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

[괴물의 탄생], 우석훈, 개마고원, 2008, (081222).

바람과 술 2008. 12. 22. 02:20

책머리에

 

여는글 - 우리들의 '위대한 선택'에 관하여

 

'국가'의 어제와 오늘

: 홉스는, 모두가 모두와 생존을 위해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너무 피곤한 것이라서, '괴물' 즉 '레비아탄'에게 각자의 권리 일부를 양보함으로써 오히려 각자의 이익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국가라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외견상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극우파만으로 구성되어 좌파가 멸종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가깝다.

곧 다가올 '위대한 선택'의 순간

: 결국 한국의 극우파들은 가시적 경제효과를 위해서 건설정책을 집어 들 것이고, 오랫동안 누적된 '버블 폭탄'을 터뜨리고야 말 것이다.

몇 가지 선택지, 혹은 그 희망에 관하여

: 일반적으로 경제에 비하면 정치적 지향은 휠씬 더 예술에 가깝고, 쉽게 분석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이며 미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국민들이 경제에 대한 취향을 자신의 경제적 이해에 따라 생각하는 그런 순간의 첫 출발점과 같다. 개인적으로 공산주의가 이상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과, 현실에서 하나의 정책 혹은 일련의 정책조합으로 선택하는 것은 전혀 함의가 다르다. 유럽에서도 일종의 '시소 현상' 같은 것들이 있어서, 좌파가 집권하면 우파들이 했던 정책들을 상당 부분 폐기하거나 취소하고, 우파가 집권해도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길게 보자면, 언뜻 볼 땐 비효율적인 것 같아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말로 괜찮은 정책들이 특정 국민경제의 진화적 수렴점으로 남게 된다. 정말 좋은 정책이 아니었다면, 정권이 바뀔 때 폐기되어 버리므로, 결국 진화적으로 안정적인 정책들이 남게 된다.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세력이 없다

:

세계 경제 패러다임의 교체

:

파시즘으로 가는 전환기 앞에서

: 확실한 것은 지금 한국 경제가 파시즘으로 가는 전환기에 놓여 있지만, 그 옆에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좁은 길이 살짝 열려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처럼 넋을 놓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그러나 전체적으로 성큼성큼-파시즙으로 걸어가게 된다. 그게 무서운 경제의 법칙이다.

 

제1부 세계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변화

 

첫번째 강의 - 개강 : 한국에서 경제학을 한다는 것

 

두번째 강의 - 자본주의가 가장 아름다웠던 18세기

 

일단 애덤 스미스의 주적, 즉 주요 논쟁 대상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당시 스페인과 영국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요. 또한 애덤 스미스가 등장할 때까지도 팽배해 있던 중상주의, 즉 화폐가 모든 것의 최종적 목표이자 돈(즉 금이나 은)을 많이 갖는 것이 국가의 부와 영예를 키워주고 높여준다는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국부론]의 저술 목표였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생산과 교환 같은 실질적인 경제행위를 강조했고, 이러한 행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균형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거지요. 금이나 은 따위를 많이 갖는 게 결코 국가의 부와는 상관없다는게 [국부론]의 핵심적 주장이었습니다. 즉 얼마나 국가가 건전하게 경제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인가가 이 책의 진짜 관심사였단 말이지요. 애덤 스미스가 대단한 것은, '돈이 최고'라고 말했던 그의 선배 경제학자들이 앞선 2세기 동안 해댔던 중상주의의 주장들을 하나씩 깨나간 데에 있기도 하지만, 이후 대부분의 후배 경제학자들이 사용하게 될 국민경제 프레임에 대한 개괄적인 밑그림을 그려낸 데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를 논하면서 주체라는 개념으로는 기업, 노동자, 지주,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조율하는 국가를 설정하면 대략 직관적으로나 실체적으로 크게 틀리지는 ㅇ않을 겁니다. 어찌보면, 19세기는 진정한 시장이 출발한 시기라기보다 바로 국가라는 것이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세번째 강의 - 위기 그리고 또 위기 :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등장

 

