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텔레비전, 또하나의 가족],노명우,프로네시스,2008,(081105).

바람과 술 2008. 11. 5. 01:24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 텔레비전 키드, 학자가 되다

 

여가를 집어삼키는 괴물

: 24시간은 얼핏 길어 보이지만, 정작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시간 44%(10시간 34분), 사회적 생존을 위한 시간 34%(8시간 13분)를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겐 고작 5시간 13분, 24시간 중 22%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시간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여가 시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에 소비한다. 고작 5시간 13분 남은 자유 시간 중에서 평일에는 2시간 6분, 토요일에는 2시간 38분, 일요일에는 무려 3시간 14분을 텔레비전 보는 데 할애한다. 하지만 공기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자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의 여가 시간을 지배하는 텔레비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텔레비전에 대한 이 같은 성찰 부족은 우리가 텔레비전 시청에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소비한다는 사실보다 더 놀랍고 기괴하다. 학자들의 성찰 부족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등장할 때부터 바보상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예전의 학자들은 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을 진지한 학문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바보스럽다고 평가했다.

텔레비전이 도착한 이후

: 텔레비전을 비난하기는 쉽다. 텔레비전은 분명 '바보상자'이다. 텔레비전은 늘 상업성 논란에 휘말린다. 아니, 텔레비전은 상업성 논란을 오히려 즐긴다. 텔레비전이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는 수십 가지도 넘게 열거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누구나 '바보상자'라고 생각하는 텔레비전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텔레비전이 바보상자인 이유보다, 텔레비전을 버리지 못하는 현실이 더 흥미롭다. 나는 현대인들이 텔레비전 없이 살 수 없는 이유, 텔레비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에 더 관심이 많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텔레비전은 매우 진기한 물건이었기에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모셔져야 했다. 세탁기가 아직 등장하기 이전, 텔레비전은 냉장고와 더불어 '놀라운 근대화'를 상징하는 새로운 기계였다. 그런데 1960년대처럼 텔레비전이 부유함의 상징인 시기도 아니건만, 지금도 여전히 텔레비전은 대부분 거실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는 텔레비전이 짧은 시간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텔레비전이 우리의 경험에서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텔레비전이 없다면 세상 소식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텔레비전은 세상을 향해 난 창문과도 같다. 텔레비전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매혹적인 풍광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다.

1920년대와 2000년대 학자가 여가를 보내는 방식의 차이

: 벤야민이 연극과 영화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사상가였음을 감안하다 하더라도, 1920년대 후반 지식인이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2000년대에 내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과 너무나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저녁 시간에 집에 들어오면, 일단 텔레비전을 켠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벤야민에게 연극과 공연 관람이 일상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는 텔레비전 시청이 일상이며 연극과 공연 관람은 일상의 패턴을 벗어난 '이벤트'이다. 벤야민과 나의 차이는 벤야민의 거실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나의 거실에는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거실에 텔레비전이 커지고 난 이후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단지 우리가 그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텔레비전 키드의 탄생

: 텔레비전이 켜지면 나는 나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시청자라는 기호로 변화한다. 텔레비전이 켜지는 순간, 그리고 시청자라는 이름으로 기호화되는 순간 엘리트와 민중 사이의 경계는 무너진다. 텔레비전 앞에서 전문적 학자 또한 대중이라는 기호로 편입된다면, 학자가 텔레비전을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에 대한 연구는 1960~1970년대 텔레비전에 대한 연구를 규정지었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의 스펙트럼을 유지해야 할까? 텔레비전에 대한 연구는 크게 보자면 개별 프로그램에 대한 분석, 방송국 제도에 대한 분석, 시청자에 대한 분석 등으로 세분되어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자신이 '연구자'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연구자'라는 관점에는, 연구자는 텔레비전을 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텔레비전을 분석하기 위함일 뿐 텔레비전이 연구자의 일상적 환경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분석적, 비판적 관점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는 이유이다. 텔레비전은 나에게 문명의 놀라운 발명품이라기보다 '환경'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의 도입이 삶의 충격이었던 전 세대와 나는 텔레비전에 대해 전혀 다른 경험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텔레비전은 나에게 '부재'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다.

익숙한 텔레비전 낯설게 바라보기

: 나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대면 의사소통은 오히려 사적 의사소통에 불과하고, 텔렙비전과 매개된 의사소통이 공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점을 나는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미 텔레비전 구입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필수 구성 요소로 자리잡았다. 텔레비전에 대한 수다스러운 담론은 텔레비전이 정상화되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사라졌다. 학자들의 관심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서 그 미디어 속의 프로그램이라는 작은 단위로 이동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텔레비전이라는 놀라운 미디어와 마주친 시청자의 시각은 텔레비전에 대한 연구 목록에서 사라졌다. 나의 관심사는 텔레비너에 내재된 기술적 속성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부여된 문화형식이며, 텔레비전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의 단면이다. 마치 대부분의 사람이 내 부모가 친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춘기적 의심을 통해 부모를 객관화시켜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텔레비전 세대가 학자가 되고, 텔레비전 키드가 성인이 되어 텔레비전을 성찰한 기록물이다.

 

ON 텔레비전을 켜다

 

텔레비전의 온 버튼은 텔레비전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를 누를 때 비로소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는 작동을 시작한다. 우리가 온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이는 그냥 검은 상자에 불과하다. 이를 누르지 않으면, 집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텔레비전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텔레비전은 온 버튼을 통해 가정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아니 인류는 텔레비전의 온 버튼을 통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다.

 

1. 매개된 삶은 인간의 운명이다

 

미디어가 매개하는 삶

: 텔레비전은 분명 미디어다. 텔레비전이 켜지면서 펼쳐지는 미디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텔레비전이 켜지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야 한다. 미디어는 사회학이다. 미디어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처럼 복수의 인간이 공존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필요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복수의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미디어의 필요성과 절실함 또한 커진다. 미디어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의사소통에 대한 갈망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의 또 다른 표현은 '인간은 매개된 존재'이다. 매개된 삶이 현실의 운명이라면, 매개된 삶을 거부하고 가능하지도 않은 직접성으로의 회귀를 꿈꾸며 종교적 삶으로 투신하기보다는 미디어를 이해라는 편이 현명하다. 매개된 삶의 운명을 이해하고, 그 운명에 구속되어 있는 현실을 파악하는 것, 그것이 세속적 학문인 사회학이 할 일이다. 그래서 미디어 연구는 사회학적 성격을 띤다. 미디어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제약을 극복하면서 탄생했고 개조되었으며 진화했다. 개인의 체험과 경험의 교류는 공간의 제약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인간은 생물학적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나의 육성을 녹음기로 채집한다면, 나라는 개인의 생물학적 한계와 상관없이 미디어화된 나의 삶은 영생을 얻는다. 미디어는 직접성을 상실했지만, 그 대가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 미디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며,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켜준다.

미디어는 문화적 구성물이다

: 미디어는 기술적 구성물이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면 미디어에 관한 사회학은 불필요하다. 메시지와 미디어 사이의 역학 관계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를 압도하기도 한다. 때로는 메시지의 내용보다 메시지의 형식, 즉 미디어가 더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다. 특정 미디어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대의 담론은 그 미디어의 영향을 받는다. 미디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 양식에도 변화를 준다. 이 과정은 매우 적극적이고 포괄적이다. 의사소통 양식의 변화와 사회의 문화적 변동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디어는 또한 문화적 구성물이다. 특정 미디어는 특정 문화를 산출한다. 문화적 구성물인 미디어의 파급 범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넓으며, 그 깊이도 상상 외로 깊다. 우리는 미디어를 선택할 수 없다. 하나의 미디어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선택권이 없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미디어 선택이 아니라, 미디어 적응이다. 미디어는 한 사회를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환경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미디어를 파악하는 일은 그 사회를 둘러싸고 있으며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의 탐색을 요구한다.

