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천하의 대세는 나뉘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치고, 합친 지 오래면 나뉘어지는 법이다.
한국어판 서문
서문 - 장강은 동으로 흐른다
조조.유비.손권이라는 3대 세력, 혹은 3대 집단은 동한 말년에 군벌이 혼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전하고 성장했습니다. 즉 위.촉.오가 정립한 상황은 그들이 건국하기 전부터 이미 기본이 형성되어 있었지요. 위.촉.오는 역사적 사명을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코 남에게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대개 승리자의 입장에서 쓰는 것이고, 민간의 역사서 편찬 역시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거나 한쪽의 편견에 빠지기 쉽습니다. 위.촉.오 삼국이 멸망하고 나자, 역사서의 기록은 이설이 분분했고 학자들의 견해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역사 속 인물들은 세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사에 기록된 얼굴로, 일반적으로 '역사상의 이미지'라고 부릅니다.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역사상의 이미지'가 '역사의 잔상'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소설과 희극을 포함한 문예 작품 속의 얼굴입니다. 세 번째는 일반 백성들이 주장하는 모습으로, 일반 민중들의 마음속에 있는 얼굴입니다. 문학상의 이미지와 민간의 이미지의 형성도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미지는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가짜 이미지에서 진짜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삼국의 역사는 사실 세 가지의 이미지, 즉 역사, 문학, 민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정설'은 이 두가지, 즉 진수의 '지(志)'와 배송지의 '주'에 근거합니다. 역사에서 또 세 가지의 독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옛사람의 입장에 서서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견해'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으로 '시대적 견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는 보는 '개인적 견해'입니다.
조조, 채찍을 휘두르다
제1강 조조의 진실과 거짓
조조는 역사상 성격이 가장 복잡하고, 이미지가 가장 다양한 사람일 것입니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간사하고 교활하면서도 솔직하고 진실하며, 활달하고 큰 아량을 지녔으면서도 이런저런 의심이 너무나 많고, 도량이 넓고 크면서도 한없이 좁았습니다. 그야말고 대인의 풍모와 소인의 얼굴을 가졌으며, 영웅의 기개와 아녀자의 감정을 가졌고, 염라대왕의 성깔과 부처님의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그 모든 것이 그의 몸에 붙어서 조금도 모순되지가 않으니 이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실제로 조조는 진실했으며, 꾸밈이 없었습니다.
제2강 간웅의 수수께끼
조조의 본래 성은 조씨일 수가 없습니다. 조라는 성은 그의 부친인 조숭이 조등의 양자가 되면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조숭과 조등은 전혀 혈연 관계가 없었습니다. 동한 말년에는 사회에서나 관계에서나 출신 가문을 매우 중시하였으므로, 조조가 비록 이런 풍조를 증오했다고 해도 정치상의 필요에 의해 자화자찬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조조는 환관 가문에서 출생하고 성장했습니다. 조조는 환관 양자의 아들입니다. 당시로서는 출신이 좋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은 당연히 좋았을 것이며, 적어도 쓸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조가 받은 가정교육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조조가 어렸을 적에 그의 양친은 모두 그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합니다. 부모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가정 형편은 좋았으므로 조조는 곧 '문제아'가 됩니다. 그런데 조조를 매우 좋게 보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당시의 태위였던 교현입니다. 조조가 가장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동시에 사람들의 질시와 원망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은 그가 진실을 말하는 점입니다.
제3강 능신의 길
삼국시대 당시에 가장 유명한 인물 감상자이자 평론가인 허소는 일찍이 조조를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라고 평했습니다. 조조는 사실 능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한 영제 희평 3년(174년), 20세의 조조는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관을 맡게 됩니다. 한 사람의 효렴으로 추천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관리가 될 자격을 가졌다는 의미로, 지금으로 치면 일정한 학력을 갖춘 사람이 공무원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대의 관제에서 현령 아래에는 승과 위가 있는데, 승은 민사를 처리하고, 위는 치안을 맡습니다. 젊은 조조는 한 가지 이치를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치란 능신이 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첫째는 시세를 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정국을 보아야 합니다. 셋째는 군주를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치세이고 명군일지라도 군주의 흥미와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189년 동탁이 도성으로 들어온 후,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했고, 이때부터 천하는 대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난세의 영웅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무력을 가진 자는 누구나 왕입니다. 중앙 정권이 통제력을 상실한 뒤, 군대를 보유하고 자중하던 지방관들은 한 지역에 할거하는 후왕(侯王)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지방 자치와 군웅 할거, 제후 겸병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조는 더 이상 '치세의 능신' 따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4강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따르랴
