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달력 속에서 만나는 숨은 우리 날찾기 1], 김선섭, 씨앤드씨그룹, 2000.

바람과 술 2008. 6. 15. 06:17

2008년 2월 8일 읽음.

 

제1부 국경일

 

국경일 - 우리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법으로 지정한 날로,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의 4대 국경일이 있는데, 1949년 10월 1일에 지정되었다.

 

일제시대를 극복한 3.1 정신 - 3.1절

 

일제시대를 헤쳐온 정신적 가교, 3.1 운동

: 3.1 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만세시위 상황을 보면, 집회 횟수가 1,500여 회에 참가인원이 202만여 명에 이르렀다. 만세시위 중 사망자 수는 7,50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검거된 인원은 5만 2,77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렇듯 3.1만세 운동은 삼천리 방방곡곡을 뒤흔들며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비록 비폭력을 지향했다고는 하지만, 3.1운동을 주도한 직후 전원이 일본 경찰에 자진해서 잡혀가는 바람에 지도부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지도부의 부재 때문에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총괄할 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결국 통일되고 단일화된 강력한 독립운동 기구의 출현을 기다리는 민족적인 여망을 바탕으로 1919년 9월,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3월 3일에서 앞당겨지다

: 당초 3월 3일로 계획되었던 독립선언은 일제의 고등계 형사였던 신철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최린과의 일화로 인해 3월 1일로 앞당겨졌다.

3.1운동관/류관순 열사 유적지/제암리 순국유적지/파고다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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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다 - 제헌절

 

우리 최초의 헌법(제헌헌법)

: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공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조선왕조 건국일이 7월 17일인 점을 감안해 1949년에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되었다.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패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정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한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아홉 번이나 바뀐 헌법

: 헌법의 수난은 첫 헌법 제정당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승만 국회의장이 헌법기초위원들의 의원내각제안을 만류하고 대통령간선제를 관철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각각 불리는 1.2차 개헌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이루어졌다.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은 4.19혁명에 의한 것이었다. 3차개헌은 1960년 6월 단행됐으나, 정.부통령선거법이 폐지되는 바람에 3.15부정선거 사범을 처벌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생겼다. 윤보선 대통령은 여론을 감안, 소급입법을 통해 반민주행위자를 처벌하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1960년 11월 4차 개헌을 했다. 5차 개헌은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장에 의해 1962년 12월에 이루어졌다. 1969년 9월, 삼엄한 경비 속에 공화당이 단독 통과시킨 6차 헌안(3선 개헌)과 1972년 10월 7차 개헌안(유신헌법)은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이었다. 1980년 10월 신군부가 발효한 5공화국헌법(8차 개헌)은 선거인단에서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뽑고 임기도 7년으로 정하는 등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바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통령직선제가 핵심인 현형헌법은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탄생(9차 개헌)했다.

헌정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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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새 아침이 다가오다 - 광복절

 

광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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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그날의 씁쓸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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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관/안중근 의사 기념관/윤봉길 의사 기념관/서대문 독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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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 때마다 힘을 발휘한 개국신화 - 개천절

 

단군개국에서 개천절까지

: 단군을 국조로 숭배하려는 사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이다. 당시 원나라의 압박을 받던 고려사람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세종대왕이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을 명실상부한 국조로 모시고 평양의 단군묘와 구월산 삼성사에 대한 숭배의식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본격적으로 고조된 것은 한말 외세의 침입과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개천절의 유래는 대종교에서 비롯되었다.1900년 1월 15일 서울에서 나철을 중심으로 대종교가 중광되자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매년 행사를 거행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특히 상해임시정부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하여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행사를 거행하였다.

국난극복과 민족통합의 구심점, 개국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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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내 민족전통관.참성단

: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과 삼랑성, 묘향산의 단군굴과 석주석, 평안남도 강동읍의 단군릉, 황해도신천의 어천대와 구월산의 삼성사, 태백산정의 제천단 등도 단군시대의 제천행적과 단둔에 대한 제사와 관계가 있는 유적지이다. 이 중 강화도의 참성단은 단군이 360여 가지에 이르는 치화(治化:어진 정치로 백성을 교화함)의 공을 세우면서 아울러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보본(保本:근본을 보존함)의 뜻을 드높인 우리 민족 제1의 성지이다.