19세기의 혁명과 호사스러움과 직독한 가난이 공존했던 시기입니다. 비록 해결의 방법과 흐름은 달랐지만, 맬서스와 리카도가 연달아 등장하면서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외침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지식인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시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새로운 전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어쨌든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세계는 위기에 빠져들었고, 자본주의는 도저히 스스로는 문제를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이런 자본주의가 만난 첫번째 위기의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흔히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회주의 출현 이후 새로운 위기가 등장하는데, 이를 자본주의와 두번째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위기는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업과 자본의 투자관계, 즉 자본 내부의 관계에서 나타난 것이고, 이를 보통은 '과잉 축적'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이 위기는 노동자들이 고통과 핍박 때문이 아니었던 거죠. 오히려 1929년의 대공황은 자본의 축적과 함께 너무 많은 돈을 주체할 수 없던 사람들의 투기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 위기 속에 등장한 구원투수가 바로 1936년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출간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입니다. 국가의 개입은 안 된다는,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고전학파의 전통을 이은 피구 같은 학자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장기(長期)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ll die). 케인스는, 유효수요 이론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서, 기다리다간 다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부의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기본으로 하는 '거시경제학'이라는 게 생겨났고, 이 새로운 이론은 이때 출범한 루스벨트 대통령을 통해 실현되었지요. 그리하여 이후의 자본주의를 전통적인 이론에서는 '수정자본주의'라고 부르게 됩니다. 국가와 기업이 일정한 긴장을 가지면서 구성되는 것이 애덤 스미스식 혹은 고전학파식 국민경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개는 전혀 다른 작동원리를 가지고, 또 서로를 견제하면서 움직입니다. 마르크스 이후의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사회주의 국가는 국가가 아주 커져서 기업, 즉 생산의 단위를 자신의 영역 안에서 완전히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케인스의 주장은 국가의 영역은 좁지만 기업의 상당 부분을 좌지우지하면서 일종의 공공 부문을 형성하고, 기업은 자신의 일부를 국가에 양보하지만 이전에 많은 부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을 가지게 되는 것이 케인스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어느 정도 독자적 영역을 가지게 되고, 기업도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 거지요. 신자유주의 흐름은 기업의 영역이 아주 길쭉해져서 사회의 상당 부분을 직접 담당하게 되며, 국가의 영역에도 상당히 파고들어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기업이 실제 정부 부문의 역할까지 대부분을 수용하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기업과 정부라는 두개의 실체가 존재하는 이유와 지향하는 목표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는 않은 거지요.

 

네번째 강의 - 국가와 시장의 경쟁, 그리고 제3부문

 

얼떨결에 1980년을 맞으면서, 세계 경제의 역사는 바로 그 이전 시기와 전혀 다른 전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특징을 달리하는 세 명의 지도자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었지요. 그들이 누구냐? 바로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그리고 프랑스의 미테랑입니다.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나타난 때가 바로 요즘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질서가 등장한 시기인데, 어찌 보면 케인스주의에 의해 강화되었던 국가 개입주의에 대해 기업들이 '불간섭주의' 혹은 경제적 의미의 '자유주의'라는 이념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반격을 펼쳤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힘겨루기를 종료시킨 게 바로 1990년의 동구권 붕괴였습니다. 세계는 이제 시장논리를 앞세운 대기업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이미 형성되어 있던 다국적기업들이 개별 국민경제의 범위는 물론이고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의 경계도 허물게 됩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이 일련의 사건을 '세계화' 또는 '금융화'라 부르기도 하고, 최근에는 '주주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을 타고 기업들이 국가를 일방적으로 누르고 지배적 위치에 올라서지 못한 이유에는 국가와 기업 외에 또 다른 제3부문이 존재하기 때문이란 점도 있습니다. 1980년대 미테랑 시절의 프랑스처럼 국가가 일방적으고 기계적으로 기업을 늘렸던 경우나, 혹은 대처 시절의 영국처럼 정부가 많은 공공 부문을 대기업에 넘기고 이윤 극대화를 강조했던 경우, 즉 국가가 주도하거나 기업의 주도한 경제들은 1990년대 중.후반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반면에 제3의 영역이 국가와 기업 사이에서 '버퍼(buffer)' 역할을 하면서 두 부문을 적절히 견제하던 현상이 특징적인 나라들, 즉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이 가장 먼저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돌파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어쨌든 이 제 3부문을 일컫는 가장 정확한 이름은 '사회경제' 정도일 텐데, 이는 공공 부문과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던 사회주의 이념과도 다르고, 시장의 원칙에 의한 이윤 극대화를 주장하는 대기업의 작동원리와도 다르지요.

