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리히프롬,마르크스를 말하다],에리히프롬,최재봉,에코의서재,2007.

바람과 술 2008. 6. 15. 04:15

08년 1월 19일 읽음.

 

서문

 

많은 실존주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의 소외,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사물로 변모하는 사태에 대한 저항을 담도 있다. 서구 인본주의 철학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의 발현에 대한 관심에 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인간이 인간다움을 최대한 발현하고 그를 옥죄는 사회적 힘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이 힘들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가져와야만 한다. 마르크스를 비판한다는 것과 오늘날 그에 관한 언급들에 흔히 보이는 광신적이거나 폄화하는 듯한 판단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마르크스 사상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오늘날 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제기하는 도전에 실질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대응을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 에리히 프롬

 

1장 왜곡된 마르크스의 개념들

 

오해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이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상에 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장 큰 심리적 동기는 금전적 이득과 여유를 향한 소망이며, 이익의 극대화를 향한 열먕을 인간의 개인적 삶과 인류 전체의 삶에 있어서 핵심적인 유인으로 믿었다고 이해된다. 이런 생각에 필적할 정도로 널리 퍼진 또 라른 오해는 마르크스가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했으며, 인간의 정신적 요구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가 없었고 그가 생각하는 '이상'은 잘 먹고 잘 입긴 하지만 '영혼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이런 관점은 한 발 더 나아가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 천국이란,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록 평등은 이루었을지라도, 무소불위의 국가관료제에 복종하며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주장하기에 이른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은 어쩌면 이런 세속의 이미지(그의 반정신주의 경향과 획일주의 및 노예화 기도)가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목표는 인간의 정신적 해방이었다. 인간이 경제결정론의 사슬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총체성을 되찾으며 동료 인간 및 자연과 협력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러나 나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전에 한 가지 강조해둘 게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의 목표와 그가 꿈꾼 사회주의의 내용이라며 제시되었던 상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 철학을 '유물론'이라며 가장 맹렬하게 비난하는 이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동기가 물질적 이득을 향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주의를 비현실적이라 공격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의 사상이 우리의 종교적.정신적 전통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중거라고 말해지는 바로 그 이유, 마르크스에 맞서서 우리의 현 체제를 옹호하는 데 동원되는 바로 그 이유들이 동시에 같은 사람들에 의해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며 그렇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사회주의보다 휠씬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동원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마르크스의 철학이 이처럼 정반대로 오해받고 왜곡된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무지다. 또 다른 이유는 소련 공산당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전유해서는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실천과 이론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쫓고 있음을 확신시키려 했다는 데 있다. 사실 소련 공산당뿐만 아니라 개혁적 사회주의자들 또한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믿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식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다른 패러다임의 사회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왜곡을 낳는데 일조하는 불합리한 이유들 또한 분명히 있다. 소련이 모든 죄악의 화신으로 간주됨에 따라 소련의 주장은 악마적 성격을 띤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증오의 이유로 흔히 드는 것이 스틀린주의자들이 여러 해 동안 저지른 공포정치이다. 위에 언급한 요인들 가운데 마르크스 철학의 왜곡과 오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다양한 사람들과 정치집단별로 중요도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며 그중 어느 하나가 유일하게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2장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제거해야 하는 장애물은 '유물론(materialism)'과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오해다. 철학용어로서 '유물론(또는 자연주의)'은 움직이는 물질이 우주의 근본적인 구성요소라는 철학적 견해를 가리킨다. 반대로 관념론이란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항상 변화하는 감각세계가 아니라 무형의 본질, 그러니까 관념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을 가리킨다. 마르크스는 존재론적으로 유물론적 철학자였지만 유물론이니 관념론이니 하는 식의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그런 문제를 거의 다루지도 않았다. 헤겔의 견해와 구분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방법론'은 인간이 실제로 꾸려가는 경제적 삶 및 사회적 삶, 그리고 실제 삶의 방식이 인간의 생각과 느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과 당대의 유물론 사이의 차이를 포이어바르에 관한 테제에서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헤겔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인간과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관념이 아니라 실제의 인간과 그가 살아가야 하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의 철학은 관념론도 유물론도 아니고 그 종합으로서의 인본주의 및 자연주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적 유물론은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그의 생각과 욕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 인간의 주된 욕망이 최대한의 물질적 이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는 심리적 욕우가 아니라 생산수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수많은 객관적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는 생산양식이 인간활동의 다른 영역들을 결정한다는 가정이다. 생산양식이 결정되면 사회적 조직을 결정하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인간을 결정하게 된다. 역사를 기술하려면 언제나 이런 자연적 바탕들과 그것들이 역사과정 속에서 인간의 행동에 의해 수정된 형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자신의 창조자라는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 종이 스스로를 창조하는 이런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요소이며, 자연을 상대로 한 자신의 신진대사를 조절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다. 노동은 인간 삶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변화하게 된다. 1.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적 변화의 개념, 변화는 생산력(그리고 다른 객관적으로 주어진 조건들)과 기존의 사회조직 사이의 모군에서 비롯된다. 모든 역사에 있어 인간의 진화는 자연을 상대로 한 투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역사의 한 지점에 이르면(마르크스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자연의 생산 근거는 충분히 개발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관계는 궁극적으로 해소될 것이다. 

