리스티는 1971년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던 영국여왕으로부터 남자들의 기사작위에 해당하는 데임(Dame) 작위를 받는다. 그녀의 작품은 전세게 100여 개국에 번역되었고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이 되었다.

 

나혜석 - 이루지 못한 선각의 꿈

 

신여성 혹은 모던걸

: 1920년대 한국의 지식인, 도시 사회에서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했다. 이른바 모던 걸, 모던 보이의 등장이다. 이들은 새로 들어온 서구식 교육의 세례를 받도 서구 사상에 심취하여 그들의 일상과 가치관을 새로운 것에 맞춘 사람들이었다. 신여성들은 구습 속에서 남녀 차별을 받던 한반도 여성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싶어했다. 자신이 습득한 새로운 사상이 당시 한반도 사회에 적용될 경우 나타날 부작용이나 스스로에게 미칠 해악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그들은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삶 자체를 실험용으로 던졌다.

여류 화가 나혜석

: 그중에 화가 나혜석(1896~1948)의 삶은 근대 신여성의 용감하였으나 완전하지 못했던 선각의 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그녀는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 여성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신여성의 대명사였다.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문필분야에까지 활동하며 새시대의 신여성이 나아갈 바를 열렬히 부르짖었다. 또 남편에게 혼인 각서를 쓰게 하는 등, 결혼에서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연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한편 3.1운동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르고 무정부주의 단체인 의혈단의 후견인이기도 하는 등 선각자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부동반 유럽여행, 그리고 최린과의 짜릿한 연애

: 나혜석의 삶은 1927년을 전후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남편 김우영과 함께 한 유럽순방과 파리 유학이 그것이다. 남편과 잠시 떨어져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나혜석은 최린과 만난다. 이미 서구의 자유로운 연애 사상에 심취해 있던 나혜석은 아무런 주저없이 최린과의 연애에 스스로 뛰어든다. 그 결과 나혜석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남편과 이혼한다.

미완의 꿈

: 나혜석의 외도는 유럽에서는 그럭저럭 사랑을 택한 용감한 선택으로 보여졌을지 모르지만 당시 한국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탈이었다. 이혼 이후 나혜석은 궁지로 몰린 자신을 스스로 변명하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하였다.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에게 보상금을 요구하는 제소장을 냈다. 이 일로 나혜석은 용서받지 못할 천하의 이단아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후 그녀의 삶은 비참했다. 천하의 나혜석은 빛나는 재능과 지성을 탕진한 채 한번 잘못 들어선 진창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좌절하고 만다. 그녀의 선각자적인 삶은 세상의 몰이해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겨울날 채 피우지 못하고 얼어죽은 꽃이 되었다.

 

레니 리펜슈탈 -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천재

 

히틀러는 뛰어난 한 명의 예술가에게 자신이 가장 멋지고 힘 있게 보일 수 있는 영상을 만들게 했다. 예술가는 그의 요구에 맞추어 히틀러와 나치를 선전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양날의 칼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낸 최고의 영상 예술가는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정력적이고 활동적이며 열정적인 여인이었다.

20세기 논쟁의 중심에 있던 감독

: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은 영화사에 있어서 20세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만든 작품들은 영화 기술적으로 미학적으로 너무나 훌륭하며 획기적이었지만, 문제는 그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나치의 카메라가 되어 나치가 원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은 나치와는 상관이 없이 오로지 영화 미학만을 추구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해왔다.

히틀러와의 만남

: 레니 리펜슈탈의 파란만장한 삶은 무용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레니 리펜슈탈은 무용가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배우로 변신한다. 강건한 신체와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그녀는 바로 산악영화의 히로인으로 급부상하였다. 곧이어 레니 리펜슈탈은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고 영화제작.시나리오.연출.주연 등을 도맡아하기에 이른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 <푸른 빚>이며, 이 영화의 성공은 레니 리펜슈탈과 세계 영화사에 지울 수 없는 만남을 만들어냈다. 레니 리펜슈탈은 그녀의 팬이 된 히틀러와 굳게 손을 잡았다. 나치는 무제한적으로 레니 리펜슈탈의 요구에 맞춰 군부대까지 동원해서 영화제작을 도왔다. 히틀러의 레니 리펜슈탈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간혹 그녀가 히틀러의 여자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너무나 예술적인 그러나 너무나 정치적인

: 레니 리펜슈탈은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마음껏 영화 기자재를 이용하고 대규모의 스태프를 도원하여 아무나 이루어낼 수 없는 뛰어난 영상미를 만들어냈다. 그녀가 만든 작품은 너무 아름답고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천재성은 그녀가 잘못 선택한 정치 노선 때문에 이후 활동 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리펜슈탈

: 제2차 세계대전 후 레니 리펜슈탈은 오랫동안 전범 재판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를 만들 기회를 잃어버린 레니 리펜슈탈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2003년 레니 리펜슈탈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잘못은 히틀러를 만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마가렛 버크화이트 - 역사를 기록한 한 장의 사진

 

20세기 격동의 현장에 선 사진작가

: 마가렛 버크화이트(1906~1971)가 포토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시기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이다. 그 격동의 시기에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사진기를 둘러메고 역사의 현장 그 어디에나 있었다.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당시 사진을 찍는 유일한 여자였다. 여자는 아무도 바지를 입지 않던 시절에도 바지를 입고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녀가 찍는 사진들은 그 누구보다 대담했으며 현장에 충실했고 때로는 미학적이었다.

<라이프>지의 성공

: 1936년 사진 중심의 시사지 <라이프>가 창간되면서 버크화이트는 날개를 달았다. 그녀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여러 장의 사진을 포토에세이 식으로 찍어 연재했다. 그녀의 사진은 단순히 현장기록의 차원에만 그치지 않고 사진으로 기사의 관점을 피력하는 저널의 단계로 뛰어올랐다. 버크화이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버크화잉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군 기자로 활약하면서 그 누구도 찍을 수 없는 사진들을 찍었다. 그녀의 사진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세계의 여론과 정치를 결정하게 하는 기준이 되었다.

인간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

: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사진은 처음에는 주로 기계와 산업현장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차츰 사진을 찍어갈수록 그녀는 현장 이면에 있는 인간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1945년 이후 버크화이트는 인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은 1950년 한국전쟁에까지 이어진다.

생생한 역사 기록자

: 1952년 한국전쟁 종군기자로 활약하던 버크화이트는 갑자기 몸이 둔해진 것을 느낀다. 버크화잍트는 이전에 잠시 걸렸던 뇌염의 영향으로 파킨슨병을 앓게 된다. 이후 18년간 지속된 투병생활 동안 그녀는 항공사진에 눈을 돌려 하늘을 계속 찍어 냈고 그 결과 <헬리콥터에서 본 미국>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최승희 - 아름다운 코리안 댄서

 

아름다운 코리안 댄서

: 1937년 국미 각국 순회공연부터 시작한 최승희의 해외공연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당대 서구의 많은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춤에 흠뻑 빠졌다. 그중에는 피카소와 장 콕토 등도 있었다. 최승희는 해외공연시 자신을 언제나 코리안 댄서라고 명시했다. 식민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최승희의 당당함과 용기에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최승희(1911~?)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한 소녀였다. 숙명여학교를 다니던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최승희에게는 인생의 결정할 일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에 공연을 온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이후 최승희는 자신의 앞날을 무용가로 결정하였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이 무용단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무용가로 성장했다.

한국무용의 체계를 잡다

: 최승희의 무용관은 다분히 사회적이며 민중적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무용을 좋아했고 예술이 상류 계급에만 봉사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1929년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린 최승희는 곧이어 한국전통무용에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많은 한국 전통무용 전수자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무용을 삿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무용과 과감히 접목시킨다. 최승희는 승무.칼춤.부채춤.가면춤 등을 무대 위에 올렸다. 이전 시기까지 기방이나 기층의 백성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행해졌던 한국의 춤문화가 마침내 무대를 얻은 것이다. 최승희는 자신이 개발한 한국무용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 전쟁을 목전에 둔 일본에게 최승희는 너무 좋은 선전도구였다. 일본군부는 최승희에게 '전선 위문 공연'을 강요한다. 1942년부터 2년간 최승희는 일제의 총칼 아래서 하는 수 없이 만주와 중국 본토 등지를 떠돌며 전선 위문공연을 다녀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지울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월북과 그 이후

: 최승희 남편 안막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회주의 문학을 하던 문학가이자 이상주의자였다. 1945년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정치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남과 북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남편을 따라 월북의 길을 택한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월북 후 얼마 되지 않아 숙청 당하고 만다. 최승희 또한 1969년 정치적으로 숙청 당하고 그 이후 함경도 일대를 떠돌다 1980년대 초반에 죽었다고 한다. 최승희와 안막의 예술가적이며 이상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일 현실정치는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 -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영혼을 올리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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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홀리데이는 재즈 역사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뛰어난 보컬리스트이다. 흔히 말해서 3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로는 엘라피츠제랄드와 사라본, 그리고 빌리 홀리데이가 꼽힌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성이 아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악보에 의존하지 않고 그때그때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영혼을 울리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였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너무나 지독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빨리 삶의 고통을 알아버린 소녀

: 빌리 홀리데이(1915~1959)는 1900년대 초반 모든 미국 흑인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가혹안 인종차별과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발리의 본명은 일리노어 페이건이다. 페이건이란 성은 어머니를 따른 것이다.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딸을 양육할 능력이 없던 어머니는 일리노어를 친정에 맡겼다. 그리고 열살이 되자 일리노어는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일리노어는 열 살의 나이에 일하러 나간 집에서 백인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감화원에 가야만 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또 다시 다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녀는 이 사건들을 계기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리고 자포자기 속에서 결국 뉴욕의 뒤골목을 헤매는 창녀가 되었다. 열네 살의 어린 창녀 일리노어는 하루 벌러 하루를 살며 하루하루 망가지고 있었다.