미디어의 역사는 단절적이다

: 미디어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매개체이다. 미디어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이어준다.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어떤 매개자가 끼어드느냐에 따라 의사소통의 결과도 달라진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미디어의 주된 양태는 변화해왔다. 따라서 텔레비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디어의 사회학과 더불어 미디어의 역사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을 수행해야 한다. 계보학적 탐색의 목표는 미디어의 역사를 '단절'을 중심으로 파아하는 것이다. 계보학은 발전의 연속성 대신 역사에서 발견되는 단절과 불연속에 주목한다. 하지만 미디어의 역사는 매우 특이하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단절은 근절적 계승이 아니라, 병렬적 동시성의 특성을 지닌다. 이렇듯 미디어의 역사에서 중요한 단절이 기록되어 있지만, 단절 이후 모든 시기의 미디어는 동시에 공존한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단절의 정확한 의미는 지배권의 단절이다. 미디어의 계보학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하고자 한다. 미디어는 분명 도구의 성격을 지닌다. 도구-미더는 특정 미디어가 도구적 성격만을 지니고 있으며 문화적 형식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미디어에도 흥망성쇠가 있다. 도구-미디어가 문화적 형식을 획득하면 한 시대를 특징짓는 중요 기준이 된다. 이렇게 단순 도구-미디어에서 벗어나 문화적 형식을 획득한 미디어를 '환경-미디어'라 부른다. 도구-미디어는 개별 인간이 개인적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만, 환경-미디어는 마치 공기처럼 개별 인간이 선택할 수 없다. 환경-미디어는 에피스테메(Episteme)적 미디어이기도 하다. 환경-미디어는 단순한 기술적 불연속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단절 또한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에피스테메적 전환을 기준으로 다섯 개의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대는 미디어 이전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직접성이 매개를 압도하며 원형의 형태로 살아 있다.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성은 논란거리지만, 이 시대는 이후 시대에 대한 안티테제를 구성한다. 에덴동산의 시대는 에피스테메적 전환을 가져온 '문자'의 등장과 함께 끝이 난다. 두 번째 시대는 미디어 시대의 제1기를 구성한다. 이 시대는 매개의 양태를 둘러싼 두 가지 모순적 축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시기이다. '문자'가 한 축을 이루며, '문자'와 대결하는 '이미지'가 또 다른 축을 구성한다. '문자'를 중심으로 한 매개의 축이 부상하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매개의 축이 소멸한다. 사진술로 대표되는 기술복제 시대의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다시 에피스테메적 전환이 일어난다. 사진과 영화 그리고 녹음 기술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기호이다. 이 시대에는 문자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소리마저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시스템으로 편입된다. 기술복제 시대가 끝나면 이 책의 분석 대상인 텔레비전의 시대가 등장한다. 텔레비전은 영화와 사진을 압도하며 지배적인 미디어로 부사했지만, 텔레비전 이후에 등장한 뉴 미디어에 의해 지배권을 위협받고 있다. 현재 우리는 텔레비전과 뉴 미디어가 지배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신 미디어는 이전의 미디어에 대한 안티테제의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특정 미디어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미이더보다 앞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미디어를 분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쟁 시대

 

음성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로

: 의사소통의 전제는 언어의 발생이다. 최초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목소리에 의존했다. 음성은 직접성이 강하다. 음성의 어조는 내용 못지 않은 메시지 전달 수단이 된다. 어조를 통해 우리는 발신자의 정서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음성의 한계는 명확하다. 음성은 음성담지자의 생물학적 한계를 공유한다. 음성은 직접적이며, 정서적 상태까지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지만 '사라짐'이라는 한계에 부딪힌다. '문자'는 음성을 시각화하여 음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입한 미디어이다. 음성이 일차적 직접성의 세계에 속한다면, 문자는 이차적이다. 문자는 음성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문자가 도구-미디어인 한, 인간은 문자를 사용할 것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문자는 반복적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도구로서 매우 유용하다. 따라서 우리가 문자를 선택할지 여부는 우리의 삶에서 반복적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달려 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문자는 한동안 특정 집단의 도구-미디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문자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미디어는 아니었다. 음성을 통해 의사소통할 수 있다면, 그리고 반복적 기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문자는 분명 과잉이다.

이미지, 민중의 세계

: 문자르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대중화되기 이전, 이미지와 문자는 서로 대립하는 상쟁의 관계였다. 텍스트(문자)가 귀족적이고 선형적인 코드를 대표한다면, 이미지는 민중적이고 비선형적인 코드의 대변자였다. 문자의 세계는 이미지으 세계에 비해 작았을 뿐만 아니라 그 파급 효과도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이미지는 문자보다는 실제의 세계에 가깝다. 특권층의 세계와 민중의 세계는 문자라는 미디어와 이미지라는 또 다른 미디어 사이의 대립을 매개로 나타났다. 텍스트의 세계와 이미지의 세계는 상이한 논리를 내재화하며 서로를 타자화한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는 역사의 중심적 문제이기도 하다. 텍스트 세계와 이미지 세계의 대립은 서양 역사에서 기독교와 이단의 싸움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성상파괴 논쟁은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과 그 반대의 입장, 혹은 구원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와 실용적 태도(모세 혹은 아론) 사이의 대립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지만, 문화사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이미지와 문자라는 서로 상이한 코드 사이의 대립이기도 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 분리된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고, 어느 세계도 압도적인 에피스테메로 자리잡지 못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떤 코드를 지지하느냐의 문제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중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앙을 저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미지가 용인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한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은 중세의 질서를 흔들었다. 텍스트 세계의 궁극적 승리는 종교개혁에서 절정에 달한다. 종교개혁 이후 텍스트 세계는 승리했으며, 그 승리는 인쇄술의 보급 및 확대와 함께 절정에 달했다. 텍스트는 종교의 언어, 과학의 언어로 자리잡고 텍스트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이미지는 '예술'이라는 호칭을 얻으며 특수한 영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소수의 도구-미디어였던 문자는 인쇄술 이후 환경-미디어로 자리잡았다. 인쇄술이 등장하고 문자 사용 능력이 상식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 문자라는 미디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특권층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문자가 환경-미디어가 된 이후 문자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인쇄술과 텍스트 시대의 도래

: 텍스트가 승리를 거두고 문자가 도구-미디어에서 환경-미디어로 전환하는 데에는 인쇄술이라는 혁신적 기술이 큰 작용을 했다. 인쇄술은 텍스트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텍스트가 소수만이 소비하는 사치품이었던 관행이 뿌리째 흔들렸다. 게다가 인쇄술은 성경 번역과 결합하면서 중세의 엘리트만이 공유했던 라틴어가 아니라 지역 언어로 서술된 텍스트의 확산이라는 상승작용을 유발했다. 이로써 텍스트는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대량생산-대량소비라는 순환 시스템이 완성되면서 텍스트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놀라운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다. 그 증거가 신문이다. 신문이야말로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텍스트 구조가 어떤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량생산-대량소비되는 텍스트의 포드주의가 등장하면서 부르주아 공론장이 등장했고, 부르주아 공론장은 부르주아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텍스트의 포드주의는 텍스트가 발휘하는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를 가져왔다. 텍스트의 세계가 포드주의로 돌입하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예술이라는 호칭을 얻은 이미지의 세계는 여전히 귀족생산과 분배의 시스템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지 세계가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장인제 생산방식을 신격화하거나(아우라 전략), 이미지 세계 또한 포드주의 방식을 차용하는 것이었다. 아우라 전략은 미술품을 모시는 신전인 미술관의 등장으로 나타났고, 포드주의로의 이동은 사진술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기술복제 이미지 시대의 시작

