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세계의 사회주의자들], 윤재설 외, 펜타그램, 2009, (090605).

바람과 술 2009. 6. 5. 14:52

머리말 - 대안적 사회 운영을 지향한 사람들의 이야기

 

01 알버트 아인슈타인 : 죽은 아인슈타인과 산 황우석의 교훈

 

CIA 표적이 된 천재 과학자

: "기껏해야 과학은 (사회 윤리적)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 우리는 인간의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단지 전문가뿐이라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천재 과학자로먼 알려져 있는 아인슈타인이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며 매카시즘 이전부터 미국 정보 당국의 표적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순수 과학자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병역 거부, 핵무기 개발 중지를 주장한 전투적 평화주의자로, 자본주의 체제의 위험성을 경고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신념을 공공연히 밝히며 살았다.

 

"과학자들은 무기 개발 동참 말라"

: 아인슈타인의 정치적 활동은 그의 학설이 인정받기 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1914년 유럽 문화를 지지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유럽인에게 보내는 선언문' 서명에 참여했다. 종전 이후 아인슈타인은 전범 문제 연구를 위해 모인 '독일 6인 지식인 위원회'에 합류하고 1922년에는 국제 연맹의 지적 협력 위원회에 참가했다. 패전국 독일이 국제 연맹 가입국이 아닌 상황에서 그의 활동은 독일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아인슈타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931년 국제 반전주의자 협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아인슈타인은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동참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싸우는 평화주의자로서의 생애

: 아인슈타인은 1950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내가 공산주의자라 해도 나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아인슈타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매카시즘의 표적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마녀 사냥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간첩 혐의를 받은 동료 과학자들의 사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1953년에는 상원 국내 안보 소위원회의 마녀 사냥에 맞서 동료 과학자를 비롯한 미국의 지성인들에게 증언을 거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아인슈타인은 그가 스스로 규정했듯이 '호전적인 평화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1939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게 독일에 맞서 원자 폭탄을 제조해야 한다는 편지에 서명한 과오를 저질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아인슈타인은 이를 "내 생전에 저지른 한 가지 실수"라며 죽는 날까지 후회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며칠 전인 1955년 4월 11일 마치 유언을 남기듯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작성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통해 "인류라는 생물의 씨앗을 근절시켜 버릴 사태를 불러일으킬 핵무기를 만드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단돼야 한다"로 호소하고 생을 마감했다.

 

02 헬렌 켈러 : 못 듣고 못 보는 말 못한 이가 발견한 좋은 세상

 

신체 장애 극복 사실만 부각한 위인전

: 조금은 낯선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를 만나기 전에 먼저 기억을 되살려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 위인전기 속의 그녀를 생각 해보자. 장애를 극복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가려져 왔던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삶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녀를 온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와 주류 언론의 반응

: 헬렌이 사회 운동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헬렌은 여성의 권리, 특히 참정권 쟁취를 위한 운동을 펼쳤다. 헬렌은 1909년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헬렌은 웰스의 [신세계]를 읽으면서 사회주의자가 됐다고 고백했다. 당시 헬렌은 이미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녀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주류 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본주의 신문이 이 같은 보도에 대해 "신문 뒤에 금권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며 자신을 먹여 살릴 돈에 순종하고 편집자들은 사회주의를 비방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훼손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FBI, "그녀는 공삱의, 파시스트, 나치다"

: 참정권 시위에 참여했던 헬렌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전투적 참정권론자입니다. 나는 참정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이상을 실현하는 운동입니다"라고 말했다. 헬렌은 이후 활동은 사형 제도, 아동 노동, 인종 차별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1940년대에 헬렌은 에스파냐 공화주의자 석방 운동,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사회주의자 석방 운동에 참여했다. 장애를 극복한 여인으로만 알려졌던 헬렌 켈러, 여성운동가로서, 평화주의자로서 그리고 사회주의자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자기의 신체장애만이 아니었다.  

 

03 버트란트 러셀 :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 버린 이유

 

소수를 뺀 모두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게 사회주의

: "나는 사회주의를 일차적으로 기계 생산 체제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식 수준에서 요구되는 대응책이며 무산계급의 행복뿐 아니라 미미한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데 적합한 대응책이다."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트란트 러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20세기 전반기에 사회주의자와 평화를 강조한 가장 정열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징병제 거부 운동으로 강사직을 잃다

: 1907년 러셀은 '여성 참정권을 위한 남성 동맹'에 가담했고 윔블던 보궐 선거에서 하원 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여성 참정권 보장'이라는, 당시로서는 인기가 없었던 주장을 갖고 선거에 뛰어들어 낙선을 했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11년 베드퍼드에서 하원 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또 고배를 마신다. 러셀은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표방한 사회주의 조직 페어비언 협회에 가입하고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징병 거부협회를 만들어 징병제 도입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16년 의회에서 병역법이 통과되자 18~41세의 모든 남자에게 병역의 의무가 부과됐다. 징병 거부 협회는 국민들을 상대로 징병거부 캠페인을 광범위하게 펼치기 시작했고 러셀은 이 활동을 이유로 케임브리지 대 강사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직장을 잃었을 뿐 아니라 투옥되기도 했다.

 

협동적 소유, 탈중심화, 자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 1914년 노동당에 가입한 러셀은 베트남에 대한 1965년 미국의 정책을 지지한 헤럴드 윌슨 노동당 정부에 항의하는 뜻에서 당원증을 찢어 버릴 때까지 50여 년 동안 당원으로 활동했다. 러셀의 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폭력을 배척한 평화주의자 러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앙 집권적 사회 경제 체제에 반대했다. 따라서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협동적 소유, 탈중심화, 자치를 지향하는 동업조합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04 장 폴 사르트르 :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된다

 

파리 지식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

: 그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절 철학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스승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57년 쓴 [마르크스와 실존주의]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 ... 1925년, 즉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대학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강좌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학생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는 것이나 또는 심지어 자신들이 세미나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는 것조차 경계하고 있었다."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사회 참여 강조

: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사회 참여를 강조했던 사르트르의 사상은 이미 전쟁 중 그의 저항 운동에서 그 단초를 실천적으로 보여 줬다. 사르트르는 1968년 5월 혁명의 학생 지도자 다니엘 콩방디와의 대담에서 "우리 사회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언가가 당신에게서 솟아 나오고 있다. 나는 이것을 가능성의 확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포기하지 말라"며 강력한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은 그에게 현실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게 만들었지만 사르트르는 '하나의 가치, 즉 스스로 목적으로 고양되는 자유'로서의 사회주의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결합 시도

: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실존주의자로서 '자유'를 중시한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혁명은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에 의해 극복되는 순간이 아니라 권력을 극복해 가는 하나의 긴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사르트르에 대해 부르주아 철학자들은 그가 초기의 실존주의에서 후기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되면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한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민중을 지키는 민중 계급의 옹호자로 남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실천적 좌파 지식인이었다.

