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본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 이춘규, 강, 2009, (091001).

바람과 술 2009. 10. 1. 03:49

여는 글

 

산에 오르며 일본을 읽다

 

'큰보살산' 한 방 먹이다

 

악마의 유혹 다니가와다케

 

일본의 상징, 후지산에 오르다

 

위험한 야간 산행의 매력

 

구사쓰, 일본 최고의 온천

 

구사쓰는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효고현의 아리마, 기후현의 게로와 함께 일본의 3대 명천(名泉)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한국인들에게 하코네나 닛코, 벳푸 온천 등이 유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인의 지진 대비, '올 테면 와라, 신의 처분에 맡긴다'

 

대지진 공포로 일본열도가 떨고 있다

 

일본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

 

추억의 마을방송, 도쿄에 남아 있다

 

대중목욕탕 센토가 사라진다

 

일본의 목욕문화는 6세기에 도래한 불교를 통해 보급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불교에서 몸을 정갈하게 하기 위해 목욕을 하던 습속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목욕문화가 점점 일반에 침투하면서 에도시대에는 센토라는 이름의 목욕탕이 널리 보급되었다. 에도시대의 센토는 보통 남녀 혼욕탕이어서, 전기가 없었던 어두운 센토 안에서 풍기문란 행위가 잦았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각 도도부현 조례로 혼욕을 금지하고는 있지만 법보다는 관습이 앞서 아직도 지방의 많은 온천에 혼욕문화가 남아 있다. 일본의 목욕문화는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 간 차이가 크다. 간사이 지역은 대중목욕탕이 비교적 넓고 탕도 여럿이며 사람들은 목욕 자체를 즐긴다. 하지만 도쿄를 붕심으로 한 간토 사람들은 목욕을 할 때 매우 엄숙하고 조용하다. 에도막부 시대 무사들의 목욕 전통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뜨거운 물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몸을 '담그는' 식으로 절도 있게 목욕을 한다.

 

밤새워 술 마시는 사람들

 

우리나라 '말 트기'와 유사한 '부레이코'는, 전통적인 마쓰리(마을 축제)가 끝나면 신이 강림하는데 이때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일체가 되기 위해 모두가 정신이 나가도록 취한 뒤 말을 트며 하나가 되었던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처럼 술은, 일본인들에게 신인합일(神人合一)의 매개체였고, 일상적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신사의 제사나 마쓰리 때 주로 먹었던 음식이었던 것이다. 자기 전에 마시는 '네자케'라는 술도 있다. 주로 겨울에, 잠을 청하기 위해서 마신다. 호기의 상징으로, 많은 양의 술을 단숨에 마셔버리는 '잇기노미'는 급성 알코올중독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19세기 말 이후 주세가 부국강병을 위한 자금원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면서 술과 국가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식민지 시대 주세를 거두기 위해서 한반도에 값싼 희석식 소주를 대량 보급시켰다는 설이 있다.

 

일본열도 위협하는 불법 투기 쓰레기

 

일본 시내 중심부나 주택가의 주요 거리는 일본을 찾는 어떤 외국인이 봐도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다. 하지만 외진 곳, 특히 지방 도시의 한적한 갈 등은 버려진 불법 쓰레기로 멍들어가고 있다. 일본열도가 불법 투기 쓰레기로 신음하는 상황이다.

 

사기꾼이 들끊는다

 

일본, 지역감정은 없는가

 

