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독교의 교파], 남병두, 살림, 2013, (150913).

바람과 술 2015. 9. 13. 18:42

프롤로그


교회는 교회의 하나됨을 역설하고 강조한만큼 오히려 더 분열해온 듯하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는 교회는 더욱 더 분멸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시작과 이단의 출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는 분명히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는 구별된다. 율법과 특정한 민족적 정체성에 근거한 이스라엘 공동체와는 달리, 교회 공동체는 민족의 범주를 뛰어넘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 근거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에비온파. 유대파 극단주의 '에비온파'는 모세 율법의 전통을 기독교으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식하면서 할례, 안식일, 음식에 관한 율법을 여전히 구소하였다. 그들이 율법을 고수하고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고 엄격한 금욕주의적 특성을 가졌다는 면에서는 에세네파와의 연관성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여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에도 신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꺼려하였고, 결국 그들 특유의 기독교인 양자론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인간으로 보며 그가 침례(세계)를 받은 직후 성령이 임할 때 하나님의 양자로 택정되었다고 이해한다. 에비온파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생겨난 교파로 이해된다. 이 교파는 이방인 기독교인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아지면서 자연히 소멸되었지만, 예수의 인성을 부각시켰다는 측면에서 기독교의 일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유대교 전통보다는 희랍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한 교파이다. 영지주의는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타격을 줄 만큼 신성을 강조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설명하는 기독론은 가현설로 이해된다. 또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한 지식을 추구하였으며, 예수는 그 지식을 매개하는 중재자로 생각하였다. 영지주의는 결코 통일된 운동이 아니었으며, 지역과 지도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을 띠는 종교적 혼합주의의 특징을 다분히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학과 삶의 양태 안에서 항상 영지주의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으며, 영과 육을 구별하는 금욕주의적 특징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마르키온파. 2세기의 마르키온파는 구약을 배격하는 면에서 영지주의자들과 비슷한 맥락이 있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율범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성경을 총체적으로 부정하였다. 마르키온파는 구약의 신을 불완전한 신으로 규정하고 진정한 하나님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며 사도 바울에 의하여 가장 잘 설명되었다고 보았다. 


몬티누스파. 몬타누스파는 급진적인 성령주의와 그리스도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2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새로운 운동이었다. 2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회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의 감소로 초대교회의 다이내믹한 신앙생활의 방식이 점점 변질되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몬티누스파의 판단이었다. 


