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 사이토 다마키, 김영진, 황금가지, 2005.

바람과 술 2008. 6. 15. 06:11

2007년 5월 27일 읽음.

 

제1장 휴대폰 세대와 은둔형 외톨이

 

들어가며

: 윤리성을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이 그 행위 또는 이론이 얼마나 리얼한가에 있다는 것, 일단은 여기에 기준점을 두자. 이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도정은 길다.

 

대화소통이 극도로 활발한 '요즘 아이들'

: 하라주쿠 쪽에서는 거의 전원이 자신의 재능이나 장래 목표에 대해 뚜렷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대우 등에는 불만이 있어도 자신이라는 존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한편 시부야 쪽 젊은이는 현재의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나 장래 목표 등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을 받으면 우물거리기 일쑤였다. 대인 관계에서는 시부야 쪽이 사교적이고 친구 숫자도 많으며, 가족과도 유대가 깊다. 반면에 하라주쿠 쪽 젊은이들은 친구나 애인은 있어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미디어와의 관련성은 특히 대조적이다. 하라주쿠 쪽은 텔레비전, 시디, 영화 등 어딘가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나 시부야 쪽은 그러한 관심이 퍽 적었다. 영화건 음악이건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기 위한 화제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한편, 은둔형 외톨이들은

: 우선 특정한 '사건'과 은둔 문제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어떤 가정의 어떤 아이일지라도 은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문제는 예방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대응이 중요하다는 것과, 은둔형 외톨이 치료는 각오와 끈기만 있으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 등이다. '사회적 은둔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자기 집에 틀어박혀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가 6개월이상 지속된다 2. 다른 정신 장애를 주 원인으로 갖지 않는다.

 

양극화하는 젊은 세대

: 아마 지금의 젊은이 세대에는 이러한 양극화가 한층 더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결국 두 극단 중 어느 한쪽에 살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징후적인 지적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아마도 현대에 가장 어려운 일은 '중용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교생들의 대화를 들으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강도적(强度的) 표현이다. 그들의 대화 소통은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그러한 강조적 파동을 상대에게 전함으로써 서로 공감하기 위한 의식(儀式)으로 보인다. 의미나 감성으로 연대하던 시대는 끝나고, 이런 강도성을 공유할 수 있는가 아닌가로 동료의 자격이 판명되는 것이다. 고교생들은 이런 강도적 발신(發信)에 뛰어나고,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강한 연대로 맺어진다. 이와 달리 은둔하는 젊은이는 강도보다는 감성에, 감성보다는 의미에 집착해 버린 것 같다. 아마도 사춘기의 양극화 배경에는 이런 가치관의 변천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제2장 오타쿠와 야오이의 섹슈얼리티

 

오타쿠는 누군인가

: 나는 오타쿠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1. 허구 맥락(context)에 대한 친화성이 높은 사람 2.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허구화라는 수단에 호소하는 사람 3. 이중 지남력(指南力, orientation) 아닌 다중 지남력을 사는 사람 4. 허구 그 자체에서 성적 대상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 오타쿠의 중요 활동 중 하나가 패러디 작품 제작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들에게 패러디는 '소유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애호하는 작품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작품의 패러디 즉 새로운 허구화에 힘을 쏟는 것이다.

 

야오이 문화의 특이성

: 오타쿠의 패러디 기호를 언급했는데, 야오이도 이 문화권에 속해 있다. 다만 패러디라고 해도 여기에도 일정한 작법이 있다. 남성 오타쿠의 패러디를 '포르노화'라고 한다면 야오이의 패러디는 '게이화'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야오이 작품의 제작자 및 소비자가 거의 여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포인트는 그녀들의 일상적인 성생활과 상상 속의 성생활이 완전히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에 대해 검토할 때에도 성적 환상 쪽을 소재로 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성적으로 늦깎이라는 점이 성적 환상을 보다 순수한 형태로 추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동인녀는 커플링에 불타오른다