조조는 연주목을 대리하자, 병사를 거느리고 황건적과 싸웁니다. 이때 조조의 군사력은 황건적만 못했습니다. 황건적은 전사 30만에 종군한 인원까지 더하면 모두 100만이었는데, 조조는 겨우 수천 명에 그나마 노련한 병사는 적고 신병이 많아서 전 군대가 모두 두려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조조는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몸소 장수들과 사병들을 돌아보며 상벌에 대한 규정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황건적에게는 포로를 우대한다는 정책과 투항 이후의 살길에 대하여 선전했습니다. 그런 다음 교묘하게 적을 기습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자, 결국 황건적은 조조에게 투항했습니다. 조조는 투항한 황건적 중에 비교적 전투력이 있는 자들을 대오로 편성하여 '청주병'으로 부릅니다. 조조는 연주목을 대리하면서 근거지를 얻었고, 청주병을 재편하여 전투 부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직면했던 심각한 문제는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며 어떻게 배치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196년(헌제 건안 원년)에 모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시행하기 시작합니다. 둔전제는 매우 수지가 맞는 장사였습니다. 첫째, 토지는 주인이 버린 것이었고, 밭을 가는 소와 농기구는 황건적에게서 노획한 것이었으니, 조조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장사를 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세금은 5할 내지 6할로 높았는데, 한나라 초기의 1/15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것인지 모를 정도이니, 폭리를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사와 농민들은 이를 통해 먹고 살 수 있어 모두가 이 세금을 내길 원했습니다. 셋째 거주 방식의 전시편제화와 경작 방식의 집단화는 군민합입의 새로운 사회 건립이자, 경작과 전투가 일체를 이룬 새로운 군대의 건설이었습니다. 넷째, 둔전제는 군량 및 마초와 병사 공급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골칫거리였던 유민 및 이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치안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제5강 거듭되는 실수
동탁은 도성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제기합니다. 소제 유변이 우매하고 유약한 반면 진류왕 유협은 성주의 자질(요 임금의 초상화와 닮은 외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동탁이 황제를 바꾼 진짜 이유는 아닙니다. 동탁은 일찍부터 이전의 권신들처럼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자신이 섭정을 하며 정권을 잡고, 그 다음에는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진짜 의도는 아마도 개인적인 위엄과 명망을 세워서 중앙 정권을 제어하는 데 있었을 것입니다. 소제 유변을 폐위시키면 하태후도 폐위시킬 수 있습니다. 진류왕 유협은 생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협을 황제로 세우면 하태후가 더 이상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장애물도 제거하고 위엄도 세우게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습니다. 원소도 황제를 바꾸려고 생각을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동탁과 또 달랐습니다. 동탁의 방법은 폐립(한 사람을 폐위시키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방식)이었고, 원소의 방법은 별립(別立, 한사람을 폐위시키지 않은 채 또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장안으로 돌진해 들어가 동탁을 몰아내고 한나라 황실을 회복할 용기가 없어서, 따로 또 한 명의 황제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옹립 대상자는 유주목 유우였습니다. 원소의 생각은 한눈에 보아도 분명합니다. 그는 낙양과 장안의 중앙 정부(당시 동탁은 낙양에 있었고, 천자는 장안에 있었습니다) 외에, 따로 '망명 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이 망명 정부를 원소가 세운 이상, 정부의 수뇌(당시에는 대장군)는 자연히 그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래에 이 망명 정부가 중앙 정부를 대신하게 된다면, 원소는 곧 나라를 재건한 명신으로서 아름다운 명성을 천고에 드날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는데, 원래의 정부가 멸망했거나 아니면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때 어떤 망명 정부를 세우면 그것은 새로운 중앙 정부가 됩니다. 이것은 대역무도한 짓입니다. 원술의 방법은 자립하여 자신이 황제로 등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술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첫째, 한나라는 이미 관 속에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고 유씨도 이미 서산에 지는 해이므로, 반드시 다른 사람이 대신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유씨를 대신할 자격은 누구보다 원씨에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원씨 가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은 원술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원술의 생각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전국옥새가 있었습니다. 원술은 이 보물을 가진 데다 민간의 유언비어를 잘못 들었는지라, 다음번 황제는 자기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헌제 건안 2년(197년) 봄,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정식으로 황제를 칭합니다. 원술의 칭제는 온통 반대에 부딪힙니다.
제6강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다
동탁과 원소와 원술. 이 세 '난세의 효웅'은 황제의 문제에 대해, 동탁은 폐립, 원소는 별립, 원술은 자립이라는 태도와 방법을 취했습니다. 이 세 가지 정책은 비롯 잘못이라고 할 수 없더라도, 뛰어나지도 못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가가 높고, 리스크도 크며, 수익이 적기 때문입니다. 서로 비교해볼 때, 조조의 방법은 확실히 훌륭합니다. 그는 폐립도, 별립도, 자립도 하지 않고, 황제를 자신의 근거지로 맞아들여 정중하게 받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황제와 국가라는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하고 사방을 토벌했습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은 국가와 민족에게는 당연히 커다란 불행이었지만, 패권을 다투던 관동의 제후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였고, 동시에 그들에 대한 한 차례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모개는 먼저 조조를 위해 형세를 분석합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 즉 사회적으로 혼란하고(천하가 분열되고 붕괴되었다), 국본이 동요했으며(나라의 주인이 천도하였다), 경제가 붕괴했고(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했다), 재난이 성행하여(기근으로 백성들이 떠도는 신세이거나 도망을 갔다), 그야말로 국가는 태평하지 못하고(조정에는 일 년을 넘길 만큼의 예산도 없다), 백성도 안녕하지 못하다(백성들은 평안한 마음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럴 때에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가진 사람이 확실히 상황을 수습해야만 합니다. 이 사업이 바로 이른바 '패왕지업(覇王之業)'입니다. 근본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는 정의이고 하나는 실력입니다. 실력 중에서 우선은 경제력입니다. 또한 실력의 대결일 뿐 아니라 인심의 대결이기도 합니다. 인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습니다. 그래서 모개는 조조에게 천자를 받들고, 농업을 중요시하며, 군수 물자를 비축하라는 세 가지 건의를 합니다. 천자를 받들어 모실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심을 크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개의 심모원려(深謀遠慮)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천자를 받들라'는 정치 전략이고, '농사를 중시하라'는 경제 전략이고, '군수 물자를 비축하라'는 군사 전략입니다. 따라서 모개의 말은 '지도 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소는 삼국에서 부차적인 인물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장면마다 등장합니다. '천자를 받들고 불충한 신하들을 호령하라'는 건의를 처음으로 한 사람은 모개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동소의 역할이 컸습니다. 