박해와 신학적 논쟁이 빚은 초기 교회의 분열

기독교 교회의 가장 초기에 나타난 교파들이 신학적·신앙적 차이로 야기된 분열이었다면, 이후에는 박해의 결과로 교회의 분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박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주로 서방교회에서 나타났다. 노바티안교회는 데키우스 황제 때에 박해로 인하여 배교한 자들 가운데 박해 후에 교회로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이들을 교회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다. 갈등은 이 문제를 두고 온건론과 강경론의 대립으로 연유되었다. 온건론자들은 배교행위에 대한 단순한 회개로 족하였지만, 강경론자들은 그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였다. 배교자의 교회 복귀를 둘러싼 논쟁은 서방교회의 교권 다툼과 교회 분열의 전형적인 이유가 되었다. 4세기 초의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는 또 하나의 교회분열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박해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 문서를 압수하여 폐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박해 후의 논쟁의 요지는 박해 시에 기독교 문서를 폐기하도록 내어준 성직자들의 정통성에 관한 것이었다. 노바티안 논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하여 강경론을 취한 자들과 온건론을 취한 자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강경론자들은 도나투스파로 결국 기존 교회의 총체적 타락을 주장하고 교회의 순결성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분리를 택했고, 그들의 교회로 입교할 자들에게 재침례(세례)를 요구하였다. 도나투스교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형성하였고 7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서방교회가 윤리적 논쟁으로 인하여 분열했다면, 동방교회는 신학적 논쟁 끝에 교회의 분열을 경험하였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필두로 하여 일어났던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교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의 관심사였다. 삼위일체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1차 콘스탄티노를 공의회(381년)에 이르기까지 니케아 신조로 정리되었지만 결고 교회의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그 기간 동안 필쳐졌던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 간의 논쟁은 정치적 파고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등 더 이상 순수한 신학적 논쟁으로 남아 있지 못하였다. 니케아 성조와 성자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에 동의하지 못했던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은 결국 제국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게르만족들 가운데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게르만족들이 로마가콜릭교회로 흡수되면서 아리우스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류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동방교회의 또 다른 분명들은 기독론 논쟁에 의하여 야기되었다. 기독론 논쟁의 주 논점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에 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이견에서 비롯되었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자는 두 본성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주장하였다. 전자는 그리소도 안에 인간의 영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압도된 상태에 있다고 이해하였으며,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 구별된 인간의 영이 있다고 이해하였다. 알렉산드아의 기독론은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로고스와 인간의 육체의 결합으로 이해한 것이었으며, 안디옥의 기독론은 로고스와 인간의 영과 육체 모두와의 결합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하여 단성론과 양성론의 차이로 발전되었다.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기독론을 주장하였던 아폴리나리스가 정죄되면서 양성론이 정통으로 인정되었으며 이 결정은 앞으로 있을 공의회의 시금석이 되었다. 특히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적 노력이 초기의 기독론 논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터툴리안 이후 서방교회의 일관된 양성론적 기독교의 전통은 동방에서 열린 공의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논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단성론자들은 그들의 신학적 견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 제2차·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도 그들의 신학은 정통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그들 역시 독립된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 교회는 주로 시리아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비잔틴제국의 황제들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결코 무시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아랍이 이들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도 이들 교회는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이들 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 간의 화해의 시도들이 있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방의 교회들이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괄목한 만한 성장이었다. 두 번째는 소위 개신교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던 16세기의 종개혁이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나왔다는 사실이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분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문화적·사상적 차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희랍문화의 특성은 동방교회의 교회적·신학적 특성으로 나타났으며, 라틴문화의 특성은 서방교회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교회의 '교인의 윤리적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일찍부터 서방교회에서 고해성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서방의 수도원 운동의 발전이 각 지역의 문화적 경향에 의하여 다르게 나타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동서방의 교회가 노골적으로 대립하게 된 직접적인 신학적 차이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성화상 논쟁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동서교회의 분열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서로마제국의 패망한 이후 로마교회가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세력이 서유럽에 형성되었다는 데 있다. 더 이상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476년 이후 로마의 갈리라 지방(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진입한 프랑크족이 클로비스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권을 수립한 것과 그 왕권이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그 이후의 유럽과 교회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동서교회의 실질적 분열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1세기 중엽이었다. 독일의 하인리히 3세에 의하여 임명된 교황 레오 9세는 11세기 교황개혁운동을 주도하였던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유럽의 각 지역을 다니면서 종교회의를 주최하고, 개혁적인 인사들을 측근으로 포진하는 등 교회개혁을 위하여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자였다. 그가 교황권 신장의 일환으로 남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있었던 노르만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 지역에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정복 이후로 희랍교구가 있었기 때문에 레오 9세의 그 지역에 대한 관심은 곧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케롤라리우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케룰라리우스는 자신의 불편함 감정을 몇 가지 신학적·제도적 이유를 들어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교회를 폐쇄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미 초기 서방교회의 전통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교회의 전통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그 시작을 11세기로 보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사건일 것이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교회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던 제국과의 공생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세속 황제에게 있어서 교회는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회의 문제는 곧 제국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좋은 예는 첫 번째 대공의회에서 잘 나타났다. 첫 대공회의는 황제가 친히 소집하고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그 결정과정에서도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일단 채택된 공의회의 결정은 황제의 공권력에 의하여 강요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전통은 '사도계승주의'일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가 이단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구별하고 세우는 일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 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도계승주의는 많은 교파들 가운데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는 차원에서 확립된 개념이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 이외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진리라고 확인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교회가 성경의 유일한 합법적 소유자인 동시에 해석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교회가 역사 안에서 이해한 성경의 해석이 곧 전통이 된다. 로마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교회는 '가시적 제도'로서의 교회이다. 제도교회의 특성은 사제들의 상화 직위체계와 성례전에서 나타난다. 즉, 교회가 정한 방법으로 사제가 성례전을 온전하게 집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시적 성례전을 통하여 수례자에게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하는 성례전주의는 가시적 제도교회의 중용한 특성이다. 가톨릭교회는 일곱 성례전을 시행하고 있다. 