: 종교개혁 이후 문자는 압도적인 환경-미디어로 자리잡았다. 문자와 경쟁했던 이미지는 미디어로서의 경쟁력을 상실했다. 문자와 이미지 사이의 경쟁력 차이는 대량생산 여부이다. 따라서 문자의 압도적 지위는 이미지의 대량생산 기법이 도입되는 순간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한시적인 것이었다. 사진술은 문자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한번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술로 인한 기술복제 시대의 등장은 오랜 기간 유지되던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쟁관계를 새로운 도구-미디어가 될지, 환경-미디어로 격상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문자가 대량생산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때, 이미지는 스스로를 예술이라 칭하면서 민중의 코드에서 귀족의 코드로 다시 자리매김되었다. 그러나 이미지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이미지는 민중 코드로서의 성격을 회복했다. 이미지느 정지화면인 사진보다 한 발자국 더 진보한 기술인 영화의 본격 등장과 함께 본래의 민중적 성격을 되찾기 시작했다. 영화는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중들의 일상을 장악하는 가장 영향력있는 미디어였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등장하자마자 영화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3. 누가 스크린을 살해했는가

 

새로운 시대가 열리다  

: 우리가 살고 있는 텔레비전의 시대에도 음성의 세계는 존재하고, 텍스트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모든 미디어는 병렬적으로 공존한다. 모든 미디어는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조은 늘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텔레비전을 켠다는 건 다른 미디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걸 의미할 정도다. 모든 미디어 환경을 뒤바꿔 놓은 혁명적 변화의 중심지인 텔레비전의 역사는 다른 미디어의 역사와 비교해보자면 매우 짧다. 1928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기계식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이후, 텔레비전은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텔레비전은 기술복제 시대에 출현한 미디어 중 가장 돋보였던 영화를 위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텔레비전 방송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텔레비전은 전지구적 현상이다. 텔레비전은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반드시 적응해야만 하는 환경-미디어가 되었다.

텔레비전의 세계화

: 한국의 텔레비전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됐다. 1956년 5월 12일 종로구 관철동 296번지에서 KBS의 전신인 HLZK-TV가 첫 전파를 발사했다.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지만, 1950년대에 텔레비전은 본격적인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방송국 이름 '한국 RCA 배급회사(Korea RCA Distribution : KORCAD)'에서 알 수 있듯,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미국 RCA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팔기 위해 설립된 회사였다. 텔레비전 방송은 시작되었지만, 시청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1950년대 후반 17인치 RCA 텔레비전은 37만 5천환이었는데, 당시 1만 8천 환이던 쌀20가마니에 해당하는 엄청난 고가였다. 이런 한계 때문에 텔레비전은 확산되지 못했고 DBC는 늘 재정난에 허덕였다. 그러다 1959년에 방송국 화재까지 겹치면서 DBC는 1960년에 결국 문을 닫았다. 본격적인 텔레비전의 시대는 KBS가 방송을 시작한 1962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군사 쿠테타 이후 '국민에게 주는 선물'로 텔레비전 방송 개시를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텔레비전 방송이 재개되었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텔레비전 보급율은 매우 낮았다. 1963년의 세대당 텔레비전 보급률은 0.7%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서울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텔레비전은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1976년에 텔레비전 보급률은 41.4%에 달했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텔레비전은 더이상 희귀한 미디어가 아니었다. 텔레비전 보급률의 확대화 더불어 텔레비전 방송국 또한 복수 체계로 변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이 확산된 주요 요인 중의 하나는, 국산 텔레비전 생산으로 인한 수상기 가격의 하락이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 텔레비전은 일상을 구성하는 오브제로서 한국의 가정에 자리잡게 되었다.

 

VOLUME 텔레비전과 포드주의

 

현재 텔레비전만큼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환경-미디어는 없다. 텔레비전 수상기는 작지만,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그 어떤 환경-미디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 불륨이라는 조절 장치는 텔레비전의 그러한 힘에 대한 은유이다. 불륨 버튼으로 우리는 소리의 양(量)을 조절할 수 있지만, 소리의 질을 통제할 수는 없다. 양을 통제할 뿐인 불륨 버튼은 그래서 양의 경제학인 포드주의(Fordism)를 연상시킨다.

 

1. 포드주의의 학습장

 

텔레비전은 영화가 아니다

: 기술적으로만 보자면 텔레비전은 영화 기술의 계승자이다. 텔레비전이 영화 기술의 계승자임은 분명하지만, 텔레비전 기술과 영화 기술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화가 어두운 곳에서 투사된 빛을 응시하는 시스템이라면, 텔레비전은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이다. 영화관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처음부터 사적 공간에서 응시된다. 텔레비전은 창문의 계승자인 동시에 참문을 뛰어넘는 기술복합체이다. 참문을 통해 우리가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실제 대상이다. 사실성과 직접성이라는 측면에서 창문은 텔레비전을 압도한다. 하지만 사실성과 직접성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면 텔레비전에 한참 뒤진다. 창문의 한계는 명확한다. 창문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창문이 제공하는 볼거리는 한정적이다. 창문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상은 '일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텔레비전과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텔레비전은 방송(Broadcasting)이라는 제도를 통해 현실화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관객들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텔레비전은 말 그대로 방사(放射)된다. 방송이라는 시스템과 결합한 텔레비전은 '양'이라는 개념을 일상화한다.

증폭의 무한확대

: 불륨은 증폭 장치이다. 증폭의 회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텔레비전은 다른 미디어와 구별된다. 증폭의 회로를 일상화시킨 최초의 미디어는 텔레비전이다. 불륨 장치는 불륨의 경제학인 포드주의의 일상화에 대한 은유이다. 대량생산된 물건은 대량으로 소비되어야 한다. 대량소비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량생산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포드는 대량생산 시스템 개발에 멈추지 않고, 대량생산된 자동차가 대량으로 소비될 수 있는 시스템 또한 고안해냈다. 대량생산 체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수평적으로(전국적인 규모로), 수직적으로(과거에는 소비자가 아니었던 사회계층을 소비자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대되어야 했다. 포드는 저임금 체계를 포기했다. 저임금 체계야말로 대중의 구매력을 약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포드는 또한 노동 통제 방식도 바꾸었다. 전통적인 노동 통제 방식이 노동자에게 근면의 윤리르 ㄹ불어넣는 것이었다면, 포드주의는 노동자를 소비자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 포드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임금과 노동 시간을 제시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기업의 대량생산 제품인 막대한 양의 재화들을 소비할 수 있늘 만큼 충분한 수입과 여가 시간을 제공받게 되었다. 이 단순한 듯 보이는 논리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햇다. 포드주의야말로 신대륙 미국의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포드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시장 논리는 도덕을 대체하며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핵심 원리고 자리잡는다. 이렇게 포드주의는 자동차 공장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생활윤리로 정착되었다.