동소는 또 자기가 돈을 내서 조조의 명의로 이각과 곽사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이때부터 조조와 조정 사이에 왕래가 생깁니다. 건안 원년(196년) 7월, 헌제도 천신만고 끝에 낙양으로 돌아오니, 천자를 맞이하여 받들 수 있는 조건이 더욱 무르익습니다. 조조는 곧 자신의 사촌 동생인 양무장군 조홍을 낙양으로 가게 하지만, 위장군 동승과 원술의 제지를 받게 됩니다. 이때 또 동소의 도움을 받습니다. 헌제 건안 원년(196년) 8월 18일, 조조는 낙양으로 들어가서 헌제를 배알합니다. 이에 천자는 조서를 내려 조조에게 부절(符節)과 황월(黃鉞, 제왕의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황금으로 장식한 도끼), 녹장서사라는 관직을 수여합니다. 부절로 군법 집행권을 가지게 되었고, 황월로 대내외적인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녹장서사로 최고 행정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조조는 성공적으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두 번째 걸음 역시 동소의 공로입니다. 조조는 낙양에 도착한 다음, 동소와 담화를 나눕니다. 동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낙양에서 황제를 보좌하시면, 형편이 여의치 않을 것입니다. 방법은 오직 어가를 움직여 허현으로 행차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황제를 장군의 근거지인 허현으로 모시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소도 지적했듯이,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조조의 기백에 대한 시험입니다. 조조는 결국 황제를 허현으로 오게 만들었습니다. 허현에 이르기 전까지 황제와 조정의 관리들은 거의 거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조조는 그들의 생활을 크게 개선했을 뿐 아니라, 이 일을 할 때에도 마치 집사나 가사를 돌보듯 매우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조조의 세심함에 황제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조조가 대단한 충신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에 천자는 조서를 내려 조조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무평후에 봉합니다. 이렇게 조조는 '천자를 받든다'라는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높은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그는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었을까요? 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원소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황제라는 깃발은 무기를 결코 대체할 수 없었으며, 천하는 아직 힘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제7강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임자다
조조는 굳게 국가의 통일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일생 동안 분투합니다. 국가가 통일을 하려면 통일의 상징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바로 황제입니다. 황제가 누구인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조건이 무르익는다면 자기가 황제를 맡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황제 자체가 없을 수는 없으며 또한 둘일 수도 없습니다. 그가 동탁을 반대했던 이유는 동탁이 황제를 없는 것처럼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소를 반대했던 이유는 원소가 황제를 둘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조조에게 개인적 야심이 조금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사실이 아닙니다. 조조는 허현으로 천도한 뒤에, 점점 '천자를 받드는 것'에서 '천자를 끼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황제도 점점 자신이 '존경받고 받들어지던' 대상에서 '연금을 당하는' 존재로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건안 5년(200년)에 이른바 '의대조' 사건이 발생합니다. 요컨대 황제를 허현에 오게 한 이후에 조조는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습니다. 그는 최대의 정치 자본과 인적 자원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제8강 신출귀몰
제9강 자웅을 겨루다
제10강 승패의 이유
원소는 보기에는 태도가 온화하고 품위가 있으며, 도량이 넓고 크며, 풍모가 멋스럽지만, 마음속은 음험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나가는 것을 볼 수가 없었고, 원소가 조조를 친 것은 조조가 자신보다 잘나갔기 때문이고, 원소가 저수를 깎아내린 것은 저수가 자기보다 총명했기 때문이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전풍이 자기보다 정당했기 때문입니다.
제11강 모든 내는 바다로 흐른다
용인술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을 등용할 것인가이고, 하나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입니다. 조조의 <구현령>은 중국 역사의 일대 사건입니다. 제국의 등용 제도를 변화시켰고(한대의 찰거 제도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후 위진의 천거 제도를 거쳐 수당에서 비로소 과거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던 중대한 이론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논쟁은 바로 덕성과 재주의 관계입니다. 이상적인 경지는 물론 덕성과 재주를 겸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덕성과 재주를 겸비할 수 없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전통적인 방식은 덕성을 선택하고 재주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고, 최소한 덕성을 재주보다 우선시합니다만, 조조는 오히려 '오직 인재만을 발탁할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오직 인재만을 발탁한다'는 말은 재주만 있다면 덕행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는 뜻이며 '어질지 못하고 불효한 자'도 상관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물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조조의 이 말이 결코 덕성을 원치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조 본인도 도덕을 매우 중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도덕성이 높고 훌륭한 사람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도덕론 지상주의자(그가 건안 8년에 반포한 명령 중 하나는 바로 '도덕론 지상주의'의 비판이었습니다)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덕이 인재를 선발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첫째 기준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도덕을 유일한 기준과 첫째 기준으로 삼아면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덕성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완전무결의 강요입니다. 세 번째는 속임수를 써서 남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동한 이래로 이른바 '덕성과 재주의 겸비'는 사실 덕성에 대한 요구이지 재주에 대한 요구가 아닙니다. 조조는 이를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정을 하다 보면 반드시 지나쳐 더 잘못되기 마련이고, 그냥 두면 교정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덕성과 재주를 겸비해야'한다는 둥 어쩌고저쩌고 하기보다 '오직 인재만을 발탁한다'는 점을 제시해야한 했습니다.