일본은 훗카이도, 혼슈, 시고쿠, 규슈, 오키나와 등 주요 다섯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은 남한보다 대략 4배 정도 넓다보니 근세 이후 동부와 서부 간의 지역 차이도 컸다. 그중에서도 간토와 간사이 간의 지역감정이 두드러졌다. 지역감정은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지극히 엷어졌고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아직도 생활과 문화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동서 간 지역감정은 크게 3번의 고비가 있었다. 첫번째는 1600년 일본이 통일되기 전 동군과 서군이 총력전을 펼쳤던 세키가하라 전투이고, 두번째는 1868년의 메이지유신이다. 그리고 1945년 일본 패전이 마지막 고비였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9월 혼슈의 중간 지점인 기후현의 세키가하라에서 있었던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외아들 히데요리를 내세운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격돌한 전투이다. 그때 승리한 동군 진영은 메이지유신까지 일본 역사의 중심 세력이 되고, 패한 서군 소속의 인사들은 하급 무사로 전락하여 대부분 서쪽 지역 변방으로 밀려나 비주류 세력으로 250여 년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사람들의 후손으로 일본 서쪽 지역에서 한을 품고 자라온 세력들이 '에도막부 타도'를 외치며 메이지유신의 주체가 된다. 메이지유신 운동의 주체는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도사번(현 고치현) 세 지역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이들은 근대 국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도 컸지만, 근저에는 신분 차별, 지역 차별에 대한 깊은 한이 서려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이후 수도를 도쿄로 옮기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며 정치적 세력을 획득한다. 조슈번, 사쓰마번, 도사번 출신들은 내각의 요직을 패전 때까지 주름잡는다. 그 후광은 1970년대까지도 작용했다. 일본의 역사와 정치의 중심이 동서 세력 간 두 번에 걸쳐 요동친 뒤인 패전 후에는 승전국 미국의 필요 등으로 인해 동서 간 인재의 불균형 현상은 크게 해소되었다. 전후에는 간토 지역의 정치 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져 간토와 간사이 특히 경제적으로 큰 온도 차가 벌어졌다. 전후에는 간토 지역의 정치 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져 간토와 간사이는 특히 경제적으로 큰 온도 차가 벌어졌다. 간토 지역과는 달리 간사이 지역은 경제 회복의 혜택이 적어 썰렁했다. 간토, 간사이의 지리적인 분리 기준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후지산이 간토와 간사이의 기준이라는 설부터, 에도막부가 설치했던 하코네의 관문이 기준이라는 설, 아울러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던 기후현의 케기가하라가 기준이란 설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정설은 간토와 간사이를 가르는 명백한 지리적 기준점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간사이나 간토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두 용어에는 간사이 지방 사람들의 우월 의식이 스며 있다. 즉 간사이는 정치나 경제, 문화의 중심이지만 간토 지방은 '야만의 땅', '혹은 최근 들어건 '촌놈들의 땅'이란 다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간사이 지역은 '천황'이 있는, 문명도가 높은 지역이란 자존심을 담아 '긴키'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키'에는 도읍이란 뜻이 있다. 현재 긴키는 교토, 오사카부, 시가, 미에, 나라, 와카야마, 효고현 등지를 가리킨다. 긴키를 간사이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간사이가 메이지유신 이후 문화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의미라는 해석도 있다. 간사이와 간토의 지리적 경계는 모호하지만 '서일본'과 '동일본'의 지리적 경계는 확실하다. 바로, 중부 아이치현과 미에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베다 강이다. 나베다 강은 강폭이 아주 좁지만 이 강을 경계로 양쪽 강안 지역의 억양이 명확히 다르다. 서쪽은 오사카말, 동쪽은 나고야말을 쓴다. 한자를 읽는 방법도 다르다. 

 

'흡연자 천국' 일본 옛말 될까?

 

평생 '철밥통' 일본 공무원

 

수돗물이 외면당하고 있다

 