 

05 조지 버나드 쇼 : 모두에게 차별 없이 평등한 분배를

 

영구 페이비언 협회의 중심인물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로만 알려진 버나드 쇼는 작품 활동뿐 아니라 논문과 개설서, 팸플릿 등을 통해 사회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알리는 선동가였으며 영국 노동자 계급의 정당을 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회주의자였다.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그는 대영 박물관에서 책을 읽거나 당시 런던 사회 중류 계급 지식인들의 논쟁을 접하며 스스로 지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19세기 말 유럽 사회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특히 1884년에 가입한 페이비언 협회는 그의 남은 인생을 규정할 만큼 의미가 컸던 조직이었다. 온건 좌파 조직인 페이비언 협회는 의회를 통한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사회주의 조직으로 나중에 영국 노동당 건설의 한 주체가 된다. 시드니 웹의 표현에 따르면 이 협회는 혁명이 아닌 지적.정치적 생활의 '침투'를 통한 영국 사회의 변화를 목표로 했다. 페이비언주의는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와 전문 엘리트를 도구로 삼아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해 있다.

 

노동자 정당 결성과 극작가로서의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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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과 반전 평화 운동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쇼의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쇼는 다른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전 평화주의자가 됐다. 독일은 물론 조국인 영국의 제국주의적 침략도 범죄 행위로 규정한 그는 평화와 협상을 주장했고 일부 우익 세력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서술에 잘 드러나 있다. "사회주의가 대중과 지식인의 신뢰를 쌓아 온 것보다 휠씬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는 대중적 신뢰를 상실해 왔다. 그 결과 20세기 첫 4반세기 말 현재 유럽 정치 상황은 혼란스럽고 위험하다. 안정된 사회주의 국가의 실현은 사유 재산-이를 개인 재산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의 철폐와 소득의 평등이라는 두 가지 주요 신조가 종교적 도그마처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06 이브 몽탕 : 정치 활동과 예술을 결합한 프랑스의 거인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

: 이브 몽탕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지만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은 노동자 계급의 편에서 좌파 정치 활동을 벌여 온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자, 정치 영화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정치 활동과 예술을 결합시킨 프랑스 최고의 좌파 예술가였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공산당원이 되다

: 제철소에서 노동을 하던 1938년 열일곱 살의 이보는 우연히 마르세유의 한 밤무대에서 공연 전 분위기를 잡는 가수 역할을 하면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2차 대전으로 인해 그는 나치의 강제 노역에 동원돼야만 했다. 1944년 2월 수용소를 탈출해 파리로 간 이브 몽탕은 파리에서 가수로서 명성을 날리게 됐고 1945년 8월 전설적인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만나게 됐다. 에디프 피아프의 도움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브 몽탕은 영화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1951년 그는 당시 인기 여배우인 시몬느 시뇨레와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다. 그가 공산당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쯤이었다. 그는 1950년 원자 폭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으로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공산당 당원이 된 것이다. 그의 아내 시몬드 시뇨레 역시 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해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베트남전 반대 등 평화와 민주주의 옹호

: 1960년대 그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동참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68년 소련군이 탱크를 밀고 체코를 침공한 것에 반발해 그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좌파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다. 피노체트 독재 시절 칠레의 민주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산티아고를 방문해 샹송을 부르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국내 언론에서는 그가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가장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말면에 자서전 [나는 잊지 않았다]에서 회고한 것처럼 평생 동안 좌파의 길을 지킨 인물이었다.

 

07 오스카 와일드 : 사적 소유 폐지 주장한 예술 지상주의자

 

19세기 말 영국 사회주의 사상 형성에 기여

: 오스카 와일드를 영국의 극작가 정도로만 아는 사람이나, 본국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쫓겨난 동성애자라고 것 정도까지 알고 있는 사람도 그가 "자본주의 체제는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철폐돼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옥스퍼드 시절 긴 머리에 기괴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며 눈길을 끌었고 종교를 모독하며 당시 사회의 위선을 공격했다. 그는 1878년 졸업 후 미국, 캐나다, 영국 등지에서 강의를 하거나 잡지에 기고를 하면서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예술 지상주의의 대변인이 됐다.

 

예술 지상주의는 외적 제약에 대한 거부

: 예술 지상주의와 사회주으의 결합,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 예술지상주의는 외적 제약에 대한 거부, 예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반부르주아 의식과 통했다. 즉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예술을 선전의 도구로 삼으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진지함이 예술 지상주의의 이면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죽은 지 백 년만에 되찾은 명예

: 사회주의와 탐미주의라는 일견 모순된 주장을 한 듯 보이는 오스카 와일드는 사적 소유가 악의 뿔리라고 주장하며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철저한 입장에 서 있었다. "사유 재산은 개인주의를 저해한다"고 주장한 그는 "사유 재산을 철폐시킴으로써 우리는 참 되고 아름답고 건강한 개인주의를 영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아무도 물질을 축적하는 데 자긴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기독교적인 공동체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기독교식의 자기희생을 통해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제의 철폐와 같은 사회체제의 혁명적인 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자였다.

 

08 조지 오웰 : 사회주의의 목표는 인간적 형제애

 

에스파냐 내란에서 발견한 사회주의

: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배우던 지난 시절, [동물농장]이나 [1984년]은 종종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회주의 체제'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소설로 제시됐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을 쓴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생애와 사상은 가려져 있었다. 그는 이 같은 사회주의적 지향이 분명해진 계기는 에스파냐 내란에 참가했을 때의 경험이었다. 원래 그는 영국에서 작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인 1930년대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비현실적이고 당시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은 중간 계급이 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거리 곳곳에 포스터가 붙어 있는 바르셀로나의 혁명적 분위기를 접한 그는 바로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의 의용군에 입대한다. 공화파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프랑스의 파시스트 반군과 맞서는 것은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즉시 그 도시의 모습이 내가 싸워서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고 오웰은 [카탈루냐 찬가]에 기록했다.