제12강 천하가 마음으로 따르다
조조는 확실히 사람을 쓸 줄 아는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는 다름의 8가지로 조조의 용인술을 개괄할 수 있습니다. 1. 진심으로 대하여 마음으로 감동시킨다 2. 정성을 다해 성실하게 대한다 3. 사심 없이 대하며 사리로써 설득한다 4. 언행을 일치시켜 신뢰를 얻는다 5. 법령을 엄격히 집행하여 법에 따라 사람을 제압한다 6. 입장을 바꿔 생각하여 관대히 포용한다 7. 남을 높이고 자기를 책하여 공을 남에게 돌린다 8. 논공행상을 통해 장려한다.
손권과 유비, 두 손을 마주잡다
제13강 매실로 담근 술
역사에서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기 위해 동정한 것이 도대체 조조의 파견인지, 아니면 유비의 주도적인 요구인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유비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조조가 비준한 듯한데, 유비는 서주에 도착한 이후, 곧바로 서주를 지키던 차주를 죽이고 공개적으로 조조를 배반합니다. 조조는 크게 밑지는 장사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비가 주도적으로 떠났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떠나게 된 근본 원인은 유비가 영웅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조조가 그 말을 하여 천기를 설파함으로써 유비의 심사를 까발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비가 떠나지 않으면 안 돼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조조는 천하의 영웅을 단지 자신과 유비 두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해도 되는 게 없고 여기저기에 부탁만 하는 유현덕은 가는 곳마다 환영과 대접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이런 대우를 받았을까요? 정답은 단 하나, 원소와 조조, 도겸 등은 모두 유비를 영웅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유비가 영웅이라는 점을 관우와 장비가 알았고, 후일 제갈량도 알았으니, 조조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조조가 틀림없이 '지금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이 조조뿐'이라는 말을 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조조가 침착하지 못했다고 이해해도 좋고, 조조가 그의 힘을 탐색하려 했든지, 일부러 경고를 하려는 의도로 그랬다고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유비가 도망간 것은 이해가 가지만, 조조가 그를 풀어준 점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조조가 이때는 아직 강웅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어쩌면 그때까지 조조는 남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으며, 정당한 이유로도 남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능한 또 하나의 상황은, 조조가 유비에게 영웅의 의지, 영웅의 기개, 영웅의 혼, 영웅의 의리가 있음을 보았지만, 유비가 힘을 발휘할 기반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제14강 하늘이 내린 기재
건안 12년(207년)은 유비와 조조에게 정말로 중요한 해였습니다. 38세의 곽가가 세상을 떠나고, 26세의 제갈량이 세상으로 나오자,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곽가와 제갈량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모두 젊은 천재였고, 세상에 나왔을 때 겨우 26~7세(곽가 27세, 제갈량 26세)였지만 사상과 모략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모두 군주의 능력을 살피는 데에 마음을 썼습니다. 셋째, 그들은 모두 전략으로 세운 공이 매우 높았습니다. 설령 1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다 할지라고, 곽가는 휘황찬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곽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조조의 군사적 성취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조조의 사업이 난항을 겪은 것은 곽가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곽가의 죽음은 조조의 입장에서 볼 때 확실히 중대한 손실이었습니다.
제15강 시대를 보는 혜안
제갈량 그의 일생에 대한 사료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고아로서 숙부 제갈현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농사짓고 독서하는 것 외에도, 제갈량에게는 두 가지의 취미가 있었습니다. "무릎을 감싸고 앉아서 길게 휘파람을 부는 것"을 좋아했고([위략]), "양부음(梁父吟)을 잘 불렀다"([제갈량전] 본문)는 것입니다. 제갈량은 전형적인 사인입니다. 사, 특히 국사는 반드시 천하를 자기의 임무로 여겨야 합니다. 물론 포부만으로는 실천할 수 없으며, 능력과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는 후일 국가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했으니, 이는 그가 능력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는 조건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그 갖춘 조건도 매우 좋았습니다. 먼저 제갈량은 매우 좋은 배경을 갖추었습니다. 그들의 선조 제갈풍은 사례교위를 지낸 사람입니다. 제갈량의 부친인 제갈규는 군승을 지냈고, 숙부인 제갈현은 태수를 지냈기 때문에, 제갈량도 관리의 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료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시 얼마간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갈량에게는 네트워크가 하나 있습니다. 그의 장모와 유포의 후처는 친자매간으로, 둘 다 채풍의 딸이자, 채모의 누나였습니다. 유표는 형주의 행정 책임자이고, 채씨 가문은 양양의 명문가이며, 채모는 유표의 심복이니, 제갈량에게 이만한 정치적 자원이 있다면 아주 좋은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은 당시의 명사였습니다. 더구나 제갈량은 또 하나의 작은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이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외에도 형주의 명사 사마휘.방덕공 등은 제갈량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제갈량은 비록 초려에 은거하고 융중에 머물렸지만, 오히려 '담소하는 사람은 모두가 대학자들이고, 왕래하는 벗들 중에는 지식이 얕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와 관계나 교류가 있었던 사람은 고관 아니면 명사였습니다. 제갈량의 조건은 분명 상당히 좋았습니다. 