도쿄에 상수도 시설을 갖춰 공공 급수가 가능해진 것은 에도막부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되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집권 1623~1651)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도쿄의 상수도 역사는 40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간다상수, 다마카와 상수 등 당시 상수도는 고저차를 이용한 자연흐름식이었었다. 수도관 중간 수십 곳에 우물을 설치해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상수원은 바닷물의 영향을 받을 위험이 없는 중류와 상류의 강물이었다. 이후 근대식 상수도 사업은 180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도쿄 지역에 콜레라가 번지면서 상수도의 위생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높은 지역의 상수도가 오염되면 아래 지역에서 그 물을 마신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병에 걸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1898년에는 낙차를 이용한 자연흐름식 상수도를 가압식 상수도로 개량하여 대량 급수가 시작된다. 이전의 수도관은 석재로 만든 일부 간선 구간을 제외하고는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누수가 많고 집단적으로 전염병에 감염되는 사건이 빈발하는 등 위생적인 면에서 매우 취약했으나 가압식 상수도로 바꾸면서 목재관을 철제관(가정이나 사업소는 납관)으로 교체했다. 상수도 근대화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상수원은 여전히 도쿄 서쪽 다마카와 강이었다. 이와 같은 상수도 근대화 작업은 1913년 3월에야 끝났다. 이후 상수도 수요는 빠르게 증가했다. 상수원으로 사용하기 위한 인공호수도 속속 건설되었다. 그중 유명한 것이 도쿄 서북쪽 구모도리야마(2,017미터) 산자락에 위치한 오쿠다마호다. 준공 당시 상수원 전용 호수로는 세계 최대였다고 한다. 오쿠다마로는 지금까지도 도쿄의 매우 중요한 상수원 구실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은 도쿄의 상수도 지도를 바꾸었다. 인구와 산업 시설이 도쿄에 급격하게 집중되고 상수도 수요도 급증한 것이다. 그러면서 도쿄 서쪽의 신주쿠를 도쿄의 부도심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도쿄올림픽 다음해인 1965년 신주쿠의 정수장이 폐쇄되고, 재개발사업이 본격화된다. 도쿄 최대 상수도 정수장이었더 신주쿠가 부도심으로 개발되는 사이 도쿄도는 도네카와 강과 아라카와 강의 상류 지역으로 상수원을 확장한다. 현재 도쿄의 가장 큰 상수원은 군마현과 사이타마현을 지나 지바현 북부를 통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도네카와 강이다. 이 강에 일곱 개의 댐과 한 개의 저수지가 있다. 그 외 다마카와(오쿠다마호는 다마카와 상류에 있다) 강과 아라카와 강이 도쿄의 주요 상수원이다. 

 

미인은 왜 간토에 집중되어 있나?

 

간토 지역 사람들은 간사이 출신에 비해 키가 작다고들 한다. 이유는 인체에 필요한 칼슘이 부족해서다. 간토평야 지대의 토양은 화산재가 두텁게 퇴적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생산된 쌀이나 야채류 등에 칼슘이 부족하다. 이런 퇴적 토양을 통과한 수돗물을 마시는 것도 칼슘 부족의 원인이 된다. 칼슘이 부족하면 성격도 격정적이 된다고 한다. 이에 반해 간사이 지방은 칼슘이 풍부한 토양이 많기 때문에 칼슘 부족 문제가 없다. 자연환경의 차이가 두 지방 사람들의 신체뿐 아니라 성격 차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해석도 많다. 간사이 지방은 아열대성 기후에 상대적으로 오래된 화산암 지대여서 부드러운 산들이 많다. 반면 온대 지역인 간토 지방은 상대적으로 젊은 화산 암석의 거친 산, 특히 3,00미터 이상의 고봉준령이 많다. 강력한 지진대는 간토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두 지역의 식생도 크게 다르다. 강의 모양새나 평야의 크기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일상생활에서도 차이가 발견된다. 음식문화의 차이도 뚜렷하다. 간토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간사이 사람들은 쇠고기를 좋아한다. 술에 대해서도 간토 사람들은 청주를 좋아하지만 간사이 사람들은 소주를 좋아한다. 청국장과 비슷하게 발효시킨 콩인 낫토는 간토 사람들이 휠씬 선호하는 음식이고, 간사이 사람들은 음식에 식초를 넣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간편한 도시락이나 냉동식품은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는 간사이 사람들이 더 즐긴다. 간사이와 간토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는 전기의 주파수가 달랐다. 집세를 내는 방법도 다르다. 오락과 목욕문화도 상상 외로 차이가 크다. 400년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대부터 도쿄에서는 무사들의 규범적 사회 전통이 이어져, 공식적으로 엄격한 대인관계가 계속되어왔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는 해석이다. 반면 오사카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상인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서민적이고 인정 많은 전통이 전해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140여 년 전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변신하기 전까지 무려 300여 개의 번으로 나뉘어 있던 지방분권 전통과도 뿌리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텔레비전의 보급과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두 지역의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 