 

좌파의 분열과 배신에 크게 좌절

: 오웰은 몇 달 동안 파시스트와 대치를 하다 휴가를 얻어 떠났다 돌아온 바르셀로나는 몇 달 전의 바르셀로나가 아니었다. 통일 노동자당과 에스파냐 정부 및 공산당 사이의 분열은 전쟁과 혁명에 대한 전략의 차이에 있었다. 에스파냐 좌파 정부와 공산당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우선시하면서 혁명은 잠시 유보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통일 노동자당은 혁명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소련은 정부와 공산당 편을 들었고 내전의 와중에 통일 노동자당 당원들이 체포, 처형되는 사태까지 이른다. 오웰에게 이는 '혁명에 대한 배신'이었고 파시즘의 승리의 전주곡이었다. 알려져있다시피 당시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풍자한 우화 소설 [동물농장]은 1945년에 출판됐는데 당시 소련이 영국과 군사 동맹 관계를 맺고 있어 출판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에스파냐 내란에서 목격한 공산당의 배신과 독선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행복은 사회주의의 목표 아닌 부산물

: 오웰은 빈민가에서의 체험과 에스파냐 내란에 참가하면서 느꼈던 희망과 좌절을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와 전체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대로 연결시키며 작품 활동을 벌이다 1950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직막 작품 [1948년]은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여태껏 사회주의의 부산물이었고 우리가 아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인간적인 형제애이다." 평등과 형제애, 그리고 행복, 조지 오웰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낀 배경이다.

 

09 허버트 조지 웰스 : 사회주의적 상상력으로 쓴 공상 과학 소설

 

공상 과학 소설 안에 19세기의 계급의식 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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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집필과 더불어 사회주의를 위한 활동 벌여

: 웰스는 어릴 적부터 가난에 시달리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재단 보조 일을 싫어하던 그는 얼마 안 있어 그 일을 그만두고 미스허스트 그래머 스쿨의 조수로 일하게 됐다. 웰스는 이곳에서 비로소 학문을 접할 기회를 얻었고, 열여덟 살에 런던의 남부 캔싱턴에 있는 과학 학교에서 생물학을 배울 수 있는 장학생 자격을 얻었다. 1888년 런던 대학을 졸업한 웰스는 과학 교사로 지내면서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 과학 저널을 창간하고 논문도 발표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얻게 된 웰스는 1895년 첫 번째 소설인 [타임머신]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사회 비평은 당시 점진적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활동하던 페이비언 협회에 주목을 받았다. 웰스는 1903년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게 된다. 20세기 초 영국의 사회주의 조직 가운데 하나였던 페이비언 협회는 웰스가 보기에 심약한 지식인들이 모여 앉아 사회주의 개혁을 토론하는 소그룹 정도에 불과했다.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웰스는 협회가 변혁을 선동하는 실천적인 조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결국 웰스는 1908년 페이비언 협회를 떠났으며 사회주의를 향한 그의 투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과학 기술 발전이 부를 전쟁 가능성 예고

: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웰스는 진보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민중을 교육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됐다. 1920~1930년대에 웰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유럽과 미국의 언론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웰스가 당시 책이나 칼럼을 통해 주장했던 것은 '세계 정부의 필요성'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고통을 지켜본 웰스는 국제연맹의 창설을 지지하고 지식인들이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런 주장으로 인해 웰스는 몇몇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엘리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웰스는 미래 세계에 대한 경고를 계속하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 8월 13일 사망했다. 진정한 세계인의 고나점에서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고, 과학적 상상력으로 미래의 세계를 예측한 작가 웰스는 현실에서는 인류가 실현해야 할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위해 노력한 사회주의자였다.

 

10 미셸 푸코 : 우리를 혹사하는 체제를 전복하자

 

정신분석학과 프로이트에 깊은 관심

: 프랑스 철학이 19세기까지 서양 철학을 주도했던 독일을 누르고 인기를 얻게 된 이유를 프랑스 철학자들의 '실천'에 두기도 한다. 푸코는 1946년 7월 파리의 명문 고등사범 입학시험에서 4등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푸코의 대학 시절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로 인해 점점 의기소침해져, 마침내 자살을 시도했다. 푸코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정신과 의사에게 동성애 대한 성적 관심을 털어놓았지만 당시만 해도 정신과 의사들은 동성애를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했던 때라 푸코의 우울증은 치료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연구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당시 치료 과정에서 푸코는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병자들을 단순히 치료하는 일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즉 그들은 사회 안에서 한 인간이 무엇을 해야 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정하는 '정신적 경찰관'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푸코는 정신 분석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혼자 프로이트를 읽으며 공부를 했다.

 

공산당 가입과 해외에서의 학문 연구

: 1955년 푸코는 불어 선생 자리를 하나 얻어 스웨덴에 웁살라로 갔다. 스웨덴에 가기 전에 그는 1950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푸코는 스탈인이 사망한 이후 1953년 당을 떠났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소련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문제 삼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인권과 반체제 운동에 힘쓰다

: 1968년 말 서둘러 프랑스로 되돌아온 푸코는 본격적인 정치적 행동에 돌입했다. 새로 생긴 뱅센느 실험대학의 철학과장을 맡게 된 푸코는 급진적인 철학자들을 모으고 좌익 학생들과 행동을 함께 했으며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비롯해 에스파냐, 이란, 폴란드 등의 정치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는 등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수감자들의 인권에 각별한 관심을 쏟은 푸코는 1971년 1972년에 감옥 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폭동을 계기로 수감자들이 감옥의 극도로 가혹한 생활 조건을 책으로 쓰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때부터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75년에 발간한 [감시와 처벌]은 처벌의 형식으로서 감옥의 기원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푸코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여겨지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임명된 이후에도 공개강좌를 통해 반체제 운동에 힘을 쏟았다. 푸코는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이는 권력에 대한 그의 연구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푸코는 국가 권력을 투쟁의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마르크스적 시각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다. 푸코는 사회 곳곳에서 미시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즉 권력은 단지 정치권력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힘의 관계를 뜻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정치적 저항은 당위라고 주장한다. 권력 관계는 저항을 통해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애기다. "우리는 우리를 조용히 혹사하는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전복시켜야 한다. 내가 저술 작업에서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

 

11 파블로 네루다 : 서정시보다 진한 사랑으로 싸운 시인

 

칠레인들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신화적 시인

: 칠레 사람 치고 그의 연애시 하나 못 외우는 사람 없다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공화파를 지지하고 외교관직을 박탈당했고, 공화파 난민들을 낡은 어선에 실어 칠레로 수송해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도피와 망명 생활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죽음을 무릅쓴 탈출을 감행한 일은 유명하다.