치자꽃을 머리에 단 가수

: 당시 미국은 경제 대공황기를 맞고 있었다. 일리노어는 급박한 심격으로 '포즈와 제리즈'라는 나이트클럽에 댄서로 응모한다. 나이트클럽 주인의 면박을 받으며 힘없이 돌아서던 일리노어에게 피아노 연주자가 장난 삼아 노래나 한번 불러보라고 한다. 그 노래는 흑인 창녀 일리노어 페인건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가수 빌리 홀리데이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무대 위에서 레이디, 무대 아래에선 검둥이

: 1930년대 빌리 홀리데이는 음반을 취입하고 여러 악단과 공연을 하며 재즈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무대 위에 선 그녀의 자태가 너무 품위 있고 우아해서 레이디 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무대 위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가수였다. 그러나 무대 아래 내려오면 가혹한 미국의 인종차별 속에서 그녀는 검둥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녹여 보려고 성급히 결혼을 한다. 그러나 두 번의 결혼 모두 실패였다. 그 결혼들은 그녀를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기는 커녕 외로움과 비참함을 더욱 짙게 했으며 그리고 마약이라는 씻을 수 없는 해약을 남겨 주었다.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

: 카네기 홀에서의 연주, 재즈 비평가상의 수상, 최고의 음반 판매 등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1959년 빌리 홀리데이는 쓰려져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한다. 마약에 찌들은 중년의 여인을 아무도 빌리 홀리데이라고 알아보지 못했다. 본명 일리노어 페이건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딱딱하고 차디찬 병상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역시 외로운 마지막을 맞이한다. 진료 기록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 칼라스 - 노래에 살고 사랑에 죽고

  

때로 사랑의 함정에 빠져 재능을 망치는 경우를 왕왕 본다. 20세기 중반 세계는 인간의 목소리 그 이상의 목소리를 가진 한 명의 가수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 문화계의 히로인이었던 마리아 칼라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신이 주신 목소리를 가진 소녀

: 마리아 칼라스(1923~1977)는 미국의 그리스 이민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지독한 근시에다가 뚱뚱했던 그녀는 관심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1930년대 경제공황기에 미국에서 맞이한 아버지의 파산과 부모의 이혼 등 불행 속에서도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만은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다시 돌아온 그리스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날개를 달게 된다. 그리스 왕립음악원에서 만난 스승 이달고 여사의 교육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프리마돈나의 목소리로 가다듬어진다.

프리마돈나의 탄생

: 아버지를 찾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두드린 세계무대로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마리아 칼라스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오디션을 받았지만 탈락했다. 그때 그녀에게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함께 일했던 이탈리아 출신 베이스 가수 레메니의 소개로 마리아 칼라스는 베노나의 아레나에서 <라 지오콘다>를 부를 기회를 잡게 된다. 이 무대를 계기로 마리아의 훗날 남편이자 매니저가 된 메게니니와 음악적 후원자인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 세라핀을 만나게 된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승승장구하며 인생 최고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마리아 칼라스는 평생의 짐이었던 무거운 몸무게도 떨쳐버린다. 일년 만에 30kg을 감량하며 명실상부한 어떤 오페라에도 어울리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프리마돈나로 거듭난 것이다.

오나시스와의 염문

: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에 감동한 오나시스는 그녀와 남편 메게니니를 자신의 유람선 크리스타나에 초대한다. 오나시스에게 빠진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며 인생을 바쳤던 노래와 무대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사랑의 상처

: 그러나 오나시스의 사랑은 쉽게 식었다. 오나시스는 세계적인 프리마돈나를 자기 여자로 만든 것에만 만족할 뿐 마리아 칼라스를 평생의 동반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배신은 마리아 칼라스에게 도저히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전성기와 같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세월이 가버렸음을 알아차린 마리아 칼라스는 쓸쓸히 뉴욕에서 칩거하며 세상을 멀리하였다.

불멸의 디바

: 오나시스의 처절한 배신에도 마지막까지 그와 결합할 것을 희망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오나시스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생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채 파리에 은둔한다. 그리고 1977년 마리아 칼라스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마릴린 먼로 -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

 

노마 제인 모텐슨의 불우한 어린 시절

: 마릴린 먼로(1926~1962)의 짧은 인생은 20세기 초중반 미국역사의 그늘과 함께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본명이 노마 제인 모텐슨인 마릴린 먼로는 이제 막 할리우드 영화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로스앤젤레스에서 필름편집 일을 하던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노마 제인이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이때부터 노마 제인은 무수한 보육원과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이런 시절을 보냈다. 지긋지긋한 시설 생활과 후견인의 남편들로부터 당하는 성희롱 드을 견디지 못했던 노마 제인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도망치듯 결혼한다. 노마 제인은 남편을 전장으로 내보래고 낙하산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 되었다.

마릴린 먼로의 탄생

: 낙하산 공장에서 일했던 노마 제인에게 작은 기회가 왔다. 애국심 진작을 위해 군수공장 여공들의 사진을 찍게 한 정부 시책으로 노마 제인은 모델로 설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녀의 사진은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곧이어 노마 제인에게는 다른 사진 모델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누드 사잔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지긋지긋한 공장생활보다 그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폭스사에 단역 배우 자리를 얻게 된다. 이 때 그녀는 자신의 본명 노마 제인 모텐슨을 버리고, 또 동시에 서류상으로만 남은 결혼과계도 청산한다. 그녀가 새로 얻은 이름은 마릴린 먼로였다.

섹스 심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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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들

: 배우로 성공한 마릴린 먼로는 프로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 세기의 결혼을 한다. 조 디마지오는 곧이어 마릴린 먼로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고 마릴린은 9개월 만에 두 번째로 이혼장에 도장을 찍게 된다. 그러던 중 마릴린 먼로는 마침내 '아빠'를 찾아냈다. 섹스 심볼으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싶어 몸부림치던 마릴린 먼로 앞에 당대 최고의 지성인 극작가 아서 밀러가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관계라기보다는 사제관계에 가까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임신이 유산으로 끝나버리고 난 뒤 두 사람의 결혼도 위태로워진다.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4년 만에 이혼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즈음 마리린의 약물복용은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녀는 대단한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존F.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그들이다.

의문의 죽음

: 인생의 마지막 1년간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케네디가의 며느리가 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방황과 혼란 속에 배우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때 그녀에게 다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전 남편 조 디마지오였다. 마릴린 먼로는 그와 다시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혼을 3일 앞둔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자신의 침대 위에서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그녀의 자살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너라 그녀의 죽음은 결국 자살로 마무리되었다.

 

제니스 조플린 - 우드스탁의 여신

 

우드스탁의 여신

: 1969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뉴욕주 남부의 한 작은 마을, 우드스탁에서 벌어진 음악 페스티벌, 우드스탁의 무대에서 배출된 많은 혜성 같은 뮤지션들은 그들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짐 모리슨과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청중의 가슴에 비수 같은 목소리를 꽂으며 등장한 제니스 조플린(1943~1970). 그녀는 남성 라커들 틈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뿜어내며 당당히 노래 불렀다.

텍사스의 못생긴 여자아이

: 자유분방함의 상징과도 같은 제니스 조플린은 그러나 매우 보수적인 텍사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미국의 청소년사회는 소심하고 아름답지 않은 소녀에게는 너무 가혹한 세계였다. 한때 제니스는 그녀가 다니던 텍사스 대학에서 '가장 못생긴 남학생'에 선정 당하는, 우스꽝스럽지만 매우 가슴 아프며 잔인한 대접까지 받기도 하였다.

영혼을 찢어 놓을 듯한 목소리

: 그녀는 술과 마약 그리고 남자들 사이를 오가며 20대 초반을 방황으로 지냈다. 제니스는 여러 술집을 돌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제니스는 이즈음 텍사스를 벗어나 한창 플러워무브먼트를 벌이고 있던 히피들의 중심지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간다. 빅 브라더 앤드 홀딩 컴퍼니 밴드의 리드 보컬이 된 제니스는 1967년 몬트레이 팝페스티발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한다.