중세의 교회 이탈자들(서방교회)

중세 서방교회에서 신성로마제국으로 개념화된 국가와 교회의 새로운 합일은 교회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카타리파. 십자군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 동방에서 전래된 이단 중 대표적인 것은 '카타리파'였다. 고대의 마니교처럼 선과 악에 대하여 극단적 이원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서방의 마니교'라고 불리기도 한 이들은 성결한 삶을 위한 금욕적 생활 방식을 강조하였다. 


발도파. 12세기 말에 기존 교회를 위협할 만한 공동체 운동은 발도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발도파는 피터 발도(혹은 발데스)라고 불리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사도적 삶의 특징으로서 청빈의 삶과 설교사역을 강조하였다. 사실 그들의 활동은 13세기 초에 일어났던 탁발수도회들과 별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성경을 중시하는 사역을 강조한 것은 이후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의 활동과 견줄 만한 것이었다.


위클리프파. 위클리프와 후스의 공통점은 둘다 자기 시대에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화형에 처해졌던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은 둘 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존 위클리프는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내면적·개인적 관계를 강조하였고 당시 가톨릭교회의 사제주의와 신앙의 공덕주의를 비판하였다. 특히 성격이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요 최고의 권위임을 강조했고, 성경은 모든 믿는 자들의 소유라고 주창하였다. 또한 세상 권력에 몰두하는 교황과 타락한 수도회들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잘못된 교황이나 성직자들은 세속 통치자에 의하여 축출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곧 교회가 타락할 때는 정부가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후스파. 요한 후스는 보헤미아의 성직자로서 명 설교가요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위클리프의 사상과 운동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의 기초를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고, 성경의 최고 권위를 재확인하였다. 또한 그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중재자도 없다고 보았고 죄에 대한 대사 행위 역시 거부하였다. 중세에 나타난 교회 이탈자들은 대체로 제도교회의 형석적이고 외형적인 신앙 형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자들었으며, 신앙의 보다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을 중시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성경의 귄위를 회복하고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교회의 개혁을 꿈꾼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정신은 직접적으로 후세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과 교단의 형성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에 있어서 새로운 교단주의가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방교회만을 두고 본다면 교회는 중세적 통일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하나의 교회라는 개념을 유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 초까지 기독교 유럽의 결속력은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흔들림이 없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해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이 그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시대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의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수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정치사회적인 변화와 중세 후기의 사상적 다양화, 그리고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꾸준한 제기 등과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르네상스라는 문화적 변혁기 동안의 다양한 변화들은 종교개혁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때 등장하기 시작한 소위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은 종교개혁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그 방향에 따라 대체로 세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우선은 가톨릭 내에서 교회의 타락을 경고하며 윤리적 개혁을 강조한 종교개혁이다. 이 종교개혁은 종교의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였고,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 다른 타입은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적·신학적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을 제기한 종교개혁이었다. 루터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류 종교개혁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 역시 교회의 윤리적 타락을 지적하였지만, 교회 타락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리와 신학의 문제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지적하였던 교리적·신학적 문제점, 특히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그들로 하여금 가톨릭교회 내에 남아 있는 것을 힘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세속 권력과 함께 손을 잡고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관료 의존적'이었다. 마지막 종교개혁은 주류 종교개혁가들의 교리적·신학적 문제제기에 동의하면서도 교회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교회와 국가의 합일, 즉 교회와 사회의 구별이 없는 국가교회에 있다고 주장한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사회의 모든 자들로 두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한 믿는 자들로 구성된다고 보았으며, 국가에 의하여 강요된 신앙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기존 교회는 기초부터 잘못 세워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각 개개인의 신앙고백을 근거로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했으며 의도적 분리를 시도하였다. 복음적 재침례교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서 현대 자유교회 전통이 시작되었다. 