만약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다면, 매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안 12년 이전까지 그는 거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남양에서 은거하며 융중에서 생을 마치려는 태도를 다짐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제강량의 포부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갈량의 입자에서 말하자면, 그는 그저 '임용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중용' 내지는 '전용(專用)'을 바란 것 같습니다. 제갈량의 선택 기준은 매우 분명해집니다. 첫째, 그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정권, 새로운 국가, 새로운 왕조를 세울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 사람의 이러한 포부와 조건은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잠재적인 상태에 높여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분명 유비뿐입니다. 먼저, 유비는 제왕의 후예입니다. 둘째, 유비에게는 제왕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셋째, 유비에게는 제왕의 재주가 있었습니다. 넷째, 유비는 제왕의 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제 말년에 무리를 모아 병사를 일으킨 때부터 건안 6년에 유표에게 의탁할 때까지, 유비는 좋은 운수는 가지고 있었지만 좋은 운명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비에게는 두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하나는 든든한 근거지(힘을 발휘할 근거지)이고 다른 하나는 명확한 정치 노선(성공의 길)이었습니다. 제갈량은 바로 그를 위하여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건안 12년의 유비와 제갈량은 쌍방이 모두 상대방을 필요로 했으며, 또한 쌍방의 모두 상대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16강 삼고초려
많은 사람들이 유비가 애타게 인재를 찾는 일면만을 보고, 제갈량도 사실은 유비를 필요로 했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제갈량은 반드시 세상으로 나와야 했으며, 유비가 그가 가장 선택하고 싶은 주군이었습니다. 둘째, 유비가 비록 인재를 급하게 필요로 하긴 했지만,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 그가 필요로 한 것은 일군의 사람, 즉 일군의 '현명한 신하들'이지 반드시 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셋째, 제갈량의 날카로운 감각으로 볼 때, 당연히 그가 유비를 발견한 것이 유비가 그를 발견한 것보다 빨랐을 것입니다. 종합하자면 제갈량은 이미 26세가 되었고 유비 역시 46세였으므로, 양측 모두 시간이 자신을 기달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한 상황에서 모종의 기회와 인연으로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사마휘와 서서의 추천을 간순한 개인 행위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형주는 인재가 넘치던 곳이었습니다. 형주에는 본토의 인재 외에도 중원에서 피난해온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국가의 대사에 관심이 많았고, 형주의 안위에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추천은 마땅히 형주 선비 집단의 추천으로 보아야 합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일찍이 건안 5년(200년), 즉 유비와 제갈량이 만나기 겨우 7년 전에도 누군가가 손권을 위해서 유사한 계획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손권판' 내지 '동오판 융중대'라고 일컬을 만합니다. 이 사람도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천하 삼분'이라는 결과를 예견했습니다. 어쩌면 '삼분천하'의 전략적 목표를 세웠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제17강 융�대책
노숙을 언급할 때마다, 성실하고 온순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져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상의 노숙은 호탕하고 위협심이 강하며 사람들의 �은 신망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노숙 또한 정치적인 두뇌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숙이 손권에게 의탁하자, 손권은 곧바로 그를 접견하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밀담을 나눴습니다. 손권을 위한 계책으로는 그저 "강동을 차지하고 천하의 분열을 관망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은 물론 거창한 청사진입니다. 그러나 건안 5년(200년) 당시, 노숙은 아마도 말해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손권도 마찬가지로 들을 수밖에 없었을 테고요. 건안 13년(2008년)에 이르자 상황이 또 바뀌었습니다. 노숙이 일찍이 세웠던 그 계획은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고, 그 주장은 곧바로 실행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감녕입니다. 이제 네 가지 '융중대'를 알았습니다. 첫 번째는 '원소판'으로, 저수가 말했듯,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며, 전사와 군마를 길러 입조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조판'으로, 모개가 말한 것처럼, '천자를 받들어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자들을 호령하고, 농사를 진흥시켜 군자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융중대'라고는 하지만, 사실 모두 패업을 실현하는 전략적 계획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넓은 의미에서 '융중대'라고 불러도 무방하기는 합니다만, 제갈량의 '융중대'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융중대'라고 병칭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노숙의 계획입니다. 또 노숙과 제갈량은 자기 측의 능력이 아직 약소하다는 점과 통일이라는 대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먼저 천하를 삼분한 이후에 통일을 이룩할 것을 주장합니다. 후일 이 두 집단의 인물들 중에서도 노숙과 제갈량의 관계가 가장 좋은데,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그들의 관점이 같고 주장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방안에도 다른 점도 매우 많습니다. 첫째, 노숙의 삼문제서 주제는 손권.유표.조조입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삼분에는 주체는 유비.손권.조조입니다. 둘째, 제갈량이 설정한 목표는 '한 황실의 부흥'이지만, 노숙은 '한 황실은 부흥할 수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셋째, 노숙의 실시 방안은 먼저 형주를 탈취하고 익주를 점거하여, 삼분을 양립으로 바꿔 '삼국'을 '남북조'로 변환시킨다는 것입니다. 제갈량의 실시 방안은 손권과 연합하고 형주와 익주를 점령한 다음, 조조와 손권이 함께 싸워 지쳤을 때 다시 동진하고 북상한다는 것이니, 역시 '삼국'을 '동서한'으로 변환시키는 것입니다. 노숙의 '삼분'은 현재 상황이고 제갈량의 '삼분'은 미래 상황입니다.