 

제2부 법정기념일(1)

 

법정기념일(1) - 법정기념일은 정부가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의거하여 제정, 주관하는 어떤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세금은 나라의 살림 밑천이다 - 납세자의 날

 

송충이와 얼음까지 세금으로

: 납세자의 날은 나라 살림과 경제개발의 기초인 세금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 국민의 납세 정신을 계몽하고 세수 증대를 위하여 제정된 날로 매년 3월 3일이다. 1966년 3월 3일, 국세청이 발족된 이듬해부터 세금의 날 기념 행사를 실시해오다가 1973년 관세의 날을 흡수.통합하였다.

세금은 공공서비스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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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 박물관

: 세금은 크게 국세와 지방세로 나뉘어지고, 국세는 다시 내국세와 관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관세에 대한 모든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세관 박물관이 그것이다. 인천광역시 관세공무원 교육원 내에 자리잡은 세관 박물관은 100평 정도의 전시실을 갖추고 관세 행정과 관련된 각종 서적 및 사진, 시대별 밀수 사례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상공업이 발전해야 잘 살 수 있다 - 상공의 날

 

물물교환에서 전자상거래까지 : 우리 상업의 역사

: 1973년에 발명의 날, 중소기업의 날.계량의 날.전기의 날.상공인의 날을 상공의 날로 통합하면서 날짜로 3월 20일로 정했다.

단순 철기제품에서 첨단제품까지 : 우리 공업의 역사

: 광복 이후의 공업은 95%에 달하는 일본인 공장의 국유화에서 출발, 미국식 자유기업원리의 경제체제로 전환하였다.

금융제도의 변천으로 살펴 본 우리 나라 상공업

: 우리 나라에 본격적인 화폐가 등장한 것은 고려 때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송나라 화폐의 영향과 산업의 발달로 화폐 주조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996년(성종 15년)에 건원중보라는 철전이 만들어졌으나 널리 이용되지는 않았다. 최초의 서양식 화폐는 고종 때 만들어졌으며, 나중에 전화국을 설치해서 독일에서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신식화폐를 만들었으나 이 역시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다.

한국상업사박물관.보부상 유물전시관.화폐박물관.조흥금융박물관.석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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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면서 일하는' 제2의 국군 - 향토예비군의 날

 

무장공비 격퇴와 자주국방을 위하여

: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사건에 대하여 어떤 군사적 보복이나 응징을 취하지 않으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공비의 남파가 계속될 것이고, 그래서 정부는 종래의 유엔 중심의 국방 태세에서 자주적 국방 태세로의 전환, 향토예비군 250만 명의 무장화, 무기생산 공장의 연내 건설 등 자주국방의 필요성과 결의를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정부는 1968년 3월, <향토예비군설치법시행령>을 제정, 공포하였고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1970년부터 4월 첫째 토요일에 기념식을 거행해 오고 있다.

옛날에도 예비군의 있었다

: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예비군과 유사한 군사조직이 존재했는데, 잡색군이 그것이다. 잡색군은 당시 군대 편제의 하나로 생원.진사.교생 등의 지방 유력자와 향리, 공사전 등의 역을 가진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병역의 의무가 없었으나 유사시에 대비한 예비군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잡색군의 조직이 이루어진 것은 1410년(태종 10년)경부터의 일인데, 그 활동은 미약한 편이었다.

