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프랜시스 후쿠야마, 이수경, 한국경제신문, 2020, (210116)

바람과 술 2021. 1. 16. 02:58

서문 006

 

상대 정파의 정책을 무조건 거부하는 극단적인 파당 정치가 나타나고 조직력을 갖춘 이익 집단들이 다수의 행동이나 의지를 가로막는 미국 정치의 현상을 나는 비토크라시라고 명명한 바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인정을 위한 투쟁은 인류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그는 인정 욕구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은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인정받는 '보편적 인정'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보편적 인정은 민족, 종교, 종파, 인종, 빈족성, 성별 등을 근거로 하는 부분적 형태의 인정들, 또는 우월함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개인들에게 도전받아왔다. 정체성 정치의 부상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직면한 주요 위협들 중 하나다. 만일 인간 존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이해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리 인류는 끊임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1장 존엄의 정치 021

 

근대의 경제 이론은 인간은 자신이 얻는 '효용', 다시 말해 물질적 행복의 극대화에 목표를 두는 합리적 주체이며 정치는 그런 효용 극대화를 위한 행동이 확장된 결과물일 뿐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구축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담론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이 같은 단순한 경제적 모델을 뛰어넘어서 인간의 동기를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라는 사실, 이기심에 따라 움직이면서 더 많은 부와 자원을 추구한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심리는 단순한 경제적 모델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2장 영혼의 세 번째 부분 035

 

정치학 이론은 인간 행동에 관한 이론을 토대로 세운다. 주변 세계에 관한 풍부한 경험적 정보를 활용해 인간 행동의 일정한 패턴을 파악하고, 그 행동과 주변 환경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이다. 즉 각자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의 규범 및 관습에 뿌리를 둔 특성이 아니라 인간이 생물학적 특성을 보편적으로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일정불변의 특성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본성과 양육을 가르는 경계선은 오늘날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지만 이 두 가지 기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을 움직이는 또 다른 강력한 동기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게, 남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으려는 '대등 욕망'이다. 우월 욕망은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말한 '지위재'에 해당한다. 즉 우월 욕망은 타인과 비교한 개인의 상대적 지위에 기초하므로 그 본질상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과정은 우월 욕망이 밀려나고 그 자리가 대등 욕망으로 대체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의 엘리트만을 인정하던 사회가 구성원 모두의 타고난 평등함을 인정하는 사회로 대체된 것이다. 

 

현대의 정체성 정치를 이끄는 힘은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당해온 집단들의 평등한 인정에 대한 요구다. 그런데 이 같은 평등한 인정에 대한 욕망은 해당 집단의 우월성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로 쉽게 변형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민족주의와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종교 극단주의자들의 정치에서 쉽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3장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055

 

정체성의 기본 토대가 된 것은 개인의 내면과 외부 세계, 이 둘을 구분하는 자각이다. 개인들이 자기 내부에 숨겨진 진정한 정체성이 존재하고 그 정체성이 주변 사회에서 해당 개인에게 부여한 역할과 다투며 불화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정체성에서는 자기 진실성을, 표현되지 못하는 내적 자아에 대한 인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즉 정체성이 외적 자아가 아니라 내적 자아의 편에 서 있다. 

 

4장 존엄성에서 민주주의로 073

 

5장 존엄성 혁명 081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평등이란 언제나 자유의 평등에 가까운 무언가를 의미했다. 즉 국가의 힘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를 평당하게 갖는 것, 그리고 자치와 경제적 교환에 참여하는 적극적 자유를 평등하게 갖는 것 말이다. 

 

오늘날 자유민주 국가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본 이상을 현실에서 완벽하게 실현하지 있지는 못하다. 국민의 권리가 빈번히 침해되고 법은 부자 및 강자들과 빈자 및 약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으며, 시민들은 참여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참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자유의 목표와 평등의 목표 사이에는 본질적인 갈등이 내재한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자유는 종종 불평등을 심화하고 결과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자유를 감소시킨다. 민주주의의 성공은 그것이 추구하는 이상들을 최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맞추는 것에 달려 있다. 즉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 사이의 균형, 그리고 합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 있는 국가와 그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법과 책임성의 제도 사이의 균형이 관건이다.  

