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달력 속에서 만나는 숨은 우리 날찾기 2], 김선섭, 씨앤드씨그룹, 2000.

바람과 술 2008. 6. 15. 06:20

2008년 2월 20일 읽음.

 

제1부 공휴일

 

공휴일 - 공휴일은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휴무하기로 정한 날로, 4대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중 식목일.어린이날.현충일도 포함된다. (* 식목일 왜 안 쉬는 거야 ㅠㅠ )

 

식목일 - 한그루의 나무로 울창한 숲을 ...

 

인간적인 식목에서 경제적인 조림으로

: 식목일은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677년(문무왕 17년) 2월 25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조선 성종이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의 선농단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고 왕실의 의례나 제례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임금이 농사를 짓던 토지를 직접 논갈이한 날인 1343년(성종 24년) 3월 10일에 해당하는 날이기도 하다. 계절적으로 청명을 전후하여 나무 심기에 좋은 시기이므로 1949년에 공휴일 및 식목일로 지정하였다. 그 뒤 1960년에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폐지하고, 3월 15일을 사방의 날로 대체 지정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1961년에 다시 식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공휴일로 부활되었고, 1982년에 기념일로 지정되어 산림녹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옛날의 식목행사는 오늘날의 식목일처럼 나무를 심기에 좋은 청명.한식에 행하여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조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조선왕조 때까지 가장 큰 규모의 식재조림은 조선 정조와 순조대에 걸쳐 이루어진 화산식목(花山植木)이다. 그러나 일련의 조림 역시 긴 안목으로 앞날의 목재 소요량에 대비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조림은 아니었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조림은 20세기 초반에야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림을 비롯한 모든 산림의 대부분이 일제의 과숙림 정리벌채라는 명목에 의해 황폐화되는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도 산림의 황폐는 여전했으나, 1945년 첫번째 기념식수 행사에 이어 1946년부터 매년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해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국민들이 산림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1970년대 후반부터 농어촌의 연료가 석유 등 화석연료로 대체되면서 산림녹화는 급속히 진전되어 왔다.

송충이와 호랑이로 본 산림

: 80여 년에 걸친 몽고 지배하에서는 일본 원정을 위하여 1274년부터 1279년까지 전함 약 3,000여 척을 건조하기 위하여 강원도 오지의 임목까지 벌채하는 등 충렬왕 재임 당시에 전국적으로 70%의 산림이 벌채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도한 산림 벌채는 결국 엄청난 풍수해로 이어졌다. 고려사에 보면 고려시대 약 500년간 발생한 183회의 풍수해 가운데 말기 100년 동안 전체 풍수해의 절반이 있었고, 고려왕조 멸망 전 30년간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가뭄과 풍수해가 꼬리를 물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도 병자호란.임진왜란 등의 전쟁으로 인한 산림 파괴와 인구 증가, 그리고 세수 증대를 위한 무리한 산지 개간으로 산림 파괴는 심각하였다. 그래도 조정에서는 조림은 생각도 못하고, 다만 국가에서 쓸 목재의 고갈을 우려해 소나무를 유독 보호하는 정책을 펼치기게 이르렀다. 때문에 전국적으로 소나무 단순림이 우리 산림의 주종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송충이가 서서히 문제가 되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3년(태조 2년) 2월에 개성 송악산에 송충이에 의한 큰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은 뒤 매년 송충이의 피해가 더욱 심해져 조선시대 내내 송충이의 피해를 논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급기야 1516년(중종 11년) 5월에 이르러서는 송충이의 피해를 나라의 큰 재난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광릉수목원과 산림박물관.진주 남부산림박물관.안면도 산림박물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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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일이었던 식목일이 너무 그립다)

 

석가탄신일 - 부처님 오신날

 

호국불교와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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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과 연등

: 우리 나라에서 정확히 언제부터 연등회를 실시했는 가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 않으나 중국에서 정월 14~16일의 3일간에 걸쳐 실시한 것이 고구려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조선 말기 이후 각종 외래종교가 유입되면서 연등행사는 불교계의 연례행사로 위축되어 각 사찰 단위행사에 그쳤으나, 1975년에 석가탄신일이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불교계 전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제등행렬이 행해지고 등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통도사 송보전시관.법주사 성보전시관.미륵사지전시과.목아박물관.한국불교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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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와 어린이 날

: 어린이 날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1923년 방정환을 포함한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 1일로 정하였다가 1927년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 5월 5일로 정하여 행사를 해왔으며,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하였다가 1975년부터는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방정환과 어린이 날