 

2부 괴물의 탄생 -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

 

다섯번째 강의 - 압축성장과 국가의 역할

 

한국 경제에 관해서는 몇 가지 쟁점들이 존재합니다만 역시 가장 큰 쟁점은, 1945년 패전 국가들에게서 독립한 수많은 신생국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던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성공했는가라는 점일 겁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출발점을 설명하는 데 첫번째로 사용되는 개념은 '계획경제'입니다. 흔히들 한국 경제를 시장경제의 상징이라 보기 쉽지만,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계획경제의 상징이었습니다. 사실상 한국 경제는 철저하게 계획경제에 의해 출발했습니다. 언뜻 보면 우리와 유사하지만, 중남미 경제와 한국 경제의 확연히 다른 출발점을 설정해주게 됩니다. 이승만에서 박정희까지 그리고 전두환에서 김대중까지 한국 경제의 사령탑을 가졌던 사람들의 공통점 한 가지를 꼽는다면, 전통적인 '정부:기업'의 대립축에서 정부를 장악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일 겁니다. 즉, 기업이 정부를 장악한 일부 국가와는 달리 한국 경제는 출발부터 굉장히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의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이 이러한 정치인들 가운데서 기업에 처음으로 결정권을 내어준 사람이고, 이명박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한국 경제를 이제 국가에서 기업으로 넘겨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흐름에 중대한 변화가 생격난 건 1972년 12월에 공포된 유신헌법 이후의 이른바 '73년체제'에서입니다. 여기서 정부와 기업 사이에 결정적인 또 다른 전환점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때 박정희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경제에 걸게 됩니다. 북한과의 경제경쟁에서의 승리를 정치적 목표의 전면에 내세우게 된 거지요. 한국식 재벌들이 여타 나라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기업으로서 그 위상을 갖추게 되는 게 바로 이 시기입니다. 차관을 통해서 기업을 만든 한국 정부는 독재를 강화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기업가들의 도움을 애타게 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 경제를 종종 '개발독재'라고 부르는데, 어쨌든 이 독재체제 내에서도 세 가지 정도의 중요한 시기구분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1961년 5.16 군사쿠테타지요. 그 두번째는, 바로 '73년체제'라고 부르는 유신정권의 등장입니다. 세번째는, 1980년 전두환 장군이 광주에서의 학살을 통해서 집권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당시의 경제개발 과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던 사람으로, 1969년에 전격 발탁되었던 남덕우는 5년 동안 재무부 장관을 맡았다가 유신체제의 출범과 함께 부통리가 됩니다. 그를 축으로 하는 일련의 학자들을 '서강학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경제적 개발논리로 변형된 국가주의형 케인스주의자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 속에서 그 유명한 압축성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ㄴ디ㅏ.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통해 성장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건 서강학파를 포함한 당시 관변 경제학자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경제이론의 형식을 가진 일종의 정치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두 가지 정치이념, 즉 한국은 여타 나라와 다르다는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일단 기다려서 압축성장을 끝내고 나면 분배를 하겠다는 '한국식 성장 우선주의'의 원형들이 하나의 정치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런 두 가지 정신에 충실한 사람들을 한국식 우파라고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 '미국 없이는 우리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약간 변형된 실용적 숭미주의 같은 걸 결합시키면 바로 한국 보수이념의 원형이 됩니다. 지금에 와서보면, 유신시대는 이명박 정권의 숭미와는 조금은 결을 달리하는 실용적인 대미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경제 작동방식에 대해, 비록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정부가 재벌들을 경쟁시키는 가운데 경제적 효율성을 만들어낸 장치였다고 분석하게 됩니다. 