 

외교관 거쳐 공산당 의원으로 본격 정치 활동

:

 

사회당의 아옌데와 대톨령 후보 단일화

: 칠레에서 좌파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1969년 네루다는 칠레 공산당의 대톨령 후보로 지명됐다. 하지만 사회당, 공산당을 비롯한 칠레의 좌파 진영이 인민 연합을 구성해 대통령 선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하자 네루다는 입후보를 철회하고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로의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1970년 칠레에서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1973년 9월 11일 아옌데 대통령이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네루다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쿠테타가 일어난 지 12만인 9월 23일 산티아고의 한 병원에서 예순아홉 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가 한 가장 힘찬 연설 중 하나였던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네루다는 시인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모든 민중의 일상적 노동에 바치는 자신의 헌신과 애정, 자기 몫의 참여를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인간의 손에 건레려 하는 이 끝없는 투쟁에 시인이 동참하고자 한다면, 그때 그는 땀과 빵과 포도주와 모든 인간의 꿈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내 시한 편 한 편은 유용한 노동의 수단이 되기를 요구했으며, 나의 노래 하나하나는 서로 교차하는 두 길의 만남을 위한 표지로 내걸리기를 갈구했고, 혹은 어느 누군가가, 다른 이들이, 다음 세대에 올 사람들이 새로운 표지들을 새겨 놓을 돌 조각 하나, 나무 조각 하나가 되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나의 당에게 ( 김남주 옮김 )

 

그대 덕분에 나는

낯선 사람들과 형제가 되었다

 

그대 덕분에 나는

살아 뻗어가는 모든 세력에 가담했다

 

그대 덕분에 나는

다시 태어난 조국을 되찾았다

 

그대가 나에게 주었다

외로운 사람들이 알지 못한 자유를

 

그래다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친절이 불처럼 타오르는 것을

 

그대는 똑바로 서게 해 주었다

똑바로 뻗어가는 나무처럼

 

그대 덕분에 나는 배웠다

사람들 사이의 일치점과 상위점을 분별하는 기술을

 

그대 덕분에 나는 알았다 한 사람의 고통이

어떻게 하여 만인의 승리 속에서 사라지는가를

 

그대 덕분에 나는 배웠다

형제들의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기술을

 

그대는 현실 위에 나를 붙박아 주었다

꿋꿋하게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그대 덕분에 나는 악당들의 적이 되고

분노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벽이 되었다

 

그대는 내가 보도록 해 주었다

빛으로 가득찬 밝은 세계와 커져가는 기쁨을

 

그대는 내가 사멸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왜냐라면 그대 속에서 나는 이미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12 파블로 피카소 : 회화는 장식품이나 심심풀이가 아니다

 

그림을 통한 파시즘 반대와 자유 옹호

: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과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 이렇게 선언했던 피카소는 1973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30여년 동안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1881년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태어나 화가로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며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피카소는 평소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왔다. '게르니카'뿐 아니라 많은 작품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적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며 대항했던 피카소는 파시스트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절의 어느 날 나치 장교가 그의 집을 수색하러 와서 '게르니카'의 사진을 보고 피카소에게 "이것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 피카소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오, 바로 당신들이오!"

 

공산당 가입은 인생의 논리적 귀결

: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투사들과 교유하던 피카소는 독일군이 물러간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는 뉴욕에서 발간되는 [신대중]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산당에 가입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건 내 인생과 작품 전반의 논리적인 귀결입니다. 나는 지금껏 유배 상태였지만 이제 더는 아닙니다. 내 조국 에스파냐에서처럼 프랑스에서, 소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용맹하기 때문에 나는 공산당원이 된 것입니다. 에스파냐가 나를 다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때까지 프랑스 공산당은 나의 조국입니다. 그리고 난 당 안에서 위대한 과학자와 시인들, 그리고 지난 8월에 내가 본 파리 투사들의 그 아름다운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내 형제들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실제 많은 미술평론가들이 공산당 가입 후 피카소의 작품이 공산당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피카소는 1973년 아흔둘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 30여년 동안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행사에 참가하는 한편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으며 열성적인 당원으로 활동했다. 물론 프랑스 공산당이 그의 작품 활동에 이의를 제기하곤 했지만 그는 끝까지 충직한 당원으로 남아 있었다.

 

13 존 스타인벡 : 미국 노동자 계급의 영원한 벗

       

직접 체험한 빈민의 삶을 묘사한 작가 

: 스타인벡은 1920년 스탠퍼드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강의를 듣는 대신 목장, 도로 공사장, 목화밭, 제당 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는 시간이 많았다. 스타인벡이 노동자와 빈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기간 동안 사회의 밑바닥과 그곳에서 노동하고 생활하는 서민들의 생활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주 노동자 그린 [분노의 포도]로 FBI의 주목 받아

: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애환과 분노를 접한 스타인벡은 조드 일가의 역경을 그린 [분노의 포도]를 1939년 발표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작가로 성공하기 시작한 스타인벡은 이 작품의 출간으로 인해 지독한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작가동맹, 인민전선에서 활동

: 스스로를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분노의 포도]를 썼을 당시에 인민전선 당원이었다. 인민전선은 1935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대항한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결성하기로 하면서 국가별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하지만 미국 공산당과 인민전선의 활동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으면서 급속도로 위축됐다. 이 시기 스타인벡은 미국 작가 동맹을 통해 미국 공산당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인민전선의 붕괴 이후에도 작가 동맹의 회원으로 남아 있었다. 196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타인벡은 이후 린든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전 참전 결정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가 진보적인 독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 1967년 반전 입장으로 돌아섰다. 자신과 주변의 삶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을 그린 스타인벡, 그는 지금도 미국 노동자 계급의 영원한 벗으로 남아 있다.

 

14 마틴 루터 킹 : 인종.경제적 평등 꿈꾼 민주적 사회주의자

 

반공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민주적 사회주의자

: 1968년 미국에서 반전 운동이 확산되는 시점에 암살당한 킹 목사는 우리에게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흑인 민권 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믿기지 않지만 "보다 개선된 부의 분배가 필요하고 미국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킹 목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지만 이는 백인 자유주의 진영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공산주의자였으며 그가 관계를 맺은 전미 법률가 조합(NLG)이나 민주 행동을 위한 변호사회(LDA) 등은 좌파 조직이었다.

