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박준상, 2005, (140502).

바람과 술 2014. 5. 2. 22:55

옮긴이 서문 


밝힐 수 없는 공동체_ 모리스 블랑쇼

 
Ⅰ. 부정(否定)의 공동체 

적절하거나 부적절하게 버려야만(여기서 버리는 것은 단순히 반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적합한 것이 되는' 개념들이 있다. 만일 공산주의가 평등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기에 모든 인간들의 욕구들이 평등하게 만족되어야만(그러한 요구는 최소한의 것이다)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산주의는 완전한 사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자체 홀로 생겨날 수 있는 어떤 투명한(장-뤽 낭시가 말하고 있듯이) '내재적인' 인간성의 원리를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과제가, 그 자신의 과제가, 나아가 결국 모든 것의 과제가 될 수 있게끔 존재하거나 생성해야만 하는 인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순수한 개체적 실재로 자신을 정립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절대적 내재성에 대한 요구가 정당화된다. 스스로 자기 고유의 자기 동일성과 자기 결정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순수한 개체적 실재로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수한 개체적 실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여겨지기에 더 폐쇄적인 것이다. 개인은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자신 이외의 다른 기원을 갖기를 거부할 것이다. 개인은 자신과 동등한 개체가 아닌 타자에게 이론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 무관심한 채 스스로를 긍정할 것이다. 개인은 과거에서든 미래에서든 무한정 반복해서 정립된 자신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 상호성이란 개념 자제를 의문에 부친다. 만일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더 이상 동일자와 동일자의 (상호적) 관계가 아니게 되고, 타자가 자신의 자기 동일성과 그를 고려하는 자와의 반대칭성으로 인해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자로 나타난다면, 완전히 다른 관계가 주얼질 것이다. 또한 이 완전히 다른 관계는 우리가 거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을 완전히 다른 사회를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 … " (결여의 원리). 주의해서 보자. 그것은 하나의 원리로서 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좌우하고 가늠한다. 따라서 그 결과 원리로서의 결핍은 완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핍된 인간 존재는 온전한 실체를 이루기 위해 타자와 결합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결핍에 대한 의식은 자신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며, 그 문제 제기를 위해 타자 자체 또는 하나의 타자가 필요하다. 인간 존재는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인되기를 원한다. 인간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 자신을 부인하기도 하는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 결과 인간 존재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즉 자기 또는 분리된 개인으로 존속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의식하게 만드는 상실의 체험 속에서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바로 그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에 인간 존재의 의식의 기원이 있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자신을 항상 미리 주어진 외재성으로 여기저기 갈라진 실존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 존재는 과격하지만 은밀하고 조용한 끝없는 자신의 와해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구성 가운데 아마 실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인간 존재의 실존은 타자 또는 복수의 타자를 부른다. 따라서 각 인간 존재는 어떤 공동체를 부른다. 즉 유한한 공동체. 왜냐하면 그 공동체는 이번에는 자신을 조직한 인간 존재들의 유한성을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들을 구성하고 있는 유한성은 보다 높은 수준의 절박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사실을 공동체가 망각한다면 인간 존재들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결핍은 어떤 충만함을 보여주는 모델과의 비교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결핍은 결핍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을 찾지 않으며 오히려 초과를, 채워질수록 심해지는 결핍의 초과를 추구한다. 의심할 바 없이 결핍은 (나에 대한 타자의) 이의 제기를 요청한다. 이의 제기는 고립된 나로 인해 생겨난다. 이의 제기는 그 위치로 인해 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인 하나의 타자로서(또는 타자 자체로의) 노출을 항상 유도한다. 만일 인간 실존의 근본적으로 부단히 의문에 부쳐진 실존이라면, 인간 실존은 그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만을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실존이란 의문은 항상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공동체의 두 가지 본질적 특성이 드러난다. ① 공동체는 축소된 형태의 사회가 아니며, 또한 연합을 통한 융합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② 사회 조직에서와는 다르게 공동체에서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공동체는 어떤 생산적 가치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어떤 목적을 갖는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타인에 대한 헌신을 그가 죽음 앞에 처했을 때조차 항구적으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타인이 고독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타인이 대신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동시에 타인이 자신에게 부과된 이 대리 죽음을 또 다른 자의 것으로 넘겨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대속이 연합을 대신한다. 


공동체는 최고 주권이 지배하는 장소가 아니다. 공동체는 노출되면서 노출하게 한다. 공동체는 공동체에 반하는, 존재의 외재성을 포함한다. 사유는 외재성을 지배하지 못한다. 설사 사유가 외재성에 다양한 이름들을 붙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공동체가 각각을 위해 나와 공동체 자신을 위해 운명과도 같은 자신 바깥(공동체의 부재)을 지배하는 한에 있어, 공동체는 나눌 수는 없지만 필연적으로 다수일 수밖에 없는 말의 자리를 마련한다.


내적 경험은 서로 나눌 수 있을 때에만 완성된다. 내적 경험은 나눌 수 있고 이에 따라 한계들을 드러낼 때, 또한 위반하려는 한계들 가운데 그 자체로 드러날 수 있을 때 불완전성 가운데 보존되고 완성된다. 달리 말래 단순한 내적 경험이란 없다. 조건들을 전제하지 않는 내적 경험이란 (바로 그 불가능성에서조차) 가능하지 않기에, 여전히 조건들을 구비해야만 한다. 