즉 일반적으로 시장이 만들어내는 '경쟁(competition)'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국가가 누가 누가 더 많은 수출을 하는지 다투는 경연(contest)을 열어서, 그 우승장에게 자금과 각종 특권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재벌들에게서 효율성을 뽑아내었다는 애기지요. 그래서 세계은행은 이러한 한국 경제를 '경연적 시장'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국 경제 모델의 문제점으로는 또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그렇다면 모든 나라가 필연적으로 경제발전을 위해 독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와, 수출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단계적 고도화라는 한국의 전략이 국제적 상황이나 각 구가별로 처한 여러 사회문화적 조건과 상관없이 언제나 통할 수 있는 필승의 전략인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유신 시기에 관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던 한국 경제의 이른바 '고도화 작업'은 당연히 섬유업과 같은 경공업이 아니라 중화학공업-일본식 표현으로 하자면 '중후장대형(重厚長大形) 산업'-을 경제의 주축으로 한 성장전략이었고, 이는 대기업인 재벌들의 협조가 없다면 할 수가 없는 것이었지요. 더구나 이를 민간기업에만 맡겨두지 않고, 포항제철이나 한국전력의 경우처럼 중화학공업의 인프라에 해당하는 몇 가지 업종에는 정부가 직접 개입해서 한국형 계획경제 시스템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국가적 투자가 1980년 이후의 한국 경제 번영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것이냐, 아니면 단지 '3저'라고 불리는 당시 국제적 호황기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석유를 중심으로 경제를 고도화하려고 했던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벽에 부딪히게 된 것지요. 그렇게 시작된 물가 불안과 더불어 한국 경제는 부동산 문제라는, 전에는 예상도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고민과 마주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는 이 투기 문제로 인해 그의 체제 자체가 전복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고 맙니다. 당시 한국의 재벌들은 대부분 건설사를 모기업으로 하여, 이를 통해서 순환출자와 기업지배, 그리고 때때로 돈세탁 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설사에 돈이 풍부하게 돌고 있어야 나머지 회사들이 자금회전도 원활해지는 구조였지요. 그리하여 유가 상승과 부동산 투기로 인해 한국 경제는 점차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빠져들게 되고, 여기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유신경제에 2차 석유파동이 닥쳐오게 됩니다. 이라하여 한국 자본주의는 '79년 공황'이라고 부르는 첫번째 구조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분석하기에 따라서는, 1929년 세계대공황을 과잉 생산에 의한 유효수효 부족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조건과 1979년의 한국 경제 상황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정치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이 상황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유신경제는 과잉투자가 국제유가라는 두 가지 변수가 국내 인플레이션을 격발시켰고, 이 상황을 유신체제가 견뎌내지 못한 거라할 수 있겠지요. 유신경제기에 자리를 잡았던 재벌체제가 한국식 개발독재의 근본 장치라고 본다면, 1998년까지를 개발독재의 시기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새로 등장한 무시무시했던 전두환 정권은 경제적으로 본다면, 국가주의의 강화에 의한 자본의 재조정과 인플레이션 정책,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장경제의 고유한 미덕이라 할 '독과점 규제에 의한 질서' 같은 것들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권위주의 정부가 산업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던 조정도 실종된 이 시기, 감히 말하자면 개발독재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소돔과 고모라' 현상이 벌어집니다. 바로 우리가 IMF 경제위기 혹은 환란이라고 부르는 1997년의 경제적 대몰락이지요.