 

처절한 '택시 전쟁'

 

너무나 '일본적'인 휴일

 

거대한 요새도시 도쿄

 

일본 국민병(病) '카훈쇼', 재앙이 되나

 

일본, 이사하기 힘드네

 

보신탕과 뱀장어

 

한국엔 김.이.박, 일본엔 사토.스즈키.다카하시

 

일본 성씨의 숫자는 그야말로 수수께끼다. 현재 사용중인 성씨는 15만 개 정도이고, 없어지거나 쓰고 있지 않은 성씨까지 합하면 29~30만 개라고 추정된다. 최신판 [일본 성씨 대사전] 등에 근거한 것이다. 일본의 성씨가 이 정도의 숫자를 기록하게 된 것도 불과 130여 년전부터이다. 일본에서는 1867년 메이지유신 이전만 해도 귀족이나 무사계급만이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0년 '평민 성씨 허가령'을 내려 평민이라도 성씨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국민을 위한 게 아니고 근대국가로서 국민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메이지 정부는 1875년 평민들도 성씨를 의무적으로 갖도록 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처벌하겠다고 윽박질렀다. 이렇게 되어서야 대부분의 평민들이 일제히 성을 급조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일본 정부는 호적법 50조에 "어린이 이름에는 평이한 상용한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를 안 지키고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아 2004년에는 "적어도 수백 개의 출판물에서 관행적으로 사용될 경우"등에 한해 쓸 수 있는 한자를 늘려주기도 했다. 일본의 성씨 제도는 철저히 남성 우위이다. 또 하나의 특이한 제도가 양자 제도이다. 

 

적응하기 어려운 도쿄의 날씨

 

도전하는 한국인, 재일한인회

 

도쿄대 축제 오월제, 젊음과 지성이 넘친다

 

갈림길에 선 일본    

 

입시 전쟁과 사교육 열풍  

 

여유 잃어버린 일본의 '여유 교육'

 

사무라이가 꿈틀거린다

 

망년회 손님 유치에 사활을 건다

 

개발이냐, 보존이냐

 

세계 전체로 봐도 지난 50여 년간 선진국에서는 각종 개발 열풍을 타고 기존 습지의 약 70%가 사라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습지는 다양한 야생 생물의 보금자리가 되고 홍수조절과 수질정화 기능을 하며 수산자원을 공급한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재평가되고 있다.

 

게이단렌, 자민당의 위기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은 창당 54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파벌정치'가 작동하고 있다. 파벌은 크게 자금, 인사, 정보 등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움직인다. 파벌정치의 세 가지 요소 중 하나인 자금은 그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정치자금은 개인의 후우너도 있긴 하지만 기업이나 각종 이익단체의 헌금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중앙당 차원에서는 선거공영제 이후에도 경제단체 등이 주는 정치자금의 도움을 얻어야 하는 실정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경제단체 게이단렌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이단렌은 집권 자민당이나 제1야당인 민주당 등에 정치헌금을 하면서 정치 경제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많은 재벌들이 군부와 결탁하고 전쟁물자를 보급하며 군산복합체를 형성해 몸집을 키웠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게이단렌은 오랜 세월 주로 자민당에 집중적으로 정치헌금을 계속해 '자민당의 금고'로 불렸다. 하지만 1993년, 오랜 정경유착의 폐해로 리크루트 사건 등이 이어지자 게이단렌은 정치헌금 중단을 선언했다. 이때는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되어 경제가 최악으로 치닫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일본 재계는 정치헌금을 하지 않는 동안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졌다'는 지적이 일자 정치헌금을 부활시킨다. 정치헌금이 재개된 것은 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 정권 때였다. 게이단렌은 정치헌금을 하지 않는 동안 자민당뿐 아니라 제2야당인 민주당과도 연구회를 개최하는 등 특정 정당에 치우침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헌금 재개를 선언한 뒤에는 다시 본색을 드러냈다. 상징적인 것이 2005년 9월 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을 단독 지지한 것이다. 일본 최대의 노동단체인 렌고가 민주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민주당과의 간담회도 2004년 이후 중지해버렸다. 그런 게이단렌이 변하고 있다. 자민당이 최근 3년 새 무려 세 명이나 총재가 바뀌면서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2009년 총선에서는 게이단렌 차원의 자민당 지지는 하지 않았다. 게이단렌의 줄타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국 지형의 변화가 임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이단렌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우파적 성격이 강한 게이단렌의 개헌에 대한 입장은 민주당과 거리가 있다. 소비세에 대한 입장도 상반된다. 실제로 민주당이 집권을 하더라도 정책적 괴리를 극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적지 않다. 게이단렌의 정책 노선은 기본적으로 자민당 우파와 유사하다.