 

6장 표현적 개인주의 093

 

자율성이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루터는 인간의 자유란 나머지 자연 만물보다 고귀한 존엄성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는 오랜 기독교적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자유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능력에 한정됐다. 칸트는 이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되 자율성의 세속적 버전을 제시했다. 즉 관념적인 이성의 법칙에 따라 도덕적 선택을 하는 능력에 따라 도덕적 선택을 하는 능력에 초점을 둔 자율성 개념이었다. 그러나 정언명령과 같은 칸트의 도덕 법칙들은 인간 개인이 선택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철학적 추론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적 전통에서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올바른 도덕적 선택을 내리는 개인의 능력이다. 

 

7장 민족주의와 종교 107

 

세계 무슬림 인구의 대다수는 급진주의자가 아니라는 루아의 말은 옳으며, 이는 곧 극단주의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각 개인의 스토리와 사회적 환경에서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케펠이, 불만을 품은 유럽의 무슬림 청년들이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 특정한 형태의 이슬람주의를 전파하는 지하드 전사가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 역시 옳다. 

 

8장 잘못 배달된 편지 129

 

9장 보이지 않는 인간 139

 

10장 존엄성의 대중화 155

 

1970년대 말 크리스토퍼 래시는 자존감 증진이 인간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나르시시즘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르시시즘이 미국 사회를 규정짓는 특징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11장 정체성에서 정체성들로 175

 

내가 속한 집단이 피해자다. 우리 집단이 처한 상황과 우리가 겪는 고통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책임이 있는 사회 및 정치 구조를(즉 미디어와 정치 엘리트층을) 깨부숴야 한다라는 프레임을 또같이 사용한다. 좌파고 우파고 할 것 없이 이제 정체성 정치는 대부분의 사회 이슈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렌즈가 됐다.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외부인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 갈수록 늘어나는 정체성 집단들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체성 저치는 그 특성상 똑같은 현상의 출현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 집단들이 서로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원을 둘러싼 싸움과 달리 정체성 인정 요구는 대개 협상이 불가능하다. 

 

12장 국민 정체성 203

 

국민 정체성의 출발점은 한 나라의 정치 체제(민주 체제든 아니든)가 지닌 정당성에 관한 공통된 믿음이다. 국민 정체성은 공식적인 법과 제도에 담길 수 있다. 

 

국민 정체성을 수립하는 일은 성공적인 현대 정치 질서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유는 물리적 안정 때문이다. 국민 정체성의 부재가 가져올 수 있는 극단적인 결과는 국가 붕괴와 내란이다. 두 번째 이유는 통치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통치(즉 효과적인 공공 서비스와 낮은 부정부패)는 입법과 행정을 담당하는 국가 관리들이 자신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가능해진다. 세 번째 기능은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나라를 위해 일하려는 의욕도 없어진다. 네 번째 기능은 넓은 반경의 신뢰를 만들어낸다. 다섯 번째 이유는 경제 불평등을 완화하는 견고한 사회안전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여섯 번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과 정부 사이에, 그리고 국민들끼리 맺은 암묵적 계약이며 이 계약 하에서 국민들은 정부가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다른 권리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유나 권리 일부를 포기한다. 국민 정체성은 이 계약의 정당성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있는 무엇이다. 만일 국민들이 같은 정치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지 못하면 그 나라의 체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13장 국민의식을 위한 내러티브 225

 

국민 정체성이 형성되는 경로는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한 나라의 정치적 경계선을 넘어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존의 언어적 또는 문화적 인구 집단에 맞춰서 국경을 바꾸는 것이다. 세 번째는 소수 인구 집단을 기존의 민족적 또는 언어적 집단의 문화에 동화시키는 방식이다. 네 번째는 해당 사회의 현재 특성에 맞춰 국민 정체성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257

 

정체성은 포퓰리스트 민족주의 운동, 이슬람주의 과격 세력,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많은 정치 현상의 기저에 깔린 공통 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정체성을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정체성이 고정된 것도, 꼭 출생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체성은 분열로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통합으로 향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주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