 

여섯번째 강의 - '삼성공화국'의 등장과 거듭된 시장의 승리

 

한 나라의 경제정책이 좌파와 우파가 바뀌면 엄청나게 변할 것 같지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리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김대중 1기(1998. 3~2000. 6/IMF 경제위기)에 국가는 부도 직전으로 기업들은 도산하고 있었고, 포철과 같은 한국의 주요 공기업과 외환은행을 비롯한 은행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2기(2000. 7~2003. 2/경제위기 회복기)에는 IMF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지만, 사회안전망을 일부 확대하여 한국에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완하는 것 외에는 사실 공적인 경제정책으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변화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시기였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하면서 '2만 달러 경제'라는 식으로 1인당 국민소득을 국정의 최대 기조로 잡는, 세계적으로 거의 전례가 없는 이 과정을 통해 한국 경제는 본격적인 위기로 진입하게 됩니다. 그는, 케인스 우파 정도의 정책기조로 볼 수 있는 '한국형 뉴딜'과 같은 토목사업 중심의 경제운용 계획을 세워 1970년대 박정희식의 고성장에 의한 포퓰리즘을 시도합니다. 그리하여 한국 경제의 오래된 마약이라 할 토목공사 중심의 경제로 급선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이제 한국과 같은 경제 규모에서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위기에 빠진 노무현은 결국 정권을 넘기게 되는 2006년, 한미FTA를 마지막 처방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즈음 한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전형적인 양극화 현상과 더불어 중소기업의 '빈곤의 악순환' 현상, 자영업자의 위기, 농업의 동시적 붕괴라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마지막 중소기업 정책이라고 할 김대중의 벤처지원책이 현실적으로 좌초하면서, 이제 한국은 미국의 부속 경제라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중남미형 신자유주의 경제로 전환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삼성이 이재용 승계구도를 완성시키기 위해 상당한 로비를 한 건 아마도 사실인 듯하지만, 이런 것만으로 한국과 같은 거대한 경제구조가 간단하게 '삼성공화국'이 되지는 않습니다. 삼성의 수출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경제 공무원을 포함한 경제 엘리트만이 아니라 언론계 등 소위 한국의 여론 주도층 내부에서 삼성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문화가 생겨났다는 게 더 중요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 또 하나, 법조계에서 삼성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 역시 단순히 삼성이 관리를 했기 때문에 한국의 모든 법조인이 동시에 부패했다기보다는 좋은 국민경제에 대한 시각을 법조인이 가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건전한 자본주의의 형성에서 사법부의 역할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특히 이 사법부를 잘 활용해서 초기 자본주의의 병폐로 생겨나는 독과점과 기업 부패를 제어하면서 자본주의의 마지막 안전장치를 확보한 게 바로 미국 경제 모델이지요. 삼성공화국의 등장을 촉진한 요인을 노무현의 측근정치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 자본주의 모델이 갖는 큰 특징은 한마디로 엄격한 사법부 위에 서 있는 '공정한 경쟁(절대로 독과점만큼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지독할 정도의 분산형 시스템(연방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한 상태에서의 분산형 시스템)이 갖는 상향식 경제 장치들의 효율성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무현 집권 2기(2006. 10~2008. 2/한미FTA 경제)의 한국은 전격적으로 중남미형으로 경제 모델을 바꾸게 되는데, 그 효과는 매우 직접적이었습니다.

 

일곱번째 강의 - 중앙형 시스템의 비극, 그리고 토호와 자치 문제

 

