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시작

[노자가 옳았다], 김용옥, 통나무, 2020, (220129)

바람과 술 2022. 1. 29. 12:14

노자 「도덕경」, 윗벼리 : 길의 성경

 

제1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언어 이전 언어라는 장벽 언어 이후
감정 이성
혼돈 질서
카오스 코스모스
비논리 논리
순간순간 변화 불변
유동 고정
비관념 관념
무형 유형
현실적 실상 초월
개별자 보편자

 

개별자 보편자
변화 불변
하늘
현상 관념
언어 밖 언어 속

 

변화 불변
노자의 도 플라톤의 이데아
천지우주가 도의 고향 초월적 하늘이 이데아의 고향
노자가 사랑하는 것 노자가 배제하는 것
플라톤이 배제하는 것 플라톤이 사랑하는 것
현상 관념
생성 존재
내재 초월

 

결국 존재는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내적인 것이며, 세계-내-존재의 주체인 현존재는 존재의 시간성으로 인하여 비본래적 자아를 버리고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존재는 '있음'이며, 있음은 '시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 밖에 어떻게 존재가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이 시간 밖에 있다면 그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시간 속에 있는 인간과 역사에 관여할 길이 전혀 없다. '있다'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기존의 존재론과는 달리 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시간은 '늘 그러함의 길'인 것이다. '영원불변의 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존재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하나님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변화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불변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변화의 다양한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불변'이나 '영원'이라 말하는 것은 모두 시간 속에 지속태일 뿐이다. 

 

노자 파르메니테스·플라톤
가도지도 부정 가도지도 긍정
항상 그러한 도의 추구 불변의 관념적 이데아 추구
변화긍정 불변부정 변화부정 불변긍정
몸각(몸 전체의 감수성)이 인간의 주체 이성이 인간의 주체
심미적 도법자연 과학적 세계구성
내재주의 초월주의
무종교·무체제적 개방 종교적 독단과 결합

 

보편자 형이상자 형이상학 체 본체와 같지 않음 일형에 통섭된다 모두 시공 내의 사건이다
개별자 형이하자 형이하학 용 현상과 같지 않음

 

무명 본체와 같지 않음 체용일원
현미무간
역의 세계
유명 현상과 같지 않음

 

가도지도 상도
가명지명 상명
방편 진여
불편, 고착 유동, 생성
언어의 세계 실상의 세계
유명·유형 무명·무형
가차 자연

 

무명 유명
무형의 세계 유형의 세계
카오스 코스모스
천지지시 만물지모
무욕 유욕

 

제2장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노자의 영향을 배제한 공자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공자의 위대성은 노자적 사유를 흡수한 바탕 위에서 현실적 도덕을 건설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중국역사에 있어서 「노자」의 이해가, 이 도교라고 하는 기실 전혀 노자와 무관한 민관신앙의 틀에 예속되는 경향성을 탈피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에 있어서, 아니 중국의 라오빠리싱의 상식적 세계관에 있어서, 철학적 세계관으로서의 도가사상과 종교적 인생관으로서의 도교이론은 실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를 혼효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우선 도가철학이라고 하는 것, 특히 노학 체계는 우주론, 인식론, 가치론, 정치철학, 역사관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세계관이며 다양한 사유갈래의 남상을 형성하는 포용적인 원점이다. 그러나 도교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제도화된 종교조직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야기해도, 그것은 하나의 구체적인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동방의 사상에는 초월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세적 시공간에서 사는 인간의 구극적 관심은 현세적 시공간의 관계성 속의 자기존재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민간신앙의 특질은 이 '불로장생'을 주요목적으로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다. 도교라 하는 것은, 노자를 개산조로 한다든가 하는 식의 관련이 있을 수 없는, 노자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는 자연발생적인 자연숭배사상의 필연적 귀결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도교적 관점에서 「노자」라는 텍스트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 있는 것이다. 도교에 의한 「노자」의 왜곡 이외로도 주자학의 도통이론이 성립되면서 「노자」를 이단으로 휘몰아가는 맹목적 경향성이 짙어만 갔다. 

 

노자는 가치라는 것을 인위적 '작'의 세계에 귀속시킨다. 돌멩이 하나도 자연에서 뒤굴고 있을 때는 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가치가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모두 인위에 속한다. 노자는 인위를 '유의'라 부른다. 그리고 유위는 '무위'에 대비된다. 노자에게 있어서 무위는 항상 유위가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그러나 무위는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심미적 가치의 양면성

아름다움
the Beautiful

추함
the Ugly
윤리적 가치의 양면성

좋음
착함
the Good
불선
좋지 못함
착하지 못함
the Not-Good
양자는 결국 상생, 상성의 관계에 있다

 

미에 대하여 오를 말하는 것이나,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하는 것은 결국 같은 사유패턴의 소산이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추함을 말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우리는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함이란 악한 것이 아니다. 추함은 그 자체로 적극적인 심미적 가치이다.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간의 조화의 문제인데, 조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념적인 고정성을 가질 수 없다. 조화는 역동적 관계이며, 역동적 관계는 반드시 '새로움'의 요소를 창출해야 한다. 이 새로움의 요소는 항상 추함의 계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하는 것은 선 그 자체가 실체화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불선의 계기로 인하여 선함은 새로운 선함을 더해간다. 모든 인위적 가치는 역동적 상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조화를 창출해야 한다. 고정된 완벽한 조화보다는 새로움을 지향하는 불완전한 조화가 더 고등한 것이다. 선에 대하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나 선의 고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자의 사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이 세 구절이다. '소유 없는 생성, 자기고집 없는 행위, 지배 없는 성장'.

 

제3장 불상현 사민부쟁 

 

 

노자 「도덕경」, 아래벼리 : 얻음의 성경

 

유황유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