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알마, 2008,(080522).

바람과 술 2008. 6. 15. 06:26

산책을 시작하며

 

1부 일상의 재발견

 

이순신장군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 - 세종로 '이순신 동상'을 찾아

 

'한국의 중심도로' 세종로

: 경부고속도로가 경제의 중심도로라면, 세종로는 역사의 중심도로다. 이미 조선시대 때 나라의 중심도로로 조성된 세종로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거느리며 제1도로의 지위를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1914년 서울과 전국 각 지역 간 거리를 재는 기준점인 도로원표(1997년 태평로 코리아나호텔 옆으로 옮겨짐)가 지금의 이순신 동상 자리에 만들어지면서부터는 아예 지리적 중심이 되었다.

이승만-세종대왕-이순신

: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4.19혁명 때 시민들에 의해 철거된 이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세종로라는 이름에 걸맞는 세종대왕 동상이었다. 그러나 반공이 국시였던 1960년대 후반, 광화문을 시멘트와 페인트로 복원(?)한 박정희는 '문약한' 세종대왕 동상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결국 1968년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보완해주리란 기대를 떠안은 이순신 동상이 한국의 대표도로 세종로를 '접수'했다. 이순신 장군이 접수한 곳은 비단 세종로만이 아니었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총재를 맡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주도로 전국에 걸쳐 32종 352개의 '애국선열' 동상이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 78%인 274개가 이순신 동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초등학교에는 '좌승복 우순신'하는 식으로 거의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순신 동상이 세워졌다.

교체될 뻔한 이순신 동상

: 박정희 정권은 희박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자리만 나면 애국선열 동상 세우기에 바빴다. 군사정권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 '속도'에만 매달려 '질'은 형편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제작을 끝마치다 보니 그 모양이 조잡하기 그지 없었다. 청동이 아니라 값싼 시멘트로 건성건성 만들어 표저이 다들 밋밋했고, 표준 영정과도 맞지 않아 얼굴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결국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세운 352개 동상 중 절반 이상이 철거 후 다시 제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세종로 이순신 동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 1977년 서울시는 이순신 동상 재건립을 위해 2억 3,000만원의 예산을 배정하고, 새로운 동상의 모형까지 제작했다. 박 대통령이 갑자기 죽지만 않았어도 아마 세종로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이순신 동상이 들어섰을 것이다.

21세기에 맞닥뜨린 19세기적 마인드

: 2007년 말 서울시가 세종로를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처럼 광장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왕복 16차선인 세종로를 10차선으로 줄여 중앙에 광장과 분수대를 만들고, 조선시대 육조거리와 월대 등을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 영구지배'를 꿈꾸며 심은 은행나무 스물아홉 그루는 양쪽 보도로 옮겨 심고, 차도 때문에 광화문 코앞까지 밀려난 두 개의 해태상도 원래 위치로 옮기기로 했다. 그동안 충무로 등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던 이순신 동상은 '국민 정서'를 고려해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청계고가는 갔어도 화두는 여전하다 -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를 걸으며

 

청계고가를 걸으며 서울의 과거와 오늘을 보다

: 1969년 완공된 삼일아파트는 '불도저'라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이 판잣집을 헐고 세운 시민아파트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청계천 '복원'만이 아니라 주변부 '재개발사업'까지 두루 포괄하는 일련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슬럼화된 삼일아파트가 온전히 남아 있기는 힘든 일이다. 1970년대에 들어선 삼일빌딩(114m)은 그로부터 15년 후 여의도에 249m 높이의 63빌딜이 들어설 때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일제 때 시작된 청계천 복개, 40여 년 만에 끝나다

