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시선은 권력이다], 박정자, 기파랑, 2008, (080306).

바람과 술 2008. 6. 15. 04:19

서문 - 유리집을 꿈꾸는 불면증의 군주

 

눈이지배하는 세상

: 시선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러므로 시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주요한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조화와 질서를 보여주는 최고의 이상으로서 우주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우주를 해석하고 닮기 위한 방식으로서 미메시스(모방)를 모든 예술의 원리로 삼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원근법이 발명되어 사물이 부동의 것으로 고착되었다. 원근법적 사고가 지배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가 거리두기와 대상화로 규정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사이버 시대로 진입한 현대 사회에서 물질세계는 더 이상 원근법적 세계의 견고성을 갖지 못한다. 이제 이미지는 무질서하고 불안정하고 우연적이고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가짜(simulation)이기까지 하다. 새로운 바로크 시대라 규정될 정도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우며, 가상이 지배하는 현대의 사회상은 그 근원에 이처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있는 것이다. 시선은 타자와의 관계이고,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기본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시선이 인간관계의 기본인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토마스 홉수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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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성의 역전

: 모든 것은 시선의 비대칭 속에 있었다. 한 사람이 만인을 보는 것, 이것은 근대 이후 권력 행사의 특징이다. 한 사람이 만인을 보기 위해서는 시선이 효율적인 배분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바로 감시였다. 잘 감시하기 위한 방법의 진화와 발전이 근대 이후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라도고 할 수 있겠다.

벤담과 판옵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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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개념의 기초로서의 헤겔과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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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 속의 눈

 

에드가 앨런 포의 <폭로하는 심장>

김영하의 <퀴즈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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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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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인의 지옥

 

타인의 시선

: 수치심은 근원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수치를 느끼는 것은 타자의 시선 속에서이다. 혼자 마음속으로 수치를 느꼈다 해도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가상적으로 상정하고서이다. 나는 열쇠구멍을 통해 어느방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단지 그 방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을 지각할 뿐, 나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 나는 주체이고, 방안의 장면은 대상이다. 나는 방안을 바라보는 주체로서만 존재할 뿐, 나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고, 물론 수치심은 없다.  

잠시 전의 나를 무로 만드는 의식

: 우리의 의식은 대상 없이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대상 앞에서만 스스로 형성되는 그런 존재이다. 처음에는 투명한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의 상태이다가 앞에 어떤 대상이 나탄면 그 순간에 작동을 시작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의식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항상 '그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이것이 후설 현상학의 기본 원리인 지향성의 원리이다. 현상학에서 초월이란 대상을 향한 의식의 작용이다. 초월은 의식과 그 대상 사이의 거리이며, 의식과 의식 아닌 것 사이의 관계이다. 자기에게서 몸을 빼낸다는 것은 매번 바로 직전의 자기를 부정한다는 의미이므로 사라트르는 이것을 '무화(無化)'와 동의어이고, 의식을 지칭하는 것이며, 결국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돌멩이는 없어

: 대상을 향해 초월적 운동을 하는 우리의 의식은 외부의 대상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의식의 앞에 두고 성찰할 수도 있다. '자기와 대면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대자(對自) 존재하고 부른다. 초월성도 없고 자기와 대면하는 능력도 없으며 그저 자기 자신으로 자족해 있는 상태의 사물들은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에서 즉자(卽自) 존재라고 부른다. 자기와 자기가 이중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이에 가느다란 틈새가 있다는 뜻이다. 틈새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므로 무(無)이다. 대자는 속에 무(無)를 품고 있는 존재양식이다. 이 '무(無)'가 다름 아닌 의식이다. 의식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앞에 대상이 생기면 그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초월적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무(無)' 덕분이다. 

타인에게 있어서 나는 꽃병과 같은 사물

: 의식은 자기 앞에 놓인 대상을 향해 초월적 운동을 하는데, 이때 대상은 '의식과는 성질이 다른 것', 즉 '의식이 아닌 어떤 것'이다. 우리의 의식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모두가 대상이다. 하나의 주체 앞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의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대상은 객체이며 동시에 모두가 사물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주체인 인간이 의식의 대상이 되었을 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바라보임을 당할 때 생기는 것 - 수치심

: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그저 사물로 보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수치심의 철학적 근거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바라보임을 당할' 때 나는 그의 의식의 대상이 되는데,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체인 타자가 나를 객체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동시에 내가 물질성을 띠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성이 부정되고 한갓 물건으로 전락한 것이다.

사물로의 추락

: 순수한 수치심은 자기가 대상(물체)이 되었다는 것, 즉자존재로 전락했다는 것, 다시 말해 나의 존재를 남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왜냐하면 주체가 대상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대상의 존재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밖에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리해서 자신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불편한 이유

: 대자존재인 우리의 의식은 앞에 대상이 나타나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월적인 지향성의 운동을 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아닌 다른 존재와 부단히 관계를 맺는다.

눈이냐, 시선이냐

: 우리가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이다. 

맹수처럼 싸우는 두 시선

이겼을 때가 곧 지는 순간

사랑의 불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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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세계 속에 떨어진 것이 우리의 원죄

 

3.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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