 

일찍이 인종차별.불평등에 눈뜬 목사 집안의 아들

: 1949년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은 킹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해석 방법은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전형적인 약점들을 지적하고 대중의 자의식 성장에 기여했으며, 기독교 조직의 도의심에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는 마르크스 저작을 통해 "빈부 격차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고 인정하고 "현대 미국 자본주의는 사회 개혁을 통해서 빈부 격차를 상당히 감소시켰지만 부를 보다 효율적으로 분배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았다"고 주장했다.

 

백인들도 동참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

 

자유 시장 원칙 대신 필요에 따른 상품 분배 지향

: 암살 직전까지 흑인 민권 운동뿐 아니라 농동 운동과 반전 운동에도 힘을 기울이던 킹 목사는 흑인들의 경제적 참상을 고발하고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근본적으로 재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킹 목사는 자신이 지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자유 시장의 원칙에 근거해서 상품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분배되고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인종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15 존 레넌 : 선(禪) 마르크스주의를 꿈꾼 20세기의 아이콘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의 밴드 비틀스

: 레넌은 1971년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급진적인 발언을 했을 당시 신좌파 활동가들조차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비틀스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북부 노동자 도시 리버풀 출신의 레넌이 운동에 뛰어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계급'은 뿌리 깊은 원초적 자각이었고 계급 구조가 있는 한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레넌은 종교에 심취해 있을 때에도 자신을 기독교 공산주의자로 규정했다. 영국 변두리 출신의 이 로크롤 밴드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 레넌은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조지 해리슨은 미국에서 아직 반전 운동이 활성화되기 이전인 1966년에 연애 기자들 앞에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와 본격적인 운동 대열 합류

: 레넌은 1969년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새 연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와 함께 본격적으로 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모든 혁명은 개인숭배로 끝나고 말았다"며 노동자 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어버이'가 되어 어떠한 '어버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자기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레넌의 이러한 명철한 정치의식과 투쟁은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베트남전을 질질 끄는 닉슨 정부에 대한 투쟁에 열중하다가 좌절하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1980년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앨범을 발표하면서 그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엎치락뒤치락했던 정치 경력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면서도,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보수파가 되든지 사회주의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라며 자기는 자신의 사상을 '선(禪) 마르크스주의'로 정리하겠다고 단언했다. '선 불교'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1980년 12월 의문을 죽음을 맞았다.

 

16 빅토르 위고 : 노동자에게 사랑받은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레 미제라블]은 현실에서 그린 지옥

: 그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은 발표될 당시부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주머니를 털어 조금씩 모은 돈으로 책을 사서 돌려본 이래로 빅토르 위고는 특히 프랑스 노동자 계급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왔다. 이 작품은 19세기 문학의 대중적인 성공 사례로 꼽혔고 "주머니에 12프랑이 있으면 노동자들은 이 책을 샀고 제비뽑기로 읽는 순서를 정했"을 정도로 당시 노동자들에게 인기였다. 1830년대 파리의 현실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위고는 "단테는 시에서 지옥을 그려 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 내려 했다"고 말했다.

 

노동 계급과 코뮌 전사의 벗

: 빅토를 위고의 생애는 제1제정, 왕정복고, 7월왕정, 제2공화국, 제2제정, 제3공화국으로 이어진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억압 체제에 저항하며 노동자 계급과 코뮌 전사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의 작품과 생애는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7 에리히 프롬 : 인간적 사회주의 꿈꾼 정신 분석학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융합 시도

: [사랑의 기술], [소유나 존재냐], [자유로부터 도피] 등의 책으로 유명한 에리피 프롬은 우리에게 심리학자 혹은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신프로이트학파의 거장이었던 프롬이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융합해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꿈꾼 인물이었고 미국 사회당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23년 정식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사회 조사 연구소는 초기에는 사회 변력의 주도 세력으로 노동 계급을 상정했지만 "산업 사회의 기술적 합리화가 노동 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거세했다"고 판단하고 현대 사회의 문화적 상부 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 연구 활동의 초점을 옮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 분석학의 도입이 요구됐다.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1년에 세 명의 정신 분석학자를 맞아들였는데 그들이 칼 란트아우어, 하인리히 멩, 에리히 프롬이었다. 프롬이 합류함으로써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융합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다.

 

미국 사회당 강령 초안 작성

: 서구의 자본주의도 소비에트 공산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프롬은 마르크스 초기 저작에 주목하여 인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프롬은 자본주의도 소비에트식의 공산주의도 인간성을 짓밝고 관료적 사회 구조를 만들어 '소외'를 가속화시키고 있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담겨 있는 사상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었다.

 

18 제라드 드파르디유 : 극중 배역에 갇히지 않는 현실의 좌파

 

불우한 가출 소년에서 인기 배우로

: 드파르디유는 1948년 12월 27일 프랑스 중부 상트르 주 샤토루에서 가난한 금속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각국을 떠도는 부랑아 생활을 하며 차를 훔치고 상점에서 물건을 쓸적 훔쳐 암시장에 팔아넘기는 등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 생활을 했지만, 연극 학원에 다니던 한 친구의 권유로 배우 수업을 받게 되면서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뚜렷한 정치 신념을 가진 배우

: 드파르디유는 2005년 11월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가난하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거친 드파르디유 <1900년>, <당통>, <제르미날> 등 사회성 짙은 영황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이런 극중 캐릭터는 현실에서도 이어져 드파르디유는 프랑스 공산당과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모터사이클과 포도주를 좋아하는 프랑스 국민 배우 드파르디유는 종종 이브 몽탕과 비교되고 있다. 이브 몽탕 역시 국민 배우로 불렸고 공산당의 당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이들의 뚜렷한 정치적 신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19 슈테판 하임 :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영원한 저항아

 

미국 시민권 대신 사회주의 동독을 택한 망명 작가

: 그는 1913년 독일 켐니츠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치가 집권하자 유대인인 그의 집안에도 비극이 닥쳤다. 부친은 자살하고 가족들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학상당했다. 그는 다행히 미국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하이네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본격적인 작가로 활동하여 명성을 얻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장교로 입대하여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했다. 냉전이 본격화하고 매카시즘의 광풍이 미국을 휨쓸면서 사회주의자인 그는 미국에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는 1952년 훈장과 미국 시민권을 반납하고 독일로 돌아간다. 그는 이미 둘이 된 조국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의 고향은 서독 지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슈테판 하임은 자본주의 서독이 아닌 사회주의 동옥을 선택했다. 그러나 쑴에 그리던 사회주의 조국이 그가 꿈꾸던 이상과는 한참 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디서나 저항하고 배척받았던 생애

: 동독으로 돌아온 바로 이듬해인 1953년 신문에 비판적 칼럼을 기고하면서부터 동독 정권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서독에서 환영받은 것도 아니다. 동독에서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극작가 브레히트와의 두터운 친분이었을 것이다. 슈테판 하임과 동독 정권과의 갈등은 동독이 붕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어쨌든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 되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것은 슈테판 하임이 바라는 세상이 아니었다. 동독의 브레히트 묘비에 "유대인 돼지 새끼"라는 낙서가 쓰이는, 대략 그런 세상이 온 것이다.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를 넘나들며, 서로 많이 다른 각각의 공간과 시간들을 거치면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저항했고, 배척받았다. 그가 정주하고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20 아서 밀러 : 마릴린 먼로 남편이 빨갱이라고?