: 많은 남성 오타쿠는 여주인공의 조형(造形) 즉 마음을 빼앗는 그 외모에 매료된다('모에' 한다). 아니면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이나 이야기 설정 등에 매료된다. 후자는 '캐릭터 다치(立)'로 이름지어 구분하고 있다. 그러면 여성 오타쿠 즉 동인녀들은 무엇에 매료되는가, 원래 그녀들은 "누구누구 모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동인녀들은 '위상(立相) 모에'라는 것이다. 위상이란 관계성의 위상을 가리킨다. 동인녀 용어로 '공(攻)'은 남성끼리의 동성애 행위에서 남성 역할 또는 적극적으로 관계를 추구하는 역할을, '수(受)'는 행위에서 여성 역할 또는 애정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말한다. 근년에 와서는 이러한 구분이 애매한 하나의 영역이 생겨났다. 야오이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바로 '쇼타'로 불리는, 전(前) 사춘기 소년 등의 에로스를 그리는 작품군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제작하는 측이나 소비하는 측 어느 쪽에 있어서도 남녀 뒤범벅이 되어 버린 착종 상황이 나타난다.

 

정신 분석의 공간

: 허구 속의 성적 대상이 현실 속의 그것의 대체물이 아니고, 오히려 허구 공간이 자립적 욕망의 경제적 공간이 되어 있다는 점도 또한 오타쿠적 기호(嗜好)의 특성이다.

 

욕망의 비대칭성

: 현실적인 이성애적 남녀 관계에 있어서, 겉으로는 남성은 여성을 찾고 여성은 남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대칭적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잘 알고 있듯이 어떤 남녀 관계일이라도 남녀의 욕망의 방향은 본질적으로 엇갈린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란 환상의 교환임에 틀림없다. 남성은 손에 들어오지 않는 욕망(대상 a)을 목표 삼아 은유적 연쇄를 더듬어 가고, 거기서 환상=지(知)를 생산한다. 항상 붙잡을 뻔하다가 마는 대상 a를 대신해서 남성이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여성이라는 이름의 환상이다. 그러면 여성의 경우는 어떠한가, 여성은 우선 남성에 의해 욕망된 위치(곧 어머니 위치)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여기서 자리매김이란 결여태(缺如態)이다. 여성은 상징계에 결여된 존재(=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위상밖에 갖지 못한다. 이 결여된 포지션으로부터 여성은 스스로 결여하고 있는 팔루스를 욕망한다. 이것은 남성이 환상을 형성하는 방향을 정확히 반전시킨 형태가 된다.

 

그래서, 쇼타콤 현상

 

다시, 정신 분석에 대하여

: 정신 분석의 맥락에서 소아는 욕망하는 대상 자체가 '되고 싶다'고 바라고, 성인은 대상을 '갖고 싶다'고 바란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또다시 일상과 허구 사이에 일어나는 성의 괴리이다.

 

'허구화와 '소유'

: 오타쿠는 성도착이 아니다. 그것은 오타쿠라는 것이 확실히 소유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타쿠의 특이성은 우선 무엇보다도 그 소유 의식이 두드러진다는 데 있다. 그들은 애착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그것을 허구화하는 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허구화 행위로 인하여 이미 오타쿠는 성도착을 면한다. 왜냐하면 허구화 욕망이란 어디까지나 소유 욕망이며 '갖고 싶다'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타쿠나 야오이나 우선 '갖고 싶다'라는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이성애적인 일상을 보증한다.

 

창조자로서의 오타쿠

: 오타쿠의 창조 행위는 욕망으로부터 창조까지의 거리가 극히 가깝다는 점에서 창조 과정의 가장 원초적 형식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오타쿠 표현의 변천

 

무한한 환상의 수퍼 플랫 공간

: 오타쿠 표현의 진화를 이끌어 온 것은 성, 작가에 대한 전이, 코믹 마켓이라는 세 가지 요소다. 오타쿠의 욕망 즉 허구화에 의한 소유 욕망은 이 세 가지로 지탱되어 왔다. 나는 오타쿠 문화의 중요한 기능 하나가 이러한 환상의 무제한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은 항시 구조를 지향한다. 바꾸어 말하면 구조 없는 성은 불가능하다. 거기서 우리에게 가능한 역할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물론 오타쿠 문화의 비판자나 부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저항'을 개의치 말고 해석을 해 주어서 외부로부터 그들의 창조성을 계속 도발하는 것이다.

 

제3장 컬트집단 VS 틀어박히기

 

낙원을 방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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