제18강 강동의 기업
'강동 집단'이란 두 왕조를 3대를 거치며 건립되어 온, 지방에서 할거한 정권입니다. 정권의 창시자는 손견이고, 기틀을 다진 사람은 손책, 진정한 영수는 손권입니다. 손책은 그 짧은 몇 년 사이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범함과 총명함 때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희귀한 것은 손책의 정치 중시였습니다. 두 가지의 일이 이 점을 증명해줄 수 있습니다. 첫째, 원술은 황제라고 칭하며 손책을 끌어들였지만, 손책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두 번째 일은 바로 조조가 '천자를 받들어 불충하는 신하들을 호령'할 때, 손책이 같은 생각을 한 점입니다. 그러나 손책에게도 항우와 같은 결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했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으며,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점과 한사코 체면을 차리려는 점은 손책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 그는 결국 이 두 가지 약점 때문에 죽었습니다. 손책은 강동 집단에서 좋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는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습니다. 둘째, 그는 후계자를 잘 뽑았습니다. 강동 집단의 정치적 자원과 군사적 역량으로 '천하'는 잠깐 사이에 이렇게 커졌습니다. 다음 단계에는 강동을 보위하고 성패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니 자신의 후계자가 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적 재능이 아니라 정치적 재능이며, 용감하게 잘 싸우는 능력이 아니라 노련하게 국익을 위해 애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격과 기풍이 자기와 비슷한 손익을 선택하지 않고, 자기와는 다른 손권을 택했습니다. 손책은 뜻밖에도 '불초(不肖, 자기와 닮지 않은 사람)를 선택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뛰어난 점입니다. 그러나 이는 강동 집단으로 하여금 이후의 정치적 노선을 한가지로 정하게 했습니다. 바로 '수성'을 '기본국책'으로 하고, 수성의 전제 하래에서 진취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손권의 시대에 강동 집단은 내부적으로 줄곧 두 가지의 다른 의견이 존재하여, 두 가지의 다른 노선을 대표했습니다. 장소를 대표로 한 사람들은 보수를 주장하였으니, 이들은 '비둘기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요와 노숙을 대표로 한 사람들은 공격을 주장하였으니, '매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19강 반드시 얻어야 할 땅
유표가 이런 능력이 있는데, 그렇다면 왜 그를 '바로'라고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유표는 마음속에 큰 뜻이 없었습니다. 둘째, 유표는 도량도 없었습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사람을 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유표의 네 번째 문제는 바로 후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후사가 없었다'는 말은 유표에게 후계자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가 쓸모가 없었고 후계자 선정도 적절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표의 이런 안배는 형주의 분열을 위한 복선이 됩니다. 유기가 떠난 후 형주 집단은 두 파로 분여되었습니다. 한 파벌은 명의상 유종을 대표로 했는데, 배후에는 채모와 괴월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조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며, 채모는 조조와도 면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한 파는 유기를 명의상의 대표로 했는데, 배후에는 유비와 제갈량 등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후일을 대비하지 못하니 어찌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유표를 위해 공평한 말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첫째, 원소와 유표는 모두 실패했지만 원소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고 유표는 난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니, 그 자신은 결코 누구를 건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 유표의 실력과 능력으로는 '그저 지키기만 하는 녀석'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셋째, 바로 유표가 '백성을 사랑하고 사인을 양성하며 조용히 스스로를 보호하는' 정책과 책략을 실행했기 때문에, 형주 지역은 10여 년간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였고, 북방에서 남하해온 많은 난민들도 경제적인 도움과 안전을 얻었으니, 이것은 유표가 잘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표는 몇 가지 억울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훌륭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며, 자기의 깜냥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백성을 사랑하고 사인을 양성하며 조용히 지키는' 정책과 책략을 실행하여, '난세에 형주를 그럭적럭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햇습니다. 물론 유표에게 전혀 행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형주로 파견된 것은 그의 행운이었습니다. 애석한 점은 하늘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유표가 평안무사헤게 놔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20강 성 앞까지 쳐들어오다
건안 13년(208년) 봄, 손권과 노숙과 감녕의 전략 계획을 실시했습니다. 조조가 오환으로부터 업성으로 돌아왔을 때 서쪽으로 출병하여 유표의 대장이자 강하태수였던 황조를 일거에 섬멸시켰습니다. 조조는 일찍부터 형주를 차지할 생각을 했고, 그에 대한 준비를 했습니다. 건안 13년 정월, 조조는 업성에 현무지를 조성하여 수군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는 군사상의 준비였습니다. 6월, 조조는 삼공제를 폐지하고 새롭게 승상과 어사대부라는 직무를 신설하면서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올라 대권을 독점했습니다. 이는 정치적인 준비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처리한 후 주주는 7월에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유표를 공격했습니다. 이 무렵 병에 걸린 유표는 증세가 악화되어 결국 8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유비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유경승이 임종 시에 나에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말했습니다. 유비와 유표가 서로 볼 수도 없었는데, 어떻게 자식들을 맡기는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유비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유표가 정말로 유비에게 '나라를 맡기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유비에 대한 시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표가 '땅을 맡긴 것'과 유비의 '겸양'을 '인격이 높고 절개가 굳다'라고 보는 견해는 엉터리에 불과합니다. 유표가 병으로 죽은 후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노숙은 이 일이 강동에 미치는 중요성을 바로 감지했습니다. 노숙은 손권에게 형주 지역이 지극히 전략적인 의의를 갖고 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노숙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유표가 세상을 떠난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그가 주창한 '동오판' 내지 '손권판 융중대'를 실시하려는 것입니다. 그 전략 목표는 형주를 소유함으로써 손권이 '제왕이 되는 바탕'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전술 방안은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손권과 유표는, 아니 강동 집단과 형주 집단은 대대로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권은 정치가였고, 정치가는 감정과 기분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바로 노숙의 계획을 비준했고 노숙도 곧바로 길을 떠났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유비는 번성을 떠나 남하하여 장강을 건널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노숙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북상하여 유비와 당양 장판에서 만났습니다.