포드주의는 생활원리이다

: 포드주의가 승리를 거둔 사회에서 우리는 일상은 포드주의 미학에 의해 지배받는다.

탈정치에서 경제 지향으로

: 포드주의는 전 사회로 퍼져나가고, 문화 생산 방식에까지 침투한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는 포드주의적 방식의 합리화에 의해 재편된 문화 산업의 대명사이다. 영화 산업의 포드주의는 미국에서도 1920년대에야 시작되었지만, 텔레비전은 처음부터 포드주의적이었다. 영화와 달리 텔레비전은 막대한 투자를 요구하기에 포드주의적 생산 방식 도입에 필요한 자본을 소유한 사람만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 방송 시스템은 애초부터 포드주의적 생산 방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텔레비전은 포드주의의 창시자 포그가 내세웠던 두 가지 원리, 즉 충분한 임금과 충분한 여가 시간 제공의 복합 효과가 가장 잘 발휘되는 영역이다. 텔레비전은 처음부터 산업적 성격이 분명했다. 텔레비전은 대량소비를 전제로 만들어진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대량소비는 시청률로 측정된다. 또한 시청률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존재이유를 설명해주는 도구이다. 텔레비전이 다른 미디어와 경쟁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뿐이다. 텔레비전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속성상 텔레비전 방송국이 운영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청료 수입에 따라 운영되는 공영방송 시스템이며, 다른 하나는 포드주의적 생산과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규모의 자본이 직접 운영하는 방식이다. 공영방송 시스템은 포드주의의 확산을 견제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거대 자본인 상업방송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에 포드주의에 대한 사회적 브레이크는 사실상 없다. 텔레비전은 광고업자들에게 시청자를 판다. 텔레비전을 보는 순간 시청자들은 알게 모르게 포드주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의 재택근무자로 고용되는 셈이다. 텔레비전 시청자는 시청 행위를 통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통계적 집합체로서 시장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청이라는 노동의 특성 때문에 자신이 재택근무 노동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은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많을수록 광고주로부터 많은 돈을 받는다. 방송국이 광고주로부터 얼마나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청 행위라는 재택근무에 몰입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 시청자는 무임금 재택근무자이다. 우리는 매일 밤 시청률 통계로 잡히면서 재택근무를 한다. 텔레비전은 탈이념적이다. 아니 탈이념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이념의 기준의 바뀐 것에 불과하다. 텔레비전을 지배하는 이념은 정치에서 경제로 바뀐다. 텔레비전만큼 경제적 이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디어는 없다. 때문에 텔레비전은 정치를 숭상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은 경제를 숭상한다.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은 신자유주의의 예고편과 유사하다.

 

2. 불륨 장치와 매스 커뮤니케이션

 

스텍터클 사회의 도래

: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텔레비전을 통한 의사소통에 포섭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텔레비전은 역사상 처음으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원형을 가시화한 미디어가 되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미디어도 텔레비전처럼 대량(Mass)의 단위에 접근하지 못 했다. 신문과 책은 문자 해독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대량의 의사소통을 현실화하는데 실패했다. 텔레비전을 통한 의사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양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텔레비전의 의미를 규정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텔레비전에 부착되어 있는 불륨 버튼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불륨을 통해 텔레비전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시청자의 무능력을 전제로 한 미디어이다. 텔레비전이 수신 전용으로 개발된 이유는 기술적 한계 때문만은 아니다. 수신 전용 텔레비전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용하다. 텔레비전은 수동적 태도를 학습하는 학교이다. 텔레비전을 통한 의사소통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이 의사소통은 일방적이다. 메세지의 발시자는 명확하다. 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을 수신하는 시청자는 누구인지 불명확한 불특정 다수이다. 이들은 모호한 대중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이 의사소통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모르게 만든다. 이러한 놀라운 비대칭성이 텔레비전에 숨어 있는 독이다. 이렇게 비대칭적인 의사소통 구조 위에 놓여 있는 한, 텔레비전은 아무리 탈정치적인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 현상 유지에 기여하는 보수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비단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다른 미디어에서도 의사소통의 비대칭성은 나타난다. 발신과 수신의 비대칭성은 어니 미디어에서도 발견되나, 비대칭성의 항상성 여부라는 측면에서 텔레비전은 다른 미디어와 다르다. 발신자에게 수신자로 벡터화된 의사소통 구조는 절대 변할 수 없다.

시청자는 영원한 시청자이다

: 현재의 수신자기 미래의 발신자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사회변동의 밑바탕이다. 발신과 수신 수조의 고착화는 지배를 연장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지배를 영속화하려면 수신의 충실도를 높이되, 수신 과정에서 학습 효과가 발휘되는 장치를 차단하면 된다. 텔레비전은 읽고 쓰는 능력의 불균등한 배치와 보급을 통해 노렸던 정치적 효과를 완성한 미디어이다. 매중 미디어란 민주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모든 종류의 인쇄 미디어를 통해 수준을 막론하고 아무런 지장 없이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경우 전적으로 다르다. 텔레비전을 의사소통의 미디어로 사용하는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별다른 훈련이 필요 없다. 놀라운 일이다. 덕분에 텔레비전은 그 어떤 미디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었다. 텔레비전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이상에 도달했다.

 

3. 대량생산-대량소비의 경제학

 

텔레비전 시청자와 포드주의적 소비주의

: 인쇄 미디어의 확산은 정치적 변동을 가져왔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출발한 '대중'이라는 사회학 개념은 포드주의를 내재한 텔레비전 시대에 와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다. 정치적 개념이었던 대중은 텔레비전의 시대에 경제적 개념이 되었다. 텔레비전만큼 동일한 상품에 대한 소비가 대량으로 일어나는 산업도 없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도시 설계를 할 때 정치의 장소인 프닉스(Pnyx)와 경제의 장소인 아고라(Agora)를 공간적으로 분리했다. 정치의 공간과 경제의 공간을 분리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테네인들은 경제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지만, 정치는 정의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이러한 분리를 쓸모없게 만든다.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를 이어주는 광고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거실에 앉아서 상품 사이를 산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사회의 최신 경향을 개인에게 그 어떤 미디어보다 빠르게 전달한다. 텔레비전 자체가 '최신'의 은유가 된다. 소비주의는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만 흐르지 않는다. 프로그램 내부에도 소비주의는 흐른다(PPL). 텔레비전은 "소비사회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해 소비자가 소지해야 할 사물의 최소한의 공통 파노폴리(Panopoly)로서의 표준적인 짐 꾸러미(Standard Package)를 제공한다.

폐쇄적인 시뮬라크라의 세계

: 텔레비전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을 가정에 전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텔레비전은 자기폐쇄적인 구조이다. 텔레비전의 기의는 현실이 아니다. 프로그램은 또 다른 프로그램을, 프로그램은 광고를, 광고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인류학은 '문화는 생활양식(Way of Life)의 총체'라는 신념을 지녀왔다. 생활양식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집단적 발명품이며, 소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생활약식조차도 선택할 수 있고 고를 수 있으며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 텔레비전은 소비재의 요소를 팔 뿐만 아니라 소비재들의 세트인 생활양식조차 판매한다. 소비자들은 유행에 따라하지만, 동시에 안정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이 무엇을 소비하는지, 소비의 최신 경향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최신 유행에 대한 정보는 사람들의 이런 불안을 일시에 해소시켜준다. 유행, 혹은 트랜드라는 보다 순화된 이름으로 텔레비전은 최신 정보를 매일매일 제공한다. 텔레비전은 근대의 형성기에 정치적 의미를 지녔던 대중을 탈정치화시키며, 공공의 이익과 결부되어 언급되었던 시민을 소비자로 바꾸어 놓는다. 대중은 텔레비전을 통해 결합되는 것 같아 보여도 그 결합은 분리된 상태로의 결합이다. 아무리 불륨을 높이거나 낮춰도 불륨 장치를 발신 장치로 바꿀 수는 없다. 시청자는 이런 운명의 �에 갇혀 있는 것이다.

