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부두교 -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 라에네크 위르봉, 서용순, 시공사, 1997, (220331)

바람과 술 2022. 3. 31. 17:17

1. 대서양 횡단

 

베냉 지역에서 사용되는 퐁족의 언어 중 '보둔(vodun)'은 언제라도 인간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무섭고 신비한 힘을 의미한다. 

 

자연과 인간사의 여러 분야를 관장하는 정령들을 숭배하는 부두교는, 아프리카의 가나에서 나이지리아와 토고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베냉만의 풍족, 요루바족, 에베족 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현 베냉 공화국인 다호메이에서 부두교가 발달했아. 이곳에서는 민족, 마을, 씨족, 혈통 등이 사회조직의 기반이 된다. 각 집단은 조상신이자 수호신인 자신들의 고유한 '보두' 혹은 '보둔'을 가지고 있다. '에군군(Egun-gun)'이라는 죽은 이에 대한 숭배의식은 씨족이다 부족 집단들을 집결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종교적인 전통을 보존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보두노' 혹은 '후노'라고 불리는 제사장들은 보둔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신자들이 보둔과 접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보둔의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 신자들, 특히 '운소'라 불리는 입문자의 몸으로 들어오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신이 들렸다' '정령'의 '말'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콜베르의 주장으로 만들어져 1685년 루이 14세가 공포한 흑인법전은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정당화할 때에 교회가 맡을 역할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흑인법전 제2조는 "우리 섬에 있는 모든 노예들은 로마 교황 카톨릭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고 교육받을 것이다."라고 규정해 놓았으며, 제3조는 "카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행위를 금지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흑인법전에 있는 60여 개의 조항 중 노예들이 받는 학대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인 조항은 단 하나도 없었다. 법전에 언급된 휴식이나 음식, 종교 등에 대한 조항은, 사실 탈출 예방을 위한 통제수단을 확고히 하고 노예소유주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카톨릭으로 강제 개종해야 하는 참담함 속에서도 흑인 노예들은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그들의 생존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주인의 시선 밖에서, 교회의 그늘진 곳에서 비밀리에 정기적으로, 초자연적인 힘으로 상징되는 조상의 정령들을 숭배하고, 기도를 올렸다. 카톨릭의 성인과 성체 숭배의식은 아프리카 신앙을 숨길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노예소유주와 행정관, 선교사는 부두교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모든 신앙과 의식들을 유치한 짓이나 광기의 징조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미신이나 우상숭배, 악마주의 같은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결국 18세기까지 부두교에 대한 초창기 묘사들은 뱀 숭배신앙이나 악마적이며 미개한 의식이라는 고정관념에 지배되어 균형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들에 문화적 단결을 가능케 해주는 부두교의 힘과 규칙적이며 절제된 언어, 풍부한 신화와 의식은 아직 외부 관찰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식민지 경영자와 행정관은 이미 부두교의 비밀스럽고 신비한 특성이 노예제도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2. 지옥 같은 노예생활 속에 감춰진 부두교

 

흑인들의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노예제도에 맞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은 다양한 부두교 의식을 통해 점차 그들 고유의 종교를 발전시켜 나갔다. 공동체의 유대를 만들어 준 부두교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흑인들의 투쟁에 기반이 되었다. 

 