: 개발시대의 상징인 '청계고가'는 청계천을 덮어버리고 놓은 '청계천로'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로 올라간다. 이미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도심에 가장 쉽게 도로를 만드는 방법은 하천을 물 흐를 공간만 남겨두고 덮는 것이다. 이를 '하천을 덮어 길로 쓴다'고 하여 복개(覆蓋)도로라 한다. 일제는 그런 식으로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광교 주변 청계천을 복개했다. 계속해서 청계천 본류도 복개할 계획이었으나, 1945년 일본이 전쟁에 지면서 복개사업 역시 중단됐다. 청계천이 다시 복개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1955년 들어서였다. 이번에는 전쟁으로 급증한 천변 판잣집 철거와 도심정화라는 목적이 추가됐다. 비록 속도는 느릴지언정 복개사업은 계속됐고, 처음 복개를 시작한 동아일보사 앞에서부터 6km 정도 나아가게 된다. 복개된 것은 비단 청계천만이 아니었다. 월곡천이나 녹번천, 홍제천 등 서울에 있는 하천 가운데 1/3이 복개됐다. 심지어 경주나 남원에서는 읍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까지 덮어버리는 등 하천 복개는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대부분 도로나 주차장 등으로 사용됐다.

'불도저' 김현옥과 청계고가

: 군사정권의 진군은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도로 위에 도로를 또 깔았다. 바로 고가도로다. 

청계고가가 놓인 까닭은?

청계고가는 갔어도 화두는 여전하다

: '빨리빨리'에만 치중한 나머지 시공과 설계가 동시에 이루어지거나, 심지어 '선시공-후설계'라는 전에 없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예산 조달 계획이나 완성된 설계도 하나 없이 일단 기공식부터 하고 본 것이다. 

 

어머니가 가발공장에 취직하던 해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평화시장'을 찾아

 

5년 이상 경력자는 전부 환자

평화시장이 아닌 착취시장

각하께선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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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전태일 동판과 오늘의 대한민국

 

해방과 함께 태어난 전쟁과 함께 자라다 - 용산동 2가 '해방촌'을 찾아

 

서울 속 '외딴섬' 해방촌 찾아가기

: '해방촌'이란 이름은 이 동네가 해방과 동시에 생겨났기에 붙은 이름이다. 또, 한국전쟁 후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이들이 임시거처로 사용한 곳도 이곳 남산 기슭의 해방촌이었다.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란 해방촌

: 다른 지역과 해방촌을 잇는 길은 크게 세 개다. 남산3호터널을 빠져나와 미군기지 앞의 진입로를 통해 들어가거나 남산 중턱의 소월길을 통해, 혹은 서쪽의 후암동 길을 거쳐 들어갈 수 있다. 서울 중심부에 있는 동에치곤 진출입로 사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태생이 해방 직후 들어온 해외동포와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의 '임시거처'였기에 주거나 교통시설 역시 임시의 그것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해방촌이 생겨난 것은 일본군이 미군에 패퇴하면서부터다. 본디 해방촌이 자리한 용산동 2가 산2-5번지 일대는 일본군 제20사단의 사격장이 있던 곳이다.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청이 접수하기는 했으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 공터는 전쟁통에 서울로 몰려든 실향민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해방촌의 랜드마크 해방교회

월남인들의 인큐베이터 해방촌

해방촌의 오늘

해방촌이 사라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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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빚다 - 남산공원 '김구와 안중근 동상'을 찾아

 

'반도 조각계의 중진' 김경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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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을 수놓은 친일작가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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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이 '독립운동'을 심사하던 시대

: '항일'은 없고 '친일'만 존재했던 일제강점기의 조선 미술계. 그들은 해방 후 '친일'에서 '친독재'로 변신하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다.

지금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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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60년 만에 닻 올리는 친일 역사 청산 -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을 찾아

 

해방 3년 만에 시도된 역사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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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와해를 위한 총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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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사라진 반민법과 반민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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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발간만이 전부는 아니다

: 독립유공자 후손의 80%가 고졸학력이고, 60%가 무직인 점을 고려하면 역사는 참으로 불공평하다.

 

침략과 수탈에서 평화 교류의 철도로 - '서울역'을 찾아

 

경성역 '그릴'과 '티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쌀 한말에 70전, 설렁탕 한 그릇에 15전 하던 시절, 양식 A코스가 3원 20전이나 했으나 말이다.