 

선생 대접받는 일본 국회의원 

 

일본은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역할과 힘이 한국에 비해 크다. 여당 의원은 총리나 장관, 차관, 각 부처의 정무관 등으로 다양하게 진출해 국정을 운영한다. 잘못하면 국민의 신임을 물어 내각 총사퇴 등으로 책임을 지거나 중의원이 해산되기도 한다. 의회는 양원제로 참의원과 중의원으로 나뉘어 있다. 참의원은 임기 6년이 보장되고 3년마다 절반을 다시 뽑고, 중의원은 임기 4년에 총리가 국회를 해산하면 임기가 끝난다. 중의원은 25세 이상의 일본인에게 피선거권이 주어지고 소선거구에서 300명, 전국 11개 권역별 비례대표 180명으로 모두 480명을 선출한다. 참의원은 242명으로 47개 도도부현별 선거구에서 146명, 전국단위 비례대표 96명을 선출한다(일부 선거 때 선거구를 조정하기도 한다). 장관이나 차관 중에는 중의원 출신이 많다. 대부분의 내각에서 참의원 출신은 소수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참의원 무용론도 나오고 있지만 간혹 중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참의원에서 부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참의원이 부결시킨 법안도 중의원이 2/3 이상 찬성하여 재가결하면 통과된다. 일본의 국회의원 배지는 국화 문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 배지를 단 국회의원들에게는 여러 특권이 주어진다. 국회의원의 월급이라고 할 수 있는 세비는 월 1,328,000엔인데, 1년에 두 차례 6,354,480엔을 받고, 문서통신비로 월 100만 엔, 입법사무비로 월 65만 엔을 추가 지급받는다. 연수입으로 치면 2,230만 엔, 우리 돈으로 대략 2억 원 이상이다. 10년 이상 국회의원을 하면 의원직을 그만둔 뒤 의원 연금이 지급된다. 1년 단위로 치면 412만 엔 정도가 되는데, 재직 11년째부터 연당 약 82,000엔이 증액된다. 15년 동안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 59세에 은퇴하면 80세까지 무려 1억 엔 정도의 연금을 받게 되는데, 고이즈미 개혁의 일환으로 2006년 4월 폐지되었으나 완전히 없어지는 데는 사오십 년 정도 걸릴 전망이다. 국회의원들에게는 국회의원회관에 있는 39.95제곱미터의 의원실이 주어진다. 물론 무료이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회관 크기의 절반 밖에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일본 국회의원들이 우리 의원들보다 검소하게 지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카사카, 구단시타, 디카나와 등 도심 특급 지역에 아파트형 의원숙사가 월 5만 엔 정도(일반인의 경우라면 월세가 30만 엔 안팎)에 제공된다. 국회에서 자동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중의원 숙사가 네 개, 참의원 숙사가 두 개 있는데 숙사와 국회의원회관 구간을 무료 마이크로버스가 운행하고 있다. 현재는 의원회관을 재건축하고 있어 2010년에는 100제곱미터의 의원방이 의원들에게 제공되어 "의원들이 토끼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다. 비서진은 공인비서 두 명, 정책비서 한 명까지 세 명에 한해 국가에서 급여를 지급해준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의원과 비서 간의 스스럼 없는 관계이다. 지방 출신 의원들이 지역구 관리를 하려면 많은 시간과 교통비가 소요된다. 때문에 국가는 원활한 의정 활동을 위해 의원들의 교통비 부담을 줄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국회의원은 안전하게 입법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국회가 열려 있을 경우에 불체포특권을 가진다. 또한 국회 안에서 행한 발언에 대해 책임을 면해주는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일본에서 국회의원이란 직업은 되기도 어렵고, 책임도 크며, 업무 수행에 남다른 전문성과 체력이 요구된다. 특히 장관이나 총리직을 국회의원과 겸직하는 사람들은 일반 의원보다 휠씬 강한 체력이 필요하다. 국회의원들은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일본 국회에는 당 내부에 각종 공붐임이 있어서 아침 일직 공동학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