노예들은 노예상인이나 식민지 경영인을 식인종이라고 여기거나, 자신들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마법사들보다 더 영력이 강한 마법사들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노예들은 자살을 하면 백인 주인들에게 육체만을 남겨 준 채 고향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노예들이 어떻게 작업장이나 농장에서 요구된 혹독한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종교의식들을 금지당했지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카톨릭 신앙활동을 구실로 백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이제 노예들은 성자숭배, 각종 성사, 성령 발현, 그리고 다양한 카톨릭 대축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아프리카 종교에 보호막을 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카톨릭을 향한 노예들의 종교적 열정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던 주인들도 마침내는 그것이 결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따라서 노예들이 기독교 의식에 심취하는 것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노예들이 보여 준 저항의 두번째 형태는 그들만의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곳은 도망친 노예들의 피난처가 될 뿐만 아니라 노예제도 철폐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6세기에 접어들자 수많은 노예들이 농장과 작업장 밖으로 달아났다. 행정당국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예방책을 강구했지만, 수입 노예의 폭증에 따라 탈주사건 발생률은 치명적인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굶주림과 학대, 자유에 대한 갈망에 떠밀려 도망친 노예들은 '마룬(Maroon)'이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하로쿠코 산맥(오늘날 도미니카 공화국의 남서쪽)으로 가 그곳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경제, 정치, 문화 공동체를 결성했다. 탈주지에는 동화되지 않은 노예인 '보살(Bossale)'과 반대로 이제 막 섬에 도착한 노예의 수가 가장 많았다. 따라서 식민지 경영자들의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려는 아프리카적인 조직원칙이 쉽게 수립될 수 있었다. 춤, 노래, 신화, 의식, 치료요법 들뿐 아니라, 크에올어, 아프리카의 친족구조에 기반한 새 가족제도의 개발 등이 새로운 사회체제 구성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부두교는 출신 민족과 출신 농장이 저마다 다른 노예들 사이에 단단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었다. 아프리카 전통은 공동체에서 자발적으로 복원되었는데, 여기에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예제도의 폐지였다. 그래서 탈주노예들은 부적을 만드는 데 능하며 독초와 독약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부두교의 사제들에게 마술과 주술을 배웠다.

 

1750년부터 1791년까지 생도맹그의 농장주들은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부두교의 정령들은 식민지 경찰에 대항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수상한 약을 제조하거나 판매하는 행위, 아프리카의 모든 주술행위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부두교에 관한 무서운 미신들은 마침내 노예제도를 뿌리째 뒤흔드는 데 성공했다. '주술'을 발휘하는 탁월한 능력 덕분에 유명해진 탈주노예 지도자들은 식민지 정치무대에 나타나 백인들의 멸망과 노예들의 해방은 예언했다. 탈주노예 지도자들 가운데 몇몇은 진짜 정치인이 되어 독립투쟁의 전략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수아 마캉달은 1757년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약뿐 아니라 '경호인'이란 부적을 만들어 반란노예들에게 배포하여, 식민지 경영자와 행정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후 '마캉달'이란 말은 생도맹그에서 만들어지는 부적이나 독약을 통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부두교 의식과 '마캉달'을 금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선언'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서 노예들을 완전히 격리해 놓을 수는 없었다. 노예들은 이제 노예제도에 마지막 공격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룬들의 새 지도자는 부크망 뒤티였다. 여러 군데 작업장의 노예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뒤티는 작업반장이자 마부였으며 부두교의 제사장이기도 했다. 그가 마룬 거주지와 식민지 북부에 위치한 작업장과 농장의 모든 노예들에게 폭동명령을 내렸다. 식민지 경영자들이나 교구신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봉기는 국비리에 추진되었던 것 같다. 첫번째 회합은 마룬 거주지의 지도자들이 모여 진행했고, 두번째 회합은 1791년 8월 14일 밤 뒤티가 좌중을 이끈 부두교 의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마침내 8월 22일 봉기가 시작되었다. 폭동을 일으킨 노예들은 두 달 동안 식민지 전역을 공포에 빠뜨렸다. 200개의 설탕농장과 1,800개의 커피 농장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수천여 명의 백인이 죽음을 당했다. 1793년 8월 29일, 파리 의회의 전 변호사이자 혁명지지 인사로 이름을 날리던 레제 펠리시테 송토낙스가, 전 세계의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프랑스의 국민의회가 식민지의 정국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다른 두 명과 함께 그를 파견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1791년 8월의 흑은 봉기는 승리를 인정받았다. 