서울역에서 발견한 경성역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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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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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과 수탈이 아닌 평화와 교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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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문화의 재발견

 

100년 한국 영화와 함께한 산증인 - 종로 3가 '단성사'를 찾아

 

단성사의 탄생

: 단성사가 2층 목조건물로 처음 설립된 것은 1907년 지명근과 박태일, 주수영 등에 의해서였다. 다만 그때는 영화 상영이 아니라 기생들의 승무나 가야금 공연 등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었는데, 승무 춤꾼 박리화와 단가 명창 채희, 관객들을 곧잘 웃겼던 명화 등은 지금의 여느 인기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영화의 날'과 박승필

: 공연장으로 쓰이던 단성사가 명실 공히 근대적 상설영화관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1910년대 중반 판소리와 탈춤 등 전통연희 공연장인 광무대를 운영하던 박승필에게 인수되면서부터다. 물론 그 당시 인기 있던 영화는 지금의 영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무대에서 표현하기 힘든 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삽입하는 연쇄극, 이른바 키로드라마(Kino drama) 형식이었다. 일제강점 상황에서 한국 영화 제작이 이처럼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영화계에서 한국인 최초로 극장으로 추적한 자본을 영화제작에 재투자한 박승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하의 영화 산업

: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는 영상이 연극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 있던 키로드라마 형식을 뛰어넘어 영상만으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영화였다. 이 영화는 조선총도부 체신국이 1923년 저축을 장려하려고 만든 내선일체 홍보용 영화였다. 제목의 '맹서'라는 단어도 그렇거니와 전국을 돌려 '무료 상영'했다는 점에서, 그 숨은 의도가 뻔히 보인다. 조선총독부 내에 '활동사진반'과 '이동영사반'을 두고 홍보영화제작과 지방 순회상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그때였다. 이들 조직이 생긴 1920년대부터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까지 17년동안 무려 679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4,733차례 상영됐다고 한다.

한국 영화의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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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조국 근대화의 상징 -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세운상가' 유랑기

 

'공습 대비용 공터'가 '한국판 라데팡스'로

: 지금은 회복이 블가능해 보일 정도로 쇠락했지만, 사실 세운상가는 지난 1967년 한국 최초의 도심재개발사업으로 탄생한 최첨단 주상복합빌딩이다.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정확히 13일 전인 1941년 11월 25일, 일제는 미군의 공습을 대비하기 위한 방공용 공터를 크게 확충하기로 했다. 결국 일제는 잘 서 있는 건물까지 헐어가며 방공용 공터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해서 소개된 서울의 주요 지역은 다음과 같다. 1. 서울역~신세계백화점 앞 퇴계로 일부 : 너비 40m, 길이 1,080m 2. 필등~신당동 : 너비 40m, 길이 1,680m 3. 서울서부역~갈월동 : 너비 30m, 길이 800m 4. 서울역~충정로 : 너비 30m, 길이 약 600m 5. 종묘 앞~대한국장 앞 : 너비 50m, 길이 1,180m. 하지만 1차 소개를 끝낸 지 두 달도 안되어 일본이 패망하면서, 소개됐던 공터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됐다. 그중 1~4는 각각 '퇴계로'와 '청파로', '의주로' 등으로 바뀌었으나, 5는 그냥 방치되던 실정이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전쟁 중에 양산된 빈민들이었다. 게다가 이른바 종삼(鐘三)이라 불리던 집창촌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돼, 서울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따라서 관계 당국이 재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66년 드디어 재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연면적 2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세운상가가 건설이 그것이다. 그 구상을 현실화한 이는 서른다섯 살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김수근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설계안을 짰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