: 첫번째 어린이 날 행사는 1923년 5월 1일에 있었는데, 천도교소년회.불교소년회.반도소년군 등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행사를 주최했다. 오후 3시 천도교회당에서 기념식과 선언문이 낭독되고 선전문이 배포되었다. 그때 선포된 소년운동의 기초 조항은 아래와 같다.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야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許)하게 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야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3.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실제 '어린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소파 방정환이다. 일설에는 1920년 8월 25일자 [개벽] 제3호에서 소파가 잔물이란 필명으로 외국 동화인 [불켜는 이]를 어린이 노래로 번역해 소개한 것이 효시라고 한다. 그후 어린이 날은 5월 1일이 메이데이(노동절)과 중복되므로 5월 5일로 옮겼다. 어린이 날을 한국처럼 온 국민의 축제로써 성대히 지내는 나라는 없다. 어린이 날은 우리 나라의 자생적인 민주 이데올로기에 의한 공휴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성어린이 박물관.LG사이언 스쿨.어린이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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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영혼과의 대화

 

현충일은 6월 6일

: 1953년 휴전이 성립된 뒤 3년이 지나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정부는 1956년 4월 매년 6월 6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현충기념일 행사를 갖도록 하였다. 1956년 국무회의가 현충일을 6월 6일로 잡은 것은 이달에 6.25전쟁이 일어났기에 영령을 상기하기에 알맞다 해서 '6'이 겹친 날을 잡았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굳이 6월 6일과 전몰장병의 위령을 결부시킨다면 우리 역사 기록상 최초로 조정에서 장병의 뼈를 거두어 집에 봉송함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한 고려 현종 5년 6월 6일을 연상할 수도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현충일은 여제(勵祭)라 하여 청명(淸明)날과 7월 15일, 그리고 10월 초하루에 세 차례에 걸쳐 전국의 각 주현(州縣)에서 일제히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자손을 못 두고 죽은 혼백을 불러 모시는 일환으로서 전몰장병을 위령했기에 독립된 현충은 아니었다.

묘비명으로 되새겨 보는 현충일

: 묘비명이 새겨진 석판은 대령 이하 장교와 사병 1인에게 할애된 한 평의 땅에 조성된 것으로 60*40cm 크기에 불과하다(국립현충원).

나라마다 현충일이 있다

: 미국은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에 메모리얼데이 기념식을 갖는다. 매년 메모리얼데이 행사가 거행되는 곳은 알링턴 국립묘지 및 각 지역공원 등이다. 일본에서는 2차대전 이후 현충일에 해당되는 공휴일은 폐지되었으나, 매년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에 갖가지 전몰자 추모행사가 전국에서 실시된다. 도쿄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부도칸에서 거행되는 전국 전몰자 추도식은 일왕과 총리를 비롯 각게 요인이 참석하는 최대 추모행사이다. 유럽은 20세기에 세계대너을 두 차례나 치른 탓으로 전몰자 수도 많고 전쟁 관련 유적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의 현충일처럼 국민 전체가 전몰장병들을 애도하는 날은 대게 11월에 있다. 인류 최초의 세계전쟁인 1차대전의 종전협정이 조인된 1918년 11월 11일을 기념하고, 1.2차 대전 전사자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에는 별도로 정해진 현충일이 없다. 그들을 기리는 현충일은 없으나 공산당창건일인 7월 1ㅣ일, 인민해방군 창건기념일인 8월 1일, 일본군이 항복한 8월 15일, 건국기념일인 10월 10일 등 국가경축일에 반드시 인민영웅들을 애도하고 그들의 높은 뜻을 기리는 전국적인 행사를 벌인다.

국립현충원.국립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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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탄신일 - 고난의 역사에서 국민의 축제일로

 