 

새로운 독립국가(아이티)에서 부두교는 이제 어떤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인가? 유럽 전역에서 독재전제주의, 주술, 식인풍습 같은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들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점차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은 그들이 권력에 도달하기까지 값진 기여를 한 아프리카의 전통 유산을 어떻게 떠맡을 것인가? 사실 부두교는 문자에 기초하고 있는 의식이 아니다. 정확한 교리도,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도, 엄격한 의식도 갖고 있지 못한 부두교는 공식 종교로서 지위를 얻기 힘들었다. 통치자들은 카톨릭을 국가의 공식 종료로 선택했을 때, 유럽 국가들과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3. 국제무대에서 나타나는 주술

 

19세기 서양인은, 모든 아프리카 문화에 야만성이 깃들여 있다고 보았다. 1791년에 아이티에서 봉기와 독립전쟁을 주도한 선동자들은 부두교와 야만성이 관련 있음을 증명하는 도구로 이용되곤 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20세기에 되살아나 미국의 아이티 점령을 정당화했으며, 아이티를 살아 있는 시체들이 떠도는 죽음의 땅으로 변화시켰다. 

 

독립 아이티의 부두교 의식은 유럽인들의 관심을 점점 더 증폭시켰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심해진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부두교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1860년부터 아이티는 카톨릭을 모든 아이티인의 공식 종교로 지정하고 바티칸 교황청과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부두교는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고, 사람들은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떠들썩한 추문을 통해서난 부두교를 접할 수 있었다. 1910년에는 헤스켓 프리차드 같은 미국 작가들이 아이티를 찾아왔다. 미국 작가들은, 흑인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두교 관련한 끔찍한 소문들은 벌써부터 백인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인종적 특성'을 더욱 뿌리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아이티의 독립은 시기상조로 생각되었다. 백인은, 흑인이 문명국의 대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백인의 지도가 선결문제라고 믿었다. 인종, 부두교, 독재 전제정치가 갖는 확실한 연관관계는 결국 미국의 여론을 아이티 점렴으로 기울게 했다. 1915년, 해방군을 가장해 상륙한 미해군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점령하게 된다. 그들은 점령기간 동안 부두교 신전을 약탈하고 아프리카 선조들의 '우상'을 파괴하면서 자신들이 아이티에 이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식인종 사촌> 같은 선정적인 제목을 단 책들은 미국인에게 아이티를 '좀비'의 땅으로 소개했는데, 이는 '죽은 자를 깨우는' 부두교의 기괴한 풍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죽음의 보두인 좀비는 차츰 미국 공포영화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부두교의 이미지가 이처럼 굳어 버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하로 숨어들게 된 제사장들이 부두교를 신비스럽게 만들어 자신들의 능력을 한층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할 전략으로 꾸며 냈던 것이다.  

 

4. 르와 정령

 

부두교에게 정령 숭배 신앙은 개인과 개인은 물론 그들과 세계의 관계를 중재한다. 정령들을 언어에 비유한다면 각 정령은 한 단어와 같아서, 그 자체로는 단 하나의 협소한 의미밖에 없다. 정령들은 상호대립과 보완작용을 하며, 부두교의 신단을 함께 구성함으로써 전체 가족으로서 중요성을 획득한다. 

 

정령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르와는 인간의 몸에 깃들이기도 하지만, 나무와 강, 산, 공기, 물, 불 등 모든 자연물 안에 존재할 수 있다. 부두교의 르와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농업, 전쟁, 사랑)과 자연세계의 여러 측면 사이에 연결망을 형성해 준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창조하며, 개인의 삶을 나서 죽을 때까지 지배한다. 이것은 마치 그들의 메시지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개인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배울 수 있는 길인 것처럼 보인다. 르와는 또한 사회생활과 우주의 여러 분야를 분류하는 양식을 제공한다. 질서와 무질서, 삶과 죽음,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들은, 어떠한 것도 부조리한 상태로 두지 않는 르와의 중재 덕분에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르와는 어떤 것이든 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연결하는 끈의 역할을 한다. 르와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카톨릭 성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부두교의 존재조건뿐만 아니라 그것의 변형, 적용, 그리고 생존 능력을 보여 준다.