 

자본주의 참혹함 고발한 [세일즈맨의 죽음]

: 1915년 뉴욕에서 출생한 아서 밀러의 가정은 대공황으로 몰락한 미국 중산층들 중의 하나였다.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38년 루스벨트 행정부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연방 극장 프로젝트'에 가입해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비록 당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아서 밀러도 미 의회가 우려를 금치 못했던 좌파 예술가인들 중 하나였다. 밀러는 1930년대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공산당에 입당했던 가장 큰 동기는 대공황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 당의 스탈린주의 노선에 염증을 느껴 공산당과 절연하게 된다.

 

매카시즘의 탄압과 먼로와의 결혼 생활

: 1956년 밀러가 비미 활동 위원회의 청문회에 불려 나갔다. 그는 이름을 대라는 의원들의 요구에 끝까지 저항했다. 그 대가는 벌금과 30일간의 구금, 블랙리스트 등재, 여권 말소였다. 그런데 청문회 기간 중 세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의원들과 설전을 벌이는 아서 밀러가 아니라 그의 곁은 지킨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 배우 마릴린 먼로였다. 두 사람은 1951년 처음 만나 청문회 기간 중인 56년 6월에 결혼했다. 나이 차이뿐만 아니라 미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문학가와 스크린을 주름잡는 섹스 심벌의 결합은 여러 모로 이색적인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반대를 비롯해 반전 운동에 주력

: 1965년 아서 밀러는 국제 문인 협회(PEN)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국제 문인 협회가 세계 문인들의 양심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을 거치면서 국제 문인 협회는 단순한 친목 단체에서 행동 그룹으로 변모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 작가들의 창작과 자유 문제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말련에 늙은 몸을 이끌고 동참했던 활동은 9.11사건 이후 벌어진 전쟁과 공포에 대한 반대다. 그는 또한 미국의 군사 교도소에서 벌어지는 잔혹 행위와 미국의 힘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시민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40여 년 전 그 자신이 체험했던 바로 그 '광기'의 재현을 경고한 것이다.

 

21 로저 워터스 : 5만의 이스라엘-아랍인 춤추게 한 좌파 로커

 

한국의 신군부에 단단히 찍힌 록 밴드

: 핑크 플로이드는 '정의 사회 구현'에 어울릴 만한 밴드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밴드의 중심에 서 있던 로저 워터스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한 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5공화국의 문화공보부는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오핸 노동당 지지 철회

: 스스로가 밝힌 바에 따르면 10대 시절 로저 워커스는 노동당의 청년 조직인 '청년 사회주의자'의 캠브리지 지부 대표를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노동당의 지지자였지만 그마저도 블레어의 정치와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지지를 철회했다.

 

음악은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

: 전쟁은 로저 워터스가 생애에 걸쳐 꾸준히 제기하고 있는 주제이다. 로저 워터스는 2006년 6월 팔레스타인에서 공연을 가졌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을 비판해 온 노장 뮤지션의 공연에는 아랍인과 유대인을 합해 5만 명의 관객이 모여들었다. 무대에 오른 그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리하기 위해 설치한 장벽을 향해 '더 월'에 들어있는 그 유명한 노랫말을 목청껏 외쳤다. "벽을 허물어라(Tear down the wall)!"

 

22 로버트 오펜하이머 : 과학자의 양심 지킨 원자 폭탄의 아버지

 

미국의 은인에서 미국의 적으로

: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부밖에 모르며 세상일에는 담을 쌓고 사는 전형적인 공붓벌레였다. 그런 그가 이론 물리학 바깥의 영역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36년 한 여학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진 태틀록은 미국 공산당 당원으로 오펜하이머에게 문학과 사회주의라는 다른 세계를 가르쳐 주었다. 둘은 결혼을 계획했지만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를 급진주의자로 만든 다른 요인은 미국과 세계를 휩쓴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으로 고통 받는 진 태틀록의 가족을 보면서 이전까지 자신이 안주했던 '연구실 안에서의 연구'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됐다. 193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받은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소유한 부를 미국 안팎의 좌파 활동에 기부했다. 에스파냐 내란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활동에 열정을 쏟았는데 이는 오펜하이머 자신이 그다지 종교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대인이었고, 또 유럽에서 만났던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오는 것을 보고 파시즘의 위험을 일찍부터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가 핵무기의 개발에 매진했던 것도 단지 학자로서의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수소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4년간의 노력 끝에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오펜하이머의 동생 프랭크는 그가 실험의 성공 후 전혀 기뻐라지 않았다고 전했다(핵폭발에 성공하고 오펜하이머는 "이제 나의 이름은 죽음이며, 세상의 파괴자이니라"라는 구절을 떠올렸다고 함). 소련이 첫 번째 핵 실험에 성공했고 이에 놀란 미국은 한 단계 높은 핵무기인 수소 폭탄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 개발에 강하게 반대했다. 인류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낙관주의는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오펜하이머는 1953년 청문회에 소환됐다. 청문회는 그의 소소한 개인사까지 들춰내며 핵에 대한 정보를 좌파에 연루된 친구들에게 흘리지 않았는지 추궁했다.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의 요구에 끝까지 거부했고, 그의 소환에 대해 미국 과학계의 다수가 분노했기 때문에 공직 추장이나 기소는 피할 수 있었다.