 

CHANNEL 텔레비전과 모더니티의 시공간

 

채널은 불륨이라는 증폭 회로를 통해 대량생산된 메시지가 대량소비되기 위해 우리에게 몰려오는 통로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채널은 거실에 있는 시청자를 외부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길이 되는 셈이다. 채널은 복수이다. 채널은 불륨과 달리 복수이기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시청자에게 결정권을 위임한 듯한 뉘앙스를 주기도 한다. 채널이 과연 시청자에게 잃어버린 능동성을 회복시켜줄 가능성을 보장하느냐에 대한 논쟁보다 흥미로운 건, 텔레비전을 통한 지각의 변형 과정을 완성시켜주는 기제로서의 채널이다. 텔레비전이 켜지면 시청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더니티 속으로 발을 내딛는 셈이다.

 

1. 채널, 거대한 일방통행로

 

채널을 확보하라

: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철도라는 채널이 없었다면 근대국가는 불가능했다. 공간을 이어주는 철도라는 채널이 개발되면서 근대 국가는 이전의 정치 체제와는 다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봉건국가에서 의사소통의 망은 지배자만이 독점한다. 동일한 의사소통망 속에 편입된 사람들은 '어명'과는 다른 '공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철도라는 채널이 공간 이동과 더불어 의사소통의 망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두 공간 사이의 거리는 객관적인 거리보다 그 사이에 놓인 채널, 즉 철도에 따라 결정된다. 채널의 밀도는 한 공간과 또 다른 공간 사이의 거리를 결정한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도로라는 채널은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형성기에 도시 계획자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채널의 확보에 주력했다. 그 채널이 혁명군의 손에 들어가면 혁명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왕이 소유하면 봉건적 질서가 유지되었다. 텔레비전이라는 수신 장치와 메시지 발신자 사이를 이어주는 가상의 길, 즉 채널은 거대한 일방통행로이다. 메시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놓여 있는 일방통행로 채널은 모더니트를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의 특성이 주조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술 불가능한 역사

: 텔레비전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해 텔레비전에 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다. 각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수는 항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논문의 수보다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연구 논문들이 모여 텔레비전에 관한 일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나는 순진한 기대는 가능성 없는 헛된 꿈에 불과하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매우 분명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만드는 사람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코끼리와 같다. 우리 모두는 그 거대한 코끼리의 일부분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반 이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대상에서 역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의 역사는 서술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역사 서술이 가능하려면 대상의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은 시작이 있지만 , 끝이 없다. 개개의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건 시시포스(Sisyphos)의 무모한 도전과도 같다.

개개의 프로그램보다 흐름이 중요하다

: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물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한다면, 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합쳐진 텔레비전 자체는 하나의 흐름(Flow)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극장과 뮤직홀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경우 연극이나 영화를 분석하는 단위인 프로그램은 설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텔레비전의 진정한 의미는 개별 프로그램이 아니라 개별 프로그램들이 서로 맺는 연관관계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의 연관이 바로 '흐름'이다. 채널이라는 텔레비전의 흐름이 만들어낸 길이 가정으로 들어오면, 전혀 새로운 시공간이 펼쳐진다. 텔레비전의 채널은 관점주의(Perspectism)가 거짓이 아님을 입증해주는 메커니즘이다. 아니, 채널은 관점주의의 연장이며 확장이다. 텔레비전의 세계에는 복수의 공간뿐만 아니라 복수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관점주의는 시청자를 지치게 만드는 원천이다. 텔레비전의 관점주의는 채널의 병렬이자 나열이다. 텔레비전 채널은 대도시의 길과 같은 역할을 한다. 텔레비전 채널이 늘어나면 적은 채널만을 수신해야 했던 사람은 흥분하지만, 그 흥분은 일주일을 못 가서 따분함으로 바뀐다. 텔레비전은 객관과 주관이라는 가장 오래된 철학의 이분법을 무화시킨다. 텔레비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이 둘을 매개하지도 않는다. 텔레비전은 특유의 관점주의를 발휘하여 이 둘을 병치시킨다. 뉴스와 다큐멘터리는 사실 전달을 꾀한다. 하지만 뉴스가 끝나고 방송되는 드라마는 텔레비전이 공론장이라는 가정을 무색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픽션의 세계이다. 뉴스와 드라마 사이에는 객관 모델과 주관 모델을 가장 상업적인 방식으로 매개하는 놀라운 발명품인 광고가 있다. 광고는 전통적인 시장을 닮았다. 텔레비전의 천재성은 광고에서 빛난다. 광고처럼 객관 모델과 주관 모델을 천재적으로 결합하는 미디어는 없다. 광고는 객관이면서 동시에 주관이다. 광고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환상이다. 각 프로그램이 벽돌이라면, 광고는 벽돌과 벽돌을 연결시키고 접착시키는 시멘트의 역할을 수행한다. 프로그램이라는 벽돌과 광고라는 시멘트가 연결되어 각각의 채널은 하나의 벽체를 형성한다. 텔레비전은 미디어에 관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텔레비전은 독창성은 전혀 없지만, 독창적인 모든 요소들을 나열함으로써 가장 독창적인 존재가 되는 마법을 발휘하는 미디어이다. 모든 것은 혼재되어 있는 채널 속에서 텔레비전이 시청자에게 부과하는, 혹은 시청자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주입하는 특정한 행동양식의 규칙이 숨어 있다. 시청자는 텔레비전을 통해 텔레비전의 규칙과 규율을 학습하며, 텔레비전이 구축한 세계 속으로 편입된다.

 

2. 사적 공간에 공적 공간이 침투하는 길

 

몰입을 위한 외출

: 텔레비전은 주로 사적 공간에 놓여 있다. 텔레비전은 영화를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텔레비전이 놓인 공간의 특성 때문에 텔레비전과 영화는전혀 다른 미디어가 된다. 영화를 보는 공간과 텔레비전이 놓인 공간의 차이는 두 미디어의 의미를 바꾸어 놓는다. 영화 관람은 텔레비전 시청과 비교해보면 '몰입'의 형태를 지닌다. 몰입이라는 영화 특유의 맥락은 영화가 소비되는 공간환경의 특성에 기인한다. 영화 관람의전제는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의 이동이다. 그래서 영화 관람은 이벤트의 성격을 지닌다.