1526년과 1529년에 있었던 슈파이어 제국회의가 열림 즈음에는 이미 독일 내에서 루터교 지역과 가톨릭 지역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제국회의의 결정은 독일 지역이 종교적으로 양분되는 공식적 과정의 첫 단추였다. 그 제국회의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군주의 종교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소위 '영역교회'의 개념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루터규의 운명이 이제는 루터의 손을 떠나 독일 제후들의 손에 넘어갔음을 의미하였다. 이후 독일의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의 갈등은 제후들 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되었고, 루터교의 운명은 자기 지역에서의 권력 신장을 꾀하면서 정치적 독립을 강화시키려고 하였던 제후들의 정치적 성패에 달리게 되었다. 17세기 말부터 루터교 내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일은 야코부스 수페너의 주도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은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던 소위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이 운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체험과 감성을 중요시하였고, 개인의 실질적이고 내면적인 경건한 신앙생활에 관심을 두었다. 대부분의 경건주의자들은 루터교를 떠나지 않았으며, 하나의 지속적인 영성 운동으로서 18세기 이후 교파를 초월하여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혁교 전통은 대체로 스위스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초기 개혁교 전통의 시작은 울리히 츠빙글리의 취리히에서의 개혁이 중심을 이루었고, 나중에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개혁이 그 뒤를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교회에서 성화상을 철폐하고 가톨릭의 성례전주의를 배격하는 등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를 정화하는 것이었으며, 복음을 가르치고 성경교육을 강조하는 일면 말씀과 기도가 예배의 중심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복음의 삶은 모둔 시민의 삶에도 적용되어 교회를 이탈하는 것은 시민법을 어기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도덕적 개혁에 주안점을 두면서 중교적 획일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초기의 개혁교 전통의 특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세속권력은 종교개혁의 주요 파트너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루터와는 달리 츠빙글리는 스위스 지역에서 종교개혁의 확대를 위하여 세속권력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2세대 개혁가 요한 칼빈에 이르서 그 무게가 제네바로 넘어갔다. 칼빈은 신자의 생활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기구를 주셨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곧 교회, 성례, 정부라고 하였다. 교인의 삶에 정부의 적극적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 칼빈은 교회의 영적인 문제는 성적자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며 정부가 간섭해서는 안 되는 분야라고 강조하였지만, 정부는 교회의 외형적 치리에 있어서는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부가 해야 하는 역할 중에는 올바른 교회를 보호하고 돕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을 위하여 세속권력과 손을 잡는 데 있어서도 제네바의 개혁은 루터보다는 츠빙글리의 개혁 방법에 더 가까웠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기조 위에 당시의 주요 개혁가들의 신학사상을 계승·발전 및 정리한 자였다. 종교개혁가들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에 대하여 비판을 제기했을 때 가장 중요한 이슈는 구원론과 인간론이었는데, 이는 칼빈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하여 인간의 역할은 전무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 예정, 그리스도의 제한적 구속, 인간의 완전한 타락,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성도의 견인 등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강령이 개혁교 전통의 본질적 관점들을 모두 포괄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개혁교 전통의 가장 중요한 특색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칼빈은 루터처럼 교회를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정의를 하지만 더 나아가 한 가지 요소를 더 추가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권징제도였다. 교회는 교인들의 올바른 윤리적 삶을 장려하고 관장하는 곳이며 때로는 출교의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칼빈은 율범을 기독교인의 생활의 길잡이로 강조하면서 루터보다는 율범을 더 긍정적으로 이해하였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이 대체적으로 관료 의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대에 정교분리와 '신자들의 교회'를 주창하면서 4세기 이후의 교회를 총체적으로 반성하고 신약성서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재침례파의 교회는 개신교 중교개혁의 또 다른 주요 전통으로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이 교회의 전통은 이후 하나의 독립된 전통으로서 '자유교회'의 전통으로 불리게 되지만, 16세기에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다른 개신교들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으며 종교개혁의 주류에서 제외되었다. 초기의 재침례교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루터와 츠빙글리의 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하던 자들이었다. 당시에는 태여난 아이가 유아세례를 통하여 교인이 되는 동시에 시민이 되었다. 즉, 유아세례는 교회와 국가를 한데 묶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츠빙글리의 젊은 제자들은 교회개혁의 첫걸음으로 유아세례의 철례를 꼽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한 각 개인들, 즉 믿는 자들의 자발적 모임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교회는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유아세례를 통하여 자동적으로 교인이 되는 영역교회, 혹은 국가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신자의 교회'였다. 그들은 교회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을 윤리적 타락이나 신학적 타락에서 찾기보다는 교회의 정체성 상실에서 찾았다. 재침례교운동의 신학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회론에 있다. 국가교회를 배격하고 신자의 교회를 추구하면서 신약성서의 원시기독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염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배격하고 신자의 침례(세례)를 주장하였으며, 정교분리와 완전한 종교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들이 특히 강조하였던 것은 제자도의 개념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된다고 하였고 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제자가 됨을 의미하였다. 교인이란 단순히 신앙고백을 한 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16~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 교단들

영국의 종교개혁은 외형적으로 왕과 여왕들의 주도하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영국 사람들은 이미 종교개혁을 기대할 만한 여러 가지 전조들을 경험했다. 영국의 인문주의, 위클리프와 롤러디의 전통, 영어성경, 영국의 독립성, 중앙집권적 왕권수립 등은 영국의 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종교적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였다. 16세기 영국국교회의 형성은 종교적인 묵적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고 완성되었다. 가톨릭교회의 감독주의를 여전히 고수하기 때문에 '감독교회'로도 불리며 한국에서는 주로 '성공회'로 불린다.