 

독단과 독선은 과학이 아니다

: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끝내려고 만든 무기가 사실은 인류를 끝장낼 괴물임을 알고 좌절했다. 그러나 자기가 저지른 오류를 자기 손으로 수정하고 인류에 속죄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과학자의 양심과 책임이 연구자의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임을 일깨우기 위해 남은 평생을 바친 과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23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공산당도 외면한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자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영화의 계보를 잇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엘리아 카잔 이후 30여년 만에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마르크스주의 영화감독이었다.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혁명의 열정으로 충만했던 1968년 이탈리아 공산당(PCI)에 입당했다. 공산당에 입당한 베르톨루치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와 정치를 직접 결합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검열에 맞선 길고 외로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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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부정하는 공산당에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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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대니 글로버 : 자국 외교 정책 당당히 비판하는 할리우드 인기 배우

 

제3세계에 관심 가진 할리우드의 진보주의자

: 2006년 1월 대니 글로버는 미국의 진보적인 가수인 해리 벨라폰테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네수엘라를 방문해 차베스 대통령을 만났다. 이 방문을 통해 그는 당시 진행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변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할리우드 진보주의자의 대표로 잘 알려진 팀 로빈스-수잔 새런든 부부지만 사실 글로버는 이들 부부를 합친 것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미국 안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만 목소리는 내는 다른 할리우드 자유주의자들과 다르게 그는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깊은 관심을 보이고 힜다.

 

흑인 민권 운동을 넘어 제3세계 연대로

: 대니 글로버는 가장 활동적인 미국 반전 운동 단체인 앤서(A.N.S.W.E.R)의 지지자로 이라크 전쟁 이후 열린 주요한 반전 집회에는 반드시 참가하고 있다.

 

진보적인 독립 정당을 건설하자

: 대니 글로버의 역동적인 활동과 급진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글로버 자신이 자신을 좌파나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독립파 사회주의 잡지인 '먼슬리 리뷰'가 창간 50주면을 맞았을 때 그가 보낸 축사를 보면 대니 글로버라는 진보적 배우가 가진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적은 너무 강해서 이길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행동에 나서게 해주고, 불가능이란 단지 어려움일 뿐이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잡지의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 잡지가 바로 먼슬리 리뷰다."

 

25 미야자키 하야오 :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공동체와 연대 의식에 일찍이 관심

: 청년 시절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던 미야자키는 대학에 대날 무렵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청소년 판인 '소년소녀 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란 제목의 만화를 연재했는데, 그가 밝혔듯이 이 작품은 SF와 마르크시즘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도에이 동화에서 스튜디오 지브리로

: 미야자키는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터로 일하게 된 도에이 동화의 노동조합 서기로 활동하였다. 미야자키는 도에이 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 이사오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며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했다. 1985년 그들은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었고, 1990년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과는 달리 스태프를 월급제로 고용하였다. 스태프를 작품마다 계약하는 방식이 아닌, 상시적으로 고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고용을 안정시킴으로써 작품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착취 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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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의 긴장과 공존 모색

: 미야자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미야자키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가 되길 원했다. 소련과 중국의 국경 분쟁은 과연 그 국가들의 사회주의가 진실한가를 의심하게 했지만 그래도 그는 1990년대 이전까지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동구권의 몰락은 그에게도 고통이었다. 미야자키는 현실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정당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아 자신의 꿈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미야자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은 그의 작품 속 의식보다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일지 모른다.

 

26 가라타니 고진 : '몰락' 이후 쉰이 넘어 코뮌주의자가 되다

 

비평은 위기 상황으로 자기를 내모는 것

: 사회주의적 전망이 상실된 1990년대에, 그것도 쉰이 넘고 나서야 그는 코뮌주의자가 되었다. 바로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다. 가라타니 고진이 비평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1960녀대 후반은 서구 지성계에서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시기이자 반체에 운동이 번져 나가던 시기였다. 그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 당시 제기된 인간적 마르크스주의도 반체제 운동이 보여 준 열정도 그에게는 '이념이 만들어 낸 병'에 불과했다.

 

1990년대에 나타난 태도의 전환

: 가라타니 고진은 1989년까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경멸해 왔다. 그는 어떠한 입장에도 속하지 않고 비평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자 자신이 과거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지속된다는 전제 아래 유효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사회주의가 현실적으로 끝났을지언정 사상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자본주의를 극복할 현실적인 기획에 몸을 담았다.

 

이론적으로 구축된 실천의 방향

: 자본주의는 정의감과 연민에 기반한 열정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지양할 코뮤니즘 역시 종교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상상이 아닌 새로운 교환 원리를 통해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선 자본주의를 스테이트(state, 국가)와 네이션(nation, 공동체)과 겹쳐 사고한다. 1989년 이후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자신의 정식을 설파하는 데에 경주했다. 그것들 각각은 등가교환, 상호부조, 강탈이라는 교환 원리에 대응한다. 먼저 네이션 안에서는 '상호부조'가 이루어진다. 등가교환에 따르지 않고 공동의 감정에 기대어 서로를 돕는다는 교환 원리이다. 스테이트는 강탈을 자신의 교환 원리로 삼는데, 그것이 교환인 까닭은 지속적으로 빼앗기 위해 수탈당하는 이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기원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시장 원리에 따라 화폐를 통한 등가교환을 취한다. 이렇듯 상이한 교환 원리가 합쳐져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강력한 스테이트로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던 것이 레닌주의이고, 네이션으로 자본주의 극복을 꾀했던 것이 파시즘이다.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사슬을 끊지 못 했기에 역사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세 가지 교환 원리에 기반해 있는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새로운 교환 원리를 제안한다. 그것이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다. 또 한 가지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이론적인 단서는 자본의 자본화 과정, 즉 화폐-상품-화폐'에 있다. 여기에는 두 차례 개입의 여지가 있다. 첫째는 화폐-상품의 계기, 즉 화폐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고 두 번째는 상품-화폐'의 계기, 즉 상품이 다시 잉여가치가 부가된 화폐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화폐-상품-화폐'의 과정을 끊자고 제안한다. 즉 일하지도 상품을 사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대중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전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의 연합'을 제시한다.

 

사상의 실패인가 새로운 사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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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켄 로치 : 대처리즘에 영화로 맞선 블루칼라의 시인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

: 켄 로치는 프리 시네마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영국 국립 영화극장에서 6회에 걸쳐 발표된 일련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파생된 영화운동이다. 영화는 모든 상업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예술가는 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게 이 운동의 핵심이었다.

 

사회문제, 계급 문제 다룬 수작 잇단 발표

: 1970년대 켄 로치는 토니 가넷의 지원 아래 꾸준히 사회 문제, 계급 문제를 다룬 수작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회 서비스가 후퇴하고 노조의 힘이 약화된 마가렛 대처 수상 재임 기간은 그에게도 고난의 시절이었다. 로치는 대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영화들을 만들었을 때 그것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90년대에 들어 새로운 투자자를 만난 로치는 노동자들의 삶을 주제로 한 뛰어난 극영화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절 작품들이 각종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켄 로치의 현실 정치 활동도 눈에 띈다.