과거 자본주의 이전 시기에 농지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 혹은 호족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대 국가가 성립되던 과정의 대부분 국가에서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제헌의회는 조선시대의 계급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1948년 농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과저을 통해 한국의 농지 보유가 상당히 평등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소작농이 줄어들면서, 한국 농업의 한 특징인 소규모 자영농이 널리 만들어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당시 인구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 수가 50년 만에 7% 수준으로까지 줄어들게 되지요. 이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농업 인구가 빠져나와, 한국 자본주의에 풍부하게 공급되었던 노동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도시화율을 보이고 있는 상태인데, 한국전쟁이 있기 전 21.4%였던 도시화율이 불과 50년 만에 4배에 가까이 커지면서 생겨난 문제점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200년에 걸쳐서 진행된 서구의 도시화 수준을 불과 50년 만에 이루게 된 한국 경제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중앙집중형 경제'입니다. 농촌에서 나온 사람들이 전국의 여러 도시로 흩어져 들어간 게 아니라, 그 대부분이 서울과 수도권으로 몰려든 거지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른바 '87년체제'가 만들어지던 당시 농민들이 강력히 주장해 9차 개정헌법에 '경자유전'이란 표현이 명문화됩니다. 이 경자유전 조항은 토지에 대한 일종의 '금융실명제' 역할을 한 셈이니, 경제 상층부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는 거였겠지요. 세상이 이렇다 보니 '외지인'이라는 개념마저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농민들은 '토지용역료'라고 불리는, 이자율로 계산해보더라도 20~30%에 달하는 고리의 소작농 상태인 거지요. 그런데 지역개발과 관련된 법률들은 지주들을 지역주민으로 규정한 채 지역에서 중요한 의사셜정을 경제적 이해당사자, 즉 지주들끼리 결정하게 해놓고 있습니다. 이러니 그곳에 살지도 않는 '외지인'과 현지에 있는 지방토호, 이 두 집단이 손을 잡으면 실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희망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의사결정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비정상적이지요. '자치의 실종'이라는 한국 경제의 비극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죠. 지역거주민 혹은 주민들끼리 자기가 사는 지역과 관련해 뭔가를 결정하는 게 '자치'일진대, 한국의 경제제도와 토지 소유 현황이 이러한 자치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토지 보유와 권력 분리를 아마 세계에서 가장 교과서적으로 만들어내었다고 저는 봅니다. 어쨌든 그 분리장치는 대단히 강력한 중앙형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쉽게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소수의 권력집단이 자신들의 부를 위해 국가행정을 장아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어느 정도는 했으리라 봅니다. '가난한 장관'과 '청렴한 공무원', 이는 조선이 가장 강력했던 세종대왕 때 이후로, 한국이 가장 잘 돌아가던 시기에 등장했던 전형적인 시스템의 특징입니다. 이 분리가 무너지면 한국과 같은 중앙형 체제는 언제든지 부패하게 되고, 시스템의 비효율이 강화되기 십상입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해석해보면, 실제로 주민들의 자치라는 영역에서 지역경제의 대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던 게 바로 2002~2004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 경제는 중앙의 경제 엘리트들과 지방토호들이 지역에서 대부분의 의사결정권을 장악한 채 끊임없이 농지 보유를 늘리면서 농지 가격을 높이려던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분산형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노무현이 2004년 '한국형 뉴딜'이라는 토목형 경제로 방향을 급선회했기 때문이지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지역에서 진행된 대부분의 정책적 논의는 토지를 보유한 외지인과 지방토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되었지요. 이는 전형적인 케인스 우파 방식의 재정 투입에 의한 건설경제의 비효율성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땅값 상승에 의한 간접적 부의 재분배 현상이 아주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노무현 2기 한국 경제의 특징입니다. 그 당연한 결과로, 싹을 틔워가던 자치의 흐름이 꺽이면서 2002년에 등장했던 얼마간의 주민 지도자들마저 2006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 한나라당을 축으로 하는 지방토호 지배구조가 사실상 어찌 해보기 어려울 지경으로 고착되고 맙니다. 여기서의 분권이란 '토목형 균형발전'일 뿐이었으니까요. 2006년 한국 경제는 완전히 건전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거시경제라는 눈으로 볼 때, 수도권으로 돈이 몰리든, 아니면 또 다른 특정 지방으로 돈이 몰리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투기경제가 어느 지역이든 발생하고 또 점차 강화된다면, 기업도 지식경제에 투자하면서 기술개발로 장기 수익을 올리는 일을 별로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즉 국민경제를 구성하는 80% 가까운 사람들과 정상적인 기업에겐 땅값과 농지값이 안정된 상태가 더 좋은 경제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규제 철폐는 본질적으로 딱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즉 공공 부문을 기업에 넘겨주는 '민영화'와 수도권 땅값을 올려주는 수도권 중심의 '땅값 포퓰리즘'입니다. 물론 지금이라도 이런 문제의 해결책의 출발점은 헌법 121조에 근거해서 전국의 농지 보유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를 하는 일입니다. 이런 정책을 곧이곧대로 법에 따라 시행한다면, 농지값이 떨어질 겁니다. 그러면 자격이 없던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던 농지를 지금의 소작농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농지융자를 지원하고, 또 이미 제도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농지은행들이 이렇게 외지인 소유 농지를 내려간 가격에 사들여 공공 농지로 전환하는거지요. 이렇게 되면, 비로소 각 지역에서 자치를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이 생겨나게 될 겁니다. 중앙형 구조는, 지방에 도시를 여러 개 만들어서 억지로 공기업과 정부기관 몇 개 내려 보낸다고 해서 해체되는 게 아닙니다.

 

여덟번째 강의 - 괴물의 탄생, 실종된 제3부문과 파시즘

 