: 얼핏 보면 하나의 건물 같지만 김현옥 시장 당시 완공된 세운상가는 실제 4개의 건물, 모두 8개의 상가로 이루어져 있다. 종로와 청계천로 사이에 '현대상가(종로세운상가)'와 '세운상가 가동'이 한건물에, 청계천로와 을지로 사이에는 '대림청계상가'와 '대림상가'가, 을지로와 마른내길 사이에는 '삼풍상가'와 '풍전호텔'이, 다시 마른내길과 충무로 사이에는 '신성상가'와 '진양상가'가 한줄로 연이어 있는 구조다. 처음부터 세운상가는 주거와 상업 그리고 사무공간을 모두 포함하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이었다. 게다가 자가용 승용차도 별로 없고 대중교통도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도심에 있는 직장까지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세운상가 아파트의 인기는 단연 으뜸이었다. 주민 대부분의 중산층 이상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관리비 안 내면 단전 조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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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근대화, 다시 자연으로

: 조만간 세운상가는 영영 사라질 것이다. 2008년까지 종로에서 청계천까지 90m, 2012년까지 청계천에서 을지로까지 290m, 마지막으로 2015년 을지로에서 퇴계로까지 500m가 철거될 예정이다. 폭 70~90m의 대규모 녹지대를 만들어, 북한산-북악산-창경궁.창덕궁-종묘-남산-관악산을 잇는 서울의 남북 자연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참히 헐리고 있다 -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

 

건물 때문에 친일 상처가 덧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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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천재'간 '만 번 죽여도 죄가 남을' 인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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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에 나타난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직원들

: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1970~80년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직원들이 철거 중이던 봉천동 판다촌 등을 찾아가 쓰레기나 진배없던 생활유물을 수집해 근현대 한국생활문화사 복원작업을 시도하였다.

우리는 너무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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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를 이용해 외세를 막으려 하다 - 정동 '손탁호텔' 터를 찾아

 

한국인들이 커피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부터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를 시작으로 1968년 대상음료의 전신인 미주산업이 최초로 국산 인스턴트커피를 출시하면서 급격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한국의 커피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1920년대 명동과 충무로에 문을 연 '아오키도'나 '후다미', '금강산' 등을 한국 커피숍의 시발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커피숍은 그보다 20녀 년 앞서 출현했다. 러시아 대리공사 웨베르와 함께 온 일행 가운데 웨베르의 처남의 처제인 서른두 살의 앙투아네트 손탁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고종에게 커피(당시 커피는 각설탕 속에 커피를 넣은 형태였다. 각설탕 덩어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그것이 녹으면서 커피가 되는 인스턴트 방식이었음)를 소개하거나 명성황후에게 프랑스산 화장품을 제공해 왕실의 환심을 샀다.

서울 최초의 호텔과 커피숍

: 고종은 1902년 10월 덕수궁 옆에 25개의 객실을 갖춘 2층짜리 호텔을 지어 손탁에게 운영을 맡겼다. 당시 외교문서에 '한성빈관'으로 표기된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린 사바친이 설계한 '서울 최초의 호텔', 손탁호텔이다. 손탁의 능력은 탁월했다. 특유의 사교성을 바탕으로 손탁호텔을 직기 훨씬 전부터 그녀의 사저에서는 각종 사교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손탁호텔이 지어지면서 이와 같은 모임은 호텔로 옮겨져 더욱 활성화되었다. 단순히 객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호텔 1층에 '서울 최초의 커피숍'이 있었기 때문이다(마크 트웨인, 윈스턴 처칠 등이 방문했음).

외세를 이용하려 지은 손탁호텔,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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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은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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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장경근을 떠올리다 - 정동 '옛 대법원'을 찾아

 

일제 법원 건물을 안고 들어선 서울시립미술관

: 1990년대 초 법조단지가 서초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일제강점기 때부터 맡은 바 소임을 다했던 '원조' 법조단지 정동.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자리에는 가정법원과 검찰청이 있었고, 서울시립미술과 자리에는 대법원이 있었다. 특히 1928년 완공된 서울시립미술고나 건물에는 지금의 대법원 격인 조선고등법원과 경성복심법원, 경성지방법원 등 세 법원이 모두 입주해 있었다.