Ⅱ. 연인들의 공동체

 
68년 5월은 아무 계획 없이,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급진적 소통에 대한 긍정(긍정의 일반적 형태를 넘어선 긍정)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바로 거기에 불안하게 하는 동시에 풍요를 약속하는 듯한 하나의 사회 형태의 특성이 표현되어 있었다.


민중은 지속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민중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다. 민중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구조들을 무시한다. 민중은 현전과 부재, 아니면 현전과 부재의 섞임, 적어도 잠재적으로 뒤바뀔 수 있는 현전과 부재이다. 그러한 점에서 민중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권력의 소유자들에게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민중은 포착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민중은 사회적 현실의 와해를 통해 드러나지만, 동시에 민중은 법에 의해 한정될 수 없는 최고 주권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을 재창조하려하는 비순응적 집요함 가운데 존재한다. 최고 주권은 법에 의해 한정지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최고 주권은 법의 기반으로 스스로를 유지하면서 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자발성과 혼동되는 것이라면, 책임의 강제는 자유와 존재 이전의 것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한계에서 축출당하라는 요구가 있을 수 있다. 만약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나에게 남아 있다면, 나는 타인으로부터 이미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어렵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공동체와 선택적 공동체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공동체는 결정의 자유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공동체는 하나의 사실로서 사회성을 구성하며, 나아가 땅·피·인종에 대한 찬양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두번째 공동체는? 그것이 구성원들이 결정과 하나의 선택을 거쳐 모여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을 선택적이라 부른다. 선택이 없다면 이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선택은 자유로운 것인가? 또는 적어도 그 선택의 자유는 이 공동체의 진리인 동등한 나눔을 표현하고 긍정하기에 충분한 것인가?)


공동체가 와해될 때, 공동체는 설사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인상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옮긴의 해설| 모리스 블랑쇼, 얼굴 없는 "사제"


블량쇼는 이 이루기 힘든 공동체, 동일성에 근거를 두지 않고 동일자의 억압을 거부하는 공동체, 오히려 타자의 발견과 차이의 발견으로 역설적으로 지속되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일상의 모든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취소도리 수 없다고 본다. 나아가 이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미래의 모든 정치적 구도의 설정에서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국 블랑쇼가 이 드러나지 않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를 정당화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의 지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타자와의 관계의 무한성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시적인 계획·목적·기구·이념·철학에 따라 한정될 수 없고 고정화·사물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마주한 공동체_ 장-뤽 낭시


거대한 경제적 불균형은 말하자면 삶에서의 불균등이다. '그' 공동체는 공동체에 반대하는 공동체, 낯선 공동체에 반대하는 낯선 공동체, 친숙한 공동체에 반대하는 친숙한 공동체이며, 스스로 분열되고, 그 자체 소통과 연합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못한 모든 다른 공동체들을 분열시킨다. 그러한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이 공동-내-존재의 법과 의미 자체여야 한다. 세계의 어렴풋이 떠오르는 의미, 그 의미는 불분명해진 의미가 아니다. 어렴풋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의미의 구성 조건이다. 그러한 의미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거기에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가피함이 있으며, 불가피함이라는 말이 갖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즉 거기에 우리의 궁핌함과 우리의 의무가 있다.


'공동'이라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였고 난제였으며, 규정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었고, 아직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가장 '공동의 것'이 아닌 것이었다. 그 점을 공산주의는 은폐해왔었지만 역으로 입증해 보여주고 있었다. 


낯선 것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며, 어떤 부정성도 갖지 않는다(죽음은 하나의 부정성으로서가 아니라, 낯선 실제성으로서 여기 현전한다). 낯선 것에 대한 긍정은 벌거벗은 신뢰에 대한, 신뢰에 따른 벌거벗음에 대한 긍정이다. 부서지기 쉬움과 불확실성 가운데에서의 벌거벗음. 가장 밝힐 수 없는 유대 관계에 낯선 것이 있고, 동시에 가장 평범한 만남에 낯선 것이 있다. 그러한 낯선 것, 즉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낯선 것에 노출된, 뚜렷이 내비치는 벌거벗음.   

 
옮긴의 해설_ 장-뤽 낭시와 공유, 소통에 대한 물음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국적·인종·종교·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간들의, '우리'의 유한성, 여기서 유한성은 첫째로 완전한 내재성의 불가능성이다. 완벽히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수 있는, 그 스스로에 정초되어 있거나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이란 없다. 즉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두번째로 유한성은 만남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접촉은 불규칙적·단속적 시간에, 즉 시간성 내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을 통해 확인하고 표상할 수 있는 '무엇'에 정초되어 있지 않으며, '무엇' 바깥의 타인의 나타남에 응답하는 순간의 정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접촉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지도 않고 '무엇' 때문에 이루어지지도 않는 급진적인 만남이다. 만남의 유한성은 '내'가 관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 즉 '나'에게 필요한 그 '무엇'의 요구에 따라 어떤 동일성 내에로 타인을 동일화할 수 없다는 사실의 징표일 뿐이다. 세번째로 낭시가 말하는 유한성은,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계 상황(죽음, 병, 고독)에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 양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낭시에게 유한성은 공동-내-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부록| 블랑쇼의 죽음

 
영원한 증인_ 자크 데리다 

인간 블랑쇼에게 표하는 경의_ 장-뤽 낭시 

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연보

 
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저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