선진국의 경우, 국민소득에서 건설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13% 정도 됩니다. 1996년의 한국은 24% 정도, 지나치게 높은 토건 비중으로 세계적인 연구 대상이 된 일본은 19% 정도였습니다. 만약 일본이 이 정도로도 '토건국가'라 한다면, 한국은 '하이퍼 토건국가'겠지요. 그만큼 한국 경제가 억지로 건설자본을 끌고 오고 있었다는 걸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2004~2005년의 노무현처럼, 건설 하나만을 붙잡고 2만 달러 시대로 가겠다는 식으로 경제를 운용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저금리 기조를 그의 임기 초.중반 내내 운용한 것은 한국 경제의 자폭 단추를 누른거나 진배없는 일이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한국 경제의 장기 분석에서 유효한 변수는 바로 이자율과 물가상승률 사이의 관계입니다. 여기에 노무현이 다시 불붙여준 토목경제가 극성을 부리게 되면서, 1980년대 중.후반부터 형성되어 온 중산층이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즈음 한국은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지옥이 됩니다. '좌파 정부 10년'이네 어쩌네 말들 하지만, 실로 이 기간은 정상적인 좌파들의 경제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저 시잔유주의 정부였을 뿐.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의 저술로 유명해진 [승자독식 사회]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이 책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보통사람들의 노력에 비해 너무 많이 버는 사람들에게 기부 등의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시정하는 게 좋겠다는 것과, 최고를 위한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낭비를 줄이는 편이 좋겠다는 것. 물론 일반인의 평균소득에 비해 100배 정도는 버는 사람들의 소득이 사회적으로 비효율성을 만든다는 것에 관한 애기지요. 결정적으로 한국 경제의 붕괴는 바로 '2만 달러 경제'를 국정지표로 삼던 순간, 그리고 이에 연계해서 나머지 문제들이 처리되던 그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봅니다. 최근에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단순히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의 권위를 가지고 공공 부문처럼 작동하는 것도 아닌, 또 다른 경제주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 '증여의 경제' 또는 '연대의 경제' 등으로 부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경제'라고도 하는데, WTO체제에서도 이런 지역정책의 일환으로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데 대해 포괄적으로 예외를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중남미형 길을 걸어감으로써 결국 대기업도 힘들어지고, 공공 부문이 실종된 채로 국민들은 비공식 부문에서 연명하게 되는 그런 국민경제 모델로 한국 경제가 가지 않게 되기를 진정 희망합니다. 또 힘들게라도 공공 부문을 지켜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여기에 조건 하나가 더 필요하다면, 어려워도 지금 공공 부문을 지켜내면서 동시에 미약하게나마 제3부문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3부 괴물의 해체 - 한국 경제의 대안과 3가지 과제

 

아홉번째 강의 - 한국경제의 대안에 임하는 자세 : 고용, 공공성, 생태-문화적 자치

 

한국은 화석연료를 비롯한 에너지 자원이 없고, 여타 자원도 쓸 만한 게 거의 없는 나라 아닙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외부 자원의 투입을 늘리면서 이 돈을 수출로 메우고, 거기서 나온 약간의 잉여를 국민들이 나누어 쓰는 그런 외부 의존형 경제를 운용해온 셈이지요. 그러나 화석연료의 수입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고, 또 그런 방식으로는 한국 경제의 규모에 맞춰 계속 커져갈 자원 사용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많은 선진국, 특히 4만 달러가 넘었거나 4만 달러 가까이에 다가간 나라들은 이렇게 경제적 효율성과 삶의 질이 동시에 높아지는 유형의 국민경제 운용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효율성', '삶의 질'과 함께 '생태적 효율성'이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국민경제의 구조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졍제는 계속해서 떨어지는 경제적 효율성을 비정규직화와 노동시간의 유지를 통해 억지로 끌어가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점차 괴로워지는 중입니다.

 

열번째 강의 - 사교육 해체와 교육문제의 대안

 

학벌사회를 해체하지 못하면 이미 국내 중산층들의 소비 기반을 무너뜨려 내수시장의 장애물이 된, 중산층들의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교육을 통해서 언제든 '인생역전'이 가능하다고 믿는 수많은 중산층들이 존재하는 한, OECD 국가치고는 좀 이상한 지금의 대학 서열 구조를 해체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최소 GDP의 4~5% 정도를 교육비로 지출하는데, 총교육비 대비로 따지면 세계에서 1인당 교육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전체의 효율성이나 인권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교육 파시잠, 그리고 인내할 수 없는 노동강도의 '교육 노동자'만을 만들어내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더 억울한 것이, 이렇게 교육받은 우리의 2세들이 국제적으로 아무런 경쟁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이명박과 그의 추종자들이 지난 1년 동안 떠들던 이상한 애기들일랑 젖혀두고-'우리 애만 살면 된다'라는, 선진국에는 거의 없었던 집단적 '죄수의 딜레마'로부터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에 대한 '소통 게임'과 '협력 게임'이 필요한 순간이 지금입니다.