또 하나의 가족, 텔레비전

: 영화 구경은 이벤트이지만 텔레비전 시청은 그보다 휠씬 더 발랄하고, 캐주얼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텔레비전은 일종의 가족 구성원이자, 가족을 구성하는 환경이다. 영화와 달리 우리는 텔레비전에 몰입할 수 없다. 텔레비전은 개인에게 너무나 친숙한 거실 혹은 침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의 산만함이 결코 텔레비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텔레비전은 놓여 있는 공간의 특성 때문에 영화를 압도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텔레비전은 가부장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이다.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중산층 가정의 거실 배치는 달라졌다. 텔레비전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가부장은 가족들과 함께 가부장의 자리를 대체한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은 현대 가정의 새로운 토템의 지위를 획득했다. 폭력과 섹스 그리고 문화의 하향평준화 논쟁이 텔레비전을 타깃으로 삼는 이유는 텔레비전이 전적으로 가족이라는 맥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적 공간에 재현되는 공적 공간

: 텔레비전은 분명 사적 공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켜지면 거실은 더이상 단순한 사적 공간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외적 세계가 거실을 점령한다. 거실은 텔레비전을 통해 방출되는 외부 세계의 저장고가 된다. 본래 사적 공간은 공적 공간의 안티테제였다. 사적 공간은 개인이 그를 구속하고 강제하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후퇴하여 구축한 안전한 진지와도 같았다. 개인만의 진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힘이 강해질수록 절실해졌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전통적 관계에 따르면, 공적 공간은 외화된 혹은 밖으로 드러난 사적 공간이다. 때문에 공적 고간은 사적 공간을 저제로 삼는다. 사적 공간이 외화되어 공적 공간이 형성될 때 '정치'가 발생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전통적인 관계를 뒤흔든다. 개인의사적 공간에는 두 종류의 창문이 있다. 하나는 이 창문을 통해 개인은 안전한 사적 공간에서 외부에 있는 공적 공간을 응시한다. 개인이 창문을 닫는 순간 실내에는 개인이 지배하는 자기폐쇄적인 세계가 구축된다. 하지만 전자 창문 텔레비전은 전통적 창문과는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텔레비전을 켤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사적 공간에 있는 개인이 선택한다. 텔레비전은 켜는 순간 바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매개하는 채널로 기능한다. 근대적 창문이 기능을 상실하면 텔레비전이라는 전자 창문은 외부와 내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근대적 경계를 뒤섞어 놓는다. 결저으이 방향이 바뀐다. 전통적인 관계에서 사적 영역은 공적 영역의 전제였기에, 공적 영역을 결정짓는 요인은 사적 영역이었다. 반면에 텔레비전이 매개하는 시대에 공적 영역은 텔레비전을 통해 사적 영역을 결정하고 규정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텔레비전은 사적인 것을 공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라는 '흐름'의 기원이 방송국이라면, 거실은 온갖 수원지에서 훌러나온 '흐름'이 채널을 통해 모이는 저수지이다.

 

3. 시청자가 호명당하는 통로

 

국가가 국민을 호명하는 장치

: 텔레비전의 채널을 통해 공적 영역이 지속적으로 침투하면 텔레비전 시청자는 단순히 개인으로 머무를 수 없다. 그는 원하지 않아도 공적 논리에 의해 규정되며, 개성 외에 다른 특징을 부여받는다. 텔레비전은 시청자를 호명한다. 20세기에 여러 미디어가 개발되었지만, 대중 미디어로 발전한 것들은 모두 무선 기술을 채용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무선 기술의 채택 여부는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 무선은 공간적 제약을 탈피하도록 하는 기술적 수단이다. 무선기술이야말로 모더니티를 특징짓는 가장 놀라운 기술이다. 무선이란 공간적 자유와 동의어이다. 텔레비전은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열정이 담긴 무선 기술의 결정체이지만, 무선 기술은 군사적 특성 때문에 처음부터 국가기구의 개입을 유발한 기술이었다. 무선 기술의 상업적 사용은 무선 기술이 등장했던 초창기부터 국가적 논란거리였다. 털레비전의 일상성에서 기인한 막대한 파급 효과를 국가기구는 놓치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국가가 시청자를 국민으로 호명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미디어이다. 텔레비전은 민족이라는 근대의 발명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효과적인 미디어이다. 텔레비전 방송의 전파 관리 시스템은 국가 사이의 경계를 확고하게 한다. 방송 전파에 의한 경계는 정치적 국경보다 더욱 강고한 힘을 발휘한다. 텔레비전은 동일한 전파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문화를 공유하는 집합체로 구성해낸다. 도일한 시청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채널을 통한 집합적 경험을 공유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집합 경험의 대상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될 때 그 효과는 배가된다. 라이브 중계는 그 어떤 미디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텔레비전만의 독점 영역이다. 텔레비전은 개인의 경험에 집합적 성격과 더불어 동시성을 불어넣는다.

집합 경험의 동시성으로 인한 황홀경의 장소

: 동시성이 경험은 전적으로 무선 기술 덕택이다. 집합적 경험이 동시성과 결합할 때 발휘되는 효과는 놀랍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집합적으로 경험되는가, 개별적으로 경험되는가에 따라 사건이 유발하는 사태는전적으로 다른 성격을 띠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 텔레비전은 아무리 개인이 사적 공간에서 혼자 시청하고 있다하더라도, 다른 시청자와 동일한 경험으로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믿음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감성의 상호작용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집합적 동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텔레비전은 현대의 토템이다. 텔레비전은 토템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정서를 공유할 때 보여주는 심리 상태와 유사한 반응을 유도한다. 매해 반복되는 자연재해 특별방송은 재난방송이 방송되는 지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운명 공동체라는 느낌을 부여한다. 재난방송은 재난을 극복하거나 예방하는 효과가 거의 없다. 재난방송은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중계된다. 재난방송을 재난 지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시청자들은 재난 지역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다. 재난 지역 외부의 사람들은 재난방송을 통해 다른 시청자들과 정서를 공유한다. 채널을 통해 속삭이는 집단의 목소리가 거실로 쏟아지는 한,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거실은 더이상 사적 공간이 아니다. 단지 시청자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4. 거실 속의 외부 세계

 

사회적 삶은 재현의 문제이다

: 시청자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이 외부 세계를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는,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만 보여준다는 시청자들의 믿음에 힘입어 텔레비전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텔레비전이 뉴스를 통해 매일매일 그리고 수시로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시건들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건의 중요도는 사건의 심각성이 아니라 텔레비전 뉴스에서 다뤄지는 시간의 양에 따라 측정된다. 사회적 삶은 전적으로 재현의 문제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재현되지 않으면, 있던 사건도 없는 것이 된다. 실제로 있는 사건이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회자되고, 기억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텔레비전을 통한 재현이 필요하다. 사실 자체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현실은 제자리를 잃고, 재현만이 남는다.

재현은 사실이 아니다

: 텔레비전은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만능 심판관이지만, 정작 텔레비전은 사실주의를 숭상하지 않는다. 사진은 실재를 빛으로 기록한  미디어이다. 사진과 실재 대상은 인덱스(Index)의 관계이다. 실재 대상과 사진의 관계에서 실재는 원본이자 근원이며 원인이다. 영화에서도 사진의 이러한 인텍스적 성격은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와서 모든 것은 변화한다. 텔레비전은 인덱스적 관계를 맺고 있던 재현된 대상과 원본 사이의 관게를 증발시킨다. 텔레비전 전파가 방사되는 순간 인덱스적 관계는 부서져 전파 속으로 사라진다.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대상과 원본과 인텍스적 관계가 깨진 시뮬라크라일 뿐이다. 텔레비전에는 존재론적 애매성이 새겨져 있다. 텔레비전에는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이 뒤섞여 있다. 실재와 닮았지만 실재가 아닌 환영이 채널을 통해 거실로 쏟아지면, 시청자들의 판단기준은 실재가 아니라 환영이 된다.