술과 마약과 그리고 노래

: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솔직한 노래를 남기고 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니스는 고독했다. 그리고 제니스가 유명세를 타면 탈수록 멀어져가는 인간관계는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노래에 더욱 집착했고 더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술과 마약에 더 집착한느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한때, 그녀에게도 봄이 다가오는 듯이 보였다. 1970년 제니스는 한 청년과 약혼을 하고 그와의 결혼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1970년 제니스는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헤로인 과다복용이었다.

여성 라커의 시조

: 제니스의 죽음 후 그녀는 락의 전설이 되었다.

 

3부 그녀, 세상 속으로

 

레이디 고다이버 - 이유 있는 누드

 

알몸의 영주 부인

: 11세기 영국 잉글랜드 중부지역에 위치한 코벤트리. 그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달려 마을을 한 바퀴 다 돌 동안 누구하나 그녀의 몸을 보기 위해 창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의 부인 레이디 고다이버였다.

11세기 영국의 상황

: 11세기 영국은 복잡한 정치.경제적 변화를 맞고 있었다. 영국은 6세기 이후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의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8세기와 10세기에 북유럽 바이킹족인 데인족의 침략의 받아 11세기 초반은 데인족의 오아인 크누트 1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데인족의 영국 통치는 영국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자유농민으로 영주의 땅을 빌려 소작만 하던 농미들의 신분이 데인족의 가혹한 세금징수에 의해 노예상태인 농오의 신분으로 하락한 것이다. 런던과 비교적 가까운 지역의 번성한 마을 코벤트리도 영국 전체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주 부인 레이디 고다이버

: 코벤트리의 가혹하고 잔인한 영주, 레오프릭에게는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의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레이디 고다이버이다. 고다이버는 나날이 몰락해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남편에게 과중한 세금정책을 고쳐줄 것을 부탁한다. 레오프릭은 고다이버의 읍소가 그칠 줄 모르자 그녀에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고다이버의 농민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라면 그 진실을 몸으로 직접 보이라는 것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나가 마을을 한바퀴 돈다면 그녀가 그토록 호소하는 세금감면을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고다이버는 결국 남편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농민들은 영주의 부인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농민들 스스로도 큰 결정을 내리게 된다. 레이디 고다이버가 벌거벗고 마을을 도는 동안 마을 사람 누구도 그녀의 몸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고다이버와 관련한 여러 가지 것들

: 그러나 도저히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사람도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코벤트리의 양복 재단사 톰은 마을사람들과의 합의를 잊어버리고 그만 커튼을 슬쩍 들추어 레이디 고다이버의 나신을 보려하였다. 그 순간 톰은 장님이 되고 만다. 톰에 대한 이야기는 훔쳐보기의 대명사로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말로 전해지고 있다. 레이디 고다이버의 이야기는 이후 학자와 역사가들에게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관행이나 상식, 힘의 역학에 불응하고 대담한 역의 논리로 뚫고 나가는 정치'를 고다이버의 대담한 행동에 빗대어 '고다이버즘(godivaism)'이라고 부르고 있다.

 

잔 다르크 - 신이 보낸 소녀

 

신의 계시를 받은 소녀

: 잔 다르크(1412~1431)는 프랑스 동레미의 한 평범한 농가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는 100년째 영국과 지루한 왕위계승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랑스 전역은 전장으로 변했고 백성들은 잦은 전쟁에 피폐해져 있었다. 동레미의 평범하고 작은 소녀, 잔 다르크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실천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 프랑스의 황태자 샤를이 머물고 있는 시농성을 찾아갔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엄밀히 말하면 영국의 랭카스터가와 프랑스의 발루아가와의 왕위계승전쟁이었다.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두 가문 간의 백년 전쟁은 시작되었다. 샤를 4세의 사촌인 발루아가의 필리페 6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영국의 랭카스터 가문 또한 만만히 물러나지 않았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어머니 쪽 권리를 내세워 프랑스 왕위를 넘보았다.

잔 다르크와 샤를 7세

: 프랑스의 황태자 샤를은 계속 영국의 공격에 밀려 남하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소녀 잔 다르크는 샤를 황태자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프랑스를 구원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샤를 황태자의 마지막 보루이던 오를레앙 지역으로 병사를 몰고 달려갔다. 전쟁의 승리와 함께 잔 다르크는 샤를의 대관식을 적극 추진하였다. 샤를의 프랑스 왕 즉위식은 영국의 헨리 6세보다 앞섰다. 이로써 샤를 황태자는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신의 계시를 받고 온 한 명의 소녀가 이루어낸 일이었다.

마녀로 몰린 잔 다르크

: 샤를 7세는 즉위 후 안이해졌다. 파리 탈환을 통해 영국군을 완전 축출을 주장하는 잔 다르크의 말을 무시한 채 1년을 보내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의 재공격을 받게 된다.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 전투에서 샤를 7세에 반대하는 부르고뉴 군대에게 사로잡힌다.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를 영국군대에 몸값을 받고 팔아넘긴다. 영국은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를 풀어주는 데 대해 엄청난 몸값을 부른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영국의 제안을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잔 다르크는 7번의 재판 끝에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의 죄를 뒤집어쓴다. 잔 다르크는 끝내 자신에게 내린 신의 개시를 부정하지 않고 루앙의 광장에서 화형으로 열아홉 살의 꽃다운 인생을 마쳤다.

잔 다르크 사후

: 백년전쟁은 1453년에야 프랑스 왕가와 부르고뉴가의 극적인 화해로 영국군을 프랑스에서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끝났다. 샤를 7세는 1456년에 가서야 잔 다르크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잔 다르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교회는 1920년에 가서야 그녀를 성녀로 시성하였다.

 

메리 울리턴크래프트 - 여성에게도 인권을

 

여성이 인간이 아니었던 시대

: 인류 최초로 여성도 인간이며 다연히 누려야 할 인권이 있음을 주장한 사람은 메리 울리턴크래프트(1759~1797)이다. 그녀는 1792년 [여성의 권리옹호]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책은 다른 지식인들의 인권서가 받았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핍박받던 여성의 대변자

: 메리 울리턴크래프트는 그 전 생애를 통해 남성에 의해 짓밟히고 자유를 박탈 당한 여성의 삶의 목도하였고 또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메리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경제권을 가져야 함을 깨달았다. 메리는 여성이 평등과 인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교육의 불평등부터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직접 체험한 남녀의 불평등한 애정 관계

: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인권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던 시기, 메리 울리턴크래프트는 여권옹호를 주장하는 일련의 저작물을 내놓고 인권회복의 메카였던 파리로 간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난다. 미국인 사회평론가 길버트 이무레이와 사랑을 나누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메리 또한 이무레이의 아이를 가진채 버림받은 여성의 비참함을 몸소 체험한다.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 메리는 템즈강에서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녀는 사랑에서조차도 평등하지 못한 남녀의 문제에 대해 더욱 치밀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부부관계를 제시하다

: 메리 울리턴크래프트는 런던에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었던 월리엄 고드윈을 재회한다. 아나키스트였던 고드윈은 상처입은 메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새로운 남녀 관계를 그녀 앞에 제시하였다. 고드윈과의 결혼 후 메리는 딸 샐리를 낳고 열흘 후 산고를 견디지 못하고 산욕열로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그녀가 가졌던 여성의 권리에 대한 원친가 자유로운 생각은 딸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그녀의 첫째 딸 프랜시스는 자유주의 사상사이자 시인인 바이런의 애인이 되어 시인과 교유하며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았고, 샐리는 현대 괴기소설의 효시가 된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의 사상은 20세기 이후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진정한 부르짖음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마담 스탈 - 살롱의 여주인

 

살롱에서 자란 아이

: 통상 마담 스탈로 불리며, 정식 이름은 안느 루이즈 제르맹 드스탈 홀슈타인인 주불 스웨덴 대사의 부인 스탈 남작 부인은 격동기 프랑스 살롱의 대표적인 안주인이었다. 그녀는 프랑스혁명 전 루이 16세의 재무대신이자 은행가인 부호 네케르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 네케르 부인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문예 살롱의 아주인으로 그녀의 집안엔 늘 학자와 시인,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프랑스혁명을 이끈 계몽학자들의 무릎 위에서 그들의 사상을 배웠고, 정치적 감각과 예술적 소양과 학자로서의 지식을 모두 살롱에서 익혔다.

정치적 살롱의 안주인

: 17세기 궁중에서부터 시작된 프랑스 살롱문화는 18세기 귀족부인들이 안주인이 되어 대표적인 귀족문확과 예술의 산실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말부터 살롱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 살롱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마담 스탈의 살롱이었다. 프랑스에 와 있던 스웨덴 대사 스탈 홀슈타인 남작과 결혼한 후 연 그녀의 살롱에는 프랑스의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자신의 사회사상을 논문으로 발표하는 등 단순한 살롱의 안주인 역할을 벗어나 진지한 정치 살롱의 일원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나폴레옹과의 불화

: 포기 프랑스혁명을 지지했던 마담 스탈은 혁명이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귀족인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경지에 이르자 잠시 살롱을 접고 스위스 코페로 물러난다. 이후 프랑스 상황이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 마담 스탈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살롱을 연다. 그녀의 살롱에는 주로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오랫동안 마담 스탈의 살롱의 감시하던 나폴레옹은 마침내 마담 스탈이 [텔핀]이라는 사회비판소설을 발표하자 폭발하고 만다. 마담 스탈은 즉시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녀는 이후 나폴레옹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했다.