장로교회는 츠빙글리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스위스의 개혁교 전통에서 나온 교단이다. 칼빈의 제네바 교회는 대체로 장로주의에 입각하여 세워진 교회였으며, 장로교는 이 전통에 따라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전하였다. 장로교는 신학저그로 칼빈주의, 정치적으로는 장로주의에 입각한 교단이다. 장로주의는 가톨릭교회의 일인감독주의를 배격하고 회중의 위임을 받아 교직자들에 의하여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 안에서 청교도들의 지속적인 교회정화 노력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청교도들은 장로주의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그 대표적인 자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그들의 노력이 거의 결실을 맺지 못했고, 그들이 기대를 걸었던 제임스 1세 역시 그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찰스 1세 때에는 그의 실정에 편승하여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군이 일으킨 혁명을 통하여 한동안이지만 마침내 장로파 청교도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장로파 청교도들이 의회를 장악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통치는 크롬웰과 그의 군대에 의하여 주도되었기 때문이었다. 크롬웰은 그의 군대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신교 독립파들을 위하여 광범위한 종교관용 정책을 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장로주의를 제도화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찰스 2세 때는 다시 국교회가 회복되었고 장로파 청교도들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로는 많은 청교도들이 국교회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장로파의 정치적 성공은 영국에서 거의 불가능해졌다. 


16세기 시작된 자유교회의 전통이 근대사회에 이르러 기독교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은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침례교에 의해서였다. 첫 번째의 침례교도들은 청교도들 가운데 영국국교회 내에서의 개혁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스스로 분리하여 독립적인 교회를 설립했던 분리주의자들 가운데서 나왔다. 그들의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닌, 16세기 재침례파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흡사한 것이었다. 침례교와 다른 개신교 교단들과의 차이점은 역사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있다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다. 16세기의 주요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적 관심은 구원론에 있었지 교회론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주 관심사는 가톨릭의 반 펠라기우스적 구원론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적 구원론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동시대의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심각한 방향 전환을 시도하였던 무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재침례교도들이었다. 교회정치의 형태는 진신자제사장의 이론을 반영하는 회중주의를 지향하였음 지역교회의 자치주의를 중요시하였다. 그들이 지역교회 위에 군림하는 어떠한 기구나 조직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바회와 총회는 교회 간의 교제와 공동사역의 장으로 이해하였지 권위기관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신조를 만들지 않았으며 신앙고백소만 발표하였다. 성경이 아닌 어떠한 문서도 개인인 신앙에 대하여 구속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중의 하나는 다양하다는 것이다. 침례교 안에는 다양한 신학이 공존한다. 영국의 침례교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룬 것이 그 예이다. 미국의 침례교는 처음부터 신학적으로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같은 교회 안에서 공존하는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대체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융합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침례교 안에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도 있고 극단적 알미니우스주의자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장로교적인 구원론과 감리교적인 구원론이 공존하는 곳이 침례교이다. 