텔레비전 시청자는 정착민이다

: 영화 팬이 유목민이라면 텔레비전 시청자는 정착민이다. 유목민인 영화팬은 통제되지 않는다. 영화의 흥행은 전적으로 영화 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자는 통제하기 쉽다. 텔레비전 시청자는 이동 능력을 상실했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얌전한 정주민으로 만들고 이동에 대한 야수성을 잠재우는 손쉬운 방법은 텔레비전이 이동하는 것이다. 정착민 시청자에게 공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는 낯설다. 공간적 거리가 없는 채널의 선택에 따라 시청자는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쉽게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채널 사이에는 공간적 거리가 없지만, 한 채널과 그 다음 채널 사이에는 엄청난 공간적 거리가 있다.

 

5. 거실로 모더니티의 시간이 쏟아지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계

: 거꾸로 사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시계는 모더니티의 창조물이다. 시간이라는 범주는 변하지 않아도, 시간에 대한 태도, 시간을 지각하는 문화 형식들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가 외부 공간을 지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동시에 텔레비전에 내재되어 있는 독특한 시간 의식을 체화하게 된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의 시간 구조에 자신을 맞추어간다. 본래 인간의 의식은 흐름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은 방향이 없다. 인간의 의식이 텔레비전에 의해 포섭되면, 인간의 의식은 채널에 의해 주조된다. 텔레비전의 시간 구조는 선형적이다. 신문은 뉴스의 모자이크이다. 뉴스가 어떤 식으로 나에게 지각될지는 전적으로 신문을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 뉴스는 선형적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흐름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시간 구조는 우리에게 다른 미디어와는 전적으로 다른 시간에 대한 감각을 요구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시간 구조는 독자에게 부여된 시간 구조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시간이 잠시 멈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대형 사고에 속한다. 텔레비전의 시간 구조는 일상의 시간의 흐름을 흉내낸다. 그리고 일상의 시간은 자연스레 텔레비전의 시간 구조에 적응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자연의 리듬에 순응한 인간의 하루 시간을 재현한다. 사람들이 새벽과 오전, 오후 그리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듯,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개인의 일상을 바탕으로 시간 구조화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흐름은 일상뿐만 아니라 계절도 흉내낸다. 프로그램 개편 주기는 희한하게도 계절의 순환 주기와 같다. 이러한 시간 구조 때문에 개인들은 자신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흐름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템포와 스피드

: 메트로폴리스 거주민들의 독특한 정신 상태는 시간 감각에서 절정을 이룬다. 메트로폴리스 거주민들에게 어슬렁거림이 없다. 모더니티의 시간 논리는 메트로폴리스 거주민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것이 휙휙 지나가는 경험은 메트로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독점해왔다. 영화의 스피드는 영화관을 선택한 사람만이, 혹시 영화의 스피드에 동의한 사람만이 경험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모든 거실을 스피드가 쏟아지는 공간으로 만든다. 영화는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모더니티의 시간을 주입했지만, 텔레비전은 모든 사람을 모더니티적 시간을 학습하는 학생으로 만든다. 모더니티의 공적 시간은 정확성을 요구한다. 표준시 제정 이후, 모더니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간 관리는 경영학의 출발점이다. 적어도 공적 시간은 정확성과 템포가 요구된다. 정확성과 템포에서 어긋난다면 그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 텔레비전만큼 시간 계산의 압박에 시달리는 미디어도 없다. 테일러의 '과학적 시간 관리'의 최고봉은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에 내재된 엄격한 시간 관리 방식은 가정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의 사적 시간과 충돌을 일으킨다. 사적 시간은 공적 시간처럼 엄격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적 시간은 텔레비전이 켜지는 그 순간부터 공적 시간을 사적 공간에 방사하는 텔레비전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한다. 모더니티 특유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은 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거실 안으로 폭포처럼 쏟아진다. 텔레비전이 켜지면 거실은 모더니티의 강의실로 변모한다.

 

OFF 텔레비전을 끄다

 

오프 버튼을 누른다는 건 단지 잠에 들기 위해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세상과 잠시 이별한다는 뜻일까? 우리가 오프 버튼을 누른다고 해서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텔레비전이 꺼진다는 건, 수상기가 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는 뜻이다. 무한한 미디어는 없다. 텔레비전의 지배가 끝나고 새로운 미디어의 지배가 도래하면 개개의 텔레비전 수상기가 켜져 있더라도 텔레비전의 시대는 끝이 날 것이다. 텔레비전은 종말에 도달해 있는가? 텔레비전 시대는 어떻게 끝나게 될까? 텔레비전 수강기의 오프 버튼이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1.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나타내는 문화적 징후들

 

텔레비전은 변하고 있다

: 최근 들어 텔레비전의 중심성에 도전하는 새로운 미디어들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 시대는 황혼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텔레비전 시대의 문화적 관습에 따르면 거실에 높인 텔레비전은 전화기와 더불어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주요 통로였다. 하지만 퍼스널 컴퓨터의 보급과 핸드폰의 확산 결과 텔레비전의 매개 독점은 이미 파괴되었다. 특정 세대에게 텔레비전의 중심성은 이미 끝났다. 새로운 미디어의 확산은 텔레비전의 맥락을 변화시킨다. 이 모든 변화에 의해 텔레비전 시청의 새로운 문화적 관습이 형성된다. 텔레비전의 전통적 시청 방식이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징후는 시청률이 드라마 신드롬을 반영하지 못하는 사례의 빈번한 등장이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은 텔레비전 수상기의 축소와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덕택에 텔레비전은 가족이 함께 보는 도구에서 이동하는 개인의 도구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소비되는 독점적 도구로서의 자격을 급격히 상실하는 과정과 함께 진행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이제 텔레비전 수상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시청된다. 텔레비전의 이동성이 증가하면서 개인의 사적 영역의 성격 또한 변화한다. 시청의 단위가 개인으로 변화하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도덕적 공포감이 약화된다. 텔레비전에 대한 태도는 급격하게 자유주의적으로 변화한다. 텔레비전 시청의 맥락이 거실의 대형 텔레비전에서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로 이동하는 이유도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텔레비전 시청을 탈맥락화하려는 10대의 전략과 결합한다. DMB와 PMP로 개인들이 이동식 텔레비전 시청에 몰두하면, 지하철 내부에는 개인들의 사적 공간이 점점이 흩어지며 나타난다.

본방을 사수하라?

: 시청 단위의 변화와 더불어 프로그램이 유통되는 방법도 달라지고 있다. 다운족의 규모가 작지 않다는 사실은, 최근 프로그램의 화제성과 시청률이 반드시 상응하지는 않는 균열 현상이 점차 빈번해지고 있는 추세를 통해 알 수 있다. '미드'와 '일드'는 형태상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일방적 지배에 대항해 능동성이 발휘된 경우로 볼 수 있지만, 형성된 매스 커뮤니케이션 대항 구조를 통해 소비되는 건 드라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드'와 '일드'를 과소평가할 수도 없다. '미드'와 '일드'는 붕괴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텔레비전의 견고한 중앙집권적 매스 커뮤니케이션망에 처음으로 나타난 균열이기 때문이다.