 

건강은 부다 - 보건의 날

 

쑥과 마늘로 시작된 우리 보건의 역사

: 1973년나병의 날.세계보건일.국제간호원의 날.세계적십사의 날.구강보건일.귀의 날.약의 날.눈의 날 등을 통합하여 보건의 날로 정하였다. 일제시대에는 모든 의료활동이 경찰 행정으로 일원화되어 식민지 보건 정책이 규제 위주로 실시되었으나, 이 기간에 독일의 유럽 의학과 의료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한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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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의약박물관.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연세대학교 의학박물관

: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있어 왔던 한의원을 제외하고 맨 처음으로 등장한 약국은 1910년 서울 종로 3가에서 문을 연 인수당 약국이다. 이 약국의 주인은 유세환이었는데, 그는 구한말 시대의 유일무이한 한국인 약학자였다. 이들 약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우황청심환이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병원은 개항 1년 후인 1877년에 부산 동래에 세워진 제생병원이다.

 

아! 대한민국임시정부 -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 3.1 운동을 계기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는 날로 매년 4월 13일이다.

외교활동과 독립전쟁으로 본 임시정부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초기부터 미국 등 강대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이 무렵의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독립군 단체에 거의 일임하고 외교활동에 전념하다시피 했는데, 1919년 11월 예산의 경우 외교항목이 69.2%에 달할 정도였다. 국제정세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바탕을 둔 외교독립론 내지는 독립청원론은 제국주의 열강이 국가를 승인하고 지원해 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제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제국주의의 냉혹한 침략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임시정부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독립 전쟁을 위한 준비도 진행시켰다. 또한 상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 간부를 양성하였다. 임시정부가 추진한 대표적인 독립전쟁의 하나는 의열투쟁이었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여 군사 활동을 추진할 무렵,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임시정부는 OSS 측과 연합작전을 전개해 광복군 대원들에게 OSS 훈련을 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한미간에 연합작전이 선언됨으로써,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출발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써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은 실행 단계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임시정부.안창호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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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화요일, 그 해 4월의 함성 - 4.19 혁명 기념일

 

그해 4월의 기록

: 1962년 학생 단체에서 기념식을 거행토록 권고해 4.19 의거기념일로 지정되어 행사를 거행해 왔다. 그러나 1994년에 4.19 혁명기념일로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었고, 1995년에 4.19 묘지를 성역화해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4.19 혁명의 도화선,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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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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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10%는 장애인 - 장애인의 날

 

1994년에야 정부기념일로 지정되다

: 국민의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깊게하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행사를 하는 날로 4월 20일인데, 1994년에야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교통사고나 산업재해 등으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이 전체의 88%이며, 근래에는 매년 2만 명씩 증가 추세에 있다. 지체 장애의 경우에는 96%가 후천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장애인의 천국인 선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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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대할 때의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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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과학기술의 시대 - 과학의 날

 

일제시대 때부터 과학의 날이 있었다

: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의 발족일을 기념하여 1968년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하였다. 그런데 원래 우리의 과학의 날이 4월 21일이 아니라 그 이틀 전인 4월 19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1회 과학의 날 행사는 1934년 4월 19일에 거행되었다. 나아가 1935년 제2회 행사 때는 몽양 여운형이 실행위원장을 맡아 과학데이가 단순한 과학행사가 아니라 민족의 역량을 근본적으로 키우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과학대이는 당시의 신문과 방송이 다른 일을 제쳐 두고 일주일씩 '법썩'을 떨 만큼 대단했다.

빗살무늬토기 제조에서부터 엑스포 개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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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과학관.국립서울과학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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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만에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 정보통신의 날

 