 

딜레마에 빠진 국세조사

 

일본인의 가슴에 자리한 '천황'

 

일본은 입헌군주제, 즉 헌법에 의해 천황으로 불리는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다. 헌법에서는 천황을 국가 및 국민 화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권력도 행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천황은 많은 국사를 담당하고 있다. 헌법에 따라 총리대신과 최고재판소장(대법원장)을 임명하고, 헌법 개정과 법률, 조약 등을 공포한다. 국회 소집과 중의원 해산의 최종 선언자이기도 하며, 총선거 공시, 장관 임명, 대사신임장 인증, 사면 감형 인증, 신년 행사 주재, 외국 대사나 공사를 맞이하는 일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660년 초대 천황인 진무가 즉위했음, 4~5세기경부터 고대 천황제의 형태가 갖추어졌는데 그 시기의 천황이란 존재는 부족연맹의 장(長) 정도였다. 그러나 6세기 말 쇼토쿠태자에 이르러서 천황의 권력이 확립되었다고 문헌은 전한다. 7세기 중엽 다이카개신 이후 비로소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9~12세기 헤이안 시대의 귀족정치, 13~14세기 가마쿠라막부 시대의 무인정치를 거치며 천황의 지휘는 급락한다. 특히 에도막부 시대엔 천황의 권력이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이런 상태는 1868년 메이지유신에 의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가 다시 확립될 때가지 계속된다. 천 년 만에야 일왕의 지위가 다시 막강해진 것이다. 이를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고 한다. 패전 후 1947년 신헌법에 의해 천황은 다시 인간의 지위로 내려왔다. 메이지헌법에서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며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라고 했던 것과 비교할 때 현행 헌법에서는 "국정에 관한 어떠한 권리의 주장과 행사도 불가"한다며 명백하게 천황의 힘을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천황은 '특별한' 존재이며,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국민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지방분권과 그에 따른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를 마무리한 구심점이 천황이었기 때문에, 그 구심점이 사라지며 다시 분열의 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제 세습 정치가 싫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은 '세습 정치'를 큰 거부감 없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왔다. 전체 국회의원의 '세습 의원' 비율도 항상 30% 선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고마신사가 왜 '출세신사'인가

 

왜 '왜놈'인가

 

야스쿠니 참배, 일본인들의 시각

 

야스쿠니에는 메이지유신 때부터 태평양전쟁 때까지 일본식으로 말하면, "일왕의 명령을 받들다가 전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야스쿠니에 안치될 수 있는 자격 조건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처음부터 일본인들에게 신성시되었다. 메이지현법에서 일왕은 '신'으로 받들어지며 침략전쟁 추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는데, 메이지일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야스쿠니는 당연히 다른 신사와는 지위가 달랐다. 전쟁 중 일반 신사는 내무성 소관이었으나 야스쿠니만큼은 육해군성 소관의 특별한 종교 시설로 대접받았다. 야스쿠니에 안치된 전몰자들은 모두 '신'으로 모셔졌으며, 야스쿠니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고취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태평양전쟁 후 야스쿠니의 헌법적 지위가 바뀌었다. 1946년에 공포된 평화헌법에서는 영구 평화와 신앙의 자유, 정교 분리의 원칙과 더불어 야스쿠니신사는 국가의 보호를 벗어나 하나의 종교법인으로 변했다. 