 

역사의 탐구는 감독으로서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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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적이지 않은 결말 불구 장기적 낙관론자

: 켄 로치의 탁월한 능력은 사회적 관계로부터 기인하는 갈등을 설명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생생하게 그리는 데에 있다. 그렇지만 켄 로치의 영화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길게 보자면 사람들이 가기어 맞서 싸울 것이니 낙관적이다." 불편하지만 그의 영화를 보게 되는 이유이다.

 

28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 산업화의 과정에서 노동자 편에 선 목회자

 

예수 믿는 사람들의 두 가지 오해

: 비행기 한 번 타지 못한 터라 다른 나라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크게 2가지 우해를 하고 있다. 1.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는 이른바 영적인 신앙인들은 결국 보수적 입장을 가지게 되고, 기도도 하지 않고 룻이 여자인지 롯이 여자인지 모르는 신앙인들은 결국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색과 구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만사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2.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룸하르트의 성장 배경과 영적 경험

: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대단히 유명한 목회자였으며 치유자였다. 자기의 내적 확신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유명한 신앙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개개인의 고난을 종요시하지 말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기적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에 봉사하는 것을 원했다. 블룸하르트는 개인뿐 아니라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라고 했다.

 

보다 넓어진 시각과 공개적인 '편들기'

: 블룸하르트는,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과 함께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거룩한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 운동을 반교회적인 태도,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몰라붙였다. 밧볼에서 조용히 지내던 블룸하르트가 공개적으로 사회 문제를 거혼하게 된 계기는 이른바 '교도소 법률안'이었다. 당시 교회는 파업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했다. 문제가 있으면 기업주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선 사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룸하르트는 자본이 갖는 악마적 속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법안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노동자들 편에 서기로 했다. 그의 등장은 위축되어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블룸하르트는 1899년 10월 2일 두 번째 집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오늘날 노동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히 적은 자들에게 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의 친구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이 되고 내 스스로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한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 1900년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어야 합니까?" 블룸하르트는 천대받는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멸시받는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뷔르템베르크 주교회는 그에게 목사직과 그 외 다른 직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고 그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여전히 깊은 영성을 지녔던 블룸하르트

: 그는 1888년까지 대전도 운동을 전개하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그 후 약 10년 동안 명상과 피정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하느님 나라'를 강조했다. 그에게 기다림의 공동체는 곧 이 세상에서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교두보였다.

 

29 폴 틸리히 : 인간 소외 극복을 꿈꾼 종교 사회주의자

 

목사님이 왜 사회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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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주의와 종교 사회주의

: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 사회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주의와 종교 사회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이론이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사회의 악마적 착취와 그에 따른 위기의 장기화 등을 타개하려고 영국의 킹슬리, 모리스, 루드로 등이 주창한 운동이다. 1850년 '기독교 사회주의'라 불린 이 운동은 신자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배격하고, 경제적 사회악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기독인의 의무이자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곧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학대 받는 자, 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전투적 교회'라는 모델을 채택했다. 반면 패배와 절망의 궁지에서 헤매는 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그들을 그 상황에서 구출해 내는 것, 곧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종교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 아니고, 교회와 사회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다. 교회가 되었든 세계가 되었든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주권' 아래에 있다고 인정되는 교회보다 교회 밖, 속세에서 '주권'을 더 많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여러 '운동', '현상'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찾자면 어떤 '이론'이 가장 '성경적'인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 사회주의는 사회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전통 교회보다 세계 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를 실천적 역동성 속에서 종교적 의의를 찾았다. 그러므로 종교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교회에 반하는 이론으로 생각하지 않고 표용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반종교성이나 무신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 특별한 하느님의 경륜과 손길이 있다고 믿었다.

 

종교 사회주의자 틸리히

: 틸리히가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는 1.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에 있다. 1차 대전 중 틸리히는 국민들이 계급적으로 분열되고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2. 틸리히는 1차 대전에 참가한 경험으로 사회주의 혁명만이 제국주의의 계급 분화를 타파할 것으로 믿었다.

 

틸리히가 본 마르크스주의

: 틸리히는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종교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만이 부르주아 문화.사회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틸리히는 사회주의 운동을 외적인 경제적 제도의 변혁이나 노동 계급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자기 소외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틸리히에겐 종교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인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 최대의 사명을 띤 공동체였다. 틸리히의 종교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실존의 본래 가져야 할 위치에서 빗나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곧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하나의 연격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산과 교환이라는 경제적 매커니즘에 의해 노동자들은 인간 상실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또 하나의 일치된 지점은 '돈'에 대한 입장이다. 돈 때문에 인간 관계가 왜곡되고 결국 인간 소외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틸리히와 마르크스는 일치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공통점이 있었고, 실제로 틸리히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받은 영향도 크지만 최종 해결점은 차이가 있다.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신률(神律)

: 틸리히가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점이었다. 그는 타율적인 '제도', 곧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 사회주의를 통해 인간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봤는데,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회주의 운동 속에 불어넣음으로 새로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자율도 타율도 아닌 신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율의 현상들인 자기 만족성, 개인주의 등이 종적을 감출 것이며, 타율에 의한 비인간화, 물건화(物件化), 도구화 등이 극복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이론을 기초로 틸리히는 그런 신률이 지배하는 날을 기다랴여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그의 '거룩한 공백기론(Sacred Void)'이다.

 

30 월리엄 모리스 : 예술과 노동의 결합 꿈꾼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

 

사회주의자 모리스

: "현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예술과 생활의 즐거움을 뺏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없어지면 인간의 타고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더 이상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예술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 "예술의 창조와 그것에 따르는 일의 즐거움은 회화나 조각 등의 예술 작품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의 일부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40대의 월리엄 모리스가 사회주의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모리스는 옥스퍼드에서 평생의 친구가 된 화가 번 존스를 만났고, 그의 사상을 토대가 된 러스킨과 칼라일의 저작을 탐독했다. 특히 사람이 일하면서 경험하는 즐거움이 사회의 기초에 존재함을 주장한 러스킨의 예술론은 모리스에게 평생의 영향을 끼쳤다. 노동 그 자체에 있는 예술적 가치에 주목한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자들, 기계에 종속되어 분업화된 비숙련 노동자들이 예술로부터 소외된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노동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레드하우스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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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예술가로서의 현실 정치와 사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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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RED 열정/진보/유혹의 컬러 (장석원)

 

보론 : 사회주의 자유의 또 다른 이름 (장석준, 진보신당 상임연구소 연구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