적반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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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하복'과 '기강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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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주의와 전문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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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전통' 제야의 종 - 종로 '보신각'을 찾아

 

'한국판 킬트' 제야의 종

: 섣달 그믐날 밤인 제야에 백발번뇌를 없앤다는 뜻으로 치는 108변의 '제야의 종'은 사찰에서나 행해지던 불교적 풍습에 불과했다. 민족적.국가적 전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1929년 새해를 맞는 아이디어로 경성방송국(JODK)이 지금의 남산 북서쪽 기슭에 있던 일본 사찰 본원사에서 범종을 빌려와 타종하여, 1929년 1월 1일 제야의 종이 처음으로 전파를 타게 된다. 만들어진 전통이 어디 제야의 종뿐일까. '제양의 종'의 기원 못지않게 종을 치는 횟수에 대한 사실도 왜곡되어 있다. 개인들이 시계를 갖고 다니지 않던 시절,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것이 보신각의 역할이었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새벽 4시에 33번의 타종해 사대문을 열고, 일과가 끝나는 밤 10시에 28번의 타종해 성문을 닫았다. 여기서 '33'과 '28'이라는 숫자는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 28수'에서 유래했는데, 각각 '모든 백성'과 동양에서 생각하는 하늘의 별자리 28개를 상징했을 뿐이다.

파란만장한 보신각

: 보신각이 처음 세원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398년까지 거술러 올라가는데, 당시에는 그냥 종각 혹은 종루라고 불렀다. 당시 종각은 지금 자리가 아니라 종로 탑골공원과 인사동 입구 사이에 있던 옛 청운교 근처에 있었다. 거기 그대로 15년 정도 별 탈 없이 서 있던 종각은 1413년 들어 지금이 보신각 남쪽 광교 네거리로 옮겨졌다. 몇 차례 화재와 소실과 중건되기를 반복하며, 종각은 도로 확장 등의 이유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는데, 1980년 또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2층짜리 누각(이때,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짐)으로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종각의 '보신각'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95년 고종이 친히 '보신각(普信閣)'이라는 현판을 내리면서부터다. 보신각 안에 걸린 동종 역시 부침이 많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보신각에서는

: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와 망각 속에 '집단적 기억'은 그렇게 조작되고 있었다.

 

3부 의미의 재발견

 

나머지 절반의 역사를 생각한다 -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3,000명의 홀아비가 탄식한 곳

: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 8도의 감옥 총면적이 고작 1,000제곱미터밖에 되지 않던 시절, 그 두배가 넘는 규모의 감옥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 이름은 경성 감옥. 서대문 형무소가 들어선 후에 처음으로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것은 '105인 사건'때다. 1910년 안명근이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데, 이를 빌미로 이동휘와 양기탁, 김구, 이승훈 등 지식인과 학생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동양 최대 규모였다는데, 조선인에 대한 탄압 강도에 비례해 형무소의 규모는 날로 커져갔다. 기록이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만 5,000여 명, 모두 4만 명이나 되는 민족해방운동가들이 투옥된 서대문 형무소.

지나친 박피와 화장에 대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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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절만의 역사'는 어디로 갔나

: 서대문 형무소가 세워진 것이 1908년, 문을 닫은 것이 1987년이니 대략 80년에 이른다. 미군정을 거쳐 1987년 폐쇄될 때까지인 나머지 절반의 역사는 어디고 간 것일까? 서대문 형무소는 해방 뒤 38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서울 형무소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계속해서 정치범과 양심수를 수감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금기를 깨고 온전한 80년의 역사를 보듬기를

: 해방의 그날까지는 항일의병과 항일지사를 잡아 가둬 일제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보루였고, 독재가 판치던 시절에는 정권의 안녕을 위해 기능한 서대문 형무소. 그러나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대 한민족'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대결 구도를 전제로 모든 것이 꾸며져 있다. 단순히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나머지 절반'도 기록해야 마땅하다.