 

신들의 나라 일본, 그들의 종교 생활

 

수많은 신들의 나라 일본, 영웅이나 동물, 심지어 식물까지 온갖 신들이 모셔진 신사와 그 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국민적 종교로서의 신토(神道)는 일본인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신토를 믿는 사람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태어날 때는 신토식의 의식을 치르고 결혼 때는 기독교나 신토, 불교식 등으로 갈리며 죽어서는 대부분 불교식 장례를 치른다. 일본인들 다수는 각기 다른 신을 모신 신사에 가서 절을 하고, 복을 빈다. 그리고 신사와 절이 함께 있을 때는 신사와 절에 동시에 참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거나, 선을 긋는 성향이 약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 지역사회나 국가의 복을 비는 기복신앙적 성격이 강하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한 신토는 역사도 가장 길다. 일본의 고유 민족 신앙으로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실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 신토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에 일왕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 종교가 되고, 신사는 정부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면서 강해졌다. 결국 국가와 종교의 일체화가 이루어졌고, 특히 1930년대 이후에는 '국가 신토'가 널리 보급된다. 신토가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토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에도시대의 막부의 도움을 받아 크게 융성했던 불교는 긴 침체기에 들어산다. 다만 장례 의식만큼은 불교식이 압도적으로 많아 '잘례식 불교'란 용어가 있다. 일본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 승려도 결혼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일본의 가업 잇기 전통에 따라 승려도 가업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종교사에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대전환의 계기였다. 일왕을 신의 존재로까지 떠받들던, 그리고 신토로 단결했던 일본에서 1946년 1월 1일 이른바 '천황의 인간 선언'을 통해 천황이 인간의 위치로 내려오고,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가 신토'는 해체된다. 이른바 신하된 백성의 의무이고 영광이라고 교육받아온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한다. 전쟁 때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종교단체법은 폐지되고, 새로운 종교 법인령이 공포된다. 종교단체는 신청서를 제출하면, 쉽게 종교 법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근거에 따라 민간 종교단체로서 신사본청이 설립되었다. 신사 본청은 이세신궁을 본종으로 해 전국 신사의 대부분인 78,000여 사를 조직했고, 나머지 약 1,000여 개 신사는 다른 종교 법인을 만든다.

 

게이샤,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정성 가득한 송별회 문화

 

총중류 사회를 꿈꾸던 일본, 어디고 가는가

 

기업 영빈과, 구락부에서  

 

강한 중소기업, 후계자가 없다

 

집값 거품 얼마나 빠졌나

 

학연과 지연, 악연이었나

 

홈리스, 일본열도의 그늘

 

우리는 모두 '하류인생'

 

어떤 직업이 많이 버나?

 

왜 도요타자동차 열풍인가

 

보너스, 신나는 기다림

 

일본에서의 보너스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용어는 달랐지만 에도시대 때부터 보너스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명절에 커다란 상점의 주인이 종업원에게 옷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 보너스 제도의 원형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보너스 제도가 일본에 도입된 것은 1876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선박사업을 하던 미쓰비시가 외국 기업과의 치열한 항로 확보 경쟁에서 승리한 후 사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돈을 지급한 것이 시초라는 것이다. 금액은 1개월치 월급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과 같은 제도적으로 보너스가 정례화된 것은 1888년이 되어서였다. 결국 일본의 보너스 제도는 에도시대의 옷 지급과 같은 토착적인 방식과 '성공에 대한 보수'의 요소가 강한 구미적인 방식이 융합된 독특한 형싱으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딪쳐서 깨져라! : 속담에서 드러난 일본의 민족성

 

닫는 글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 등의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의 공격적인 성격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 것도 같다. 도쿄대의 한 교수는 "일본인의 자연재해 스트레스를 한국인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단결하지만, 때로는 살리지 못할 사람은 버리고 가는 냉혹성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