낭만주의의 전파자

: 프랑스에서 추방된 후 마담 스탈은 유럽 각지를 여행한다. 1807년 마담 스탈은 또 한편 그녀를 대표하는 소설을 펴낸다. [코린 혹은 이탈리아]는 여성성을 찬미하는 본격 여성주의 소설이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가난한 자들의 천사

 

상류층의 딸

: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나라였다. 극단적인 부와 극단적인 가난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의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해외 여행 중 이탈리아의 플로렌스(피렌체)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둘째 딸로 얻었다. 그녀의 이름은 태어난 곳의 지명을따서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이팅게일의 집은 사시사철 기후에 따라 거처하는 집이 각 지방마다 있을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조금 다른 아이였다.

간호사가 되다

: 나이팅게일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녀가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은 '간호'였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거의 막혀 있던 시기에 여성의 몸으로 직접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은 간호 정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간호라는 것도 당시에는 무척 미천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상류층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나이팅게일이 간호를 인생의 길로 정하고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일곱 살부터 시작한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른한 살의 나이에 나이팅게일은 겨우 간호사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이팅게일은 1851년 독일 카이젤스베르트에 있는 간호원 양성소를 찾아가서 3개월간 교육을 받는다. 그 후 독일과 프랑스의 병원을 직접 돌아보며 간호법과 병원관리법을 배웠다. 런던으로 돌아온 후 나이팅게일은 할레병원 간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크림전쟁

: 1853년 크림반도에서 일어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은 플로렌스에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이어 새로운 인도주의에 눈을 뜨게 한다. 그녀가 크림전쟁 야전병원에 도착한 뒤 불과 몇 개월 내에 사망률을 크게 감소시켰다. 단 5개월 동안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에서 사망률을 42%에서 2%로 줄였다.

간호학교를 세우다

: 전쟁에서 돌아온 후 나이팅게일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병원개혁안을 건의한다. 더불어 크림전쟁에서의 공로로 받은 표창금을 털어 런던의 성 토머스병원 내에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를 창설한다. 이전까지 교회나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간호교육을 정식학교로 옮겨와 종교로부터 간호가 독립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 제도는 영국으로부터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으며, 현대의 간호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해리엇 터브먼 - 노예의 삶을 떨치고

 

해리엇 터브먼(1820~1913)은 미국 메릴랜드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아프리카에서 '사냥' 당해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해리엇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강탈당한 채 노예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인 열다섯 살의 어느 날, 해리엇은 도망치는 노예를 돕기 위해 주인에게 반항하다가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다. 해리엇은 이때의 폭력으로 이마의 뼈가 부서져 미간이 움푹 패인 흉터를 평생 안고 살아야만 했다. 더불어 수면 발작이라는 치명적인 병도 함께 얻고 말았다.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 북부나 남부 모두 흑인의 삶이나 자유, 인권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를 위해서 흑인들을 이리 저리 밀고 당기는 것이었지만, 흑인의 입장에서는 적으나마 임금을 보장해주고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삶을 인정하는 북부는 그야말로 낙원처럼 보였다. 그즈음 북부의 백인 일부와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드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 일을 시작한다. 그 일은 지하철로라는 은어로 불리고 있었다. 스물아홉 살의 해리엇 터브먼도 이 지하철로의 인도자의 손에 이끌려 북부로 탈출한다.

지하철로의 가장 위대한 차장

: 지하철로 조직은 탈출경로를 철로, 도망 흑인 노예를 숨겨주는 조력자의 집을 역, 흑인 노예들을 이끌어 북부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인도자를 차장이라고 불렀다. 해리엇은 1850년부터 1860년까지 무려 19차례나 지하철로의 차장으로 남부로 숨어 들어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북부로 탈출시켰다. 해리엇은 자신만의 자유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리엇은 백인농장주들에게는 극악한 적이었고 흑인 노예들에게는 모세와 같은 존재였다.

남북전쟁과 그 이후

: 1861년 마침내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전쟁이 터졌다. 해리엇도 북부의 편을 들어 남북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북부 스파이로 잠입해 남부의 병력과 군사기지 등 중요한 정보를 빼돌렸다. 해리엇의 활약상이 얼마나 눈부셨던지 한때 그녀는 북부의 군인들에게 '터브먼 장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남북전쟁의 결과 남부의 농장주들은 미국경제의 주도권을 북부고장주들에게 건네주고 몰락했다. 법적으로 보장한 흑인의 자유와 평등은 사회적으로는 그다지 실현되지 못했다. 해리엇은 남북전쟁에서의 혁혁한 공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갔다. 그리고 1908년 여든여덟 살이 되는 나이에 그동안 노동과 자서전을 써서 번 돈을 모아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완성했다. 이 집은 해방된 흑인들의 안정된 정착과 경제적 자립을 도와주는 집이다.

 

에멀린 굴덴 팽크허스트 - 여성 참정권을 위한 외침

 

과격 시위의 주도자

: 1912년 3월,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가를 비롯한 주요한 거리에 위치한 건물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박살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국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200여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벌인 일이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여성사회정치연합)에 소속된 정치참여를 위한 권리 획득이었다. 이 정치 단체의 대표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에멀린 굴덴 팽크허스트(1858~1928)였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정치상황과 에멀린 굴덴 팽크허스트

: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하면서 여성참정권 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리처드는 존 슈투어트 밀의 친구이자 그 또한 여성 참정권을 적극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남편과 함께 독립노동당에 들어가 여성의 정치참여를 위한 운동에 투신한다.

팽크허스트가의 모녀

: 남편 리처드의 유업과 에멀린 스스로의 권리 의식은 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 딸 크리스타벨, 실비아와 아델라는 어머니 에멀린을 도와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WSPU 조직이 바로 이 팽크허스트 모녀가 만들어낸 노력의 산물이었다. 더불어 WSPU 소속 여성들의 시위는 점차 과격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여성 참정권 운동에 미친 영향

: 양단으로 치닫던 영국정부와 여성참정권자들의 잠정적 화해는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세계 전쟁에 참여하게 된 영국정부에 대해 에멀린과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지지를 표명한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자제하면서 전쟁으로 부족한 일손을 여성의 전시노동 참여로 보충할 수 있도록 운동을 변화해나간다.

마침내 획득한 여성 참정권

: 1918년 영국정부는 마침내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른 살 이상의 여성에게만 주어진 선거권으로 불완전한 것이었다. 남성과 똑같이 스물한 살부터 선거권을 가지게 되는 완전 평등 참정권은 1928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마리 퀴리 - 20세기를 연 천재과학자

 

폴란드의 가난한 천재 소녀

: 마리 퀴리(1867~1934)의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이다. 그녀는 폴란드 사람이다. 천재적이며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던 그녀 앞에 경제적인 문제가 벽으로 다가왔다.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는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이 없었다. 더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한 했지만 마리의 집에서는 마리를 뒷바라지할 힘이 없었다. 마리는 언니 브로냐와 재미있는 약속을 한다. 마리의 언이 브로냐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마리는 당분간 가정교사로 돈을 벌러 브로냐의 유학자금을 대겠으니 대신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학비를 조달하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언니 브로냐는 파리 소르본대학에 입학하고 4년 뒤 의시가 된다. 그리고 마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녀를 파리로 부른다. 마리는 꿈에도 그리던 공부를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소르본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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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과학자 부부

: 마리와 피에르의 결혼은 이상적이었다. 퀴리 부부 사이에서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 문명의 새로운 변화에 신호탄을 올리는 두 가지 광물, 즉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거대한 발견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위대한 행보

: 마리 퀴리는 1908년 소르본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한 공로로 화학 분야에서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으며, 1914년에는 파리대학교에 라듐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리 퀴리의 투철한 인류애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또 한번 발휘된다. 그녀는 뢴트겐이 발견한 X선과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을 이용해 전쟁에서 부상 당한 많은 병사들을 직접 병원에서 치료하였다.