우정총국 개설에서 유래

: 1956년 6월 4일 정부는 체신부 훈령으로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을 베푼 1884년 12월 4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매년 12월 4일을 체신의 날로 정하고, 이어 1967년 11월 27일에는 매년 5월 31일을 집배원의 날로 정했다. 그러나 1972년 7월 7일, 고종이 우정총국 개설을 명령한 날인 1884년 4월 22일이 근대적 체신사업의 창시일로 의미가 있다 하여 4월 22일을 체신의 날로 개정했다. 이어 1973년 1월 24일 유사한 성격의 행사가 연속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집배원의 날을 폐지하고 이를 체신의 날로 흡수 통합했다. 1994년에 주관부서가 체신부에서 정보통신부로 바뀜에 따라 1996년부터는 정보통신의 날로 명칭을 변경했다. 봉수제도는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12시간 정도면 서울까지 닿았으므로 당시로서는 비교적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처음 변방에서 보낼 때는 연기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해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날이 어두워져 봉화로 바뀌었다. 봉수대는 20리에서 40리 정도의 사이를 두고 주변에서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 설치했는데,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전국적으로 630개 소 정도가 있었다. 우역제도는 봉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생겨났다. 오늘날의 우편제도와 같은 통신방법이나, 옛날에는 당시로서는 가장 기동력이 빠른 말을 이용했다. 우역제도는 신라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일정한 우역의 통로가 짜여져 있었다. 고려 때는 더욱 발달하여  서울 개경에서 지방으로 뻗어난 우역의 길이 22개나 있었고, 역의 수는 모두 252개 소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 제도가 대체로 계승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개화기의 통신 수단

: 우리 나라에 전화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당시 전화라고는 궁중에 3대, 각 부에 7대, 평양과 인천에 2대, 도합 10대가 고작이었으며 궁내부(宮內府)에서 교환을 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는 전화에 대한 예절도 대단했다. 상투를 단정히 고쳐 세우고 전화기 앞에서 두 손을 머리 위에 쳐드는 읍(揖)을 하고 전화 딸딸이를 돌렸다. 상대방이 나오면 자신의 직함.품계.본관.성명을 다 말하고 상대 부서의 판서.참판.참의의 안부를 물은 다음 전화 받은 당사자의 부모들 안부까지 묻고서 안건을 말했다. 1903년 서울의 마포.남대문.영등포.서대문 등에 전화소라는 공중전화가 가설되었는데, 이 전화소 규칙의 항목이 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규칙은 무려 31조나 되었는데, 이 중 통화 중 불손하고 저속한 언사로 농담을 하거나 서로 언쟁할 때는 전화소에서 통화를 금지시키기 위해 감시자를 전화기 옆에 앉혀 두었을 정도였다. 초창기 전화기는 텔레폰을 음역, 던진풍이라 불렀다. 더러는 덕진풍이라고도 표기했는데, 전화가 생기면서 버릇없이 전화로 부모에게 문안을 하고 심지어 전화로 문상까지 하는 풍조가 생기자, 삼강오륜을 망치는 요물이라하여 '도덕을 닳게 하는 바람'이란 악명을 얻은 것이다. 1970년대 들어 전화 적체는 전화임대업이 번성하고 전화가입권을 담볼한 사채행위가 빈발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돼 온갖 사회적 병폐가 만연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청색백색 전화'인데 1970년 8월 31일 이후 청색전화는 매매가 불가능했지만 마음대로 양수양도가 가능한 백색전화는 전국적으로 45만 7,280대에 불과했었다. 이로 인해 백색전화의 프리미엄이 무려 20만원을 호가하는 등 전화시세가 한때는 서울 변두리 주택값과 맞먹는 엄청난 재산가치를 지닌 적도 있었다.

우정박물관.한국통신박물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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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있었기에 ... - 충무공탄신일

 

인물평으로 본 이순신

: 충무공의 높은 충의를 길이 빛내는 행사를 하는 날로 매년 4월 28일이다. 1967년 1월 6일에 4월 28일을 이충무공 탄신기념일로 고시했는데, 1973년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거북선과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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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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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 법금에서 헌법까지 - 법의 날

 

법의 날과 노동절의 뿌리는 하나

: 5월 1일은 법의 날이면서 국제노동절이다. 이 두 기념일은 노동자의 권익 신장과 법치주의 준수라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있으면서도 공교롭게도 1886년 미국의 시카고에서 벌어진 총파업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연유됐다. 법의 날은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8년에 공산진영의 메이데이에 대응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당시 우리 나라 국회와 법무부는 미8군 법무감실과의 협조를 거쳐 미국측의 입김대로 5월 1일을 법의 날로 정했다.