 

'사대의 상징'을 헐고 들어선 '일제로의 종속' - 현저동 941번지 '독립문'을 찾아

 

독립문 편액, 이완용이 썼다?

: 성산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커다란 돌문이 하나 서 있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필립 제이슨이 발의했고,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1897년 완공한 높이 14.28m, 폭 11.48m의 독립문이 그것이다. 지금의 독립문은 1797년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을 잇는 고가도로를 건설하면서, 원래 위치에 '독립문지(獨立門址)'라고 새간 동판만 묻어둔 채 이전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해 내각 총리대신에 올랐고 1910년에는 일제의 조선 강제합병조약을 체결한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나중에는 후작 작위까지 바은 바로 그 이완용이다. 독립문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돈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위원장으로서 사업을 주도했던 인물 역시 이완용이다.

독립협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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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의 진실

: 일제가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 야욕을 불태우던 1928년, 파손이 심했던 독립문을 수리한 것은 지금의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조선총독부 경성부였다. 게다가 일제는 1936년 독립문을 '고적 제58호'로 지정해 보호하기에 이른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건대 과연 독립문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독립문이 탄생한 배경에는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청국의 전통적 종주국 지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운운한 것에 기인한다. 이렇게 독립문의 '독립'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종속되기 위해 청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사대의 상징을 헐고 '또 다른 사대의 상징'을 세운 셈이다.

상징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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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 - 논란이 끊이지 않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민족' 과잉의 공간

: 현충원은 한국전쟁 와중에 숨진 전몰장병을 위해 1955년 국군묘지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 들어섰다. 143만 제곱미터의 광활한 대지 위에 들어선 현충원은 1960년대 들어 애국지사와 경찰관의 유해도 안자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묘지가 만들어진 지 10년 만에 '국립묘지'로 승격됐고 2005년에는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현충원이 생기기 전까지 전몰자의 영혼은 남산 장충단공원 안에 있는 장충사에 안치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이승만 정권은 보다 큰 규모의 묘지를 필요로 하게 됐고, 결국 이곳에 장충사를 대체하는 군국묘지를 확대 설치했다. 그랬던 묘지가 이처럼 '민족' 과잉의 공간으로 변한 것은 19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부터다.

항일과 친일의 '불편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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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적대적 공존'

: 현충원은 고주넉한 분위기와는 달리 냉전 가득한 남북대결의 장이기도 하다. 묘지를 둘러싼 남북대결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참으로 한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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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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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유린된 제국의 상징 - 소공동 '환구단'을 찾아

 

지명은 시대의 부침에 따라 종종 변화기도 한다. 소공동은 원래 조선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가 살던 '소공주댁'이 있어 소공주동 혹은 소공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경우다. 일제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조선주차군사령관이자 제2대 조선총독으로 무단통치를 편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기리기 위해 '하세가와마치'라고 불렸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지명도 춤을 췄다.

굴욕의 땅에서 황제를 칭하다

: 소공동의 기구한 운명은 이미 하세가와가 조선에 진출하기 300여 년 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부터 시작됐다. 왜군 장수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조선원정군의 주둔지로 쓰였고, 이들을 저지하겠다고 들어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도 이곳에 사령부를 풀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인연인지 나중에 남별궁으로 이름을 바뀐 소공주댁은 그 후 300년 동안은 중국 사신들의 숙소로 운영됐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무너져가는 조선왕실이 소공동에서 권위를 세우는 것은 곧 국가 주권을 되찾는 일이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원구단이라고 불렸던 환구단은 고종이 하늘에 제를 울리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곳이다.

환구단, 다시 외세의 땅으로

: 조선을 강제점령한 일제가 그 자리에 지상 3층, 지하 1층짜리 조선철도호텔을 짓기로 하면서, 1913년 환구단은 결국 황궁우와 돌북만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 바스라지고 만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조선총독부가 시미즈구미에 의뢰해 건설한 조선철도호텔과 흥남 비료재벌 노구치시타기우가 세운 반도호델이다.