 

마리아 몬테소리 - 어린이의 눈높이로

 

몬테소리는 아이들의 놀잇감에 듣기 좋으라고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놀잇감을 통해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개발한 이탈리아의 여의사이며  심리학자, 아동교육자였단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

: 마리아 몬테소리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무남독녀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보수적인 사람으로 사랑하는 딸이 그저 당시 여성들이 살아가는 대로 무리엇이 살기를 원했다. 이에 비해 어머니는 매우 진취적이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소 흥미를 가졌던 기술학교에 진학을 하였고, 이어 이탈리아에서 여성으로 최초로 의대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 몬테소리는 6년 만에 로마대학교 의과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것은 마리아 몬테소리가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받지 못하는 아이들

: 마리아 몬테소리는 로마정신병원의 보조의사로 의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정신지체 아동들이 그저 동물처럼 수용되어 있는 끔직한 환경을 목도하게 된다. 몬테소리는 1898년 이탈리아 교육학회에 장애어린이들의 교육개혁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녀 스스로 정신지체 아동들 사이로 뛰어들어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정신지체 어린이들의 감각을 개발하기 위해 특수한 도구를 만들고, 이를 만지고 느끼면서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확실히 성과가 있었다.

의사에서 교육자로

: 실험은 성공하였지만, 마리아 몬테소리에게는 개인적인 불행이 닥쳤다. 동료의사 주세페 몬페사노와 사랑에 빠졌던 마리아는 그와의 사이에 아들 마리오를 낳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다. 아이는 은밀히 양부모에게 맡겨졌다. 어린이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녀였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는 돌볼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불행이 그녀에게 닥친 것이다. 이즈음 마리아 몬테소리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907년 그녀는 로마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 빈민들을 위한 탁아소를 열었다.

어린이의 집

: 카사 데 밤비니, 즉 어린이의 집이라고 명명된 그녀의 탁아소에는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몬테소리는 의사 시절 정신지체 아동들을 교육하던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아이들에게 적용하였다. 결과는 예상 밖으로 훌륭했다. 무조건 아이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치던 방법은 카사 데 밤비니에서는 배제되었다. 아이들의 인격을 그대로 존중하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이 실시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몬테소리 교육법

: 몬테소리의 카사 데 밤비니에서의 성과는 점차 입소문을 타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나라에서 몬테소리의 어린이 교육법을 알고 싶어했다. 오늘날 어린이 보호와 어린이 입장에 맞는 유아교육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하여도 어린이는 통제할 수 없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관찰을 통해 어른으로서 성장하기 전에 어린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스스로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박에스더 - 아름다운 인술

 

영어에 능통한 이화학당의 여학생

: 박에스더(1877~1910)의 본명은 김정동이다. 그녀는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안일을 돕던 광산 김씨의 딸로 태어났다. 김점동은 열 살에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에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한다. 그즈음 김에스더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의료 선교활동을 위해 미국에서 온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의료나 약 등에는 관심없이 그저 통역사의 일만 충실히 하던 김에스더는 어느 날 자신의 진로를 확실히 정하게 되는 사건을 만난다. 로제타 셔우드가 언청이 수술을 흉터 없이 완벽히 해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김에스더는 자신도 의술을 배워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돕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남편의 외조로 의사가 되다

: 미망인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는 로제타 셔우드 홀을 따라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박에스터는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곧이어 드각을 나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티모어의 여자 의과대학에 최연소 나이로 입학하기에 이른다.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아내를 볼티모어의대에 보낸 뒤 자신은 뉴욕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4년간 낯선 이국땅에서 상투머리 그대로 고생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하던 박유산은 아내 박에스더가 의사가 되기 직전에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박에스더가 의과대학 졸업장을 따기 불과 3주 전의 일이었다.

미신과 싸우며 병마와 싸우며

: 의사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박에스더는 고종이 동대문 인근에 특별히 마련한 여성전용 병원인 보구 여관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의학의 길로 이끌어준 로제타 셔우드 홀이 한국에 돌아와 세운 평양의 홀 기념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박에스더가 펼친 의료활동은 단순한 의학의 시술뿐만 아니라 미신과의 싸움이기도 하였다. 신간벽지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양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박에스더는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말 못할 홀대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신념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의료 봉사활동을 해나가던 박에스더가 하나 빠뜨린 것이 있었다. 환자 돌보느라 미처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이었다. 박에스더는 남편을 앗아간 것과 똑같은 병인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당시 의학기술로 폐결핵은 손을 쓸 수 없는 병이었다.

 

마가렛 생어 - 여성은 출산 기계가 아니다

 

원래 가족계획, 즉 산아제한운동은 여성의 건간을 지키기 위한 여성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는 기계처럼 취급받았던 여성의 몸을 여성 스스로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 바로 산아제한운동이었다.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

: "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하게 되기 전까지는 어떤 여성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산아제한운동의 제창자 마가렛 생어(1883~1966)의 말이다. 마가렛 생어는 여성이 주도가 되어 임신과 출산 여부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다. 피임에 대해 교육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으며 여서으이 임신은 여성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손에 놓여 있었다.

가난과 다산으로 죽어가는 여성들

: 마가렛 생어 자신의 어린 시절도 다산과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일랜드계의 석수장이 아버지와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11명의 자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마가렛 생어는 열여섯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그리고 간호사가 되어 뉴욕의 빈민가에서 여성들을 돌보면서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목도한다. 여성이 스스로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신을 조절할 수 있는 피임법이 절실함에도 사회는 이를 외면하고 있었다.

산아제한의 선구자

: 1914년 마가렛 생어는 [산아제한평론]을 발간하면서 적극적으로 산아제한운동에 나선다. 이 산아제한운동은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자는 여성운동이었다. 그녀는 1916년에 브루클린에 산아제한진료소를 열었다. 많은 가난한 여성들이 그녀를 찾아와 피임법을 교육받고 처치를 받았다. 그러자 마가렛 생어는 공안질서방해죄로 체포되었다. 이후 계속된 그녀의 투쟁은 결국 하나하나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60년 마가렛 생어와 과학자들이 이루어낸 먹는 피임약 개발은 산아제한운동에 큰 획을 그었다.

산아제한운동과 인구문제

: 마가렛 생어의 산아제한운동은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생식과 성경험을 분리하였다는 의미에서 인류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마가렛 생어의 산아제한운동은 인류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새로운 성의식과 종족 번식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고 인구조절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경제정책 또한 불러일으켰다.

 

소피 숄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처형장의 젊은이들

: 1943년 2월 22일 독일의 뮌헨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세 명의 젊은이가 처형 당했다. 그들은 소피 숄, 한스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였다. 그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들은 전쟁광이자 독재자였던 히틀러에 반대하는 몇 장의 글과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야만 했다.

나치를 따르던 소년 소녀들

: 소피 숄(1921~1943)은 독일의 울름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국가란 개인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소피 숄과 오빠 한스 숄이 청년기이던 1930년대 독일의 사정은 그들의 아버지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히틀러라는 전대미문의 성동가가 등장하여 독일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광기로 몰아갔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장미단의 활동

: 나치와 히틀러의 잘못을 먼저 깨달은 것은 오빠 한스 숄이었다. 한스 숄은 친구들을 모아 백장미단을 만들었다. 젊은이들이 용기 있는 비판세력이 되어 잠자고 있는 독일인들의 양심을 깨워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 밖으로 컸다. 잠자거나 혹은 숨어 있던 독일의 양심이 서서히 깨러나려는 순간이었다.

나치 치하의 마지막 양심

: 소피 숄은 1943년 2월 18일 뮌헨대학에서 여섯 번째 전단지를 뿌리다가 열렬한 나치당원이던 대학 경비에게 잡혀 나치의 비밀 경찰 게슈타포에게 넘겨졌다. 오빠 한스 숄과 같은 백장미단원이던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에 대한 나치 정부의 대응은 잔혹했다. 체포된 지 나흘 만에 가장 열렬한 나치 옹호자인 판사가 그들을 재판했다.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소피 숄을 비롯한 백장미단원 세 명은 그 날 오후 바로 처형되었따. 나머지 백장미단원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독일은 수많은 잘못을 저지른 나치 정부와 함께 전쟁에 졌다. 그때서야 하나 둘 백장미단을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

 

레이첼 카슨 - 침묵의 봄을 깨우다

 

침묵의 봄

: 레이첼 카슨은 그녀의 저서 [침묵의 봄]에서 살충제와 자연에 대한 무절제한 정복욕으로 일어난 폐해에 대해 과학적 근거와 통계수치, 실제의 사례들을 모두 종합하여 낱낱이 밝혀 놓았다. 1962년의 일이었다. [침묵의 봄]을 읽은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을 어느 정도 버리게 되었다. 이 [침묵의 봄] 한 권의 책으로 세계 곳곳에서 환경에 대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쓰는 해양학자

: 자연 속에서 자유롭고 활기찬 어린 시절을 보낸 레이첼은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녀는 1925년 펜실베이니아여자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단 한번의 실험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생물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레이첼은 전과하여 생물학을 공부하고 이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해양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레이첼은 이제 자연과 바다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글쟁이, 혹은 글을 잘 쓰는 생물학자가 되었다.

지구의 대변자

: 수산국 직원으로 있으면서 그녀가 쓴 바다 생태계에 대한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즈음 레이첼 카슨은 친구 허킨스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는다. 매사추세츠주 정부가 모기박멸을 위해 DDT를 살포했는데 모기는 악착스러워졌고 오히려 근처의 생물들이 다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레이첼은 곧 갈충제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 시작한 조사는 196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살출제가 인간과 자연에 도움은커녕 인간과 자연을 죽이는 물질임을 발표할 수 있는 확고한 증거들이 확보되었다. 레이첼은 1962년 [침묵의 봄]을 출간한다.