 

2. 뉴미디어, 상충하는 의사소통 형식

 

올드 미디어의 황혼

: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메시지의 수신자였던 적은 없다.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이미 종교의 영향력을 앞선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국민국가의 경계와 종교의 벽쯤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스 커뮤니케이션 형식이 드라마를 등에 업고 이렇게 전지구적 영향력을 행사할수록, 매스 커뮤니케이션 구조로 인한 위험성은 더 크게 자라는 셈이다. 텔레비전의 지위를 위협하는 뉴 미디어들은 텔레비전과는 구별되는 의사소통 형식들을 보여준다. 텔레비전이 포디즘의 원리를 구현한 의사소통 형식이라면, 뉴 미디어는 탈포드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포드주의의 경제학에 충실한 텔레비전은 경제학적 기준에 따라 세상사를 스크리닝(Screening) 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노쇠

: 올드 미디어의 대표주자 텔레비전에서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은 뉴 미디어 인터넷의 매력에 빠져든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올드 미디어라고 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인터넷의 새로움은 피드백(Feedback)의 열린 가능성에 있다. 발화자가 있고 수신자가 있다는 점에서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두 의사소통 형식의 결정적인 차이는 발화자와 수신자의 관계에 있다. 하이터텍스트(Hypertext)인 웹은 텍스트인 텔레비전과 달리 지식 생산 과정의 집단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인터넷에서 텔레비전에 의해 선발되거나 선택될 수 없는 찌질이부터 엘리트까지 모두가 동일한 출발점에서 뜀박질을 한다. 텔레비전이 엘리트 발화구조하면 웹은 극단적인 민중의 발화 구조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의사소통 구조를 내장한 텔레비전에서 의사소통의 흐름은 구조화되어 있고 고정되어 있지만, 웹을 통한 의사소통은 무정형의 망을 통해 이뤄진다. 두 의사소통 형식의 이러한 차이에서 알 수 있듯, 텔레비전이 만들어낸 문화형식과 인터넷이 만들어낸 문화형식은 서로 상이할 뿐만 아니라 충돌한다. 때로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의사소통 형식은 세대간 갈등이나 계급적 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응답을 허용하는 뉴 미디어의 가능성

: 뉴 미디어 인터넷에 사람들이 매혹된 이유는 전적으로 개방된 응답 가능성 때문이다. 응답 가능성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지는 콘텐츠의 확산 속도와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방식에서 확인된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시위의 현장에는 신문, 방송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미디어가 공존했다. 대표하는 시기가 서로 상이한 새 미디어의 경합이 벌어지자 각 미디어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나타났다. 촛불시위는 미디어 전쟁이었고, 응답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이 실험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촛불시위는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한 인터넷 의사소통 방식이 갖고 있는 잠재력과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폭발력은 휘발성이었다. 촛불시위의 급격한 쇠퇴는 조직화된 힘의 조직적 대응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웹 기반 의사소통 형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과장은 금물이다.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텔레비전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3. 왜 오프 버튼을 찾아내야 하는가

 

텔레비전의 진화

: 텔레비전은 그 어떤 미디어도 이루지 못한, 중앙집권 시스템과 자본의 힘이 결합했을 때 발휘되는 괴물 같은 상황에 도달한 미디어이다. 전세계의 텔레비전 방송은 몇 안 되는 거대 미디어 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자본에 의한 지배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영리한 텔레비전은 텔레비전 비판자들보다 빠른 속도로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 거대하게 축적된 자본의 덩어리이면서 자기학습 능력까지 소유한 텔레비전 앞에서 개인은 초라하다. 개인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다. 첫 번째 선택지에는 이런 명령이 적혀 있다. "닥치고 즐겨!" 이를 열지 않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텔레비전을 버려!"이다. 두 선택은 모두 극단적이다.

카우치 포테이토? 아니면 텔레비전을 버려?

: 텔레비전 앞에서 입 닥치고 그저 즐기기만 하는 카우치 포테이도(Couch Potato)로 살지 않고, 그러면서도 텔레비전을 버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텔레비전을 끌 수 있는 능력을 연마해야 한다. 아무리 텔레비전이 뉴 미디어의 도전을 흡수한다 하더라도 텔레비전 시대가 영원할 수는 없다.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 텔레비전을 살해한다고 해서, 텔레비전의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뉴 미디어와 텔레비전 결합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다. 텔레비전이 다른 미디어에 의해 사라지는 것과 우리가 텔레비전 끄기를 통해 스스로 텔레비전을 조절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는 텔레비전에 내재된 상업성 때문도, 텔레비전이 바보상자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바로 텔레비전이 외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시청자가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끄기'는 부재하는 응답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텔레비전 안 보기는 텔레비전 중독의 치유법일 수는 있으나, 텔레비전이 내표한 위험성의 진앙지인 의사소통 구조 자체는 전혀 건드릴 수 없다.

실어증에서 벗어나자

: 텔레비전의 시대는 대화 불능 시대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은 시청자를 침묵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텔레비전은 문명의 실어증을 유발한다. 따라서 잃어버린 대화 능력의 복원은 텔레비전 시대에 일종의 혁명이다. 텔레비전을 끈다는 것은 텔레비전을 더이상 시청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시대, 우리가 혁명을 복원하려면 단순히 텔레비전을 끄고 시청하지 않는 소극적이고 즉각적인 부정에 머물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 알게 모르게 조정한 실어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에서 이득을 얻는고 있는 세력은 응답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기초한 권력은 공손한 응대 말고는 어떠한 형태의 응답고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응답에 적대적이다. 자신들의 권력은 무응답 덕택에 영속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텔레비전이 더이상 호명의 도구로만 작용하지 않도록 개입해야 한다. 대꾸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라는 '흐름'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결정권의 독점 구조가 만들어내는 '흐름'에 대한 응답은 일방통행적 의사소통 구조에 대항하는 대안적 의사소통의 흐름을 창출하는 일일 수도, 발신 독점을 해체하는 시도로 구체화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으로 인한 문제와 진정으로 거리를 두고 싶다면, 텔레비전을 끊을 게 아니라 우리가 텔레비전이 알게 모르게 체화시킨 실어증에 빠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현대를 지배하는 가장 거대한 매스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텔레비전과 대결하는 방법이다.

 

에필로그 - 텔레비전 시대, 살 것인가 살아질 것인가

 

텔레비전 마주보기

: 평범한 테제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자신이 삶의 주인리가 생각하지만, 우리들 각자의 삶을 우리는 통제하고 조절할 수 없다. 우리는 구조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주장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시대의 종말이 언제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는 자신의 삶을 통헤할 수 있는 능력의 회복 여부이다. 그래서 삶의 통제 능력 회복 여부는 텔레비전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성찰과 연결되어 있다.

자폐증과 실어증 사이에서

: 시청자들이 중간지대에 안주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학자들은 시청자들을 귀찮게 한다. 중간지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귀찮기만 하다. 아니, 대답할 수도 없다. 반면 텔레비전은 시청자들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시청자에게 위안을 주고, 기쁨을 준다. 학자들이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귀찮게 할수록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텔레비전 앞에서 시청자들은 실어증에 빠져있고, 학자들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중간지대가 더 위험하다

: 성공의 기술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평범한 시청자에게는 성공의 기술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매개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세련된 미디어가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흡입하는 이 위력적인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친애하는 유권자'나 '위대한 국민' 혹은 '존경하는 시청자 여러분'으로 명명되며 추상명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이 위험에서 탈주하는 길은 곧 개인을 보호하는 길이다. 생존의 기술 익히기는 우리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대상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