소공동의 기구한 운명

: 조선철도호텔은 완공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고, 1938년 지상 8층으로 지어진 반도호텔은 1953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환구단 터에 이렇게 당대 최대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호텔들이 들어선 것은 황실을 파괴하려는 일제의 의도와 함께 현실적 이유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건물만 세운 게 아니다. 있는 건물을 헐고 길도 냈다. 그때 난 대표적인 길 가운데 하나가 지금이 서울시청과 한국은행을 잇는 소공로다. 일제는 환구단 영역을 밀어내고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을 지나 조선은행, 그리고 일본인들의 주거와 상업 중심지인 메이지초(지금의 명동 일대)를 잇는 소공로를 뚫었다.

정원으로 변한 환구단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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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곳에서 발견된 환구단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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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만 남고 임시정부는 잊혀지다 - 평동 '경교장'을 찾아

 

금광갑부의 사저가 임시정부의 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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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현관이 되어버린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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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만 남고 임시정부는 잊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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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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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을 찾아

 

임시정부 요인 호송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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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호텔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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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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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몇몇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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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장소의 재발견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를 찾아

 

입주 한 달 만에 붕괴된 와우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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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판잣집, 그 대안은?

: 1960년 전체 인구의 10%인 244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1970년 전체 인구의 18%인 543만 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10년 사이에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당시 "서울시 1백만 평 땅에 14만 5천 채의 찬잣집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정부로서는 일단 무허가 판자촌과 천막촌 등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두 가지 방법이 동원됐는데, 그중 하나는 빈민을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나 서울 관악구 신림동과 봉천동, 강북구 미아동, 노원구 상계동 등 변두리로 이주시키는 '배제정책'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서울 시내 각지에 '빈민들도 살 수 있는 수준'의 시민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는 '포용정책'이었다.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 시민아파트 건설계획의 압권은 누가 뭐라 해도 1968년 12월 발표된 '69 시민아파트 기본건립계획'이었다. 골자는 '이듬해부터 3년 동안 산비탈 고지대의 판잣집을 헐고 시민아파트 2,000동 10만 호를 짓는다'는 것이었다. 준비 없이 시작한 공사는 여러 문제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사고가 빈발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내부의 전기.상하수도.온돌.화장실.정화조 설치는 물론, 옥상을 비롯한 계단 난간도 입주자가 알아서 설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나 건설사의 비용절감 노력이 여기에 그쳤다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당시는 '무조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 승진도 하고 훈장도 받는 시대였다. 33개 건설사가 나눠 맡아 시민아파트를 시공했는데, 그 회사들의 상태는 대부분 부실 그 자체였다. 와우아파트만 하더라도, 13~16동의 시공을 맡은 대룡건설은 그 이전까지 이런 규모의 공사를 한적이 한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렸다.

시민아파트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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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의 추억'과 오늘

: 시민아프트는 애초 목적과는 달리 시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와우식' 시민아파트 건설 사업은 전형적인 전시행정, 졸속행정에 다름 아니었다.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 -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과 함께 남산 '옛 안기부'를 찾아

 

유스호스텔로 바뀐 인권유린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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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간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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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잡기보다 만들어내는 데 더 능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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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는 갔어도 감시는 끝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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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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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민족대표는 누구인가? - 인사동 '태화관' 터를 찾아

 

학생들이 시작한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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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들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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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민족대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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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됐을지언정 '독립'은 하지 못하다 - 남산공원 '조선신궁' 터를 찾아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만 있던 것은 아니다

: 일본인이 본격적으로 서울로 진출한 것은 1800년대 후반이다. 일본인의 진출은 곧 신도의 유입을 의미했다. 신도는 일본 고유의 민간신앙으로, 메이지유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군국주의적 색채를 띠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 수립가 국민 동원을 위한 구심점으로서 민간신앙 수준의 신도를 천황숭배를 강요하는 '국가신도'로 재정립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제는 식민지를 확보하면 어김없이 신사를 세웠는데, 한국에서도 미나미 지로 총독 이래 '면 단위 마을마다 신사를 둔다'는 1면1신사 원칙을 고수했다.