제21강 위기의 순간에 명을 받들어
유비와 연합하는 것도 옳지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중립을 지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는 곤혼스럽고도 진퇴양난인 상황입니다.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를지, 젊은 손권(26세)의 입장에서는 모진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태가 아직 급하지 않고 상황도 불분명한 단계에서 손권은 망설이는 태도를 택했습니다.
제22강 거센 물결을 막아내다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하기로 한 결정은 손권의 집단과 개인의 이익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가 결정을 하도록 도운 사람은 그의 집단 내부의 '자기 사람'이지 제갈량일 수 없습니다. 또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한 주요 방법 역시 계산이었습니다. 그는 손권을 위해 세 가지의 의견을 내놓습니다. 첫째, 제갈량은 핵심은 시간이며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말성임이라고 말합니다. 결정해야 할 때에 결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결과인 혼란을 감다해야 합니다. 둘째, 제갈량은 강동의 병마는 강하고 굳세며, 형주에도 아직 남은 힘이 있음로 양측이 '힘을 합치기만' 한다면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제갈량은 조조군은 일단 이익을 잃는다면 반드시 북방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주장은 물론 손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손권의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제갈량의 계산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측면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그는 단지 손권이 투항하든지 전투하든지 간에 결정을 내려야지, 관망하고 의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점만을 말했을 뿐, 투항할 경우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둘째, 그는 조조를 이길 수 있다고만 가정하며, 그 결과로 삼분천하를 할 수 있고, 적어도 형주를 삼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싸움에 졌을 경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손권이 캐묻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제갈량의 요청에 응한 이유는 이 이전에 임 누군가가 그를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노숙은 동오 집단의 정치 노선과 정책의 설계자입니다. 노숙의 계획에 따르면, 손책의 유언에 근거하여 보더라도, 동오 집단의 정치적 노선은 응당 '강동을 보호하며', '성패를 지켜보아' 먼저 천하를 삼분한 후에 통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첫걸음은 손책이 창립한 기반을 공고히 하여 발전시키고, 다음으로는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조조와 강을 경계로 대치한 뒤, 마지막으로 적당한 때에 북벌을 감행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략에는 중요한 전제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형주가 유표의 손에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조조의 남정과 유표의 죽음은 손권과 노숙의 꿈을 무너뜨렸습니다. 안타깝게도 손권과 노숙이든 유비와 제갈량이든 간에, 모두 조조의 행동이 그렇게 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결과적으로 노숙이 도착하기도 전에 조조가 먼저 형주의 경계에 도착했습니다. 이에 노숙은 그 자리에서 주저 없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유비에게 쌍방이 연합하여 함께 세상을 구제하자고 건의했습니다. 사실 이 건의는 유비를 방패막이로 삼아 형주가 조조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책략이었습니다. 이때 조조는 그들을 도왔습니다. 현재 우리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원인 때문에, 조조는 손권에게 알 수 없는 편지를 한 통 보냈습니다. 조조의 이 편지는 이 사건의 핵심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편지는 조조가 오에 보낸 선전 포고이자, 형세를 갑자기 변하게 만든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편지 이전까지 이 전쟁은 조조와 유비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전달된 후, 조조와 유비 간의 전쟁은 조조와 손권 간의 전쟁으로 바뀌었고, 유비의 사정이 손권 자신의 사정으로 변하여, 손권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조가 이런 편지를 썼는지의 여부를 살펴봐야 합니다. 조조가 이런 편지를 �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어떤 학자는 조조의 편지가 협박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조조가 순탄하게 형주를 점령한 후, 동오까지 단숨에 해치워 멸망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일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조조는 손권에게 선전 포고를 하기 위해 그 편지를 썼습니다. 둘째, 조조는 손권을 겁주기 위해 그 편지를 썼습니다. 셋째, 조조는 그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조조가 이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해도 동오 측은 매우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조조가 편지를 썼든 쓰지 않았든 강동의 제신들은 모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꼈습니다. 조조에게 투항하지 않는다면 유비와 연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들 합니다. 싸워서 졌을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노숙이 말하지 않았고 손권도 묻지 않았습니다. 싸움의 패배가 투항과 별 차이는 없지만, 휠니 명예롭기 때문입니다. 노숙과 손권의 대화는 분명히 제갈량을 만나기 전에 있었고, 그래서 제갈량의 말 한마디에 결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숙은 손권의 정치적인 결정을 하는 데에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즉 전쟁을 할지 하지 말지의 결정 문제르 해결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손권이 군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전혀 돕지 못했습니다. 즉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는 해결해줄 수 없었습니다.