성탄절의 풍습과 유래

: 기독탄신일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 이교도들의 축제에서 연유되어 중세 이후부터 교회가 예술의 탄생일로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기독탄신일을 12월 25일로 정하고 축제화한 것은 4세기 중반이며, 동방교회는 예수가 요단가에서 세례를 받은 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지킨 적이 있다. 예수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인 것은 수태로부터 아홉 달을 계산하여 나온 날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기독탄신닐을 법정 휴일로 인정한 것은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뚱뚱한 몸에다 마음씨 좋게 생긴 붉은 얼굴에 새하얀 수염이 가득하고 빨간색 외투와 삼각형 모자, 굵은 가죽벨트를 걸치고 있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은 1931년 미국의 코카콜라사가 처음 만들어낸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산타는 미국 전역에서 상업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 푸른색 혹은 보라색 외투를 걸치고 백화점 안내원.통신판매원.샌드위치맨 등의 역할을 하다 마침내 코카콜라사에 의해 그 모습이 통일되어 코카콜라가 전세계로 퍼지면서 그 모습도 함께 퍼지게 된 것이다. 크리스마스 카드는 1843년 영국에서 처음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캐롤은 본래 불란서 말 Carole에서 온 말로 주로 중세 불란서에서 둥근 원을 만들어 춤을 추었던 원무(圓舞)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 원무는 동지때 가졌던 축제에서 사용한 이교도들의 무곡이었다. 그러므로 캐롤은 춤출 때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말이어서 캐롤이 모두 크리스마스와 반드시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그 음악이 캐롤인지 아닌지는 곡의 가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적 형식으로 판단하였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축일인 12월 24일에 '낙원의 나무'를 세워 에덴동산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기독탄신일에 관한 풍습과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만만치 않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오면 간단하게 X-MAS라고 쓴 것도 볼 수 잇다. 여기에서 X자는 영어 알파벳의 X가 아니다. 헬라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자인 '크스'자로서 이 뒤에다 MAS자를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표기는 X-MAS로 할 수 있지만 읽을 때에는 반드시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한다.

우리의 크리스마스 변천

: 우리 나라에서 크리스마스가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49년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크리스마스는 축제일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루 쉬는 날 정도에 불과했다. 크리스마스가 오늘날처럼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의 축제로 자리잡은 것은 195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통행금지를 해제하면서부터이다. 크리스마스 축제 열기는 1950년대 중.후반에서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절정을 이루었다가 박정희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고비를 맞았다. 1975년에는 오일쇼크로 인해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장식물을 일체 금지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크리스마스의 과도한 열기를 누그러뜨린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982년의 야간통금 전면해제였다. 연중 내내 밤에 통행이 가능해짐에 따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열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은 것이다. 1960년대 크리스마스 선물은 당시의 빈곤을 반영하듯 여타 명절 때의 선물과 마찬가지로 생필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선물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1965년의 크리스마스에는 당시 860원이던 양철통에 담은 6kg짜리 설탕이 큰 인기였다. 1973년의 크리스마스 히트상품은 2,000원 내외의 장미표 와이셔츠와 1,200원에서 3,500원까지 하던 미원.모포.화장지.내의도 인기가 있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레코드와 카세트 테잎을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고, 캐럴 음악이 담긴 테이프는 부담이 없는 선물이었다. 1990년대 들어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패션상품들이 선물의 대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국제성서박물관 외

: 우리 나라에서 교회가 창설된 것은 1784년 이승훈이 중국의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정약전 등과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것이 그 효시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801년 대박해를 거치며 거의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교회 재건에 힘쓴 결과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북경교구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가 처음 교회를 세운 것은 1884년 황해도의 솔내에서 서상륜에 의해서였다. 그 뒤 각 교파에 따라 제각기 교회가 세워졌는데, 교회가 하나의 제도적인 조직으로 구체화된 것은 1884년 장로교회가 처음이었다.

 

제2부 법정기념일(2)

 

법정기념일에는 기념행사를 가짐으로써 그 의의를 높이며 새로운 발전과 성숙을 도모한다. 법정기념일 의식과 행사는 엄숙하고 검소하게 행하는데, 정부에서 주관하는 법정기념일은 현재 36종이 있다.

 

6.25사변일 - 우리 민족 모두가 패배자인 전쟁

 

기습남침에서 휴전까지

: 6.25기념일은 휴전직후 국방부와 문공부 주관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해오다 1973년에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모두가 패배자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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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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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날 - 애환 싣고 달려온 철마 100년

 

우리 철도의 역사

: 1825년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부설된 것이 세계 최초의 철도이며, 대중용 철도는 1829년 리버풀과 맨체스터 간의 철도개업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1830년 볼티모어와 일리코트 간에 개통된 것이 그 효시이다. 동양에서는 1853년의 인도를 선두로 일본이 1872년에 동경과 요코하마간에 설치했다. 우리 나라 철도의 역사는 1889년 9월 18일 서울 노량진~인천 사이 33.2km에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경부선 철도건설로 대륙침략의 발판을 삼고자 했던 일본은 철도건설부지 측량 때 한국인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외국에 보낼 새를 사냥하겠다고 우리 정부를 속인 일본인들은 측량하는 것을 우리 국민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사냥할 때 접근하면 위험하다며 측량을 실시하는 곳에 금줄을 매고 붉은 깃발을 세워 얼씬도 못하게 했다. 열차의 스피드 시대를 연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특급열차인 '해방자호'가 운행되면서부터이다. 시속 50km로 시작된 열차의 스피드 시대는 지난 1955년 통일호가 운행되면서 본격화됐다.