8초 법금에서 헌법까지

 

일꾼의 날에서 노동절까지 - 근로자의 날

 

메이데이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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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의 날에서 노동절까지

: 우리 나라에도 오늘날의 노동절이나 근로자의 날이라 할 수 있는 '일꾼의 날'이 있었다. 바로 음력 2월 초하루가 바로 일꾼의 날이었다. 대체로 이 날부터 농사일이 시작되기에 이 날만은 주인이 일꾼 대신 마당을 쓸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날 동구밖에서는 선배 일꾼들이 후배 일꾼들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성인식이 벌어진다. 이 시련을 겪고 나야만이 품을 팔 때 반품받던 것을 온품을 받게 되고 또 장가갈 자격을 얻는다.

 

카네이션에 담긴 어버이 날 - 어버이 날

 

어버이 날의 기원

: 어머니 날을 오늘날처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미국의 백화점왕 존 워너메이커였다. 1908년 5월 두번째 일요일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신의 백화점에서 어머니 날 기념행사를 벌였다. 기념품도 대량으로 만들어 팔았다.

어버이 날과 카네이션, 그리고 패랭이꽃

: 동짓날이 되면 우리 조상들은 어머니에게 버선 한 켤레를 정성들여 지어 바쳤다. 이를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 하는데, 그 버선을 신고 이 날부터 길어지는 햇살을 즈려밟고 그처럼 오래 살라는 장수 기원의 선물이다.

 

호국의 역군, 안보의 제2보루 - 재향군인의 날

 

6.25 와중에서 생긴 재향군인

: 우리 나라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에 부산에서 재향군인회를 창설했다. 1961년 5월에는 세계향군연맹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1965년 6월 8일에 있은 제49회 국무회의에서 세계향군연맹에 가입한 5월 8일을 우리나라 재향군인의 날로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나라의 재향군인은 1951년 1월 12일, 한국전쟁 상이장병들에 대한 제1차 명예제대를 실시한 것이 그 효시이다.

호군의 역군, 안보의 제2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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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다 - 스승의 날

 

존경받는 스승에서 '지식을 파는' 직업인에 이르기까지

: 해방 이전까지 스승을 위한 날이나 행사는 없었다. 1963년에 들어서야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J.R.C)가 국내 최초로 5월 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1965년부터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로 변경하여 각급학교 및 각급단체가 주관이 되어 행사를 실시하여 왔다. 1973년 정부의 서정쇄신 방침에 따라 사은행사를 규제하게 되어 스승의 날이 폐지되었으나, 1982년에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조성을 위하여 다시 부활될었다. 선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사.박사.사부.사유.사장.훈장 등은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의 교육 대상자의 신분.지위와 관련된 것이다. 즉, 국왕의 스승은 사.사부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국가에서 설치한 교육기관에 소속되어 교육활동을 하던 사람들고 박사.사장.사유.훈장 등으로 일컬어졌는데, 이 가운데 박사는 삼국.고려시대부터, 사장.사유는 조선시대의 중앙교육기관인 성균관.사부학당에서 훈장은 조선 후기 지방에 설치되었던 서당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훈장이야기

: 스승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당나라 때 [교계율의]라는 불교책에서 처음 나왔다. 조선시대의 선생은 교수.훈장.접장.훈도 등으로 불렸으며, 품계는 큰 고을에서 육품으로 군수보다 이품이나 낮고 작은 고을에서는 가장 말단직인 참봉과 같은 구품에 불과했다. 봄과 가을에는 산에 가 싸리나무 한 짐 져다 훈장집에 갖다 드리는데, 명분은 그 싸리 회초리로 자식놈의 종아리를 자주 때려 사람 만들어 달라는 체벌용 맷감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싸리나루를 모두 맷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남은 싸리로 빗자루를 엮어 장에 내다 팔아 훈장은 본의 아니게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싸리비는 당연히 서당에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상식이었고 싸리비 값은 깎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 밖의 훈장의 부수입으로는 '눈물 값'이라는 뜻인 누대(淚代)라는 게 있었다. 온 마을이 문맹인지라 객지에 나간 아들이나 딸네로부터 편지가 오면 이를 읽어 줄 사람은 훈장 밖에 없기에 편지를 들고 서당에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답장도 할 길이 없어 으레 훈장의 손을 빌려야 했는데, 그때마다 눈물 바다가 되곤 했다.