 

3장 인간의 의식과 사회구조, 폭력 사용의 문제

 

핵심적인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관념과 상상, 그리고 의식의 생산은 처음에는 물질적 활동과 인간들의 물질적 교류, 그러니까 실제 삶의 언어와 직접 결부되어 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의 상상과 사고, 정신적 교류는 물질적 행동이 직접적으로 개입된 결과로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관념 등을 생산하지만,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은 생상력의 일정한 발전단계 및 그 생산력에 상응하는 포괄적인 상호관계의 제약을 받는다. 의식이란 의식적인 실존, 그리고 인간의 실제 생활과정에서의 실존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스피노자나 뒷날의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허위'의식,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이자 합라화이며 인간행동의 진정한 동기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다는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관념이나 이상은 실제적이거나 유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허위의식이 올바른 의식으로 바뀔 때에만, 다시 말해서 합리화와 허구로써 왜곡하지 않고 실재를 올바로 의식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이고 진정한 인간적 욕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과학 자체와 인간에 내재한 모든 힘들 역시 생산력의 일부로서 자연의 힘들과 상호작용한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주장은 관념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현실, 헤겔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현실적 가능성'에 뿌리내리지 않은 관념에 대한 반대였다. 무엇보다 그는 환경이 인간을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환경을 만든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폭력에 의한 정치혁명이라는 생각은 결코 마르크스주의가 창안해낸 것이 아니라 지난 삼백 년 동안 부르주아 사회가 해온 생각이었다. 폭력에 대한 분개는 폭력이란 절대적으로 그른 것이라거나 가장 직접적인 방어의 경우가 아니면 폭력의 사용은 결코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적 견지에서만 근거를 지닐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 및 정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정치적 폭력이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에게 있어 폭력은 기껏해야 한시적인 의미만을 지닐 뿐 사회변모에 있어서 항구적인 요소로 구실하지는 못한다. 

 

4장 인간의 본성

 

1.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그 자체로서 알아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실체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이 해겔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에게도 추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보편적 인간 본성과 각 문화에서 특수하게 발현되는 인간 본성을 구분하면서 인간의 두 가지 충동과 욕구를 구분한다. 인간 본성의 불가결한 일부를 이루며 다양한 문화에 따라 형태와 방향만을 달리하는 항구적이며 고정된 것, 그리고 인간 본성의 불가결한 일부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구조와 특정한 생산 및 교화조건에 기인하는" '상대적' 욕구가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잠재력을 타고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의 진행에 따라 변화한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변모시키는 인간은 역사의 산물이기도하다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인간이 자기실현을 이루어온 역사이다.