 

열한번째 강의 - '고담' 대구와 '토건' 전주 : 토호구조, 자치, 문화

 

한국 경제의 특이성을 애기하는 가장 주요한 변수 중 하나는 바로 국민의 절반이 서울과 경기도, 즉 수도권에 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첫번째 상황변수는, 서울은 자신이 사용하는 재화에 대한 대가를 정상적으로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분배망들이 분산형으로 구성되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종의 지대소득(rent benefit)을 단지 서울이라는 공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얻게 되는 셈이지요. 한마디로, 순전히 시스템 구조 때문에 생겨나는 원천적 차이를 경제장치 내에서 '내부화(internalization)'하려는 아무런 조정장치 없이 한국형 유신경제 모델을 끝까지 밀고 오다 보니, 서울이라는 아주 이상한 괴물이 탄생하게 됐다는 것이지요. 두번째 상황변수는, 1990년대 중.후반 이후로 세계 경제의 협업구조가 변하면서, 한국이 더 이상 세계의 공장으로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사실상 지난 10년 동안 제대로 된 지방자치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고, 실제로 작동한 것은 중앙형 토호와 지역토호의 결탁밖에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여기에 마지막 변수를 하나 추가하자면, 산업자본 자체가 대형 할인매장 형태로 지방경제의 작은 구심점 하나하나까지 부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단 땅값이 올라가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사용가치 혹은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지역의 발전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하면 대단히 편안하고 안정적이되 엄청나게 새로운 시설을 늘리지는 않아서, 전면적 토지가격 상승을 동반하지 않을 사업들을 중심을 잡아야겠지요. 어떤 방식이 실제로 지역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따져보는 나름의 기본원칙이라면, 외지인들에게 땅값 소득만 올려준 채 실제 관광수익 대부분은 사업주인 대기업 구좌를 통해 거의 서울로 올라가버리는 식이었던 제주도의 골프장과는 정반대되는 속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보면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합니다. 물론 현재의 위기 상황과 중앙형 구조 속에서, 지역의 자발적 힘만으로 이런 시도들이 성공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랜드마크가 아니라 '정주(human settlement)'의 의미에 대해서 찬찬히 생각해보시면, 최소한 여러분 개개인의 삶이라도 조금은 윤택해질 것입니다.

 

열두번째 강의 - 한국 경제의 새로운 전환, 제3부문을 위한 노력 : 삼각 균형의 국민경제론

 

생활협동조합의 '구심점'이 되어줄 수 있는 전통적인 사회기관인 종교기관들, 이를 첫번째 경로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은 모두 '글로벌주의자'이자 보편주의자였습니다. 제자들에게 국가 쇼비니즘이나 마초 근본주의로 돈 장사하라고 가르친 게 아니라, 공동체를 잘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가르쳤습니다. 두 번째 경로는, 미국이 주로 그랬듯이, 대기업들이 공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금들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세번째 경로는, 스웨덴이나 스위스 혹은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인큐베이팅'이라 표현하는, 출범시키고 일정 궤도에 올라갈 때까지 지원한다거나 생협에 매장 정도를 대여해주는 방식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열세번째 강의 - 종강 : 세계 경제에서 한국 경제가 갖는 의미와 그 교훈 

 

한국 경제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2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한 수많은 개별 국민경제 가운데 거의 유일한 성고 사례입니다. 이쯤에서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이 지닌 몇 가지 치명적인 단점들을 한번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합니다. 우선 첫번째, 한국 모델은 경제를 지나치게 강력한 중앙형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 한국형 모델은 건설자본의 역할이 너무 커서 땅투기 문제와 함께 지방토호가 생기게 된다는 단점을 지적해야겠지요. 셋째, 이 한국형 경제개발 모델은 국가가 모든 재원을 집중시켜서 재벌들을 키워주는 걸 핵심으로 하는데, 결국에는 그 재벌이 국가권력을 우습게 만들고 정부의 정상적인 작동마저 마비시킨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경제라는 이 특수한 개발 모델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부작용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이걸 시장과 공공성이라는 담론(즉 고전적인 경제학이 제시하는 국가와 기업, 혹은 권력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풀기가 어렵다는 점이 또한 고민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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