레이첼 카슨과 환경보호

: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남긴 여파는 컸다. 레이첼 카슨 이후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이제 지배가 아니라 보호, 혹은 조화로 자리를 옮겨가데 되었다.

 

마더 테레사 - 낮은 데로 임하소서

 

알바니아에서 인도로

: 마더 테레사(1910~1997)의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로 알바니아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910년 혼란스러웠던 작은 나라 알바니아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열렬한 애국자였고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탓이었는지 그녀의 아버지는 아그네스가 어렸을 때 그만 암살 당하고 만다. 이후 남겨진 아그네스의 가족들은 가톨릭 종교 속에 화목한 가족으로 그들의 삶을 가꾸어가기 시작했다. 1928년 아그네스는 신에게 자신을 봉헌하고 인도로 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아그네스는 조국 알바니아를 떠나 아일랜드를 거쳐 마침내 어렸을 때부터 가고 싶었던 나라, 인도에서 수녀생활을 시작하였다.

부르심 속의 부르심

: 아그네스는 인도에서 다시 세례를 받고 테레사로 세례명을 고친다. 1948년 콜카타에서 다즐링으로 피정을 가던 기차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그녀가 로레타수녀회를 나와 거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종교에 일생을 바치고 있던 테레사 수녀에게 또 다른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훗날 테레사 수녀는 이 일을 부름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이후 테레사 수녀는 2년여 간의 지루한 수녀회 탈퇴 절차를 마치고 혈혈단신 인도의 거리로 나섰다.

흰색 사리를 입은 수녀

: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홀로 콜카타의 빈민거리로 나선 1950년대 인도는 복잡한 상황르 맞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침내 200여 년 간의 영국지배를 벗어난 인도는 독립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종교적 정치적인 상황에 맞물려 여러 곳에서 전쟁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막 독립을 한 인도에서 영국계 수녀회 출신의 수녀는 반목의 대상이었다. 수녀회를 벗어나 홀로 인도사람들 앞에 나선 테레사 수녀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품었던 선교의 뜻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신의 부르심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다. 흰색 사리는 인도의 여인 중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여인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국적을 취득해 인도인이 되었다.

살아있는 성녀

: 처음 5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작했던 테레서 수녀의 봉사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헌신적인 봉사와 박애를 지켜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테레사 수녀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선교수녀회'가 결성되고 후원단체도 생겼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여졌고 테레사 수녀에게는 노벨상을 비롯한 많은 상들이 수여되었다. 사랑의 선교수녀회는 마침내 가톨릭교단에서 인정받았다. 교황도 테레사 수녀의 활동에 감동하였다. 1997년 마더 테레사의 임종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던 인도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의 마음을 울렸다.

 

4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

 

서시 - 미인계의 원조

 

월나라의 절세 미녀

: 중국의 춘추 말기, 월나라의 저라산 근처에 사는 땔나무 장수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서시,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녀가 강으로 빨래를 하러 갔을 때 강 속의 물고기가 물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반해 헤엄칠 생각도 잊고 그대로 가라앉아버렸다는 이야기(침어:浸魚)가 생길 정도였다. 서시는 어렸을 때부터 가슴않이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늘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는데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워 동네 처녀들이 찡그린 모습을 흉내내고 다녔다고 한다(효빈:效嚬). 서시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훗날 월나라의 수도로 뽑혀 가게 되는데 월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시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와 그녀가 궁전에 들어가는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한다. 월나라의 재상이던 범려는 서시의 얼굴을 보는 값으로 백성들에게 1전씩 받아 그 돈으로 무기를 사기도 하였다고 한다.

와신상담의 오나라와 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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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로 간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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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의 마지막

: 오자서의 우려대로, 범려의 계획대로 오나라의 힘은 약해졌고 그 기회를 노린 월나라는 오나라를 쳐서 이겼다. 부차는 산 속으로 도망가 미인에게 속아 충신을 저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자결하였다. 월라나의 임금 구천은 원수를 갚고 숭리하였다. 그러나 정작 오나라를 망하게 한 일등 공신인 서서의 이후 그 행방이 묘연하다. 승리는 남성에게 돌아가고 미인인 죄로 불행하게 살아야 했던 서시는 소외되었던 것이다.

 

양귀비 - 시대를 풍미한 경국지색

 

아들의 아름다운 아내

: 양귀비(719~756)의 본명은 양옥환이다. 그녀는 애초 당 현종과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관계에 있었다. 쓰촨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친척의 집에서 자랐던 양옥환은 열여섯 살에 그 미모를 인정받아 당 현종의 수많은 아들 중 하나인 수왕의 비로 궁에 들어간다.

시아버지의 귀비로 들어가다

: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염치는 있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당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궁에서 내보래 당분간 화산에서 도가의 여도사로 생활하게 한다. 그 사이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한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당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되어 현종의 비로 다시 궁에 들어온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당 현종 치세 전반기는 '개원의 치'라는 칭호를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먼 당 현종에게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화청지에서의 사랑

: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온천인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여 정치를 모두 맡겼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국충은 건달 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로 당 현조 치세 말기를 부정부패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안록산의 난과 양귀비의 죽음

: 양귀비의 몰락은 당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의 안록산을 가까이하였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왔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되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당 현종은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잊지 못했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환과 그리움 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 권모술수의 희생양

 

아름답고 순종적인 교황의 사생아

: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480~1519)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사생아였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6세도 당대 최고의 권모술수가로서 교황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이었다. 반노차 카타네이는 25년간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정부로 있으면서 네 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그 첫번째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자 르네상스 최고의 남자로 일컬어지는 체사레 보르지아이고, 루크레치아는 셋째였다.

루크레치아의 인생을 좌우했던 아버지와 오빠

: 루크레치아의 아버지 교황 알렉슨드르 6세는 오로지 자신의 보신과 보르지아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두를 희생해도 괜찮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루크레치아의 큰오빠 체사레는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라면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혈육을 살해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남자였다. 아버지와 큰오빠 두 남자가 루크레치아를 가장 적절히 이용한 것은 바로 루크레치아의 결혼을 통한 정략적 제휴였다.

세번의 정략결혼

: 루크레치아의 첫 번째 결혼은 그녀가 여인으로 자라기도 전인 열한 살에 서류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페사로 지방과의 연맹이 필요했던 알렉산드르 6세는 딸을 페사로의 공작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시킨다. 페사로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지방의 영주와 연대가 필요했던 보르지아 가문의 남자들은 루크레치아의 첫 번째 결혼을 교황인 아버지 알렉산드르 6세의 권세를 이용해 무효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는 나폴리의 알폰소 다라곤, 즉 비셀리 공작과 결혼시킨다. 비셀리 공작은 루크레치아를 몹시 사랑하였다. 루크레치아도 결혼생활에 만족하였다. 체사레는 이제 정칮거으로 쓸모가 없어진 매제 비셀리 공작을 잔혹한 암살로 제거한다. 그녀의 세번째 결혼은 당시 체사레에게 가장 필요한 세력이던 페라리의 알폰소 데소테와 이루어졌다. 결코 안정적이지도 않고 보르지아 가문의 필요에 의해 여차하면 깨어질지도 몰랐던 그녀의 세번재 결홍는 18년간이어졌다. 다행히도 그녀의 친청인 보르지아 가문이 몰라했기 때문이었다.

친정의 몰락

: 보르지아 가문의 몰락은 당시 로마를 휩쓴 말라리아와 함께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6세와 체사레는 동시에 말라리아를 앓게 되고 알렉산드르는 고령을 이기지 못해 숨을 거두고 만다. 교황이던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이 사라진 데다 말라리아오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동안 체사레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보르지아 가문의 몰락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알폰소 데스테의 아내 루크레치아의 위치 또한 불안하기 짝이 없게 되었다. 결코 정숙하고 현명한 아내가 아니었던 루크레치아였지만 알폰소 테스테는 그녀를 끝까지 지켰다.

삶이 자기 것이 아니었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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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 홈스콜의 대모

 

실생활에서 모범을 보인 어머니

: 신사임당(1504~1551)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사임당은 16세기 사람으로 사임당이라는 칭호는 고대 중국의 현모양처로 알려진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신사임당은 4남 3녀의 자식을 모두 강릉의 친정에서 낳았고 친정에서 더부살이하며 자식들을 길렀다. 신사임당은 자식과 남편을 자연스럽게 방목하면서도 스스로의 삶에서 참다운 모범을 보였다.