철도가 이 땅에 들어오던 날의 풍경

: 경인선 개통 당시, 기차 손님이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기차 요금은 1마일당 2전 오리였다. 당시에는 장정이 30마일 정도 걷는 것은 예사였는데, 그것을 기차 요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75전이나 된다. 그 무렵 주막에서 파는 밥 한끼가 5전이니까, 세 끼를 합치면 15전에 하루면 닳아 없어지는 짚신 한 켤레 값인 10전을 합해, 25전이면 30마일을 하루에 갈 수 있었다. 즉 같은 거리를 기차요금의 1/3에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철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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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 - 6.25때 우리 국군의 38선 돌파일

 

의병 해산에서 해외파병까지

: 현행 국군의 날은 지난 1956년 9월 21일 대통령령에 의해 제정되었다. 육해공 3군 해병대가 각자 창설기념일에 행사를 치러 물적.시간적 낭비가 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이를 통합한다는 것이 제정 취지였다.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선정된 것은 한국전쟁 중인 지난 1950년 북진 중인 연합군 중에서 국군 보병 3사단 23연대 3대대가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국군은 미군의 작전 통제를 받고 있어서 독자적인 작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23연대 3대대는 맥아더 장군이 38도선 돌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독자적인 작전을 벌였었다.

신식군대와 국방경비대 시절

: 최초의 신식훈련은 1882년 세검정 너머 평창에 이영(二營)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초록(草綠)군대로 불렸던 이 신식 군대는 양반 자제들인지라 종들을 데리고 입대를 하였고, 종들이 업고서 제식훈련을 받기도 했다. 또 중인 출신인 교관들이 훈련시켜면서 양반들에게 반말을 쓴다고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시작됐다. 군정 당국은 조선총독부의 행정기루를 인수, 일반행정에 필요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한 다음 군대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미군정청은 영어에 능통한 만주군 출신의 원용덕과 함께 본격적인 조직업무를 벌였다. 이에 따라 설치된 것이 군사 영어학교였는데, 1945년 12월 5일에 문을 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미군정 당국은 군대 창설을 보류하고 군대조직 대신 미점령군의 경비임무를 도와 줄 경비대를 조직키로 했다. 미군정청은 곧이어 경비대 창설 과정에 필요한 만큼의 장교인원을 그때 그때 임관, 확보해갔다. 군사영어학교가 1946년 4월 30일 문을 닫을 때까지 이런식으로 임관된 장교는 110명으로 모두 군대 창설의 역군들이 되었다.

육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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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날 - 왜 노인의 날인가?

 

노인의 날에 담긴 뜻

: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중순, 무장항일투쟁 본거지의 하나였던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을 중심으로 노인단이라는 무장독립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노인단의 창립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노인동맹취지서를 통해 그 창립 취지를 대내외에 밝혔다. "독립을 하지 못하면 해외에서의 각고 끝에 집이나 전답, 금전을 마련하여 자손에게 남겨주거나 학문과 기예를 전수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의 노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므로 노동동맹단을 구성한다." 199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45차 유엔총회가 10월1일을 국제노인의 날로 결의하자, 우리도 1997년 5월 9일에 정부 주관의 기념일로 지정했다. 노인의 날은 1997년 10월 2일 동대문 운동자에서 첫 기념식을 가짐으로써 우리 나라 정부기념일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노인 우대문화

: 우리 나라 노인복지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노인복지법은 정부 수립 이후 상당기간 지연되어 오다 1981년에 확정, 공포되었다. 노인헌장은 노인의 날이 제정되기 이전인 1982년 5월 8일 어버이 날을 기해 공포되었다. 노인헌장 1. 노인은 가정에서 전통의 미덕을 살려 자손의 극진한 봉양을 받아야 하며, 지역사회와 국가는 이를 적극 도와야 한다 2. 노인의 의식주에 있어서 충족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3. 노인은 심신의 안전과 건강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4. 노인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5. 노인은 취미오락을 비롯한 문화생활과 노후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한글날 -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바른 소리