18세기의 감리교와 성결운동의 교단들

18세기의 영국국교회에서 분립된 또 하나의 주요 교단은 감리교였다. 감리교의 분리는 여느 교단들의 분리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어떤 기존 신학에 대한 반성이나 교회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른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신앙운동 혹은 영적 부흥운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분리였다는 점에서 독특하였다. 18세기의 감리교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의 영국은 종교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18세기 초까지 국교회를 포함한 영국의 여러 개신교 교단들은 영적인 활기보다는 교리 논쟁에 빠지고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감리교 전통에 있는 교회들은 그 교리적·신학적 논거를 웨슬리의 가르침에서 찾는다. 그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영국국교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흔히 웨슬리의 신앙적 표준을 '사중표준'이라는 말로 설명을 한다. 국교회가 교리와 신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표준을 성경, 이성,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두는데 웨슬리는 여기에 경험을 추가하여 신학의 '사중표준'으로 삼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였으며 기독교 신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자료였다. 웨슬리는 또한 성경의 이해와 해석을 돕고 보완하는 이차자료로서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하였다. 또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서 반드시 인간의 이성의 유용하게 쓰인다고 보았다. 이성은 영적인 진리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신앙의 광신주의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여기에 더하여 신앙의 경험을 중요시하였다. 웨슬리가 신앙의 경험을 중시한 것은 이후의 감리교의 중요한 신앙적 특징이 되었고, 그것은 감리교에서 비롯된 여러 성결운동의 교단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웨슬리 신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구원론과 성화론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우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은총에서 비롯된다고 전제하고 동시에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의 구원혼은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또 구원을 칭의 사건과 성화 사건으로 나누었다. 그는 또 구원을 창의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성화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감리교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소그룹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소그굽을 통한 교육과 영성 훈련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교회 상황에서는 사역의 주체를 뒤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역의 주체가 고위성직자가 아니라 사역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웨슬리 운도이 가장 중요한 영성과 사역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었다.


19세기 이후로 웨슬리와 감리교의 전통에서 여러 현대의 교단들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신이 구체호된 것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발하게 일어났던 '성결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발생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신자들이 미국이 감리교회가 신학적 '자유주의'에 물들었다고 판단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해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보수주의는 성결운동의 기본적은 틀을 형성하였다. 성결운동의 또 다른 원인은 '도시화'라는 사회적 현상에 있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그 중심이 도시의 중산층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으며 저소득층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었다. 성결운동이 초기에 도시의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성결운동이 웨슬리의 성화와 성결의 정신에서 그 신앙적 유산을 찾을 수 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19세기 초에 있었던 부흥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결교의 신앙과 신학은 감리교와 마찬가지로 웨슬리의 전통에서 그 기본적 골격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성결교 고유의 특성은 그러한 기본적 골격에 성결운동의 신앙적 특성들이 가미되어서 나타난다. 그들이 말하는 '사중복음'은 그러한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사중복음은 곧 중생, 성결, 신유, 그리고 재림을 말한다. 중생은 칭의의 사건, 즉 구원을 말하며, 성결은 구원 이후의 거룩한 삶을 세워가는 것인데 곧 온전함을 이루는 성화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신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말하고, 재림은 성도들의 희망의 원천으로서 성결교의 특별히 전천년설을 믿고 있다. 사중복음에서 중생과 성결은 웨슬리 신학의 강조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신유와 재림에 대한 강조는 19세기 성결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결교는 또한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감리교와는 달리 유아세례를 시행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성결운동에서 나온 또 하나의 주요 운동은 20세기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이었다.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보수적인 신학, 엄격한 도덕성, 그리고 믿음을 통한 신유를 중요시하였다는 점에서 유사하였지만 성령강림의 교리와 방언의 교리는 후자에만 있기 때문에 그 차이가 서서히 뚜렸해지면서 분리된 운동으로 각각 발전하게 되었다. 오순절운동은 처음부터 교단을 형성하려는 운동이 아니었지만 곧 다양한 교단들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 또 이 운동의 초기에 참여하였던 많은 이들은 그들이 원래 속했던 교단을 떠나지 않고 자기 교단 내에서 그들의 '오순절적' 신앙방식을 유지하였고, 그들에 의해 많은 교단들이 오순절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 가운데는 칭의와 성화 이후에 일어나는 성령체험을 중시하여 그것을 성령침례(세례)라 하고 제2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1914년에 새로운 교단 '하나님의 성화'를 조직하였다. 이 교단은 오순절운동이 낳은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이 교단의 신학적 특징은 특히 '삼중구원'과 '오중복음'으로 요약되는 '전인구원의 교리'에 잘 나타난다. 삼중구원은 영혼의 구원, 빌병으로부터의 치료, 제반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성령 충만·신유·축복·재림을 말하는 오중복음은 성결교의 사중복음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전인구원의 근본 의미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사실적으로 속한 선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도 당연히 추구해야 할 선"이라는 데 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대체로 웨슬리의 구원론에 입각해 있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의 편에서 당위적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강조한다.  


에필로그


'같음'과 '하나됨'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같다고 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됨'이지 '같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