 

많은 르와가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일상사에 개입하는데, 이 때문에 부두교는 다신숭배교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르와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두교도들은 르와가 아프리카에서, 좀더 명확하게는 완전히 잃어버린 전설의 땅인 기니에서 온 것이라고 믿었다. 르와들이 갖는 권위가 모두 같지는 않으며, 세 개의 주요 의식을 치르는 각 신전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르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모든 의식에서 르와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던 레그바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레그바는 신들의 비밀을 훔쳐 인간세상에 전해 주었다. 레그바는 사원이나 마을 입구, 교차로 등을 지킨다. 서열상 레그바 다음에 오는 르와들은 다양한 자연분야와 여러 인간활동을 지배한다. 르와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연계해 주며, 가족의 안정과 영속성을 보장한다. 부두교의 판테온에서 르와는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한 존재로 나타난다. 부두교에서는 모든 고정된 이원론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르와에게 모든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면서 무한한 힘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르와가 개인의 삶 전체에 침투하거나 개인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의 책임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부두교도들은 마술과 주술의 시행을 배척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힘들이 부두교 체제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으며, 그것들이 언제든지 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부두교도는 늘 재난에 대비하고 유사한 무기들로 보호조치를 한다. 그렇지만 그 조처의 대가로 때로는 굉장히 값비싼 계약을 맺어야 하기 때문에, 르와들을 산다는 것은 약간의 위험을 내포한 행위이다. 만일 그들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면, 르와 아슈테에게 노여움을 사 병이나 불행이 가족을 덮치게 되기 때문이다.  

 

5. 사자 死者 숭배

 

만일 죽음을 자연의 냉엄한 처벌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견디기 힘든 것이리라. 그러나 특정한 의식을 통해 죽음이 중재되면서 죽음은 사회를 재생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을 통해 산 자는 죽은 자에게 힘을 북돋워, 그들이 물을 헤치고 부두교 정령의 안식처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죽은 이들에 대한 예식을 실천해 온 노예들은, 고인들과의 관계가 사회적 행동양식과 그 이상의 것을 형성해 준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부두교에서 의식을 죽은 이들을 향한 열정 같은 것으로 이끄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확인하려는 신도들의 의지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들-카톨릭 의례까지-을 동원하여 죽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하였다. 부두교에서 죽음은 단지 한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집단,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엄습하는 사건이다. 거의 모든 의례들이 개인의 죽음을 현실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다는 기능을 한다. 만약 그런 의례들이 없다면 죽은 이는 살아 있는 이들의 곁을 계속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삶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끝없는 불안의 원천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직 사회집단과 공동체의 지지 아래에서만 죽음이라는 현실과 만나는 것이다.

 

6. 망제 르와 당세 르와 : 봉헌

 

르와는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잘 받드는 경우에만 호의를 베푼다. 르와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매우 정확한 영접 장치가 필요하다. 신들리기, 입문, 그리고 신비한 결혼은 르와와 긴밀한 접촉을 하는 데 필수적인 형식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르와와 맺는 친교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운명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7. 놀라운 생명력

 

노예제도가 존속하던 시대부터 국가와 교회가 함게 행해 온 탄압 아래서, 그리고 19세기 전반부터 1930년까지 대다수 아이티 지식인들에게 거부를 당하면서도, 부두교는 놀라운 생명을 보여 주었다. 뒤발리에 정권은 엄청난 정치적 착취를 통해 부두교를 죄악으로 규정해 명예를 더럽혔으며, 그것을 노예소유주와 노예상인, 그리고 식민지 경영인의 탓으로 돌렸다. 

 

8. 기록과 증언

 

9. 참고문헌

 

10. 그림목록

 

11.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