 

1980년의 상처, 그 해 5월 - 5.18 민주화운동기념일

 

5.18은 범국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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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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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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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에서 어른으로 - 청년의 날

 

성년의 날과 관례

: 1973년과 1974년에는 4월 20일에 성년의 날 행사를 거행하였으나 1975년부터는 청소년의 달인 5월에 맞추어 날짜를 5월 6일로 변경하였다. 이후 1984년에 다시 5월 셋째 월요일로 성년의 날을 변경했다. 옛날의 우리 사회에는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의식과 절차가 있었다. 남자에게는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고 여자에게는 쪽을 지고 비녀를 꽂아주는 절차다. 그게 관례(冠禮)다. 그러나 관례는 주로 양반가에서 유행되었고, 일반서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관례를 치러 어른이 되는 사람은 최소한 어른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절 소양을 갖추어야 했는데, [효경]이나 [논어]정도는 알아야 했다.

성인 신고식

: 옛날 중국 문헌들을 보면 삼한의 소년들은 등의 살가죽을 뚫고 굵은 새끼를 꿰어 그 한 끝에 한 길 남짓의 통나무를 매어 꿀어다가 집을 짓는 고행을 거쳐야만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 바다의 날

 

한반도와 바다, 그리고 배

: 바다의 날은 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달의 마지막 날을 선택해, 1996년 5월 30일에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 해양을 둘러싼 국제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1994년 11월 유엔해양법 발효로 해양 자유이용시대에서 바다 분할시대로 전환되었고, 선진국은 전통적으로 높은 해양 중시사상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날 제정 등 해양사상 강화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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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지구를 위한 노력 - 환경의 날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환경의 날 제정까지

: 우리 나라가 경제개발이 가속화된 1960년대 이후부터 갖가지 환경분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 최촐 뚜렷하게 제기된 환경문제는 공단지역의 오염문제였다. 일련의 환경보호를 위한 노력은 1996년에 접어들어 매년 6월 5일을 환경의 날로 제정하여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였다.

하나 뿐인 지구를 위한 인류의 노력

: 1804년에는 스코틀랜드 파슬리 지역에서 최초로 상수여과장치가 개발되어 급수시설에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수인성 전염병이 크게 줄었다. 1880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서는 수질 보호를 위해서 최초로 내수면 수질보호법이 제정되었고, 1899년에는 하천 및 항만오염방지법이 미 연방차원에서 제정되었다. 1889년 영국의 런던시에는 하수를 최초로 침전 처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하수처리의 기원이었다. 지구환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최초의 세계회의인 UN인간환경회의가 1972년 6월 5일에서 6월 16일까지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113개 국 국가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UN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하고 세계환경의 날 제정 및 UN 내 환경전문기관인 UNEP 창설 등을 결정하였다. 3월 23일은 기상의 날인데, 기후변화협약은 이 날과 빼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기후변화협약은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개발과 성장을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 협약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이해가 크게 엇갈려 있다. 지구의 날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대규모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자 위스콘신주 출신의 넬슨 상원의원이 1970년 4월 22일 환경문제에 관한 범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지구의 날을 처음으로 선언한 것에서 유래한다. 5월 31일은 세계해양의 해 기념을 위해 제정된 바다의 날이다. 세계해양의 해는 1994년 12월 유엔총회의결의로 1998년을 세계해양의 해로 선포한 데서 유래되었다. 9월 16일은 오존층 보호의 날이다. 유엔은 오존층 파괴물질에 대한 몬트리올 의정서 서명일인 1987년 9월 16일을 기념하고자 1995년 1월 23일에 '세계오존층 보호의 날'로 선포하였고, 유엔총회는 모든 회원국들이 국가 차원에서 몬트리올 협약의 목적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 특별한 날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