 

2. 인간의 자기 활동

 

마르크스의 인간개념은 헤겔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헤겔은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통찰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문제는 본질과 실존이 맺고 있는 관계다. 본질은 실존하는 과정에서 실현되며, 동시에 실재한다는 것은 본질로 회귀함을 뜻한다. 헤겔에게 지식은 객체가 사융하는 사람과 분리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되는, 주객 분리의 입장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헤겔의 사유 전체는 궁극적으로 사물에 내재한 가능성들, 즉 사물이 자신을 표현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개념, 그리고 이 과정이 이 가능성들의 적극적인 운동의 하나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헤겔은 생산적인 인간, 수동적이거나 수용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개인을 매우 체계적이고 심원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개인이란 세계를 생산적으로 포착하고 그럼으로써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만 온전한 개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존재이다. 헤겔에게 있어 모든 개인적 힘과 역량과 잠재력은 사변이나 수용성이 아닌 부단한 행동에 의해서만 발달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괴테, 헤겔은 물론 마르크스에게서도 인간은 생산적인 한에서만,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인간적 힘을 표현하고 이 힘으로써 세계를 포착하는 행위 속에서 자기 바깥의 세계를 포착하는 한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특징을 '운동의 원칙'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열정은 "대상을 향해 열정적으로 쏟아붓는 인간의 본질적 힘"이다. 마르크스의 활동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감각은 동물적인 조야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제한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지닌 감각은 감각 바깥에 있는 대상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대상이란 내 자신의 능력 중 하나를 확인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자신을 객관세계와 관련지음으로써 바깥세계는 비로소 인간에게 실제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사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바깥에 있는 객관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게 만드는 것은 '사랑'뿐이다. 주체와 객체(대상)는 분리될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는 사유재산과 인간의 자기소외의 확실한 폐지, 그러니까 인간 본성을 인간을 통해, 그리고 인간을 위해 실질적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인간 자신을 사회적 존재, 즉 진정한 인간적인 존재로 회복하는 것, 이전의 발달단계에서 거둔 성과를 모두 수렴하는 완벽하고 의식적인 회복이다.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은 인간의 유적 특성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유적 특성'이란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이런 개념에서부터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부와 가난개념과 다른, 전혀 새로운 부와 가난개념에 도달한다. 부유한 인간이란 동시에 수많은 인간적 삶의 표출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며 그 자신의 자기실현은 내적 필연성, 즉 필요로서 존재하게 된다. 가난은 인간으로 하여금 최대한의 부, 그러니까 타인을 향한 필요를 경험하게 이끄는 수동적 질곡이다. 마르크스에게 독립과 자유는 자기창조행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의 목표는 인간의 해방이었고, 인간의 해방은 생산적 관계맺음 및 인간과 자연의 하나됨의 과정에서의 자기실현과 동일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인간의 개별성의 발달이었다. 물질적 재산의 지배력이 너무도 크게 보인 나머지 사람들은 사유재산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은 모두 파괴하려고 한다. 재능 따위는 강제로 없애려고 한다.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개성을 부정하는 이런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논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에 관한 그의 개념을 유념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에게 노동과 자본은 결코 경제적 범주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활동이다. 노동은 인간의 자기표현이자 개별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힘의 표현이다. 이런 활동의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을 개발시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 일은 생산물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적 에너지의 의미 있는 표현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일은 즐거운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핵심논의는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고 소외되며 의미 없는 것으로 노동을 왜곡시키고, 따라서 인간을 '불구적 괴물'로 변형시킨다는 데 있다. 인간의 발전목표가 총체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전문화가 미치는 불구적 영향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다루는 핵심주제가 소외되고 의미 없는 노동을 생산적이며 자유로운 노동으로 바꾸는 것이지, 사기업이든 '추상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의해서든 소외된 노동에 더 나은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다. 