 

훈민정음에서 한글까지

: [훈민정음] 원본의 말문에 적힌 '정통(正統) 11년 9월 상한(上瀚), 즉 세종 28년 9월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 되어 이 날을 한글날로 정하였다(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1926년 11월 4일 오늘날의 한글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매년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가행해 왔고, 1928년에 그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한글 문법과 맞춤법 연구에 일생을 바친 주시경이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한글

: 1994년 6월 디스커버리지에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이며 그 독창성과 기호배합의 효율성면에서 특히 돋보인다고 찬사를 보냈다. 우선 자음과 모음이 쉽게 구별된다는 점을 꼽았다. 또 자음이 입술.입.혀의 위치를 확실히 해준다는 점, 그리고 28개 자모(현재는 24자모)가 수직 수평의 조합으로 반듯한 사각 형태를 이루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는 점을 직시했다. 글자의 모양도 당시 동양 과학사상의 핵심을 이룬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초성과 종성은 자음이고, 중성은 모음이다. 모음을 만드는 기본은 음양의 조화로 만들어진 우주의 3요소라 할 수 있는 하늘과 땅과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대왕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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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의 날 -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다

 

옛날 스포츠 이야기

: 체육의 날은 국민 체력의 향상을 위한 각종 체전가 아울러 올림픽 이상을 구현하는 날로 매년 10월 15일이다. 1962년 체육진흥법에 의거해 1969년에 체육의 날로 지정되었다.

체육강국으로 자리매김하다

: 1894년의 갑오경장을 전후해 근대체육이 구미와 일본으로부터 도입되고, 1895년 오늘날과 같은 학교가 속속 설립되면서 학교체육이 활성화되기 시작해 고종황제와 황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배일사상에 따른 집단적 의거를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도입 초기부터 날로 확대되어가던 연합운동회가 폐지되고, 심지어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인 윷놀이 대회까지 탄압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림픽 기념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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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날 - 우리 문화에도 역사가 있다

 

우리 문화의 독창성

: 문화의 날은 1970년대에 들어 문화창조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 공포하면서 그 법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 국민 문화향유권을 신장하는 계기를 조성하고 방송, 잡지, 영화 등 대중매체의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하는 문화예술진흥에 관련된 행사를 하는 기념일이다. 매년 10월 20일로 1973년에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군화와 양키문화에서 카오스까지

: 1950년대는 군화와 양키문화였다. 1960년대는 가히 혁명과 재건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영화가 문화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는 유신과 청바지.통기타.생맥주의 시대였다. 시대의 좌절은 깊어만 갔고, 당대 청년문화는 저항이어야 했는데도 한쪽에서는 다른 양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1980년대의 유행어는 '민중'이었다. 1990년대의 문화지형도는 카오스 그 자체이다.

그곳에 우리의 문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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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날 - 건국.구국 경찰에서 호국.민주 경찰까지

 

경무국에서 경찰청까지

: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국립경찰 창설일로 기념해오다 1957년부터 경찰의 날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호랑이와 귀신에 대적해야 했던 옛날의 경찰

: 옛날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이 말은 옛날의 경찰인 포도청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2년(태조 1년)에 순군만호부를 둔 것이 최초의 경찰조직이라 할 수 있다. 개화기 때까지만 해도 경찰의 가장 큰 임무는 두 가지 공포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경찰인 순검(巡檢)을 뽑을 때는 항시 호랑이와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채용했다. 갑오경장(고종 31년) 때는 좌.우 포도청을 합쳐 경무청을 세우고 최초로 양복에 대검을 휴대하고 근무하였다.

경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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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합일 - UN의 수혜국에서 기여국이 되다

 

평화를 위한 태동한 국제연합

: 1950년에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나, 1976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한국, 수혜국에서 기여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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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의 날 - 자린고비 정신에서 저축까지

 

저축에도 역사가 있다

: 국민저축 정신을 앙양시키고 저축, 보험 및 증권사업의 증진을 위한 행사를 하는 날로 매년 10월 마지막 화요일이다. 1964년에 처음 제정되었다.