그치지 않은 자기개발

: 현모양처라는 이름의 그늘에 가리워져 신사임당이 뛰어난 화가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조선 중기 화단에 뚜렷한 자기의 이름을 남긴 당당한 화가이자 조선 제일의 여류 화가였다. 더불어 신사임당은 당시 여성들은 거의 가까이 하지 않던 한문 경전을 공부하여 남편 이원수와 시시때때로 학문적 토론을 일삼았다고 한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함께 성장한 여인

: 시사임당과 그녀의 자식들은 어머니와의 정서적.학문적 교감을 통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전에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로서 서로를 거울 삼아 성장했던 것이다.

 

마담 퐁파두르 - 사치아 애욕의 권력자

 

18세기 프랑스 궁정사회는 이전 상업혁명의 결과로 엄청난 불르 누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귀족이 아니면서 권력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많은 서민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 권력과 부를 샀다. 가장 대표적인 여인이 마담 퐁파두르(1721~1764)였다.

로코코 시대의 대명사

: 18세기 프랑스 상류층 사회가 누리던 예술적 사조를 로코코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름다운 영인, 마담 퐁파두르가 위치해 있다. 그녀는 로코코 시대 예술가들의 훌륭한 후원자였으며 유행의 정점에 서 있었다.

야심을 품은 여인

: 마담 퐁파두르의 원래 이름은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이다. 그녀는 파리의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났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왕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노리던 잔느는 당시 프랑스왕 루이 15세의 전용사냥터 근처에 땅을 구입한다. 그리고 왕을 알현할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가진 미모와 매력을 백분 활용한다. 마침내 그녀는 루이 15세의 손을 잡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입성한다.

왕의 애첩으로

: 잔느는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지위를 얻고 그대로 궁정에 눌러 앉았다. 남편과의 관계는 이 시점에서 모두 끝났다. 그녀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20녀간 살았다. 그동안 그녀는 루이 15세의 정식 왕비를 모욕했고 프랑스의 궁정생활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정치까지 휘둘렀다.

유럽 역사에 미친 영향

: 마담 퐁파두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가 귀족출신이 아니라는 계곱적인 위치는 당시 활발히 일어나던 계몽사상을 지지하게끔 했다. 새로이 성장하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앙숙이던 오스트리아와 전격적으로 손을 잡는 외교혁명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마담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말년에는 스스로 뚜쟁이가 되어 왕실 활렘을 운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루이 15세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과 부를 가져다주는 절대 놓을 수 없는 끈이었다. 마담 퐁파두르 이후로 프랑스 왕실은 백성들에게 신임을 잃고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종말을 맞고야 만다.

 

마리 앙투아네트 - 화려하고 무지했던 왕비

 

사치의 대명사

: 백성들이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유가 빵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앙투아네트(1755~1793)가 '그럼, 케이크를 먹지, 그러냐"는 말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말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녀는 프랑스 사람도 아닌 오스트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공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정략결혼

: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화려한 궁중문화에 젖어 살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세계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란 철부지였다. 노회하고 졍략적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비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왕비 그 자체였다.

착하지만 무능한 왕과 하려하고 사치스러운 왕비

: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한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는 왕비와 또 다른 의미에서 세상에 무지한 남자였다. 그는 화려한 파티와 궁중생활을 좋아하진 않아지만 사냥과 책에 빠져 정치에는 무심하였다. 루이 16세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는 매우 호인으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였으나 정치적인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혁명은 터지고

: 1789년 프랑스 국민들은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때까지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국민의 의지를 받아들여 새로운 정치를 할 것을 기약하기보다는 외세를 끌어들여 혁명세력을 진압하고 다시금 과거의 사치와 방만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다.

단두대에 오른 왕비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기도한다. 게다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친청 오빠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에게 혁명군을 진압할 군대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1792년 가장 급진적이고 열혈한 정당이 혁명 주도세력이 되면서 혁명 정국도 가파르게 진행되기 시작한다. 혁명 주도 정당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하고 그 해 10월 마리 앙투아네트도 남편의 목을 자른 단두대에 올라 사형 당한다.

 

마타하리 - 여명의 눈동자, 혹은 이중간첩

 

알몸으로 총살 당한 여인

: 1917년 10월 15일 아침, 파리 교외 반센느 둑에서 한 여인이 총살된다. 총살 직전 씌우려던 눈가리게마저도 거부한 채 그녀는 12명의 사수 앞에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벋어 던지고 알몸으로 섰다. 그녀는 마타하리, 본명은 M.G. 젤러드 네덜란드 출신의 무희이자 고급 콜걸이었다. 그녀의 죄목은 스파이 혐의, 그중에서도 한창 제1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정보를 판 이중간첩이라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아름다운 무희

: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네덜란드였는데 스무 살을 전후하여 인도네시아로 건너갔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 주둔하던 장교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이혼한 마타하리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빈털터리였다. 그녀는 파리의 한 클럽에서 이국적인 미모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발리 댄스를 선보임으로써 일략 유럽 최고의 무희로 유명해진다. 젤러는 이국적인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름도 마타하리로 고친다. 마타하리란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란 뜻이다.

유럽 고위층 남자들의 혼을 빼놓다

: 마타하리에 대한 입소문이 점점 퍼지면서 그녀는 파리 최고의 클럽인 물랭루즈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희가 되었다. 그녀의 매력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 남성들을 유혹하였다. 실제로 당시 유럽의 군인들 사이에 가장 각광받는 핀업 사진이 마타하리의 사진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만난 고위층의 남자들은 프랑스 군부와 정계의 고위층, 재개 인사, 네덜란드 총리, 프로이센의 황태자 등 나라와 분야를 막론하였다.

스파이였냐? 희생양이었나?

: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반발 직후 프랑스로 돌아오려고 한다. 전쟁 중에 부상 당한 그녀의 애인 블라디미르 드 마슬로프의 병문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독일에 적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마타하리의 무리한 프랑스행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특히 전쟁 전부터 마타하리의 행동을 수상히 여겼던 영국은 프랑스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체포하여 3차례나 심문하기도 하였다. 마타하리는 독일에서 얻은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프랑스에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는 프랑스 경찰에 체포된다. 마타하리가 'H21'이라고 불리는 스파이로서 프랑스 정관계에 암약해 정보를 독일 측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심문과정에서 마타하리는 독일군으로부터 스파이 제의를 받고 돈도 받았지만 스파이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녀의 범죄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소환되는 사람들은 모두 프랑스 내에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프랑스 고위층은 들끊기 시작했다. 빨리 사건을 끝내고 누군가 모든 비밀을 짊어져야만 했다. 1999년 비밀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문서에서 마타하리가 군사 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밣히고 있다.

 

이방자 - 망한 나라의 불운한 왕비

 

천황비를 꿈꾸던 소녀

: 이방자(1901~1989)의 본명은 나시모토 마사코이다. 아버지는 메이지 천황의 조카로서 나시모토미야 가문의 모리마시 천황이었고 어머니는 큐슈 지방의 유력한 번주의 딸이었다. 그녀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당시 황태자이던 히로이토(소화천항)와의 혼담이 오가기 시작한다. 마사코가 일본 황태자비 후보자 세 명 중에 한 명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황태자비가 되다

: 황태자 간택에 앞서 3명의 후보들에게는 여러 가지 시험이 따랐다. 불임으로 진단이 내려진 마사코는 천황비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또 다른 음모가 꾸며졌다. 마사코와 조선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의 결혼이 추진된 것이다. 일본은 명문 황족의 딸을 조선 황태자와 결혼시킨다는 전시적인 효과와 더불어 아이를 갖지 못하는 그녀와 영친왕을 결혼시켜 조선 왕조의 대를 끊어놓자는 흉계를 꾸몄다.

영욕의 세월

: 망국의 황태자와 결혼한 이방자는 결혼 내내 이은의 울분을 함께 나누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에게 아이가 생겼다. 그러나 그녀가 낳은 아이는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영친왕의 아들 이구는 일본도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이후 오랫동안 해외에서 망명객처럼 유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영친왕 부부에게 닥친 또 다른 불행은 조선의 독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영친왕 부부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마침내 1963년, 영친왕 부부에게 귀국이 허락된다. 그러다 다시 조국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영친왕 이은은 이미 쓰러져 기억상실증과 실어증에 시달리며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7여 년간 병마와 싸우다가 마침내 1970년대 숨을 거두고 만다.

낙선재로 돌아와 사회복지사업에 힘을 쏟다

: 생면부지 한국 땅에 마지막 황태자비란 이름만 짊어진 채 육순의 할머니 이방자는 홀로 남았다. 1968년 정부의 마지못한 배려로 들어가게 된 창덕궁 낙선재에서 마지막 남은 생을 마칠 것을 결심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조선 황실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았다. 이방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위로는 순정효황후(마지막 황제 순주의 황후)를 모시고,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또 한 명의 망국의 희생자이자 시누이인 덕혜옹주를 돌보면서 낙선재에 끝까지 남았다. 제대로 황태자비의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사회봉사의 신념으로 동분서주하며 남편의 융버을 이어가던 이방자는 한국에 돌아온 지 25여 년이 되는 1989년에 끝내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숨을 거둔다. 나시모토 마사코, 이방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그녀의 삶은 한국과 일본,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지켜보며 그 속에서 고통받는 희생자의 삶이었다.