 

5장 소외

 

마르크스에게 소외란 세계를 장악함에 있어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로 경험하지 못하고 세계(자연, 타자들, 그리고 자기 자신)가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그것들은, 비록 인간 자신이 만든 것일지라도, 인간보다 높은 자리에 적대적으로 위치해 있다. 소외는 본질적으로 세계와 자신을 수동적으로, 수용적인 태도로, 객체와 분리된 주체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소외의 여러 형태 중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이 언어에 있어서의 소외이다. 언어의 소외는 소외가 얼마나 복잡한지 온전히 보여준다. 언어는 인간의 가장 값진 성취의 하나이다. 하지만 입 밖에 내는 말의 위험성, 그것이 살아있는 경험을 대체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의식해야 한다. 사상이든 예술이든,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종류의 대상이든 인간의 다른 모든 성취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삶에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것들이지만, 그것들 각자는 한편으로는 덫이기도 하다. 소외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사상가는 헤겔이었다. 그에게 인간의 역사는 소외의 역사였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에게서도 소외개념은 실존과 본질 사이의 구분에 기초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실존이 자신의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 실제의 그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한 상태이며, 달리 말하자면, 그는 마땅히 되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그가 아니며, 그는 그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소외의 과정이 일에서, 그리고 노동의 분화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에게 일이한 인간과 자연이 능종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창조를 포함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지적인 활동은 육체노동이나 예술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물론 언제나 일이다). 그러나 사유재산과 노동분화가 발달하면서 노동은 인간의 능력을 표현한다는 고유한 성격을 잃어버린다. 노동과 노동의 산물은 인간과 그의 의지 및 계획에서 분리된 별도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2가지 점을 강조한다. 1. 일의 과정에서, 특히 자본주의 상황하의 일에 있어서는 인간은 자신의 창조력으로부터 소외되며 2. 그 자신의 일의 대상은 낯선 존재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를 지배하고 생산자에게서 독립적인 힘이 된다. 생산과정이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리나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위해 존재한다. 이 점에 있어서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조차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마르크스가 무엇보다 노동자의 경제적 착취에 대해 말했다는 것,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몫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또는 생산물이 자본가 대신 노동자에게 소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다는 식이다.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수입의 균등화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개인성을 파괴하고 인간을 사물로 전략시키며 물건의 노예로 만드는 일에서 해방되는 데 관심을 두었다. 키에르케고르처럼 마르크스도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소외되지 않은 일을 할 때 인간은 자신을 개인으로서 실현할 뿐만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도 실현한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목표가 노동계급의 해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해방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한다. 인류의 해방은 모든 인간이 소외되지 않은 자유로운 활동, 그리고 물건의 생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목표가 되어 "불구적 괴물이 아니라 완전히 발달된 인간이 되는" 사회를 복원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동과 환경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 그리고 자신의 동료 인간과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소외된 인간은 타인들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로부터, 자연과 정신의 양 측면에서 공히 인간의 "유적 존재'로부터도 소외된다. 인간의 본질로부터의 이런 소외는 실존적 자기 중심주의를 초래하는 데, 그의 개별적 실존을 위한 수단이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인간다움은 그의 개별적 실존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소외는 모든 가치를 전도시킨다.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마르크스의 소외개념에서 수정되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이 가장 소외된 계급이며 따라서 소외로부터 해방은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해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소외가 대다수 사람들, 특히 기계가 아닌 기호와 인간을 다루는 다수의 인간들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점은 예측하지 못했다. 