자린고비와 저축

: 자린고비란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지방을 쓸 때 사용하는 종이를 아끼고자 지방을 기름에 절여 두고 쓴 데서 유래했다. 절약의 습관은 해방 이후에도 남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좀덜이쌀을 들 수 있다. 좀덜이쌀은 끼니도 잇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끼니 때마다 쌀을 한 줌씩 덜어 모아 이듬해 보릿고개에 대비하는 한 방법이었다.

합리적인 저축과 소비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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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날 -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독립운도에서 민주화운동까지

: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자율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한 날로, 매년 11월 3일이다. 1953년에 지정되었으나, 1973년에 일시 폐지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1984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학생의 날의 의미

: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이었다.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민족차별교육에서 발단이 되어 민족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농업인의 날 - 농자천하지대본

 

농업인의 날은 '토월토일'

: 1996년 5월, 권농의 날을 폐지하고 11월 11일을 농업인의 날로 지정했는데, 이는 농민은 흙에서 나서 흙을 벗삼아 함께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흙토(土)'자가 겹친 '토월토일(土月土日)', 한자로 11월 11일을 나타낼 수 있는 날에서 유래했다. 또한 이 때가 모든 영농을 마치고 풍년제를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는 점도 작용했다.

우리 나라 농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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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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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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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의 날 - 순국선열의 의미

 

을사늑약에서 해방까지

: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위훈을 기리는 행사를 하는 날로 매년 11월 17일이다. 임시정부시절부터 추모행사를 거행해 왔으나, 1997년에야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순국선열의 의미

: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순국한 사람으로, 그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순국한 선열의 수치는 기록상 약 9만 6,000여 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헌상의 수치일 뿐 실제로 순국한 선열은 30여 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순국선열의 날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의 치욕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근대민족운동과.일제침략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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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날 - 메이드 인 코리아

 

수출보국, 우리는 해냈다!

: 1964년 8월 26일 국무회의는 수출 누계실적이 1억 달러가 되는 날을 수출의 날로 하기로 의결하였으며, 이 의결에 따라 그 해 11월 30일에 연간 수출누계가 1억 달러에 이르자, 당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고 대통령 참석하에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개성상인, 그리고 '메이드 인 코리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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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보호의 날 - 소비자는 왕이다

 

일본상품 불매운도에서 소비자 시대의 도래까지

: 우리 나라 소비자보호운동은 1950년대를 효시로 1960년대 태동기, 1970년대 성장단계를 거쳐 1980년대에 정착단계에 이르렀고, 1990년대 성숙기 및 전환기를 맞고 있다. 소비자운동 유형도 1950년대가 소비자 계몽형이라면 1960년대는 정보제공 및 공동구입형, 1970년대는 고발형, 1980년대는 상품테스트 중심형, 1990년대는 시민주권운동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 소비자보호운동은 1955년 대한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선두로 하여 각종 여성단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정부가 소비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던 1977년을 전후하여 외국으로부터 품질하자에 대한 클레임이 쏟아지면서 일방적으로 기업이 지배하던 시장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자각이 싹 트면서부터이다.

소비자는 왕이다

: 1960년대에는 선진 각국의 소비자 단체에 의하여 국제소비자연맹(IOCU)이 창립됨으로써, 소비자 보호운동의 국제적 협력 기반을 마련하였다.

 

국민교육헌장선포일 - 두 얼굴을 가진 교육헌장

 

대만과 독일에서도 부러워 한 교육헌장

: 국민교육헌장선포일을 기념하고 국민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교육 유공잘르 장학행정을 통해 발굴 포상함으로써 그 공을 기리고 교육쇄신과 발전의 기품을 진작시키기 위한 날로 매년 12월 5일이다. 1973년 정부기념일이 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의 두 얼굴

: 국민교육헌장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것은 국민교육헌장의 좋은 측면 못지 않게 박정희 대통령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초헌법적 장치의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역기능 때문에 국민교육헌장은 국회.학회.언론계에서 1978년부터 1995년까지 20여 회에 걸쳐 그 존폐문제가 제기되어왔으나, 1995년 12월에 국민교육헌장의 공식행사를 폐기하고 새로운 교육장정의 제정 여부는 연구 검토하기로 결정되었다.

 

세계인권선언기념일 - 민본주의에서 인권법 제정까지

 

시민혁명에서 국제인권규약까지

: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권리에 대한 세계인권선언의 숭고한 이념을 드높이고 국민의 인권의식을 고취하는 날이다.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일 제정 권고에 따라 1973년부터 12월 10일로 그 기념일을 정했다.

민본주의에서 인권법 제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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