 

심슨부인 - 왕좌를 버린 세기의 로맨스 

 

"사랑하는 여성의 도움이 없는 한 영국 국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936년 12월 11일 밤 대영제국의 왕 에드워드 8세는 BBC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사랑과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발표했다. 에드워드 8세는 영국 왕위를 박차고 나와 한 명의 여성을 선택했다.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11개월 동안 지난하게도 그의 사랑을 결혼으로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녀를 버리거나 왕위를 버려야 했다.

미국인 유부녀와 황태자의 만남

: 베시 윌리스 워필드 스펜서 심슨 윈저 공작부인(1896-1986)이 정식 이름인 심슨부인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스무 살에 해군 조종사 스펜서와 결혼하였다가 10년만에 이혼하고 이듬해 영국인 사업가 심슨과 결혼하여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남편의 재력을 바탕으로 런던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던 심슨부인은 파티에서 에드워드 황태자를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처음에는 우정을 가장하여 만나기 시작했고 그리고 마침내는 서로의 사랑을 속이지 못해 결혼을 결심했다.

푸른 드레스를 입고 올린 결혼식

: 이 결혼에서 에드워드 8세는 국왕의 자리를 버렸을 뿐 아니라 본의 아닌 망명객이 되어 영국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 거부되었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리고 심슨부인의 이혼문제가 모두 처리되기를 기다려 1937년 6월 프랑스의 한 교횡에서 쓸쓸한 결혼식을 올린다. 이때 심슨부인은 하얀 웨딩드레스 대신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온몸을 푸른색으로 장식했다.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 6세로부터 윈저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심슨부인에게는 아무런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전하'라는 경칭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윈저 공작과 함께 사는 '평민' 아내였을 뿐이었다.

세기의 로맨스

: 에드워드 8세와 심슨부인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해로하였다. 그들의 결혼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세기의 로맨스가 되었다. 1972년 에드워드 8세가 프랑스에서 먼저 숨을 거두자 심슨부인은 검은색 상복 위에 심슨 블루의 숄을 걸치고 장례식장에 나와 다시 한번 그들의 로맨스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14년 후 그녀가 숨을 거둘 때도 마지막 유언이 심슨 블루의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쑹칭링 - 쑨원의 아내, 중국의 국모

 

송씨 집안의 세 자매

: 광동성 대부호 쑹씨 가의 주인인 쑹루야오는 서구문명에 일찍 눈을 뜬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세 명의 딸이 있었다. 모두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야심이 있는 여인들이었다. 첫째 쑹아이링, 둘째 쑹칭링, 셋째 숭메이링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녀들은 가치관이 달랐다. 이들의 인생을 두고 중국 사람들은 흔히 쑹아이링은 돈을 사랑하였고, 쑹칭링은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쑹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하였다고 말하곤 한다. 첫째 쏭아이링은 중국 산시성의 대부호 쿵샹시와 결혼하며 중국의 경제를 남북으로 아우르는 대부호가 되었다. 막내 쏭메이링은 권력을 쫓아 당시 군벌의 대표주자이자 가장 정치적이었던 장제스와 결혼하여 그의 야심을 보좌하였다. 쑹칭링은 중국 근대사상의 아버지이며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국부로 존경받는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쑨원을 택했다.

쑨원과의 만남

: 쑹칭링(1892~1981)은 언니 쏭아이링이나 동생 쑹메이링에 비해 침착하고 사려깊은 성격을 가졌다. 그러던 중 쑹칭링은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이던 쑨원의 비서가 되었다. 쑹칭링은 스물두 살이 되던 1914년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일본에서 쑨원과의 결혼을 감행한다. 그때 쑨원의 나이는 이미 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쑨원과 쑹칭링의 결합은 이상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쑹칭링은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이를 체화하였다. 남편 쑨원을 돕는 동안 쑹칭링 자신도 한 명의 사상가로, 중국의 미래를 짊어질 혁명가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국을 생각하다

: 1925년 쑨원은 베이징에서 타계한다. 쑹칭링과 쑨원의 결혼 생활은 불과 10여 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 10년은 한 명의 총명한 여성을 주곡과 민족을 생각하는 지도자로 변모시켰다. 쑹칭링은 국민당 정부의 수장인 장제스와 강하게 맞섰다. 이때부터 시작된 장제스와 대립은 평생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장제스의 아내였던 동생 쑹메이링과의 관계도 여기 끝을 맺게 된다.

쑹칭링과 중국

: 1945년 9월 항일전쟁에 승리한 후 쑹칭링은 마오쩌둥과 손을 잡고 동생 쑹메이링과 그녀의 남편 장제스를 대만으로 몰아낸다. 1949년 중국 본토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쑹칭링은 두 차례나 국가 부주석을 역힘하였다. 이후 그녀는 중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활약하였다. 쑹칭링은 1981년 만성 임파선백혈병의 악화로 여든아홉 살의 파란 많은 삶을 마친다. 죽음에 임박한 시점에서 쑹칭링은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에바 페론 - 날 위해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전반기에는 세계 7위의 경제 부국이었다.

팜파스의 사생아

: 에바 페론(1919~1952)은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초원지대 팜파스에 속한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미니 후아나는 인근의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의 정부였다. 에바는 후아나와 후안 사이에 태어난 다섯 명의 아이 중 네 번째 사생아였다. 출생부터 불우했던 에바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남자들 품을 전전하는 삼류배우

: 에바는 여러 명의 남자를 전전하며 삼류극단의 삼류배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여러 남자의 품을 떠도는 가난과 비참함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귀엽고 순진하게 꾸미고 싶어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에비타라고 불렀다.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후안 페론과의 만남

: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지 10년 만에 에바는 큰 행운을 잡는다. 당대 실력자인 '통일 장교단'의 리더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이다. 에바와 후안이 동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안에게는 정치적 시련이 닥친다. 반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획득한 후 후안을 구금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련은 에바의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현시킨다. 정치적이며 선동적이고 남을 설득할 줄 아는 그녀의 재능이 애인 후안의 석방운동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바는 후안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추겨 총파업을 일으킨다. 그리고 파업 10일 만에 후안은 노동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풀려나와 에바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에바 페론과 포퓰리즘

: 포퓰리즘이란 대중에 아부하여 인기몰이를 하지만 실은 대중을 기만하고 인기를 정치적인 입지확보에만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에바와 후안은 자신들의 인기를 포퓰리즘으로 이끌어나갔다. 그 결과 사회는 경직되고 페론과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가 이루어졌다. 에바는 아르헨티나 잔역을 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며 성녀를 자처하였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페론 정권 시기에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이미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바와 후안은 이미 비판세력이 없어진 나라에서 나랏돈을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썼다.

에바에 대한 엇갈린 평가

: 에바 페론은 9년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다. 그녀는 1952년 서른세 살의 나이로 척수 백혈병과 자궁감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에바의 죽음 이후 그간에 숨겨왔던 페론 정권의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군부마저도 후안 페론에게 등을 돌려 후안은 군부 쿠테타에 의해 쫓겨나고 만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 아름다운 퍼스트레이디의 대명사

 

퍼스트레이디의 대명사

: 재클린 부비에 오나시스(1924~1994)는 프랑스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상류층이었던 가정에서 자라난 그녀는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재클린은 우연한 기회로 젊은 나이에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상원의원 존F.케네디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2년여에 달하는 뜨거운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로부터 8년 후, 재클린은 남편의 손을 잡고 퍼스트레이디로 백악관에 입성한다. 이때 재클린의 나이는 불과 32세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재클린은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였다.

댈러스에서 울린 총성

: 1963년 11월 22일 텍사시의 주도 댈러스. 재클린도 그날의 총성과 함게 10여 년간의 결혼 생활과 3년간의 퍼스트 레이디 생활을 끝내야 했다. 그러면서 5년간 재클린은 미망인이 된 전 퍼스트레이디로 기억될 뿐이었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재혼

: 그로부터 5년 후 미국 국민은 경악할 만한 소식을 접한다. 전 퍼스트레이디가 재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쾌감을 보인 미국 국민은 결혼 상대가 불한당 같은 그리스의 세계적인 부자 오나시스라는 데에서 더욱더 경악했다. 이 결혼으로 재클린은 부를 얻었고 오나시스는 미국 최고의 미남 대통령이었던 존F. 케네디의 아내를 탈취한 남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워킹우먼으로의 변신

: 그러나 이 결혼도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나시스는 재클린을 전시용으로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싶어했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그녀는 장황하게 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란 이름과 막대한 금액의 상속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재클린은 기자로 활동했던 처녀 시절의 경력을 되살려 출판과 언론 일에 뛰어들어 잡지를 발간하고 책을 출판하였으며, 특유의 매력과 지성으로 많은 사업 동반자를 끌어들였다. 재클린은 1994년 암으로 임종하기 직전까지 미국 상류층 사교계의 대모로, 또 출판업계의 큰 손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