 

6장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그 자체는 인간 발전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분명히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간이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생산물과 노동, 동료 인간, 자기 자신과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생산형태와 사회조직을 만들고자 한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장악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삶의 충족이 아니라 이런 충족을 위한 조건이었다. 마르크스의 비전은 인간에 대한 믿음,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온 인간 본질의 진정한 잠재력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의 조건으로 보았지, 그 자체가 인간 삶의 목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의 목표는 자유였지만, 그 자유는 현재의 민주주의가 생각하는 것보다 휠씬 더 근본적인 의미의 것이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인간의 욕구에 봉사하는 사회를 말한다. 인간의 진정한 욕구는 그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욕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섰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나는 필수품이자 욕구로서 느낀다. 그것이 없다면 나의 본질이 실현되거나 충족될 수도, 또 완전해질 수도 없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의 일차적 목표는 인간의 진정한 욕구를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인데, 그것은 생산이 인간을 위해 봉사학 자본은 인간의 거짓 욕구를 만들어내고 착취하는 것을 그만둘 때에만 가능해질 것이다. 마르크스가 종교에 맞서 싸운 것은 그것이 소외되어 있는 인간의 진정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실존과 본질이 일치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의 분리와 적대관계의 극복, 그리고 자연의 인간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질서를 의미했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더 이상 이방인들 속의 이방인이 아니며 자신의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세계를 의미했다. 

 

7장 마르크스 사상의 연속성

 

8장 인간 마르크스

 

"악당의 사악한 생각조차도 천국의 경이보다 더 장엄하고 고상하다", "인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나에게 낯설지 않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존재는 많이 하고 소유는 적게 하는 인간, 동료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부유한 인간이 바로 마르크스였다.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서문 - 카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서문 - 카를 마르크스

 

비판의 무기는 정말이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마르크스 회상하며 - 폴 라파르그

 

1.

마르크스는 학문은 연구의 궁극적인 결과와는 상관없이 학문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학자가 공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 서재나 실험실에 틀어박혀서 동시대인들의 삶과 정치투쟁에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타락으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골초였다. 언젠가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본>을 팔아봐야 그것 쓰느라 피워 없앤 시가 값도 못 건질 거야". 그러나 그의 낭비로 치자면 성냥 쪽이 한결 더했다. 그는 파이프나 시가를 피우던 중에도 너무나 자주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냥갑을 비우곤 했다. 마르크스는 학문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문헌의 측면에서도 양심적이었다.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갖지 못한 사실에 입각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그것을 철저히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글을 발표할 때 그는 가장 적절한 형식을 찾아내기까지 몇 번이고 수정을 거치곤 했다. 철저한 준비 없이 대중 앞에 나타나는 것은 그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2.

 

3.

 

예니 마르크스가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 1850년 5월 20일 런던

 

카를 마르크스에 대한 단상 - 엘리노어 마르크스-에이블링

 

마르크스 고백 - 카를 마르크스

 

가장 좋아하는 덕목 : 단순함, 가장 좋아하는 남자의 덕목 : 힘, 가장 좋아하는 여자의 덕목 : 약함, 주된 성격상의 특징 : 단일한 목표, 행복의 이상 : 싸우는 것, 비천함이란 : 복종, 용서할 수 없는 악덕 : 잘 속는다, 가장 혐오하는 악덕 : 노예근성, �어하는 사람 : 마틴 터퍼, 가장 좋아하는 직업 : 책벌레, 가장 좋아하는 시인 : 세익스피어/아이스킬로스/괴테, 가장 좋아하는 산문 작가 : 디드로, 가장 좋아하는 남자 영웅 : 스파르타쿠스/케플러, 가장 좋아하는 여자 영웅 : 그레트헨, 가장 좋아하는 꼿 : 서향나무 꽃, 가장 좋아하는 색 : 빨강, 가장 좋아하는 이름 : 라우라/예니, 가장 좋아하는 음식 : 생선, 가장 좋아하는 경구 : 인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나에게 낯설지 않다,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 : 모든 것을 의심하라

 

카를 마르크스의 장례식 - 프르드리히 엥겔스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그에게는 많은 반대자가 있었지만 개인적인 적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후기

 

역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