제23강 세찬 물결 속에 우뚝 서서
주유가 '비둘기파'의 노파심을 겨냥하여 조조의 이번 출정에 보이는 4개 폐단을 지적했습니다. 본토가 불안하고 후환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남하하는 것이 그 첫 번째 폐단입니다. 기병을 버리고 함선을 사용하여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했으니, 이것이 그 두 번째 폐단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10월이라 말에게 먹일 꼴이 없고 병사들의 보급 물자도 넉넉지 못하니, 이것이 세 번째 폐단입니다.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을 감행하니,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반드시 질병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폐단입니다. 종합하자면, 노숙은 손권을 도와 정치적인 득실을 계산해주었고, 제갈량은 손권을 위해 연맹의 득실을 계산해주었으며, 또 주유와 함께 군사적인 득실을 셈해주었습니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군대를 위무하자, 주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군무를 맡고 있어 감히 마음대로 직무를 떠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장군게서 몸을 낮춰 직접 오신다면, 그것이 이 주유가 매우 바라는 바입니다." 이에 유비는 혼자서 작은 보트를 타고 주유를 보러 간 것입니다. 유비는 주유를 만났고, 틀림없이 한 차례의 위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너라 그의 최대 관심사는 분명 군사 상황이었습니다. 유비가 근본적으로 주유의 승리를 �지 못했고, 여전히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일부러 "유별나게 후방에 있으면서" 직접 2천 명의 구사를 거느리고 관우. 장비와 함께 했고, 주유와 연합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주유는 오히려 의기양양하고 자신감 넘치게 "3만 명이면 충분합니다. 유장군께서는 마음 푹 놓으시고 제가 적들을 격파하는 것을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주유의 태도는 물론 영웅의 기개가 넘치고, 유비의 걱정도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적벽대전은 중국 역사상 적고 약한 인원으로 많고 강한 적을 물리친 유명한 전쟁이며, 역대로 매우 높은 중시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제24강 적벽의 의심스런 구름
적벽대전은 정사에 나타난 기록도 많지 않고, 남아 있는 문제도 적지 않아서, 역사학계의 '신적벽대전'이 여러 차계 폭발했을 정도입니다. 관련된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누구의 전쟁이었는가? 둘째, 전쟁의 규모는 어떠했는가? 셋째, 시간과 지점은 어떠한가? 넷째, 승패의 원인이 무엇인가? 왜 양군이 처음 교전을 벌이자마자, 조조가 패했을까요? 첫째, 조조의 군중에 온역이 유행하여 병자가 늘면서 전투력이 감소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조조군은 수전에 익숙지 않아 배 위에 가만히 서 있기도 힘이 든데, 어떻게 싸울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셋째, 조조가 적의 상황을 치밀하게 헤아리지 못해, 스스로 등등한 기세를 상대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정면에서 통렬한 공격을 받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나다. 넷째, 양군이 좁은 길에서 만난데다 강물 위였으므로, 조조 측의 병사가 많았다고 해도 전혀 유용하지 못했고, 육군의 경우는 더욱 쓸모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원인은 제갈량과 주유도 거의 예상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조조가 벌인 것은 '침략전'이었고,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벌인 것은 '보위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매우 투지가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연합군이 적벽에 왔을 적에 장수와 병사들이 단단히 벼르면서 싸우고 싶어서 안달했으리라 믿습니다. 첫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조는 별 수 없이 전진을 멈추고 전선을 장강의 북쪽 강가에 정박시켰습니다. 이때는 이미 한겨울이라 북풍이 거세게 불었고, 선체는 요동을 쳤으며, 조조군에는 병자들이 넘쳐났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조조는 명령을 내려 전선을 한데 묶어놓게 했고, 육군은 강기슭에 올라가 막사를 치고 진지를 구축하게 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조조 자신의 결정인지, 아니면 어떤 모사의 건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방통이 연관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도 즉각 알았습니다. 이때 조조군은 이미 어떤 심가간 전염병에 감염되어 전투력을 상실했고, 또 한 차례 전투에 패배한 데다 전함을 서로 연결시켜 놓는 실수를 범하여, 황개가 하공을 쓰자고 건의를 제출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주유는 그 계책을 따랐고, 이에 황개는 거짓으로 항복하여 불을 놓았으며, 조조군은 대패했습니다. 조조의 이번 패배는 대단히 참담했습니다. 적변전에서 조조가 패배한 원인은 첫 번째가 전염성 질병 때문이고 두 번째가 화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정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조조의 실패에는 객관적인 원인도 있고, 주관적인 원인도 있습니다. 본래 조조의 우세는 매우 분명해 보였습니다. 첫째, 조조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제후들이 감히 그와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우세에 있었습니다. 둘째, 조조는 형주를 빼앗아 사해에 위엄이 진동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졌으니 심리적인 우세를 가졌습니다. 셋째, 조조는 파죽지세로 남하해 군대의 사기가 고조되었고, 승리에 고취된 병사들을 거느리고 겁을 먹은 적군을 상대하는 것이었으므로, 기세상의 ㅇ세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 조조의 병력은 손권-유비 연합군의 몇 배나 되었으므로, 군사상의 우세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조는 도대체 왜 패했단 말입니까? 역시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주로 전략상의 착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조는 자신의 전략 목표가 무엇인지, 즉 형주를 빼앗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강동을 빼앗으려는 것인지, 유비를 없애려는 것인지 아니면 손권도 함께 해치우려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백전노장이자 빈틈없이 치밀한 계산의 소유자인 조조가 왜 이처럼 많은 실수를 한 것일까요? 그는 손권과 유비의 연합 가능성에 대해 예측하지 못했고, 손권도 공손강처럼 유비의 목을 가지고 올 줄 알았던 것입니다. 종합하자면, 조조의 패배는 적을 무시했기 때문이고, 손권-유비의 승리는 연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황개의 거짓 항복을 조조가 간파하지 못했다든가, 한겨울의 동남풍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모두 작은 문제입니다. 이외에도 조조의 실패에는 또 한 가지의 원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늙었다는 것입니다.
역자 후기 - 삼국지는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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