국사당을 헐고 들어선 조선신궁

: 일제의 신사정책과 관련한 최고의 '작품'은 조선신궁이다. 신궁은 일반적인 신사와는 달리 정부 자금으로 운영되는 신사로, 조선신궁이 세워지기 전 일본 본토에도 15개밖에 없을 정도로 격이 높았다. 조선의 수도이니 특별한 신궁을 세웠을 수도 있겠으나, 왜 많고 많은 장소 중 남산이었을까? 서울 남산은 평범한 산이 아니라 당시 조선인에게 신성한 곳으로 받아들여져, 국사당을 두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태조가 지금의 남산 서울타워 아래 팔각정 자리에 세운 제사시설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무학대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한 천제를 드리던 공간이다. 그러나 일제는 국가당이 조선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이유로 국사당을 아예 인왕산으로 이전해버렸다.

조선신궁의 흔적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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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은 어떤 역할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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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됐을지언정

: 1945년 8월 15일은 조선에서 더 이상 신사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날이었다. 해방 직후 하루 이틀 만에 전국 대부분의 신사가 조선인에 의해 불타 사라졌다. 하지만 조선신궁의 최후는 달랐다. 조선인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의해 '해체'됐다. 일본 천황이 패전을 공식발표한 이튿날인 8월 16일 오후 5시 신령으로 하여금 하늘로 돌아가라는 의미의 승신식을 지낸 일제는 각종 신물을 일본으로 보낸 데 이어, 10월 7일 남은 시설을 불태움으로써 20여 년에 이르는 조선신궁의 역사를 '스스로' 끝냈다. 이 승인식은 일본 신도가 시작된 이래 처음 있는 행사였다.

 

남산에 신사 유구가 있다! - 리라초등학교 뒤 '노기신사' 터를 찾아

 

해방 후 30년 동안 건재했던 노기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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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신' 노기 마레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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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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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죽어서도 조선을 파괴하다 - 장충동 '박문사' 터를 찾아 

 

'항일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선 박문사

: 지금은 공원으로 변해버린 장충단은 고종이 명성왕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죽은 궁내부대신 이경식과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단이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는 1908년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고, 결국 2년 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장충단은 폐사되고 만다. 일제의 '장충단 지우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신라호텔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에 예전에 박문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일본은 그 언덕을 가리켜 춘무산이라 불렀다. 여기서 '박문'은 이등박문, 즉 이토 히로부미를 가리키는 말이고 '춘무'는 그의 호다. 2층 건물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박문사는 철저하리만큼 이토를 위한 공간이었다. 망자를 신사에 모시는 경우는 있었지만, 개인을 위한 사찰을 지어 추모하는 것은 일본에서도 상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파괴하며 지은 박문사

: 박문사는 단지 사찰 하나만 세우고 마는 일이 아니었다. 박문사는 다른 어떤 시설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속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사회의 중심인물인 왕, 그가 살던 궁궐 파괴가 병행됐다.

영빈관 암벽에 새겨진 '민족중흥'

: 지금은 신라호텔로 찾아간대 해도 이토나 박문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외국 대통령 등 국빈을 위한 영빈관을 짓기 시작,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7년 완공되면서 아예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박문사를 돌아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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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 태평로 14가 '부민관'과 해방 후 '국회'가 있던 곳을 찾아

 

해방 이후부터 1975년 8월 국회가 여의도 새 국회의사당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근25년 동안 국회 건물로 이용됐던 서울시의회 청사. 당시 이곳에서는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만한 각종 사안이 논의 결정됐다.

해방 한 달 전 터진 부민관 폭파사건

: 해방 후 국회로 쓰였던 이 건물이 세워진 것은 1935년 12월 '부민관'이라는 이름으로였다.

친일파를 위한 광복과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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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부민을 위한 문화공연장으로 세워졌지만 실제로는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각종 정치집회 장소로 전락했던 부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